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본문/누가복음 19:1-10오늘 본문은 세리장인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삭개오 사건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베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시는 마지막 여행을 하는 길에 일어났습니다.예수님이 마지막 구속 사역의 완성을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여리고에 오셔서 두 가지 일을 행하셨는데 하나는 앞에 18장에 나오는 두 소경을 고쳐주신 일이고 또 하나는 오늘 삭개오가 구원 받은 일입니다.예수님이 두 소경을 고치시고 길을 계속 가시는데 허다한 무리가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 여리고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리장이고 부자였습니다.여리고는 그 당시에 동서 무역의 교차로였습니다.요단 동편 베레아 지방에서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로 들어오는데 향품이나 발삼나무 같은 물품들을 실어나르는 지점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요한 세금을 징수하는 장소였습니다. 거기에 세리들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세관 공무원이었습니다.세리들은 동족들의 세금을 거두어서 로마에 바치는 유대인들이 보면 정말 반민족적인 행위를 하는 로마의 앞잡이였습니다. 그들은 세금을 징수할 때 강제로 빼앗고 속여서 많이 취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경제적으로는 넉넉한 생활을 했지만 그러나 유대인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세리장은 지역의 세리들을 지휘하면서 이런 일을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세리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면서 부자였습니다. 권력을 잡고 있었고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삭개오는 지위와 물질이 있었지만 그의 삶 속에는 갈증이 있었습니다.그것은 사회적인 갈증이었고 종교적인 갈증이었습니다. 자기 동족들이 자기를 개처럼 여기면서 그들의 교제권 안으로 넣어주지 않았습니다. 유대 사회는 종교와 사회생활이 일치를 이루는 사회였기 때문에사회적으로도 소외됨과 동시에 종교적으로도 죄인으로 낙인찍혀서 사회적, 종교적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위는 있고 물질은 많아서 남들보다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렸지만 그것으로는 도무지 채울 수볼 수도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보통 같으면 이 정도 어려움이 있을 때 그냥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열심으로 주변을 둘러보았고 마침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목에 있는 돌무화과나무를 발견합니다. 삼거리 한 복판에 있는 나무라서 거기에 올라가면 어느 길에서 오든지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전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그 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여기서 우리는 먼저 부르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이르셨는데 삭개오를 쳐다보십니다.5절 말씀에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삭개오가 가졌던 열심보다 더 큰 열심으로 주님이 삭개오를 바라보십니다. 주님의 바라보심은 목적을 가진 바라봄입니다.무슨 목적입니까?10절 말씀에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삭개오가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고 보기를 원했지만 우리 예수님은 먼저 삭개오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더 큰 열심으로 바라보셨습니다.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삭개오야”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부르기 이전에 예수님이 먼저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삭개오가 가진 관심보다 더 큰 관심으로 주님이 먼저 주목하시고 먼저 바라보시고 먼저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삭개오야’ 하셨을 때 나무 위에 있었던 삭개오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가슴이 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름은 곧 그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름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름을 높인다는 것은 그분을 높이는 것과 똑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알고 계셨다는 것은 그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예수님이 삭개오를 찾아오셔서 그를 바라보시고 이름을 불러주신 것이 삭개오 편에서 무언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속에 있는 사랑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주님의 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그냥 소유의 절반이 아니라 내 소유의 절반이라고 합니다. 그냥 소유의 절반이라고 하면 얼마든지 남의 것을 착취해서 나눌 수도 있을 것입니다.그런데 내 소유라고 분명히 명시하는 것은 자기 것을 나누겠다고 하는 결단이 보이는 부분입니다. 그 동안 삭개오는 내 것을 모으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애를 썼겠습니까? 부정한 방법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내 것에 집착하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내 소유, 내 재산, 내 것은 움켜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여기서 준다는 말은 현재 능동 직설법 단어입니다. 현재적인 결단입니다. 나중에 주겠다, 죽고 나서 주겠다, 그게 아니라 지금 준다는 말입니다.이어서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남의 것을 속여서 빼앗은 것에 대해서 네 배로 갚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레위기 6장에서 근거한 것입니다. 원래 도둑질 하거나 속여서 취한 것이 있으면 거기에다가 5분의 1만 더해서 주면 됩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네 배나 갚겠다고 합니다.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자기 죄가 드러나면 5분의 1을 더해서 갚으면 되는데 4배로 갚겠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더 심각한 죄인으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자기 인식이 완전히 바뀌고 있습니다.거기에다 무엇이 변화됩니까?