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조 개관과 현 시대에의 적용Ⅰ. 들어가는 말1643년부터 1649년간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서 개최된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가 만든 4개의 표준문서 즉,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예배모범』, 『장로회 정치(government)』는 교회사 전반을 통해 교회가 만들어 낸 가장 귀한 신앙의 표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앞의 두 문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은 논란의 여지없이 가장 완벽한 신조와 교리교육서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 수많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이를 그대로 수용하거나 일부 수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웨스트민스터 표준서들이 완벽하다거나 더 나은 신앙의 표준서들이 나타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이 역사적 배경과 저자의 배경 속에서 영감되었듯이 이들 웨스트민스터 표준들도 역사적, 즉 시공간적 환경 속에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표준서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총회의 개최와 과정에 대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우선 되어야 한다.한국교회의 8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장로교는 합동측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교리로 채택하고 있으며 통합측과 대신측에서는 헌법 및 교리로 채택하고 있다. 회중교회 침례교 등은 교리 일부를 수정하여 채택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성경을 제외하고 개혁교회의 가장 권위있는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중세말부터 시작된 종교 개혁의 정점이자 귀결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의 교인들은 교회를 처음 다니면서부터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대해 자주 듣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장로회는 이들 표준에 대한 교육과 이해가 부족하며, 이 표준을 만든 웨스트민스터 총회나 이 표준들이 만들어진 과정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어떠한 상황에서 소집되었고, 표준서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통해 그 의미와 한계를 고찰하고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의 의의와 구할 필요도 없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다. 예배 부분과 신조 문제에 대한 논의는 거의 대립이 없었다. 『예배모범』은 성경 낭독, 기도, 설교로 구성되는 공 예배를 강조하였고, 세례식, 성찬식, 결혼, 장례, 금식일, 감사일 등을 포함하고 있다. 많은 청교도 목회자들과 스코틀랜드 특사들의 활약으로 신앙고백서도 별 무리 없이 작성되었다. 요리문답서는 두 권 즉, 성인을 위한 『대요리문답』과 어린이를 위한 『소요리문답』으로 나누어 만들었다. 『소요리문답』은 『대요리문답』과는 달리 신앙고백서의 순서를 따르지 않았는데, 이는 스코틀랜드 특사들이 귀국 준비로 『소요리문답』의 초안과정에 참여하지 않았음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5년 반 이상의 기간 동안 총 1163회의 회의를 가진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1649년 2월 22일의 회의를 끝으로 폐회하였다. 오늘날 거의 모든 장로교회들이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만들어 낸 결과들을 헌법으로 채택하고 있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기존의 모든 신앙고백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교 신앙의 표준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총회의 유산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희생과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 장로회 표준들이 하나씩 만들어 질 때마다 스코틀랜드 총회는 잉글랜드와의 언약에 따라 이들을 스코틀랜드 교회의 표준으로 수용하였다. 잉글랜드 교회를 위해 잉글랜드 땅에서 잉글랜드 목사들의 결정으로 작성된 문서들을 잉글랜드 교회가 아니라 스코틀랜드 교회가 수용했다. 역사의 아이러니이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신 신비였다. 1660년 잉글랜드 교회는 왕정복고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폐기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교회는 이들을 수용하였고 이는 복음과 함께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한국 교회가 이러한 하나님의 신비 가운데 일부가 된 것은 복이 아닐 수 없다.Ⅲ. 본론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의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외적으로는 내전과 내적으로는 심각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신학자들이 함께 이룬 뛰어난 작품을nhn?docId=2374914&ref=y" 고백서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전체적으로는 Hyperlink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377849&ref=y" 칼빈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미국장로교는 20장과 23장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며 20장과 31장을 개정하기로 하고 1788년에 개정안을 가결한다. 이후 1842년에 미국 남장로교회가 34장 〈 Hyperlink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375748&ref=y" 성령에 관하여〉과 35장〈 Hyperlink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377028&ref=y" 하나님의 사랑의 Hyperlink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375496&ref=y" 복음과 Hyperlink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375709&ref=y" 선교에 관하여〉을 추가했고, 1903년에 미국 북장로 교회도 이를 수용하였다. 이러한 수정과정은 대체로 영국에서 작성되었을때 미진했던 정교분리의 원칙을 반영한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고백서 20장, 23장과 31장의 개정, 그리고 새롭게 첨부된 34장과 35장을 처음부터 채택하였다.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서의의와 목적흔히 ‘교리문답’으로 번역하는 카테키즘(Catechism)은 ‘신앙교육’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 교회는 교회 지체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잘 가르치고 그들로 배우게 하기 위해 여러 교육방법을 이용했는데 이 모두를 카테키즘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카테키즘이 교육적으로 효과가 뛰어난 문답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카테키즘을 자연스럽게 교리문답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여러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을 작성했다. 