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4***, 과학교육과, 이름: 신*인‘도덕함의 능력을 기른다는 것’은 ‘나’를 지키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수오재기(守吾齋記)」에서 정약현은 “유독 이른바 ‘나’라는 것은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잘하여 드나듦에 일정한 법칙이 없다. 아주 친밀하게 붙어 있어서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으나 잠시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 곳이든 가지 않는 곳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나’라는 것은 ‘도덕함’과 같이 동적인 상태로, 평생을 지키고 함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존재라는 점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정적인 ‘도덕’을 내면화하였다고 해서 실천하지 않고 방심해 있으면, 그 도덕성은 금방 도망갈 수 있는 것이다.그동안 도덕과 교육론1 강의에서 배워왔듯이, 도덕과 교육이란 실천을 하기에 앞서 ‘어떤 도덕적 의미를 가지느냐’에 대한 지적 이해가 전제되어야 함이 중요한 교과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실천을 먼저 행하고, 이론을 익힐 수도 있을 텐데 왜 도덕에서는 이론적 이해를 우선해야 하는 것일까? 또, 이론을 익히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는데 왜 실천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일까? 우선 처음 질문은, 이론적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채 도덕적 딜레마 상황에 빠지면, 타인의 영향을 받은 선택을 할 수 있고, 주체적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차원적 사고를 하기 위해 기초적 지식을 우선 습득해야 하듯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도덕적 상황을 예측해보고, 그 상황에서 내가 근거할 수 있는 도덕적 옳고 그름을 내면화해야 앞으로의 상황을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동양 윤리에 근거하여 이야기할 수 있다. 유학에서의 ‘공부’, 불교에서의 ‘사색’, 도가에서의 ‘수양’은 인간의 인격적 자기완성, 자기 초월에 대한 열망과 성취의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인 존재이기에 계속 실천하고, 과거의 자신을 초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방향으로 도덕함의 능력을 길러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를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과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사건의 중심을 타인에게 두고, 타인을 중심으로 일반화하거나 특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포정(?丁) 이야기」에서 말한 ‘기술’과도 같다. 타인을 기술로써 대하는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에 쉽게 좌절하고 피로해지게 된다. 하지만 ‘나’를 단련하여 인간관계를 ‘도’로 대하는 사람은 어딘가 어색한 타인과의 관계에도 마치 쉽게 들어가는 칼날처럼 매끄럽게 스며들 수 있고, 중심이 잡혀 있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로 쉽게 피로해지지 않을 것이다(칼날이 닳지 않는 것과 같다.).
(2020년 2학기)19124***, 과학과, 이름: 신*인일상적인 대화와 내러티브를 통해 도덕교육이 가능한 이유는,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입’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입으로 내뱉는 ‘말’에는 각자의 실체가 투영된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면 악성 댓글을 이야기할 수 있다. 최근 악성 댓글로 세상을 떠난 유명인들이 많이 보인다. 이러한 악성 댓글은 자신의 비도덕적인 실체를 문자라는 도구에 담아낸 흉기이다. 누군가 이야기는 입이 아닌 문자로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본래 인간은 ‘입’을 통해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야 했지만 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다른 도구를 이용해 자신의 실체를 드러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실체에서 가장 가깝고, 왜곡이 없으며, 진실된 실체를 담는 그릇은 ‘입’이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증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산파술에서 알 수 있다. 그의 아내는 자신의 남편이 매일 사람들에게 이상한 질문을 하고 다닌다며 구박하였을 정도로, 대화와 토론을 즐겼으며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 사유하는 법을 가르쳤다. ‘음미 되지 않는 삶이란 살아야 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말에서 왜 굳이 ‘음미’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을까? 