이전에 최고로 여겼던 가치가 전복되고 있습니다. 물질을 모으기 위해서 더 많이 착취했을 것입니다. 물질이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제일 옹졸한 사람은 자기의 가진 것을 가지고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급차를 타고 넓은 평수의 집에 살면서 자기가 가진 그것으로 자기의 가치까지 높이려고 하는 그런 사람은 너무나 천박한 사람입니다. 천박한 사람은 자기의 부를 정체감으로 삼습니다. 자기를 무엇으로 드러내는가 ...자기가 가진 것으로 자기를 드러내려는 사람은 천박한 사람입니다.그리스도인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내가 주님께 속했다가치를 내 소유, 내 재산에 두었는데 그러나 이제는 내 소유를 나누어줌으로 내 소유에 두었던 절대적인 가치가 사라지고 재물이 상대화 되었습니다.거기에다가 심지어 어떻게 됩니까?“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삭개오의 관심이 가난한 이웃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자기에 대해서 죄인으로 여겼기 때문에삭개오에게 있어서 사람들은 자기의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삭개오가 주님을 만남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가치가 바뀌었습니다. 수단이 목적이 되는 가치 전도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단으로만 여겼던 사람들을 목적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내 소유를 늘리기 위해서 착취해야 할 수단이었던 사람들이 이제 내 소유를 나누어서 베풀어야 할 목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이러한 삭개오에 대해서 주님은 뭐라고 선포하십니까?9절 말씀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7절에서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여겼던 삭개오를 향해서 이제 예수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구원에 대한 현재적인 선포를 하십니다.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여기고 구원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그렇게 말씀하심으로 삭개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드러내셨습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오늘 죄인이었던 삭개오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그 단서가 5절 말씀에 있습니다. 5절을 한번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예수님은 삭개오를 바라보시고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제일 먼저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왜 내려오라고 하십니까?왜냐하면 삭개오는 나무 위에 올라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올라가다 ... 이 말은 비록 주님을 보기 위해서 나무 위에 올라간 행동이지만 그러나 올라가내려오는 것이 니가 살 길이다.주님은 엄중한 명령으로 신적인 권위를 가지시고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우리는 얼마나 올라가려고 합니까?우리의 목표는 어쩌면 올라가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많아지고 더 높아지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입니다. 소형차를 타면 중형차를 타야 하고 30평에 살면 60평에 사는 것이 소망입니다.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올라서 세상에 대해서 큰 영향력을 가지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많이 가짐으로 높이 올라감으로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겨자씨 같이, 누룩 같이 너무나 작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안에 엄청난 영향력이 있어서 많은 새들이 깃드는 큰 나무가 되고 가죽 부대 전체를 부풀게 하는 그런 것이 바로 교회의 능력이요 복음의 능력입니다. 많이 모으고 많이 가짐을 통해서 한 없이 높아짐으로는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려오라“그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더 많이 가지는 것에 대한 집착, 높이 오르는 것에 대한 집착, 그 모두를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많이 모으고 높이 오르고 무언가 우리가 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세울 수 없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자녀를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습니다.주님 앞에 철저하게 내려놓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가 올라가는 길입니다. 주님께 맡기고 철저히 낮아지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가 높아지는 길입니다.주님이 삭개오에게 내려오라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하십니까?”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반드시 너의 집에 유하겠다 그렇게 하십니다.유대인의 문화에서 보면 어느 한 집에 유한다는 말은 가족처럼 관계를 맺겠다는 말입니다.”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주님은 삭개오의 집에서 삭개오와 식탁을 나누시습니다.
“네가 어떻게 읽느냐?”본문/누가복음 10장 25-37절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은 그 전체적인 흐름 자체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시작해서 예루살렘에서 최후를 마치는 그런 흐름으로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길 위를 걸으시는 메시야로 소개됩니다. 어느 한 곳에 머물러 계시거나 안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움직이면서 예루살렘에서 지셔야 할 십자가를 향해서 나아가십니다.그 여정 중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십니다.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귀신들린 사람, 자식을 잃은 부모, 죄인, 여성, 그리고 로마제국의 앞잡이로 일하는 여러 사람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만나시면서 그들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고 말씀으로 일으키시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십니다.