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남성 중심주의적 가치관에 도전하는 타모라- 러비니아와의 비교를 중심으로『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 (Titus Andronicus)』작품은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고대 로마 제국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이 극에는 기존 사회가치에 순응하는 인물인 러비니아(Lavinia)와, 이에 저항하는 여성인 타모라(Tamora)가 등장한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는 남성의 ‘명예’와 여성의 ‘순결’이 가장 중요한 가치였는데, 러비니아는 이에 이용 당하고 타모라는 이를 이용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에 타모라와 러비니아가 각각 로마의 시대정신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차이점을 중심으로 두 인물을 비교하고, 이후 타모라와 아론과의 관계, 그리고 타모라와 타이터스의 관계를 비교하여 결론적으로 타모라가 로마 제국에 어떻게 복수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2막 3장에서 타모라와 러비니아가 숲속에서 만나 대화하는 장면을 중심으로 두 인물을 비교하여 로마 제국의 가부장적 사회구조에 두 인물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분석해보겠다.2막 3장에 등장하는 타이터스의 딸, 러비니아는, 여성의 ‘정숙’을 최우선시한다는 점에서 타모라와는 대비되는 인물이다. 그녀는 또 남성중심적인 로마 제국 내에서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가치인 아름답고 정숙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타이터스의 ‘사회적 명예’를 높이는 ‘소유물’로써 존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5막에서 타이터스는 그녀를 ‘흠하나 없는 정숙함 (5.1.176)이라 칭하기도 하고, 2막에서 카이론과 아론도 그녀의 정숙이 루크리스와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Lucrece was not more chaste/ Than this Lavinia (2.1. 108-09)’라 표현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그녀의 삼촌인 마커스조차 러비니아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는데, ‘Kings…/might not gain so great a happiness/ As half thy love? (2.4.19-21)’ 라며 그는 러비니아가 모든 로마 남성의 욕망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이는 모두 러비니아의 ‘정숙’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 그녀 존재자체가 이상화되었기 때문이다.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숙’을 상징하는 러비니아는 2막에서 타모라와 숲에서 만나 대립한다. 여기서 러비니아는 타모라의 ‘정숙하지 않음’을 비난하며, ‘Tis thought you have a goodly gift in horning, (2.3.67)’라고 비꼰다. 또, ‘Cuckold’라는 노골적인 표현으로 타모라의 불륜을 지적하며 포로 흑인에서 갑자기 황후자리에 ‘간택’당한 그녀를 하대하고 무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러비니아의 도발은. 타모라가 황후가 되었음에도 자신을 간택한 황제가 아닌 자신의 욕망을 더 추구하고, 정숙보다는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타모라에게 결핍감에 따른 분노감을 부여한다. 또 자신의 맏아들을 눈 앞에서 살해하고, 무릎끓고 애원했음에도 이를 무시해버린 타이터스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이미 있었던 타모라의 화를 더 돋구었을 것이다. 황후가 되었음에도 로마에 소속감을 갖지 못한 타모라에게는, ‘정숙함’이라는 사회적 가치에 따라 로마인의 ‘명예’와 ‘존경’의 대상이 되는 러비니아가 자신의 ‘정숙하지 못함’을 지적한 것이기 때문이다.분노의 여신이 된 타모라는 러비니아를 직접 죽이려고 하다가 결국 러비니아가 가장 중요시 여기던 ‘정절’의 가치를 뺏기 위해 아들들을 이용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한다. 이때, 러비니아는 자신을 살려달라 요청하며 역시나 로마의 남성주의적 가치관에 동화된 여성으로서의 모습을 보인다.‘’Tis present death I beg, and one thing more/ That womanhood denies my tongue to tell./ O, keep me from their worse-than killing lust, And tumble me into some loathsome pit/ Where never man’s eye may behold my body. (2.3.173-177)인용문에 따르면, 러비니아는 자신의 목숨은 죽여도 되지만 죽는 것보다 정절을 지키지 못하는 게 두렵다 말한다. 