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과 목담당교수학 과학 번이 름목차Ⅰ. 서론Ⅱ. 본론1-1. 남북한 분단의 과정가. 일본의 패망과 38선나. 자주적 독립운동의 실패다. 남북 정부의 수립라. 한국전쟁1-2. 소결2. 남북한 정치(사회)체제 비교3. 남북한 경제제도 비교가. 경제력 비교 통계자료나. 남북한 경제체제 특징1) 개인적 소유제도 VS 사회적 소유제도2) 시장경제체제 VS 계획경제체제3) 개방경제체제 VS 폐쇄경제체제4. 남북한 교육체제 비교가. 남북한의 교육이념 및 목적 비교나. 남북의 교육제도 비교다. 남북한의 교육과정 비교5. 북한 주민들의 생활(의식주) 비교가. 의복나. 식생활다. 집Ⅲ. 결론Ⅰ. 서론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이후 분단된 남한과 북한은 수 십 년을 거쳐 현재까지 냉전과 평화의 분위기가 이어져왔다. 지난 2018년 4월 27일에는 1차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판문점 선언이 발표되면서 남한과 북한은 지속 가능한 관계 발전을 위한 기틀을 만들었으며 6월 12일에는 북미정상회담을 거치며 남북한의 교류와 협력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이제 한반도의 문제는 남북한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었으며 남북의 분단은 여전히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한반도의 더 나은 미래와 발전을 위해서는 남북의 통일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분단의 과정과 남북 체제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통일을 대비하는 시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남한과 북한의 정치교육생활과 관련된 전반적인 자료들의 비교·분석을 통하여 남한과 북한에 공통점과 차이점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 분단되어 있던 시기의 차이를 극복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으며 이는 앞으로 남과 북이 함께 나아갈 미래의 기반을 만들어 가는데 의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Ⅱ. 본론1-1. 남북한 분단의 과정가. 일본의 패망과 38선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무조건항복은 한반도에 ‘해방’의 기쁨을 가져왔으나 그 뒤로 한반도 ‘분단’의 비극으로 시작이 되었다. 일본이 패망군정은 이를 무시하며 친미적인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정권의 수립을 위하여 한국민주당의 인사들과 연락하였고 소련은 이북에서 인민위원회를 공산주의적 조직으로 재편하고 친 소련 성향의 김일성을 대중 앞에 등장시켰다.다. 남북 정부의 수립미국과 소련이 서로의 이익을 얻으려 갈등이 심화되면서 냉전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당시 여론은 좌우 합작으로 중도적인 통일정부의 수립을 원했다. 북측을 김일성이 장악하고 남측에서는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하자 중도 정치 세력들은 1946년 7월에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미 군정은 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이로 인해 좌우 합작은 결렬되었고 1946년 2월 16일에 북쪽에는 이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설립되어 2년간 유지되었다. 1947년이 되자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더욱 본격화되었고 유엔(UN)에서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실행되면서 분단을 반대하던 민족주의 정치가들은 위기를 느꼈다. 한국독립당의 김구와 민족자주연맹을 조직한 김규식 등은 남북의 모든 정치세력이 함께 평양에 모여 전 조선 대표자 연석회의를 열 것을 제안하였으나 김일성은 이 대회를 이북 정권의 정당성 확보의 장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이후 김구는 5·10 단독 선거에 불참하면서 통일 국가의 수립을 반대하였으나 뜻을 실현하지 못한 채 암살당하였다. 