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허술함우리는 같은 곳에서 - 박선우‘우리는 같은 곳에서’ 는 혼자선 연약한 개인이 ‘우리’가 되어 단단하고 견고해지는 과정을 그린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정반대의 지점에서 공감했다.“그래, 그 시절의 나는 너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우리의 마지막을 예감했는데, 잊지 않기 위해서 몰래 마음을 다잡곤 했는데, 어쩌다가 그걸 망각해버린걸까”“무릇 관계란 오래될수록 견고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르고 허술해지기 마련이다.”끝까지 읽고 난 뒤에도 계속 머리 속에 남아있던 문장이다. 정답이라 생각했던 인간관계에 대한 편견이 단번에 깨진 것 같았다. 사람들은 보통 오랜 친구일수록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깊어 그 관계가 쉽게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러나 우습게도 이 작품을 읽고 난 뒤 다시 생각해보니 저 문장만큼 잘 들어맞는 말이 없었다.작품 속에서도 그렇다. 영지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영지와 서주연의 관계 그리고 영지와 ‘나’의 관계, ‘나’와 아내의 관계가 바로 ‘오래되어 무르고 허술해진’ 관계처럼 보인다. 영지와 서주연과의 관계는 누구보다 가까워 보였지만 허무한 결말을 맞는다. 이는 갑자기 일어난 결과가 아니었을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 오랜 시간 조금씩 허술해지던 관계의 끈이 그날을 이후로 더 이상 이어져있지 못할 만큼 해져서 지난 수많은 과거의 어떤 일들에도 불구하고 하필 그날 끊어져 버린 것이라고 느꼈다. 그만큼 사람 사이의 오래된 관계는 허술했다. ‘나’와 아내의 관계도 그랬다. 누구보다 가깝다고 느꼈고 앞으로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느껴 결혼까지 했지만 특히 ‘나’는 오래된 그 시간을 보험 삼아 무르고 허술해진 관계를 제 3자의 입장에서 방관하는 듯 보였다.오랜 사이일수록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명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관계를 유지해간다. 서로에게 이따금씩 어떤 신호를 주면서, ‘테스트’를 주면서 관계가 얼마나 무르고 허술해지고 있는지 확인한다. 처음 ‘운명’이라 느낄만큼 잘 들어맞던 느낌은 망각한 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아직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관계의 허술함우리는 같은 곳에서 - 박선우‘우리는 같은 곳에서’ 는 혼자선 연약한 개인이 ‘우리’가 되어 단단하고 견고해지는 과정을 그린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정반대의 지점에서 공감했다.“그래, 그 시절의 나는 너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우리의 마지막을 예감했는데, 잊지 않기 위해서 몰래 마음을 다잡곤 했는데, 어쩌다가 그걸 망각해버린걸까”“무릇 관계란 오래될수록 견고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르고 허술해지기 마련이다.”끝까지 읽고 난 뒤에도 계속 머리 속에 남아있던 문장이다. 정답이라 생각했던 인간관계에 대한 편견이 단번에 깨진 것 같았다. 사람들은 보통 오랜 친구일수록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깊어 그 관계가 쉽게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러나 우습게도 이 작품을 읽고 난 뒤 다시 생각해보니 저 문장만큼 잘 들어맞는 말이 없었다.작품 속에서도 그렇다. 영지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영지와 서주연의 관계 그리고 영지와 ‘나’의 관계, ‘나’와 아내의 관계가 바로 ‘오래되어 무르고 허술해진’ 관계처럼 보인다. 영지와 서주연과의 관계는 누구보다 가까워 보였지만 허무한 결말을 맞는다. 이는 갑자기 일어난 결과가 아니었을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 오랜 시간 조금씩 허술해지던 관계의 끈이 그날을 이후로 더 이상 이어져있지 못할 만큼 해져서 지난 수많은 과거의 어떤 일들에도 불구하고 하필 그날 끊어져 버린 것이라고 느꼈다. 그만큼 사람 사이의 오래된 관계는 허술했다. ‘나’와 아내의 관계도 그랬다. 누구보다 가깝다고 느꼈고 앞으로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느껴 결혼까지 했지만 특히 ‘나’는 오래된 그 시간을 보험 삼아 무르고 허술해진 관계를 제 3자의 입장에서 방관하는 듯 보였다.
