일본 고대 말기에 나타난 사무라의 발생과 성장을 설명하고 동 시기의 고려/중국과는 어떠한 점에서 차이가 있었는지 자신의 생각을 기술하시오.사무라이는 무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다만 그들이 칼이 중심 이였으며 다른 지역 세계와 차이가 있는 것은 칼을 가지고 지배층을 구성했다. 칼잡이들이 계층을 이뤄냈으며 집단화 되어서 지배층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군사적인 부분을 담당해야할 필요성은 어느 사회나 가지고 있어야 하며 누군가가 문신이면서도 무신 적인 군사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방면에 일본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무사 집안으로서 일관된다. 사무라이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조정을 구성했던 소위 그런 사회에서 사무라이 계층이 형성이 되었는데 그 계층이 나중에는 천황이라던지 귀족가문을 능가하는 일본 최고의 지배층으로 올라간다. 중국이나 한국은 문관들이 주로 우위를 점하는 시대였던 반면에 일본은 무신들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살아가는 모습도 다르다. 일본의 사무라이 같은 경우는 현대 사회의 사원 같은 느낌이다.사무라이는 일본 문화의 상징적인 존재이다. 사무라이는 무위라는 것을 추구한다. 무위라는 것은 무를 승상 하는 것이다. 일본의 사무라이 체제가 근현대에 미친 영향을 본다면 사무라이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 무조건 긍정적일 수는 없다. 80%의 일본 백성이 일본의 주인이 되지 않고 오히려 일본의 약 10%를 차지하는 사무라이 계층이 일본의 지배계층이 일본을 대표하냐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중국이나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은 지역에 기반을 하고 있어 예를 들어 그 지역의 지주가 되어 그 지역의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쓸 수 있지만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주군에 고용된 지배층이다. 주군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는 지배층이다. 봉건제라고 하는 것은 가볍게 말해서 지역 봉건적인 것이며 군현제는 중앙집권이다. 유럽은 봉건제를 거치고 절대왕정을 거치며 자본주의 발전으로 나오는 반면에 동양(중국, 조선)은 중앙 집권적이었다. 왕, 조정이 다스리는 군현제 특성을 띈다. 동북지방에 있던 에미시 이종적 집단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최고 사령관인 사타노우에노 타마라마로 로 세이이 다이쇼군(정이대장군)으로 임명되었으며 동북지역의 에미시 집단을 정복하였다. 19세기 중반 일본의 막부 체제가 종식을 고할 때까지 일본이 말하는 쇼군은 세이이다이 쇼군이었다. 10세기 들어와서 후지와라 씨가 대두하면서 섭정관백이 등장하는데 후지와라노 요시후사가 정식으로 셋쇼 섭정이 되었고 후지와라노 모토츠네가 관백으로 된다. 이후 대대로 독점하면서 전성기를 이루어 나갔다. 셋쇼(섭정)는 천황의 나이가 어려 통치를 대행해 주는자이다. 간빠꾸는 천황이 친정할 나이임에도 천황을 보좌하며 정치를 주도하는 자이다. 주로 천황의 외척이 셋칸으로 임명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천황의 지위 절대화에 따라 후견인 체제의 등장도 용납되는 단계로 진입을 의미한다. 천황의 지위가 절대화에 따라 후견인 체제의 등장도 용납되는 단계로 진입을 의미한다. 그만큼 외척에게 맡겨도 천황 자체의 지위가 불안해지지 않는 단계에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천황의 권위와 권력이 분리가 가속화되는데 천황의 이원적인 모습이 천황제 온존의 토양이 배양되었다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서 (천황의 외척가문)- (상황)- (사무라이 쇼군) 이순으로 천황 권력의 대행자들이 있었다. 