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10년 6개월 간 장교로서 복무하고 34살의 나이로 전역한 예비역 대위입니다. 그리고 전역을 한지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전역을 결심하면서 앞으로는 이러한 삶을 살아봐야지 하면서 장밋빛 미래를 그리던게 엊그제 같은데요, 하지만 사회로 나와 느낀 건 역시 ‘쉬운것은 없다’ 였습니다. 전역을 하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역 후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의문과 답답함 그리고 두려움도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전역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고 전역 이후에 어떤 삶이 있는지는 블로그나 유튜브 등 인터넷을 통해 단편적으로밖에 알지 못 하는게 현실입니다.때문에 저는 여러분에게 제가 전역을 결심한 순간부터 전직교육기간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제 경험을 바탕으로 어떻게 전역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비록 자랑할 수 없는, 어떻게 보면 실패뿐인 경험담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점을 교훈 삼고자 합니다.이 글이 조금이나마 제 2의 삶을 준비하시는 장기복무 군인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이하 썸네일을 참조해주세요>
북한의 교육과 문학예술 조선대 군사학부 최석 훈목 차 북한의 교육정책 1 1 북한의 학교생활 2 북한의 문예정책 3 문예분야별 실태 4북한의 교육정책 1북한의 교육정책 건전한 사상의식과 깊은 과학기술지식 , 튼튼한 체력을 지닌 믿음직한 인재를 키우는 것 . [ 교육법 제 1 장 3 절 ] 북한의 교육목적 과학지식 체 력 혁명사 상 혁명사 상 주체사상 , 당 정책 ,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 체 력 노동과 국방의 의무를 감당할 준비 과학지식 선진과학기술의 성과를 체득 학생들을 ‘ 혁명화 , 노동계급화 , 공산주의화 ’ 하여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 북한 지도층에 충성하는 인재 양성이 목표 북한의 교육목적북한의 교육정책 노 동 당 : 교육과 관련된 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지시 및 전달하며 우선적인 권한을 갖고 인사나 교육문제를 다룸 . 내 각 : 교육성이 행정적 , 실질적인 업무 담당 학 교 : 당과 내각의 지도 및 통제를 받아 교육 실시 북한의 교육행정체계북한의 교육정책 보통교육 : 한국의 의무교육에 해당 유치원 , 소학교 , 중학교 총 11 년 고등교육 : 한국의 대학과정 성적뿐만 아니라 성분과 가정환경도 중요 특수교육 : 외국어 , 과학기술 , 체육 , 예술분야 인재양성 북한의 학제 남한과 북한의 학제 비교표북한의 교육정책 정치사상교육 : 김일성 , 김정일의 혁명역사와 혁명활동 과학기술교육 : 일반과학과 전문기술 체육교육 : 노동과 국방에 필요한 체력향상 북한의 교육과정 사회주의 사회 특성상 교육과 정치가 결합 교육내용에 생산노동이 포함되어 생산활동과 직접 결합 교육의 내용과 방법이 국가에 의해 규격화북한의 학교생활 2북한의 학교생활 일반수업 외 노력동원과 조직생활 수행 노력동원 : 학생의 사회의무 노동은 1959 년부터 정규교육의 일환으로 실시 조직생활 : 소학교 2 학년 - 소년단 가입 중학교 5 학년 -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붉은청년근위대 학교활동 소학년생부터 대학생까지 예외없이 모두 동일 남한의 과외와 같은 개념은 원칙적으로 실시되지 않음 북한 소년단 북한 붉은청년근위대북한의 학교생활 학교규율 위반 , 용의복장 불량 , 흡연과 음주 , 이성교제 자본주의 문화유입에 따른 모방행위 청년동맹에서 처벌권한을 가지고 처벌함 학생의 일탈과 처벌 1990 년대 경제난 이후 일탈현상이 심해지고 있음 경제난 이후 가족해체와 북한사회의 전반적인 통제이완현상 특히 생계형 일탈현상 증가 북한의 꽃제비 [ 북한 전국적으로 25 만 명 ]북한의 문예정책 3북한의 문예정책 해방 후 사회주의체제 수립의 정당성을 확보 사회주의체제 수립에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는 수단 1990 년대에는 북한주민의 사상적 결속을 위함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정당성과 충성심을 확보 남조선혁명의 정당성 확보 정책적 목표 선전선동과 지도자 중심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 기여북한의 문예정책 집단적 창작 (3 위 1 체 제제 ) 당 , 행정기관 , 예술인이 공동으로 창작과정에 참여 대표적 예술인조직 : 조선문학예술총동맹 ( 문예총 ) 예술소조 : 공장 , 기업소 , 