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재선충병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경험은 살충제가 긍정적인 과학기술의 결과라고 여기도록 하였다. 병충해 때문에 농업인들이 힘들어한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곧 드론 기술이 상용화된다면 그들의 고민들이 머지 않아 깔끔하게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느꼈던 적도 있다. 이처럼 나는 평소 해충을 제거하는 '살충제'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지녔었고, 과학기술 발전의 긍정적인 영향력을 신뢰하고 있었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무엇보다도 나에게 이 책의 1장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실제로 1장은 과학적인 사실이 아니라, 우화를 담은 이야기이다. 우화는 불과 4페이지의 짧은 분량이지만, 그 어떤 문명 비판의 글보다 강한 인상을 남겼다. 봄이 왔는데 새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세상이다. 그런데, 책 중간을 넘어서면 시골의 어느 가정 주부가 저자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그 내용 속에는 1장 우화가 현실이 된 상황이 담겨 있다. 이러한 상황과 함께 무심코 해충 박멸로 이끄는 살충제가 다시 돌아 땅에 묻히고, 물을 통해서, 그리고 비를 통해서 인간에게 돌아올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은 기존의 나의 입장을 돌리기에 충분했다.물론 이러한 결론이 감정적으로 쉽게 나온 것은 아니다. 2장부터 이어지는 내용들은 상당히 과학적인 근거로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과학적인 사실들을 근거로 삼고 있는 내용들이 아름다운 문장들과 대비되어 더 극적으로 다가왔다. 생산적인 측면에 있어 화학 물질이 자연을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고, 말라리아 모기 퇴치처럼 삶의 질을 고양시킨다는 장점이 계속 신경 쓰였다. 하지면, 결코 더 많은 생산만이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모든 생물을 위험으로 몰고가지 않는 적절한 양의 화학 물질만이 살포된다고 믿을 수 있을까?당시 미국에만 매년 500여 종의 새로운 화학물질이 등장해 사용되었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매년 인간과 동물이 500여 종의 새로운 화학 물질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이렇게 나에게는 안전성이라는 최우선 가치가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말라리아 모기를 피하기 위해 DDT를 과다 사용한다면, 모기에 물리지 않아 병에 걸리진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바로 '암'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암은 치유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많은 비용이 드는 일이다. 당장의 득이 실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은 후, 단기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을 볼 줄 알아야 사안에 대한 균형 잡힌 평가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침묵의 봄은 출간된 지 60년이나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현재 진행형인 상황이다. 저자는 화학 물질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을 경계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에 동의한다. 시중에 화학 약품을 쓰지 않는 제품을 찾아볼 수 있는가? 가습기 살균제, 1급 발암물질이 검출된 라돈 침대, 생리대 유해 물질, 그리고 최근에 논란이 된 염색약 발암 물질 사건 등 너무도 나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이렇게 보니 마치 현대 사회는 일종의 '소독 문명'인 것 같다. 그러니까 현대 문명의 특징은 무엇이든지 깨끗한 것, 오염되지 않은 것, 새 것을 극도로 추구한다. 당장 중고거래 사이트를 접속해보면 '새상품'은 급속도로 팔리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의 청소기, 가습기 등 제품들에 uv 살균기가 붙지 않은 제품 찾기가 어렵다. 나는 이러한 '무균 상태'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 과연 올바른 방향인지 의심스럽다. 자칫하면 이러한 노력은 화학물질의 오남용으로 이끌기 쉽기 때문이다. 19세기 과학 기술의 힘이었던 화학 물질을 통해 나치들은 유대인이라는 '균'을 처리했다. 이는 과거의 일이 아니다. 오늘날 러시아가 드론으로 화학무기를 살포한 결과, 2만 여명 이상이 거주하는 우크라이나 마리오폴을 폐허로 만들었다. 저자가 말했듯, 화학물질을 살충제가 아닌 '살생제'라고 표현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저자의 지적과 외침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DDT가 보편적으로 사용이 허용된 이래, 독성이 더욱 심한 화학물질을 만들어내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과연 자연을 무균 상태로 만들 수 있을까. 해충이냐 익충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관점아닌가? 곤충의 입장에서는 해충이 유익한 먹이가 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문제는 생태계 전체를 거시적인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전한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박테리아, 세균, 바이러스, 해충 등을 박멸할 수 없다. 만약 그 모든 것들을 모조리 박멸하는 날이 온다면, 아마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세균이 살 수 없는 곳에서 내가 살 수 있을까. 이런 차원에서 '이조양양조'의 참 뜻을 되뇌어본다.저자는 새가 더 이상 노래하지 않고 죽음의 강이 된 지역을 이야기하고, 공중에서 화학약품을 무차별적으로 발포한 상황을 이야기한다. 화학 물질이 흡수된 강의 생물들은 죽어나간다. 살충제는 특정한 종만 제거하지 않는다는 점에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맹독성 살충제는 특정한 해충만이 아니라 살충제와 접촉하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위험에 빠지게 한다. 자연뿐만이 아니다. 살충제는 가벼운 염색체 손상에서부터 유전자 돌연변이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세포 활성 과정을 방해한다. 많은 공간을 할애하여 무분별한 살충제 피해의 심각성을 외치는 저자는 "목적만 맞으면 어떤 수단을 써도 정당하다" 라는 것의 결과가 결국은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걸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는 저자의 목소리에 공감한다. 인간은 이 화학전에서 승리하지 못하며 격렬한 포화 속에 휩싸일 뿐이다. 대규모 살포뿐만 아니라, 나의 삶에 은밀하게, 조용히 영향을 끼치는 지속적인 화학 물질에 경계해야 한다. 계속 떨어지는 물방울이 마침내 단단한 바위를 뚫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