결국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정부 수립을 선포하여 일제에서 해방을 알렸으며 9월 9일에는 북한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어 한반도는 공식적인 분단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라. 한국전쟁남과 북에 각각 단독 정부가 수립된 뒤 남북의 갈등은 점점 격화되었다. 이러한 남북 갈등의 심화는 무력 분쟁으로까지 이어져 1949년 한 해 동안에도 크고 작은 교전이 생겨났다. 한국전쟁은 소련과 미국이 각자 한반도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벌어진 전쟁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북한군의 대대적인 남한 침략이 시작되었다. 전면전을 예상하지 못했었던 남한은 외세에 의한 분단을 막지 못했음을 확실히 인지하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분단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앞으로의 통일을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많은 비극과 아픔을 남겼으며 증오의 기억을 갖게 만든 사건이다. 전쟁은 현재 “휴전”상태이고 이것은 누구의 승리도 아니라는 의미이며 이를 통해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공고히 하고자 한다.남한북한자유민주주의체제의 일반적 특징과 같이 다원적인 사회사회주의체제의 특징과 함께 주체사상을 유일사상으로 하는 획일적인 사회모든 영역에 있어서 모든 사람의 기회를 균등히하고 자율적인 개인 중심의 사회전체를 위하는 집단주의 사회대통령제+의원 내각제 요소인 정부형태와 함께 복수정당제를 채택사회주의 국가의 보편적 특성인 1당 지배체제 와 주체사상에 지배되는 유일 지배체제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짐으로써 획일적인 사상적 통일이 배제되고 있음.개인주의를 사회와 집단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에 복종시키려는 부르주아 사상이나 경향으로 규정개방사회이며, 사상적으로 공산주의나 북한의 주체사상과 같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사상을 용납하지 않으나 그 외 어떤 사상이나 이념은 공익을 해치지 않는 한 허용.통제된 폐쇄사회이며, 주체사상을 유일사상으로 하여 모든 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고 있으며 주체사상 이외는 그 어떤 사상도 용납 못함.2. 남북한 정치(사회)체제 비교3. 남북한 경제제도 비교가. 경제력 비교 통계자료2019년 중 북한의 경제규모(명목 GNI)는 한국 단위 기준으로 35조 6000억원으로 남한의 약 1/54 수준이며 1인당 국민소득은 약 141만원으로 남한과 약 1/27 수준이며 총 인구는 2배나 차이가 난다.대외경제규모에서도 남한과 북한의 차이를 볼 수 있다. 2019년 중 북한의 무역 총액은 32억 4천만 달러로 남한의 약 1/322 수준이며 수출과 수입 부문에서도 각각 2.8억 달러와 29.7 달러로 남한과 약 1952배와 170배의 차이가 난다.나. 남북한 경제체제 특징1) 개인적 소유제도 VS 사회체제 비교가. 남북한의 교육이념 및 목적 비교남한북한차이점교육이념민주주의 교육이념.홍익인간.공산주의 교육이념.주체사상.교육목적인격의 완성자주적 생활능력의 배양민주국가 발전에 봉사인류공영의 이상실현에 기여혁명화노동계급화공산주의화교육원리인격존중주의이데올로기교육 강화유사점교육이념지덕체를 고루 갖춘 전인적 인간형성 중시학교교육의목표기초적인 생활규범, 도덕적인 품성을 학교 교육의 목표로서 중시함.교육목적전통적인 도덕규범 강조나. 남북 교육제도 비교남 한북 한유치원1년제유상 교육낮은반 1년유상 교육높은반 1년무상의무 교육초등교육초등학교 6년제무상의무교육소학교 4년제중등교육중학교 3년제구분없이 6년제고등학교 3년제유상 교육다. 남북한의 교육과정 비교남 한북 한공통점교육과정의 개발이 모두 중앙집권적.차이점교과서 개발방식개방적폐쇄적교과서복수 교과서단일 교과서교과 개정시 일반 교사들이 많이 참여할 수 있다.내용에 있어서 학교나 학생이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재량이 부여된다.교과내용이나 교육활동에 대해 비판할 수 없다.5. 북한 주민들의 생활(의식주) 비교가. 의복의복은 자신의 자아를 표현하면서 그 사회를 반영하는 수단이다. 사람의 가치관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 의복도 함께 달라진다. 남북의 분단으로 인한 정치·경제 등 제도의 차이는 남북 사람 사이에 스타일이 다름을 만들어냈다. 