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와 우리의 교리”를 읽고나는 감리교 소속의 교회에 다니고 있으며 감리교의 신학교에서 감리교의 신학을 배우고 있는 신학생이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와 공부하고 있는 많은 신학에서 웨슬리를 빼놓고 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하지만 그러한 신학이 오늘 날의 교회의 교리로 이어지는 과정이 어떠했는지 잘 알지 못하였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또 느끼고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이 책은 웨슬리의 초기 메도디스트 교리를 다루면서 감리교의 초기에 웨슬리가 교리를 만든 마음을 상기하면서 오늘의 감리교가 웨슬리의 교리의 본질을 많이 잃어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다시 초기의 메도디스트 교리를 연구하면서 다시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감리교신학대학교를 다니면서 웨슬리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연구하고 공부했던 적이 없었던지라, 웨슬리의 교리를 공부하면서 느낀점은 웨슬리와 메도디스트의 교리가 정말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며 균형이 잡힌 교리라는 것이다. 이전에는 몰랐지만 책을 읽으면서 웨슬리의 신학과 교리의 그의 삶이 성경적이었으며 오늘날의 감리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앞으로 감리교 목회자가 될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책에서 말했다시피 오늘날의 감리교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 위기 중의 한 예시로 감리교 신학의 사중표준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의 감리교회는 처음 웨슬리가 교회신학의 기본으로 삼았던 4가지 표준(성경, 전통, 이성, 경험)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처음으로 나온 비판은 이성의 사용에 대한 비판이었다. 웨슬리가 이성을 사용했던 방법은 이신론이나 합리주의에서 강조하던 이성이 아닌 신앙을 전제로 하는 이성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이성으로 광신주의나 성경적이지 않는 잘못된 신비주의를 경계하기 위해 사용되어왔다. 하지만 오늘날의 감리교회에서는 웨슬리의 이러한 이성의 역할을 부정하고 오히려 신앙과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성적 비판에만 치중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성이 신앙생활과 복음을 무너뜨리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의 사용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며 이 때문에 기독교의 본질까지 훼손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경험에 있어서도 웨슬리가 처음 강조한 마음이 경험, 다시말해 하나님과의 마음을 통해 만남의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경험을 강조하면서 웨슬리의 교리의 본질을 벗어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주장에 근거하여서 감리교의 신학은 훼슬리의 처음 의도를 벗어나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초기의 메도디스트의 교리의 성격을 공부하면서 균형이 정말 잘 잡혀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초기 메도디스트의 교리의 성격을 살펴보면 성경적이고 사도적이며 초대교회적이면서 역사적이고, 이성적이고 경험적이며 실천적이고 구원론 중심이며 복음적이였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목회적이고 설교를 위한 것이었으며 영성젓이고 평이하고 시가적이며 에큐메니컬하다는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해 성경을 바탕으로 실천적이고 복음적이고 쉽다는 것이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감리교가 다른 교단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것중에 하나가 교리가 없다는 점이다. 이것이 비록 감리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나온 비판이지만 이에 대해 점검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초기 메도디스트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배운 것은 교리가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과 교리의 바탕은 성경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를 전할 때고 나의 의견이나 생각이 아니라 철저히 성경에 바탕을 두고 또 웨슬리의 사중표준을 바탕으로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적인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철저히 성경적이면서 평이한 설교를 했다고 한다. 회중들이 받아들이기 쉬우면서도 성경적이었던 설교가 웨슬리의 설교였으며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설교라고 생각한다.웨슬리 교리의 특징은 에큐메니컬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웨슬리의 교리는 ‘복음적’ 에큐메니컬이라는 것이다. 웨슬리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본질은 확고하게 지키면서 성경적 기독교를 추구하였다. 오늘날 개신교회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을 한다는 단체들을 보면 이러한 본질을 흐리면서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까지 말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웨슬리가 주장한 에큐메니컬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웨슬리의 교리는 철저하게 구원론 중심이었으면서 동시에 철저하게 성경적이었다. 