기독교가, 신자가 ‘누구를 믿으며(대상)’, ‘무엇을 믿는지(내용)’를 여러 이유로 유일한 길을 완전하게 전개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려는 의도로 기록한 점도 성경의 권위를 뒷받침한다(고1,5). 성경은 우리의 구원과 믿음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명시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성경의 충분성이다. 하나님께서 구약과 신약 성경 66권을 직접 영감하시고(고1,8) 믿음과 생활의 법칙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고1,2). 즉 성경은 신행(信行)의 유일한 법칙(고1,4,6,7)이다. 그리고 성경은 종교의 모든 논쟁에서 최종적인 법정이다(고1,8). 이런 고백의 배경에는 회의 대표들이 그 당시와 이전에 겪었던 수많은 논쟁과 박해가 있다. 이들은 성경을 유일한 법칙으로 삼아 성경대로 살기 원했으며 성경 번역을 주장함으로 핍박을 받았으나, 이제는 공적으로 이 회의에 참석하여 담대하게 이 고백서를 작성하고 있다.성경은 믿음과 삶의 법칙이다(고1,2). 두 문답서는 이런 고백을 따라 믿음의 법칙(대6–90; 소4–38)과 생활의 법칙(대91–196; 소39–107)을 차례로 취급한다. 고백서는 이 차례를 엄격하게 따르지는 않지만 믿음의 법칙은 고백서 1–18장, 25–33장에서, 그리고 삶의 법칙은 19–24장에서 부분적으로만 다룬다. 고백서는 중간에 생활의 법칙 일부만을 다룸으로써 믿음의 법칙을 양분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종교개혁에서 나온 대부분의 신조들은 믿음의 법칙 부분에서 사도신경을, 생활의 법칙 부분에서는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제시하고 해설한다. 성경은 믿음과 삶의 법칙이다(고1,2). 두 문답서는 이런 고백을 따라 믿음의 법칙(대6–90; 소4–38)과 생활의 법칙 (대91–196; 소39–107)을 차례로 취급한다. 고백서는 이 차례를 엄격하게 따르지는 않지만 믿음의 법칙은 고백서 1–18장, 25–33장에서, 그리고 삶의 법칙은 19–24장에서 부분적으로만 다룬다. 고백서는 중간에 생활의 법칙 일부만을 다룸으로써 믿음의 법칙을 양분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종교개혁에서 나온 대부분의 신조들은 믿음의 법칙 부분에서 가지로 구분을 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KJV의 입장을 분명히 지지한다. (대 29).한편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십계명 및 주기도문의 해설은 탁월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중 주기도문과 관련하여 개역개정의 번역이 잘 못된 것이 눈에 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에서 대부분의 역본들은 ‘debts’라고 해서 ‘잘못’이나 ‘빚’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반해 개역개정과 NLT 등이 죄(sins)라고 번역을 하고 있다. 신조는 사죄를 간구하는 기도의 근거가 우리가 행하는 사죄가 아님을 아주 정확하게 밝힌다. 우리는 우리가 사함을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임을 고백해야 한다. 본 기원의 해설에서 원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에 빚진 우리의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순종으로 인하여 죄와 죄책과 그 형벌에서 해방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중보에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매일의 범죄를 사하시고 그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평강과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도록 간구해야 한다. 이렇게 사함을 받은 자가 이웃의 잘못을 사할 수 있다. 우리 신조의 해설은 아주 정당하다. 우리의 믿음도 사죄의 조건이나 근거가 아니듯이,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가 용서받을 근거가 아니다.(대 194, 소 105)Ⅳ.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신학적 의의 및 현실에의 적용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사실 종교전쟁이며 신앙의 전쟁이었던 내전 중에 소집되어 시시각각 닥쳐오는 위험 속에서 신조를 작성하였다. 총회는 세개의 신조를 작성하여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하나의 종교와 신앙을 구현하려고 하였다. 이 신조들에는 종교개혁의 5대 표어 중에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뚜렷한 자세가 아주 강력하게 스며 있으며 순간순간마다 묻어 나온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인간의 자유가 손상되지는 않는다. 종교개혁의 5대 표어를 따라 하나님의 작정을 고백해도 우리가 숙명론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의 속량을 받S1
성경해석의 실제 – 모세오경의 장르별 해석과 모세오경 리뷰1. 족보 (창세기 10장 1~32: 노아의 자손)1) 창세기 10장의 내용창세기 10장에서 언급하는 족보는 대홍수 이후 노아의 아들인 셈과 함과 야벳의 자손이 온 세계에 퍼지는 내용을 담고 있다.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이 홍수 후에 그들의 아들을 낳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축복 그대로 이들은 온 세상에 거하게 되었다. 본 장은 홍수로 말미암아 멸종 위기에 놓였던 인류가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다시 급속 확산된 것과 그들이 세계 곳곳에 흩어지게 된 원인이 밝혀져 있다.2) 9장 및 11장과의 관계9장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무지개 언약을 맺는 장면과 노아가 포도주 사건으로 셈과 야벳을 축복하고 함(가나안)을 저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대홍수 이후에 노아의 후손들이 전 세계에 퍼지게 되는데 축복을 받은 셈과 야벳의 후손들과 함의 잘못으로 저주를 받은 가나안의 후손들이 10장에서 그 흩어져 사는 지역이 소개된다. 또한 다음장인 11장에서는 바벨탑사건과 셈의 족보 및 데라의 족보가 나온다. 타락 이후에 죄성의 유전으로 인간은 언제나 교만하여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게 된다. 이 때까지는 아직 언어가 갈라지지 않아서 높은 탑을 쌓아 이름을 날리고 흩어짐을 면하려고 바벨탑을 쌓게 되나 바벨탑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케 하여 탑 건립을 중단시키고 온 세상으로 이들을 흩으신다. 또한 셈과 데라의 족보를 통해 아브라함의 계보를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창세기 전체에서 10장의 역할은 대홍수 이후에 살아남은 노아의 후손이 전 세계로 흩어져 살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3) 표현상의 특이사항10장에서 함의 후예인 니므롯에 대한 언급과 바벨탑이 건축되는 지역인 바벨을 언급한 뒤 다음 장에서 바벨탑 이야기가 나오는 점이 특이하며 셈의 자손을 열거하면서 10장 25절 에서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뜻: 나눔 – 원형 פָָלַג의 니팔형 뜻: 나. 