북한에서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단정하고 깨끗하고 건전한 옷차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자리 잡혀있다. 그래서 북한 주민들은 대부분 단정하고 실용적인 옷차림을 선호한다.북한남한북한 주민이 평상시에 자주 입는 옷은 남녀 모두 양장이다.(남자: 넥타이 안 매는 인민복 형태 양복 /여자: 투피스)남한 주민은 평상시에 면 티셔츠에서부터 정장까지 다양하게 입는다.북한 주민들은 손질하기 편리한 옷과 간결한 옷을 선호한다. (합성섬유 재질 선호)남한 주민들은 면이나 마 같은 자연산 작물의 옷을 선호한다.옷이 별로 많지 않다.(한 계절에 2~5벌 정도)옷을 거의 매일 바꿔 입는다.의복은 개성을 표현하기보다는 집단주의지고기, 닭고기 등을 주로 이용한다.김은 생산량이 많지 않아 야유회나 소풍 같은 특별한 때 먹을 수 있는 식재료다.김의 생산량이 많고 인기가 좋아 반찬으로 자주 보인다.북한의 음식은 남한 음식에 비해 양념을 적게 쓰므로 슴슴한 것이 특징이다. 음식이 달지 않고 향도 약하다. 원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리는 방법을 쓴다.양념을 강하게 쓰는 곳이 많으며 맵고 자극적인 양념을 즐겨 먹는다.북한 주민의 식생활은 가정식 위주로 이루어지며 외식문화는 일반화되지 못했다.가정식을 많이 먹는 만큼 외식을 자주 한다.유사점바다가 인접하여 어류 요리를 즐겨먹는다.젓갈을 많이 담그고 자주 먹는다.다. 집북한남한아파트는 실내에 화장실이 있지만 단층집은 집 바깥에 화장실이 있다.오래된 시골집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아파트나 주택 모두 집 안에 화장실이 있다.살림집 난방은 평양시 중심 거리의 아파트만 중앙난방이며 절대다수의 주택은 개별난방이다. 개별난방에 쓰는 연료는 석탄과 나무가 다인데 평양뿐 아니라, 북한은 연료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대다수 주민 집들이 겨울에 충분한 보온을 하지 못한다.거의 대부분의 아파트나 주택에 가스보일러가 있으며 연료가 부족하지 않다.평양의 중앙난방아파트에서는 음식을 만드는 데 석유 곤로를 가장 많이 사용하며 최근 들어 가스 곤로가 늘고 있다. 그러나 중앙가스 공급 체계를 통해 가스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가스통을 이용한다.개별적으로 가스통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 가스공사를 통해 가스를 공급받는다.북한 아파트 생활에서 가장 불편한 것은 물이다. 전기 부족으로 정전이 될 때도 많으며 물 공급하는 시간이 정해져있고 고층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전기세가 다른 나라에 비해 저렴한 편이며 고층에서도 물이 잘 나온다.유사점도시주민들이 선호하는 살림집은 아파트다.Ⅲ. 결론이처럼 남한과 북한의 정치(사회), 경제, 교육, 주민생활을 비교한 결과, 전반적인 측면에서 다소 차이를 보였다. 먼저, 정치 체제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인 차이점은 앞으로의 통합을 )
REPORT1. 서론중간고사가 끝나고 첫 9주차로 들은 강의는 독일의 맥주에 관한 것이었다. 맥주에 관심이 없어도 맥주하면 독일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독일의 맥주는 유명하다. 한국의 맥주 공장이나 해외의 맥주공장을 견학 해본 적이 있을 정도로 맥주를 좋아하는 나로써는 강의를 흥미롭게 들었다. 그래서 독일의 맥주문화에 대해 더 자세히 조사해보았다.2. 본론1) 독일맥주의 유래와 발전맥주에 홉을 첨가한 것은 10세기경부터로, 독일의 바이스비어(Weissbier)는 1541년 뉘른베르크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영국의 에일(ale)과 포터(porter)는 8세기경부터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때 당시의 맥주는 모두 상면발효방식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데, 상면발효란 효모가 맥아즙을 발효시키면서 발효통 위로 둥둥 뜨는 방식으로 우리나라의 막걸리 양조법과 비슷하다. 상면발효는 상온에서 일어나지만 반대로 아래로 가라앉는 하면발효를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냉각 기술이 있어야 했는데, 19세기 이전까지는 냉각 기술이 없었다. 바이스비어나 알트,쾰쉬,에일,포터 등과 같은 맥주는 모두 상면발효 방식을 사용했다. 상면발효 맥주는 대부분 어둡고 탁한 것이 특징이다. 이 ‘바이스비어’라는 이름도 다른 맥주들이 어둡고 탁한것에 비해 유일하게 흰색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하면발효 맥주가 생겼다. 