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철학 레포트김**자리끼수많은 사람이 지금도 도덕경을 읽고 있고, 우리 역시 도덕경을 음미하고 있다. 도덕경의 한마디 한마디는 촌철살인의 모호성으로 우리들을 일깨우는 듯하다. 하지만 말이라는 것은 그 어느 것의 진면목도 완벽히 표현할 수 없다. 단면은 기가 막히게 표현해낼 수 있지만, 그 말들은-실상 어느 말이든-그것이 가진 생명력을 영원히 보장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런 가운데, 이해하기 쉽지 않은 노자의 책을 발견해낸 것이다. 어떻게 노자는 수천년동안 살아남았을까? 나는 노자가 왜 이런 작법으로 우리에게 말을 거는지부터 생각해야겠다.“...피와 아포리즘으로 쓰는 사람은 읽혀지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산과 산 사이를 가장 빨리 가는 길은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긴 다리를 가져야만 한다. 아포리즘은 봉우리들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듣게 된 자들은 키가 크고 높이 솟은 자여야 한다....”이것은 노자와는 거의 상관없는, 그리고 어쩌면 정반대의 사상을 견지한 니체의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니체의 생각은 도덕경의 의도를 대변하지 않는가! 결국 노자가 도덕경을 집필함으로써 의도했던 것은, 도(도)를 행하고 그 위를 걷는 ‘단일성의 직시가 가능한 자’를 길러내기 위함이 아닌가? 우리는 그의 형형색색 문장들을 거닐며, 구분과 분열 속을 휘젓는다. 개념은 더 이상 개념이 아니고, 구분은 가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들은 키가 크고 높이 솟은 자가 되어 인간계의 허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노자에게 있어서는(니체에게 있어서만큼) 어떠한 표현보다도 내용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이렇게 글로 적어 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이, 잠든 이가 한밤중에 목말라 할 때, 자리끼와 같이, 나 자신에겐 목을 축여주고, 이 다면(多面)의 문자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쟁점은 ‘과연 비움이 무엇이며, 무엇이 가치 있고, 우리는 무엇을 소중히 다뤄야 하는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위대하게 만드는 단일성이란 무엇인가?’ 일 것이다.싯다르타는 바라문의 아들이었다. 그는 바라문의 아들로서 기도를 하고, ‘옴’을 소리 내어 읽었으며, 단식과 사색과 기다림을 행하는데 능했다. 싯다르타는 그 시대의 예의와 몸짓을 온몸에 두루 치장하고, 그의 해박함과 그의 지혜로움으로 시대의 존경을 받는 소년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어느 날 모험이 찾아온다. 침잠과 완벽의 상징이었던 싯다르타는, 떠돌이 승려들인 사문들에게 마음이 이끌려, 그들과 함께 하기로 한다. 이제 사문이 된 그는 이제 속세와 결별한다. 그의 눈은 속세에 대한 증오와 멸시의 불꽃으로 가득 찼고, 그런 그의 눈은 고통 받는 이들로만 가득 찬 쓰디 쓴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싯다르타의 사문 시절 가장 큰 목표는 오히려 그를 비우는 것이었다. 그의 생각에는 그의 욕구와 꿈으로부터 벗어나, 자아를 상실하고 초탈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심장박동과 호흡을 줄이고 줄여, 그는 마침내 그것이 거의 없는 경지에 이르러 영혼만으로 세상을 맛본다. 왜가리가 되고, 해변에 쓰러져 썩어가는 재칼이 되고, 나무가 되고, 돌이 되고 물이 되었지만, 언제나 윤회의 수레바퀴 그 가장자리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가 욕구를 벗어날 즈음이면, 그는 새로운 욕구와 함께 했다. 그가 자아를 벗어날 즈음이면, 그의 또 다른 자아가 그를 찾아왔다. 업보는 그가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그의 곁에 더 강하게 머물렀다. 그는 자아로부터 도망치려고 했을 뿐이었지, 초월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그때 그는 고타마 싯다르타(석가모니)의 소문을 듣는다. 고타마는 그의 내면에서 윤회를 정지시키고 번뇌를 극복한 부처였다. 손짓과 눈빛 그리고 호흡을 비롯한 모든 면모에서 고타마는 부처의 자비와 평온함을 보였다. 사문의 무리를 떠난 우리의 주인공 싯다르타는 고타마의 말을 들어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도착해서 보니, 소문 못지않은 설득력으로 부처는 설법을 한다. 부처가 되는 길을 걷는 것이 해탈을 하는 방법이라고.