김현, [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문학에 미치는 영향과 문학이 미치는 영향김현에 따르면 문학은 실체적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문학은 관점에 의해 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학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 다음 세대의 새로운 관점에 의해서는 문학이 아닌 것으로 규정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규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인간은 하나의 문학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그 작품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저 읽는 사람의 관점이 그것의 의미를 결정하고 의미뿐만 아니라, 그 작품이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자리까지 결정하게 만든다.우리의 시대별 관점에 의해 그 시대의 문학이 규정된다는 사실에 공감한다. 문학이라는 것은 그것을 접하는 사람에 의해 해석되는데, 모든 사람이 언제나 같은 경험과 사고만을 공유할 수 없기에 각자의 관점에 따라 그 작품이 읽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때문에 문학은 의미가 있다. 문학을 “오늘날의 우리가 규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표현한 것은 그간 수많은 이들에 의해 평가되고 형성된 문학 작품들의 존재적 의의를 다소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의 문학이 그리고 미래의 문학이 현재와 다를지라도 우리는 과거의 문학이 어떻게 규정되었는지를 통해 현재와 비교할 수 있고 미래의 문학도 어쩌면 현재의 문학을 반박하거나 긍정하면서 혹은 새로운 규정을 생성함으로써 그 관점을 생성할 수 있다. “우리들의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미가 소멸된다는 뉘앙스로 비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현재의 관점에 의해 규정된 ‘현재’의 문학은 ‘현재’의 관점이 투영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또한, 그에 따르면 문학 작품은 내용+형식이 아니라 내용형식이다. 그것들은 분리될 수 없다. 과감히 말해서 그 자체로 좋고 나쁜 내용이나 형식은 없다. 사람들은 내용은 좋은데 형식이 별로라던가 형식은 좋은데 내용이 별로라고 하지만 문학성이란 작품을 통일적으로 인지하는 행위이다.그래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이 배를 불려주지 않고 큰돈을 벌어다 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인식은 인간에게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또한, 인간은 문학에서 얻은 감동을 통해 감각적 쾌락을 불러온다. 그 쾌락은 인간이 반성을 통해 인간의 총체적 파악에 이르게 하며 인간을 억압하는 것과 싸울 것을 요구한다.문학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무지를 추문으로 만든다. ‘앙토아네트’라는 프랑스 전제 시대의 한 왕비는 그녀에게 빵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분노의 함성을 듣고,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될 게 아니냐고 태연스럽게 대답한다. 그러한 대답이 무지의 소산이라는 것을 문학이 밝히고 있다.