또 타모라에게 같은 여성으로서의 ‘동정’을 베풀어달라며, 남성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차라리 묻어달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타모라는 정절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타이터스의, 그리고 로마의 가장 큰 명예로운 가치인 ‘여성의 정절’을 철저히 무시하며 자신이 육체적, 성적 욕망을 끝까지 놓지 않고 추구한다. 타모라는 ‘Now will I hence to seek my lovely Moor,/ And let my spleenful sons this trull deflower. (2.3.191-2)’ 라고 말해, 결국 러비니아는 타모라와 그녀의 아들들에 의해 강간당하고 두 손과 혀를 절단당하고 숲에 홀로 남겨지게 된다. 이는 타모라가 러비니아 뿐만 아니라, 딸의 ‘정절’을 본인의 사회적 가치와 동일시했던 타이터스에게도 도전장을 내민 것이라 볼 수 있다.다음은 복수의 여신 타모라가 아론을 통해 어떻게 로마와 대항하는지 알아보겠다. 우선 타모라는 고트족의 포로로 끌려온 이후에 새터나이너스에게 갑작스럽게 황후로 ‘간택’받음으로써 최고 권력자라는 신분으로 사회적 위치가 상승하게 된다. 이처럼 타모라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여성이기도 하지만, 로마 황제의 ‘선택’을 받은 순간만큼은 이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받아들이고 이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황후가 되어 가장 높은 자리 옆에 앉게 되면 그녀가 복수를 하기 더 용이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족과 고트족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피부색으로도 남들과 철저히 구분되어 가장 낮은 사회적 계급에 속한 아론은, 새터나이너스와 반대로, 여성이 주체적으로 성적 욕망을 발산하는 대상이 된다.특히 2막에서 그녀는 ‘Let us sit down and make their yellowing noise. (2.3. 20)라 말하며, 아론에 대한 자신의 성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더불어 새터나이너스 황제의 무능함을 이미 눈치채고 있던 타모라는 그를 달콤한 말로 위로하는 척하면서 근본적으로는 그를 조종하며 로마 황제의 권위를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매장해버리기까지 한다. 이는 그녀가 아론에 대한 욕망을 감추지 않음으로써 남성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로마 황제의 자리에 위치한 남편을 무시함으로써 로마 자체에 대항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타모라의 로마 질서에 대한 위협은 그녀가 아론과의 혼외자를 낳음으로써 절정에 달한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여성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억제하고 정절을 지켜 남편의 ‘핏줄’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로마 남성의 ‘명예’에 해당했을 것이기 떄문이다.이처럼 타모라는 1장에서 자신의 첫째 아들 알라버스를 눈 앞에서 잃고, 그를 살려달라고 무릎끓고 빌었음에도 무시당했던 경험에 대해 타이터스와 더불어 로마 전체에 복수하게 된다. 러비니아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로마 사회가 가장 중요시 여기던 그녀의 ‘정절’을 파괴함으로써 복수한 것이다. 특히나 로마 남성의 시선의 ‘대상’이 되었던 그녀의 신체를 조각조각 내어 로마 남성들이 그 비극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특히 타이터스 자신이 본인에 닥친 불명예와 부정의를 직면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이는 타이터스에 대한 사적 복수이면서 동시에 로마 국가에 대한 복수가 되기도 한다. 사적 복수인 이유는, 타이터스의 ‘사회적 명예’를 높이는 그의 소유물 중 하나를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러비니아’의 신체와 정절의 가치를 산산조각내어 타이터스의 사회적 명예를 실추시키고, 명예를 더럽히며 온갖 부정의를 겪도록 했다. 동시에, 한 평생 로마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쳐온 타이터스는 사실상 로마 그 자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는 로마 전체에 대한 대항이라고 볼 수도 있다. 황후가 된 타모라의 노골적인 성욕과 주체적인 욕구 표현 역시 로마의 기존 질서에 대립되는 것으로, ‘핏줄’로 후계자를 정하던 로마 황실을 위협하는 요소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모라는 극 중에서 악인에 가깝게 묘사된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당시 가부장적 사회구조에 대항하여 본인의 욕구에 대해서 주체성을 드러내는 여성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그녀의 행위 역시 복수를 위한 연쇄적 폭력의 일부였으나, 그 당시 가장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물인 타이터스에게, 타지에서 온 여성으로써 맞설 수 있는 힘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입체적인 면을 한 번 더 돌아볼 계기가 되지 않을까.
