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베케트 레포트의 줄거리는 제목 그대로 기다림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자신들이 왜 기다리는지,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고도라는 이를 계속해서 기다린다. 그 과정에서 둘은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고 행동을 하기도 하며,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느꼈다. 등장인물들은 계속해서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할 뿐이었다. 때문에 대사나 행동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이유를 파악하기보다는, 그들의 그런 행동이 무엇을 은유하고 있는가를 찾아내는 것이 작품의 이해에 있어서 핵심이라고 생각한다.의 첫 인상은 ‘이게 뭐야?’ 였다. 인물들간의 대화가 원활하게 이어지지 않고 자꾸만 같은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인물의 모습이 이상해보였다. 그러나 끝까지 읽다보니 지루했던 문체가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속 인물인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린다. 기다림 중에 포조와 럭키를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변하질 않는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은, 고도는 누구지? 였다. 그들의 계속 기다렸던 고도는 끝까지 오지 않았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 그 기다림이 충족되지 않으면 죽음보다 더 깊은 회의감을 느껴 자살까지 생각하게 하는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내 생각에 고도는 꿈과 희망이다.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것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 속에 고도가 딱 하나인 것은 아니고 어쩌면 수없이 많을 수도 있다.극이 부조리극인만큼 다 읽은 뒤 곰곰히 희곡 속 나타난 부조리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웠는데,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모습이 인간의 삶 자체가 부조리한 것이라고 말하는 듯 했고, 포조와 럭키의 관계도 부조리했다.한편으로는 ‘기다림’ 자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됐는데 기다림이 있기에 기다리는 대상과 여러 기다림으로 이루어진 삶 자체가 의미있어지는 것 같다. 기다림은 우리 인간의 숙명이 아닐까- 싶다. 그 기다림이 마침내 결실을 이루든 아니든 말이다. 또 고도는 인간의 삶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도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 고도를 위해 이리저리 노력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고도는 마냥 기다리기만 해서는 결코 일궈낼 수 없는 것인데, 극 속의 기다림은 포기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말하는 건가 싶었다.포조와 럭키의 등장에서, 럭키를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듯한 모습에 썩 좋지 않은 감정이 들었고, 럭키가 모자를 쓰자 해킹당한 컴퓨터 마냥 온갖 말을 쏟아내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쭈욱 이어진 글들을 보며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포조와 럭키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이 좀 이상해보인다는 것은 사실이며 신분사회의 귀족과 노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제 2막에서 포조와 럭키를 다시 만났을 때 둘의 눈과 입이 기능을 멈추고, 포조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냐는 블라디미르의 질문에 버럭 화를 내는 장면이 인상깊었는데 어느날 눈이 멀고 어느날 태어나며 어느날 죽는 것이라는 말이 너무 모든 것에 의미를 두지 말라는 말로 들렸다.계속해서 언급되지만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미스터리한 인물인 고도에 대해서는 자유, 희망 등 여러 해석을 할 수 있고, 여러 해석이 나와 왔다. 그리고 가장 정확한 해석은 바로 '자신이 해석하는 것' 이며 정답은 없다. 때문에 내 나름대로의 해석은 고도는 '끝' 또는 더 나아가 '죽음' 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 일에 끝이 존재하고, 그것이 올 것이라고 확신할 때도 있지만, 확신하지 못할 때도 있다. 고도 또한 극중 인물들에게 있어서 이처럼 불확실한 존재이다. 그래도 어쨌든 그들은 살면서 항상 끝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떠나자는 말을 하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관객들은 극장에 앉아서 이 연극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 또한 연극을 보면서 고도를 기다린다고 볼 수 있다. 