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CMIM)의 의미와 전망-CMIM의 아시아 통화기금으로의 성장, 그 속에서 한국의 역할을 중심으로--목 차-Ⅰ.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의 의미1) CMIM의 탄생과 발달배경2) CMIM가 가진 의미Ⅱ.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의 전망1) 단일 통화체제로의 성장 가능성2) CMIM의 발달과 성장에 있어 한국의 위치 및 역할Ⅲ. 결론Ⅳ. 출처 및 참고문헌Ⅰ.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의 의미1) CMIM의 탄생과 발달배경1997년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1997년 7월 태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는 순식간에 주변국으로 확산되었고, 당시 한국이 겪었던 ‘IMF 사태’도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겪었던 외환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 이후로 동아시아 국가들은 개별 국가들이 각자 현재의 국제금융시장의 상황대처를 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지하였다. 그 결과 1999년 11월 개최된 제 3차 ASEAN+3 정상회의에서 동아시아 역내지원 메커니즘 강화 원칙에 있어 합의가 이루어졌고 2000년 5월 제 2차 ASEAN+3 재무장관회의에서 아시아 국가들은 아시아 내에서 더 이상 금융위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합의를 하기 위해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를 출범시킨다. 역내 위기가 발생할 시 통화스왑을 통해 자금을 지원해 주는 내용에 대한 합의였는데, 이 합의를 통해 외환위기 발생시 자국통화를 담보로 역내 국가로부터 일정시점에서 결정된 환율로 외국 통화를 차입할 수 있게 되었다.이후 2006년 5월 인도 하이데라바드에서 개최된 제 9차 ASEAN+3 재무장관회의에서는 CMI 다자화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후 2009년 5월 3일 개최되었던 ASEAN+3 재무장관 회의를 거쳐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에 관한 주요 쟁점에 최종적으로 합의하였다. 분담금은 한국 16%, 중국과 일본 각 32%, 아세안 20%씩 분담하기로 합의되었으며, 분담금 대비 인출배수는 중국과 일본 0.5, 한국 1,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필리핀이 속한 아세안 빅5 국가는 2.5, 나머지 아세안 국가는 5.0으로 결정하였다. 한국은 위기시 분담금의 16%를 받을 수 있으며, 금융위기 가능성이 높은 국가일수록 더 높은 분담금 대비 인출배수를 가진다. 총 스왑규모를 1200억달러로 확대하며 각 국의 분담금 규모를 확정하는 등의 결정을 내렸고, 이에 따라 한국은 1200억달러의 16%인 192억달러를 분담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마침내 2010년 3월 24일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가 출범하게 되었다. 이후 2011년 5월 거시경제 감시기구인 AMRO가 출범하고 역내 독자적인 글로벌 경제분석 기관을 설립하여 아시아의 경제변화를 보다 면밀히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2012년 5월 회의에서는 한국과 중국, 일본이 국채투자 프레임워크에 합의하게 되면서 3국 외환보유액 통한 상호 국채투자를 확대하게 되었다. 나아가 CMIM의 규모를 기존 합의인 1200억달러에서 2100억달러로 확대하고 단독으로 쓸 수 있는 기금을 20%에서 40%로 확대하는 합의를 하였다. 2016년에는 CMIM의 규모를 2400억달러로 확장하여 한국은 CMIM 기금의 16%인 384억달러를 분담하고, 동시에 위기발생시 최대 384억달러를 지원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2) CMIM가 가진 의미상위 배경에서 살펴본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의 설립은 아시아의 독립적 통화기금의 설립이라는 데 그 의미가 있다. CMIM 이전에는 아시아만의 독립적 통화기금이 존재하지 않았다. 국제통화기금인 IMF가 그 역할을 어느정도 대신하고 있었으나, 아시아의 경제위기를 예방하고 막는 역할을 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아시아의 한 국가에서 발생하게 되는 경제위기는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와 같이 빠르게 확대된다. 따라서 더 심한 금융위기가 발생하여 아시아 전체로 영향이 퍼지지 않게끔 사전에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기구가 처음 설립되었다는데 그 의의가 존재한다. 다시말해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는 동아시아 역내 자원 매커니즘의 강화와 역내 외환위기 재발의 방지에 그 의미를 두고 설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CMIM은 긴급한 경제위기 상황에서 유동성 지원을 해주는 기능만을 담당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경제빈국을 위한 상시지원을 통해 위기예방기능을 확대하는 수준으로 계속해서 발전해왔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이를 계기로 역내 금융협력이 제도화되는 성과를 거둚과 동시에 활용 가능성도 눈에 띄게 상승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Ⅱ.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의 전망1) 단일 통화체제로의 성장 가능성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는 단일 공동펀드 도입과 자금규모의 확대, 합의방식 결정이나 투표권 배분 등의 점에서 획기적인 제도적 전환을 이루었다. 그로써 그동안 역내 긴급유동성 지원을 위한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국제 통화기금 IMF에 비해선 굉장히 미약한 제도임은 사실이다. CMIM의 꾸준한 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실효성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지적되어온 것이 IMF 연계비중이기 때문이다. CMIM은 IMF로부터 독립된 단일 통화체제로 성장할 수 있어야 향후 더 큰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현재 CMIM이 가입국 지원에 제공할 수 있는 금액 중 70%는 여전히 IMF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부터 세계각지에서 IMF에게 금융지원을 신청하게 되면 오히려 위기발생이 높은 국가로 낙인찍혀 모든 금융시장에서의 거래가 중단되거나 거래조건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IMF로부터 독립된 단일 통화체제로 성장할 수 있어야 CMIM가 근본적인 설립취지에 걸맞는 기구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점차적으로 IMF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비중을 점차 줄여나가는 것이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의 과제라고 볼 수 있다.