독일의 양조사인 Josef Groll이 체코의 필센에 있는 한 양조장에서 만든 것으로 이 맥주는 그 지방 특유의 물과 맥주 발효 숙성 창고의 낮은 온도 덕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맥주는 기존의 맥주와 다르게 밝은 황금색을 띠고 있었으며, 대체로 맛이 깔끔하고 맥아의 향보다는 홉의 향이 더 부각되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 맥주는 곧바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냉각기술과 결합하면서 곧 세계에서 가장 사랑 받는 맥주가 되었다. 당시까지 유럽 대륙의 맥주에 관한 한 독보적인 위치에 있던 독일 뮌헨의 양조업자들은 필스너비어의 도전에 큰 위기의식을 느끼고 기술 개발에 나선다. 그래서 나온 것이 ‘깔끔함’을 더욱 강조한 남부 독일식 필스너비어와 헬레스라거비어이다. 헬레스 라거 비어는 요즘 우리가 가장 흔하게 마시는 라거 타입 비어의 전형으로서 부드럽고 가벼운 것이 특징이며 이 맥주는 곧바로 미국으로도 소개되었으며, 미국에서는 보리와 함께 옥수수 속의 당분을 이용하여 맥주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2) 독일맥주의 특징가장 큰 독일맥주의 특징은 Reinheitsgebot 라고 하는 특수한 법이다. Reinheitsgebot (독일맥주순수령)은 1516년 바이에른의 빌헬름 4세가 맥주 양조업을 장악하고 궁정 양조장인 “호프 브로이 하우스”를 개설하면서 바이에른 맥주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공포한 법으로 가장 오래된 식품법인 동시에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법이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 맥주 제조법에 따르면 맥주의 성분은 홉, 보리(맥아), 물, 보리 4가지에 한정되며 다른 어떤 물질도 첨가되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 시점에서 보면 청결규정 정도가 되겠지만 단순한 식품관리규정이라기 보다는 넓은 의미이고 독일 식품전반에 이러한 규정들이 적용된다. 따라서 독일 내에서는 이 4가지 이외에 다른 성분이 포함되면 '맥주'라는 명칭을 쓸 수 없다. 독일은 지금도 이법을 엄격히 지키고 있으며, Braumeister(브라우마이스터) 라고 하는 맥주양조기술자가 있고 공대에 맥주양조학과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사람 중에도 5명의 Braumeister가 존재한다고 한다.3) 독일맥주의 종류독일의 맥주 종류는 5000여종이 있고 양조장만 해도 1400여 개가 있다. 하여 가장 대표적인 종류는 5가지를 소개해보려 한다.① 필스너(Pilsner)줄여서 필스(Pils)라고 하거나, 크리스탈(Kristal)이라고 하기도 한다. 독일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며 보편적인 맥주이며, 우리나라에서 흔히 마시는 라거 타입과 비슷하다. 하지만 국산 맥주보다 뒷맛이 훨씬 깔끔하고, 쓴 맛이 거의 없어 부담없이 마실 수 있다고 한다. 필스너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지만 조금 더 진하게 만드는 것은 엑스포트(Export)라고 하는데 원래 독일에서는 엑스포트가 더 인기 있었으나 1970년대부터 필스너가 대세가 되었다고 한다.② 바이쩬 비어(Weizenbier)바이쩬 비어는 직역하면 "밀 맥주"라는 뜻으로 색깔이 필스너보다 좀 더 연하다고 하여 바이스 비어(‘흰 맥주’)라고도 부른다. 밀의 부드러움과 함께 상면발효의 특징적인 향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맥주라고 할 수 있다. 독일에서 만들어진 맥주 양조 방법이므로 독일을 대표하는 맥주로 볼 수 있다. 중세 시대에는 보리보다 밀이 귀했기 때문에 바이쩬 비어는 귀족들이 마시는 귀한 맥주였다고 한다.③ 알트비어(Altbier)뒤셀도르프 지방을 중심으로 양조되는 이 맥주는 오랜 역사를 지녀 AltBier라는 이름이 붙었다. 독일의 대표적인 상면발효맥주라고 할 수 있다. 필스너비어보다는 덜 하지만 쌉쌀한 맛이 효모에서 나온 향과 조화를 이루며. 색깔은 약간 어둡고 알코올도수는 약 4.5~4.8%이다.④ 둥클레스 비어(Dunkles Bier)dunkel은 독일어로 ‘어두운’이라는 뜻이며, 맥주를 만들 때 맥아(보리 엿기름)를 훈제한 뒤 만들기 때문에 사실상 검은 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을 띤다. 아래로 가라앉는 효모로 발효시킨 맥주 즉, 하면발효맥주의 특성이 두드러져 흑맥주 치고는 부드러운 맛이 특징이다. 또한 구수한 맛이 강하고 바이에른 지역에서 처음 만들어진 방식이다.