어쩌면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길을 우리도 함께 걸어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우리 주님은 화려한 왕궁의 길, 사람들의 인정과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레드 카펫을 걸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외면하고 싫어 버린 바 된 후미지고 구석진 길을 걸으셨습니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아서 버려지고 소외되고 사회적인 연약함을 지닌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을 말씀으로 세우셨습니다.그래서 어쩌면 한없이 올라가고 높아지고 많이 가지고 남들이 인정해 주는 자리에 오르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우리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사람들을 찾아가고 그들과 함께 하는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그것이 우리의 완성될 구원을 향해 걸어가야 할 신앙의 여정이 되어야 합니다.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 가운데 한 율법교사를 만나십니다.오늘 본문 10장 25절부터 27절까지 그리고 28절부터 37절까지를 보면 전체적인 구조가 비슷합니다.1) 율법교사의 질문 (25절 :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2) 예수의 반문 (26절 : ‘율법에 무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3) 율법교사의 대답나님 사랑에 대해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고 또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라서 남들의 판단이나 잣대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그러나 이웃 사랑에 대해서,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그 이웃이라고 하는 존재의 범위가 무한정으로 넘어가게 되면 자기들이 그것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이웃의 범위에 넣어두게 되면 자기들은 결국에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그리고 혹시 율법을 지키다가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내가 규정한 이웃에 대해서 선행을 베풂으로 인해서 그 부족분을 채워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행위 구원론자들입니다.그러다 보니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웃이 누구인가?’‘이웃’이라고 하는 개념입니다. 자기들이 사랑할 만하고 뭔가 좋아할 만한 것이 있는 사람들만 이웃이라고 규정합니다.그래서 자기들 같은 유대인들, 더 좁게는 바리새인들, 같은 종교를 가지고, 같은 관습이나 유전을 지키는 부류들만을 이웃이라고 규정합니다. 그 범위를 넘어선 이방인들, 사마리아 사람들, 죄인들, 세리들, 창기들은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만약에 이웃의 범위가 이방인들, 죄인들에게까지 넘어서 버리면 자기들이 도무지 율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혹시 율법을 지키지 못했을 때 차선책으로 율법 준수에 대한 부족분을 이웃에 대한 선행을 통해서도 채울 수 없습니다.그래서 이웃을 규정하고 이웃을 한정짓기를 원했습니다.율법교사가 예수님을 향해서 물었던 질문은 결국에는 예수님의 이웃 개념이 자기들의 이웃 개념과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그것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우리의 구원관을 예수님이 인정하는가, 인정하지 않는가 ... 그러면서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렇게 묻습니다.“내가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 내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한계 안에 있는 대상, 그것이 이웃인데 당신은 이웃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습니까?”그 질문을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웃이 과연 어떠한 존재인가... 그것을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율법교사와 똑같은 “행함”에 대한 단어를 쓰고 있지만 예수님이 사용하신 “행하라”는 말은 다른 의미입니다.내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쌓아야 할 공덕의 차원에서의 행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행함은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내가 그것을 행함으로 내 구원에 대해 보탬이 되도록 하는 행함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로서 그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써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할 그 믿음의 반응이 어떻게 드러나느냐? 그것은 행함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우리의 행함이 나의 구원에 보탬을 위한 행함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의 참된 믿음은 그의 신앙의 고백과 더불어서삶의 열매, 행함 까지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그 말은 믿음이 따로, 행함이 따로 그런 말이 아니라 참된 믿음 안에 행함의 요소도 함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오늘 율법교사나 비유 속에 나오는 제사장, 레위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율법을 연구하고 묵상하고 공부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대놓고 방탕하고 방종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자신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할 정도로 경건의 삶을 실천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죽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만짐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기를 원치 않았습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나아갔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만 잘 하려고 했지 사람을 향해서는 제대로 하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우리는 믿음이 좋은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합니까?하나님을 향한 한 방향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배 잘 드리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금식도 많이 하는 사람을 믿음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하는 방향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요한일서 4:20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성경에서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오늘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향해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질문했을 때에도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서 그것을 인정하시면서 옳다, 그것을 행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 네가 영생을 얻을 것이다....