발람의 이야기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고 이방 족속을 저주하고 멸하는 과정에서의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여야 한다.3) 발람이야기민수기 22장 2절~24장에 이르는 발람의 이야기 중에서 22장 2장에서 heading에 해당하는 22장 2절은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으므로” 이 구절에서 두 개의 동사, ‘보다’ 와 ‘행하다’ 이 두 단어는 각기 그 이후의 이야기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를 제시하고 있는 데 ‘행하다’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을 제외한 이방 민족을 저주하고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일들을 행하시게 되고,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그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보게’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이야기에서 축복하고 저주 하는 것과 관계된 ‘행하다’ 계통의 동사는 40여회 사용되었으며 ‘보다’ 계통의 동사는 28회 사용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약속하신 대로 실천하는 신실하신 분’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이야기의 플롯은 발람과 발락과의 갈등 및 해소를 중심으로 보아서는 안되고 하나님과 발람과의 갈등 및 해소를 기준으로 살펴봐야 한다. 즉, 발단은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으로 등장인물과 배경 등이 나오는 부분이므로 22:2~6절까지로 잡고 갈등부분은 발람이 하나님의 말을 순종하는지 거역하는지에 대해서부터 생각해야 하므로 발람이 우유부단한 상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가라’는 허락을 받는 부분인 22:7~20까지이며 하나님께서 가라고 허락한 뒤 사자를 보내어 나귀로 하여금 가지 못하게 하면서 발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행하도록 사전 정지작업을 하는 부분을 절정으로 잡아서 22:13~35까지이다. 대단원은 이후 22:36부터 24:25까지로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충실하게 예언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예언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인도하에 흥왕하고 번성하게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보다 더 조명하고 있다. 또한 제 5계명에서 신명기의 10계명은 복을 누리리라를 추가하였다. 제 10계명에서는 신명기가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라는 말을 앞에 두어 강조하고 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 둘 다 모세의 작품으로 인정한다면 양자간의 차이는 이제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가나안의 문란한 이방 문화를 극복 하여야 하는 것을 앞두고 일부 수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4. 내러티브(사건 기술) (레위기 24장 10절~23절)1) 내러티브 본문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의 어머니가 이스라엘 여인이요 그의 아버지 는 애굽 사람인 어떤 사람이 나가서 한 이스라엘 사람과 진영 중에서 싸우다가~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 이든지 본토인 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그 저주한 자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쳤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 에게 명령 하신 대로 행하였더라.2) 내러티브의 전후장(23장, 25장)과의 관련 분석23장은 절기에 관한 규정이고 25장은 안식년에 관한 규례이다. 절기와 안식년은 다른 규례 보다 그 비중이 큰 중요한 사안들이고 그 사이에 위치한 24장은 등잔불 및 진설병 규정과 복수법 사이에 나레이션으로 애굽인 아비와 슬로밋이라는 유대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다가 징계를 받아 죽은 사실이 언급되었다. 이는 여호와의 성호를 모독, 혹은 저주하는 일이 얼마나 큰 신성 모독죄인가를 보여 주고 그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본 내러티브는 범위를 정하는 것이 까다로 운데 일단 24장 10절에서 시작하여 16절에서 일단락된 것처럼 보이지만 저주한 자를 죽이는 결과가 보복법의 끝인 23절에 나옴으로써 결국 23절까지를 같은 같은 나레이션으로 보아야 한다. 특별히 등잔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 불이 꺼진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거부하는 행위이므로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과 진설병은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여섯 개씩 두 줄로 진설해서 이 완악하게 하신 바로가 변심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뒤 쫒다가 홍해에 수장되는 내용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를 쳐다보며 공포와 절망에 빠졌으나 곧이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16장은 만나와 메추라기의 이야기로 백성들의 불평과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나타낸다. 따라서 15장은 우리의 삶이 기쁨과 함께 고난이 있으며 찬송과 함께 불평이 공존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극복하여야 하고 불평보다는 찬양을 통해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 모세오경 리뷰모세오경 본문을 다섯가지 요소(족보, 시가, 이야기, 법, 내러티브)로 분류해서 각기 그 의미를 파악해보았다. 특별히 술취한 노아의 사건 과 관련해서는 노아 행동의 잘잘못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전적으로 나레이터의 언급에 주목하여야 할 것 같다. '당대의 의인' 노아가 홍수이후의 회복된 땅에서 포도원을 경작하여 풍성한 수확으로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고 자고 있었는데 내러티브에 의거,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포도주는 '야인 [yayin] '으로 포도즙이 아니라 '발효된 술'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한데, 이 경우에 신구약 전체에서 술에 관한 부정적인 언급과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할지 과제로 남는다. 또한 노아의 아들들이 노아의 하체를 보았느냐 안보았느냐의 문제를 놓고 함의 후손들이 처참할 정도의 인종적인 저주와 차별을 받는 문제와 관련해서 어떻게 신학적으로 해석하여야 할지 궁금하다. 그런데 성서는 술에 대하여 두 가지로 해석을 하고 있다. 일단 구약 안에서만 살펴본다면 술은 대부분 '포도주'를 의미한다. 이 포도주를 많이 마셔야 취하는데, 구약 시대에는 포도주를 취할 만큼 많이 저장해 놓고 마시는 사람들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왕이나 돈과 권력이 있는 상위층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풍요로운 사람이나, 잘 사는 상류층 사람들이나 포도주를 마시고 취할 수 있었다. 즉, 구약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는 행동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문맥은 뜻한다고 보아야 하는데 이 명칭으로 판단해보면 출애굽기의 주제를 '시내산 에서의 언약'이란 측면보다도 12지파로 대변되는 '이스라엘 백성의 형성'이라는 측면을 더 중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언약적인 중점은 전적으로 레위기로 넘겨야 할 것 같다. 쉐모트의 단수형인 쉠(שֵׁם)이 모세(משׁ)의 이름을 거꾸로 해놓아서 언어적인 유희로 볼 수 있는데, 모세가 출애굽기의 저자가 맞다면 출애굽기의 주인공이 모세라고 보았을 때 재미있는 설명이 되는 것 같다. 출애굽기의 원어 명칭과 어떤 관련이 더 있을지 묵상해 볼 일이다.