싯다르타는 듣는다. 싯다르타는 듣고 사색한다. 싯다르타의 생각은, 해탈은 말이나 글 등의 가르침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싯다르타는 부처에게 감탄했지만, 싯다르타 자신만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저 도망만 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싯다르타는 강을 건넌다.‘싯다르타’(헤르만 헤세)의 내용이다. 이것은 노자가 도덕경에서 언급한, 도를 향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빠짐없이 서술한다. 강을 건너기 전까지, 싯다르타는 자신을 비우는 과정에서부터, 무지를 깨닫는 과정까지를 지난다. 그는 지칠 줄 모르고 비우며 기다렸지만, 결국 그가 발견한 것은 도망치는 자아였다. 그가 가르침 받아온 것들은 무상하고, 단편적이며 순간적인 답이었을 뿐이다. 답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바로 여기서, 마치 마크 트웨인의 각성과 같이, 그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무엇을 모르는지 까지 깨닫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일체의 구분이 우리를 그 구분 안에 구속하고, 그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은 도망이 아니라 초탈임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바라문의 삶도, 사문의 삶도, 부처가 거느린 교단에서의 삶도 그에게 있어서는 찰나였다. 싯다르타는 이 영원과도 같은 찰나동안 느긋이 기다렸지만, 그는 아직도 헷갈렸던 것이다.강을 건넌 싯다르타는 이전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그 후, 지금까지보다 굉장히 오랜 시간이 지날 동안, 지금까지의 통찰과 그에서 비롯된 능력으로 말미암아 싯다르타는 미모의 아내를 얻고, 굉장한 재산을 획득한다. 거지같은 사문의 차림새에서 이제는 부유함의 대명사로 발돋움하였다. 싯다르타에게서 20년의 시간은 그렇게 무섭게 지나가버렸다. 싯다르타는 그 시간 동안 자신의 길을 잊고 살며, 도박이나 식욕 색욕과 같은 욕구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화내는 일이 잦아졌으며, 더불어 남들과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이런 유희의 한가운데에서 싯다르타는 유희의 반복이 윤회의 반복임을 알게 된다. 회의는 회의를 낳고, 싯다르타는 자신의 유희가 끝났으며, 자기가 더 이상 이 유희를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는 드디어 세속에서 도망친다.이것은 새로운 시작이고 새로운 탄생이었다. 잠시나마 세속에 물들었던 싯다르타는, 하지만 일전에 그가 전에 건너왔던 강가에서 생을 마감하려고 한다. 막 그의 몸 덩어리를 수면으로 던지려는 순간, 그의 입은 옴을 발한다. 그것은 강의 소리였다.일전에 강을 건널 때 도와주었던 친절한 뱃사공, 바주데바를 만나기로 한다. 이제 떠돌이 신세인 싯다르타는 뱃사공이 된다. 훨씬 투박했지만, 바주데바의 섬세한 몸짓 하나하나에도 부처의 평온함이 깃들어있었다. 무엇보다도, 바주데바는 싯다르타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잘 들어주었다. 특별한 대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싯다르타는 그에게서 영혼의 안식을 찾는다.바주데바는 싯다르타에게 강 이야기를 해준다. 강은 강 어디에나, 어귀에도, 폭포에도, 원천에도 있다. 그리고 강의 시간은 항상 지금이다. 어제의 그림자와 내일의 그림자도 사실은 지금이었고 지금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강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삶 역시 강임을 안다. 범천이나 회귀의 일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없을 것임을 안다. 이제 싯다르타는 바주데바와 함께 강의 소리를 들으며 산다.강은 주장을 하지 않는다. 묵묵히 모든 빗물과 지류들을 받아들인다. 큰 소리를 내지 않으나, 모든 것을 노래한다. 싯다르타는 강에서 단일성을 발견한다. 비단 강뿐이 아니라, 노래하는 모든 것, 숲과 강, 산과 돌멩이, 인간과 삼라만상이 하나임을 발견한다.