어디로 가시나이까-진은영, , 『우리는 매일매일』“Quo Vadis?”는 라틴어로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뜻으로, 기독교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려는 베드로 앞에 예수가 나타나자 놀란 베드로가 예수에게 물었던 질문이다. “울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나”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진은영의 시 는 타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폭력적이고 무관심한 모습을 비판하고 있는데, 그래서 제목만 봤을 때 보다 시의 전문을 모두 읽은 후 제목을 다시 읽었을 때 이 제목이 그런 사회에 대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더 잘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매일매일』의 3부에서는 70년대 군사독재 체제 시절에 시인들이 서로에게 총을 쏘는 모습을 그린 처럼 고통받는 자신의 이미지와 현실의 이미지들이 다소 폭력적으로 그려진다. 도 그 중 하나이다. 고통받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의 폭력적인 단면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에서는 “우리”의 폭력적인 모습으로 비판적 의식을 드러내고 있었다. 밑에서 언급할 화재 사건과 관련해 외국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우리 사회의 폭력적인 모습을 “우리의 녹색 비밀을 묶어둔 노끈들”이라는 사물로 형상화 시켰으며, 화재로 전부 타버린 보호소의 재들을 “우리가 모아”두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우리는 “갇힌 사람들의 피로 젖은 빵을 뜯”는다. 화자는 그 빵을 뜯으며 마지막으로 “이제 어디로?”라고 묻는다. 이 물음이 폭력 위에 서서 희생당한 이들의 피로 만들어진 빵을 뜯는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바람직한 사회로 가기 위한 물음으로 보이기도 하고, 이제는 완전히 방향성을 잃어버린 우리가 더 이상 갈 곳이 없음을 통탄하며 입 밖으로 버려내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2007년 2월 11일 전라남도 여수시 입국관리소의 외국인 보호시설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10명이 숨지고 17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불길에 휩싸인 외국인들의 절박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도주가 우려되어 쇠창살로 만든 이중 잠금장치를 개방하는 것을 지연시켰다. 그 결과 9명의 외국인이 유독가스와 연기에 질식해 숨졌고 나머지 생존자들은 큰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현장에는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어있지 않았으며 화재경보기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곳은 보호소가 아닌 구금시설이나 다름없었다. 외국인 보호시설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시설이었기 때문에 더 큰 충격을 주었다.낡은 선반 위에서는여수 출입국 보호소 화재로사과와 별을 싼 종이냄새가 났었다이주노동자 10명 사망, 17명 부상사과와 별을 싼 종이냄새가 났었다보호 외국인의 도주를 우려해숨겨놓은 얇고 구겨진 파란 종이를 풀며쇠창살 문 개방 지연, 감금된 채숨겨놓은 얇고 구겨진 파란 종이를 풀며노동자들 연기에 질식 사망- 부분시의 일부분이다. 신문기사의 해드라인처럼 보이는 글은 굵은 글씨로 표시하고 사과와 별 같이 생명력 있어 보이는 사물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러나 사과와 별을 감싸고 있던 얇고 구겨진 파란 종이는 어딘지 힘없고 금방이라고 부스러질 것 같다. 보호소에 있던 외국인들을 덮었을 재처럼 말이다. 사건의 표면적 사실에만 입각해 쓴 기사와 고인이 되어버린 인물들의 이야기를 병기 하면서 타자의 삶이 무시되고 가볍게 처리되는 현실을 비판한다.그렇다면 타자는 누구일까. 우리는 타자를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배제하고 있을까. 타자는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맞지 않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출현은 ‘우리’들에게 큰 뉴스거리가 되어주지 못한다. 타자는 ‘우리’와 함께 살아가지만 우리는 ‘타자’와 함께 살아가지 않는다. 