이러한 측면에서 CMIM은 AMRO의 역량을 확대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AMRO는 IMF 연계를 축소하거나 제외하기 위해 설립된 역내의 독자적인 거시경제 모니터링 및 감시기구로, 2011년 싱가포르에서 출범하였다. AMRO는 역내 회원국의 거시경제 및 금융시장 상황을 모니터링하여 평가하고 분기별 보고서를 발간하면, 거시 및 금융분야에서 위험이나 취약성이 발견된 국가에 대한 개선정책을 수립하여 권고하는 역할을 한다. 나아가 AMRO는 자금지원을 요청하는 국가에 대하여 유동성 제공에 관련된 조건준수를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AMRO의 전문성이 충분히 확보되고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 기구가 된다면 CMIM이 적용하고 있는 IMF연계가 약화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를 통해 IMF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동아시아 단일 통화체제로 발전할 수 있게 된다.결과적으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가 단일 통화체제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AMRO의 성장과 발달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2021년 3월 31일 한국은행이 보도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 개정 협정문에서 IMF 비연계비율을 기존 30%에서 40%로 상향시킨 것으로 보아 그 전망이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2) CMIM의 발달과 성장에 있어 한국의 위치 및 역할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의 발달과 성장에 있어 한국은 중국과 일본에 이어 가장 영향력이 큰 세 번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2009년 5월 합의한 CMIM의 분담금 배분에서 중국과 일본이 32%로 가장 높고, 그 다음 한국이 16%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CMIM 내 중국과 일본의 각축 속에서 공정하게 캐스팅보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위치가 되었다. 캐스팅보트란 결정권과 같은 말로, 의회에서 의안의 표결 결과가 가부동수로 나왔을 때 의장이 직접 의안의 가결 및 부결 여부를 결정하는 것을 이야기한다.2021년 3월 한국은행이 보도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의 개정 협정문에서도 한국은 여전히 분담금 규모의 16%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출배수도 여전히 1배수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과 일본도 여전히 32%를 차지하고 있고, 두 국가의 힘이 CMIM에서 지나치게 거세지지 않기 위해서는 한국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 CMIM의 목적은 분명 회원국의 국제수지 보전 및 위기시 단기유동성 지원을 위해 설립되었으나, 국가별로 금전적인 관계에 얽혀 있는 협정이기 때문에 자금의 비중이 더 큰 국가로 힘이 몰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점차 체계화되고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CMIM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한국이 그 중재자 혹은 결정권자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현재 한국은 브루나이와 함께 2021년 ASEAN+3 금융협력회의 공동의장을 수행하고 있으며, 필자는 한국이 CMIM의 결정권자로서의 역할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을 거라고 전망한다.
SM 엔터테인먼트 기업분석 보고서-4차 산업혁명: 메타버스의 시작과 아바타 세상의 도래--목 차-Ⅰ. 머리말Ⅱ. 기업 소개1. 기업연혁 및 비전 소개2. 주요 사업영역 및 주요기술Ⅲ. 경영전략 분석기업환경 분석2. 기업전략 분석3. 기업 다각화 전략 분석Ⅳ. 결론Ⅴ. 출처 및 참고문헌Ⅰ. 머리말“끊임없이 말을 걸어주는 나의 aespa. 이런 교감, 너의 존재는 날 다른 차원으로 이끌었지.” 2020년 11월 SM 엔터테인먼트의 새로운 아이돌 aespa의 데뷔곡 가사다. aespa는 4명의 실존멤버와 그들의 아바타 4명을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당 가사는 실존멤버와 그의 아바타 간의 소통을 상징하는 대목이다.현재 우리 근처에서는 ‘메타버스’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4차 산업혁명 발달에 따른 AI 기술의 발전으로 가상공간 속에서의 만남이 가능해졌고, 그러한 ‘아바타’사업은 코로나-19사태를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비대면이 일상화되는 시대가 만들어졌고, 나아가 가상공간에서 사용자가 만든 가상 캐릭터를 통해 타인과 만날 수 있는 기술이 급속하게 발전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SM 엔터테인먼트가 고안해낸 사업이 AI 가상 아이돌 산업인 것이다.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대표는 aespa 그룹 속 4명의 실존멤버와 그들의 아바타 4명을 바탕으로 세계관을 구축하고, 확장시켜 나가는 것을 전제로, K-POP 아이돌 산업을 4차 산업혁명 기술과 접목시켜 나가고자 한다고 밝혔다. 나아가 이 대표는 "미래는 셀러브리티와 관계된 비즈니스가 더욱 중요해지는 세상"이고, "내가 좋아하는 셀러브리티의 아바타와 하루를 시작하고 일상을 보내는 세상이 올 것"이라며 "아바타들의 초거대 버추얼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라 주장했다.따라서 필자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서 SM엔터테인먼트의 경영전략과 향후 방향성에 대해 분석해보고자 해당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다.Ⅱ. 기업 소개기업 연혁 및 비전 소개1. 기업 연혁SM 엔터테인먼트는 1995년 설립된 대한민국의 연예기획사로, 2 그러나 다시 코로나-19 감염자 수가 증가하고, 거리두기 규제를 강화하게 되면 다시 모든 콘서트를 온라인으로만 감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다음 Economic, 경제적 환경 또한 코로나19의 타격으로 모든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큰 손실을 겪었다. 한국 CXO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대면산업으로 대부분의 수익을 얻는 엔터테인먼트 사들은 평균적으로 2019년에 비해 2020년 48.1%의 영업손실을 겪었다. SM 엔터테인먼트 또한 이 위험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실제로 앞서 제시했던 SM의 재무제표에 따르면, 2019년 404억의 영업이익을 창출했으나 2020년 영업이익은 65억에 그쳤다.다음 Social, 사회문화적 환경 분석에 따르면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팬덤 문화를 형성한다. 