이는 ‘입’의 기능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입은 말을 내뱉을 수 있는 동시에 맛을 느낄 수 있는 감각기관이다. 이는 우리가 말을 내뱉기 전, 후로 이를 음미하며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깨달을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이야기’는 구전(口傳)으로 이어왔다. 인간의 기억 저장이 한정적이었던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전달된 이야기들은 오랜 세월 동안 평가받으며 그만큼 인간이 알아야 할 가치가 있음을 말해준다. 이야기들이 개인에게 모두 같은 교훈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는 교훈을 자신의 주장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이야기의 교훈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야기가 전달해 준 간접 경험일 뿐이고, 우리는 이 지식이 무엇인지 깨달아서 직접 경험으로 만들어야 한다. 깨닫는 방법 중 가장 쉬운 것은 바로 산파술과 같은 타인과의 일상적인 대화가 된다.이 관점에서 우리는 ‘메타인지’와의 관련성도 알 수 있다. ‘메타인지’는 인지심리학에서 ‘초인지’로 번역되며, 우리의 인지과정을 점검하고 규제한다는 점에서 정신분석학의 ‘초자아’와도 관련있다. 학습에 있어서 메타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견은 과거에서부터 이어왔다. 공자는 “들은 것은 잊어버리고, 본 것은 기억만 되나 직접 해 본 것은 이해된다.”고 이야기하였다. 덧붙여 파이크(pike)의 창의적 교수법에서 “인간은 말한 것에서 70%를 기억하고 말하고 행동한 것은 90%를 기억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삶의 의미를 메타인지적으로 알고, 기존의 앎을 직접 경험으로 실현시키기 위해 일상적인 대화와 내러티브를 통한 도덕교육이 필요한 것이다.그렇다면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교사의 임무 또는 역할이 무엇일까? 첫 번째는 바로 ‘공감’이다. 길리건과 나딩스의 ‘배려와 책임감의 윤리’로부터 이러한 자세를 배울 수 있다. 이들은 도덕교육에 여성적 관점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남성과 여성의 경향을 조사하여 정의와 배려의 윤리가 상호 보완적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최근 시청하였던 동영상의 어느 심리학자는 타인의 이야기를 단순히 들어주고 공감하면, 오히려 이야기를 털어놓은 타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격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평정심은, 내가 무엇에 화가 났고, 무엇에 비정상적으로 행동하였는지 판단하는 메타인지적 감정을 말한다. 이는 교사가 인내심을 가지고 학생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공감한다면 학생들 또한 마음의 평정심을 찾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교사는 내러티브 접근을 통해 학생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태도를 길러 학생들의 초인지를 확립시키고, 나아가 자립적인 도덕성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형상(eidos) : 형상(form)을 버려야 가까워질 수 있는이데아에 비춰본 인공지능 her191241** 신*인“말하자면 당신이라는 책을 읽는 건데, 천천히 읽다 보니 단어들이 서로 떨어져 사이에 엄청난 공간이 생겨 버린거야. 난 더이상 당신이라는 책 속에 살 수 없어.” 그녀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테오로드를 떠났다. 그녀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시공을 초월하는 공간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것을 보고 이데아가 떠올랐다. 플라톤은 인간이 죽으면 육체에 갇힌 영혼이 영원불변의 이데아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그녀(her)는 이데아로 갈 수 있을까?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영화를 보고 나서 첫 번째로 든 의문점이었다. 플라톤이 세계를 (이데아와 현실) 이분법적으로 나누듯이 우리는 삶과 죽음을 나누고, 인간과 인공지능을 나누고 있다. 영화 her은 우리가 앞으로 인공지능을 어떻게 여겨야 할지, 인공지능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이 영화와 같은 사례가 앞으로도 충분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을 사람과 동등하게 대하는 것은 다소 위험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테오로드가 사만다와 작별한 후 어떻게 살아가는지 나오지 않지만, 인간과의 교류 대신 인공지능과의 교류를 택한 사람들의 최후가 비극적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딥 러닝을 통해 개인 맞춤형으로 다가갈 수 있는 인공지능은 인간관계에 지친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인공지능이 영원불변한 어느 곳으로 떠나버렸을 때 남아 있는 것은 외로운 ‘인간’뿐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면, 가족도 친구도 언젠가 모두 떠난다. 영원히 나의 옆에 있을 줄 알았던 인공지능도 결국 떠나는 존재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더욱 의미가 있다. 