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우리의 하나님 사랑 자체가 거짓이라는 겁니다.“누가 내 이웃입니까?”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해서 주님은 “누가 이웃이 되어줄 것인가?”이웃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네가 이웃이 되어 주어라...이웃을 규정하지 말고 네가 이웃으로서 행동을 하여라...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내가 규정하고 한계와 범위를 정해서 나의 맘에 들고 내가 사랑할 만한 무언가가 있고 뭔가 가능성이 보이고 성실해 보이고 뭔가 내 사역에 보탬이 되겠다는 사람, 그들만 이웃의 범주에 집어넣고 그렇지 않고 남을 속이고 빼앗고 도둑질을 하고 악한 일을 일삼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네가 그렇게 했으니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네가 잘못했으니까 그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너는 나의 이웃이 될 자격이 없다.하나님을 향한 믿음,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려고 하는 삶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생각하고 아예 그들을 이웃의 범주에서 제외시켜버리는 그런 모습...여러분! 이것이 오늘 율법교사의 모습이요 유대인들의 대표격인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입니다.그런데 여러분 사실은 그게 저의 모습이었습니다.저희 교회에 첫 번 째로 나온 자매가 있습니다. 고등학생인데 한국어를 저희한테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로 연결이 되어서 열심히 교회에 나왔습니다. 자라온 환경이 어려웠지만 그래도 참 밝고 활달하고 리 바로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이 책망하시던 바리새인들, 율법사들의 태도였습니다.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게 바로 저의 모습이었습니다.저 스스로 이웃에 대해서 규정하고 선을 그어서 그 안으로 들어오면 이웃, 벗어나면 이웃이 아니야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하나님께서 만약에 우리를 그런 잣대로 보시고 판단하신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이웃이 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하나님의 거룩의 기준에 부합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하겠습니까?자격과 조건과 능력을 따진다면 우리 모두는 버려지고 내팽개쳐져야 할 사람들입니다.그러나 우리의 참된 이웃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아무런 자격이나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직 연약할 그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그 때에, 우리 편에서의 선함이나 능력이나 자질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하시고 친히 우리의 이웃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그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자비입니까?여러분! 제가 뭔가 내세울 만한 것이 있고 자격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이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다른 무언가가 있어서 목회자가 되고 선교사가 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 자리에 서지도 못할 사람입니다.저희가 지난 2월달에 개척을 한 교회가 시삣에 있는 서머나교회입니다. 교회를 처음 시작하려고 동사무소에도 찾아가고 마을의 이장도 만나고 하면서 준비를 했습니다. 동사무소에 텐트와 의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까 선뜻 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거기다 자기들이 주일 아침에 비어있는 농구장에다 텐트와 의자를 미리 다 설치해놓겠다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사람들도 만나고 전도지도 돌리고 나름대로 준비는 했지만 처음 시작하기 전날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머리 속으로 그림이 그려져야 하는데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모일지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막막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우리를 통해서 행하실 일을 기대
부자와 나사로 비유 누가복음 16:19-31오늘 본문의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부자의 삶과 죽음, 그리고 나사로의 삶과 죽음을 대조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그런데 사실 부자와 나사로의 삶을 대조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 중요한 초점은 아닙니다.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해석할 때 물질에 대해서 청지기의 역할을 잘하자, 재물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잘 사용하자, 그렇게 빨리 결론을 내립니다.아니면, 보통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가지고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로 끌고 갑니다. 주로 주일학교에서 구원 메시지를 전할 때 예수님을 잘 믿으면 천국에 가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라고 하면서 지옥의 고통을 극단적으로 부각시켜서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거기에는 마실 물이 없어서 타는 듯한 목마름이 있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엄청나게 뜨거운 불이 있어서 너무 너무 고통스럽다, 하지만 큰 구렁텅이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있어서 거기서는 천국으로 절대로 건너올 수 없다, 그래서 이런 비참한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한다, 그러면서 오늘 비유를 사용하기도 합니다.우리가 본문을 해석할 때에는 일부분만을 가지고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본문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그리고 전체적인 문맥 속에서 그 본문이 어떤 의미를 드러내는지를 살펴보아야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보통 비유에서 앞부분과 뒷부분이 나란히 있을 때 어디에 강조점이 있습니까? 