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가 활동취미로 한국 무용을 하며, 대상자는 자신을 위해 매주 5회, 하루 4시간 이상을 소비한다. 이 시간은 자신의 취미활동이자 운동인 한국 무용을 배우고 연습하는 시간이며, 전 후로 함께 수강하는 수강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등 여가 시간을 보낸다. 사회 활동소속되어 있는 단체로는 일본 거주 시절 함께 공부하고 적응하기 위해 의지하고 서로 지지했던 친구들이 소속된 모임이 있다. 특별한 단체명은 없으며, 모임에서 총무를 맡아 한 달에 1번씩 회비를 걷고, 여행을 목적으로 함께 모으는 자금의 관리 역할을 맡고 있다. 만남은 한 달에 1번 가진다. 자녀들의 나이가 18세-25세로 발달 주기가 비슷하여 자녀들과 관련한 정보 등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자녀와 직결될 수 있는 주제의 이야기를 자주 하기 때문에 서로의 일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건강 관리건강하다는 것은 고통 없이 일상생활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인지하며, 평소에 운동과 규칙적인 생활, 여러 매체에서 얻은 정보를 통해 알게 된 건강 식품 섭취 등으로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 현재에는 50대에 접어들면서 지속적으로 운동을 하기 힘들고, 목이나 어깨 통증이 자주 있으며 특히 두통이 심해 건강한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마취통증의학과, 정형외과, 한의원 등의 기관에서 상담을 받고 치료를 받았으나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현재는 건강 문제가 발생할 때 마다 집에서 좋은 것을 먹고 푹 쉬는 것으로 치료를 대신하고 있다.● 자궁암 검사 -마지막으로 2018년 3월 13일에 검사하였으며, 2년에 한 번 검사한다.● 혈압 – 마지막으로 2018년 5월 21일에 측정하였으며, 측정 빈도는 한 달에 한 번 병원을 방문하여 혈압 약을 처방 받기 전에 측정한다.● 음주 - 맥주 (300ml) 2~3캔 정도를 일주일에 1번 이상 섭취함.● 흡연 – 해당 사항 없음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 서평 보고서나는 패스트푸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저질의 고칼로리.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패스트푸드의 모습이다. 하지만 분단위로 시간을 쪼개어 써야 했던 수험생 시절, 드라이브 스루를 통해 패스트푸드를 자주 찾게 되었다. 차 밖으로 한발짝도 나가지 않아도 배를 두둑하게 채울 수 있는 음식을 얻고, 딜리버리 서비스를 통해 집 밖에 나가지 않아도 음식을 얻을 수 있다. 그 뿐인가, 주문하고 나서 음식이 나오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수험 생활 시절,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먹던 패스트푸드는 이상하리만큼 그저 그런, 보통의 맛이었고, 배를 채울 수는 있었지만 밥이 아닌 ‘연료’를 채웠다는 생각에 가슴이 허전했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그러한 경험 때문인지, 패스트푸드, 특히 햄버거는 잘 먹지 않는다.조지 리처가 지적하는 부분 또한 내가 수험생활을 하며 느꼈던 감정들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가 말하는 ‘합리화의 불합리’가 그러했다. 내가 음식이 아닌 연료를 먹었다고 생각했듯이, 소비자의 건강과 음식 문화와는 길을 달리하여 합리를 추구하는 맥도날드화는 분명한 불합리를 낳았다. 직원들의 경우 열악한 근로 조건과 임금에 시달렸고, 그 마저도 ‘효율’과 ‘이윤’을 최고로 여기는 맥도날드 사회에서 로봇에 일자리를 뺏길 위험에까지 시달려야 했다.맥도날드화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인 합리 속의 불합리는 우리가 크게 경계해야 할 사항인 것 같다. 일단 책에서 제시되었듯이, 맥도날드가 배출하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는 분명히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또한 소위 ‘맥도날드화’의 선두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패스트푸드 기업은 노조를 허용하지 않는다. 패스트푸드 기업의 노동자들은 철저하게 분업화 되고 단순 반복적인 작업만을 담당하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창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1년이면 100%가 대체되는 것, 영양가 없는 음식, 젊은 세대의 음식 문화 변질 등 합리만을 추구했던 패스트푸드 기업은 모순을 맞이하고 있다.책에서는 하이테크 임신과 이러한 ‘ 맥도날드화 ‘ 가 의료산업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깝고, 걱정이 된다. 걱정이 되는 부분 중 하나는 바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직원’ 즉, ‘맥아이덴티티를 갖추게 되는 직원’이다. 맥도날드 체계 내에서는 직원이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창의성이란 오히려 효율을 떨어뜨리며, 정해진 매뉴얼 대로, 주어진 역할만 수행하면 그것이 직원이 해야 할 일의 전부이다. 의료계에서 이러한 직원(여기서는 의료진이 될 것이다)의 태도는 환자의 안전에 매우 치명적이다. 간호사의 경우, 환자와의 라포를 쌓는 단계는 치료의 일환이며, 매우 중요한 활동이다. ‘라포’란 심리학적인 단어이지만 간호학의 이해를 공부할 때도 자주 언급되는 단어이다. 주로 의료진과 환자, 또는 가족 간에 좋은 소통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일종의 신뢰 관계를 말한다. 이는 고통을 겪고 있을 환자 또는 가족과 끊임 없이 대화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쌓일 수 있다. 이는 직접적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활동이 아니기에 맥도날드화 되어가고 있는 세계에서는 분명 효율적이지 못한 활동이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 생산성을 무시할 수 없다. 나 또한 김리연 간호사의 ‘간호사라서 다행이야’ 라는 책을 읽으며, 라포 형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김리연 간호사의 삶 속에서 환자와의 관계는 그야말로 닫힌 문에 끊임 없이 노크를 하는 일이었다. 그러한 과정을 모두 뛰어넘고 ‘매뉴얼에 따라’ 환자를 분류하고, 형식적인 진료와 상담을 하고 오직 질병 하나만을 바라보고 치료를 하는 것은 의료진의 존재를 무색하게 만든다. 