메이지 유신(왕정복구)은 사무라이로부터 권력을 다시 천황중심으로 회수했다.정치는 종래대로 태정관(최고 정치기구)을 통해 이루어지나 관리 임명권을 장악한 셋칸의 일족(외척 후지와라)이 태정관의 고위직을 독점하게 된다. 공경이라는 관직을 독점한 것이다. 섭관가의 경제적 기반은 관직에 따는 급료와 장원(대토지 소유)의 수입이었다. 이런 셋칸정치 때문에 지방 통치의 난맥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천황 친정체제가 등장하게 된다. 10세기 초에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외척 후지와라 씨의 주도에도 다이고 천황 과 무라카미 시대에는 천황이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엔기의 치와 덴랴쿠의 치로 표현된다. 다이고 천황시대에는 장원정리령을 로도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원정 시기에는 장원정리에도 불구하고 최고 권력이 된 원에게 장원 기신이 집중되어 원 자체가 최대 장원 영주가 된다. 지행국제 (고쿠시를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의 횡행이 시작되었다. 원의 보호 하에 사원 세력이 강해졌으며 대표적인 세력은 남도와 북령이었다. 사원들도 무장을 하였고 조정에도 고우소로 압박하였다. 쉽게 말해 수도 안에서도 중앙의 혼란 지방의 혼란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런 원정기는 중세로의 이행이 본격 진행되었다. 권력의 사유화 경향이 현저해졌다. 경제적 측면의 사유화는 불수불입 장원의확대를 뜻하며 지행국제의 횡행을 뜻한다. 사적 주종관계가 일반화되었다. 원과 원의 근신, 무사단과 주군으로 주종관계가 일반화되었다. 권력자들이 각종 사적인 세력으로 분열, 법이 아닌 실력으로 싸우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무력 전문 집단은 사무라이 세력의 존재가치가 더욱 부각되기 쉬운 시대상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무력집단이 향후 일본 사회에 어떻게 기능하고 수렴되어 가는가 에 일본적 특성이 나타난다.무사의 조건은 영주여야 하며 고귀한 집안 출신이어야 하며 궁마술의 기능을 가져야 한다. 이런 점을 중시해서 본다면 기존의 견해에는 몇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발견된다.첫번째, 무사가 농민에서 성장했다는 견해에서 본다면 헤이안 초기까지 조정의 상비군은 징병된 백성이 대부분이었다. 건아제 이전까지는 군단제였다. 군단제란 일반 농민들을 차출하여 군대로 편성하는 것이다. 건아제는 지방 호족들의 자제들을 모아서 소수 정예제로 차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사는 징병이나 농업과는 관계없고 일상적으로 싸우는 것을 임무로 하는 프로의 전사 즉 일종의 직업 군인이었다. 무사가 지방의 부유한 농민이 성장한 결과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중세에 활약한 대표적인 무사 중에 농민의 자손은 단 한 명도 없다. 미나모토씨, 후지와라씨 등 들은 천황이나 귀족이라는 혈통을 자랑하였다. 무사를 시골에서 탄생한 새로운 시대의 영웅으로 보면 교토와 무사의 강고한 파이프의 정은 징병제를 폐지하고 수도방어에 중요한 관문과 변경지역 이외의 병사를 해산시켰다. 이에 군대는 처음부터 강한 병사를 모으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건아제). 토착 호족 중에 궁마술에 능한자를 윤번제로 근무시키면서 무예만 연습시켰으며 이는 토착 호족에게 출세의 기회가 되었다. 군지는 60개의 국 아래에 군의 행정을 담당하는 지방관이다. 원래부터 그 지역에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토착 호족이다. 