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길잡이 10주차 과제‘푸른 눈의 목격자’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감상문수업시간을 활용해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다큐멘터리 두 편을 보게 되었다. 이 영상은 각각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 조상의 생활을 담은 영화이다. 이 두 영상의 공통점은 모두 독일인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영상으로 기록을 남겨준 두 인물이 어떻게 모두 독일인인지는 나도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 덕분에 우리는 우리도 모르고 있던 우리의 상황을 알 수 있게 되어 감사할 따름이다.위에 말했던 거처럼,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에 의해 제작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 조상들의 일상생활들을 영상을 담아낸 다큐멘터리이다. 내가 바라 본 우리의 근대시기는 그야말로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김씨 일가의 세도정치 이후, 고종의 통치기간 동안 흥선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으로 일제강점기를 초래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도 아니고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 제 3자의 눈으로 그 당시 조선을 바라보고 싶었다. 특히나 좀 더 새로운 시각으로 조선을 알고 싶었기에 동양인들이 아닌 서양인들이 바라보는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을 느끼고 싶었다. 그렇기에 나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영화가 정말인지 좋았다. 이 영화에 대해 나는 일제강점기 시대라고 하여 우울한 상황만을 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일제통치기간에는 즐거운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단편적인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영화에서는 우리 조상들의 평범한 일상생활들이 담겨있었다.영화부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신발에 대한 이야기였다. 짚신은 발에 딱 맞아 우아한 걸음걸이를 완성시키지만 나막신은 질질 끌려 느린 걸음을 유발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빵하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러게 직설적이고 조선을 사랑하는 시각으로 그려낸 문장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조상들의 많은 일상들이 소개 되었다. 영화를 통해 조상들도 때론 울고 웃는 그런 평범한 일상들을 지낸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외국인의 눈으로 본 조선은 정말인지 재미있었다. 그리고 나도 항상 새로운 시각으로 현재 한국을 지내고 싶어졌으며 내가 보내고 있는 일상들을 한 폭의 영상으로 남기고 싶어졌다. 지금은 따분한 일상일지 몰라도 몇 년 후면 지금의 일상은 전혀 다른 새로운 일상이 되어버릴 것이란 걸 느꼈기 때문이다.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는 앞서 말한 거처럼 5.18 광주민주화운동를 영상으로 담아 낸 위르겐 힌츠페터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왜 일어난 것일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유신헌법으로 입법부와 사법부가 무력화된 4공화국 말기에 대한민국의 정보를 관리하던 3개의 권력관인 ‘대통령 경호실’과 ‘중앙정보부’ 그리고 ‘국군 보안사령부’가 있었다. 1979년 10.26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이 암살을 당하고 암살범이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보안사령관 ‘전두환’에게 체포를 당하자 3대 기관 중 유일하게 건재한 수장을 가진 ‘보안사령부’가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를 독점하기 시작했다. 이런 정보 권력과 ‘10.26사건 합동 수사본부장’의 지위를 이용해 정국을 주도하게 된 전두환이 자신과 자신의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멤버들을 숙청하려던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12.12 쿠데타로 역 숙청해 버리면서 신군부가 군권을 장악하게 됐다는 것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핵심 배경이다.