팬덤 문화란 같은 그룹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팬덤 이름을 만들어서 그들 간의 유대성을 강화 시키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SM 엔터테인먼트 아이돌 중 aespa의 팬덤 ‘MY’와 NCT의 팬덤 ‘NCTZEN’이 존재한다. 이들은 트위터나 팬카페 같은 SNS 상으로 만나 아이돌의 스케줄이나 소식을 주고받고, 시상식 투표나 음악 스트리밍 등 아티스트 지원을 위해 수많은 커뮤니케이션을 주고받는다.마지막으로 Technological, 기술적 환경을 분석해보면,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온라인 소통 방식들이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기존 아이돌 팬덤은 v앱을 통한 팬과의 생방송 소통기술을 활용했고, 팬싸인회나 콘서트를 통해 오프라인으로 만났다면 현재는 모든 서비스를 온라인으로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온라인 서비스 기술을 계속해서 도입시키고 있다.그 기술들은 온라인콘서트를 통해 발현되는데, 대표적으로 4차산업혁명의 AR 기술을 도입시켜 온라인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 SM 엔터테인먼트는 Beyond LIVE 공연을 통해 이를 선보였는데, 아티스트의 카메라 워킹과 실제 공간이 연동되는 AR 합성기술 Live Synk Walking을 도입하여 실시간 3D 그래픽으로 구현된한다. 세번째로는 ‘SMP’의 모방 불가능성이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SM 엔터테인먼트는 그들 만의 독보적인 음악 퍼포먼스를 SMP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로 장르화 시켰다. 이는 많은 자본이 있어도 SM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면 따라할 수 없는 독보적인 장르이다.따라서 다른 대기업 엔터테인먼트도 SM 엔터테인먼트가 제공하는 음악과 무대 퍼포먼스를 대체할 수 없다는 대체 불가능성도 SMP에서 찾을 수 있다.마지막으로 SWOT 분석을 통해 기업의 환경을 전체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먼저 Strength, 기업의 내부 강점은 첫 번째로 다수의 스타 배출 경험을 통한 노하우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SM의 노하우는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K-pop 아이돌 산업의 리딩 컴퍼니로 자리잡아 정상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 된다. SM 엔터테인먼트는 1996년 데뷔시킨 ‘H.O.T’부터 시작해서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EXO, 레드벨벳, NCT, aespa까지 수많은 정상급 아이돌 들을 육성했고, 시대의 흐름에 맞춘 컨셉의 설정과 변화로 이들을 모두 성공시킬 수 있었다. 두 번째로 SM 엔터테인먼트가 가진 수많은 자회사들을 통해 체계화된 아이돌 육성과정도 내부강점이라고 볼 수 있다. ‘SM 루키즈’ 라는 신인육성 프로그램은 연습생들을 방송에 출연시킴으로써 아이돌의 노하우를 축적시키고, 매체에 익숙해지도록 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이다. 또한 SM 엔터테인먼트는 특정 작곡가에 의존하지 않고 20년 가까이 자회사에 3만여 곡의 음원을 축적해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다른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이 따라할 수 없는 SM만의 장점이며, 이를 통해 SM 엔터테인먼트는 SM을 하나의 한류시장 장르로 정착시킬 수 있었다.다음으로 Weakness, 기업 내부의 약점을 분석해보자면, 첫 번째로 ‘아티스트 리스크’를 들 수 있다. 사람을 서비스상품으로 내세우는 아이돌 산업 특성상 아이돌의 사생활 문제는 엔터테인먼트 기업의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시로, 최근 크게 이슈가 , 메타버스 기술을 사용하여 실제와 가상을 넘나드는 온라인 콘서트를 만들어 팬들의 몰입도를 더욱 상승시켰다.실제로 오프라인 콘서트에서는 무대연출과 효과가 큰 부가가치를 창출하곤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존재했다. SM 엔터테인먼트는 온라인 콘서트를 통해 더욱 다양한 무대연출을 선보임과 동시에 기존 콘서트의 비용을 절감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점에서 가치사슬의 최적화를 이루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실시간 채팅을 통해 전세계 팬들과 인터렉티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오프라인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장점이기 때문에 팬들로 하여금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즉, 소비자가 인식할 수 있는 차별화전략의 가치창출을 이루어낸 것이다.SM 엔터테인먼트는 다음과 같은 온라인 콘서트를 외주업체에 맡기지 않고, 자회사인 SM C&C(이하 SM Culture &Contents)의 기획력과 기술력을 사용하여 선보였다. 라이브 소통만 네이버의 V LIVE의 기술을 사용하였고, 나머지 4차산업혁명과 관련된 기술들은 SM의 자회사 내의 기술발전을 도맡아 하는 점을 통해 고객에게 큰 가치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 차별점을 확인할 수 있다.또한 SM 엔터테인먼트는 자회사 ‘SM Dear U’를 만들어 팬과 아티스트의 소통에 한발짝 더 나아가게 만들었다. SM Dear U는 아이돌과의 유료소통 서비스인 ‘버블’이라는 메신저 어플을 만들어 매월 4,900원을 지불하면 자신이 원하는 아이돌 1명과 1:1 메시지 송신과 수신이 가능하도록 했다. 해당 버블 서비스는 기업-구매자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아이돌과 사적인 메시지를 주고받기 때문에 맞춤형 서비스제품을 생산한다는 장점이 있다. 나아가 굳이 마케팅을 하지 않아도 구매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서비스 홍보에 나선다는 ‘구매자 마케팅’장점이 존재한다. 실제로 SM Dear U는 현재까지 마케팅에 소모되는 비용이 0원이라고 밝혔다.이렇듯 SM 엔터테인먼트는 차별화 전략을 통한 사업부전략으로 소비자가 인식할 수 있는 가돌 아티스트 사업에 있어 생길 수 있는 위협을 줄이고자 하는 것이 SM의 비관련다각화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연예업계에서의 기업화, 대형화를 이루고 규모의 경제를 통해 전문적, 체계적인 사업운영이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다양한 분야의 연예인과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거나 타 매니지먼트 회사를 인수, 합병하여 연예인들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비관련다각화를 진행한다. 또한 자회사를 설립하여 방송사만의 영역이었던 콘텐츠 제작을 내부화하고 양질의 콘텐츠를 제작, 확보하는 수직적 다각화를 이루었다. 이미 소속 아이돌 아티스트를 콘텐츠 요소로 보유하고 있는 입장에서 직접 콘텐츠를 제작하기까지 하는 SM 엔터테인먼트의 다각화 전략은 더 다양한 콘텐츠권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SM 엔터테인먼트는 콘텐츠 저작권 확보를 위해 인수합병 전략을 시행한다. 