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삶의 열쇠는 자아를 파악하는 것에 있다.이번 강의 때 본 일본 애니메이션 ‘늑대아이’를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살고 있지는 않은가’. 어쩌면 우리는 진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망각한 채 타인에게 의지하고 타인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늑대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늑대로 변한 모습을 숨길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모습이 마치 자신의 본래 성격이나 적성을 숨기고 직업의 안정성, 보수만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몇몇의 모습과 겹쳐 보였습니다.자연 속에서 ‘늑대’라는 자아를 인정하고 산을 지키기 위해 떠난 아메, 그리고 사회 속에서 인간문화에 적응하고 인간으로 살아가려고 학교도 열심히 다니고 친구들과 잘 어울린 유키. 확실한 것은 두 명(혹은 두 마리) 모두 누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정체성의 혼란을 이겨내고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갈 어린 두 아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삶을 열심히 살기위해 노력했던 어린 아메와 유키는 현재 사회가 원하는 삶을 사려고 노력하는 저를 반성하게 하였습니다.또한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는 ‘모성애’를 잘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메와 유키가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면서도 결국 각자의 정체성을 찾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엔 아메와 유키의 엄마인 하나의 역할이 컸습니다. 하나는 아메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며 남편의 몫까지 열심히 두 아이를 키웠습니다. 편한 속세에서 벗어나 불편한 것 투성이인 외지에서 악착같이 살아가는 하나를 보며 아이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하나가 있었기에 그들이 정체성 파악을 잘 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었습니다.우리 사회에서 흔히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면 대부분 들어가는 부분이 ‘장래희망’입니다. 보통 꿈이라고 칭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미국인이 이런 인터뷰를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꿈을 물어보면 모두 장래희망을 대답하고, 또 꿈을 물어보는 사람도 장래희망을 대답하길 원한다. 그러나 미국은 그렇지 않다.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대답한다. 꼭 직업으로 한정되지 않아도 좋다.” 라는 식의 인터뷰였습니다. ‘늑대아이’ 속의 ‘하나’를 보는데 이 인터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실제로 늑대아이가 자식으로 태어난다면 과연 몇 명의 부모들이 하나처럼 그의 삶을 존중해줄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는 하나의 열린 사고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공무원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도 잘 모르는데 자기소개에 공무원이 꿈이라고 적는 아이들은 그저 부모님, 크게는 사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어린아이에게 미래를 정하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 압박일 수 있습니다. ‘하나’처럼 그들에게 시간을 주고,아메가 학교를 가지 않더라도 크게 꾸짖지 않고 그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응원해줄 수 있는 열린 사고가 우리 사회에 도입되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아메와 유키가 물론 정체성을 찾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메가 비바람을 뚫고 가족을 떠나 스승 대신 산을 지키러 갔던 길은 그 누구보다도 막막하고 무서웠을 것입니다. 또한 유키가 처음 늑대인 것을 소헤이에게 들켜 소헤이를 다치게 했을 때 유키는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과 또 한편으로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데 혼나는 상황이 억울했을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자아를 찾아 가는 길은 이들처럼 험난합니다. 저 또한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맞는건지 의심할 때도 많고 섣불리 맞다고 대답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아메와 유키처럼 낯선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이 선택한 힘든 길을 걸을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어떤 삶이든 책임지고 당당하게 펼쳐 나갈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늑대아이’는 어쩌면 현실성 없는 얘기일 수 있지만 ‘뭐든지 할 수 있지만 또 뭐든지 할 수 없는’ 청춘들에게 한 번쯤 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영화였습니다.