질병이란 신체적인 것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회적 역할에도 장애를 일으키고 이는 심리적인 질병을 불러온다. ‘치료’란, 질병의 치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개인의 역할을 다할 수 있게 회복하는 것을 돕는 것까지의 활동을 말한다. 과연 이러한 과정을 모두 뛰어넘고, 오로지 합리만을 따지는 맥도날드화된 병원이 생산성이 높고 효율적인 체계를 갖고을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 두려고 한다. 예측 가능한 고객의 컴플레인을 매뉴얼에 따라 해결하고, 예측 가능한 크고 작은 해프닝들을 고객의 만족에 기초하여 해결 하려 하기 보다는, 기존 사례에 맞춰서, 또 방침에 따라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의료계에서는 사실상 ‘예측’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니 정확하게는, 불가능 해야 한다. 감기가 심한 듯 하여 병원을 찾은 사람이 폐렴으로 진단을 받을 수도 있고, 성공적인 수술 후 정상 바이탈을 찾아 가던 환자가 새벽에 사망한 채로 발견될 수 있는 곳이 병원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환자들에게 100%의 치유와 회복을 확신시켜주지 못하지만, 제이미 홉스가 ‘난센스’에서 말하듯 불확실함은 발전을 유도하기 때문에, 더 나은 치료를 제공할 수 있게 만든다. 완전히 치유하지 못하면서 더 나은 치료를 제공할 수 있다는 말에 어폐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여기서 지적하는 질병이란 자가 면역으로 회복될 수 있는 단순 질병이 아닌, 중증 질병 즉 완전한 회복이 불가능한 질병을 말하는 것이다. 완전히 회복되기 어려운 질병에 대해서 의료진이 항상 경각심을 갖고 끊임 없이 부작용과 돌발 증상에 대비하고 불확실성을 견디는 훈련을 일상에서 겪지 않는다면, 그들은 더 나은 치료를 제공할 가능성을 상실한다. 달리 말해, 이와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맥도날드화 된 ‘맥 병원’ 이 중증 질병을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 두는 연구를 진행 하여, 일종의 매뉴얼을 짜 둔다고 해보자. 환자는 이 매뉴얼에 따라 치료 과정을 겪는다. 그런데 만약 환자가 매뉴얼 상에 없던, 말하자면 대본을 벗어난 증상을 보인다면? 매뉴얼만을 달달 외워 창의적인 생각, 개인적인 치료 노하우 등을 겪을 기회가 없었던 의료진은 발만 동동 구르다 골든 아워를 놓치게 될 것이다. 과연 모든 인간의 신체를 고려하여 부작용의 매커니즘과 증상들을 하나의 문서로 만들 수 있을까? 나는 그러한 과정 자체가 매우 비합리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며, 매뉴얼화 되었다고 해도 새로운 증상과 부작용이 계된 사회에 ‘익숙해져 있어’, 과거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나만 하더라도, 맛을 예측할 수 없는 음식을 시키고, 하염없이 음식을 기다리며 앉아있지는 못할 것 같다. 또한 불친절한 직원 , 호의적이지 못한 서비스 등은 찾지 않게 될 것 같다. 나는 책을 읽으며, 맥도날드화 라는 것은 양날의 검이라는 생각을 했다. 분명 맥도날드화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 맥으로 통칭되는 패스트푸드 기업은 이제는 맥도날드와 같은 체제를 선택하지 않고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를 바꾸려 들면 이는 비단 음식점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윤을 최고로 삼으며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맥도날드화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도덕적이지도 않다. 이미 바삐 돌아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맥도날드화가 가져오는 효율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의료 산업에 있어서는 맥도날드화가 도입되는 것이 철저한 규정 아래 엄격하게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철저한 규정에 포함되어야 할 사항은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의료진을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매뉴얼을 따르지 않는 것이 효율을 떨어뜨린다는 병원 내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아야 한다. 매뉴얼이 있으면, 물론, 응급 상황 시에 정해진 계획 대로 일사 분란 하게 움직이다 보니 더욱 빠르게 처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매뉴얼을 만드는 것 자체는 비판하지 않겠다. 실제로 병원에는 응급상황 시 따라야 할 매뉴얼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하는 것은, 의료진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매뉴얼만이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나타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맥도날드와 같은 패스트푸드 기업에서는 생산과정에 있어 다른 방식을 택하는 것을 틀리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의 생산 과정에서는 직원의 개성이 드러나는 것이 비효율로 작용될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환자를 치료할 때에 의료진의 판단에 따라 매뉴얼에 맞지 않는 처치를 해야 할 때가 많고, 또입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이러한 위험에 노출 되어 있는 것은 바로 처방을 하여 약을 내어 주는 분야이다. 현재에도 병원 약사들은 환자들이 끝까지 주의 사항과 약 복용 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 등을 간단하게 브리핑 하는 것을 듣지 않으려고 하고 , 시간을 뺏는다고 도리어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고 하소연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개선을 약사의 의견에 맞추지 않고 환자에 맞추어, 즉 이익에 맞추어 해결하려고 하면 분명 약사를 만나지 않고도 의사의 처방전 암호와 증상 등을 입력하면 질병에 맞는 약을 자동으로 처방하여 주는 시스템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이는 개개인의 지병이나 알레르기 등의 신체적 특징 등을 맥도날드화 된 시스템 체계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부분에서는 방대한 정보가 저장되어 있는 시스템 쪽이 더 우월할지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환자’이다. 