자연의 이치와 관련한 에드먼드와 글로스터,두 인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중심으로리어왕은 늙은 아버지와 세 딸의 관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이며 왕의 잘못된 판단으로 펼쳐지는 그의 비극이다. 리어왕과 세 딸의 이야기와 더불어 글로스터와 두 아들의 갈등 역시 이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평행하여 등장하는데, 리어왕의 주제의식을 더욱 강조하는 데 기여하는 역할을 한다. 해당 글에서는 리어왕 3막 3장 1행부터 25행에 집중하여 글로스터와 에드먼드의 대화를 통해 두 인물의 성격을 짐작해보고, 당시 시대상에 비추어 볼때 두 인물을 악인과 선인으로 과연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해보겠다. 먼저, 글로스터와 에드먼드의 대화를 분석해보고 이 대화에서 등장하는 ‘unnatural’과 ‘natural’의 개념 사이의 대립이 작품 속에서 어떻게 등장하고 있는지 살펴보겠다. 이후로는 전통적 가치관과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이 세대 갈등으로 통해 나타나고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시대상에 비추어봤을 때 아버지를 배신한 에드먼드가 과연 완전한 악인이고, 배신당한 글로스터는 무고하고 선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정리하며 글을 마무리할 것이다.먼저, 3장 3막의 시작부분에서 글로스터는 ‘I like not this / unnatural dealing.’ (3.3.1-2) 이라며,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리건과 거너릴의 행동을 비판한다. 자연의 이치 (natural)이라는 표현은 작중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데, 해당 맥락에서는 아버지 리어왕을 폭풍우 치는 날씨에 밖으로 내쫓고,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하지 않은 리건과 거너릴의 배은망덕한 모습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이에 에드먼드는 표면적으로나마 동의를 표하며, ‘Most savage and unnatural. (매우 잔인하고 몰인정하다)’ (3.3.7) 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때, 그가 ‘savage’라는 형용사를 추가한 점에도 주목할 만하다. 작중에는 특히나 자식들의 이러한 배은망덕한 모습을 짐승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3막 7장에 글로스터가 자신의 집에서 포박되어 리건에게 분노를 표출할 때에도, ‘Because I would not see thy cruel nails / Pluck out his poor old eyes, nor thy fierce sister / In his anointed flesh stick boarish fangs. (당신의 잔인의 손톱이 불쌍한 노왕의 두 눈을 뽑아 버리거나 부인의 악독한 언니가 그 멧돼지 같은 이빨로 폐하의 몸을 물어뜯는 꼴을 볼 수가 없어서였소.) (3.7.69-71)’ 라며, 리건과 거너릴을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표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이처럼 작품 속에서는 자식으로서, 혹은 젊은 세대로서 그 위의 세대를 공경하고 존경하고 부양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natural)처럼 당연한 것이라고 바라보는 전통적 가치관이 강조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16세기 후반 영국 사회는 르네상스 인본주의가 대두되는 시기였고, 인간의 지적 성장을 통해 당연시되던 운명을 개인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상이 등장하여 종교적이고 봉건적인 가치관이 서서히 붕괴되던 시기였다. 신과 운명을 믿었던 사람들이 인간의 지적능력과 성장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두번째로, 글로스터와 에드먼드 각각 인물의 특징을 분석해보겠다. 위의 시대적 배경과 대화에 따르면 글로스터는 봉건적 가치를 중시하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는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것을 중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왕의 편을 드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지금은 폐왕이 된 리어왕이라도 그의 편을 드는 것이 합리적으로 옳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There is part of a power already footed. We / must incline to the King. (이미 군대의 일부가 상륙했고, 우리는 폐하의 편을 들어야 한다.)’ (3.3.13-15)라며, 이미 침략 중인 프랑스 군을 고려하여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왕의 편을 드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았다. 