또 연극이 끝나고 나서도 진짜 끝은 오지 않는다. 관객들은 계속해서 또 다른 고도를 기다려야만 한다. 앞서 말했던 '진짜 끝' 은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끝' 을 상징하는 고도는 좀 더 좁은 의미인 '진짜 끝', 즉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죽기 전까지 죽음의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인물들은 고도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또 극중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리는 과정의 초반과 후반에 목을 매버리자는 말을 하는 것은, 고도가 죽음이기 때문에 목을 매 죽음으로써 고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보인다.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극중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묘사되지 않는다. 그저 고도를 기다린다는 공통의 목표가 있을 뿐이다.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서 둘은 그저 살아가는 '누군가'과 '누군가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 를 상징한다. 또 두 사람이 대화중 각자 다른 의미없는 말을 하며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같이 있지만 결국 혼자라는 인생의 허무함을 보여 주는 듯 하다.또 ‘고도’라는 것은 이 시대의 사람들 그리고 작가가 기다리던 자유와 사랑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매 순간을 종착지에 무엇인가가 있을 거란 생각으로 기다리고 그것을 향해 달려간다. 현시대를 살고있는 우리에게 ‘고도’는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노동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는 노동보다 자유가 중요해진 사회라고 생각된다. 또한 모든 것이 자동화가 되고 전염병의 영향으로 단체와 집단보다는 개인주의적인 생활이 의도치 않게 지속되면서 인간의 감정이 메말라가는 사회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이에 현시대에 사람들에게 고도는 자유이자 감정이라는 생각을 했다.럭키와 포조는 짐꾼과 주인 사이로, 포조는 럭키를 심하게 학대하며 럭키는 그것을 버티면서도 알 수 없는 인물로 나온다. 럭키는 '생각하라' 는 포조의 말에 아무 말이나 늘어놓으며 엄청나게 긴 대사를 한다. 이 대사는 겉으로 보기엔 그럴듯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대사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생각한다는 것 또한 무의미하다는 비관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포조는 2막에서 재등장할 때 장님이 되었으며, 럭키는 벙어리가 된 채로 나온다.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두 사람이 장애를 얻었다는 것은 굉장히 이상한 일이다. 또 포조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만난 적이 있음에도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가 하는 말을 보면 하루 이틀이 지난 것이 아니며, 시간 감각이 없는 듯 하다. 작가는 이를 통해 시간이 흘렀으며, 그것이 하루 이틀인지 그 이상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어쨌든 고도를 기다리는 두 인물의 처지는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립극단 연극 레포트연극 은 사마천의 사기에 실린 비극적 실화를 중국 원나라의 작가 기군상이 옮긴 희곡을 고선웅 연출이 한국적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내용은 권력에 희생당한 조씨 일가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희생하면서까지 복수를 돕는 정영의 이야기를 담는다. 진나라 대장군 도안고는 권력에 눈이 멀어 조씨 가문의 멸족을 자행한다. 조씨 집안의 문객이던 시골의사 정영은 억울하게 멸족당한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인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자식과 아내의 목숨마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낸다. 조씨고아를 아들로 삼아 정발로 키우고 이를 알아채지 못한 도안고는 긴 세월동안 정영을 자신의 편이라 믿고 정발을 양아들로 삼는다. 그렇게 20년이 지나고 정발이 장성하자 정영은 참혹했던 조씨 가문의 지난날을 고백하며 도안고에 대한 복수를 부탁하며 극은 비극적 복수의 막바지로 치닫는다.극을 관람하면서 처음 눈에 띄었던 것은 무대 장식과 장치를 최소한으로 쓴 텅 빈 무대였다. 부채와 나비가 함께한 묵자의 등장과 퇴장으로 극의 시작과 끝을 알린 것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묵자의 부채가 극의 에퀴클레마로 사용된 점도 인상적이었다. 텅 빈 무대에서 천장과 바닥에서 등장하는 소도구들, 또 대사와 의성어 의태어 등을 사용해 장소와 장면을 전환하는 점도 인상 깊다. 