실제로 미등록 외국인을 관리 하는 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이주노동자로 온 그들이 보통 어떤 일을 하고 어디에 살고 있는지, 무엇을 먹는지 그들이 어떤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는지 등을 오늘 점심에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보다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외국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소외계층, 소수자 등도 타자로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시는 타자화되어버린 외국인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변방으로 내몰리고 있는 모든 타자들을 다시 사회 속으로 이끌고 출현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어린 우리는 높은 담장을 넘어이웃의 마당에 빗방울로 떨어졌는데과일나무 가지들은 빨간 열매 달고우리를 계속 따라오는데- 부분‘빨간 열매’는 시의 초반부에 등장한 사과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빨간 열매를 달고 있는 가지는 보호소의 불길 속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간절히 바랐을 그들과 동일시된다. 가지가 계속 우리를 따라오는 것은 아마 그들에게 향했던 우리의 무관심과 폭력적인 태도로 인한 피해가 계속될 수 있음을 암시하면서, 앞으로 과일나무 가지일 수 있는 모든 타자에게도 눈길을 주고 그들에게 행했을, 행할 수도 있는 폭력적 행동을 멈춰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이후에 물방울은 “연기에 그을린 고양이털”과는 상관없이 “맑은 얼룩”을 내며 속절없이 흘러내리는데, 그 광경이 털이 빳빳하게 굳을 만큼 차가운 자본주의의 모습과 닮아있다.
흔적-박세미 시인의 시를 중심으로“이게 내가 원하던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런 생각이 드는 때는 보통 지금까지 해오던 일에 회의감이 들 때부터 단순히 순간의 행위가 재미없을 때까지 다양하다. 그런 순간마다 나는 누구인가에 관해 생각한다. 그리고 삶의 방향성에 대해 생각한다. 스스로가 어떤 태도를 지양하고 또 지향하는지. 마지막으로 그런 생각에 다다른다. 껍데기의 나와 내면의 나는 얼마나 다른가.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이었고 자신이고 그리고 자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이 지점에서 시를 쓰는 것에 관해 생각해보자. 시를 쓰는 것은 곧 내면의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 있다. 시를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내면을 시각화하여 볼 수 있다는 것인데, 내 안에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보이지 않았던 모습을 낯선 단어를 빌리거나 그 의미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단어를 이용해 나열하거나 적절한 위치에 배치함으로써 ‘나’를 드러내게 된다.그리고 여기서 박세미의 「일」과 「빈티지」는 ‘나’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 애쓰면서 ‘나’의 내면을 바라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몇 퍼센트입니까」에서는 ‘당신이 당신일 확률’에 관한 물음이 ‘나가 나일 확률’과 얽히면서 자아의 흔적을 찾아간다. 박세미 시인은 시를 쓰는 일이 “나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며 시를 통해 “자신의 고유성을 끊임없는 질문으로 찾아간다”고 말한다. 또,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0퍼센트든, 100퍼센트든 그게 몇 퍼센트든 상관없이 결국에는 자신을 향한 그 질문 속에서 만들어져가는 최후의 것이 자신의 원형과 비슷하고, 원형에 닿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의 퍼센트에 관해 묻는 행위를 위해서는 나를 타자화 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 사람에게는 여러 개의 ‘나’가 존재할 수 있고 그 여러 가지 ‘나’를 타자의 위치에서 바라보며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면서 ‘나’의 원형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찾은 나의 조각을 끼워 맞추며 그이 그의 일이다 그는 자가 제면을 고수하고 있다그러나 기계의 일이다 그는 기계를 돕는다숙달된 일에는 생각이 잘 끼어들지 못한다그날도 그는 제면기를 켜고 반죽을 밀어넣고 있었는데순간이었다기계가 그의 손을 반죽인 양 빨아들인 것은기계와 손이 서로를 단단하게 옥죄어 상대의 작동을 중지시켰을 때생각만이 이 