또한 구원에 있어서는 이신칭의와 교리를 주장하여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분명하게 주장하였다. 웨슬리에게 이러한 본질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다. 웨슬리가 휫필드와 마지막으로 교리적 논쟁을 하였던 것도 이러한 본질을 확실하게 지키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웨슬리 교리의 에큐메니컬은 성경적인 기독교를 추구하기 위한 에큐메니컬이었다고 보는 것이 그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교리 중에서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 있다면 다른 교회나 신학 사상까지 받아드릴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을 가지되, 구원의 방법에 있어서 이단성이 있다면 타헙하지 않았던 웨슬리의 교리야 말로 진정한 에큐메니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웨슬리의 초기 메도디스트 교리에 있어서 교리의 표준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감리교인으로서, 성경적인 설교를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될것이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웨슬리의 설교와 서문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예비 감리교 목회자로서 웨슬리의 표준설교와 신약성경주해와 논문들 그리고 그의 생에에 대해서 깊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전히 지식적인 공부가 아니라 웨슬리가 말한 성경적인 기독교를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해온 신학공부가 웨슬리가 말한 성경적이었는지, 사역을 하면서 했던 설교들이 감리교 교리에 맞는 것이었는지에 대해 자아성찰을 하기 위함이다.웨슬리는 초기 메도디스트 신앙 공동체에 있어서 일반 평신도 훼원을 입회시킬 때 어떠한 교리 시험도 치르지 않았다. 유일한 입회 조건은 ‘죄로부터 구원 받고 다가올 진노로부터 구원받으려는 소원’을 가지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메도디스트 교회의 목사나 설교자들에게는 총회가 확정한 교리 시험에서 통과한 사람들만을 임명하였는데, 그 이유는 성서적인 기독교 신앙과 메도디스트 신앙을 보유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감리교회도 이러한 교리 시험과 하나님을 만난 확실한 체험과 같이 확실한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과 감리교 신앙을 가진 자들을 목회자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야지 웨슬리가 말한 성경적 기독교의 본질을 흐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초기 메도디스트 동동체가 그랬던 것처럼 이후에라도 성경적 기독과 신앙에 대해 의심이나 문제가 생길 때 출교시키는 것이 본질을 흐리지 않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메도디스트 교회가 교리와 의견을 구분하여 다루었다는 점에서 본질을 확실히 하되 비본질적인 부분에서는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다음은 메도디스트의 주요 교리이다. 감리교의 네 가지 핵심 교리는 ‘원죄’. ‘이신칭의’, ‘완전성화’ 그리고 ‘성령의 증거에 의한 구원의 확신’이다. 웨슬리는 이 네 가시의 교리를 말하면서, ‘모든 사람’의 교리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구원하실 사람들을 이미 정해두었다는 예정설에 부정하면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교리인 만인 구원론을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모든 사람이 원죄로 인래서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보았다. 모든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고 보았으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이 열려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구원의 핵심은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러한 믿음은 회개를 동반하며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되고, 이 순간에 성령의 증거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이 4가지의 교리를 배우면서 감리교가 그 어느 교파보다 성경적이며 균형있는 교리를 가진 교단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예정설이나 구원을 강조하지 않고 구원 받은 이후의 삶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균형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구원을 받는 방법에 있어서도 공덕을 쌓은 방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우리 감리교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헨리 나우웬 독후감나는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사역을 시작하여서 1년이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역을 하고 있다. 사역을 시작했을 때와 비교해서 나는 내가 더욱 성숙해지고 사역을 잘 하고 있다는 교만에 빠질뻔 하였으나 현대목회론을 수강하고 헨리 나우웬의 “예수님의 이름으로”를 읽고 그 교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은혜를 입었다. 