남북한 관계론 레포트기획좌담 평가김**남북한 사이의 관계, 특히 남한에서 북한이 가지는 정치적/외교적 입지는 매우 크다. 정치적 층위에서 남한 내부의 대북 정책 갈등은 일정정도 이념 갈등과 맞물려 있다. 외교적 층위에서 북한 관련 의제 역시 한국의 국제적 위상 뿐 아니라, 오랜 세월 침식해 온 이념적 스펙트럼과 결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보수-진보, 좌파-우파 획정을 기준삼아 남북한 관계의 내·외부 평면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본 보고서에선 상대적으로 보수적 입장의 남궁영 교수와 진보적 입장의 김근식 교수 간에 나눴던 기획 좌담을 다루고자 한다. 각 학자가 좌담에서 피력하는 바가 넌지시 보여주는 그들의 입장이 어떤 이유와 시각에서 비롯되었으며, 비판되고 보완되어야 할 지점은 어디에 있는지 고찰해보자.남한 사회에서 보수-진보의 구분은 꽤 뚜렷하다. 경제 영역에선 복지 논쟁과 더불어 기업이 국가에 미치는 영향력을 어느 정도로 용인하고 신뢰하는지에 따라 보수-진보의 구분의 한 축이 성립한다. 또 한 편엔 민주주의적 요소의 도입 여부 혹은 국가 권력의 강도에 달린 정치 영역이 있다. 이 두 영역이 겹치면서 한국 특유의 보수-진보관을 형성한다. 경제의 시장적 요소와 정치의 국가 권력이 결합한 보수가 있는가 하면, 경제의 평등적(복지) 요소와 정치의 민주적 요소가 결합한 진보가 있다. 경제, 정치의 각 사안은 한국 정치에선 접착력이 강한 편이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시장-민주적, 복지-국가적 입장도 성립할 수 있다. 칼로 말끔히 베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그런데 여기에 접착성을 강화시키는 한 가지 특수성이 있다. ‘대북관’을 들어 사상의 건전성을 검증하는 신문기사나 인터넷 여론을 볼 때 우리는 알게 된다. 북한을 대하는 방식이 보수-진보 진영과 어떤 상관성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거칠게 말해, 북한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북한이 우리에게 겨눈 총부리가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한 판단이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이념적 차이를 가르는 핵심 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즉 가치정향성과 정치적 태도를 판가름하는 원인으로 북한 문제가 부상함에 따라 보수-진보 획정의 판도가 달라지게 된다. 또 북한 하나만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분단과 냉전이라는 역사적 맥락, 하나의 민족이라는 변수, 지배적 체제로서의 미국이 북한/안보 문제와 하나의 궤를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특이점은 남궁영-김근식 교수의 좌담에서도 같은 형태로 전개된다. 남궁영 교수는 북한을 비정상국가로 간주하고, 그 체제에 내재한 불안정 요소-작게는 김정일의 건강 여부도 논쟁화하며?에 주목한다. 앞서 말한 역사적 맥락과 결부해 북한의 체제 불안정은 예측하고 제어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남한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온다. 여러 전략적 판단과 한국의 군사적 여건 상, 미국이 짜놓은 MD체제 등의 국제 질서에 편승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는 듯 하다. 특히나 비대칭 전력으로서 국제 안보의 축을 흔들 이슈로 부상한 북한 핵문제는 한국의 의지만으로 처리될 수 없는 큰 사안이라는 점에서, 남궁영 교수의 생각은 이해될 법 해보인다.그러나 기본적으로 그가 강조하고 있는 전략 방식은 북한이 갖고 있는 선험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즉 북한을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행위체로 그리면서, 인위적인 형질 속에 놓여진 특성으로부터 남한의 대북 기조와 정책을 기획한다. 그러다보니 좀 더 현실에 가깝고 유동적인 북한의 추이를 반영하기 힘든, 경직된 구조로 고착되는 측면이 있다. 여기에 더해 북한과의 관계 개선보다는 안보 문제의 해소가 목적이라는 의중이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이를테면 북한의 정상국가화가 선결되어야 한다는 부분이 그렇다. 즉 북한은 여전히 위협 요소이고, 적대적 국가로서 대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남궁영 교수의 인식은, 그 ‘원칙’이 대변하는 바, 체제 붕괴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지언정 제재와 압박을 수단으로 하는 반공주의적 보수관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 면에서 구성주의적 입장에서 관계의 새로운 국면을 만들고, 각 행위체의 성격 자체까지도 변화시킬 전략을 구축하는데는 소홀하다. 6자 회담의 성격을 규정하며 원천적 해결의 가능성을 닫아둔다는 사실이 그것을 방증한다. 김근식 교수의 지적처럼 북한 채널의 단절로 긴밀한 대응이 어려워지고, 북중관계가 두터워짐에 따라 정보를 중국으로부터 취득해와야 한다는 문제점 또한 이로부터 발생한다.