협동단체 등에 조직되어 근로인민대중의 예술 활동이 이루어짐 창작제도문예분야별 실태 4문 학 70 년대 : 피바다 꽃파는 처녀 한 자위단원의 운명 항일 혁명투쟁관련 작품 / 주체문예이론대두 80 년대 : 청춘송가 생활 속의 소재를 사용하는 방향으로 다소 변화 90 년대 : 위대한 수령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네 나는 주체사상탑과 이야기한다 추모문학 , 단군문학 , 태양민족문학 , 선군혁명문학 2000 년대 : 나의 멋 유치원 마당가에서 황진이 개인의 일상성 , 현실체험을 통한 작품창작 북한의 대표적 문학작품 [ 피바다 , 꽃파는처녀 , 황진이 ]음 악 일반적으로 선전선동의 수단 등의 기능적인 면이 강함 서사적이면서 사실적임 음악 , 단순한 화성음악이 주류 최근 : 비정치적인음악 / 선군정치에 부응하는 노래증가 그동안 금기시되어 왔던 대중가요풍의 생활가요가 유행하기도 함 북한곡 : 휘파람무 용 여타 예술분야에 비해 독자적 정체성이 미약함 전투적이고 선동적인 동작이 중시 눈이 내린다 조국의 진달래 키춤 사과풍년 대표적 집단체조를 공연예술의 형식으로 발전 [ 아리랑 ] [ 아리랑 ] 공연 – 선군정치 우월성 선전 , 김일성 , 김정일 우상화사업미 술 기존의 미술을 배척하고 항일혁명미술을 참된 미술로 평가 기존의 미술은 착취계급의 사상과 취미를 반영했다고 평가 추상화나 추상조각 등은 찾아보기 힘듬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 내용의 주체적이며 혁명적인 미술 권장 노동하는 장면 , 농사짓는 장면 등이 많음 북한 조각 및 회화작품영화 및 연극 / 드라마 영화는 다른 어느 예술보다 중요하게 취급 영화에 음악 , 미술 , 연극 등의 예술적 모든 요소가 결합 최근 : 김정일의 선군정치를 반영한 작품이 대부분 연극은 1980 년대 이후 대작 위주로 창작 성황당 최근 : 북한주민들 사이에서 가벼운 희극공연이 인기 드라마의 중심 주제는 사회주의 혁명을 이뤄가는 모습 최근 : 짧은 편수와 생활 모습을 그린다는 점에서 인기 왼쪽부터 딸에게서 온 편지 ( 연극 ), 엄마를 깨우지 말아 ( 드라마 ), 돌아오지 않는 밀사 ( 영화 )질의 및 응답감사합니다{nameOfApplication=Show}
군사사 REPORT20075039 최석훈1장. 고조선의 요동확보고조선은 건국초기에는 제사장이 정치적 군장을 겸임하는 이른바 제정일치 국가였다. 즉 정치적 군장인 단군왕검이 통치하는 성읍국가로 출발한 것이다. 그러다가 한(韓)으로 불리는 정치적 대군장이 다스리는 보다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국가로 발전한 것이 연맹왕국이다.이들이 지배하던 연맹왕국은 석기시대를 벗어나면서 청동기 문화를 향유하는 선진화된 국가로 발전해갔다. 한편 고조선 영역의 주변에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크고 작은 국가들이 출현하여 경정잭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들 상호간에 무력충돌의 위험이 점증하게 되면서 군사력 확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고조선은 기원전 7세기 경부터 중국 춘추시대의 제나라와 경제·문화적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경제력을 축적하고 지배층의 권위를 신장시키는 등 괄목할 성장을 이룩하였다. 중국대륙에서 기원전 8세기 후반은 이른바 춘추전국시대로 불린다. 그 중 연의 주변국에 대한 강압적인 대외정책 하에서 동호족을 공략한 후로 연의 예봉은 고조선을 향하고 있었다. 고조선은 중국대륙 정세의 변화와 그에 따른 연의 침공야욕을 간파하고 있었다. 연의 동진정책을 사전에 무력화시키기 위한 적극적 대응전략으로 채택한 것이 요서 지역을 선점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고조선은 연의 동진정책을 외교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별도의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함께 추진해 나갔다. 즉 군사적으로는 선제 기습공격을 기본으로 한 대응전략을 은밀히 추진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외교적 노력을 통해 연의 침공 기도를 일단 중지시키고 예봉을 피하는 강온양면 전략이다. 후 강온양면 전략의 균형이 깨지면서 고조선은 외교적 방법으로 일단 연의 침공 위협을 약화시킨 후로 암암리에 군사력을 강화해 나갔다. 그리고 연의 무리한 조공 요구에 정면으로 맞서는 강격 대응전략을 세웠다. 기원전 300년 경 연은 이끌고 대릉하 방면으로 쳐들어왔다. 이 지역은 고조선의 입장에서도 중국세력의 견제라는 측면에서 중요시하는 지역되었다. 이후 고조선은 내부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세력과의 접촉선에서 멀리 떨어진 한반도 내륙지역의 안전지대인 평양으로 옮겨진 것이다. 한 편, 연나라가 진나라에 복속되고 다시 통일된 진나라가 한나라에 멸망하게 되었다. 