⑤ 헬레스 라거비어(Helles Lagerbier)저장맥주 혹은 숙성맥주, 13세기 독일에서 시작된 발효방법을 적용한 맥주이다. 하면 발효 맥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며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라거 타입의 맥주이다. 알코올도수는 4.5~5.5%이며 홉의 쌉쌀함보다 맥아 향이 강조된 맥주이다. 우리나라에서 양산되는 맥주, 버드와이저 등이 여기에 속한다.4)독일의 맥주축제(옥토버페스트)맥주를 사랑하는 독일인만큼 맥주와 괸련된 축제도 많은데, 그 많은 맥주축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 이라고 하면 Oktoberfest(옥토버페스트)를 들 수가 있다. Oktoberfest는 9월말부터 10월초까지 약 2주간에 걸쳐 열린다. 이 축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맥주 축제로 1810년 10월에 바이에른 공국 왕국의 초대 왕인 빌헬름 1세의 결혼을 맞아 5일동안 음악제와 함께 축제를 열었던 것에서 기원되었다. 처음 결혼식 축하연으로서의 의미와는 다르게 변화되었지만 축제가 열리는 곳마다 참가 회사의 맥주 통을 싣고 가는 마차 행렬이나 마을마다의 고유 의상을 볼 수 있는 것, 각종 맥주 회사들이 지은 저마다의 특징 있는 맥주홀, 이 축제를 위해서 각 나라에서 관광온 수많은 맥주 애호가들이 맥주와 색다른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것이 옥토버페스트에 자랑거리이다. 하지만 1980년 9월 26일에 옥토버페스트에서 폭탄이 터져 200여 명이 부상을 입고 13명이 죽는 최악의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매해 축제 때마다 독일 국민은 물론 전 세계에서 7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여든다. 그러나 방문한 사람들의 과음이 점점 문제가 되고 있다. 축제장이 술주정꾼의 난장판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2005년에는 ‘조용한 옥토버페스트(Ruhigen Wiesn)’라는 조직이 결성되기도 했다. 또한 각 텐트 운영자들은 18시 이전에 전통 관악음악만 연주하고, 음악의 크기도 85 데시벨 이하가 되도록 하고 있다. 이는 축제에 가족과 노인들도 거부감 없이 방문할 수 있고, 전통적인 분위기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3. 결론이렇듯 독일은 맥주와 관련하여 매우 깊은 역사와 발전과정을 갖고 있으며 현재 매우 다양한 맥주가 있고 맥주와 관련한 축제 또한 성대하게 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독일에는 ‘맥주는 맥주 공장 굴뚝의 그림자가 비치는 범위 내에서 먹어야만 하는 것’ 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고향마을의 맥주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한편으론 그만큼 많은 맥주 종류와 양조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조사를 통해 독일의 맥주사랑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었고 독일을 가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샘솟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참고문헌 : 맥주이야기, 원융희 (학문사, 2003년) / 독일의 맥주(나무위키) / 네이버 블로그
『당신이 알아야 할 한국사 10』에 대한 서평이 책은 표지의 질문들이 먼저 눈길을 끄는데 ‘독도는 왜 우리나라 땅입니까?’와 같은 한국사 이슈에 관한 역사 질문으로 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독도는 우리나라 땅이며 일본이 억지로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것은 당연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우리나라 땅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논쟁에 잘 대처하기 위해서는 독도가 왜 우리나라 땅인지에 대해 명확하고 자세한 논리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이 책에서는 독도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알아야 할 10가지의 중요한 상식을 풀어냈다. 10가지 키워드는 독도, 일본군 ‘위안부’, 