저자인 헨리 나우웬 목사님이 말 하시듯,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그것이 나를 더욱 예수님 가까이 인도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잘못된 교만함을 회개하고 더욱더 예수님께 다가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부르시고 목회자로서 영적 리더로 세우고자 하신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의 이야기와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목자가 될 것을 명하는 세 가지의 질문을 통해 목회자이자 영적 리더가 될 자들에게 도전한다.마귀의 첫 번째 시험은 돌을 빵으로 바꾸라고 한 것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살아가야 한다”라고 마귀를 꾸짖으면서 시험을 이겨내신다. 말씀의 선포라는 자신의 사역을 고수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연결되는 베드로가 받은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이다.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면서 능력과 성적과 업적에 취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 그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무조건적인 첫째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질문인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받는 인정, 애정, 연민, 격려는 둘째 사랑으로 첫째 사랑의 깨어진 모습일 뿐이다. 현실에 적절하려는 욕망의 지배를 받으면 둘째 사랑을 쫓아가게 된다. 우리는 신비주의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첫째 사랑을 아는 지식 안에 거하여야 한다. 헨리 목사님은 묵상 기도 훈련을 통해서 긴급한 문제들을 쫓아다니는 우리의 마음을 점점 자신에 마음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두 번째 마귀의 시험은 예수에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 스타가 되라는 것이다. 나는 이 질문이 경쟁 사회에서 개인적인 영웅주의에 빠져 혼자 무언가를 이루려는 현시대의 목회자들에게 엄청난 도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누구인지 증명하시기보다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답하시면서 스턴트맨이 되는 것을 거부하셨다. 베드로에게 3번씩이나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공동체적이고 상호보완적인 목회의 사명을 베드로에게 주심을 의미하였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서 보내셨던 것처럼, 우리는 ‘함께’ 사역할 때 언제든지 우리들의 이름이 아닌 우리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믿음의 공동체의 지체들이 자신의 목자가 누구인지 모르거나 그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목양은 재빠르게 다른 사람에게 교묘히 힘을 행사하는 한 방법이 되어버린다고 헨리 목사님은 말씀하신다. 목회자는 깊은 묵상기도에 몰두하는 신비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기꺼이 고백하고 목양의 대상들에게 용서를 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지막으로 마귀는 “너에게 권능을 줄테니 힘을 가지고 지배하라”라는 것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데에 있어서 힘이나 권력을 사용하면 효율적이라는 합리화를 통해 십자군, 종교재판소, 인디언 노예들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힘을 가질 기회가 있었을 때 마귀에게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힘과 권력에 대한 유혹을 막기 힘든 이유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더 간편한 대체물로 힘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되는 것이 쉽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사람들을 힘으로 다스리는 것이 더 쉬우니 말이다. 세 번의 질문 이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목자가 되라고 명하신다. 그리고서는 “젊었을 때에는 원하는 곳으로 다녔으나, 늙으면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가고 싶은 길을 선택하여서 책임 질수 있는 것이 성숙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기꺼이 이끌려 갈 수 있는 능력’을 ‘성숙’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성숙을 위해서는 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신학적으로 성찰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일상의 희로애락과 현실들을 깊이 생각하면서 인간의 의식을 하나님의 부드러운 인도하심을 아는 데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종종 숨겨져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 힘들지만 신학적 성찰을 꾸준히 해야 한다.