고조선 역시 연 지역에서 건너온 유민 중 위만에 의해 준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라 위만조선을 열게 되었다. 위만조선은 초기 한나라와 대립하기 보다는 우선적으로 관계 개선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수준 높은 철기문화와 유민들에 의한 선진문물을 유입하고 한의 외곽을 방호하는 이른바 번국으로서 국가이익을 챙기게 되었다. 우거왕 시대에 이르러 고조선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고조선의 영역도 최대 판도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에 대한 입조를 중단하고 주변국들의 교류마저 차단 봉쇄함으로써 한나라와 고조선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군사적 대립이 첨예해졌다. 처음 고조선은 패수와 왕검성에 상륙한 한의 군대를 막아서 패퇴시켰으나 한은 지연전을 통해 결국 왕검성까지 이르게 된다. 고조선역시 전공을 다투는 육로군과 수로군 지휘관의 경쟁심을 이용하여 상호간 갈등을 조장하는 이간전술을 펼쳤다. 하지만 전세를 타개할 방책이 되지 못하였고 강화론자와 강경론자의 내분으로 인해 항전의식이 약화됨에 따라 결국 자멸하고 만다. 2장.고구려 영토확장기고구려는 기원후 1세기 경에 고대국가를 형성하여 밖으로 부여 및 중국세력과 끊임없이 대리바는 가운데 영토확장을 도모하면서 국가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그 결과 고구려의 대외정복을 통한 영토확장전략이 보다 활발하게 추진된 것은 태조왕부터로서, 중국과 충돌하면서 축적된 국력과 경험을 바탕을 하여 본격적으로 실행되었다. 당시 상황은 초기에는 기병을 이용하여 기동위주의 전술을 채택하였으나 광범위한 영토를 확장한 이후에는 기동전보다는 성곽을 중심으로 한 공성전 위주로 방위전략을 바꾸고, 중국세력보다 상대적으로 열세한 군사력 운용 및 유지를 위한 보급지원과 인력동원의 한계로 인해 단기 제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다, 기름진 평야지대에 위치한 옥저는 그 후 고구려가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추진하는 후방기지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중국대륙의 전략환경도 후한의 국력쇠퇴로 인해 고구려의 팽창정책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는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정착시킨 결과 동북아의 강국으로 발전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 후로 고구려가 북방의 연에 대한 유화정책을 통해 경계심을 완화시키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남진정책과 연동되는 상관관계를 가졌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백제-왜국이 제유한 후방지역의 후환을 제거하고 장차 후연과의 전쟁에 주력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척박한 땅에서 농업과 수렵을 병행하면서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으로 삶을 영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국민적 저력을 영토확장을 위한 군사력으로 결집시킨 인물이 광개토대왕이라고 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은 소수림왕-고국양왕이 국가체제를 정비한 바탕 위에서 ‘선남진 후북방’을 전략 기조로 삼아 팽창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남으로는 한강유역, 북으로는 부여의 농안일대, 동으로는 오늘날 길림과 연해주, 서로는 요동을 장악하여 북경일대까지 진출하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으로부터 광대한 제국을 물려받았다. 그는 부왕의 업적을 계승하면서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주로 백제를 지향한 남진정책으로 한강 일대까지 영향력을 확장시킴으로써 한민족 역사상 최대 판도를 형성하여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이러한 장수왕대의 대외 전략의 기본구도는 한반도 남쪽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공세전략이었다. 그리고 이를 추진하기 위해 장수왕은 당시 중국 남-북조의 정세 변동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양대세력을 적절하게 견제, 조정하였다. 특히 고구려와 인접한 중국대륙의 북위를 상태로 전개한 전략을 오늘날의 전쟁억제전략의 개념과 비견할 수 잇을 것이다. 당시 북중국의 정세는 선비족이 세운 북위 세력이 주변국을 압박하는 상황이었다. 