레위기는 제사와 음식에 대한 설명과 함께 거룩, 정결, 부정 등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정리하였을 때 지루하고 따분한 책이었지만 성경공부를 하면서 그 언약을 중심으로 구약성경 전체가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서 다시 보게 되었고 이번 강의를 통해 레위기가 죄인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가? 즉,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기'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레위기의 원어가 봐이크라(וַיִּקְרָא)로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로 번역되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부르셨는데 (가까이 오라고) 가까이 오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설명해 놓으신 책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히브리서는 레위기의 눈으로 읽어야 하고 레위기는 반드시 히브리서 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이들이 다시 유대교로 되돌아 가려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가 구약의 제사장 보다 훨씬 우월한 큰 대제사장임을 강조하여 유대교로 다시 돌아 가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기술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에 특별히 히브리서와 같이 읽어 보았는데 피상적인 개념외에 더 깊은 뜻은 아직 잘 모르겠다. 혹시 두 책을 묵상하는 좋은 방법을 알고 계시는 믿음의 동료들이 있으면 함께 나눔을 원합니다. 이번 강의를 통해서 신약성경에서 얘기하는 '영화'의 단계에 가기위해 거쳐야 하는 '성화'와 관련 '거룩'을 '성화'로 이해한다면 오히려 구약 백성들이 더 쉽게 MAT1
「창조, 타락, 구속 (알버트 월터스, 마이클 고헌 저/ 양성만, 홍병룡 역)」요약알버스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은 출간된지 30여년이 지나도록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개혁주의적 대안과 그 성경적 기초를 제시하여 많은 그리스도인의 세계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구조와 방향’ 이란 화두를 꺼내면서 구조란 “창조자에 의해 의도된 방향”을 얘기하는데 다시 말해 창조자의 원래 창조 의도에 더 가깝게 가도록, 구속 받고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하는 관점을 그는 자신의 스승인 에반 루너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구조를 다른 말로 하면 창조의 원구조라고도 할 수 있고 방향은 왜곡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통틀어 가르치는 말로 이해해도 된다고 한다. 이 책은 포괄적인 문화와 정통 기독교의 기본요소를 결합시켜 세계를 봐야 할 필요가 커져 가면서 일종의 영적 공백 상태에 있던 세상에 개혁주의라는 성경적 세계관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창조의 범위, 타락이 미친 영향,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란 창조의 모든 부분과 전 문화 영역을 그리스도안에서 타락 이전의 상태로 회복한다는 점을 설명한다. 이 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제 1장 : 세계관이란 무엇인가저자는 제 1장에서 성경적 세계관의 내용을 설명하고 우리가 성경에 순종하고자 할 때 그 내용이 우리 생활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설명한다. 특히 개혁주의적 세계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뿐만 아니라 그 특징을 세밀하게 살펴본다. 올바른 세계관이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밝히고 성경이 그 세계관 형성에 중요한 준거틀이 된다는 점을 논증한다. 또한 신학과 철학이 세계관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분석한다.세계관은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이다. ‘사물들’ 이란 말은 우리 신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지칭할 수 있으며 세계관은 개인의 신념의 문제이표현해 주기 때문에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성경은 일반 계시와 달리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자연의 책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명쾌함이 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해 그 작업을 실행해 주셨지만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시행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하나님의 법의 지배는 자연계에서는 직접적이지만 문화와 사회의 영역에서는 매개적이다. 자연법칙은 소위 제 2창조에서 하나님이 직접 발전시킨 땅을 지배하고, 규범은 제 3창조라고 부를 수 있는 곳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발전시키시는 땅을 지배한다. 여덟번에 걸친 “…이 있으라”라는 창조 명령이 동물과 식물과 광물에 부과된 창조의 법을 대표한다면, 4중적 ‘문화명령’은 사회와 문화에 부과된 창조의 법을 대표한다. 창세기 2장은 “이것은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라는 말로 시작된다. 여기서 톨레도트(תּוֹלֵדוֹת)는 복수형으로 쓰여 내력, 족보, 역사 등의 뜻으로 “…에서부터 발생하는 역사적 발전상’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란, 자연적 차원이든 인간적 차원이든 창조의 모체 안에 숨겨져 있는 가능성들을 대대로 드러내고 개발하는 과정이다. 창조 세계란 한번 만들어진 다음에 고스란히 그냥 존재 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는 성장하고 개발되며 이 성장과 개발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 속에 함축된 발전 가능성들을 실현하는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창조의 법은 새롭고 놀라운 방식으로 구현 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반면 우리가 사람의 역사 즉 문화와 사회의 개발 과정이 창조와 창조의 발전의 필수적인 부분임을 안다면, 범죄로 인한 탈선에도 불구하고 태초부터 그것들이 하나님의 우주를 향한 계획안에 있었고 우리가 전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청사진의 일부 라는 것을 안다면 정치나 영화, 컴퓨터 공학, 사업 경영, 경제, 스카이 다이빙과 같은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손수 만드신 작품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새 조에다 어떤 것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손상되지 않은 창조 세계의 선한 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을 의미하며 이 회복은 창조세계의 어떤 영역에 국한되기보다 창조 세계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회복 곧 구원이 새로운 무엇을 가져 온다기 보다 창조 세계의 삶에 이전에 없었던 영적인 혹은 초자연적인 차원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이전부터 계속 존재하던 것에 새로운 생명과 생동감을 불어 넣는 것이다. 은혜는 자연을 회복한다. 즉 자연을 온전하게 만든다. 구속의 범위는 타락의 범위만큼 넓고 모든 창조세계를 포괄한다. 창조 세계에 속한 것 가운데 이 두 대적 간의 전쟁에 영향을 받지 않는 중립적인 요소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모든 곳에서 인간의 죄성은 타락시키고 왜곡시킨다. 