뒤에 나오는 이야기에 강조점이 있습니다.오늘 본문도 19-26절, 그리고 27-31절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은 실제적인 예를 말하는 것이고 뒷부분이 핵심을 말하고 있습니다.오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문맥을 살펴보아야 하는데본문에서 제일 가까운 문맥이 14-18절입니다.14-18절이 나오고 나서 이어서 부자와 나사로 비유가 나오니까 뭔가 단절이 되고 서로 아무런 관계스로 의롭다고 여깁니다.이어서 16-17절을 보면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고 침입하느니라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여기에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무슨 뜻입니까? 율법은 모세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고 선지자는 예언서를 기록하였으니까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 성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그리고 나서 18절에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여기에 간음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간음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모세의 율법에서 아내로 데려온 사람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면 이혼 증서를 써서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원래 취지가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편안하게 이혼하라는 말이 아닙니다.그래서 오늘 누가복음 16장 18절은 간음하지 말라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버리지 말라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아내를 버려서 과부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이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나서 그 다음에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이것이 오늘 본문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어떻게 서로 연결이 될까요?먼저 14-17절까지는 ‘율법과 선지자’18절에 ‘아내를 버리지 말라’19-26절까지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인데, 결국에는 ‘가난한 자를 버리지 말라’그리고 27-31절에서 ‘모세와 선지자들’, 즉 율법과 선지자 이야기가 나옵니다.그러니까A 율법과 선지자B 아내를 버리지 말라B’ 가난한 자를 버리지 말라A’ 율법과 선지자이렇게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간단하게 말해서 앞과 뒤에 율법과 선지자 그리고 가운데 부분에 과부와 가난한 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과부, 가난한 자, 고아, 나그네 같은 소외된 사람들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을 테니까 아마도 나사로는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했을 것입니다.나사로는 무엇을 먹었습니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일반적인 빵 부스러기가 아니라 식탁을 닦고 바닥으로 던져버리는 빵조각을 말합니다. 거지는 그런 빵조각이라도 먹으려고 했습니다.22절 말씀,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때가 되어서 두 사람은 죽었습니다. 부자도 죽고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죽어서 장사되었습니다. 가족들이 많은 돈으로 최고의 장례식을 치러서 수많은 사람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부자는 제일 좋은 자리에 묻혔을 것입니다. 나사로는 그냥 죽었다는 말만 나옵니다. 부자와 나사로가 죽는 모습 자체도 다릅니다.그런데 죽은 이후에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바뀝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즉 천국에서 위로를 받고 있었지만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서 아브라함을 부릅니다.24절 말씀,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부자는 아브라함을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부자가 유대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도 율법을 알고 있었고 지키려고 했다는 말입니다.부자의 대문 앞에 있었던 나사로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았던 부자는 이제 자기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두 가지 요청을 합니다.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두 가지 요청 다 ‘나사로를 보내 달라’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보내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는 것...그리고 나사로를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어서 다섯 형제들이 고통 받는 지옥에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이게 바로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종교적인 열심은 대단합니다. 희생 제물을 드리고 십일조를 드리고 온갖 제사를 드리지만 그러나 그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님이 그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기뻐하는 것입니다.이것이 오늘 본문 어디에 나옵니까?25절 말씀,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부자는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습니다. 개역 개정성경에는 자세하게 나타나지 않지만원문 성경이나 영어 성경을 보면 분명하게 ‘너의 좋은 것’이라고 나옵니다.너의 좋은 것, 니가 보기에 좋은 것,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입니다.그게 뭡니까?철저하게 자기 중심의 신앙, 기호나 취미, 소모품처럼 변질되어버린 신앙....자기의 종교 행위에 얽매여서 자기 스스로는 만족하고 자기 스스로는 ‘의롭다’고 여겼지만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된 것입니다. 그저 “너희가 기뻐하는 바”였습니다. 자기들이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율법과 선지자들을 오해한 것입니다.그러니까 부자는 자기 종교, 자기 만족에 빠져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이 말하는 참된 정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부자는 음부에 가서, 즉 지옥에 가서, 아브라함의 품, 즉 천국과는 도무지 가까이 할 수 없는 큰 구렁텅이를 경험합니다. 건너가거나 건너올 수 없는 영원한 분리를 경험합니다.