환자들은 약사와 대면하여 약을 처방 받는 상황에서도 약사가 약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하거나 딴생각을 하고, 집중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한 환자들이 기계에 대해서는 인내심을 갖고 주의사항 등을 숙지하여 읽으려 할 것이라 기대되지 않는다. 약에 대한 설명은 매우 중요해서 복용 방법만 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즉, 합리를 추구하는 시스템이 도입되고 나면 정작 환자들은 정말 필요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단순하고 단기적인 해결책만을 제공받게 되어, 장기적으로는 큰 문제를 초래하는 비합리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간편 주문과 같은 시스템이 의료계에 도입되는 것은 금지해야 한다.전공과 관심사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의료 산업에 맞추어 책을 이해하게 됐다. 조지 리처가 말하는 맥도날드화의 통일성, 표준화, 단순화에 따른 효율성, 계산가능성, 예측가능성은 모두 의료 산업에 있어 필요한 부분이 있는 반면 의료계를 크게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위험도 갖고 있었다. 책에서는 정말 다이나믹한 사례들이 소개되고 있기에, 의료 산업다.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를 읽고인간은 행복을 추구하고, 때론 갈구하며 자신의 삶의 방향은 행복을 이루는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한다. 인생의 대전제로 행복을 내세운 만큼,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행복이 무엇이며,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 매뉴얼을 갖고 있다. 이 책은 그 ‘메뉴얼’이 인간의 어떤 착각과 성향, 그리고 경험 때문에 만들어지는지를 논한다. 당사자가 아니고선 정확히 알 수 없는, 타인의 행복을 평가하는 것은 무슨 기준을 가지는지, 행복의 척도는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지, 행복을 연구하는 것을 어떻게 측정하여 과학이라고 칭할 수 있는지, 인간이 상상하는 ‘미래’란 정말로, 말 그대로 ‘미래’인지 등 성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생각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생각지 못한 답변을 제시한다.이 책을 읽을 때, 행복을 다루고 있는 책이라고 해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쯤이면 저자의 서문을 읽을 때 보다 행복해져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면 안 된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관점들이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고, 앞으로 나는 나의 가치관을 어떻게 정리해야하는지 혼란스러운 지경에 이른다. 또 그 혼란에 대한 정답을, 이 책에서는 제공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책을 읽게 된다면, ‘그럼 이건 이런 의미이고, 이런 결론이겠군.’ 이라는 판단보다는 ‘ 아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그 경험이 그런 의미를 가졌구나.’ 와 같이 과거의 자신을 되돌아보고 과거의 자신이 저자가 제시하는 모델과 얼마나 일치하는 지를 확인하고 감탄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읽는 것이 가치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 가장 큰 2가지 이유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첫 번째는 개개인의 상상, 기억, 지각에 관한, 행하고는 있었지만 인지하지는 못했던 정보들이 ‘타인의 행복에 대한 나의 입장’을 더욱 현명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학과 특성상 아픈 이들을 많이 마주한다. 나의 경우에는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은 암 병동에서 소아암 환아를 찾아가 놀이 봉사를 하고 있어 왕래가 더욱 잦은 편이다. 나는 항상 놀이 봉사 시간을 장난감 몇 개로 놀아주는 것으로 채우는 것에 대하여 큰 죄책감을 느꼈다. 활동 지침 상 그것이 정석이지만 놀이 봉사를 끝마치고 암 병동을 나설 때면, 항상 이런 생각을 했다. ‘무슨 죄가 있어 행복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을까. 고작 장난감 하나로 놀이 시간을 채우고 나오는 게 너무나 죄 스럽다. 저 아이들에게 어떻게 행복을 전달할 수 있을까’.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이것은 쓸데없는 걱정과 오지랖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책에서 ‘자신에게 부족한 경험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그 경험을 해본 사람보다 반드시 덜 행복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어쩌면 내가 간과하고 있던 부분에 대하여 정곡을 찌르는 한 문장이라 생각한다. 그 아이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에서, 나보다 훨씬 큰 강도의 행복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함부로 그 아이의 행복이 나보다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환자를 마주해야 하는 의료인이라면, 이러한 경험-확장 가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이 함부로 환자의 상황을 판단하는 것을 막고 그들을 더욱 융통성 있게 대하며 동정하지 않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나의 전공에 관련하여 저자가 주는 메시지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내용이 첫 번째 이유에 해당되는 것이라면, 두 번째는 저자의 행복에 관한 다양한 신선한 관점들 중 가장 와 닿고, 살갗으로 느낄 수 있었던 ‘느낌’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미래를 상상하는 일에 대해 다루고, 또 인간이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이유를 제시하며, 습관화 현상, 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 등 아주 다양한 행복의 과학을 다룬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모든 행복감과 관련된 요인들이 행해지고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기준’이 가장 인상 깊었다.