그러나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는 죄악의 패배와 창조의 회복을 함축하고 있다.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계시인 신약 성경 전체의 핵심주제이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 에게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라고 하셨다. 진정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 현존해 있다. 바리새인들이 그 나라가 언제 임하는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라고 대답하셨다. 헬라어 ‘ἐντός’는 within의 뜻 보다는 among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속이나 바리새인들 사이가 아니라 그 바리새인들 가운데 있는 예수님을 통해 임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제자들에게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고 또 그 나라의 도래는 아직 완료된 실재가 아님을 가르치셨다. 므나 비유(뉵 19:11-27)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최종적으로 ‘세상이 새롭게(중생)될’ 것을 기대하면서 그 나라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하여 창조 세계의 질병과 악마화에 대항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경적 동 분야에 그가 현대인의 세계관 형성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앞서 요약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는 다양한 세계관에 ‘구조와 방향’이라는 준거틀을 대입하여 분석한 뒤 또한 다양한 세계관이 있는 것 같지만, 내면을 들여다 보면 제한된 수의 세계관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제 1의 실재(궁극적 실재)의 본질과 속성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기본적 대답만 있을 뿐인데 즉 영원토록 자존하는 것은 우주이거나 아니면 초월적인 하나님이라는 논리다. 또한 올바른 세계관의 선택에 있어서 네 가지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논리적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관련된 모든 자료가 포함 되어야 하며 자체 논리가 스스로 설명 가능하여야 하고 주관적으로 만족을 주는 세계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과 논리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논리의 비약이 있는지도 확인해봐야 하고 객관성이 확보되었는지의 여부도 검토해봐야 한다.1) 단점저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원어를 들어 설명하는데 그 중에는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해당 원어에 익숙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 단어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원어는 또 다른 숙제가 된다. 예를 들어 ‘너희 안에’에 관한 설명에서 저자는 원어 ‘ἐντός’를 설명하고 있는데 원어에 생소한 독자에게는 이것은 부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교양 서적의 형태를 띠고 있는 책이므로 누구나 금새 이해하기 쉬운 현대어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에 원어를 사용하려고 마음 먹었다면 차라리 전문적으로 확실하게 설명하고 정확한 원어로 표현해서 원어 공부를 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다. 많은 신학관련 서적들이 이런 오류에 빠져 있다.우리는 책의 제목만으로도 저자가 올바른 가치관을 성도들의 성화과정으로 귀결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뻔한 결론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구성 및 논리상의 반전이라든지 플롯의 짜임새라든지 하는 재미가 결, 창 5:1(아담 자손), 창 6:9(노아의 족보), 창 10:32(그 백성 들의 족보),창 11:10(셈의 족보), 창 25:13(그 세대), 창 37:2(야곱의 족보) 에 나오는데 한글 번역으로는 족보, 세대, 계보, 자손, 후손, 내력, 대략 등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지만(실제로 한글 개역개정판에서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원어로 분명히 같은 단어를 쓰는 것에서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인류의 족보와 같은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천지창조는 인류 구속의 역사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창 2:4)라고 한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인류를 위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거룩한 선포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저자의 말과 같이 세계관은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 가지는 근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이다. 이 틀의 바탕에 성경을 놓아야 한다. 이 틀을 종교적으로 한정시켜서는 안된다. 삼각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스펙트럼으로 나뉘는 것과 같이 성경을 통해 우주의 모든 체계를 바라 보아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가치관 또는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세계관을 비교, 검토하여 체계적으로 정리, 합리적인 가치관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자연주의나 뉴에이지, 포스트모더니즘을 동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유신론을 더 확고하게 정립하기 위해 다른 세계관을 비교하고 검토해야 한다.2) 가족에게저자는 이 책에서 ‘구조와 방향’이라는 신개념을 도입하여 창조, 타락, 구속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내었다. 신선한 시도이다. 이러한 준거틀 안에서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이 올바른 삶임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조차도 성경적으로 근거를 두어야 한다. 언뜻 보아서 앞뒤가 맞지 않는 기독교리를 알아 듣기 쉬운 말로 표현하여 자녀로 하여금 다른 세계관이 갖추지 못한 놀라운 합리성이 있음을 증명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화두를 문화 전반으로 확대하여 S1