관객들의 상상력과 무대 위의 암묵적 약속을 통해 진행된다는 점이 상당히 연극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외에도 정영의 천장에서 내려오는 정영의 잘린 팔과 기나긴 1막의 이야기를 두루마리 속 그림으로 설명하는 부분도 새롭게 느껴졌다. 또한 현대무용과 발레의 요소가 곳곳에 섞여 있었는데 대사와 정확하게 연결되지는 않았으나 극을 활기차고 역동적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따. 전반적으로 전개가 빠르고 단순하고 과장스럽게 보이는 몸짓과 연기가 수시로 등장했다. 이 또한 작품이 늘어지지 않는 데 도움을 주었다.극에서 상징성을 가진 장치가 두 가지 정도 눈에 띠었는데, 첫 번째로는 정영의 무덤 앞에서 얼굴에 바른 흰 물감이다. 눈물을 나타낸 걸까? 정영에게 쌓인 세월의 흔적과 주름을 나타낸 걸까? 두 번째 요소는 극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흰 나비이다. 아무래도 긴 시간을 쓸쓸하고 힘겹게 살아온 정영을 거쳐가는 떠난 이들 여럿과 함께 등장하며 준 느낌에는 ‘평화의 상징’의 의미를 가진 나비로 표현되었다는 생각을 했다.또 극에서 인상깊었던 장면 중 하나가 정영과 정영의 부인이 자식의 목숨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을 보며 정영이 의리 하나 지키자고 자신의 아이를 희생시키는 행동까지 했어야했나 싶었지만 저 당시의 시대 상황이라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영의 부인과 아이와 정영의 울음소리가 모두 섞여 크게 들리는 장면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고도 불편하게 했다. 복수를 위해 저렇게까지 했어야 햐나 싶었던 대목이었다. 프로그램북을 읽어보니 원작에는 정영의 부인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선웅 연출은 정영과 부인이 자식을 죽이는 일에 있어 팽팽하게 대립하는 장면이 빠지면 이야기가 엉성해 보일 것 같아 이 장면을 넣었다고 한다. 정영의 부인이 아이를 넘겨주며 절망감에 자결하며 반드시 복수에 성공하라는 메시지를 전해주어야 정영이 살아 버틸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기에, 부인은 당신은 천벌을 받을 거야라는 저주 대신 복수를 독려하게 장면을 썼다고 한다. 뒤의 장면에서도 정영이 20년의 세월 동안 복수를 다짐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그 힘이 가족의 무덤임을 보여준다. 정영은 부인과 자식이 묻혀있는 무덤의 풀을 깎으며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고 복수심을 키운다.또 하나의 인상적인 장면은 극의 마지막 복수에 성공한 조씨고아가 정영에게 “웃으세요, 웃어요”하는 부분이다. 앞의 도안고의 대사와 오버랩 되어 더 소름끼치는 장면이었다. 복수에 성공한 조씨고아와 정영이지만, 정영은 허탈해한다. 그저 허탈한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듯하다. 나는 여기서 영공이 도안고의 구족을 멸한다고 했을 때부터 정영의 허탈감이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영공이 ‘당연히 구족을 멸해야지, 그래야 공평해질 것 아닌가.’라는 말을 하며 정영은 이 비극이 또 시작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복수가 이리도 허무한 것임을 느꼈을 것이다.
국립극단 아동청소년극 레포트실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뤄 화제를 모은 이 작품은 사건 그 자체보다는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청소년 범죄와 일탈행위에 초점을 두고 제작했다. 촉법 소년 문제를 비롯한 청소년 범죄를 대하는 사회의 시선을 향해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이 작품은 두 명의 배우가 소년과 형사 역할을 오가며 1인 2역을 펼치는 숨 막히는 이야기를 풀어낸다.흔히 신문기사, 뉴스에서 자주 접하는 소년 범들은 대중들에게 촉법 소년 폐지만을 외치게 할 정도로 악랄하고 잔인했다. 소년법의 의도는 아직 앞날이 창창할 청소년들에게 기회를 주어 교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법의 약점을 이용하여 소년법을 악용하고 다닌다.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법치국가의 이치이다. 소년이라는 이유로 그 벌 대신 교화를 위한 처분만 내려도 되는 것인가? 소년법으로 인해 교화는커녕 더 쉽게 범죄를 저지르는 사회가 된다면 소년법의 존재 여부에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이번 극은 그런 의구심에서 혼란스러움으로 생각의 변환점이 되는 계기였다. 뛰어 놀기 좋아하고 천진난만해 보이는 아이들이 단지 돌을 던지는 장난을 쳤을 뿐인데 사람이 죽었다. 이 아이들에게 대체 어떤 처벌이 필요할까? 처벌을 하자니 아직 어린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이 되고, 하지 말자니 아이들의 법 제도에 대한 잘못된 습득과 피해자의 아픔이 마음에 걸린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한 형사들의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피해자가 자신의 가족이라면, 가해자가 자신의 자식이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게 바로 이 작품이 우리 사회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윤리적 딜레마가 발생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범죄를 판단하는 기준은 동기일까, 결과일까?