북위는 ‘5호 16국’의 혼북조의 대립관계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중립외교로 세력균형을 유지했기 때문에 남진정책을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 내부에서는 여전히 군소 세력간에 권력장악을 위한 정쟁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외척 세력 간에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싼 암투는 고구려 집권층의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악재로 작용했다. 한편, 고구려와 백제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으면서 혼란의 와중에서도 군사력을 꾸준히 확충한 신라는 진흥왕대에 이르러 과감한 팽창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로써 후발주자인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에 뛰어들면서 영토확장을 위한 삼국의 각축전이 전개된 것이다.3장.고구려의 대외 전쟁기고구려는 영양왕대에 동북 만주지역으로 뻗쳐오는 수나라 영토확장 정책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가 수나라의 영주 지방을 선제공격함으로써 유리한 상황에서 무력 대결을 전개하려는 ‘예방전쟁전략’ 즉, 고·수간 전쟁 발발이 당장 급박한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고구려는 수의 영토확장 정책과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였다. 때문에 수가 전쟁을 충분하게 준비하기 전에 유리한 상황에서 먼저 공격하는 것이 오히려 득이 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의 반격으로 오히려 큰 피해를 입고 실패로 끝난 고구려의 선제공격은 수나라에 또 다른 침공명분만 제공한 결과로 끝났다. 수 문제가 고구려의 영주 침공을 문책한다는 핑계로 대대적인 침공을 단행하고 이에 고구려가 총력전으로 대응하자 양국간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수의 원정군이 도중에 자진해서 퇴각하자 이를 계기로 고구려는 양국간 긴장을 완화시키는 외교적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는 강경 대응책의 대두와 돌궐과 제휴하려는 고구려의 기도를 저지하고 실추된 수의 위신을 만회하기 위해 재침을 단행하였다. 초기에는 수의 기선을 제압함으로써 전의를 약화시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지만 점차 시일이 경과하면서 수군의 후속부대가 증원되고 전열을 정비하여 도하작전을 재개했기 때문에 요동성으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고구려군은 요동성에서 수군의 포위에구려의 기만전술은 아군의 시간 획득 및 적 공격기세 약화로 전투력을 보존함으로써 수차례 적의 공세를 둔화시켜 지연작전의 성공을 보장하였다. 결국 수는 기동력이 뛰어난 정예부대를 수도 평양으로 진출시켜 우기가 시작되기 전에 고구려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속전속결 전략을 채택하였지만 살수에서 대패하게 되면서 후퇴하였다. 수는 건국초기에 대운하 건설 등으로 피폐한 내부사정을 무시한 채 장기간 원정작전을 감행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당나라가 들어서자 고구려는 화친노선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 고구려는 북쪽 부여성에서 남쪽 대련 부군의 비사성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축성하였고, 연개소문이 주도한 쿠테타 세력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연개소문은 당의 중재를 정면 거부하거나 신라에 한강유역의 반환을 요구하는 등 강경노선을 일관한 특징이 있다. 이는 신라가 집요하게 대당외교를 전개한 결과와 다른 한편으로 고구려가 강경파의 집권으로 대당외교의 유연성을 상실한 채 강경 일변도로 당 태종의 침공 야욕을 자극한 결과를 일으키게 되는데 고구려와 당과의 충돌은 크게 두 차례로 압축된다. 1차 전쟁은 645년 개모성, 백암성, 안시성 일대를 연하는 일련의 전투로 이루어지며, 제2차 전쟁은 647년 남소성,박작성 일대에서 전개된 전투가 중심을 이루었다. 1차전쟁에서 당은 안시성의 공략에 실패하면서 철수하게 되고 2차 전쟁에서는 무모한 전쟁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수륙양면으로 소규모 정예부대를 고구려 변경지역에 몇 차례 투입함으로써 고구려의 전력을 고갈시키고 내부혼란을 조성한 다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지역 일대가 초토화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더욱이 고구려는 당의 침공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으므로 전시나 다름없는 대비태세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농업인력이 전선에 동원되었고, 농업 생산성은 급락하였다. 이로 인해 식량난이 가중되는 등 전반적인 경제악화로 인해 국력 고갈이 심화되었다었다.