「그리스도인,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찰스콜슨,낸시피어시 저/정영만역)요약기독교 저술가로서 범죄인 등 소외된 계층의 복음전파와 사회개혁에 앞장서 온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펼치면서 성경 속의 진리들이 삶을 지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 기독교적 세계관이 우리의 삶에 가이드맵이 될 수 있을지, 문화를 재건하여 모든 세계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광채를 볼 수 있도록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변을 해준다. 또한 신자들이 기독교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함으로써 기독교문화를 건설하는 데 충실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저자는 다양한 논리와 실례를 들어서 이 사실을 증명해 보인다. 이 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제 1부 : 세계관은 왜 중요한가1부는 한 마디로 세계관에 대해 정의하고 올바른 세계관을 정립하는 것이 왜 중요하며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세계관이란 것은 아주 실제적인 것으로 이 세상에 대한 신념의 총합이고 우리의 일상적인 결정과 행동을 지시 하는 커다란 그림이다. 그래서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다른 여러 가치관과 갈등 속에 있는 모습을 조명하고 불신 시대 속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어떻게 수립하며 이에 대한 실천적 자세를 어떻게 갖추어 나갈지를 알려준다.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사람이 성경이 삶의 모든 영역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진정한 기독교는 모든 현실을 보고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것은 바로 세계관이다. 우리는 기독교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진리이며 다른 모든 것의 뿌리가 된다고 믿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궁극적인 현실이다. 오늘날의 도전들로는 큰 범주로 말하면 유신론과 무신론의 차이이다. 궁극적 실재가 하나님인가 우주인가로 나뉘는 것이다. 뉴에이지 같은 종교는 영적인 것이 원래 자연 안에 완전히 내재되어 있다고 로운 유토피아를 꿈꾸었으나 역시 바람에 나부끼는 꺼풀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이러한 세계관은 선을 말하였지만 악을 풀어놓았으며 이성은 계몽을 약속했지만 어두움 속으로 인간을 밀어 넣었다. 인간의 죄를 부인하는 이러한 사상들은 인류에게 엄청난 후 폭풍을 몰아온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피의 혁명을 유발한다. 이러한 패턴이 칼 마르크스의 전체주의에서도 나타난다. 이렇듯 죄를 부인하는 것이 파시즘의 뿌리이다.죄를 부인하고 잘못된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죄를 직시하지 못하고 범죄의 책임을 빈곤과 그 밖의 사회 병리에 떠넘기면서 영혼의 문제가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 죄를 부인한다는 것은 인간을 위하는 교리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을 부인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품격을 떨어뜨리고 파괴한다. 그것은 우리를 더 큰 힘에 사로잡힌 인질로 폄하시킨다. 인간의 죄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에서 유토피아적 이념이 시작된다. 이로써 우리는 죄를 다룰 능력을 상실하게 되며 결국에는 죄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다시 죄에 굴복하는 악순환을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도덕적 책임이라는 개념이 없다. 모든 악을 사회적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죄에 대한 책임 회피 의식이 있다. 유토피아적 틀은 진정한 악과 효과적으로 씨름하기 위해서 필요한 개념적인 도구를 박탈해 버렸다. 우리가 악을 이름 붙이거나 확인할 수 없다면, 악을 다룰 능력을 상실하게 되며 결국에는 악의 치명적인 영향력을 더 크게 만든다.하나님은 선하시고, 본래 그의 창조 역시 선했다. 하나님은 악의 창시자가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 이론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악을 창조하셨다면, 본질상 그분은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하고 선이 악을 이길 수 있다는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죄의 근원은 하나님의 바깥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알고 계시지만 고통을 통해 인간을 자신에게 되돌아 오도록 하기 위해 용인하고 계시는 것도다”(앱 5:31-32)라고 해서 여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증거한다. 성서 신학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이미지를 남편과 아내 사이의 변함없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결혼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심오한 신비’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성적인 문제로 인해 벌어지는 수많은 악한 결과들은 성경의 성 관념에 비추어 극복해야 한다.창조에 대한 그릇된 관점은 근대 공교육에 만연해 있는 개념적이고도 도덕적인 상대주의로 곧장 나아갔다. 죄와 타락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상실된 것 또한 큰 재난이었다. 공교육에 있어기독교적 교리를 도입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홈스쿨링을 하면서 자녀들에게 기독교적 세계관을 주입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된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일은 성스러운 일이다. 성경은 자유롭고 번성하는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성경내에서 사유재산권은 보장되고 있으며 부의 축적 자체를 나쁘다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부는 충실한 신앙에 대한 대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은 부 자체를 목적으로 보는 것, 또는 부를 축적하기 위해 억압하고 잔인해지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린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갇힌 자를 돌볼 때 그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의 책임감을 강화시켜 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경제적 성공은 도덕성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인간의 법 위에는 영원한 법인 하나님의 법이 있다. 과학의 발달에 따라 창조론을 폐기하고 진화론을 택함에 따라 잘못된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가장 잘 지켜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상위법에 대한 헌신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법에 어긋나는 법이나 행동에 저항하는 최전선에 서 있다는 것이다.현대의 모든 과학의 기초는 성경으로부터 나왔다. 기독교인들은 과학의 본래의 자기 역할인 하나님이 창조하신 시간을 소모시킬 뿐이다. 예를 들어서 제 30장의 케이오 펀치 부분과 제 43장 기적의 손길 등의 부분은 없어도 논리 전개가 어렵지 않게 진행될 수 있다. 꼭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 편집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이 책의 구성상 제 4부와 제 5부의 구분이 논리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중복되는 부분도 있으며 꼭 다루어야 할 것이 빠진 경우도 있다. 4부에서 이미 구원과 구속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데 5부에서 구원에 관한 언급을 반복해서 하고 있다. 전체적인 편집에서 구속과 구원에 대한 개념을 한 곳에 정리하고 다른 곳에는 이 개념에 근거하여 실천적 적용을 심도 있게 다루었으면 좋았을 것이다.저자는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된 세속화 과정은 이제 멈춰서고 있으며, 새천년은 ‘세계사의 비 세속화’를 특징으로 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미래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낙관론에는 논리적인 설득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부족하다. 