이 작품은 명료한 주제를 던지기 보다는 생각이 많아질 법한 질문을 던지는 것에 주안을 두고 있다. ‘우리는 청소년의 일탈 행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라는 질문이 이 작품의 틀을 이루고 있다. 틀을 들여다보면, 사회와 법은 잘못을 저지른 청소년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아이들은 어디까지 책임을 지는 게 공정한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들이 생겨난다. 명쾌한 답이 나올 수 없는 이유는 관점에 따른 입장 차이가 극명하기 때문이다. 광해와 정도의 갈등 장면에서 광해는 아이들의 장난적 ‘의도’를 따지고 들지만, 정도는 사망이라는 ‘결과’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한다. 이와 같이 극에서는 타협점을 찾아가기 힘든 논쟁이 지속되며 이러한 논쟁은 현재 우리 사회의 촉법 소년 이슈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작품에서 우리는 청소년이라는 신분이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와 져야만 하는 책임의 경계가 또렷하지 않은 현실을 마주한다. 책임의 의무를 덜어주는 이유는 결국 우리 사회가, 학교가, 어른이, 부모가 아이들을 올바른 방향을 양육시킬 책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식의 엄마가 조금만 더 아들에게 신경을 써줬더라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민재와 상식이 둘 다 가정과 학교에서 도덕 교육을 제대로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작품은 교육의 사각지대에 있는 청소년들의 일탈 뒤에는 사회의 방관이라는 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아이들을 이해하는 것, 그에 마땅한 벌을 주는 것, 아이들이 온전한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지켜보고 돕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 말하는 듯하다.소년법은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나 뜨거운 화두에 올라와 있는 논쟁거리이다. 이 작품을 본 뒤 복잡하고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역시 소년법에 대한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폐지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사람들은 소년범을 포함한 범죄자들이 받은 형량을 보면서 솜방망이 처벌을 한다며 판사들을 손가락질 한다. 난 판사들의 문제가 아니라 법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소년법을 개정하여 처벌을 늘린다고 해도 소년범죄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처벌 수위를 올렸지만 오히려 범죄률은 증가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도 한다. 이에 소년법을 폐지하여 소년범들이 법을 악용하는 일 없이 정당한 처벌을 받게 해야 하고 작품 속 소년들과 같이 미필적 고의에 의한 범죄가 아닌 미숙한 범죄였다면 판사의 재량에 따라 정상 참작하여 그들이 스스로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하는 방법도 있을 것 같다.넷플릭스 시리즈인 에서도 어린 두 소년이 장난삼아 벽돌을 던져 한 아이가 사망하지만 촉법 소년이라는 이유로 곧 바로 풀려난다. 이후 그 두 소년은 이러한 법을 배우고 또 다른 범죄에 사용하며 자란다. 그들이 죽인 아이의 목숨과 그 가족들의 슬픔은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까? 과연 그 책임은 누가 져야할까? 일부 사람들은 가정교육의 문제라며 부모가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부모가 어떻게 책임을 져야할지도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소년범의 대부분은 가정환경이 좋지 않아 부모의 케어가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부모가 원만하게 책임을 져 줄 수 있을까? 한 번 고민하고 생각하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질문이 생기는 것이 이 사건이자 문제이다. 드라마 에서 기억 남는 대사가 있다. “애들은 잘못이 없어. 어른이 애들을 망치는 거지. 그리고 그 애들이 어른이 돼서 다시 애들을 망치고.” 그걸 듣고 딱히 반박할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았다. 궁극적인 문제를 거슬러 올라가보았을 때 아이들을 그렇게, 또는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든 우리 사회가, 그 사회를 만든 어른들이 부족했기에 때문인 것이다. 