이에 따르면, 글로스터와 에드거는 모두 실리와 유익을 중시하는 부자인물로서 공통적인 특성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봉건적인 가치관에 따라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중시했던 아버지와는 반대로 세대교체에 대한 욕구를 드러냈던 에드먼드는 도덕적인 가치보다는 자신의 목표에 대한 성공을 더 중시하는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에드먼드는 서자로 태어나, 늘 아버지에게 직접적으로나 공개적으로 차별적인 대우를 받으며 자랐던 인물이다. 예를 들어, 1장 1막에서는 글로스터가 에드먼드를 데리고 켄트와 얘기하는데, ‘a son for her radle ere she had a husband / for her bed. Do you smell a fault? (침실에서 남편을 맞이하기도 전에 요람에서 아기를 맞이하게 되었답니다. 이제 무슨 잘못이 있었는지 아시겠어요?) (1.1.15-16)’라며 에드먼드가 ‘잘못’으로 태어난 아이라고까지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본인이 생각했을 때 자신은 적자로 태어난 형 에드가보다 못난 점이 없고, 외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혹은 능력적으로도 충분하고 뛰어나다고 판단한 에드먼드는 결국 이러한 차별 대우에 대한 반란을 꾀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반란을 꾀하면서는 또, 결혼이라는 적법한 제도에 의해 태어난 에드가보다, 사랑에 의해 태어난 아이인 자신이 더 우월하다며, 자연과 인위적인 것 사이의 자연적인 것이 더 우월하다고 비교를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연(natural)적인 것의 가치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부모-자식간의 연대, 자식으로서의 도리와 같은 봉건적인 가치관까지 지지하지는 않는 모습이다.따라서, 감히 아버지 글로스터를 배신하고 형인 에드가를 반역자로 내몰고 싶어했던 에드먼드가 완전한 악인이고, 나약하고 늙은 노인인 글로스터는 완전히 무고하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에드먼드는 세대교체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군주가 되기에는 적합한 인물상이었다고 보인다. 두 인물 모두 실리와 이익을 추구하며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반면, ‘자연의 이치’와 개인의 목표 사이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고려하는지에 대해서만 차이를 보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봉건적 가치와 새로운 가치, 새로운 세대 간의 차이,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작품을 비교 분석해보면서 유독 ‘natural vs unnatural’ 에 대한 개념이 많이 등장했었는데, 셰익스피어는 독자들이 물질적이고 허위적인 것보다는 자연의 이치, 도리에 맞는 도덕성에 대한 가치를 봐주기를 원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인본주의에 대한 가치가 두드러지고 있던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봤을 때에 아마도 이러한 인물들이 당시에 다수 등장했었고, 두 가치관이 충돌했을 때 그래도 우리가 인간으로서 짐승과 다른 점이 있다면 부모-자식간의 도리를 지킬 줄 알고, 인간으로서의 휴머니즘이 있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이에 에드먼드가 자신의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려고 하는 행위 자체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려고 했던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그의 욕망과 목표가 세대교체에 있었고, 리어왕의 다른 인물들과 같이 결핍을 동력으로 했던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완전한 악인은 아니라는 변명이 가능하다고 본다.
좋은 저널리즘이란 기본을 지키는 언론학번 이름좋은 저널리즘이란, 사회 공동체 발전에 기여한다는 언론으로서의 기본 역할을 수행하는 언론을 의미한다. 권력을 감시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또 민주주의가 제대로 성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기본적인 언론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언론의 정체성과 역할을 의심하며 오히려 뉴스와 기사의 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낮아진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좋은’의 의미가 더 나은 세상을 향하는 데에 있다면, 기본적인 언론의 역할을 수행하며 더 나아가 사회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 ‘좋은’ 저널리즘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나 2019년 코로나 사건부터 시작해서 최근 전 세계적으로 주목할만한 여러 큰 사건들이 있었는데, 이때 실제 언론의 대응 및 보도 방식을 예시로 들어보면서 좋은 저널리즘의 특징을 3가지로 정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앞으로 저널리즘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정리해보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첫 번째로, 좋은 저널리즘은 권력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데 일조해야 한다. 