콘텐츠 산업은 향후 꾸준히 성장하게 될 산업이며,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앞으로 더 많은 기술이 적용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SM 엔터테인먼트는 이를 이유로 자사의 역량이나 신규 역량을 개발하기 위해 시간과 자본을 투자하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타사를 인수, 합병하여 자회사로 내부화 하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는 전략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인수합병 측면에서 최근에는 SM 엔터테인먼트를 CJ ENM이 인수합병 하고자 한다는 기사가 올라오고 있다. 만일 CJ ENM이 SM 엔터테인먼트를 인수합병 하게 된다면 SM 엔터테인먼트는 미디어 콘텐츠와 아이돌 아티스트, 배우, 개그맨 모두를 보유할 수 있게 되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대기업이 될 수 있다고 본다. SM 엔터테인먼트 만의 고유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인수합병을 진행한다면 두 기업 모두 상생함으로써 전세계적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나 예능 매체에 잠식되어 SM엔터테인먼트 고유의 분위기와 SMP를 잃어서는 안될 것이다. SM의 고유한 색만이 SM 엔터테인먼트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차별적 경쟁우위이기 때문5
과학혁명이 가져온 자연의 도구화-과학혁명이 이끌어낸 과학의 발전이 근대사회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Ⅰ. 머리말Ⅱ. 본문-과학혁명이 불러온 영향1) 기계론적 세계관으로의 변화, 자연의 도구화2) 계몽주의 사상의 발전, 그가 불러온 인간의 타락Ⅲ. 맺음말Ⅰ. 머리말15, 16세기 서구는 르네상스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당시 르네상스 운동은 유럽 전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고대 그리스의 문화가 부활됨과 동시에 과학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15세기부터 19세기 까지는 고대 그리스 시기 과학을 넘어 좀 더 새로운 과학의 기저가 형성되는 과학혁명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과학혁명을 기본으로 현재에는 다양한 기술을 만들어 내고, 그로 인해 좀 더 편리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인류는 기술의 계속된 발전을 통해 보다 세상을 편리하고 살기 좋게 발전시켜왔다. 그러한 인류 발전의 가장 큰 계기가 된 사건이 유럽의 과학혁명인 것이다. 과학혁명은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출판한 《천체의 회전에 관해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를 통해 태양 중심설, 즉 지동설을 주장하게 되면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 시기 존재했던 과학의 발전과 패러다임의 변화를 ‘혁명’이라 칭할 만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바로 과학혁명이 유럽의 근대 문화와 사상, 나아가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킨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17세기 과학혁명에는 천문학과 역학, 화학, 생물학의 기본 지식을 다시 뒤엎고 새로운 이론과 과학으로 만들어내게 되면서 신이 자연과 인간을 절대적으로 통제하고 지배한다는 중세시대의 가치관을 인간과 물질 중심의 사고인 유물론적 사상으로 바꾸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고대의 자연철학과 자연에 대한 중세의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과학발전을 이루었다. 따라서 과학발전의 관점에서는 긍정적인 변화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곧 근대 사회 전반에 걸친 자연의 이해에 있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나아가 근대 유럽사회는 과학혁명을 통해서 자연을 지배하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이 있음이 드러나게 됨과 동시에 그 영향을 받아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와 역사도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이 지배하고 있다는 18세기 계몽사상 또한 성행하게 된다. 이러한 18세기 계몽사상을 이끌어낸 살롱의 퇴폐함과 인간의 타락도 과학혁명의 부정적인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따라서 본문에서는 15세기에서 19세기까지에 이르렀던 과학혁명의 과정과 영향을 비판적 사고를 통해 파악하고, 평가해보자 한다.Ⅱ. 본문본문에서 집중적으로 파악해 볼 1차 과학혁명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천문학 혁명, 뉴턴의 역학 혁명, 방법론의 발달, 라브와지에의 화학혁명, 그리고 다윈의 생물학 혁명으로 나뉘는데 이러한 사실들이 근대 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은 꽤 다양하다고 볼 수 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순수과학이론의 발달과 기존에 설명할 수 없었던 수많은 형이상학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진 점, 나아가 이전보다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 당시 과학혁명은 그러한 이성을 통해 세계, 즉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파악했고, 이는 기계론적 세계관과 계몽주의 사상을 낳았다.1) 기계론적 세계관으로의 변화, 자연의 도구화과학혁명으로 인해 유럽은 중세의 영적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변화하였다. 이에 따라 이전에는 큰 중요성을 지니지 않은 채 행해지던 과학에 대한 연구가 사회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자연을 지배하는 것은 수이고, 과학과 수는 절대적이다.’ 즉 자연의 모든 현상을 수학적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는 세계관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베이컨과 데카르트, 뉴턴에 의해 확립되었는데, 이들은 세계를 탐구하는 방법을 파악함으로써 과학적 방법론을 펼쳤다. 이들은 “객관적 지식이 있으면 인간은 자연계, 즉 의학이나 자연현상 그 밖의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여기서 기계론적 세계관이 출발하였다. 이런 기계론적 세계관은 수학적인 측정이 가능한 것, 경험이 가능한 것만을 과학으로 보고, 주로 운동하는 물질만을 취급한 것에 그 특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을 규칙에 의해 돌아가는 기계 그 자체로 보는 것이다. 