결국 이 큰 구렁텅이는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부자는 왜 이 자리에 놓여지게 된 것입니까?그것은 ‘그의 대문’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부자는 대문 안에서 고 부자의 물건을 훔쳐가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물질을 나누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의 물건을 가져가면 하나님께서 오히려 부자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필리핀 사람들의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할 때 경비원이 모든 직원들의 가방을 일일이 검사합니다. 심지어 교사들도 학교에서 퇴근할 때 혹시라도 학교 물건을 가져가는 것이 있을까 싶어서 항상 가방을 열게 하고 확인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대할 때마다 부자로부터 돈이든, 음식이든 무언가를 얻어내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차량이 정체되는 곳이나, 아니면 골목 입구 같은 곳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조그만 플라스틱 통을 들고서 지나가는 차량 운전자에게 구걸을 합니다. 그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필리핀의 성도들도 선교사를 대할 때 그런 의식들이 은연중에 있습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몇 성도들은 선교사에게 항상 뭔가를 바라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선교지의 성도들을 바르게 세워나가는 방법이 무엇일까 ....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선교사에게 손 벌리지 않고선교사에게 뭔가를 바라지도 않고 이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들의 잘못된 사고방식, 자기들의 선입견, 자기들의 틀 ... 그러한 모든 대문들을 뛰어넘고 그 대문 밖으로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에는 선교사를 의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도로서의 권리와 축복을 누리며 살도록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부자의 것을 마음대로 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선교사가 무언가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선교사만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자녀로서의 부요함과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고 하나님과 공동체 안에서 바른 관계를 맺어나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이 성도들이 가난하니까 그냥 선교사가 후원받아서 교회 건물을 지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선교사만 .
기욤 뮈소 “그 후에” 독후감1. 작가에 대하여기욤 뮈소는 빠른 사건 전개와 생동감 있는 화면 구성,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감각적인 요소들로 독자들을 매혹시키는 이 시대 프랑스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이다.1974년 프랑스 앙티브에서 태어났으며, 니스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몽펠리에대학원 경제학과에서 석사 과정을 이수한 후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집필 활동을 시작했다. 첫 소설『스키다마링크』에 이어 2004년 두 번째 소설 『그 후에』를 출간하며 프랑스 문단에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구해줘』,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 돌아오다』, 『당신 없는 나는?』, 『종이 여자』, 『천사의 부름』, 『7년 후』, 『내일』, 『센트럴파크』, 『지금 이 순간』, 『브루클린의 소녀』까지 연이어 프랑스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다. 세 번째 소설『구해줘』는 아마존 프랑스 85주 연속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고, 국내에서도 무려 200주 이상 주요서점 베스트셀러에 등재되었다. 프랑스 언론은 ‘기욤 뮈소는 하나의 현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며 찬사를 표했고, 현재 전 세계 40여 개국 독자들이 그의 소설에 공감과 지지를 보내고 있다. 기욤 뮈소의 소설은 단숨에 심장을 뛰게 만드는 역동적인 스토리,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긴장감, 복잡한 퍼즐 조각을 완벽하게 꿰어 맞추듯 치밀한 구성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2. 줄거리유명한 변호사 네이선 델 아미코와 아내 말로리, 그리고 딸 보니에 대한 이야기이다. 말로리와 이혼 후, 힘든 하루를 겪는 네이선 앞에는 죽음을 예견하는 의사 굿리치가 나타난다. 굿리치는 네이선에게 계속 접근하며 그의 죽음을 예견한다. 성공을 좇던 가난한 집안의 네이선과 부잣집 딸이지만 평범한 일상을 원하는 말로리는 갈등과 오해 끝에 헤어지게 된다. 그는 마지막으로 말로리를 찾아가 자신의 인생을 다시 되찾으려 한다. 지난 오해를 풀며 네어이선은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말로리와의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하지만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말로리와 또 한번 슬픈 이별을 준비한다. 하지만 굿리치가 네이선을 찾아왔던 이유는 네이선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예견하는 자신의 후계자였기 때문이었고 네이선은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순간 말로리의 머리 위에 죽음의 표식이 생긴 것을 보게 된다. “그녀의 마지막 순간 옆에 있어야 하는 사람은 나야!”라고 생각하고 그녀에게 달려간다.3. 감상오랜만에 읽은 소설책이다. 문학적인 감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소설을 골랐다. 처음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어지는 스토리의 전개가 궁금해서였다. 대단한 판타지소설이나 영웅담을 그린 내용은 아니다. 우리 인생사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면서도 쉽게 간과하며 지내는 주제들, 삶이란 무엇이며, 가족, 사랑,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주인공인 '네이선'은 자수성가한 유명 변호사이다. 한 번도 소송에서 패배한 적이 없는 젊고 유능한 변호사이다. 어린 시절 이탈리아 출신의 가난한 어머니와 단 둘이서 부잣집 가사도우미로 들어가 살다가 그 부잣집의 딸과 서로 사랑에 빠진다. 자기와는 수준에 맞지 않는 그 여인과 사랑하고 여인의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한다.