특히나 민주사회에서 권력자들의 행동을 검토하고 부당한 행동을 감시하는 것은 언론의 중요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언론이 사회적 불평등, 부정부패를 드러내고 개선을 촉구하는 비판적인 기사를 통해 사회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도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언론이 정치권력에 의해 압박당한 사건이 있었다. 2022년 9월 윤석열 대통령이 비속어가 섞인 말과 함께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만한 발언을 한 것이 전 세계적으로 보도된 것이다. 윤 대통령이 한 말은 “국회에서 이 새끼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이 쪽팔려서 어떻게 하나?”로 MBC에서 최초 공식 보도되었고, 이후에 국회가 언론을 탄압하고 대통령실에서 비보도 요청을 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2023년 7월 재판부는 MBC에게 원본 영상을 제출할 것을 요구하면서 보도에 대한 책임을 물었고, 정미경 국민의 힘 국회의원 역시 ‘미국이 이 사실을 아는 것은 국익에 해가 되니 언론이 방송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며 공개된 자리에서 비속어와 함께 미국 대통령을 비하하는 말을 한 윤석열 대통령이 아니라 그것을 보도한 언론에게 책임을 돌렸다. 심지어는 국민의 힘 차기 당권 주자 중 한명인 김기현 의원은, “거짓 선동방송의 총본산인 MBC는 해체되어야 마땅하다”고 SNS에 업로드하며 경영진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정치 권력의 언론에 대한 압박은 사실상 ‘언론 혐오’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결국에 이는 언론 보도의 자유를 침해하고 정치권력감시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길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보도한 언론사의 대응이 과연 ‘좋은 저널리즘’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후 대통령실에서 해당 사실을 부인하고 나서자, 언론사들은 국내음성판단 전문가와 교수 등을 동원해서 대통령의 음성을 분석하고 노이즈를 지운 버전, 배속을 늦춘 버전 등을 뉴스에 내보냈고, 이러한 언론사의 대응방식에 대해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느냐라는 시민 사회의 비난을 더 받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언론이 녹취된 권력자의 공개함으로써 오히려 정치권력의 탄압을 받는 결과를 낳는다면, 언론은 앞으로 제 기능을 과연 잘 할 수 있을지는, 확실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두번째로, 좋은 저널리즘은 시민들의 알권리를 보장하며 정확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최근 발생한 이태원 압사사고와 관련한 언론들의 대응이 명확한 그 예시가 될 수 있겠다. 2022년 10월 29일, 할로윈을 앞두고 이태원에 인파가 몰리면서 압사사고가 발생했다. 내국인과 외국인을 포함해서 사망자수가 100명이 넘는 큰 사고였는데, 당시에 언론이 자극적인 제목과 사진, 명확하게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낚시성으로 이용해서 조회수 경쟁을 치루듯 보도하는 바람에 피해자들에게 2차 피해를 가한 적이 있었다. 2014년 4월 16일 발생했던 세월호 사건 이후, 이와 관련해서 한국기자협회에서는 재난보도 준칙을 세운 적이 있으나 10년이 지난 지금, 그 준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이 우리 언론의 현실이다. 특히나 언론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포털과 조회수를 위한 기사가 다수 양성되었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와 사진들이 포털을 앞다투어 장악했다. 해당 재난보도 준칙에 따르면, 언론은 ‘사회적 혼란이나 불안을 야기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재난 수습에 지장을 주거나 피해자의 명예나 사생활 등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유의하라’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지난 해 12월, 16세의 어린 학생은 이태원 참사 트라우마와 더불어 ‘이태원을 왜 갔느냐’라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악성 인터넷 기사 댓글들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하여 생을 마감했다. 댓글 뿐만이 아니라, 언론은 정치인들의 말들도 비판 없이 단순 인용하는 방식을 취했고, 이는 유가족과 피해 당사자들에게 고통을 가했다. 