이 세계관이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나아가 과학의 발전에 이바지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미친 것은 맞으나, 이는 ‘자연의 도구화’라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이 가져온 자연의 도구화는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때에 이르게 된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자연을 숫자, 과학적 법칙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기계론적 세계관은 중세에 있었던 ‘자연의 신비’를 담은 영적 세계관에서 탈피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우주, 즉 자연은 자연과학에 의해 동일한 존재론적 근거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객체로 대상화된다. 자연이란 인간이란 주체에 의해서 객체화되어 측정, 계산, 설명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따라서 환원주의적 세계관이라 볼 수 있으며, 모든 자연을 수량화하려 한다.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과 경험주의적 인식론은 자연의 이해에 있어 인간과의 종속을 저해하는 큰 요인이 된다. 나아가 자연과 인간을 함께 보지 않고 분리해서 보기 때문에 인간보다 자연을 열등한 것으로 인식하여 그저 정복의 대상, 수단으로 여길 뿐이다. 근대사회에서 자연과 인간의 종속을 저해하는 과정은 자연에 대한 개발과 착취가 정당화되는 결과를 초래했고, 나아가 환경 보존의 인식을 후퇴시키기에 이르렀다. 과학혁명은 근대사회 경제의 발달과 함께 더욱 빛을 발했는데, 이러한 자연의 도구화로 인해 근대시기 유럽 전역에서는 농업 공동체가 파괴되고 늪이나 숲이 난개발 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철강과 조선 산업으로 인해 나무의 수요가 급격한 속도로 늘게 되면서 숲이 빠르게 황폐화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과학혁명은 근대 사회 전반에 있어 자연의 착취를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6세기 유럽에 광석을 채취하는 산업이 흥하자, 작가 스펜서와 존 단은 “채광산업이 지구의 자궁 내 ‘가장 고결한 흐름’을 오염시킨다”고 했고, 그러한 광석 채취한업이 발달한 결과물인 “금과 은은 정신을 혼탁케 하고 인간의 가치를 저급하게 한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당시 소설계에서도 기계론적 세계관은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계몽주의 사상의 발전, 그가 불러온 인간의 타락근대 유럽사회는 과학혁명을 통해서 자연을 지배하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을 드러냈고, 그러한 과학혁명의 영향을 받아 18세기 유럽에는 계몽사상이 성행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디드로는 낡은 제도들을 모두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개혁을 추진하는데, 그러한 계몽사상가들은 ‘살롱’이라는 장소에서 모여 담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장소는 교양과 지식의 장소임과 동시에 도덕적 타락과 퇴폐의 장소이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계몽의 반항아’라고 불리던 장 자크 루소는 자연주의를 주장하며 문명이 인간을 도덕적으로 타락시켰고, 그 타락의 대표적인 표본이 살롱이라고 주장했다. 문명은 모든 인간악의 기원이며, 이성과 과학, 수와 기술의 발달이 인간을 물질적으로 진보시킬수는 있겠지만 도덕적으로는 인간을 타락시키고 악의 기원이 된다. 인간이 악과 부패가 등장하기 이전 상태인 순수한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자연주의’를 내세우기도 했다.
한국사학사 과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시대의 관찬사서1. 머리말2. 조선왕조실록3. 승정원일기4. 일성록5. 맺음말1. 머리말현재 역사학자들은 과거의 사실에 대한 증명의 근거로 유물과 기록물을 제시한다. 그 중에서 유물보다는 기록물이 당시 사건에 대한 사실을 나타내는 직접적인 사료이다. 그만큼 역사를 탐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는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가기록물은 국가에서 직접 기록한 관찬사서이다. 관찬사서란 관청에서 편찬한 서적을 이야기한다. 조선시대에 발행된 관찬사서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이 대표적이다. 이 세 관찬사서는 조선의 3대 사서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뛰어나다. 게다가 세 기록물 모두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봤을때도 그 가치가 높다. 1997년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건국부터 시작하여 철종까지의 472년을 기록한 관찬사서로, 방대한 내용이 들어가 있는 만큼 여러 가지 사회, 경제적 내용과 국가정세, 나아가 일상적인 내용까지 탑재되어있다. 무엇보다 사관들이 조선왕조실록에 저술한 관직자들에 대한 평가가 공정하고 신랄했다는 것을 보면 내용의 높은 공정성을 알 수 있다. 나아가 2001년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된 승정원일기는 세계적으로 최고, 최대의 역사서인 만큼 그 양이 엄청나게 방대하다. 또한 2011년에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된 일성록 또한 왕과 신하들이 직접 저술한 기록물인 만큼 공정한 기록물로 평가받는데,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도 뛰어난 가치가 있을 정도로, 이 세 가지 관찬사서는 그만큼 그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세 관찬사서에 대한 편찬 배경과, 편찬 과정, 현재 기록물로서의 가치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2. 조선왕조실록조선왕조실록은 건국 때 부터 춘추관의 사관을 두어 기록하기 시작했다. 사관들은 이 실록을 적기 위해 왕들을 따라 다니면서 왕고 주변 관료들이 하는 행동을 빠짐없이 기록했다.편찬할 때는 3임진왜란 시기 춘추관, 충주, 성주본이 소실되면서 조정에서 관리 파견을 해주로, 해주에서 강화로, 묘향산으로 옮기게 된다. 그리고 선조 시기 궁핍한 재정에도 불구하고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 804권을 3부씩 활판인쇄를 하여 새로 인쇄한 실록은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에 보관하고, 전주본은 마니산, 교정본은 오대산에 보관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춘추관보는 인조 2년(1624년) 이괄의 난 시기 영원히 소실되는 데다 마니산본은 병자호란 때 파괴되어 낙권과 낙장이 생겨버리게 된다. 이런 낙권과 낙장은 현종 때 보수하고, 숙종 때 정족산으로 그 보관장소를 이전한다. 묘향산본은 인조 11년(1633년) 후금과 외교관계가 악화되자 무주 적상산으로 보관장소를 이전하게 되고, 따라서 인조 이후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본, 태백산본, 적상산본, 오대산본이 존재하게 된다. 