감리교회사 기말과제 존 웨슬리의 생애수업을 듣고 존 웨슬리의 생애를 읽으면서 나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다니던 감리교회의 예배와 찬송, 또 신앙의 형태가 왜 이러한 형태로 발전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웨슬리는 18세기 영국에서 태어났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기원후 이천년 역사 가운데에 시궁창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영국 길거리에 널부러진 오물 때문이 아닌 그들의 도덕성의 결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30년 동안의 전쟁이 끝나고 무미건조한 지성주의와 영성주의 가운데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도덕성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교회는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정치에 물들어버린 상황이 웨슬리가 살아가던 시기였다.강한 청교도의 뿌리 가운데 태어난 웨슬리의 어머니는 매우 단호하며 독립심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웨슬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죽음의 위기를 넘겼는데 그중 우리에게 대표적으로 알려진 사건은 1709년에 일어났던 화재사건이다. 그날 밤의 화재는 건물을 모두 불태웠다. 웨슬리의 구출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선지자들의 말을 빌려 ‘불구덩이에서 건져 타다 남은 나무토막’이라는 별명은 매우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의 그의 어머니는 웨슬리의 생애가 하나님께 바쳐지는 거룩한 삶을 예언한 듯이 엄격하였지만 가혹하지는 않았던 훈련으로 웨슬리를 길러냈다고 한다. 웨슬리의 어린 시절을 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 났다.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은 날은 집에 돌아와서 걷지도 못할 정도로 발바닥을 맞은 기억이 난다. 수산나의 지도 방침은 훗날 웨슬리안의 복음주의 운동의 발전과 연결되었고 종교적인 교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이성이 믿음으로 인도하는 것인지, 믿음이 이해, 이성으로 이해되는 것인지, 웨슬리와 같은 고민에 빠졌다.웨슬리는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성결을 위해 노력했다, 열 살이 되기까지 성령의 씻음이었던 세례로 인해 죄를 짓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가 구원을 얻는 도구로 생각했던 것은 어떤 사람들처럼 나쁜 사람이 되지 않고, 종교에 대한 친밀함을 가지며, 성경을 읽고 교회에 가며 기도를 하는 신앙생활들이 그것이었다. 옥스퍼드의 대학에 입학하면서 5년간의 대학생활을 통해 공적, 사적으로 기도하며, 성경과 그 이외의 서적들, 특시 신약 성서에 대한 주석들을 읽으면서도 내적인 성결에 관한 개념은 발견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어머니와의 편지는 웨슬리의 회심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내가 신학교에 와서 부모님이 자주 생각 나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던 것같다. 이미 그들이 갔던 길이지만 내가 걸어가는 길은 같으면서도 다르기에 생각이 나면서도 개척해나가는 길에 대한 염려가 생긴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자신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 웨슬리가 생각한 것은 이때쯤이라고 생각이 된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생각뿐만 아니라 말과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웨슬리는 내적인 성결을 위해서 더욱 기도하였다.옥스퍼드의 연구원으로 있었던 그는 믿음으로 인도하는 회개에 적합할만한 영적 기초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웨슬리에게 영향을 미쳤던 (테일러와 아켐피스의)서적들은 자신에게 기초한 회개를 말하고 있었고 계속적으로 자신을 정죄하게 만들었다. 안수를 받았다는 차이는 있었을지라도 내적인 성결에 대한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었다. 도덕적으로 불완전함을 늘 염두에 두고 성결을 추구하는 자신의 규칙적인 생활 방식도 신뢰하지 못하였다. 영혼을 씻는 방볍은 일상적인 연습이 되었을지라도, 그것들은 더욱 많은 회개를 불러올 뿐 영혼을 깨끗게 할 수 없었다. 이후 링턴 대학의 연구원으로 선출되고 결혼할 때까지 이 신분을 유지해 왔다. 1726년에 학사학위를 받으면서 지성적으로, 학문적으로는 성숙해졌지만 심적이고 영적인 부분에서는 계속 허전함을 느꼈다. 웨슬리는 아버지의 교구에서 부목사로 있으면서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저 신비주의 신학의 자기 구원의 환상에 빠져서 잘못된 길을 계속 걸어갔다. 심지어는 스스로에 대해서 “나의 영혼에는 생명이 없었다. 나의 설교에는 열매가 없었다.”라고 말하였다. 비록 더욱 신비주의로 더욱 깊이 들어가면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 했지만, 신비주의 신학의 실험이 실패였음을 깨닫게 된다.오직 헬라어 신약 공부를 위해 조직되었던 ‘신성 클럽’은 웨슬리를 필두로 대학교의 학생들이 국교의 잘못된 신앙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였다. 신성 클럽의 회원들은 수년간 옥스퍼드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 작은 모임의 규칙쟁이들이 4년 후에 일어날 부흥 운동의 핵심이 되었다.1735년 조지아의 신탁 통치 이사회는 웨슬리를 파송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웨슬리는 그런 것보다도 인간이 하나님의 실존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르는 완전한 사랑을 체험하길 원했다. 하지만 웨슬리는 여전히도 자신의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 때문에 괴로워하였으며, 조지아로 가는 배에서 폭풍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라비안들에게 감동하며 그들의 신앙을 관찰하며 그들을 따라하기도 하였다. 