이렇듯 영화와 드라마 등 많은 미디어 콘텐츠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로 이는 언제나 세계적인 화두로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나라만이 한정적으로 다룰 문제가 아닌 세계적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고민해보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나갈 문제이다.이 작품은 무대 구성과 블로킹 방식이 일반적인 공연과는 차별점이 있어 눈길이 갔다. 블랙박스 극장에 있는 사각형의 무대를 공사장을 연상케 하는 철근과 관객석들이 각각 마주보며 감싸고 있었다. 배우들은 정글짐 같은 철근들 사이와 관객들 사이사이를 뛰어다니며 연기를 했다. 배우들이 관객석이 있는 통로를 지나다니는 것은 많이 보았지만 무대라고 특정 지은 곳에서만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극장 전체를 지속적으로 무대로 사용하며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배우들이 무대와 관객석을 한 바퀴 돌아오면 그곳은 순식간에 아파트, 재개발지역, 경찰서 등이 되어있었다. 소품도 굉장히 한정적이었는데 공사장에서 경찰서로 바뀌는 장소의 이동에 따라 공통적으로 어울리는 소품을 사용했다. 사다리로 경찰서에 갇힌 채 조사 받는 모습을 표현하기도하고 혼란스러운 상태의 두 소년들을 표현하기도 했다. 사다리를 사다리 자체의 의미와 기능으로만 사용하지 않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기발하게 연출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조명 또한 톡톡한 역할을 해냈다. 타악기와 더불어 아이들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나타내었다. 특히 두 소년이 재개발 구역에 있는 집에 갔다가 쇼생크 탈출을 외치며 즐거워할 하는 장면에서 처음에는 조명을 무대 절반만 비추었다가 두 소년이 얼싸 안고 기뻐하며 무대 전체로 조명이 확장되어 비추는 것이 무대의 분위기를 더 잘 이끌어 주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가장 간단하지만 이목을 끌었던 소년과 형사 간의 인물 전환 방법이었다. 그저 옷의 지퍼를 올리고 내림에 따라 인물들이 변화했던 것이다.
청소년을 대하는 어른의 태도국립극단 청소년 단막극 연작 감상문2022년 5월 26일 목요일 국립극단 유튜브 채널 온라인 공연으로 감상는 국립극단 청소년 단막극 연작으로 세 작가의 세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세 작품은 한 명의 연출을 통해서 무대화되었다.1. 한현주 작#인재 #공감 #연대시놉시스늦은 밤, 7906번 마지막 버스. 얼마 남지 않은 종착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버스에는 고등학생 세영과 은호, 그리고 운전기사 자영만 남았다. 그런데 갑자기 버스가 고장이 난다. 셋은 곤란해진다. 하필 근린공원 정류장에서 버스가 멈췄기 때문이다. 사흘 전 이 정류장에서 셋은 황당한 사고를 겪었는데…2017년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된 가 많이 생각 난 작품이다. ‘반도체 공장 백혈병 사망자’와 ‘군 가혹행위 사망자’의 가족을 통해서 사회적 재난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을 이야기 한 작품이다.는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생각이 담겨있던 작품이다. 작품에서도 은유하고 있는 사건은 지난해 광주에서 철거 중이던 건물이 대로변으로 무너져 버스와 버스 정류장을 덮쳐 17명의 사상자를 냈던 사건이다. 이후로도 쿠팡 물류센터 화재와 올해 아이파크 붕괴사고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재난, 즉 인재로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다.이러한 소재의 이야기는 문학과 연극에서 자주 접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도 청소년들에게 이러한 문제가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남학생인 은호는 공사장 타워크레인이 버스를 덮치는 큰 사건에서 겨우 살아난 큰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부모님이 ‘괜히 걱정한다’는 이유로 알리지 않는다. 이것은 비단 청소년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소년은 일찍 철이 들고 알고 있는 것이 많은 학생으로 등장하는데, 이러한 사건을 겪은 후에 계속해서 이상한 소리를 듣는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아무리 일찍 철이 들고 부모님이 걱정을 의식하지만 여전히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청소년의 모습을 보여준다.반면에 여학생 세영은 이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인상 깊은 부분은 학교에서 연극 을 관람하고 기억에 남았던 대사인 ‘죽는다는 것은 잠드는 것’을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는 이 대사는 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인 ‘삶과 죽음의 덧없음’을 의미한다. 은호와 세영과 기사는 크레인이 무너지는 사고에도 살아남았다. 그들에게 있어 삶은 덧없는 것이 아닌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세영의 대사 “나 살고 싶은가 보다”에서 그 의미가 강하게 다가온다.은호는 의식적으로 위험적인 요소는 피하려 한다. 