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대체 무엇이 느낌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나는 맺음말에 있던 이 한 문장이 저자의 행복에 대한 모든 관점을 일축하여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단어에 집착하여 그것이 트로피라도 되는 양 그를 성취하고 얻어내려고 하지만, 사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행복도 결국은 느낌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중요한지 여부를 결정 짓는 ‘느낌’을 의식한다면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모든 관점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주관적 행복이 알맞은 형용사와 명사로 짝지어질 수 있는 이유는, 모든 인간 개개인이 느끼는 ‘느낌’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결정하는 ‘행복’의 여부 또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든 것을 ‘느낌’을 기준으로 한다. 예를 들면, 저자는 우리가 상상을 하는 것은 인간이 통제에 대한 열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상상을 통해 미리 느껴보는 것이다. 우리가 통제력을 상실하면 인간은 불행하고, 무기력해진다고 말한다. 결국 우리가 상상을 하는 것도, 불쾌한 ‘느낌’을 피하고, 미래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통해 좋은 ‘느낌’을 얻기 위해서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 나간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의 ‘느낌’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고 있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이러한 관점은 나의 현재 ‘느낌’을 무시하고 억누른 채 생활하는 것이 익숙하고, 현명하다고 믿었던 내게 매우 큰 부분을 시사했다. 모든 행동과 사건의 기준이 스스로의 ‘느낌’이라는 설명은 우리가 무언가 대단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현재의 느낌을 무시하고 인내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그다지 큰 행복을 안겨주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현재의 느낌을 무시하고 고통을 감내하는 과정을 겪더라도 미래를 위한 투자는 분명히 행복감을 높일 수 있는 합리적인 것이라는 생각에도 물론 일리는 있다. 나또한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결국에는 느낌이 전부라는 대전제가 생기고 나니, 지금의 느낌을 무시하고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느낌을 무시하고 다른 방향으로 행복감을 높이는 것이 굉장히 복잡한 절차를 거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예컨대, 우리가 무언가 큰 성취를 기대한다 하더라도, 그 이면에 저자가 말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 위력’이 분명히 발휘되고 있어서,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감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적응 현상 때문에 어떠한 목표를 끝끝내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그 만족감과 긍정적인 정서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요인이 작용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가장 간단하고 쉽게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이것저것 생각할 필요 없이, 말 그대로 나의 느낌에 집중하여 행동하고 결정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이 위의 두 가지라면, 한 가지 동의하지 않는 부분 또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습관화’를 극복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경험을 해 보거나, 반복되는 경험 사이사이의 시간 간격을 늘리라고 말한다. 또, 이를 시행할 때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방법을 함께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즉, 다양성을 늘리면 시간 간격을 좁혀야 하고, 시간 간격을 늘리면 다양성을 좁혀야 한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는 하나의 연구 결과를 보여준다. 하지만 나는 이 이론이 행복감을 증진시키는, 그 특정 활동이 만약 ‘성취’가 가능한 종류의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즉, 저자가 예시로 들었던 맛이 있는 무언가를 먹는다던가, 어디에 놀러간다던가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달성할 작더라도 명확한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것이라면 습관화를 극복하는 것에 다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나와 나의 연인은 댄스 스포츠를 취미로 함께 한다. 우리는 이를 취미로 갖고 있기 때문에 어느 대회에 나가서 상을 타야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배우고 있는 차차차나 자이브 등을 ‘스텝을 틀리지 않고 맛깔나게 추는 것’을 명확한 목표로 하고 있다. 