영화 뷰티풀마인드 감상문"존 내쉬 박사의 게임이론이란 무엇이며, 현실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우리는 사는 동안 수없이 선택하고, 때론 만족하고, 후회한다. 영화 ‘뷰티풀마인드’에서도 주인공 존 내쉬의 선택이 이야기를 이끌고, 존 내쉬 박사의 삶을 완성한다.존 내쉬 박사는 괴짜천재 소리를 듣는 고지식하고 혼자 있길 좋아하는,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똑똑한 학생들만 다닐 수 있는 프리스턴 대학원에 ‘This man is genius.’라는 추천서로 합격하기도 한다. 보이는 모든 것을 탐구하고 기록하는 습관을 가진 존 내쉬는 새들이 길거리에 행보하는 것까지도 점으로 나타내며 규칙을 찾아낸다. 젊은 나이로 교수를 하고, 가르치던 학생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던 존 내쉬는 조현병이 걸리기 전까지는 나름 순탄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존 내쉬 박사는 어느 날 정부 비밀요원 파처를 만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스파이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고, 자신뿐만 아니라 아내까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내에게도 숨기는 게 많아지고 차갑게 대하기 시작한다. 다행히 아내가 그런 존 내쉬를 이상하게 여기고, 존 내쉬가 허상에 빠져있음을 알게 되면서 존 내쉬가 조현병을 앓고 있음이 나타난다.평소 조현병 환자들의 시선에서 생각해 본 적 없다. 단순히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존 내쉬 박사를 보면서 그들 입장에서는 그들의 행동이 지극히 정상적이고,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자신이 괴로울 것 같았다. 하지만 존 내쉬 박사는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내고 계속 공부를 했다. 학교에 가면 환상 속 인물들이 괴롭히지만 무시하려고 노력하고 끝없이 연구한 끝에 게임 이론, 균형 이론을 완성하며 노벨상을 받게 된다.존 내쉬 박사가 게임 이론, 균형 이론을 발견한 배경은 흥미롭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금발 미녀를 사이에 두고 누가 미녀와 잘 될 수 있을 것인가로 얘기를 했다. 친구들은 애덤 스미스의 이론을 언급하며 모두 금발 미녀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존 내쉬는 ‘어차피 미녀의 남자친구는 1명만 될 수 있으니 만약 금발 미녀가 아닌 금발 미녀의 친구들도 고려한다면, 모두가 잘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주장을 한다. 이렇게 균형이론이 시작하게 된다.존 내쉬 박사가 제시 한 게임 이론부터 설명해보자면, 둘 이상의 경쟁자가 각각 최적의 행위를 결정하는 의사결정이론이다. 내쉬 균형 이론은 상대방의 전략을 알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지는 이론으로, 자신이 최적의 전략을 선택함으로써 형성되는 최적 선택의 짝이다. 즉 상대방의 전략이 공개되었을 때 어느 누구도 자기 전략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 전략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략 구성이 모든 참여자에 의해 모두 예측되었을 때 이 게임은 내쉬 균형에 도달한다.쉽게 말해 애덤 스미스의 ‘경쟁에서 개인의 노력은 집단의 이익에 기여한다’라는 이론의 반박으로 존 내쉬는 ‘최고의 결과는 집단 내 개인이 자신은 물론 집단의 이익을 위해 움직여야 나온다.’라는 결론을 이끌며 균형 이론을 발견한 것이다.‘죄수의 딜레마’는 균형이론을 제일 잘 나타내는 사례라고 볼 수 있는데 용의자가 두 명 있다고 가정했을 때 두 명 다 부인, 자백이라는 두 가지의 선택지를 가질 수 있다. 두 명 다 부인하면 석방할 수 있지만, 만약 상대방이 자백한다면 본인이 자백했을 때보다 더 큰 형량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가장 적은 형량을 받을 수 있는 자백을 하는 것이 두 명 다 최적의 선택으로 볼 수 있다.
계정봉 2주차(계명의 탄생)계명대학교의 역사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계명의 실질적인 역사는 19세기 후반부터 태동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한국은 1876년에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맺고 개항을 하게 됩니다. 개항을 통해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전파되었고, 또 외국문물도 적극적으로 유입되었는데요.특히 1884년 9월 2일 호러스 알렌이 의료선교사로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는데, 우리나라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이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 즉 기독교가 대구에 처음 전래된 시기는 1893년입니다.미국 북장로교회 배위량 선교사가 1890년 부산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하다가 1893년 4월 22일 조랑말을 타고 부산을 출발해 대구를 방문한 것이 그 시초라고 볼 수 있는데요.