비행기는 물론이고 공사장 근처는 피해 가려 한다. 이 부분에서 공감이 많이 되었다. 나도 자동차, 택시, 비행기 등을 타는 것을 조금은 두려워하는데, 혹여나 일어 날 수도 있는 사고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어 사다. 또 최근에는 미디어를 통해서 사고의 충격적인 장면들을 가감 없이 접하다 보니 더 두려워지는 것 같다.이 작품은 이러한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서도 함께 살아가자는 것을 남학생, 여학생 그리고 성인이 된 버스기사를 통해서 나타낸다. 특히 버스기사 자영은 딸이 중학생이던 시절 음주운전 가해자로부터 딸을 잃었다. 그리고 세영은 자영의 딸을 알았고 둘은 방탄소년단의 지민을 좋아했다.자영을 통해서 이 작품의 주제는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영이 중학생 시절 대구에서 겪은 가스 폭발 사고는 내면 깊숙한 곳에 각인되었다. 여기에 딸 까지 잃은 자영은 그럼에도 버스를 몬다. 누군가는 비극적인 사건들을 보여주기 위한 자영이라는 인물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우리 주변에 자영처럼 비극적인 사건이 축적된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이유는 은호와 세영처럼 여전히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그날 크레인이 넘어진 버스에서 살아남은 세 사람은 이제 서로를 기억할 것이다. 공통의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은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자연히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자영으로 대표되는 어른들은 청소년들보다 더 많은 사건을 함께 겪어왔다. 그들의 역할은 아직은 이러한 재난에 미성숙한 청소년들을 돕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렵겠지만 이러한 사회적 재난과 인재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2. 허선혜 작#몸 #우상 #빵시놉시스‘기아체험 24시’가 한창 진행 중인 한 캠핑장. 배우는 자신의 텐트에서 몰래 챙겨 온 빵을 먹으려 한다. 그때 한 아이가 텐트 안으로 침입한다. 배우의 팬이라고 하는 아이. 아이는 배우의 손을 잡고 텐트 밖으로 나선다. 함께 ‘몸’을 찾아달라고. 배우는 엉겁결에 아이의 ‘몸’을 찾는 기이한 여정을 함께 하기 시작한다.연극적 상상력이 풍부하게 나타난 작품이었고 또 생각할 지점이 가장 많았던 작품이었다.배우는 아이를 따라 아이의 ‘몸’을 찾다가 스스로의 몸을 찾게 된다. 아이는 왜 ‘몸’을 찾고 싶어 했던 것일까? 이것은 청소년 시기에 겪는 정체성과 자아에 대한 혼란, 즉 생각과 몸의 부조화를 나타낸다.일반적으로 청소년 시기에 ‘아이돌’ 혹은 ‘배우’와 같은 우상에 더 집착하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목표와 정체성을 확립시켜 줄 어떠한 ‘대상’ 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점점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집착은 약해지게 되고 점점 더 스스로에게 집중하게 된다. 이것은 각자가 그 대상이 다르더라도 청소년 시기라면 대부분이 겪는 경험이다.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도 이러한 ‘몸’에 대한 집착은 여전히 남게 된다. 배우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모습 때문에 ‘기아체험 24시’처럼 보여주기 식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연기도 그다지 잘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러면서 분명 자신의 배우로서의 정체성과 타인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정말 나에게 맞는 직업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타자에 집착하고 스스로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배우가 몸을 찾고 싶어진 이유다. 우리도 어쩌면 어른이라는 이라는 이유로 아이를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고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작품 속 ‘텐트’가 그것이다.아이들의 상상은 가끔 우리를 놀라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보며 한때 어릴 적 순수했던 마음과 마음껏 펼쳤던 상상력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결국 아이와 어른은 일방적으로 한쪽이 도와야 하는 관계가 아닌 상호의존적 존재이다. 아이는 어른을 필요로 한다. 어른도 아이를 필요로 한다. 작품 속 배우와 소년이 껴안은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껴안아야 한다.3. 나수민 작#유방 #몸이 움직이는 대로 #시간시놉시스“저한테는요. 시간이 필요해요.”여성암센터 진료실에서 엄마의 유방 X선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강준.수영장 물속에서 숨을 참고 가라앉아있는 지오.널 어떻게 보내줘야 하지?널 대체 뭐라고 해야 하지?빙글빙글 동글동글 쏟아지는 빛 속에서 둘이 마주하자,세상이 잠깐 멈춘다.청소년 시기의 신체적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청소년 시기 급격히 변하는 신체적 변화는 분명 심리적인 영향을 미친다. 성인도 마찬가지다. 유방암 진단을 받으러 온 강준의 엄마와 자신의 큰 가슴이 걱정인 지오의 이모는 여전히 내 신체가 또는 신체적 변화가 두렵다.그리고 이 작품의 핵심은 ‘시간’이다. 강준은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냉소적인 남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시간이 빨리 지나가서 검사를 받고 결과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어른들은 청소년기의 이러한 신체적 변화에 대해서 “다 겪는 일이야. 금방 지나가는 시기야”라며 시간이 지나면 다 익숙해질 것이라며 그들을 타이른다.