뉴에이지 사상이나 포스트 모더니즘 등은 오히려 극단적 세속주의의 면모를 보이면서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으며 이런 사상들은 점점 진화하면서 더욱 기괴한 모습으로 기승을 부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책의 제목을 통해 저자가 이런 저런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기독교를 믿으라고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제목을 보고 절대 이 책을 사지 않을 것이다. 종교서적인만큼 오히려 누구나 흥미를 가질 만한 제목을 뽑았더라면 내용의 전달뿐만 아니라 흥행에도 성공했을 수가 있다. 예를 들어서 제목을 ‘절망의 늪에서 바라보는 한줄기 빛’이라거나 ‘인간 실존에 침투한 로고스’ 등으로 설정했으면 비신도와 그리스도인 고객 모두에게 더욱 흥미를 유발했을 것이다. 또한 구성이나 스토리의 전개에 있어서도 논리상의 반전 이라든지 복선을 설정하여 독자가 기독교적 가치관만이 유일한 해답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좀 더 세심한 주의를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이 책에서는 기독교적 가치리는 그 분의 위엄을 묵상하는 가운데 이러한 것들을 마음에 새김으로써 새로운 힘을 얻을 때까지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 실존에 침투해 들어와 계시다. 어둠을 밝히는 성육신 사건으로 하나님께서는 닫힌 공간이었던 우주를 열린 공간으로 변화시키신 것이다. 우리 기독교에는 결정론이라는 것이 없다. 인간은 결정론적으로 정해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면서 그분의 인류 구속의 원대한 계획에 동참하여야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극복하며 성화과정을 통해 영화에 이르도록 하여야 한다.2) 가족에게 적용지금 대부분의 학교는 다윈의 진화론을 우선 교육하고 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다윈의 진화론을 사실로 알고 이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라는 것을 믿지 않을 때 무척 마음이 아프다. 그렇지만 나 자신도 40대 후반에 가서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뉴에이지의 SF 스토리에 매료되어 있었고 신비주의에 경도되어 그릇된 믿음을 가졌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시키는 것을 조급하게 서두르지는 않을 생각이지만 나름대로 기독교적 세계관을 정립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전략을 세워 놓아야 할 것이다.한국의 ‘창조과학회’는 과학적으로 우주 및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성경적인 증거임을 속속 밝히고 있다. 그들의 활동이나 이론이 100% 정확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기고 있다. 나 자신도 그들의 논리를 들어보면서 기독교적 가치관이 우주와 세상에 대해 유일하게 올바른 해석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이러한 내용을 믿는 자에게나 불신자에게 널리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절대 주권자가 행하는 모든 일들을 우리가 상식 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논리적으로 모순이 많은 기독교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으로 납득 갈만한 얘기를 해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빅뱅이론은 우주가 최초에 번쩍이는 섬광으로 시작해서 팽창해 하고 있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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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교육 현장에서 바로 사용하는 교안 (6개)1. 신앙강좌 로마서(1) - 우상숭배는 영적 간음인가?“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로마서 1:23–26, NKRV) 저자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성적인 죄에게 넘겨주신다고 한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신자들은 특히 성적 순결의 측면에서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로마서 1장 23~26절이 번갈아 가면서 우상숭배와 육체적 타락을 두 번에 걸쳐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 자’라서가 아니라 우상 숭배, 즉 영적인 간음으로 인해 정욕과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내버려 두다’로 쓰인 헬라어 ‘παραδίδωμι’는 ‘내어 주다’로 번역해야 한다. ‘그냥 놔두다’라는 의미가 아닌 적극적으로 죄에 빠지도록 하였다는 의미 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상숭배라는 잘못을 저지른 인간들에게 하나님 께서는 왜 음란과 정욕에 빠지도록 하셨는지를 확인해 봐야 한다.바울은 우상 숭배의 배후에는 사탄, 즉 어둠의 영과 타락한 세상 권세가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고전 10:19–22).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탄의 말을 따름으로써 영적인 간음을 행했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우매해지면서 우상숭배를 하게 된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육체적 타락에 넘어 가도록 놓아 두시고 또한 역리적인 육체적 타락까지 이르게 하신다. 우상숭배와 성적타락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통, 실패, 죽음까지도 포함된 개념이어서 과거, 현재, 미래가 다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통계열역학을 주창한 루트비히 볼츠만은 현대 물리학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은 유일하지도 않고 방향도 없으며 양자화까지 될 수 있는 것으로 과거 현재 미래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밝혔다. 시간은 상대적이어서 지구의 좌표계에서 볼 때 블랙홀의 좌표에 있는 사람은 영원한 시간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성경이 말하는 시간 개념의 신비를 풀어주는 이론이다.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해서 불러 의롭다 하신 자들을 이미 영화롭게 해놓으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미리 정해서(προώρισεν) 불러(ἐκάλεσεν·)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셨고 (ἐδικαίωσεν·) 의롭다 한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 (ἐδόξασεν) 에서 전부 부정과거로 표현함으로써 천상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것이다. 그런데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이라는 문구를 보면 29절에 나오는 미리 정한 그 사람들이다. 구원하기로 예정했으면 그대로 다시 부른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도 떨어지지 않는다. 가령 29절에 있는 미리 정함이 있던 사람을 열 사람이라 했을 때 30절에 와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그랬으니까 열 사람을 부르시고, 부르시는 이 열 사람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그리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이다.