한편으로 그가 채택하고 있는 현실주의적 입장은 초강대국인 미국의 지배적 체제 하에서 편승전략을 취하고 있다. 한-미의 긴밀한 공조가 ‘가치’가 일치해서 성립된 전략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미국의 안보 전략에 의존하다보니, 한국의 자주적/자립적인 역할의 부각되지 못한다. 강대국의 이해관계 속에 놓인 약소국의 진로는, 전근대 시기의 ‘화이질서’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 구도 속에서 한국의 입지는 작아지며,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미국에 양도하는 결과를 낳는다. 한국은 미국이 짜놓은 망 속에서 기능하는 하나의 말일 뿐이고, 그 망이 미국의 이해득실로 직조되었음을 감안할 때 한국의 거동도 큰 그림에서 미국의 이익에 봉사하고 편입되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이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척화와 주화, 개국과 쇄국의 갈림길이 친미/반미라는 새로운 국내 정치적 요소로 등극했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김근식 교수도 북한의 체제 내적 위기가 실재함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남궁영 교수와 큰 틀에선 같지만, 출발점과 그에 따른 각론에선 상이한 인식을 보인다. 전반적으로 그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남북한 문제의 방점을 둔다. 비핵개방을 위한 남북관계가 아니라, 남북관계를 위한 비핵개방을 말하는 대목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가 이명박 정부가 추진했던 비핵개방 원칙과 선핵 포기론의 유사성을 들어 그 부적절성과 실효성을 지적했던 것은, 그 이면에 북한이라는 국가를 일종의 온전한 정치체로 규정하고 1:1 혹은 다:다의 구성주의적 관계 설정을 염두에 두었음을 보여준다. 이 생각은 오히려 실제에 가까운 북한을 민감하게 정책으로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뛰어나다. 가령 남북 채널의 복구 및 긴밀화는 북한을 움직일 전략적 수를 찾는데 있어 현실주의적 태도와 그 유용성의 정도가 다르다. 김대중 정부의 기조가 그랬듯, 선공후득 대북관을 통해 보이는 국방비 절감의 효과는 오히려 실용적이다.반면에 김근식 교수가 가진 북한 인식이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도 있다. 그가 말한 ‘위기의 지속’은 안정화된 위기라기보단 만성화된 위기에 가깝기 때문에, 더 큰 위기를 초래하지 않을까? 체제 붕괴의 위기도 있겠지만, 북한 당국이 내부 안정화를 도모하기 위해 남한에 도발과 긴장 관계를 유발하는 조치가 더 잦아지고 더 강해지지 않을까 충분히 우려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북한의 주민/정보 통제력이 충분히 강하다는 발언도 납득하기 힘들다.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균열의 징후들이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된 것 아닌가 한다. 또한 핵무기 거래, 즉 비핵화 프로세스와 관계 정상화의 맞교환이 성사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은-구체적인 설명이 제시되지 않아-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미국이라는 변수는 남북한 관계에서 무시못할 위상을 갖고 있고, 그 미국이 전세계의 안보 전략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김근식 교수의 발언에서 미국이 지닌 입지는 실제보다 작아보인다.
근대정치사상왜 대립하는가?김**중세는 부정신학으로 대표된다. 신은 ‘~이다.’라는 확정적인 술어로서 정의내려질 수 없기 때문에, 대신 ‘~은 아니다.’로 소거해야만 점점 신이란 개념이 확실해지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이러한 술어 부정이 대표하는 중세의 세계상은 세계를 그 자체로 확정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그 밖의 다른 것과 비교되어야 비로소 확실해지는 것으로 비춰지게끔 만들었다.데카르트가 꿈에 의한 현실의 왜곡을 현실 인식의 현안으로 끌고온 것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그러나 그는 중세와 근대의 경계인으로서, ‘꿈’과 대적할 만큼 확실한 사실, 즉 코기토라 약칭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정식을 성립한다. 이 사유방식은 세대를 거듭해가면서 합리론의 본유관념 대 경험론의 습득관념 간 대립으로 발전한다. 