동북공정, 야스쿠니 신사, 약탈 문화재 반환, 독립운동 인물, 독립운동 역사, 한글, 한식, 아리랑의 순서로 10가지 키워드의 한국사 상식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독도는 왜 우리나라 땅인지부터 시작하여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 동원은 없었다는 일본의 주장에 대한 진짜 역사적 사실은 무엇인지, 중국에서 주장하는 동북공정의 내용은 무엇인지, 우리나라는 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지, 약탈 문화재는 왜 환수되어야 하는지 등에 대해 각 키워드에 맞게 궁금증을 유발하는 질문들로 목차를 이루어 한국사 상식이 쉽고 재미있게 설명되어 있다. 또한 각 키워드 마다 가 담겨 있는데 여기에는 이 책의 주요 저자인 서경덕 교수가 ‘한국 알리미’로서 여러 나라에 역사 왜곡과 관련된 캠페인을 전개하며 세계적인 여론을 환기하고 한국의 역사를 홍보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들을 전개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우리가 역사를 단지 과거의 이야기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로도 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10가지의 주제 중 우선 왜 독도가 우리나라 땅인지에 대해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독도의 위치는 울릉도로부터 87.4km가 떨어져 있어 아주 가깝진 않지만 1년에 60일 정도는 육안으로 독도가 보인다. 하지만 일본은 독도와 가장 가까운 섬인 오키섬에서 157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여 육안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지금껏 나는 독도가 일본과 우리나라의 중간에 위치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책의 가장 첫 번째 문단에 나온 이 사실은 나에게 큰 충격을 줌과 동시에 다음 내용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이어서 보면 고대, 근대의 일본 지도에는 독도가 없고 일본 정부가 독도는 조선 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던 문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부정하고 전쟁 작전에 이익을 위해 1905년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시마네현에 강제 편입을 시켰다. 오늘날 일본이 주장하는 독도 영유권 주장의 핵심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둘러싸고 나온다. 이 조약에서 한국 영토 조항에 독도가 빠진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일본 측은 독도가 일본 영토로 남았다고 주장해 왔다. 이에 우리나라는 조약의 최종안에 독도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2차 세계대전 이후 1946년에 연합국 총사령부가 발행한 로 그 효력이 계승되었고 여기의 독도가 한국 영토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독도는 우리나라의 영토임을 확실히 하고 있다. 그 후에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극동위원회로 넘어가지만 결국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3일 후 미국의 극동 담당자 딘 러스크의 명의로 된 서한이 한국 대사관으로 보내지는데 이 문서가 소위으로 불리는 문서이다. 문서에는 1905년 전 독도가 한국의 일부였다는 증거가 없고 1905년 이후 일본의 관할 하에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것으로 일본은 대일 평화조약상 독도가 일본 영토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내용은 한국에만 송부된 비밀문서였고 연합국의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미국만의 견해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연합국은 독도에 대한 한국의 지배에 묵인으로 승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나 현재까지 한국의 영토인 것이다. 