우리의 이 작지만 거창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같은 춤을 반복적으로, 매일 매일 연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는 함께 이 취미를 갖고 똑같은 춤을 반복하여 연습하는 과정에서 매일 조금 씩 성장하는 춤 실력, 서로 간의 호흡 등을 마주하며 큰 행복을 느낀다. 말하자면, 자그마한 성취가 지속되어서 반복되는 활동에서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저자가 말하는, 상황에 적응하여 행복감이 떨어지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은 적용될 수 없다. 시간 간격을 늘리거나, 다양성을 늘려버리면 매일 달성하는 작은 성취들이 없어질 것이고,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습관화를 극복하게 하겠지만, 분명 우리의 행복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만약 행복감을 주는 활동이 작은 목표들을 세우고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면, 다양성을 늘리거나 시간 간격을 넓히지 않아도 활동 내에서 달성하는 ‘성취감’이 충분히 습관화를 극복하게 하고 일정 수준의 행복이 유지될 수 있다는 이론을 추가하고 싶다. 이는 내가 예시로 들었던 댄스 스포츠 뿐만 아니라 운동, 캘리그라피 연습, 인물화를 그리는 취미 등 큰 범위의 활동에 해당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학의 쓸모 서평 보고서사회학을 처음 접하고, 평상시에 자기 개발서나 수필을 즐겨 보는 내게 이 책은 매우 어려웠다. 두 번째 읽을 때에도 저자의 서술 의도를 잘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아, 체크를 해 두었던 부분들은 세번, 네 번씩 반복하여 읽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점이 많았다.이 책은 사회학이란 무엇인지, 사회학을 왜 일반인도 접하여야 하는지, 그렇다면 사회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지막으로 사회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이 4가지 단계는 우리의 삶에서 사회학이 어떠한 쓸모를 가지는지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사실 사회학이라는 학문은 정말로 필요한 것 위주로 공부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내게 그리 쓸모 있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알아 두면 좋을 교양정도로 선택했던 수업이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돌아보면, 수업의 절반이 지나기 전에 사회학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좀 더 의미 있는 학기를 보낼 수 있게 된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된다. 아직 사회학에 대한 갈피를 잡은 수준에 머물러 있어 서평 보고서를 정갈하게 정리된 내용으로 쓸 수 없겠지만, 이목을 끌었던 사회학의 역할들을 뼈대 삼아 서평을 쓰고자 한다.사회학이란 무엇인가? – 사회학적 상상력.사회학의 역할 중에서 제일 눈길을 끌었던 것은 사회학적으로 상상하는 힘을 다룬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연결하고 그것이 내게 영향을 끼치는지 평가하는 도구로 사회학을 채택할 때 그것의 쓸모가 증명된다는 문구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 중 개인의 문제를 사회의 문제와 연결 지어 생각하고 해결책을 찾는 성향을 가진 이가 얼마나 될까? 오히려 필자가 접하고 있는 네트워크 안의 여론이나, 실제 지인들과 형성하는 오프라인 관계 속에서는 자신의 문제를 사회 구조의 모순에서 찾는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사회학적 상상력’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로 하여금 한번도 인간 사회에 ‘이상’을 제시하는 것인가 하는 결론은 사회학이 무엇인지를 공부하게 되면 고정관념처럼 자리를 잡는 것 같다. 책을 읽어보면 이것이 오류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오류라는 것이 참 어렵다. 읽으면 읽을수록 사회학이란 참 ‘애매하구나’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오류라는 것은 말하자면 ‘궁극적인 목표’를 제시하는 성격의 학문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 유지되고 있는 세계가 어쩔 수 없는 불합리 가운데에서 최선이어서 ‘대안이 없음’은 아니라는 거다. 중요한 것은 궁극적인 이상향을 고안해 낼 ‘능력’이 있는지, 그리고 이 세계를 최선이라 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지 라는 건데, 이게 참 어렵다. 그런데 이러한 애매함의 어려움 속에서 얻은 나름대로의 결론은, 이 애매함이 사회학의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애매한 위치를 지키며 사회를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사회학의 본분이고, 사회학 고유의 위치와 시선은 사회에 대한 비판을 만들어내어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것을 통해 사회를 이해하고 고민거리를 갖게 한다고 생각했다. 책에서 표현한 ‘영속적인 위기상태’란 바로 이런 사회학의 시선과 일맥상통하는 듯 하다.사회학을 왜 하는가? – 누군가를 위한 사회학적 메시지지그문트 바우만이 어떤 세대를 위해 글을 쓰느냐는 질문에 답한 내용이 인상적이다. 정해지지 않은 그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될 것이라 예상하여 보내는, ‘유리병 안의 메시지’ 는 그의 집필 의도를 파악하게 하는 좋은 비유인 것 같다. 사회학 저서를 쓸 때, 그것이 현대세대를 위한 것이냐, 미래 세대를 위한 것이냐를 따지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사회학이 어떠한 맥락으로도 해석되고, 필요시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듯 하다. 미래에 반드시 발생할 사회의 피해자가 사회학을 채택했을 때, 병 속에 든 메시지는 ‘실패는 일시적이지만 희망은 지속적이며, 가능성은 파괴될 수 없고 역경은 단단하지 않다’ 라는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다고 한다. 참 매력적이다. 사회의 구조를 알고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야다.사회학을 왜 하는가? – 유명인에 대하여책에서는 지식인이 아이돌화 되고, 사회학을 공부하는 세대가 그것의 흐름을 보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회인의 신선한 저서, 개별 활동만을 연구하는 현상을 지적한다. 