네이선의 목표는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의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고 능력도 인정받으면 아내의 가문의 수준에 맞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장인과 장모가 자기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일에 집착하고 매달리는 경우가 잦아지고 가족을 돌보지 못하는 가운데 태어난 지 석 달된 둘째 아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아픔으로 인해서 부부가 서로 더욱 돈독해지리라 믿었지만 결국에는 이혼을 하게 된다. 그 아픔과 외로움을 달래고 이겨내기 위해서 네이선은 더욱 더 일에 매달린다. 지금은 따로 살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아내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그러던 어느 날 죽음에 대한 예지 능력을 가진 '굿리치'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굿리치를 통해서 두 사람의 죽음을 직접 목도하게 되고 결국 굿리치가 네이선을 찾아온 것이 네이선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주인공의 입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아내와 딸, 바로 가족이었다. 그가 그토록 바라고 달려왔던 명예와 부가 아니라 가족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자기의 전 재산과 명예, 직책을 날리는 한이 있어도 가족을 지키려 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지금껏 달려왔던 목표들이 허황된 것이었고 진정한 행복은 가족들과 함께 하는 소소한 삶이었음을 깨닫게 된다.그러나 굿리치가 자신을 찾아온 것은 자신이 죽을 운명이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가 죽을 운명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된다. 네이선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또 다른 세계를 열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담담하게 맞이해야 할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인식하게 되면서 사랑하는 아내를 편안히 떠나보내기로 한다.
문화교양학과 고전 함께 읽기1 공통형 ? 학이편 제1장에서 공자의 유명한 세 문장 중 하나를 선택하여 서술해 보시오1. 교재 4쪽 학이편 제1장을 보면, 공자가 말한 유명한 세 문장 구절이 있다.①“배우고 때 없이 익히면 기쁘지 않은가!”,②“벗이 먼 데서 찾아오면 반갑지 않은가!”,③“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으면 군자답지 않은가!”이 구절은 복잡한 이론도 아니고, 대단한 얘기도 아니며, 공자가 생각하는 군자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린 문장이다. 이 중에서 가장 마음에 다가오는 문장 하나를 주제로 정하여, 자기 삶의 경험에서, 또는 평소 생각해 왔던 소신, 신조 등을 바탕으로 왜 자신이 선택한 주제가 마음에 다가왔는지, 또 우리 인생에서 그 주제가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을지 자기 글로 서술해 보시오.Ⅰ. 서론정치인들과 공직자들의 부정부패, 대기업의 횡포, 빈부의 극심한 격차 등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어두운 단면이요 사회악(社會惡)이다. 가진 자이든 가지지 못한 자이든 모두가 꿈꾸는 것은 부귀영화일 것이다. 가진 자는 더 가지지 못하여 안달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가지지 못한 자는 조금이라도 가지기 위해서 몸부림치지만 현실의 벽을 마주하며 좌절한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못한다며 낙담한다. 이 세상은 냉혹하고 차가운 경쟁의 사회이다. 이 경쟁에서 도태되면 영원히 패배자로 남게 되고 결국에는 사라지고 만다.오늘날 경쟁 사회에서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일이다. 사람들은 남에게 인정받는 사람, 소위 “인싸”가 되기를 원한다. 남의 인정을 받아야만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고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자의 가르침은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라고 한다.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서운해 하거나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그것이 오히려 군자(君子)라는 것이다.그러므로 공자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울리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저항과 극복의 구도로 이해해 왔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우리를 지배하려는 세력에 대해서 저항하고 그것을 극복하며 싸워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利)를 위하여 뇌동(雷動)하며 조금이라도 나의 이를 상실하게 되면 가슴 아파하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경쟁으로 점철된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이러한 공자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울림과 가치가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Ⅱ. 본론1. 주제로 정한 문장“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으면 군자답지 않은가!”논어 학이(學而)편은 16장으로 이루어져있는데 그중에 1장의 세 번째 부분과 16장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장에서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으면 군자답지 않은가!”, 그리고 16장에는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결국 학이(學而)편은 “남이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써 처음과 마지막이 수미쌍관(首尾雙關)을 이루고 있다.공자가 만년에 교육에 헌신하고자 노나라에서 연 학교는 군자(君子) 양성을 목적으로 한 사립학교였다. 말하자면 군자학의 도량이었다. 만년의 학교의 학규(學規), 훈시(訓示) 등으로 봐도 학이(學而)편은 부자연스럽지 않다. 공자는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서 바람직한 인간관(人間觀)은 결국 군자(君子)라고 본 것 같다. 군자의 중요한 덕목은 ‘이’(利)보다는 ‘의’(義)가 소중하고 ‘나’보다는 ‘우리’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2. 왜 이 주제가 마음에 다가왔는가?공자는 사랑을 바탕으로 한 도덕적 공감 능력을 중시하고, 인정의 자연스러움에 바탕을 둔 인성교육과 자율성 강조, 제자들의 수준에 맞춘 인성교육을 제시하였다. 공자의 말씀이 도덕적 공감 능력을 일으키고 있는지, 자연스러운 인성에 바탕을 둔 것인지, 나의 수준에 맞춘 말씀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나는 지금껏 세상을 살아오면서 경쟁에 물들어 있었다. 남들과 비교해서 우위에 있어야만 마음이 편했다.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이 나아보이면 잠을 자지 못할 정도였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러나 쉽지 않았다.