이것으로 이제 왜 독도가 우리나라의 영토인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독도는 한국인 모두에게 중요한 존재이며 우리의 독도를 아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중한 영토인 독도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귀 기울이며 독도를 세계의 알리기 위해 힘쓰는 분들의 노력을 본받아 더욱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주제는 ‘왜 수요일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집회가 열리는 걸까?’라는 주제였다.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강제로 끌려가 성 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피해자들이다. 또한 일본 정부와, 일본군 그리고 일본 전범 기업에 의해 전개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전쟁범죄이다. 전쟁 당시 20만 명에 이르는 조선 여성들이 속임수와 폭력에 의해 연행되어 성적 행위와 폭력을 강요당하고 성병으로 인해 병약해진 몸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온 피해자 할머니들은 사회적 냉대와 성적 후유증을 포함한 각종 여성병을 앓게 되었다. 이 문제는 1980년대 후반 피해자 여성 생존자들을 찾아다니며 조사해 온 윤정옥 교수(이화여대)의 연구와 폭로로 인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 후 한국 내 피해자 중 처음으로 김학순 할머니가 실명을 공개하고 기자회견을 열면서부터 피해자 할머니들의 신고가 늘어나게 되었다. 점차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운동이 퍼져 나가면서 피해자들의 주체적인 운동도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서 가장 대표적인 활동이 바로 지금까지 열리고 있는 수요 집회이다. 1992년 1월 8일부터 매주 수요일 정오, 서울에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리며 현재까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열리고 있다. 또한 1992년부터 국제 연합 인권 위원회에서도 논의되기 시작하여 수많은 국제기구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했으나 일본은 이미 다 끝난 얘기라는 입장만 보이며 지금까지도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하지 않고 있다. 이후 일어난 '2015 합의'는 피해자와 논의나 동의 과정 없이 진행되었다는 절차상 문제만이 아니라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쌓아 올렸던 운동의 성과를 정부가 나서서 무너뜨렸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아직까지도 수요 집회를 비롯한 피해자 할머니들의 노력과 여러 단체의 활동은 지속되고 있다. 이는 피해자분들이 더 이상 계시지 않더라도 끝나서는 안되며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역사를 통해 기억하고 끝없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외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들은 많다. 하지만 역사 문제들의 가장 큰 적은 일본 정부나 다른 나라가 아니라 우리의 무관심이었다. 역사를 단순히 과거의 역사로만 바라보며 과거의 이야기로만 받아들인다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다가오는 미래에 더 강한 국가를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시각으로 집필된 책을 통해 우리의 안목을 다지고 우리의 영토와 역사를 우리 스스로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영화 ‘우리 학교’ 감상문영화는 해방 후 재일 조선인들에 의해 세워진 조선학교의 역사와 그 현재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진행된다. 김명준 감독은 2003년 말부터 홋카이도 조선 초중고급학교에서 교원, 학생들과 함께 약 3년 5개월가량의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들의 일상을 담아냈다.사실 나에게는 재일 동포와 조선학교란 단어가 무척 생소했다. 