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영광의 기업에 들어가도록 하신다는 말인데 이것은 마지막의 정점적인 구원을 말한다. 처음부터 나중까지 같은 사람이 내내 이렇게 특수하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대상이 되어 있다. 예정된 자들 가운데 하나도 떨어지지 않고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 그러니까 영화롭게 된 사람들이 그대로 열 사람이다. 내내 같은 사람이다. 예정되었다 하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인 것이다.1) 바울은 왜 “영화롭게 했다”는 경말씀들이 이해되는 것이다. 이처럼 빛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가 있다. 이런 면에서 요한복음이 성육신 사건을 ‘빛’으로 오셨다고 표현한 것은 절묘한 비유이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빛은 그 빛이 자연적인 것이든 초자연적인 것이든 그리스도 에게로부터 비롯 된 것이다.이 구절은 특별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 있었으니” 에서 ‘세상에 와서’나 ‘비추는’과 같은 단어를 현재시제로 사용한다. 영어도 불변의 진리를 표현할 때 현재형으로 쓴다. 빛은 시제가 없이 영원불변으로 우리 각 사람에게 지금도 비추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 에서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 천지창조 당시 하나님께서는 섬광으로 빛을 주셨고 생명을 주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다시 어둠과 죽음으로 바꾼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직접 빛이 되셔서 인간세상에 침투하신다. 이 빛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기도 하고 깨달았으면서도 받아들이지 않기도 한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이시지만 그 분의 진노를 살만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악한 현상에 대해 1장 12절에서 놀라운 자비를 베푸신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여 빛을 빛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자녀로 삼으신다고 선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이 죄에 굴복할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들을 자신에게 되돌아 오도록 하기 위해 획기적인 반전을 계획하신 것이다. 그 분 자신을 희생하여서 사람들의 빛이 되어 주셨으니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인 것이다. 우리는 오직 죄를 자복하고 주 예수를 구주로 받아 들이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독생자의 영광을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제도 변함 없이 생명의 빛으로 우리 각자를 비추어 주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성육신 사건으로 빛으로 세상에 오셨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도 했고 그것을 알면서도 받아 들이지 을 창조하기 위해 ‘들려 올려져야 한다’고 예고했던 것이다 (요 3:14; 8:28; 12:32, 34).빌라도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온 세상 사람이 다 알아볼 수 있도록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쓴다. 하나님 백성의 언어인 히브리어, 로마 제국 언어인 로마어, 문명권 언어인 헬라어로 기록하여 세상의 대표격인 빌라도가 예수를 온 세상 왕으로 선포한 것이다. 여기 또한 요한복음적 역설이 있다.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루는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은, 히브리어를 쓰는 유대인 중 그를 믿는 자들과 로마어와 헬라어를 쓰는 사람 중 그를 믿는 자들, 즉 세계 만방의 모든 족속 중 그를 믿는 자들로 구성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임을 고백하는 나다나엘 같은 자로서, 불신앙의 유대인(야곱의 자손)을 대치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요 1:45–51). 그들은 예수께서 예고한 대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들려 올려짐으로써 모든 민족과 모든 방언에서 예수 자신이 끌어 모으는 자들이다 (요 12:32).1)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the king’ 과 ‘a king’의 개념구분을 하고 예수께 질문을 하였는가?5. 신앙강좌 누가복음 -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20–21, NKRV) 이 구절과 관련하여 새번역, NRSV, NLT는 ‘among’이라고 번역하고 있고 개역개정, NIV, KJV 등 역본들은 ‘within’을 주장한다. 따라서 이 부분의 해석은 원어 단어의 쓰임새와 함께 원문의 앞뒤 문맥을 살피어 해석해야 하는데 ἐντὸς 가 두 가지의 뜻을 다 가지고 있지만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것은 대부분 ‘whthin’ 으로만 쓰였지 ‘among’ 으로는 쓰이지 않았음에 주는 사람을 경건주의자 들이 라고 싸잡아서 비난할 수 있는가?6. 신앙강좌 고린도전서 – 방언( “γλῶσσα”)은 무엇인가?고린도 전서 14장에서는 “γλῶσσα”가 복수로 쓰일 때 “외국어”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단수로 쓰일 때 “황홀경의 발화”로 씌였다. 이 “γλῶσσα”의 단수, 복수 문제에 대한 해석을 혼동해서 온갖 종류의 해석이 난무했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황홀경의 발화”도 ① 당시 고린도가 항구도시로 각 지방에서 외국인이 빈번하게 왕래하여 여러 외국어가 불규칙하게 혼합된 지방언어라는 설 ② 현대 교회에서의 뜻이 없이 반복되는 음절로 기도하는 “방언”현상이라는 설이 있다.사도 바울은 최소한 8개국어 이상은 했을 것이고 이 외국어 능력은 당시로서 온 세계였던 지중해 연안에서의 그의 역사적 선교에 없어서는 안될 은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이 여러 외국어를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지만(18절) 만 마디 외국어보다 깨친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했다(19절). 그러면서 고린도 교회 사람이 모두 외국어를 할 수 있기를 바랬으나 그것이 통역이 되어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없다면 그 보다는 예언이 더 좋을 것이라고 하면서(5절) 외국어를 하는 것은 막지는 말되 예언하기를 열심히 구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37절). 그러면서 그는 만약에 자신이 고린도 신도들에게 외국어로만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침을 전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유익이 안되지 않겠냐고 반문하면서(6절) 온 교회 신도들이 모여서 외국어로 말하고 있으면, 초신자들이 미쳤다고 할 것(23절)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외국어를 하는 것 자체는 은사이지만 교회안에서는 그것보다 예언을 하는 것이 교회를 위해서 더 유익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반면에 unknown tongue으로서의 “γλῶσσα”에 대해서는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 (god)에게 말하는 것인데 영(spirit)으로 비밀을 말하지만 아무도 알아 듣지 못AT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