웨슬리는 여전히 자신의 마음 속에 채워지지 않는 믿음의 결여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러 해 동안 자신을 괴롭혀왔던 생각을 조금이나마 지울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고독 가운데 거하는 것은 헛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올더스케이트에서의 회심을 경험하기 이전까지 웨슬리는 신비주의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2월 28일에 동생 찰스가 옥스퍼드에서 늑막염으로 죽어가고 있는 소식을 듣고 다시 옥스퍼드로 돌아와 동생이 많이 나아진 것과 피터 뷜러가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뷜러와 나누던 대화 중에 웨슬리는 거룩함을 어떠한 원인이 아닌 믿음의 열매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 죄가 사하여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화해된다는 것이 한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가지는 분명한 확신이라는 것을 납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그 믿음이 어떻게 순간적으로 한 사람에게 주어지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위대하고 선한 신학자들과의 만남 이후에야 웨슬리는 신비주의와 완전하게 결별할 수 있었다.마침네 1738년 5월24일, 하나님께서 웨슬리 자신을 찾으실 수 있도록 혼자있기를 원하면서도 어떠한 끌림에 의해 올더스게이트에 있는 저녁신도회 예배에 나아갔다. 그 예배에서 봉독자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에 있는 구절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들으면서 비로소 웨슬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을 통해 마음에 역사하는 변화에 관한 생각을 하기도 이전에 성령의 뜨거운 감동을 받으며,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몸소 느끼게 되었다. 구원하는 믿음이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공로, 부활의 능력을 아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후 웨슬리는 이셀스타인에서 유럽의 형제단의 모임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웨슬리는 그 누구도 지루해하지 않는 모임의 진행과 분명한 교회적 의식과 초대교회를 재현했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감동을 받았다. 올더스게이트 회심 이후의 웨슬리는 이전과는 같을 수 없게 되었다. 사랑과 자기 훈련을 강조하였던 신비주의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인도하는 참된 죄의 회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특별한 방법으로 웨슬리에게 응답하셨다.
-21세기 선교의 실체-1목차제1부 상황, 텍스트, 그리고 프리 텍스트I. 서론II. 제1장 상황: 현대 세계의 종교III. 제2장 텍스트: 성경이 말씀하는 것IV. 제3장 프리 텍스트: 신학과 개성“기독교와 타종교 선교”I. 서론“다른 종교 전통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 기독교는 어떠한 자원을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인간적인 견해를 초월하는 근거에 의한 답변을 준비해야 한다.먼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기정 사실” 중 하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라는 “상황”이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같은 시기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상황이 중요한 이유는 오늘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들이 지닌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 상황이기 때문이다.기독교에서 우리가 처한 상황이 제기하는 문제에 답변할 수 있는 최우선의 참고 자료는 성경이다.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텍스트이지만 정확하게 답변을 제시해주는 답안지가 아니다.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 근본적인 문제들과는 다른 문제, 당시 기독교인들이 직면했던 고대 그리스의 오시리스 신비 종교들, 로마의 전쟁신들을 직면했을 때 기록된 것이다.하지만 성경이 오늘날의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성경이 기독교인의 책임에 대한 해답을 담은 최우선적 지위를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지해야 할 대상이고 최종지침이다. 우리는 지혜를 얻기 위해 성경에 접근하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세운 이론과 전략이 텍스트가 말하는 것과 부딪히는지를 점검하기 위해 성경에 접근한다.이러한 이론과 전략의 개발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가 제시하는 이슈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달려있다. 이러한 이론과 전략은 우리의 신학이 지향하는 전제들이 무엇인지, 즉 오늘날의 프리 텍스트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 텍스트를 읽는데 동원하는 가치들과 사고 볼 때, 세계화와 종교의 자유는 모든 종교의 영향력을 최소화시키는 일종의 종교에 대한 소극적 관용을 조성하기도 했다. 종교 시장에서 어떤 종교가 나에게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그 종교의 활동을 살펴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그 종교가 주장하는 진리의 가치뿐 아니라 개인의 영적 필요와 사회의 영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해당 종교의 능력에 기초해서 평가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람들은 어떤 종교가 되었든자 그들의 개인의 필요를 충족시킬 종교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 종교는 우리를 지배하고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그 종교가 가진 활용성에 따라서 선택 여부가 결정되는 소비품이 되고 말았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하나님의 손길을 대체해버린 것이다.2) 선교학적 상황들세계 종교들에 관해서 종교 사상에 대한 시장식 자유가 제공하는 선교학적 적용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1) 우리는 시장의 은유가 지배적이라는 것을 인지한 후 그런 현실에 굴하지 않겠다는 듯 결연히 행동하기 보다는 선교의 유익을 위해 그 현상을 선용할 줄 알아야 한다. 