군지의 자제들 중 자신들의 재산으로 궁마술을 배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는 지방의 유력자 간의 싸움도 이기고 농민을 효율적으로 수탈하는데도 유리했으며 중앙에서 출세하는데도 유리하였다. 일종의 치안유지를 위한 경호역할로 선출되었다.한편 중앙에서는 도성의 경비 담당인 위부의 무관을 배출하는 가문이 고정된다. 지방 양쪽에서 무력행사를 가업으로 하는 가문이 성립하는 가운데 지방의 무사는 관직을 얻고자 중앙과 연계되고 중앙의 무사는 고쿠시나 종자로 지방으로 내려가 혼인 등으로 토착하여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이렇게 하여 나중에 겐지 헤이시 후지와라씨 등으로 연결되는 무사의 가문이 만들어진다. 그들 대부분은 교토와 지방 모두에 거점을 가지고 일족 간에 활동지역을 분담했다.황실 귀족층과 지방유력층(건아제를 통해 무사화)이 결합을 하게 된다.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거쳐 지방 사회에서는 농민의 분화가 진행되어 빈부의 격차가 심해진다. 곡식이나 토지 등을 재산으로 축적한 유력 농민의 부호층이 출현하며 부호층은 소작농과 몰락한 농민을 흡수하면서 농민에 대한 사적 지배를 확대해 갔다. 9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왕, 중앙귀족과 결탁하여 왕신가인 이라 칭하며 조세 등의 납입을 거부하거나 지역에서 소란을 일으켜 지방수령인 고쿠시나 군지와 대립하게 된다. 중앙 황족이나 상류 지족은 부호층을 통해 장원(대토지 소유)을 전개한다. 장원은 8세기부터 시작되며 9세기 중반 이후 중앙관청이나 왕실, 상류귀족의 지방 진출이 현저 해졌다. 각 지역에서는 유력자들의 권위에 숨어 그들의 하지방 사회의 중앙 귀성의 혈통이 퍼진 결과 발생한 것으로 지방에서 탄생하여 중앙과 지방 양쪽의 거점을 오가며 성장하였다. 그러나 일부를 소집 선발하여 다키쿠치노 부시(내리 경호를 담당한 무사)로 조직하는 형태로 그들에게 무사라는 타이틀을 주었다. 무사의 탄생에 필수적인 혈통을 탄생시킨 것도 교토이다. 그러나 왕신 자손이나 무인 배출 씨족에게 지방에 거점을 마련하게 한 동기는 교토, 조정에서의 과도한 경쟁으로 아무런 계획 없이 왕산가, 왕신 자손을 늘린 조정을 실책이다.평씨는 왕족에서 귀족으로 가면서 출발하게 된다. 5대째가 되면 의무적으로 신하로 내려가게 된다. 50대 천황 간무의 셋째 아들 집안이 53대 준나 천황에게 자신의 아들을 신적강하 시켜 달라고 상소하면서 그의 아들들은 모두 타이라노 아손 칭호를 하사 받는다. 간무 헤이시라 불린다. 조정에서 황족을 신적강하 시킨 것은 황실의 번병으로서 황실을 가장 가까이서 지지 할 수 있는 상급 귀족 세력을 조정에 많이 심기 위함이었고 황족 유지에 따른 재정 부담도 고려하였다. 실제로 3대 이상 상급 귀족의 지위를 유지한 경우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은 수령으로서 부임해 내려간 지방에서 그대로 눌러앉아 무사화 되거나 중앙에서 후지와라 씨보다도 낮은 중급 귀족의 지위나 유지하면서 살아갔다.대표적인 헤이시는 간무 헤이시이다. 간무 헤이시 외에도 천황의 자손이 신적강하하여 평씨를 하사받는 경우도 있었다, 닌묘 헤이시, 몬토쿠 헤이시, 고코 헤이시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후손들이 가장 많이 나오고 유명한 씨족이 간무 헤이시였다. 간무 헤이시 중에서 이세 헤이시가 두각을 나타냈다. 동국에서 반란을 일으켰었던 타이라노 마사카도 도 이 가문 출신이다. 마사카도의 난 이후 동국에서 서국으로 옮겨온 타이라 일족 주에 이세 지방에 자리잡은 일족이 인세이 이후 성장하여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세 타이라 가문에서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등장하였다. 타이라노 마사모리는 키요모리의 조부로서 북면의 무사였다. 타이라노 타다모리는 키요모리의 아버지이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