이것은 비단 사회학의 문제만은 아니다. 지식인이 유명인이 되는 것이 문제된다기 보다는 유명인이 제공하는 것은 무엇인지, ‘미디어크라시’인 것은 아닌지 보아야 한다는 건데, 이 책에서 지적하는 부분에 대해 크게 공감한다. 나도 대중의 일부가 되었을 때, 유명 학자들의 연구와 기사를 그저 ‘엄청난 것’ 또는 ‘핫 이슈’ 정도로만 생각하고, 딱히 그 학자가 연구하는 학문의 전체적 흐름 속에서 그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회학의 역할은 바로 이러한 현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우리가 학문을 바라볼 때 가져야 할 시선에 대한 선택지를 주는 것일 것이다. 정말로, 이 문제는 유명인이 대중과 대화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거나 하는 개별 지식인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대중이 공공의 문제로 바꾸어 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사회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 사회학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사회학은 현실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사회학적인 대안을 제시하여 혼자서 문제 해결에 애쓰는 것을 돕고 희망을 준다. 지그문트 바우만에게 ‘왜 일반인들이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당신 말을 따라야만 하죠?’ 라는 짓궂으면서 재미있고, 예리하다. 나는 이에 대해 ‘선택권’이 생기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사회학의 역할은 특정 가치를 강압하는 것이 아닌, 현실적인 선택지들을 부여하는 것이다. 나의 행동에 대해 면밀히 검토하고 개선하려는 태도를 갖게 하는 것에도 사회학은 도움을 준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답변과 나의 의견은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는 동등한 기회를 주기 위해 노력하고, 더 나은 선택지를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는 것이 사회학자의 역할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반인들이 사회학자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기 할 수 있겠지만, 그 사회를 고려하여 선택지를 주는 사회학이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들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동등한 기회를 부여 받지 못한 이에게 자유로 가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 생각된다.사회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 은유와 사회학 설명은유는 적절한 개념의 연결망이라 말하며, 은유를 통해 사회학적 개념을 표현하는 것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게 한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은유라는 것도 결국 배경지식이 우선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제시하는 다양한 사회학적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은유적 표현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모호한 개념을, 더욱 헷갈리게 했다. 예를 들자면, 책의 초반부에 나오는 ‘마법의 커튼’에 관련된 내용이 있다. 이 커튼은 진실을 가리고 있는데, 전설로 판명 돼 믿음이 실추된 것을 새로운 스토리로 대체하기 위해 구멍난 곳을 메운다. 그리고 현대 예술에서는 이 커튼을 파괴하는 ‘파괴적 제스처’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다. 이를 사회학적 소명과 연결하여 설명했는데, 나는 이 부분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커튼을 찢는다는 것은 사회 속에서 발견한 사회학적 개념의 모순을 드러낸다는 것이고, 구멍을 메우는 행위는 사회학에게 재해석을 요구하며, 이는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에 사회학의 소명을 잘 드러낸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학이라는 것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지 않고, 사회 안에 존재하며, 사회 그 자체이기 때문에 뚜렷한 연구 대상도, 목표도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기에 이러한 해석이 조금 모호했다. 사회학이란 이상적인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 학문이 아닌가? ‘궁극적으로 올바른’ 이론이란 없고, 사회에 맞추어 때때로 변화하며 사회 구성원들에게 현실적인 의문거리와 선택지들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커튼이 가리고 있는 ‘이상’ 이란 존재하지 않는데, ‘무언가를 가리고 있다’ 라는 의미를 가지는 ‘커튼’ 이라는 사물이 어떤 특성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만약 평범한 사회 구성원인 우리가 사회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거부한다면, 사회학자들이 아무리 노력하고, 좋은 질문들을 던져도 그것을 수용할 주체가 없어 사회학은 무용지물인 학문이 될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블로그를 통한 사회학적 대화를 싫어하는데, 그 이유가 현대인들은 생각을 정착시키지 않고 서핑할 뿐이며, 블로그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은 유행의 논리를 따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우리는 정말로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우리가 크게 유의해야 하는 부분인 것 같다. 한국은 옛날부터 어떠한 이슈에 대해 반짝 하고 지는 빛 정도의 관심을 보이고, 그 관심 조차 개개인의 의견 보다는 대중의 여론이 ‘맞는 것’으로 치부되는 사회 분위기를 가졌다. 예를 들자면, 그러한 분위기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될 당시에도 만연했다. 