이 때 배위량 선교사 일행이 대구에 머문 시기는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4일간이었다고 합니다.2년 후인 1895년 12월, 배위량 선교사는 대구에 다시 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 대구 읍성 남문 안에 집을 장만한 후 4월에 부인 안애리 여사와 아들을 데리고 대구로 이사를 하게 되죠. 하지만, 배위량 선교사는 1896년 하반기에 서울에서 열린 선교사 연례회에서 서울지역 교육담당고문으로 발령을 받게 되어, 1896년 11월, 대구의 선교업무를 그의 손아래 처남인 안의와 선교사에게 인계하게 됩니다.그리고 배위량 선교사는 1897년 활동 지역을 평양으로 옮겨 숭실대학교의 전신인 ‘숭실학당’을 창설하였습니다.대구 최초의 기독교회인 ‘대구제일교회’는 기와집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살펴보도록 할까요?1867년 5월 2일 미국 인디애나주 맥코이에서 태어난 안의와 선교사는 1894년 미국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한 후 1895년 5월 29일 태평양을 건너 부산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누나 안애리와 자형인 배위량 선교사가 4년 전에 와서 미리 터를 닦아 놓은 한국에서 선교를 하기 위해서였는데요.부산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제중원에서 시작, 1949년 종합병원, 1980년 계명대와 병합, 1982년 동산의료원의료선교박물관, 은혜정원 – 1999 대구시 유형문화재 지정, 선교사와 그가족들의 바람과 꿈이 함께 잠들어 있는 무덤사과나무 – 장인차 선교자동산캠퍼스 – 박태준의 동무생각의 배경4주차 계명정신1개척정신지금 계명대학교는 설립 60주년 환력(還曆)을 지나 미래로 나아가고 있습니다.그간 계명대학교는 격동의 우리나라 역사와 함께 하면서 경이로운 발전을 이루어 3개의 아름다운 캠퍼스, 전국 10위안에 드는 학생 수와 교수진을갖추고 우수 인재를 교육하는 명문 사학으로 발전했습니다.대체 이러한 저력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계명대학의 이러한 저력은 계명정신인 개척정신과 봉사정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먼저, 개척정신부터 살펴보도록 할까요?계명대학교는 그 설립부터 도전적 개척정신의 산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선교사의 삶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개척정신은 험난한 현실 속에서 역경을 이겨내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나갈 계명인에게 중요한 정신으로강조될 필요가 있는데요.이질적이고 낯선 땅에서 새로운 종교 신념을 펼치고 그 신념을 사랑의 방식으로 용기 있게 드러내려고 노력한 선교사들의 삶 속에서 자신이 믿는종교와 관계없이 큰 용기와 개척정신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개척의 사전적 의미는 거친 땅을 일구어 논이나 밭과 같이 쓸모 있는 땅으로 만드는 것, 또는 새로운 영역, 운명, 진로 따위를 처음으로 열어나감이라는 뜻입니다.이러한 개척정신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음 세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요.우선, 개척정신은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자기사랑을 실천하는 한 방식입니다. 식물이 접붙이기를 통해 타고난 본성을변화시킬 수 있듯이 낯선 것과의 용기 있는 창조적 만남을 통해 우리는 크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만약 개척정신이 없다면 우리는 현실에 적응하는데급급하며, 타율적 삶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또한 개척정신은 자율적인 삶을 살아내는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창조적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는 ‘생존의 이치’ 자체임을 갈파했습니다.공자는 또 친구 교제에 있어서도 사귀어서 유익한 친구로 ‘정직한 사람’을 꼽고, 그에 반해 해가 되는 친구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할 뿐 성심이 없는사람’을 지목했습니다.‘정직이야말로 최선의 방책이다’는 말처럼 정직의 가치는 많은 거짓과 기만이 펼쳐지는 현대인의 삶 속에서 그 중요성이 날로 더 높아가고 있습니다.많은 경우 우리가 정직하지 못한 것은 거짓과 기만이 자신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 잘못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짓은 더큰 거짓을 낳을 따름이며, 작은 것을 얻는 대가로 더 큰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게 합니다.양심에 충실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정직할 때 정직은 신뢰와 믿음이라는 더 큰 자산을 우리에게 제공해줍니다.우리는 타인을 속이는 것보다 자신을 속이고,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을 수 있습니다.정직은 자기 사랑의 실천일 수 있습니다. 또한 정직은 타인을 기만하지 않는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로서 인간관계를 풍요롭고 올바르게 정립시켜줍니다. 거짓과 기만에 기초한 성공과 행복은 모래 위에 성을 쌓는 어리석은 시도라는 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셋째, 절약.절약은‘함부로 쓰지 않고 꼭 필요한 데에만 써서 아끼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에너지와 물자, 그리고 재화의 남용으로 부존자원이 날로 고갈되어 가고 환경오염과 빈부격차가 갈수록 심해져 가는 지금, 절약은 우리 인류의삶에서 매우 중요한 실천덕목의 하나인데요.