선진국 출신 기독교 선교사들이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음식이나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때, 이러한 선교활동이 돈으로 개종자로 구매하려는 시도에 불과한다는 비난을 받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비난에 대해서, 선교사들의 활동을 경제주의적 관점으로만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비난하는 바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러한 활동을 멈추는 것이 답이 아니라 오히려 선교사들은 자신이 품고 있는 동기의 순수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선교사들의 활동은 단순히 사회복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취약한 사람들에게 연민과 자비를 보여주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2) 선교 사역자들은, 복음을 확산시키는 사역에 도움을 얻고자 하는 의도에서 정치 권력이나 경제 권력과 같은 문화 매개체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이 세상의 정치, 경제 권력은 전적으로 세속화되었을 뿐 아니라 반종교적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특별히 권력은 종교 다. 셋째, 모두를 만족시키는 분쟁 조정이 발생하기도 한다. 종교 간 경쟁이 이 패턴으로 발생하면 특정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상의 것을 성취하게 된다.3) 적졀한 선교에 관한 경쟁우리가 종교 시장의 분배를 놓고 경쟁이 점증하는 문화에서 살아간다. 역사적으로 과거에 진행된 과도한 노력으로 인해 그런 시도를 불편해하는 일부 종교집단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종교 집단들이 더 공격적인 방식으로 자기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 선전도구들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행동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는가? 두가지 측면으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로 시장을 벗어날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은 마치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종교 경쟁에 참여할 것인가? 두가지의 원리가 있다. 첫째, 신약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기독교의 사랑은 다른 이들에 대한 강력하고 무조건 적인 사랑을 요구한다. 사랑은 우리가 경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랑은 또한 기독교인의 경쟁은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적 경쟁이 의미하는 것은 “열정을 다해 게임에 임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게임에서 이기고 지는 것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경쟁은 타종교에 속한 사람들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타종교 신앙인들 가운데 참여한다는 것은 많은 면에서 기독교인들에게 변화를 일으킨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포하는 본질과 하나님의 피조세계의 안녕에 대한 우리의 절대적 헌신을 보여줌으로 세상의 모든 이웃을 포용해야 한다.3. 협력과 경쟁이 새로운 목표는 기독교 선교와 전도에 관심을 가진 대다수의 사람들을 불쾌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 첫째로 이 설명은 마치 우리가 개종에 대한 개념을 완전 포기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둘째로 우리가 앞서 제시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경쟁이 지금도 진행 중인 선교와구절들을 우리가 직면한 구체적 질문들과 연관시켜야 한다.논지 2: 각 주제의 한가지 측면을 질문을 제기한 상황에 적절한 것으로 선택하는 것은 나머지 주제의 질문들과 텍스트와 원리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논지3: 한가지 측면을 선택해서 해석학적 초점으로 삼고 연구하거나 사용하려 할 때, 다른 측면들이 주는 눈리와 의미를 잊게될 수 있다.논지4: 매 순간 이 세가지 영역을 통해 얻는 기여가 발생한다.논지 5: 성경 말씀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성령, 즉 그리스도의 마음을 덧입는 것을 요구한다.3. 질문영역질문은 문화 조건의 변동에 따라 바뀐다.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대표적 질문 목록은 다음과 같다.①진리: 타종교에 진리가 있는가?②구원: 타종교 신자들도 구원 받을 수 있는가?③협력: 우리가 타종교에 속한 사람들과 어느 정도까지 협력해야 하는가?④대화: 우리는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대화를 해야 하는가? 아니면그들을 전도해야 하는가?⑤훈련행위: 타종교에서 유래한 영적 훈련행위(요가, 명상)들이 기독교인들에게도 작동하는가?⑥하나님(신): 기독교의 하나님이 타종교의 신이기도 하신가?⑦종교: 타종교들은 무엇으로부터 생겼는가?4. 해석학적 주제의 영역우리가 답변하고자 하는 어떤 특정 질문을 선택하는 것으로 성경 자료의 범위를 제한한다 하더라도, 우리 중 대다수는 여전히 더 큰 질문,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타종교를 추정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여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포괄하는 방식을 찾고자 열망한다. 