문제는 신군부가 언론을 적극 통제해 ‘10.26사건 수사 뉴스’들로 이슈 몰이를 한 덕분에 12.12쿠데타의 내막이 2~3개월 동안 은폐 및 왜곡되었으며 이 때문에 이들 신군부의 정권탈취 의도가 80년 3월이 되어서야 지식인층에게 확산됐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비상계엄 해제”와 “신군부 퇴진”을 요구하며 전국으로 확산된 민주화 시위가 1980년 5월 15일 발생한 서울역 총궐기 시위에서 학생과 시민 15만 명을 운집시켜버리면서 서울의 봄은 정점을 찍게 되었다. 하지만 신군부가 2차 쿠데타를 하려 한단 소문과 ‘북한의 남침설’이 공공연하게 유포되어 있던 상황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신군부의 위협에 당시 지도부는 결국 회군을 결정했고 15만 서울역 시위대는 그렇게 허무하게 자진 해산해 버렸다. 이 일로 자신감을 얻은 신군부는 이틀 뒤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를 통해 법적으로 계엄사령부가 국가를 통치하도록 만들었고 곧바로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여야 정치인 26명을 포함해 각 대학 학생회 간부들과 재야인사까지 600명을 하룻밤 사이에 체포 및 감금해 버리며 사실상 국가를 완전히 장악했다. 한편, 이날 광주에서는 7개월 전 부마항쟁으로 시위대 지도부가 구속 상태이던 부산, 경남 지역과 전날 대학 학생회장단이 모두 연행돼 시위대가 붕괴돼버린 서울, 경기 지역과 달리 전남대 간부 상당수가 체포를 피한 덕분에 시위대 조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5월 18일 아침, 휴교령이 내려지면 학교로 모이자는 행동지침을 공유하고 있던 수백 명의 전남대 학생들이 이미 공수부대가 점령해버린 자신들의 캠퍼스 앞에 모여들면서 마침내 이날의 운명적인 가두시위가 시작되었고 이들을 해산시키지 않으면 전국으로 민주화 시위가 다시 확산될 수 있다고 생각한 신군부는 현장에서 대치 중이던 공수부대에 강도 높은 진압을 지시했다. 이것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과정이다.많은 영화에서 5.18 민주항쟁에 대해 다루고 있다. , , 등이 대표적인 영화일 것이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그 날의 사건을 잊지 못한 채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반면 계엄령을 선포한 전두환은 아직까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으며 호의호식하며 잘 살고 있다는 것이 현 시대의 모순점이다. 지난 20년 3월에 광주에 내려가 재판에 참석했지만 그는 여전히 불성실한 태도로 재판을 임하는 행동을 보여 큰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재판이 시작 됐음에도 여전히 그에 대한 처벌은 나오지 않았다. 한 소셜네트워크에서 계엄군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올라왔다. 짧게나마 그 이야기들을 적어보자면 ‘자신의 아버지도 그 당시 하사관으로 복무 중으로 계엄군 활동을 하였다. 아버지도 외면하고 싶은 과거이며, 직면하기 두려운 과거이다. 자신의 아버지 역시 정권에 희생당한 피해자이다.’, ‘한 계엄군 曰 나도 피해자야 군인은 피해자 없나? 죽지만 않았을 뿐이지/군인이 장교로 진급 못 하면 피해자지/(계급장) 하나만 더 달았어도 내가 이렇게 고생 안 해. 그때 연금만 탔어도.’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그 당시 희생당한 분들에게 일말의 죄책감은 없냐고 말이다. 물론 ‘우리들은 위에서 하라하여 어쩔 수 없이 총으로 공격했으며 우리도 상부에 의해 고문을 당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비겁한 변명뿐이라고 생각한다. 계엄군은 전투불능상태인 어린이와 노인 그리고 여성을 무참히 살해하였으며 아무런 죄 없는 여성시민을 겁탈까지 하였다. 과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강제성인 것일까? 아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변명이 필요하여 정치의 희생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동정심을 정말 많이 느끼는 나지만 그들에게는 일말의 동정심을 느낄 수 없었다. 나에게 “계엄군도 명백한 피해자입니다! 그들에게 동정심이 있지 않으십니까?”라고 묻는 질문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일본도 잘살고 싶어 침략한 것입니다! 진주만 폭격으로 피해 입은 일본에 대한 동정심이 생기 않으셨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다. 그렇다 나에게 계엄군이란 일본군과 같은 위치이다. 그들은 결코 용서받지 못해야하며 전두환뿐만이 아니라 그들 역시 처벌을 받아야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