선정적인 보도를 지양하고 피해자들의 심리적 안정을 우선시 해야 할 재난 상황에서 과연 언론은 제 역할을 해냈다고 볼 수 있을까. 특히나 동일한 사건을 보도하면서도 국내 언론과 외신 언론이 보도 형태에서 차이를 보였는데, 우리나라 언론의 경우 한 가지 사건을 집중 취재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외신은 사고 원인과 책임소재에 대해서도 종합적인 성격을 띈 기사들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보도했다. 재난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대책 마련을 위한 종합적인 사건에 대한 보도가 필요할 것이며, ‘좋은’ 언론이란 이처럼 제대로 된 정보를 통해 더 안전하고 믿음직한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저널리즘이 아닐까 생각한다.마지막으로, 언론을 여론을 조성하고 낚시성으로 조회수 높은 기사만 대량 생산할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사회 문제를 조성하고 이에 걸맞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언론이라고 생각한다. 이태원 참사에서도 문제가 됐던 무분별한 가짜뉴스와 SNS를 통해 확산된 자극적인 기사들이 아닌, 재난 상황에서도 언론으로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개선하는 데 일조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최근 계속해서 이슈가 되고 있는 교권 추락과 관련한 언론 보도 등을 예로 들며 언론의 어떤 부분이 문제를 악화시켰고 또 이를 어떤 방식으로 보완, 발전해 나갈 수 있을지 정리해보겠다. 2023년 7월 18일,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1학년 담임교사가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학부모의 민원 때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이후 9월 1일 여성교사 A씨, 그리고 또 초등학교 남성 교사 B씨가 연달아 교직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언론은 역시나 자극적인 조회수 올리기식 기사를 배포하기 바빴고, 이에 언론인권센터에서는 지난 7월 바로 이를 고발하는 글을 올렸다. 특히나 의 보도 기사 태도를 지적하며, 해당 언론사가 고인의 사망원인에 대해 보도하며 고인의 사적 측면 만을 부각하며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했다는 것이다. 본문에 따르면, 해당 언론사는 ‘고인의 일기장과 정신과 진료 기록을 근거로 고인이 평소에 ‘심한 스트레스와 연인 관계’ 등으로 우울감을 표시했으며, 우울증세로 정신과 치료를 받아 온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해서 언론인권위원회는 가 고인의 일기장을 볼 수 있었던 경위, 유가족의 동의 여부, 고인의 정신과 치료 기록을 알게 된 경위가 불문명한데다가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 의심되는 사적 고통에만 초점을 맞춘, 자살보도윤리강령에 어긋나는 기사를 작성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는 비단 만의 문제는 아니며, 사회 구조적 문제로 인한 피해를 분석하고 이를 심층 취재 및 분석하여 해결법을 모색하는 식으로 모든 언론사의 전반적인 보도 태도가 변화해야 할 것이다.좋은 언론이 되기 위해 위와 같이 3가지 언론의 자질을 정리해보았다. 각각 언론의 자질과 관련해서는 실제 사례를 예시로 들며 현재 한국 언론의 문제점 및 보완 사항들을 각각 정리해보았으나, 이와 같은 언론의 문제를 바로 하나씩 해결해 나가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많다. 정리한 모든 언론의 문제점은 결국 저널리즘이 수익과 직결되어 있음으로 해서 발생하는 것들인데 언론의 수익 창출방법을 바꾸고 개혁을 모색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언론의 자정작용 역시 기대할 수 없는 수준으로 이미 조회수만을 노리는 기사들이 빠르게 포털을 장악하고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좋은 언론’, 제대로 된 기사, 공정하고 냉철한 기자들의 분석적이고 심층적인 보도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언론 통제와 탄압, 그리고 자본주의에 잠식된 언론에서 벗어나 비판적으로 작성된 기사가 나올 수 있도록 제도적, 법적, 더 나아가 전지구적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참고문헌조국현 기자, , MBC뉴스, 2022-10-15, Hyperlink "https://imnews.imbc.com/replay/2022/nwdesk/article/6417313_35744.html" https://imnews.imbc.com/replay/2022/nwdesk/article/6417313_35744.html이준영기자,