성경에는 이에 대해서 많은 텍스트들을 주었지만 무제한적으로 많은 해석학적 주제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 틀린 주장일 것이다. 다음 여뎗가지 주제는 책이 주장하는 해석학적 주제들이다.1. 지상명령: 복음을 전파하라.2. 대명령: 네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라3. 황금률: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해주길 바라는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라4. 위대한 모델: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5. 위대한 변혁: 하나님 나라6. 종말론: 영적 전쟁7. 인간의 안녕: 하나님께서는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2:11)동방 정교회는 토착화라는 말이 생기기 이전부터 그 개념을 포용하였는데 이것은 사도행전 2:9~11의 말씀이 동방 정교회 선교가 중시하는 성구이기 떄문이다. 동방 정교회는 선교를 함에 있어서 토착어, 그들이 복음을 전하고 하는 대상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들은 성경을 토착어로 번역하였고, 각종 예식을 토착어로 번역하였다. 또한 직접적으로 교회는 토착 지도자들이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목적은 지역민들이 갖는 독특한 특성들을 구현시킨 민족 교회의 성립이었다”라는 말과 같이 실제로 동방 정교회의 대부분의 선교 사역은 민족 교회를 세우기 위해 집행되는 것으로 길거리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만큼 예식을 중요시하고, 복음이 전달되지 않은 타 지역의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3) 성공회주의: 모든 교인들이 서로 화목하며 합심하여 세상에 복음을 전함으로써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소서(공동기도서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 중)성공회의 선교 목적은 세상과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변혁시키는 것이다. 이 번혁에 개인의 영혼이 포함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변혁 대상에는 정치 과정, 경제적 기능, 예술 그리고 과학 등과 같은 사회 구조도 포함된다. 성공회 선교사들은 복음을 가지고 오직 “훔치고 죽이기 위해 들어온 강도”처럼 세상에 침투하지 않았다. 그들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하려고(요10:10)” 선교지에 들어갔다. 성공회는 문화적으로 적절한 다양한 신학의 포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토착화의 분야에서 이점을 누렸다. 지역교회의 공식위원회와 자발적으로 구성된 선교회를 통해 말씀을 확산하고자 하였다.4) 주류 교회: 아무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인해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를 포함한 주류 교회가 탄생했다. 18세기에는 존 웨슬리가 이끈 후기 종교 개혁의 결과로 감리교회가 탄생했다. 루터교, 개다.
신을 옹호하다무신론자의 입장의 대표적인 인물은 리쳐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를 꼽을 수 있겠다. 그들은 나름의 과학적인,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근거를 통해 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무신론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이 책의 작가인 테리 이글턴의 스탠스는 그들의 입장에서 인정할 것은 인정을 한다고 하면서 그 주장에 대하여 근본적인 오류가 무엇인지를 꼬집고 있다. 무신론자들의 주장이 종교적으로 얼마나 무지하고 몰이해적인지를 밝혀내는 것이 초점이며 나아가서 기독교 신학이 어떤 것인지를 과학, 철학, 정치를 통해서 설명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이글턴은 먼저 리쳐드 도킨스의 주장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도킨스는 진화론을 바탕으로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반박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도킨스에 따르면 모든 존재의 창조자인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신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은 증명할 수 없는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가? 창조론은 진화론에 비해 우주와 생명체의 형성에 대한 뒷받침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에 대해 저자는 “도킨스는 기독교가 과학과 대립되는 우주관을 제시한다고 잘못 생각한다.”(17p)고 말한다. 범주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인데, 기독교는 형성에 대해서 설명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은 우주의 형성에 대해 알아가는 것에 관심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형성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이 범주 오류에 대해서 히친스 또한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히친스는 이성의 힘으로 종교를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종교를 역사로 끌어내려 허구의 이야기라고 하면서 종교는 이성을 능룍한다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믿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비합이적이고 편협한 믿음의 사례라고 이글턴은 반박하고 있다. 