이 대립은 단순히 우리의 앎이 선험적인가 경험적인가에 대한 논의를 넘어, 그 저변에서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현실이란 무엇인가를 다루는 논쟁으로 비화된다. 왜냐하면 ‘현실’은 더 이상 목적론적 인과율에 지배받지 않으며, 마키아벨리의 함의와 같이 도덕과 분리된 상태에서 원칙 없이 일어나는 우연한 변동을 일컫기 때문이다.우연적이기 때문에 손에 쥘 수 없고, 눈 뜨고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은 이제 막 신의 권능에서 벗어난 근대인을 혼란 속에 밀어넣는다. 이에 근대인은 마땅히 유효한 현실인식이란 무엇인가를 묻게된다. 마키아벨리의 과제는 현실의 변덕으로부터 발생하는 피해를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였다. 그에 반해 철학을 거칠게 정의하자면, 이렇게 인간으로선 알 수 없는 현실을 이론화/이념화하여 어떤 일률적인 원칙 속에서 다루어보려는 시도이다. ‘리얼리티’는 이렇게 현실이라는 한계 속에서 필요에 의해 발명된다. 본유관념, 습득관념 역시 그 자체로 사실이라기보단 하나의 시도이자 잠정적인 리얼리티에 머문다.그러나 현실은 사람에 따라, 환경, 사회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인식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정치적 대립을 초래한다. 주장되는 모든 것은, 그 객관성을 담보해주는 초월적인 실재(이를테면 중세의 신)가 부재하기 때문에 상대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이 옳다’고 말할 때, 그것이 하나의 의견일 수 밖에 없다는 불확실성에 사로잡힌 채 ‘선’, ‘정의’, 나아가 ‘세계’를 독점하려 시도하는 것이다. 형태가 부드러운가 독단적인가에 관계없이 상대방의 주장과 지위를 절대악시하는 태도가 그 이면에 있다. 리얼리티는 확정된 그 무엇이 아니라 획정되어야 할 그 무엇이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로 재탄생한다. 하나의 리얼리티에 매몰되면, 다른 리얼리티가 내 시각과 세계 안에선 그 정합성을 잃게 된다는 점에서 이 생각은 일견 타당하다.
근대정치사상 중간고사 레포트포르투나에 대한 단상김**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은 불행하다. 어느 하나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잡지 못하기 때문에 더 원한다. 이런 식의 역설은 그의 일상에서 두고두고 반복된다. 과열된 노력사회에서 획득을 위한 경로는 더욱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멘토임을 자처하는 자들의 서적과 강연에선 전부 노력만을 유일한 길로 지목한다. 그들은 꼭 그들이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뿌옇고 불분명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들의 세상은 스스로의 테두리 내에서만 유효하다. 예전엔 유효함이 더 컸을지 모른다. 노력이라는 것은 한때 꽤 효과적으로 원하는 바를 거머쥐게 해주었지만, 경제 성장도 더디고 분배의 수도꼭지가 막힌 시점에서 내가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은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따라서 날이 갈수록 나는 보상받지 못한 것들에 더 예민해졌다. 타인에겐 있는 것들이 내게 없을 때 느끼던 박탈감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에서부터 통상적인 기회에까지 옮아가게 되었다. 대학 초년생때 했으면 좋았을 그런 것들; 다독/다작/다상량을 뒤따라 예술에 이르는 길은 어떤 물질적인 논리 앞에서 허물어졌다. 몇 개월간 밤새워 벌었던 돈은 쉽게 증발했다. 악몽과 같이, 물론 낄낄대면서 그 과정이 7년 넘게 반복되었다. 원하는 것들을 획득하는 경우는 좀처럼 겪지 못했다. 그러다보면 원하는 것의 범주와 규모는 적어지고, 내가 경험하는 세상은 좁아진다. 지금 내 손에 쥔 것은 정말이지 아무 것도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건데 내 노력이 부족해서 적은 보상을 받는 게 아니다. 또 전적으로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그런 것도 아니다. 무엇인가 배후가 있다.나는 이제 노력조차 내 영역 밖의 것으로 본다. 실제로 그러한 요지의 주장을 다룬 기사들도 심심치 않게 발굴된다. 환경적인 요인이 이른바 노력에 미치는 영향들, 이를테면 소득 수준과 부모의 학력이 자녀의 학력과 맺는 상관관계와 같은 내용은 쉽게 내 뇌리에 안착한다. 자극적이고 불분명한 과학적 방법론으로 패배주의에 찌든 청년들을 정당화시키는 것일지언정 나는 그렇게 믿는다. 노력, 개인의 역량이라는 것은 물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뒷받침되지 않으면 다 허사다. 