절약에서 ‘절’자는 한자로 ‘대나무의 마디’를 뜻합니다. 이 글자가 뜻하는 바가 의미심장한데요. 대나무가 만약 마디를 짓지 않고 분에 넘치게웃자람을 계속한다면 어떻게 될까요?결코 대나무다움의 본질인 곧음을 유지하지 못하고 휘거나 굽어지고 말게 될 것입니다.이처럼 절약은 적절하게 ‘자기통제’ 내지 ‘자기관리’를 하는 절제의 기초 위에서 시간과 돈이나 물자 따위의 사용과 음식물 섭취량 등을 합리적으로조절하는 것입니다.즉, 절약은 아까워 덜덜 떨며 무조건 쓰지 않는 것이 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강인구 목사는 영천 금호교회와 영천 제일교회에서 시무하는 동안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동노회장을 세 차례 역임했고, 대구 서남교회 재직 시에는1961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50년부터 3년간 모교인 계성학교 법인이사를 거쳐 1954년 계명대학교설립자로서 오랜 기간 법인이사로 재직하면서 우리나라 기독교 학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이에 계명대학교는 1989년 강인구 목사에게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대학의 설립자와 이사로서의 학교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오래도록기리고자 1983년 준공한 인문대학과 사범대학 건물을 그의 아호를 따서 ‘영암관’이라 명명했습니다.여기서 영암은 계명대학교 명예총장 신태식 박사가 강인구 목사의 고향인 영주의 ‘영’자와 바위 ‘암’자를 따서 ‘영주의 큰 바위’란 뜻으로 지어준아호입니다.계명기독대학 초대학장 감부열 목사1890년 9월 28일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 조지타운에서 태어난 감부열 선교사.그의 나이 열살 때 워싱턴주 시애틀로 이사를 하여 워싱턴대학교 바로 옆에서 살았기 때문에, 감부열의 다섯 형제는 모두 워싱턴대학교를 졸업했는데,감부열의 전공은 토목공학이었다.1913년 워싱턴대학교를 졸업한 감부열은 뉴저지주 프린스턴을 여행하면서 선교사역을 하기로 결심하고 프린스턴신학교를 진학해 1916년 졸업했다.그리고 같은 해 9월 27일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헬렌 오트와 결혼을 하게 된다.결혼 후 감부열과 헬렌 오트는 한국선교사를 선택해 시애틀의 유니버시티장로교회에서 성직서임을 받고 1916년 12월 9일 한국에 왔다.그곳이 바로 평안북도 강계였다.26세에 평안북도 강계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한 감부열은 그곳에서 24년간 선교활동을 하게 됩니다. 강계 주민들은 헌신적인 봉사활동과 목회활동을하고 있던 감부열을 존경해 그 마을에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습니다.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불가피하게 본국으로 돌아간 감부열은 여러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이어갔습니다.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면으로 남겨 놓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정체성을 가졌다고 확신할 때 비로소 그 모습을 그려넣겠다는 뜻이죠.그래서 이 벽면은 우리의 자세를 바로 잡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명대학교의 정체성 확립은 구성원 전체가 추구하는 영원의 목표일것입니다.또한 본관 전면 벽에는 지난 1736년 조선조 영조시대에 대구읍성을 축조할 때 사용된 성곽돌들이 박혀 있습니다.이 성곽돌들은 20세기 초에 일본인들에 의해 대구읍성이 해체되면서, 여기 저기 흩어져 계성학교와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구해,본관 신축을 하면서 여기에 부착한 것인데요.이는 지역적으로 대구에 위치한 계명대학교가 우리 고장과 우리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계승하며 발전시킨다는 다짐을 하고자한 것입니다.다음은 행소박물관입니다. 행소박물관의 행소는 계명대학교 신일희 총장의 아호로 소박하고 겸허하게 행한다는 뜻입니다.2004년 개교 50주년을 맞이하여 신축하고 개관한 행소박물관은 지하 1층과 지상 2층의 연면적 약 6,700㎡의 규모입니다.행소박물관 제1전시실에서는 계명의 역사자료와 구석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까지의 문화상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고요.제2전시실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을 상설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국내외 특별 전시 뿐만 아니라 교육, 답사, 발굴,체험행사 등의 다양한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다음은 명교마을입니다.박명교 여사는 우리 학교의 이사와 이사장을 지내면서, 본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분으로 특히 1962년 당시 거액의 발전기금을 헌납해대명캠퍼스에 여학생 기숙사를 건립해 희사했던 분입니다.또한 박명교 여사의 부군인 의양 정재호 명예이사장도 거액의 발전기금을 기부했습니다.이에 성서캠퍼스에 새롭게 조성한 학생과 외국인 교원의 기숙사 촌을 박명교 여사의 이름을 따서 명교 마을이라고 했습니다.1989년 3월에 4개 동 277실 610명 규모로 개관한 이래 2001년 9월에 추가로 2개동을 준공했고, 이어 2002년 1월에 2개 동을 추가로 준공했습니다.그리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