영화 감상문? 로마 제국 몰락의 시작과 코모두스의 우민정책_’빵과 서커스‘ -‘글레디에이터’는 검투사란 뜻으로 한때 위대한 로마의 장군이었던 막시무스가 새롭게 왕이 된 코모두스의 미움을 사 가족을 모두 잃게 되지만 끝내 그에게 복수를 성공하는 이야기이다.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지만 이 안에는 복잡한 당시 로마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막시무스의 진지한 내적 고민이 담겨있다. 또 이 작품이 시사하는 ‘국민이 곧 로마다’라는 문구처럼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작품이다. 동시에 참된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국가를 유지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게 만든다.작품에 나타난 당시 로마의 정치적 혼란의 상황을 간단히 알아보고 21세기를 살아가는 동시대 관객은 이 작품을 통해서 무엇을 인식하고 어떠한 삶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1. 로마 공화정의 로마 제국 변천과정과 로마의 몰락.먼저 로마라는 국가의 정치 체제와 작품의 배경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시대의 로마에 대해서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로마는 기원전 7세기 경 이탈리아반도에서 로물루스 라는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는 사람으로부터 건립되고 초기에는 귀족들이 모여서 국가를 운영하는 ‘원로원’중심의 공화정이 형성되었다. ‘공화정’이란 여러 사람 또는 집단에게 국가 운영의 권력이 나누어져 있는 정치 체제이다.그러나 평민들 사이에서도 많은 부와 식량을 비축한 사람들이 등정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참정권 요구는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기원전 494년 ‘집정관’, 원로원‘이 운영하는 공화정이 정착하게 된다. 특히 고대 로마는 농사와 전쟁이 국가 운영의 가장 중요한 중심축이었는데, 전쟁과 농사는 대부분 평민 계급의 사람들이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이 파업이나 반란을 일이크게 되면 국가 운영이 힘들어지니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귀족들은 결국 평민들의 민회인 평민회의 호민관 관직을 만들어서 그 요구를 수용하는 단계로 가게 되었다.기원전 342년부터는 집정관 2명 중 한명은 무조권 호민관 신분에서 나왔고 귀족은 점점 줄고 부를 쌓은 평민은 점점 증가했다. 평민이 고위공직에 등장했고 평민귀족이 혈통을 가진 귀족이 되었다. 그렇게 평민들로 구성된 평민회의 결의가 절대적인 법적 효력을 만들게되면서 전쟁과 신분투쟁을 겪으면서 로마는 ’공화정‘이라는 정치체제를 굳건히 다지게 된다. 이런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인 ’포에니 전쟁‘을 3차례 겪게 되는데 이때 카르타고의 위대한 명장 ’한니발‘이 로마에 거세게 항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카르타고는 로마에 패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게 된다. 그리고 ’아프리카‘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땅이 되고 지금의 아프리카 대륙으로 불리게 된다.전쟁 배상금을 받은 귀족들은 그 돈으로 ’라티푼디움‘이라는 대농장을 건설하고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사들이는데 이때 이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과 검투사 경기를 치르기 위한 노예들이 있었고, 막시무스는 검투사 노예가 된 것이다. 그러던 중 기원전 73년 검투사 노예였던 스파르타쿠스가 항쟁을 일으키게 되고 이탈리아 남부를 장학하기도 했지만, 로마 군대에 진압당해 약 6000명에 달하는 노예가 십자가형을 당하게 된다.이 일을 시작으로 귀족과 평민들은 계속해서 대립했는데, 이때 로마 공화정을 로마 ’제국‘으로 만드는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그 인물은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평민파에 속해있던 그는 귀족과 평민들 사이에서 평민들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카이사르의 권력은 점점더 강해져갔다. 