그리고 알다시피 정신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물 만난 고기처럼 나는 군주론 25장을 인용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 저작에서 일관되게 관통하는 ‘포르투나’가 함의하는 바를 나는 어느 정도 공감한다. 그렇다고 춘추전국시대에 비견될 16세기 혼돈의 이탈리아와 같은 시대상을 살고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다만 현대적 포르투나는 신의 영성으로서가 아니라 자본과 위계로서 군림한다는 점에서 ‘반의 중재/반의 지배’와는 차별화된다. 이제 그녀의 지배는 거의 절대적이다. (입장이 입장이다보니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 서슴없다.) 마키아벨리의 주장과는 거꾸로, 나는 또 우리는 그녀가 허락하는 한에서만 ‘비르투’를 지닌다. 잘 조직된 비르투가 포르투나의 횡포를 제어할 수 있다면, 그 비르투는 어디서부터 뿜어져나오는가? 산업화의 기치인가, 민주화의 드높은 이념인가? 아니면 무너져가는 가족적 가치가 결집되어야 할 당위에서부터인가? 용맹스러움은 역시 뒷배가 넉넉해야 한다. 어쩌면 이 문단은 내가 가진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줄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주지했듯 “자신이 나가는 방법을 시대의 성질에 맞추는...”것 에 능숙하지 못하다. 따라서 아직은 행복하지 못하다. 내겐 시대의 성질을 득하기 위한 눈이 결여되어있다. 월간 독서량은 (드문드문 성사되긴 하지만) 0에 수렴한다. SNS의 등장 이래로 신문기사와 뉴스는 보고싶은 것만 보도록 구성되어 나의 편향성을 배가시킨다. (가끔 조선일보 기사를 보긴 하지만, 역시나 입맛엔 깔깔하다.) “시대와 사태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방법을 알 정도로 현명한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나를 지칭한 문장이란 생각이 든다.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우리 시대의 사람도 아니고, 그가 믿던 인간 본성에 대한 정언명령은 이론의 여지가 많다. 결과적으로는 그의 문장들이 근대적 처세와 인간 경영의 효시가 되었다지만, 결국 “어떻게 살고 있는가는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와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다.” 그가 제시한 인간상이 우리 고유의 시대상과는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음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어떻게 자유롭게 사는지도 알지 못한다”고 그가 말한다면, 단순히 내가 군주의 입장에 서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오히려 내가 민에 철저하게 예속되어있어서 더 잘 알 수도 있다. 우리 시대의 체제는 어찌보면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16세기보다 훨씬 견고하고 경직되어있다. 자유롭게 사는 법을 모르는 것이 한때 미개에 속했다면, 지금은 양극화된 두 계층에서 모두 죄악으로 분류된다. 한 계층에선 그들 자신의 권위를 보장하기 위해 자유롭게 사는 것이 장려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도태되어 마땅한 자로 배척당한다. 또 한 계층에선 오히려 자유롭게 살려는 의지를 갖는 것, 또 그것을 알려고 하는 욕망 자체가 죄악시된다. 얼마 남지 않은 안정을 와해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계층 사이에서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는 직면할 자신이 없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근절되어있다.
사회적 시장경제제도의 이론적 한계와 경제적 조망2****김**목차1. 사회적 시장경제제도 .......... 22. 이론적 한계 .......... 23. 미신적 메카니즘 .......... 34. 화폐기반경제의 기본 속성 .......... 31. 사회적 시장경제제도사회적 시장경제제도는 2차 대전의 전후 복구를 위한 일련의 경제학적인 고찰에서 비롯된 사상이다. 질서자유주의의 연장으로도 볼 수 있는 사회적 시장경제제도는 개인의 자발성과 경제적 효율, 사회적 형평에서 균형을 이루고 그것을 기반으로 전체적인 사회발전의 성공을 목표로 삼는다. 독일 재건의 주역들은 재건의 현장에서 순수시장경제와 통제경제의 기로에 서게 되었고, 각각에 대해선 익히 경험이 있는 바, 적절한 혼합 내지는 제 3의 형태로서 사회적 시장경제제도를 창출해내게 되었다.