비리가 발각된 당시에는 불타는 관심을 보였지만, 현재에는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사안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전과 같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 사람의 인성을 지적하고, 인격 모독적인 말들 만을 내뱉으며 화풀이 할 뿐, 그러한 사태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 위해 우리 대중이 가져야 하는 태도 등과 같은 정말로 필요한 고려에 대해서는 성숙한 시민 의식을 엿보기 힘들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사회 분위기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사회학적 소명이 진정으로 달성되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학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자신만의 경험을 토대로 한, 자신만의 사회학적 생각을 공고히 하여 정착시키는 노력을 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사회학자들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 그리고 현실적인 선택지 등을 그저 일시적인 유행으로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며 지식을 정착시키려는 시도가 있어야, 사회학이 진정으로 발전하고 알맞은 곳에서 활용될 수 있을 것 같다.책을 읽고 나니, 사회학이 나의 일상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끊임 없이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함께 변혁을 겪어가며 일반인들에게 물음을 던지고, 일반인들 자체겠다.
무너지는 환상 서평 보고서현대사회와 사회학 수업을 들으며 읽은 3권의 책 모두, 잘 읽히지 않고, 수많은 생각 거리를 던져 주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책을 읽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이 책은 특히 그러했던 것 같다. 내게 많은 생각 거리를 안겨 주었다. 필자는 교양 수업 중의 ‘역사의 제국들’ 과 ‘전쟁과 역사’ 라는 두 수업을 이번 학기에 함께 듣고 있다. 이는 필자가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역사에 대해 무지해 택한 두 가지 수업이었다. 두 수업 모두 한 분의 교수님께서 진행하시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을 얻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두 수업을 들으며 세계 역사의 흐름을 조금은 이해한 바 있다. 본 책의 서평에서 필자가 들었던 교양 수업의 이름과 그 내용을 언급하는 까닭은, 이 책을 읽으며 이해한 모든 것들과 정립한 생각, 나름대로의 답이 모두 두 수업에서 배운 배경 지식과 두 수업을 진행하시는 한 분의 교수님의 가치관과 연관 되어 있음을 깨달 았기 때문이다. 자유 방임에 가까운 시장 경제를 옹호하는 교수님의 수업을 듣고 있는 입장에서 이 책을 읽으며 방지턱에 차가 걸리는 듯한 기분을 여러 번 느꼈다. 달리 말해 불편한 부분이 몇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배경 지식도 부족하고, ‘바람직한 시장’에 관한 진지한 고려가 아직은 부족하기 때문에 책을 읽으며 무조건적으로 불편하고,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경험을 했다기보다는 이 책을 통해 다른 관점에서 시장을 바라보는 경험을 할 수 있어 뜻 깊었다고 생각한다.책을 읽은 후, 책의 저자에 대해 조사하는 습관이 있어, 이 책을 읽은 후에도 마찬가지로 책의 저자에 대하여 조사하였다. 수많은 웹 문서들이 모두 하나같이, 그를 ‘저명한 마르크스 주의 이론가’라 칭하였다. 나는 그가 마르크스 주의 이론가 임을 이해하자, 그가 왜 책에서 지금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것이 ‘시장의 실패’가 아닌 ‘바람직한 시장 형성의 실패’라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그는 자본의 경쟁적 축적 과정에서 경제 위기는 빈번하게 일어나고, 이는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고유한 경향이며,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체제일 뿐임을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증거라고 지적한다. 또한, ‘자본가들은 잉여 가치율 즉 임금 대비 이윤을 늘리는데 성공 했을지 모르지만 이윤율, 즉 총투자 대비 이윤을 늘리는데 실패했다, 경제 위기는 언젠가 일어날 사고였던 셈’이라고 말했다.임금 대비 이윤을 늘릴 수는 있었지만, 총투자 대비 이윤을 늘리는데 실패했다. 이 말은 무슨 말일까? 노동자에 지급하는 임금 대비 이윤은 늘었지만, 임금 외의 자본 투자 모두를 고려했을 때 자본가가 모든 산업 과정에 투자한 총 금액 대비 이윤을 얻는데 실패했고, 그로 인해 시장 경제가 붕괴하며 경제 대공황이 왔다는 말일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반드시 발생하는 현상일까? 이러한 현상을 막을 수는 없고 오로지 저자가 주장하는 ‘계획 경제’만이 답이 될까?계획 경제가 자본 주의 체제 아래의 자유 방임주의 시장 경제보다 유리한 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비효율적인 자본 투자를 막고 일부 산업을 국유화 하여 노동자들에게 이득이 돌아가도록 한다든가, 사회 복지를 확대하고 기본 소득제를 통해 시장 경제 체제 안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높이는 등의 대안은 아마도 현제 대공황에서의 바람직한 대안이 될 수 있겠다. 하지만 ‘계획 경제’란 실현되기도 어렵고 성공하기도 어려운 체제라고 생각한다. 