그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정족산, 태백산 사고에 있는 실록들을 왕실 도서관 규장각 도서와 함께 총독부에서 가져가게 된다. 적상산본은 황실 비서각에 옮겨졌으나, 해방 이후 일부가 도난당하고, 6.25 때 부산에서 나머지 일부가 실종된다. 오대산본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겨졌으나, 관동 대지진 당시 거의 모든 책들이 소실되고,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게 된다. 결국 1930년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규장각 도서와 함께 서울대 도서관에 이전되었고, 오대산본은 2006년 7월 일본에게서 반환받아 이후 규장각 도서와 함께 서울대 도서관으로 이전되어 현재까지 보관중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본, 태백산본, 오대산본 세가지이다. 그 중 정족산본은 선조 이전의 원형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는데다 가장 아름다운 갑인자로 인쇄되었기 때문에 고활자 연구에도 중요한 기록물이 된다.조선왕조실록의 기록들 중 다른 왕조들의 기록은 ‘실록’인 데 반하여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 시기 기록을 ‘일기’ 라고 칭한다. 이는 유교의 대의명분에 따른 체제이나, 실제로 실록들과 편찬 체제와 가치는 동5대 군주, 472년간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하루도 빠짐없이 수록한 것이기 때문에 한 왕조, 국가의 방대한 역사적인 기록으로 세계적으로 봤을 때도 엄청난 세월에 걸친 실록이라고 볼 수 있음에 그 가치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그만큼 풍부한 내용을 담은 세계적인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그 시대의 정치, 외교, 경제, 종교, 음악, 생활부터 자연재해, 천문현상, 생활사까지 엄청 다양한 내용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를 기술함에 있어도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왕도 함부로 손대고 수정하지 못할 만큼 철저한 비밀이 보장되었고, 그 개수와 후대에 다시 쓴 수정실록도 함께 보존하여 그 객관성을 더욱 높였다. 이러한 조선왕조실록은 지금 현재까지도 읽고 해석하는 것이 용이할 정도로 보존이 잘 되어있다. 이는 당시 한국 인쇄문화의 수준이 굉장히 높았고, 오랜 전통을 갖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대표적인 자료이기도 하다. 조선 말기까지 조선왕조실록이 완전하게 보존되어온 것도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유례를 보기 힘들만큼 그 보존기술도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워낙 사실 그대로 빠짐없이 기록해 온 실록인 터라 조선왕조실록은 일본, 중국, 몽고 등 동아시아의 역사와 이들간의 관계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3. 승정원일기조선시대 발행된 관찬사서 중 두 번째로 승정원일기에 대해서 살펴보자면, 조선시대에는 승정원이라고,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과 같은 역할을 하는 기구가 있었는데, 왕과 부서들 간의 소통을 맡아 각종 서류들을 정리하여 왕에게 올려 보고하고 왕이 내린 명령을 부서들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 승정원에서 왕이나 부서들에서 올라완 일들을 하나하나 기록한 기록물을 승정원일기라고 할 수 있다.승정원일기는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쓰고 사서를 만들기 위한 1차 공문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사건에 대한 기록이 굉장히 세분화되고 쓰는 방법이 체계화되어있었다. 매일 기록하는 일기의 서두엔 연호, 갑자년, 월일시, 날씨까지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나아증부위, 병명, 처방받은 약의 약방문까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기록되어있다.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기록 유산이자, 조선왕조실록과 더불어 조선사를 대표하는 기록물로 손꼽히는 세계 기록유산이다. 기록에 따르면 원칙상 한달에 한 권, 사건이 많은 경우 두 권 이상씩 기록하였다고 한다. 계산상 6400여권이어야 하지만 광해군 이전에 기록된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등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발생한 화재로 모두 불타버렸다고 한다. 그나마 다시 시작한 기록분도 인조 원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면서 또 타버려서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물은 다시 쓰지 못했으나, 그 이후의 부분은 각사등록이나 가장사초를 비롯한 각종 자료를 통해 다시 보완하여 승정원에 보관하게 된다. 그러나 영조20년에 승정원에 화재가 나게 되면서 다시 불타 일부 기록이 다시 소실되었으며, 세손의 요청으로 사도세자 사건이 기록된 승정원 일기는 아예 사라져버렸다. 또한 고종 25년에도 승정원 화재로 361권이 소실되고, 2년후에 일기청을 설치하여 개수하게 된다. 따라서 현재에는 인조 원년(1623년)부터 융희 4년(1910년)까지인 288년간 기록된 3245권만이 존재한다. 이처럼 승정원일기는 화재 뿐만 아니라 수차례 도난을 당했으나, 매번 보수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 보수된 일기는 조보나 각사등록 등 수많은 자료들을 참조하고, 당초의 주서가 기록하지 못했던 내용까지 보완하여 오히려 사료적 가치는 높이 평가된다.이전에 존재했던 승정원일기들과 중간중간 없어져버린 기록들의 소실에도 불구하고 승정원일기는 현재 그 기록적인 면에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꽤 많은 양이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승정원일기는 대략 2억 4250만자가 기록되어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글자수가 약 5400만자인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은 글자수 라고 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는 그 양과 서술배경 또한 공정하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실록보다 더욱 높은 가치를 지닌 조선 최대, 최고의 기밀 기록이다. 또한 후세에 기록된 934권의 개수분은 원래의 27책~129책에 대한 전산화가 진행되었다. 혼입된 부분은 원래 부분으로 옮겨졌고, 원본 중 인명이나 지명, 관명이 틀린 부분들을 정정했으며, 해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알아보기 힘든 초서는 원형대로 그려 넣었으며, 구두점을 찍음으로서 가독성을 높여 기록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더욱 높였다. 조선왕조실록이 사관들의 깐깐하고 철저한 기록으로 그 명성이 높지만, 승정원일기도 그에 못지않은 철저한 기록을 갖고 있다. 실제로 실록에 빠져있는 개인적은 밀담들도 승정원일기에는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존재한다. 