1990년대 들어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출산율 감소는 유럽과 미국의 현상보다 빠르고 급격한 양상을 보이며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본은 전 후 피해를 복구하며 빠른 경제성장과 산업화가 진행되어 아시아 여러나라들 중에서도 저출산현상이 상대적으로 조기에 식별된 나라가 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저출산현상은 첫 번째 베이비붐 세대라 할 수 있는 1947년부터 1949년 사이의 단카이 세대1)와 두 번째 베이비붐이라 할 수 있는 1970년부터 1974년 사이의 단카이 주니어2) 세대를 굴곡점으로 잠시 증가하였으나 아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전체적으로 감소하는 것을 알 수 있다.특히 단카이 주니어 세대는 현재 일본의 인구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인구이지만 이들이 결혼 및 출산 적령기가 되었을 1990년 이후 출산율이 높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세대가 사회에 입문할 무렵은 일본이 경제가 장기 불황의 터널에 들어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이 성인이 되어 사회에 진출하게 되어야 할 시기였던 1990년대 후반 실업률이 사상 최고점을 기록하고, 자살률, 범죄율과 같은 사회 불안정 지표도 동시에 치솟던 시기가 겹친다. 젊은 층 역시 실업률이 높아지고 프리터나 니트가 증가하는 등 젊은 층이 사회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어렵게 되어 결혼과 출산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2005년 1.26명이라는 전후 이래 최저치를 기록하며 일본 사회에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이후 일본의 경제 상황이 조금 나아진 2000년대 후반부터 단카이 주니어 세대가 뒤늦게 출산에 합류해 합계출산율의 상승에 기여하기도 하였으나, 중년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미혼율이 높은 상태로 남아 일본의 높은 생애 미혼율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한편, 2019년 일본의 인구통계에서 합계출산율이 1.36으로 하락하고 신생아의 숫자가 처음으로 90만명 밑(86만 5234명)으로 떨어진 시기에 일본 신문들은 ......<중 략>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와 연구 방향(서론)『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가 1926년에 발표한 소설로서 작가의 대표적인 초기 중편소설로 알려져 있다. 소설은 스무살의 ‘나’가 고아 기질로 뒤틀린 자신의 성격을 반성하고 고독이나 우울한 기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즈로 혼자 여행을 간 청년에 대한 1인칭적 소설이다. 이러한 소설의 배경에는 작가 본인이 스스로 고등학교 1학년 때(1918년 가을) 이즈를 약 8일간 여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실제 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어린 시절 부모와 누나를 잃고 고아로 자라게 되었으며 이즈(伊豆)로 여행을 했던 이유 역시 고아근성에 묶여져 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의 반성하며 동시에 그런 자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우울이 원인이었다고 밝히게 되었다. 여행 간 유랑단과 같이 동행했던 사실도 소설 속에 녹여져 ‘나’ 역시 유랑단 일행과 만나 ‘시모다시’까지 동행하게 되며 이후 소설적 내용으로‘나’에게 호감을 보내주는 유랑단의 무희인 ‘가오루’에게 아련한 연심을 느끼며 설렘 가득한 여행을 하게 된다. 하지만 시모다시에 도착한 ‘나’는 다시 배를 타고 도쿄로 돌아가며 유랑단 및 무희와 헤어지게 되고 ‘나’는 흔들리는 배 안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받아들이며 소설을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