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 - 신자유주의와 혐오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최근 화제가 된 영화 ‘기생충’은 자본주의 시대에 벼랑 끝으로 내몰린 빈곤한 삶의 극단적인, 그러나 어딘가 사실적이고 서글픈 모습을 보여준다. 어느새 한국 사회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인간의 존엄성까지 희생해야만 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 도달하고 말았다. 약자들을 위한 복지와 안전망은 허물어지고 더 이상 팔 것이 없어 인간의 육체마저 상품으로 내놓고 있다.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의 틀 안에서 발생한 약자에 대한 대상화, 상품화는 곧 약자에 대한 혐오로 이어져 사회 전반적인 혐오 분위기가 형성된다. 일상에서도 쉽게 접하는 혐오 표현, 직장에서의 차별부터 약자들의 목숨을 실제로 위협하거나 그들을 해하기까지 2019년의 한국 사회는 혐오의 시대를 맞이했다.우리 사회가 혐오와 신자유주의의 사회가 되어버린 근본적 원인은, 신영복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맥’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영복 선생이 교도소에서 다른 재소자들을 특정 기준에 맞추어 분석하려 했던 것처럼, 이 시대의 사람들도 시대적 기준에 맞추어 타인을 재단하고 대상화한다. 예를 들어, 돈이라는 특정한 기준에 비추어 세상을 바라본다면, 신자유주의에서 나타나듯 이 세상 모든 것의 물질적 가치만을 찾고 종국에는 인간까지도 돈의 가치로 환산해버린다. 사람을 바라보는 인식이 상품인식과 달라질 바 없다면 우리 사회가 중요시 여기는 가치에서 멀어지는 이들일수록 멸시, 소외 당하기 마련이다. 혐오도 그렇게 시작된다.해답은 시대적 문맥을 벗어나기 위한 의식적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는 변방과 마이너리티에서 발생한다. 혐오와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주체가 소수자들이라는 나의 생각도 이와 일치하는데, 사회가 중시하는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는 변방의 이들이 창조성을 통해 탈문맥에 다가서는 것이 중요하다.물론 변화가 변방과 마이너리티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의식의 변화는 개인적으로 발생하기 보다 여럿이 함께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신영복 선생이 말한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에서의 숲은 나무 한 그루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고 여러 그루가 모인 것이 듯, 사회 전체가 문제의식을 느껴야 한다. 변방에서 변화가 발생한다고는 하지만, 약자들만 문제의식을 느낀다면 사회는 변화할 수 없다. 따라서 중심부에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 마저도 끊임없이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의 가치관을 의심해야 한다.예로 자유로운 학문 토론의 장이 되어야할 대학에서 취업이나 돈에 관련된 분야만을 중시하는 풍조도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탈문맥적 사고로 대학이 무엇인지, 공부를 하는 곳마저 돈에 얽매여야 하는 것인지 고민해보는 것이 나와 같은 대학생들로서는 첫 발걸음이 될 것이다.또한 백인/비백인, 여성/남성, 이성애/동성애 등으로 세상을 나누고 그에 얽매인다면 대상화와 상품화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세상을 시대적 잣대에 구분하게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마저 평가하고 혐오하게 된다. 특히 약자들에게 세상의 잣대는 엄격해지곤 하는데, 변방의 약자들은 자기긍정을 통해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긍정’의 개념은 주디스 버틀러의 혐오에 대한 대응방식과 비슷하다. 세상의 잣대가(혹은 언어가) 나를 상처주는 것을 허용하지 않도록, 약자 내부의 긍정의 힘을 믿고 기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신영복 선생의 대안이 의미가 있는 것은 목표지향성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도나 절차적 대안은 탑다운 방식으로 결국 중심부에서 정해진 목표가 세상에 부여된다. 제도는 평면적인 관점에서 효과적이지만, 그 변화의 주체는 또다시 중심부이다. 반면 탈문맥은 사회가 규정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부터 변화할 것을 당부한다. 혐오와 신자유주의 시대에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중심부에서 만들어진 제도보다 사람들에게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고 그것이 곧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