가게에서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처음이었다 그는자신이 기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는 것이며, 손가락이 국숫가락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것이며, 손 조심 안내문이 붙어있는 것과 실제로 손을 조심하는 일 사이의 관계없음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것이다당연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던일하는 자가 생각하는 자가 된 것이다손을 대신하는 것들은 얼마나 손을 닮지 않았는가구급대원들은 금방 제면기를 분해했다세 마디로 이루어진 희망은생각보다 더 잘게 부스러지고 굽어 있었다손이 회복되는 동안 가게가 아닌 곳에서그는 새로운 제면 방식을 생각한다-박세미, 「일」“1인 운영 국숫집 주인”은 가게의 모든 일을 혼자서 해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사실 “기계를 돕는다”. 그러니까 이곳에 진짜 ‘나’는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가 그 기계에 자신의 손이 끼는 사고를 당한다. 사고를 당하면서 “일하는 자가 생각하는 자”가 되었다. 그때 비로소 국숫집 주인은 자아를 돌아보게 된다. 이 시에서 육체는 내면의 자아이고 기계는 자아인 척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런 사실은 육체가 이미 훼손되었을 때 드러난다. 그때 보인 손은 즉, “희망”은 화자의 생각보다 더 부스러지고 굽어 있는 모습이다. 손 쓸 수 없는 모습처럼 보인다. 국숫집 사장은 내면의 자아를 잃은 것이다.시 속의 인물은 ‘손 절단’이라는 안타까운 일을 당한다. 그러나 병원에서도 일 만을 생각하면서 인간이 아닌 기계가 되어버린 모습이다. 하지만 이 인물이야말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는 존재가 아닐까. 시대를 거듭할수록 자아 사색의 필요성은 점을 살아가기 위해서 내면의 자아를 보이지 않는 저 구석에 숨겨놓고 외적인 부분만 남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우리의 모습을 오히려 다 드러내면서 독자로 하여금 꽁꽁 숨겨 두었던 내 안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다. 특히 마지막 연의 “손이 회복되는 동안 가게가 아닌 곳에서 / 그는 새로운 제면 방식을 생각한다”는 내면의 자아가 부재한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면서 동시에 ‘나’를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려는 의도가 보이는 부분이었다.국숫집 사장이 “새로운 제면 방식”을 생각한다고 그를 안타깝게 보지 말아라. 그는 그 자체로 우리의 자화상이며, 그렇기에 우리의 껍데기를 보여줌과 동시에 독자가 자아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어쩌면 그의 새로운 제면 방식이 내면의 자아를 들여다볼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일기장엔 일기를 쓰기 시작한 날의 일기가 적혀 있는데그날이,기억나지 않는다그날에 그 아이는 내내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어쩌면 운 것도 같았는데왜 일기장엔 ‘그 아이는 울지 않았다’고 쓰여 있을까무엇을 커닝한 것은 아닐까젯소*를 페이지 전체에 바른다인도 슬럼가 골목에서 아이들의 눈을 본 적 있다젖은 구슬 같았고깔깔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르던 커다란 눈이왜 스케치북엔 검정 색연필만으로 그려져 있나젯소를 덧칠한다하얗게 굳어가는 표면 앞에망설이는 손이 있다흰 겹들을 쓰다듬으면느낌에 대한 느낌을 되찾을 수 있을까그러나 오늘, 나는 또‘옆집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동네서 가장 맛있는 막걸리도 사라졌다’고 적었다할머니와 막걸리 둘 중 무엇이 먼저인지순서도 모르면서 적었다새 일기장 말고젯소를 사기 위해 문방구에 간다*밑바탕에 덧칠하여 흰 바탕을 만드는 재료.-박세미, 「흰 겹」, 『내가 나일 확률』화자는 계속해서 일기장에 젯소를 덧칠한다. 왜 새 일기장을 사지 않고, 젯소를 칠하는 것일까. 일기를 쓰기 시작한 첫 날은 아마도 ‘나’의 첫 기억이 남아있는 곳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살면서 새로운 기억을 다음 페이지에 기록하기도 하지만 어떤 면을 마주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젯소로 지워야할 만큼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다. 