< 혐오 속의 증오와 역겨움 >영미문학문화학과 학번 이름혐오는 분명 사회에 의해 조작되는 감정이다. 'aversion'이라는 단어의 유사어로는 'hate(증오)'와 'disgust(역겨움)'의 두 가지 뜻이 모두 존재한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혐오는 어떻게 저 두 가지 양상을 나타내며 형성되는 것일까? 먼저, 소설 속에서 혐오의 두 가지 양상인 증오와 역겨움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분석해보고, 그것이 어떻게 혐오를 형성하였으며 주인공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첫번째로 혐오 속의 증오는 우열성에서 기인한다. 혐오는 혐오의 대상과 주체 사이의 우열을 불가피하게 나눌 수 밖에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소설 속에서 약 10살 정도인 멀린(Marlene)은, 이상적이고 완벽해보이는 자신의 친구 셜린(Charlene)과 친구가 되기 위해 베르나(Verna)라는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친구를 함께 험담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혐오는, 그 둘의 집단적 연대감을 높이고, 베를나를 향한 그들의 우월성과 지배의식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된다. “사람들은 이런 혐오 감정으로 약자들에게 수치심을 주는 '낙인찍기'과정을 통해 정상인 집단의 체계를 공고히 하고, 그로 인해 그 외의 약자들은 철저히 주변화되는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2015).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들이 '정상인'에 속한다는 합리화를 멀린과 셜린은 철저한 경계짓기를 통해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베르나의 머리를 나오지 못하도록 물 속에서 누르는 사고를 저지를 때도, “I don't think we felt wicked, triumphing in our wickedness. More as if we were doing just what was - amazingly - demanded of us, as if this was the absolute high point, the culmination, in our lives, of our being ourselves.” (p. 346)라며, 나쁜 짓을 한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자신들의 존재로서 정점에 있는 일을 하는 것처럼 느꼈다는 서술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그들은 죄책감을 느끼지도 못했던 것이다. 혐오는 이처럼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인 인권을 무시하고, 사람 자체의 존엄성의 가치를 비교하고 우열을 나눈다는 점에서 공동체의 삶을 위협하는 폭력적인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우열의 가치를 나눔으로써, 자신보다 열등해 보이는 생물에 대해 동물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내고 심지어는 증오의 감정까지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두번쨰로, 혐오에 담긴 역겨움에는 오염에 대한 불안함이 담겨 있다. 그러한 “disgust의 대상은 대체로 ‘점액성’을 갖고 유동적이며 경계가 모호하다고 간주된다.”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2015). 이는 분노와 달리, 이러한 점액성을 가진 유동적 대상은 지배집단의 공고한 경계를 동요시킬 우려가 크기 때문으로 간주된다. 소설 속에서 멀린이 베르나의 눈길을 피하고, 그녀가 자신을 만지는 것에 대해 극도로 소름끼쳐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멀린은 “Children use that word hate to mean various things, it may mean that they are frightened. Not that they feel in danger of being attacked,”,”It is not a physical harm that is feared - or that I feared in Verna's case - so much as some spell, or dark intention.” (p. 325) 이라며, 그녀의 베르나를 향한 혐오는 어떠한 실체적인 위험이나 손상때문이 아니라, 신비스럽고, 어두운 주문이나 의도 떄문이라고 서술한다. 이 또한 혐오가 추상적 이미지 때문임을 시사하고, 또 지배집단은 유동적이고 점액성의 어떤 물질로 대표되는 대상을 혐오함으로 인해서 그 자체의 단단한 중심이 흔들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소설 속에서 멀린이 베르나를 뱀 혹은 끈적끈적한 페퍼민트 자국, 초록색 슬라임 등의 끈적끈적한 것들로 비유하는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작가는 우리의 혐오가 이러한 추상적 환상과 오염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마치 그 시대의 사상과 환경이 멀린의 사고방식을 지배한 것처럼, 우리에게 주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칠 수 없다면 견뎌야 하는 삶영미문학문화학과 학번 이름“There was some open space between what he knew and what he tried to believe, but nothing could be done about it, and if you can't fix it you've got to stand it.'. 이 소설의 끝에서, 에니스는 그가 알았던 것과 그가 믿고 싶었던 것 사이의 괴리, 즉 자신이 잭을 정말 사랑했음을 가슴 아프게 느낀다. 