무신론자의 주장의 근본을 꼬집으면서 역사, 철학, 과학적으로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을 헛발질로 만드는 것이다. 과학과 기독교 이회에도 자유와 기독교, 기독교의 부패, 자본주의와 기독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이글턴은 도킨스와 히친스의 자유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라고 말한다.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기독교의 중심사상인 ‘사랑’이라는 개념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해되기 때문에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자본주의 문화를 정당화하려는 이념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디치킨스(도킨스와 히친스를 줄여 부르는 말)는 이러한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단점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 본질에서 무신론적이다. 그 가치관과 신조들은 신을 부정하고 한결같이 나쁜방향으로 무신론적인데 반해 마르크스와 니체는 대체로 좋은 방향으로 무신론적이다.”(58p)라고 말하며 이글천은 부정적 방향으로의 무신론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힐난하고 좋은 방향으로 무신론적이라는 마르크스 주의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다(사실 제목에 이끌려서 이 책을 선택했는데 읽다보니 작가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당황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부분 공산주의자들인데 무신론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라는 것이 특이했다) 디치킨스는 자신들이 믿고자 하는 것만 믿으며 해명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은 인식 가능한 대상이 아니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증명의 영역이 아니라 신뢰의 영역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실제에 대해서 찾는다는 것은 오히려 디치킨스가 믿음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보이게 하는 사유인 것이다.기독교 내에서 믿음은 사랑의 한 형태로 분류된다. 기독교인들에게 부활이란 예수의 부활 장면을 직접 찍을 수 있는 그런 류의 현실은 아니지만 부활은 현실적인 사건이라고 믿는다. 한편 도킨스는 과학이 종교의 결정적 문제점인 신앙에서 자유롭다고 설파한다. 그러나 과학과 종교가 대비된다고 보는 것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과학 또한 상상력을 기반하고 있으며 불확실하고 변칙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믿음에 기반하기도 한다. 과학에 대해서 스스로는 믿음과 관련이 없다고 무신론자들은 말하지만, 이글턴은 과학에 대해 유보적이긴 해도 그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않고 그들 또한 종교처럼 올바른 이해를 하기 위해 애쓰기 때문에 믿음과 관계가 있다고 이야기한다.요즈음 세상은 믿음이 범람하고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불가지론적인 후기자본주의 문명이 이러한 상황이 초래되는 것에 일조했다. 불가지론이란 몇몇 명제의 진위여부를 알 수 없다고 보는 철학적 관점 또는 사물의 본질은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관점이다. 이성이 지배적이고 도구가 되어서 합리적인 믿음의 건설을 저해한다. 믿음과 이성이 적절히 만나야 하는데 그렇기 위해서는 이성이 무언가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현대 사회는 물질적 이익이나 정치적 지배라는 기반을 가지고 있어 자본이 신앙주의나 합리주의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대규모의 전 지구적 인구 이동을 촉진했고, 그로 인해 서구에서 이른바 다문화주의가 탄생했다. 여기에도 모순이 하나 있는데. 다름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세계적인 규모로 번창할수록 국민에 대한 국가의 장악력을 위협하게 된다는 점이다.”(p.194) 즉 자본주의의 발전은 국민의 충성을 이끌어내지 못하게 해 권력의 기반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하지만 이런 자본주의적 권력도 다문화 속에서 큰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공통의 문화’의 필요성과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변화를 꾀하여야 하는지는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이야기이다. 이글턴은 샐러드볼 문화 보다는 용광로 문화를 적극 지지한다. 샐러드볼 문화는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샐러드볼 형식으로 공통의 문화를 만든다고 하여도 이는 결국 이방인의 문화를 올곧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풍속을 해치고 조화를 위협할 부분을 빼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글턴은 이를 진정한 의미의 ‘공통의 문화’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모두가 동등한 지위를 갖고 그대로 받아들인 문화들을 모두 용광로에 넣고 사회를 아우를 수 있는 어떤 문화가 나올지 기대하며 지켜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변화의 길을 모색하며 자기 비우기와 근본적인 개조를 외친다. 그 길을 찾는데 마르크스주의가 힌트가 될 것이라고도 이야기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문화와 문명 모두에 관한 것인데 쇠퇴하며 출구를 잃은 마르크스주의의 급진적인 이데올로기가 신학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