시의 내용을 보면 화자는 “운 것도 같은데” “그 아이는 울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말한다. 그러면서 왜 그랬을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스스로에게 묻는 행위는 오히려 내면을 외면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부정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젯소 아래로 질문이 묻힌다. 그리고 젯소질을 하다가 망설이는데, 문득 이렇게 자아를 마주하는 행위에 의문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다시 그 위에 일기를 쓰고 젯소를 칠하며 계속해서 방황하고 있다.그러나 이렇게 방황하는 삶도 우리 삶의 일부이다. 방황하고 부정하다가 어느 순간, ‘나’를 마주하는 날이 온다. 젯소를 덧칠하는 과정 속에 젯소를 덧칠한다는 기억이 새로 생겨나기 때문이다.낯선 흔적을 찾아서한 시기가 다가온다질긴 그림자를 입고서어떤 시간은 표면에 머무르고어떤 시간은 폭발한다물을 담으니알지 못하는 얼굴이 떠오른다물은 소리 없이 흔들리며우뚝 선 그림자를녹인다모두 마르고 나면수상했던 시절은깨질 것이다-박세미, 「빈티지」어두운 그림자가 질기게도 따라온다. 그림자는 현재의 ‘나’의 잔여물이다. 시간으로 따진다면 그곳에 서 있는 나는 현재의 ‘나’이고 그림자는 바로 직전의 과거에 서 있는 ‘나’이다. 즉, 질기게 따라오는 그림자는 나의 과거인 셈이다. 그리고 과거는 이미 발생한 일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질기기까지 하다. 시 속 과거의 시간에는 “표면에 머무르는 시간”과 “폭발”하는 시간이 있는데 이는 화자가 가진 여러 과거의 양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시 「빈티지」에서는 과거의 자아로부터 발견하는 낯선 ‘나’에 대해 말한다. 화자는 물속의 그림자를 통해 낯선 나와 마주한다. 물이라는 공간은 과거의 흔적을 흐리게 하고 과거 속에서 낯선 자아를 발견하게 해준다. 물웅덩이에 비친 그림자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물 때문에 출렁인다. 그런 이미지를 상상해 볼 때 시 속 화자는 물속에서 녹아버린 한때 “우뚝 서 있었던” 그림자, 그러니까 굳그 물이 모두 마르면 수상했던 시절 즉, 과거의 이해하지 못했던 자신을 마침내 이해하게 된다. 이제 화자는 자신을 한 번 더 바라본다. 마른 물속의 그림자는 더 이상 낯선 자아가 아니다.당신은 몇 퍼센트인가요?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하는 말 중 하나는 “내가 원래 그렇지만은 않은데”와 같이 원형의 나와 파편적인 나를 구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원형은 무엇일까? 그리고 파편적인 나는 원형의 나와 완전히 구별되는 것으로 봐야 할까? 이와 관련된 물음은 다음의 시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숨어 있는 문이 있다는데항상 열쇠를 쥐고 다녀야 한다는데배우가 되려면 목구멍 깊숙이눈물을 잘 흘려야 한다는데당신 옆을 지나칠 때 우연히내 걸음이 놓친 것들 나를 통과한 말들진심이 진심에 덮여 사소해질 가능성내가 나일 확률뜀틀 하나를 넘으면 다시 뜀틀낮과 밤의 경계에서누군가는 동물이 된다는데몸속을 뒤집어 가장 순결한 보호색을 띤다는데당신이 당신일 확률뜀틀 하나를 넘으면 다시 뜀틀그릇이 깨지는 날엔 손이 가벼워졌다내가 나를 다스릴 수 있다는데스스로 밧줄을 쥐고 있을 가능성당신 얼굴 그리고 손가락으로 외곽을 문지르면 당신이 흔들린다내가 흔들린다뜀틀 하나를 넘으면 다시 뜀틀나는 뜀틀과 넘어진다-박세미, 「몇 퍼센트입니까」, 『내가 나일 확률』「몇 퍼센트입니까」에서는 ‘-라는데’의 어투가 많이 등장한다. 이 어투는 해당 문장을 부정하거나 혹은 역으로 물음을 던지는 듯 보인다. “숨어 있는 문이 있다는데” 에서는 “하지만 나는 문이 보이지 않는데” 가 생략되어 있고 “항상 열쇠를 쥐고 다녀야 한다는데”는 “문도 보이지 않는데 열쇠가 어디에 있나 열쇠가 정말 있을까? 열쇠를 들고 다녀야 할까?”의 말이 생략되어 있다. “진심이 진심에 덮여 사소해질 가능성”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있는 ‘나’는 ‘나’는 나이지만 그런 ‘나’가 여러 개로 덮이게 되면 오히려 자아의 뚜렷함을 잃게 될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화자는 바로 다음 행에서 이렇게 묻는다. “내가 나일 확률” 분명 이 어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