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어느 순간 평가의 자리에 함께 서게 되면 조금이라도 내가 높은 평가를 받기 원했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친구가 미워질 때도 있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면서 한 없이 초라해지기도 하고 인간관계도 점점 좁혀지기만 했던 것 같다. 친구들을 만날 때에도 나보다 너무 잘난 사람은 만나기가 꺼려졌다. 오히려 나보다 조금 못한 사람들을 만날 때 편안함을 느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경쟁 관계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았다. 결국에는 인간관계에 자신감이 없어졌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것이 어쩌면 더 편했다.성경에서 야곱과 그의 쌍둥이 형 에서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싸웠다. 심지어 동생 야곱은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났다. 이 이야기는 결국 인간 세상은 경쟁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다. 태중에 있을 때부터 경쟁 사회를 이미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경쟁은 결국 인정받기 위한 싸움인 것 같다. 가정에서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인정을 받으려 한다. 부모가 칭찬해주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인정을 받아서 다른 학생들보다 내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직장에서도 역시 인정받는 것이 최고의 목표요 인정을 받아야만 높은 연봉과 승진이 보장된다.결국 경쟁을 통해서 더 많이 인정받아야만 세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어려서부터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 그런 교육을 받아온 것이다. 남들은 친구나 동료가 아니라 적이요 경쟁상대가 되어버렸다. 이런 세상 속에서는 어느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은 경쟁에 진 사람을 무시하고 억누르며 스스로의 성취에 대해서 우쭐하게 된다. 경쟁에서 진 사람은 한 없이 무너져 내리고 결국에는 자기의 생명조차도 내어버릴 때가 있다. 경쟁은 결국 어느 누구도 승자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 시대에서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의 태도가 무엇일까? 세상을 저항과 극복의 구도로 보지 말고 이해와 관용의 구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말이 공자의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으면 군자답지 않은가!”라고 생각한다.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경쟁하는 사회를 넘어서서 내가 먼저 남을 알아줌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남들이 나와는 다른 존재임을 알아서 서로 관용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공자의 가르침이 너무나도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3. 우리 인생에서 이 주제가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가?괴테의 장편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상업을 가장 고귀한 일로 생각하며 이익 창출을 위한 투자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의 집을 아름답게 꾸미며 물질적 향락을 의식적으로 추구하였다. 그 대척점에는 영국제 명품가구를 목표로 하는 삶과는 ‘다른’ 삶을 동경하는 또 다른 시민의 전형을 보여주는 주인공 빌헬름이 있다. 그 역시 “소년 시절부터 자기 방을 작은 왕국으로 생각하고”, “네덜란드 화가”가 “정물화”를 그려도 될 정도로 방을 꾸미고 장식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그의 진정한 관심은 집안의 장식이 아닌 내면의 성장에 있다. 아름다운 집안 가구와 인테리어에 대한 욕망은 그 자체 매우 중요한 시민계급의 삶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빌헬름의 ‘자아’에 대한 의식과 욕망은 그 네덜란드 정물화 풍의 방에 머물지 않는다.빌헬름의 아버지는 그에게 자신의 직업을 물려받아 상인이 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지만 그는 ‘상인’이 아니라 훼손되지 않은 개성을 갖춘 온전한 ‘인간’ 빌헬름이 되고자 한다. 그는 아버지가 추구하는 “무한한 소유와 가볍고 즐거운 향락”을 거부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완성시켜나가는 것”을 삶의 목표로 한다. 그가 영국제 명품가구가 있는 풍요로운 부모의 집을 떠나 긴 방랑길에 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어떻게 하면 경쟁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질 수 있을까? 괴테가 말하는 “아름다운 영혼”(Die schoene Seele)은 소유와 집착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완성시키는” 사람을 말하는 것 같다.모든 사람들이 빌헬름의 아버지가 되기를 원한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가지고 사회 고위층에 올라서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멋진 인테리어를 갖춘 고급 주택에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자기 자녀들도 부모의 부와 명예를 고스란히 물려받기를 바라며 부모가 원하는 빌헬름이 되기를 원한다. 부와 재화는 한정적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부자가 될 수 없고 모든 사람들이 고위층에 위치할 수 없다. 제한된 부와 재화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그러므로 이 땅이 생명을 다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공자의 말씀은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가? 어떻게 하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을 것인가? 남을 경쟁상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 서운해 하지 말고 내가 남을 먼저 알아야 한다. 여기에 두 종류의 앎이 있다. 남이 나를 알아주는 것, 내가 남을 아는 것, 그 두 가지이다. 한자로는 동일한 앎(知)이지만 앞의 앎과 뒤의 앎은 다르게 다가온다. 남이 나를 알아주는 것은 ‘경쟁’의 의미일 것이고 내가 남을 안다는 것은 ‘이해’의 의미일 것이다. 남이 나를 알아주는 것은 내가 남에게 인정받는다는 의미이다. 그 말은 결국 남보다는 내가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 차이를 통해서 나는 옳고 남은 틀렸다는 것을 주지시킨다. 내가 하는 생각이나 일이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남보다 나는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결국 남이 나를 알아주는 것은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