소련 정부가 붕괴하고 현 북한 체제가 ‘노동자를 위한’을 말하지만 결국엔 일부 고위층에게 자본이 집중되는 현상은, 극단적인 예시이긴 하지만, 계획 경제의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계획 경제를 위해 노동자의 감시 아래 일부 산업을 국유화 하고 기본 소득제를 실시한다고는 하지만, 이는 결국 시장에서의 국가의 역할이 강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의 역할 강화, 이는 노동자 권리 강화와 더불어 발생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현재 자본 투자의 실패와 지나친 자본 집중과는 또다른 측면에서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저자의 주장은 계획경제 체제에서 노동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과는 또다른 측면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반대하는 첫번째 이유가 ‘실현의 불확실성’이라면, 후자는특수 분야, 이를테면 의료 산업 등에서 나타나는 ‘실현의 비효율성’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빈곤 증대 , 실업자 증가 들의 부작용을 지적하며 사회주의가 그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지나친 계획 경제적인 정책은 자본주의와는 매우 상반된 것이었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사회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닌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또는 자유주의를 부정하지 않고 복지를 증대하고 빈부격차를 완화 하는 등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주장하였다. 그러한 사상을 ‘사회 자유주의’라고 칭하였다. 한국의 더불어민주당이 이러한 사회 자유주의를 중심 사상으로 하는 정당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속한 대한민국의 집권 여당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적인 정책 중 하나인 ‘문재인 케어’. 이는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 정책으로, 저자가 말하는 사회 복지 정책의 확대의 한 카테고리에 들어간다. 문재인 정부가 말하는 문재인 케어를 통해 비급여 항목들을 전부 국가가 관리한다는 것이고, 이는 의료 수가를 맞추는 역할을 하던 비급여 항목들이 많은 부분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의료 서비스 자체의 퇴화를 부를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가 간호학과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의료 산업에 대한 국가의 개입 자체가 의료 산업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대표적으로 간호 간병 서비스가 도입되면 우선은 수도권 소재 병원으로 서비스 시행이 집중될 수 밖에 없고, 이는 의료이용 양극화를 초래할 것이다. 또한 간호사의 업무가 치료를 떠난 환자의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관리하는 것으로 확장된다면, 안그래도 간호사를 자신의 시중 다루듯 하는 환자들이 많은 실정인데, 간병까지 한다고 하니 간호사의 업무 환경이 어떻게 되겠는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환자의 입장에서 아무리 비용이 저렴하더라도 치료 환경이 비위생적이고, 쾌적하지 못하며 의료진들의 불친절한 태도와 경쟁에 뒤쳐지는 낡은 의료 기술을 기뻐하겠는가? 아무리 국민들 중 의료 비용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비율이 OECD 국가 중 높다고 하더라도, 이는 의료 산업 자체에 국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특히나 생명과 직결 되어 있는 의료 산업에서 국가의 통제로 인해 지속적인 재정난을 겪고 업무 환경이 나빠진다면, 지금의 한국처럼 환자 친화적이고 세계적인 의료 기술을 보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필자는 이와 같이 계획 경제 체제 아래에서 반드시 발생하는 경쟁 퇴화의 문제가 있어서는 안되는 특수한 산업(이를테면 의료산업)이 있기 때문에 국가가 사회 보장 제도를 강화하기 위해 시장에 통제력을 갖는 것을 반대한다.마지막으로 저자가 말하는 제도에 대해 반감을 사는 요인은, 바로 ‘실현의 불가능성’이다. 그는 분명 경제 위기가 자본주의의 내제된 한계이며 극복 불가능한 것임을 말하면서도, ‘우리는 아직 단 한 나라에서도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못했고 거기까지 도달하려면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즉, 자신이 말하는 대안책이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저자의 말이 무책임하게 들렸다. 현재 발생하고 있는, 당장 해결해야만 하는 경제 위기가 우리 사회가 좇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말하며, 지금의 체제 안에서는 그것을 해결할 방도가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한편, 자신이 주장하는 대안은 실현되기 어려움을 인정한다는 것을 독자로 하여금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실현되기 어려운 대안이 ‘대안’일까? 나는 그 부분의 의문을 던지고 싶다. 이미 오랜 기간 자본주의 체제 아래 성장해온 세계 경제. 이를 돌이키기에는 이미 암묵적인 사회 내 질서가 생겼고, 자본가와 노동자가 생겼고, 많은 노동자를 관리할 수 있을 만큼의 권력이 자본가에게 생겼다. 이를 전복하기 위해서 혁명과 같은 급진적인 변화는 어려우므로 우리는 점진적인 사회 자유주의와 같은 형식의 변화를 도모해야 할 것인데, 완전한 체제 전환이 사실상 불가능함을 사회 자유주의 정당이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아무리 강하게 주장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 느냐는 것이다. 필자는 어떠한 문제에 대해 대안을 제시할 때에, 합리적이고 납득할 수 있는 대안과 함께 그러한 대안을 시행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이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부분이 없어 아쉬웠다. 제시되고 있는 대안은 매우 합리적이었고, 지금의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실현할 수 없기에 허무감을 느꼈다. 이러한 탁상 공론보다는 실패했더라도 레닌의 혁명의 나았을 성 싶다.자유 방임적 시장 경제 체제 아래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의 대안이 계획 경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계획 경제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그것이 현실에서 실현되기에는 이미 개인의 자유와 이윤 추구, 이기가 너무나 활성화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고있는 경제 위기가 왜 발생했는지는 알 수 있었지만, 그에 대한 대안은 듣지 못한 것으로 기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