그만큼 조선시대 관찬사서, 국보 제 303호로서 그 가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4. 일성록조선시대 관찬사서로는 일성록도 존재하는데, 이는 조선왕조 시기 만들어진 왕의 일기로, 영조 36년 당시 정조가 처음 쓰기 시작하여 융희 4년인 1910년까지 약 151년간 저술되었다. 일성록은 단순 기록물이 아니라 군주의 반성자료로서 쓰였고, 정조가 탄생한 1752년부터 편찬되었으나, 내용이 제대로 갖춰진 것은 1760년이라고 한다. 정조는 어린 시절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증자의 말인 一日三省(일일삼성) 혹은 三省吾身(삼성오신), 즉 "나는 매일 세번 스스로를 반성한다(吾日三省吾身)"는 말에 큰 감명을 받아 자신을 반성하는 자료로 삼기 위하여 매일 일기를 썼다. 이것이 존현각 일기로, 이후 정조가 왕이 된 후 개인 일기에서 국정 일기로 성격이 변화하면서 존현각 일기는 일성록이 되어 조선의 공식 국가 기록으로 편입되었다. 정조의 개인일기에서 공식적인 국정일기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에는 정조가 자신을 반성하는 자료로 삼기 위하여 매일 일기를 쓰는 형식으로 작성하였으나, 정조가 왕이 된 이후, 개인일기에서 국정일기로 기록물의 성격이 변화하면서, 존현각 일기는 일성록이 되어 조선의 공식 국가기록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조 즉위 이전에는 세손시절 일록인 존현각 일기에 기초하여 서술되었으나, 정조가 아닌 당시 국왕인 영조의 중심이었다. 이는 정조 즉위 이후 매일 편찬하여 왕조 말기에 이.
일제 강점기 민족주의의 역사가와 역사인식-백암 박은식과 단재 신채호의 역사인식을 중심으로-차례Ⅰ. 머리말Ⅱ. 백암 박은식1. 박은식의 역사인식2.민족주의 역사가로서 박은식의 행보Ⅲ. 단재 신채호1. 신채호의 역사인식2. 민족주의 역사가로서 신채호의 행보Ⅳ. 맺음말Ⅰ. 머리말“조선인은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없다. 무력에서도 문명이란 점에서도 자기 힘으로 이룬 바가 없다. 그래서 늘 큰 나라의 눈치를 보고, 큰 나라 따르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일본의 동양 사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한 말이다. 조선은 스스로 국가를 이끌어 갈 힘이 없으므로 일본의 도움을 받아 성장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며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를 정당화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왜곡된 역사학을 ‘식민주의 역사학’이라고 부른다. 일제가 퍼트리기 시작한 조선 식민주의 사학은 현재까지도 남아 당파싸움에 기름을 붓고, 대한민국 사람이 대한민국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발언과 생각들을 하게끔 만든다. 예를 들어 “한국인들은 본인들끼리 싸우다가 일을 망쳐버린다.”, 혹은 “한국은 강대국들에게 빌붙어 살아온 국가다.”처럼 얼핏보면 그럴듯한 논리로 한국의 역사를 왜곡시켜온 것이다.그러나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당시 이러한 일제의 역사왜곡과 민족탄압에 대항하여 우리민족 본래의 문화와 삶을 보존하기 위해서 주체적인 역사를 세우고자 했다. 일제의 식민주의 역사학은 그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무기력화 시키고,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일본에게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암묵적으로 강요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인해서 우리 민족의 부정적인 면만 극대화하여 왜곡되는 현상을 바로잡고, 우리 민족 문화의 뛰어남과 오랜 기원, 역사를 연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민족주의 사학의 시작이었다.민족주의 역사가들은 일본이 퍼트린 식민사학과 정반대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우리 국민들이 하나로 힘을 모은다면 언젠가는 독립을 이루어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왜곡시 나아가 그는 우리 조선 민족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독자적으로 언어, 문화, 예의, 의식 등을 유지했고, 다른 나라들과 다른 특징을 가진 색이 짙은 국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대 다른 민족들에게 삼켜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이러한 국혼론은 『한국통사』에서 더욱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다. 『한국통사』는 박은식이 민족주의 역사인식에 대해 서술한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다. 『한국통사』에서는 일제가 조선을 침략한 것을 중심으로 두고 역사를 서술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온 국민에게 일제의 조선침략이 얼마나 잔인하고 포악한지, 그들이 조선을 착취해가는 모습이 얼마나 간사하고 교활한지를 폭로하고 이를 잡아내어 따지고 비판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한국통사』는 고종의 즉위부터 시작해서 일제가 1910년 무단통치 시기 사건을 조작하고 날조하여 105명의 독립운동가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105인사건까지 47년간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서술하였다.박은식은 근대사뿐만 아니라 고대사에서도 이름을 알린 역사학자였다. 박은식의 고대사인식은 대동사관, 만한사관과 같은 영토인식을 갖고 있었다. ‘대동사관’은 우리나라가 원래 방대한 영토였음을 주장하는 사관이다. 만주와 한국에서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성장했던 모든 민족은 단군에 뿌리를 두고있다는 대동민족 사관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박은식의 대동민족 개념은 대종교 역사인식과 합치되며 대동사관의 연장선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박은식은 대동민족의 혈통성과 문화적 일체감을 강조하기 위해서 단국 중심의 고대사를 체계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박은식은 단군조선이 기자조선을 동화시켜 동족화한 것이라는 가능성 또한 제기했다. 그리고 박은식은 고대사 인식에 있어서 단군일원화와 주 무왕의 기자봉작설을 부정하면서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을 주장한다. 박은식의 주장에 따르면 독립 자주의 자격과 신성한 가치를 가진 국가는 고구려뿐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박은식은 고대사의 연구와 서술에 있어 사회진화론을 비판함과 동시에 강권주위를 타도하고 평등주의와 민 정치의식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 수많은 애국적인 논설문을 발표하였다. 