그리고 고칠수 없다면 견뎌야한다고 서술한다. 이는 잭의 죽음을 인정해야 하면서도 잭과 그와의 사랑이 진실되었음을 느낀 지금에 와서야, 그때 모든 것을 고치려고 하지 말고 견뎌야 했다고 애석해하는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동성애 혐오 폭력으로 결국 죽음을 맞닥뜨린 잭. 그런 잭과 에니스는 과연 무엇을 고치려고 했던 것이며, 왜 고치려고 했던 것일까? 그리고 작품 속, 두 명의 캐릭터에서 나타나고 있는 젠더구분의 경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먼저, 잭과 에니스의 성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잭과 에니스는 둘 다 아내와 자식이 있으며, 산에서 목장일을 함께 했고 외향적 생김새로도 젠더성을 부여할 수 없을 정도로 둘 다 거친 카우보이의 특성을 지녔다. 그러나, 소설 후반부에서 묘사되는 그 둘의 가정생활을 보면, 관계 속의 각각의 젠더성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초반에 대범하고 먼저 모험담을 늘어놓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보였던 잭은 그의 아내 루린과의 관계를 “Lureen? There's some serious money there. Her old man's got it.”라고 얘기하며, 그것이 자신의 돈과 사회적 지위를 상향시키는 결혼이었다고 서술한다. 또, 후에 잭의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그보다 더 경영에 능력을 보이는 루린이 가정의 모든 경제적 측면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와 반면에 에니스는 말도 잘 못하고 텐트에서 요리도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결혼 생활을 통해서는 그의 아내 알마와 그의 자식들, 즉 자신의 가정을 끝까지 책임지려고 하는 가부장적이고도 책임감있는 모습을 끝까지 보여준다. 이혼한 뒤에도 계속 딸들을 챙기려고 노력하고 비록 사회적으로 괜찮은 직장에 취직하진 못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농장에서의 삶도 성실히 살아가려고 한다. 이를 통해, 그들의 성향이 본능적으로 여성적이고 남성적으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가정환경에 의해 후천적으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고, 또한 그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젠더 구분의 경계는 다시 한번 모호해진다는 것도 알 수 있다.그렇다면 잭과 에니스는 무엇을, 왜 고쳐야만 했을까? 잭은 자신의 가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니스에게 같이 살자고 제의하지만, 에니스는 가정에 대한 강한 책임감에 이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잭을 자주 만나지 못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에니스는 어렸을 때 본 동성애 혐오 폭력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날 이후 자신의 정체성을 사회의 틀에 맞게 조작하는 삶을 살게 된다. '정상인'에 대해 규정하고, 자신과 잭의 특별한 감정을 애써 외면하려고 애쓰며 만남도 자제하는 것이다. 그런 에니스에게 잭은 자신의 사랑을 모두 보여주며, “I wish I knew how to quit you.”라며 그만큼의 사랑을 보여주지 않는 에니스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시선들에 의해 잭과 에니스는 그들의 사랑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만, 그리고 자제해야만 하는 것으로 '고쳐야'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 마지막 후반부에서 등장하는 에니스의 피묻은 셔츠를 보면, 에니스는 자신이 그토록 외면하면서 '고치고 싶어했던' 그들의 관계에 대해 명확히 깨닫게 된다. 삶의 밑바닥에서 서로를 의지했고, 또 서로에게 따뜻한 품을 제공했던 그들은 아마 '동성애자'다, '양성애자'다, 라는 범주 속에 속하기 이전에 '인간적으로 서로를 사랑'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고친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일까? 퀴어 영화들에 대한 논문에서 한 저자는 이러한 설명을 덧붙인다. 이것은 단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도 우리가 '게이의 사랑'에서 '보편의 사랑'으로 번역을 거치지 않아도 되도록, 애초에 '사람과 사람의 사랑'이라는 감각 아래 쌓아올려진 것이다. 이 퀴어 텍스트는 사랑의 '경계 없음'을 전달하면서, '우리'라는 연대성을 조금 더 넓혀 놓는다. 여기서의 우리는 '게이도 배제 않고 포용해야 한다'는 윤리나 도덕적 판단 이전에, 그저 자연스러운 동질함의 느낌에 의해 즉각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양자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게이의 사랑이면서 보편의 사랑인 것과 그저 사랑 자체인 것 사이에는 적잖은 간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