따라서 영화 초반에는 2000년대 초반의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더 과거인 8-90년대의 학교를 보는듯한 느낌과 분위기, 우리나라 말이 아닌 북한 말과 일본어가 섞여 잘 알아들을 수 없었고 북한의 모습이 떠올라 이상하고 낯설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점점 학생들과 함께 학교생활을 하는 느낌을 받았고 마지막 졸업식 장면에서는 눈물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오프닝 첫 장면으로 하얀 눈으로 뒤덮인 홋카이도의 도로와 한 조선학교가 나온다. 일본 북단에 위치한 홋카이도에서 조선학교는 이 학교 하나뿐이다. 일본 사회 속에서 마치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조선학교의 위치가 상징적으로 나타나있다. 해방 직후까지 일본 국적이었던 재일 동포들에겐 조선 국적이 부여되었다. 즉 남한 국적도 북한 국적도 아닌 무국적자로 남겨지게 된 것인데 이 재일 동포 1세들이 빼앗긴 우리 말과 글, 역사를 자녀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학교를 세운 것이 바로 조선학교이다. 540여 개가 넘던 조선학교는 일본 우익의 탄압 속에 이제는 80여 개의 학교만이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즉, 이 학교 학생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조선의 말과 글, 역사에 대해 배우기 위해 조선학교를 선택한 학생들이며 위험한 환경 속에서도 학교를 통해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고 서로 도와가며 공부하고 있었다. 교원과 학생들의 관계는 마치 드라마에 나올법한 이상적이고 화목한 공동체의 모습이었다. 학생들은 스스럼없이 선생님께 질문하고 대화하며 선생님 또한 가르치기만 할 뿐 아니라 함께 공부하며 배움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또한 내가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축구 경기를 하는 장면이었다. 원래 조선학교는 일본법에 따라 일본 고교 스포츠 공식 대회에 출전 자격조차 없었으나 운동과 항의를 통해 96년도부터 공식 대회에 참가 자격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정식 가맹이 아니라 준가맹으로 인정되어 전국 대회에 참가하더라도 시와 도에서는 다른 일본 학교에게는 지원되는 숙박, 교통비 등을 일체 지원해 주지 않는다. 이런 차별 속에서 조선학교 축구부의 고등부 3학년생들은 1,2학년과 함께 졸업 전 마지막 경기를 치르지만 아쉽게도 패배한다. 하지만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동포들을 위해 부모, 학교에 대한 사랑과 사명감으로 경기에 임하는 학생들의 마인드가 정말 인상적이었고 단지 져서가 아닌 그것들을 이루지 못했고 후배들과 다시 경기를 뛸 수 없다는 마음에 모두 눈물바다가 되었고 그 깊은 울림이 나에게도 전해져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영화는 한 마디로는 정의하기 힘든 묵직한 감동을 주었다. 가장 고학년인 고급부 3학년생들은 그 아래에 하급생들을 이끌어 가며 이들을 중심으로 수학여행, 합창대회, 운동회 등 행사들을 진행해나간다. 영화가 끝나면 ‘우리 학교’의 1년을 이들과 함께 보내게 된다. 처음에는 낯설고 이상했던 학생들의 발음도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고 그 간절함과 진정성이 전해져 그들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남한이 북한보다 더 잘 살고 우월하다는 일종의 선입견으로 인해 학교 학생들의 발음을 이상하게 바라본 거 같아 조금 부끄러웠다. 북한과 달리 우리 남한은 이들에게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 역시 놀랍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고 일본의 억압과 차별 속에서도 조선이라는 민족 문화를 보존하고 이어나가려는 이들의 노력과 의지가 더욱 돋보였다. 조선학교의 학생들이 보여준 우리나라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 민족성을 지키겠다는 마음과 통일에 대한 열망을 통해 잊고 있었던 통일과 우리 민족성에 대해 가슴속에 새길 수 있었고, 외국인에 대한 차별과 관련하여 다양한 정체성에 대한 존중과 배려와 함께 제도적인 뒷받침이 더 필요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