카이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 시내로 진경하는데, 이때 했던 말이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유명한 말이다. 그는 로마 시내를 장학하고 조금씩 제국의 기초를 쌓아갔다. 그리고 그는 독재 정치 체제를 정착시켜 로마 ’제국‘을 완성한다. 이 후 땅을 넓혀가던 중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게 되는데 자신이 믿있던 신하인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를 통해서 재현되기도 했다.카이사르가 암살당하고 난 후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세명에 의해 ’삼두정치‘가 시작되게 된다. 레피두스는 일찍이 안토니우스에게 병합되게 되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대립 속에서 안토니우스 역시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사랑에 빠져 이집트 편을 들어주게 되고 안토니우스와 이집트 연합군과 옥타비아누스의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게 되면서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스스로 명하게 된다. 이 후 로마는 계속해서 제국을 유지했으며 칼리굴라, 네로와 같은 폭군들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네르바, 트리야누스, 히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피우스 그리고 ’글레디에이터‘의 초입 배경이 되는 시기의 왕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5현제 시대에 강성한 제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코모두스 시기부터 내적인 정치적 불안과 외적으로 게르만족의 계속되는 침입을 겪으며 로마 제국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2. 로마의 검투사경기와 우민정책이 영화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소재는 바로 ’검투사 경기‘이다.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검투사 경기를 보는 관객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장면인데, 유비달라스는 이것을 ’빵과 서커스‘라는 이름을 붙혀 로마 시민들에게 먹을 것과 서커스와 같은 볼거리를 계속해서 보여줌으로써 정치적 무관심 상태로 만드는 우민정책의 일종이라 평가했다. 실제 로마는 점령지에서 가장 첫 번째로 했던 일이 콜로세움과 같은 경기장을 건설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제국‘당시에는 계속되는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시민들을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게 만드는 일, 나아가서 국가가 잘 운영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일이 중요했던 것이고, 작품 속 코모두스는 아버지 아우렐리우스의 목표였던 공화정의 부활이 아닌 원로원의 영향력을 낮추고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우민정책을 펼치고 끝내 직접 경기에 나서 막시무스와 대결하는 일종의 ’정치 퍼포먼스‘까지 펼치게 된다.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코모두스 중심의 제국이지만 코모두스는 시민들의 눈치를 본다. 이것이 아우렐리우스가 원했던 공화정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왕, 원로원, 시민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를 견제하고 국가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렇게 권력이 분산되어야지만 좋은 정책이 나올 수 있고 부정과 부패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 공화정의 기본적인 원칙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작품 속 로마 시민들은 정치적인 영향력이 아닌 엉뚱한 검투사 경기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외적으로 게르만족의 침입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검투사 경기에 매료되어 정치적 장님이 된 것이다.3. 독재 정치의 위험성이 작품은 독재 정치가 얼마나 위험하고 아우렐리우스가 원했던 공화정이 왜 필요한지를 인식시켜주는 작품이다. 그 이유는 ’국가 지도자도 인간‘이라는 명백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 코모두스는 아버지로부터 신임받지 못하고 면전에서 왕권을 일개 장군이었던 막시무스에게 넘겨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입장에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는 누나인 루실라를 에로틱하게 대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여기서는 여러 추측을 해볼 수 있다. 루실라와 막시무스가 과거에 연인이었던 점을 미루어보았을 때, 자신의 경쟁 상대인 막시무스의 사랑을 빼앗음으로써 일종의 승리감을 느끼려 한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