교육 계몽운동에도 많은 활동을 했던 박은식은 1906년 10월 함께 교육 계몽운동을 추진했던 사람들과 함께 서우학회를 조직하여 후학 양성에 힘을 쏟고, 교육 진흥과 민족 교육기관으로 사립학교의 설립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박은식 선생의 교육 진흥 활동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족의 주체성 향상을 위해서 수행했던 민족주의 역사가로서의 또 다른 행보라고 볼 수 있다.박은식 선생은 당시 중국에 망명해있던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의 방안을 논의했는데, 그 과정에서 한국의 역사를 올바르게 알리는 『한국통사』를 완성하여 중국인 출판사에서 1915년 간행하였다. 역사가였던 박은식은 일본의 제국주의에 자국민들이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 책을 저술하였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 한국사를 연구하고 그를 서술하여 책을 낸다는 것 자체가 곧 독립운동의 하나였고, 독립운동을 위한 정신을 일깨우는 준비과정이었다. 이러한 박은식의 저술의도에 맞게 『한국통사』는 민족주의 역사서로써 당시 조선 국민들에게 꽤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한국통사』를 통해서 조선 국민들에게 ‘통(痛)’을 가르쳤다. 국가의 아픈 역사와 일본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시린 고난들을 서술함으로써 이를 통해 국민들이 더 투쟁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도록 유도하였다. 박은식은 독립운동에 있어 분노와 슬픔을 기반으로 한 독립운동의 정신적인 원동력을 제공했던 것이다. 또한 박은식은 ‘국혼’과 ‘국백’사상을 주장했다. 사상에 따르면 국혼은 국교, 국학, 국어, 국문, 국사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민족 고유의 문화와 역사의식을 뜻하며, 국백은 전곡, 군대, 성지, 함선, 기계 등 우리나라의 물자와 물질적 원동력을 뜻한다. 박은식은 이렇게 국가의 가치를 국혼과 국백으로 나누어 그 당시 일본에게 빼앗긴 것을 ‘국백’이라고 표현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 이를 서술하면서 일제는 조선에게 ‘국백’을 빼앗았으나 우리나라 민족 고유의 ‘국혼’은 빼채호 선생은 역사의 특징을 시간성과 공간성이라고 주장한다. 역사란 어느 특정한 시점의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하는 인간과 그를 둘러싼 환경 사이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행동 그 사이에서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것들만을 골라 추출해낸 것이기 때문이다.이와 더불어 신채호는 한국고대사를 연구하면서 ‘낭가사상’이라는 전통적인 민족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켰다. 당시 일본의 관학자들이 내세운 식민사관은 일제 식민정책의 기반을 다기지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되던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이에 대항하여 그들로 인해 잘못 알려지고 왜곡된 한국사를 다시 올바르게 저술함으로써 조선과 조선민족의 자강과 자주적인 독립을 위한 조선의 민족정신을 확립시키고자 하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신채호 선생은 ‘낭가사상’을 역사인식의 정신사관으로 채택하였다. 낭가사상은 당시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사상과는 달리 조선 민족의 고유한 정신과 원시 신앙을 모두 종합하여 구체적으로 체계화한 사상이다. 이 사상은 고대국가의 전통적으로 반복되고 계승되는 제의와 풍류정신에 그 기본을 둔다. 그렇기 때문에 낭가사상은 그러한 제의와 풍류정신을 일깨우는 것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국권 회복과 수호를 위해 근대적인 자주독립정신을 조선 국민들로 하여금 심어줌으로써 조선의 시대정신을 밝히고자 하는 것에 그 특징이 존재한다. 나아가 신채호 선생은 낭가사상을 통해 민족주의를 수용하고, 민족 자주적이고 근대지향적인 실학 사상과 더불어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역사방법과 이론을 통해서 전통적인 민족사상을 전승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졌다.이러한 신채호 선생의 역사이론을 기반으로 하여 낭가사상과 이에 대해 고대사인식에서 가장 중요한 고대사의 체계화와 구강회복론이 서술될 수 있었다. 이는 한국 고대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변환점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신채호 선생의 낭가사상과 『조선상고사』에 드러난 그의 역사인식은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저술되어 있다. 따라서 신채호 선생의 낭가사상은 그가 한국고대사를 인식하고, 서일본부를 설치하여 남한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포함한 식민주의 사관을 지어내고, 이를 퍼뜨리면서 일본의 한국 흡수를 정당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재 신채호선생은 애국심을 계발하기 위해서 새로운 민족주의적 역사를 저술하고, 이를 온 국민에게 읽힘으로써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이바지하는 방식으로 역사가로서의 행보를 보였다.또한 신채호 선생은 20세기 국가경쟁의 원동력은 한 두명의 뛰어난 영웅이 아닌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국민들의 역량이라고 주장하면서 『대한매일신보』에 이라는 논설을 연재하여 국만 각계각층의 여러 대내외적 외경력의 발휘를 재촉하였다. 나아가 ‘신국민’이 장차 국권을 회복하고 근대의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역사와 사회의 주체라고 설명한다. 이와 동일한 신채호의 사관은 1920년대에 완성되는 민족주의 역사학의 초석을 제공하여 역사를 연구하고 탐구하는 것이 곧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민족 독립운동이라는 의식을 갖도록 하였다. 이는 ‘국사는 국혼이다’라고 보는 백암 박은식 선생의 역사인식과 같은 결을 보이는 내용이기도 하다.Ⅳ. 맺음말일제가 자신들로 하여금 조선이 그들의 주체성을 잃고 독립에 대한 염원 없이 국권 회복과 수호에 대해 지나치게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기를 바라는 이유는 ‘역사인식’에 있다. 역사인식이 올바르게 존재하는 이상 그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주체성, 책임감등이 존재하고, 나아가 이를 발전시킴으로써 자주독립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 일제강점기 시기 ‘조선은 본래 수동적이고 내부 분열이 지나치게 많이 발생해왔던 국가’라는 식으로 퍼트린 일제 식민사학은 결국에 자주독립을 바라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기력함을 느끼게 하고, 왜곡된 역사에 관한 정보를 듣고 더 이상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자세를 가지게 하려는 검은 속내가 존재했다. 식민사학은 그만큼 뿌리깊이 내려갈수록 수천년 우리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사건들에 있어서도 체념해버리게 되기 때문에 당시 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