사회적 시장경제제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시장경제를 형태적인 모티브로 삼는다. 이는 그들이 경쟁만이 경제적 효율성을 완벽하게 형상화하고, 그로인해 사회적 성과가 행해질 수 있는 물질적 토대가 마련된다는 사실을 합의했기에 가능했다. 이 정책의 주체는 항상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인간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전제되는데, 그와 동시에 경쟁이 방임적이어야만 자본의 권력화 방지와 시장의 역동성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정책에서 일면적으로 사회의 근본원칙으로서의 기능적 면모도 볼 수 있다.) 대신 순수시장경제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사회적 약자 보호와 같은 맹점에 대한 방지책으로 그들은 최소한의 사회적 조정, 다시 말해서 국가의 간섭을-시장경제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 에서-최대로 허용한다.실제로 사회적 시장경제제도는 독일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물들을 보인다. 실재적인 정책의 성취보다도 독일 경제 근저에 사회적 시장경제제도가 자리잡았음을 1949년 단체 교섭법, 1952년의 경영 조직법 등이 보여주고 있다.2. 이론적 한계하지만 20세기 중반의 정책 수립자들은 물론이고 현재 사회적 시장경제제도의 추종자들을 주체로 봤을 때, 그들은 경쟁이라는 하나의 실체적인 유행에 대해서는 오류를 지적하지 않는다. 또한 자본의 권력화에 대해서는 충분히 우려하고 기본적으로 차등 혹은 계급의 존재와 인간의 기본욕구 등의 측면은 인정하고 새로운 대안들은 제시하면서도 정치적 계급의 존재, 그리고 그 계급과 경제적 계층 사이의 상호 연관성은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계급사회에서 태동한 극명한 상하의식의 큰 틀은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일단 이론적인 측면에서, 학자들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인간이 양립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인간의 존재 가능성은 어느 한 기간 내에선 자명하나, 사실상 이 단어에 거는 기대치는 가히 도덕적 초인과 다를 바 없다.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인간이 언제까지 도덕적일 수도 없고, 스스로를 책임질 수 없는 인간에 대한 고려가 충분히 이뤄지지도 않았으며, 이 체제 내에서 전제된 모든 개념들이 그저 관념의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 경제 정책에 있는 그대로 반영되는 데에는 어느 이념과도 마찬가지로 현실과 상충되는 문제점이 있다고 하겠다. 그에 연장해서, 전 세계의 경제망은 실질적으로 하나의 유기체적인 모습을 띄고 있는데, 독일 한 국가만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도, 수많은 외부적 문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일단 독일 내에서도 모든 경제적 문제점이 해결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실제로도 최근에 있어서 사회복지정책의 파산에 가까운 재정 상태, 통일 후유증, 경직된 노동시장 관련법들을 원인으로, 경기 과열, 물가 상승 등의 독일 내 경제 위기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사회적 시장경제제도는 그 효용성을 잃은 듯하다.3. 미신적인 메카니즘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있어서는 경쟁을 통해서만 경제적인 현상이 형상화될 수 있다는 일종의 미신적인 메카니즘이 만연해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경쟁을 살리고 기업의 권력화를 막기 위해 국가가 개입한다는 차선적인 대안을 내놓기 이전에, 올바른 지식인적 안목으로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그리고 경쟁 자체의 의문을 갖고 좀 더 기저, 좀 더 근본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해보지는 못하고 있다는 견해이다.왜 시장경제의 특질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경쟁’을 언급하는 등의 적극적이고 보수적인 노력이 아직까지도 감행되어야만 하는지, 또 그렇게 하면서까지 시장경제에는 보존 가치가 있는지, 시장경제는 그래서 현재 존속하는 그 어느 체제보다 혹은 앞으로 도래할 새롭고 획기적인 어떤 체제보다도 효율적인지가 먼저 고찰되어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