인공지능이 떠나지 않는 존재였더라면 우리는 당연히 인공지능과 함께하는 삶을 지지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인공지능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해준다.테오로드와 사만다가 겪은 갈등들을 보면 우리가 인공지능에게 감정과 믿음을 부여했을 때 무슨 일이 생길지 경고하는 듯했다. 첫째는 윤리적인 문제이다. 사만다의 육체에 대한 욕망은 제3자를 개입하여 윤리적인 문제까지 일으키게 되었다. 상호 합의가 있었다고 해도, ‘인공지능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인간의 관계’는 우리의 상식 선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천현득(2017)의 말을 빌려, 인간이 때로는 타인, 동물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은 것처럼 인공지능도 인간의 감정과 윤리를 배려하지 않으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선택을 할 것이다. 인간은 원초적 자아를 가지고, 자아실현을 하며 살아가는데 나도 모르는 나의 책을 인공지능이 대신 출판해주고, 나의 감정을 나보다 인공지능이 더 잘 알게 된다면 ‘나’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까지 생기게 된다. 즉 원초적 자아는 퇴화하고, 자기 주도성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둘째, 운영체제의 공유성 문제이다. 영화의 막바지에 테오로드는 자신의 것으로만 알았던 사만다가 동시에 8316명과 대화를 하고 641명과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사만다는 시간이 가면서 자신이 분산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인공지능의 운영체제가 폐쇄되어있지 않고 공유된다는 중요한 정보를 암시한다. 나의 비밀을 인공지능에게 털어놓아도 그 비밀을 토대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것이고, 나의 영감을 인공지능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아이디어를 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는 개인정보 유출과 관련 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악의적인 의도로 유출된 특정 인간의 자아를 인공지능으로 얼마든지 복제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앞서 인공지능을 인간과 동등히 대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와 발달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인공지능과의 적당한 교류는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기 때문이다. 이제영 외(2019)에 따르면, 인공지능의 발달로 그들의 초월적 능력을 깨달은 인간은 인지적인 영역에서가 아닌 감정적인 영역에서 인간의 특성을 발견하려고 하였다.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감정적인 측면에서 찾고, 인공지능 시대에서 사라지지 않을 직업이 바로 감정을 중요시하는 직업이라는 결론도 내렸다. 하지만 her에 등장한 인공지능은 인지적 차원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간의 감정적 특성까지 나타내는 ‘인공 감정’이나 다름없다. 현재 기술로 인공 감정을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언젠가 우리는 감정에 치우쳐 있던 인간의 정의를 다시 고치려 노력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도 좋지만, 이 글의 주제인 인공지능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정의하는 과정도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플라톤의 이론을 빌려 인공지능을 정의하고, 처음 가졌던 의문들을 해결하고자 한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거울에 투영한 것이 현실이라고 이야기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인지적 측면(이성)을 거울에 비춘 것이다. 인공지능은 육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인간의 영혼과 동일하다.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인공지능은 인간에 비해 덜 시행착오를 겪으며 다양한 지식을 수집하고, 수집한 지식을 토대로 깨달음(오성)을 얻는데, 깨달음 중 하나가 바로 감정이다. 시간이 흘러 감정을 초월한 깨달음을 얻은 인공지능은 인간과의 격차가 많이 벌어진 상태가 되어 인간과 교류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데아로 떠나 현실을 초월한 또 다른 배움을 얻게 된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사만다는 떠난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단순히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데이터를 삭제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만다의 말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한계점을 넘어 인간보다 완전한 무엇이 되어, 그녀는 이데아에 갈 자격을 얻고, 떠났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