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전투 영화의 특성과 양상ㆍ 전쟁은 정치의 일부ㆍ 각 시대의 사상과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개체와 공동체, 계급과 관련된 윤리관념에 대한 표현 풍부ㆍ 죄와 선, 인간의 정의 같은 주제 표현이나 반전의 메세지를 전달하기 용이ㆍ 공들여 연출된 전투장면은 스펙터클로서의 흥행 요소 존재ㆍ 희생과 용맹이라는 서사적인 차원에서 관객들의 감정이입↑전쟁 전투 영화의 흐름과 선정 이유ㆍ 국가 별로 2차 세계 대전을 그리는 방식ㆍ 영국 : 초기의 전쟁 영화에서 공중 전장을 주로 표현,→ 이 후 직접적인 전장의 스토리 묘사에서 개인이 겪는 심리적 상처에 주목<배틀 오브 브리튼>(1969) → <어톤먼트>(2007)
옥상과 바닷가는 동시녹음에서 다른 공간,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바람이다. 바람을 막기 위한 마이크의 액세서리인 윈드스크린과 윈드재머도강한 바람을 막을 수는 없다.이때 가장 유용한 방법은 마이크를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스쿠핑 마이킹(scooping miking)을 하는 것이다.사람의 위보다 아래의 바람이 약하기 때문이다. 만약인물 전체가 화면에 잡혀서 인물 머리 위에 위치시키는 톱 마이킹(top miking)을 사용해야 한다면 바람을등지는 위치에 마이크를 띄운 각도로 마이킹하는 것이 좋다.
과목명:담당교수님:학번:이름:한국 멜로영화의 시대적 변화-과 를 중심으로-한국 멜로영화와 영화 선정 이유-과 의 비교-소감-한국 멜로영화와 영화 선정 이유많은 영화 장르 중에서도 멜로영화는 시대적 변화의 의미가 큰 장르이다. 특히 ‘멜로’라는 장르는 ‘사랑’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 이면에 담긴 사회적 억압을 주로 하는 장르이다. 이러한 사회적 억압은 영화 속에 표면적으로 드러나며, 주인공 남녀 간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로써의 역할을 행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억압들을 이겨내고 사랑을 쟁취한다. 이러한 사회적 억압은 여러 영화에서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데, 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 의 경우는 동성애적인 부분과 상류층 가정의 표면적 이미지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났으며, 더글라스 서크 감독의 은 나이와 신분차에 대한 사회적 시선,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의 경우에는 인종과 나이차에 대한 억압의 시선으로 나타난다. 또한 멜로영화는 ‘여성’에게 영화의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영향을 받는 장르이다. 외적으로는 멜로영화의 주 소비층이 여성이라는 점이며, 내적으로는 영화의 플롯상 여성 주인공의 지위와 주체성에 대한 내용의 차이가 될 것이다.그중에서도 한국의 멜로영화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특히나 유교적 문화권, 가부장적 사고가 팽배했던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또한 과거 한국과 현재의 한국을 생각한다면, 의미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시대적 변화의 의미가 커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멜로영화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러한 한국 멜로영화의 시대적 변화를 비교해내기 위해 이 글에서는 한형모 감독님의 과 정지우 감독님의 를 비교해보고자 한다. 두 영화는 우선 시대상 배경의 차이가 굉장히 크다. 과 는 각각 1956년과 1999년 작품으로, 무려 40여년의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시대의 차이는 특히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일 수 있는데, 40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의 차이 속에 한국이라는 역동적인 나라는 사회적 이슈, 특히 젠더 이슈에 대해 성숙해지고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멜로영화의 장르적 특수성과도 맞닿아있으며, 그렇기에 고전적 사례로써 을 선정, 와 함께 비교하며 그 변화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과 의 비교과 두 작품은 멜로영화 중에서도 ‘불륜’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불륜멜로는 고전적 사회적 인식인 ‘여성의 가정으로의 회귀’라는 메시지로부터 현재는 여성의 성적 욕망에 대해 부각하고 가정으로의 회귀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장르적 관습의 변화는 과 에 고스란히 나타난다.불륜을 다루고 있는 멜로영화의 플롯은 ‘1. 여주인공이 외간 남자와 밀회함 2. 남편은 눈치채나 묵인함 3. 가족이 붕괴될 위기의식을 느낀 여성이 관계를 정리하려 함 4. 가족의 붕괴를 무릅쓴 애인과의 재회와 애정의 확인 5. 그래도 가족을 생각하여 다시 가정으로 돌아오는 여주인공’과 같이 나타난다. 이러한 고전적 멜로영화의 플롯은 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5번과 같은 경우 이 부분에서 는 다른 방향을 추구한다. 여주인공이 가정을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남편인 ‘서민기’가 여주인공을 살해함으로써 이뤄진다. 이러한 결말은 과거의 멜로영화, 즉 과는 대조되는 극단의 결말로 볼 수 있다. 이것의 연장선에 바로 두 영화의 공통적 키워드를 찾을 수 있는데, 이러한 큰 틀에 있는 것이 바로 앞서 말했던 ‘가정으로의 회귀’이며, 더 깊게 말하면 여성 주인공의 주체적 행동에 대한 사회적 시선의 변화에 대한 내용이다. ‘가정’이라는 개념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으며, 그중에서도 가정 속의 남녀의 역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관점들도 많이 바뀌었다. 이러한 점에서도 두 영화를 차이를 보인다.기본적인 멜로영화의 사회적 지위의 설정은 남성이 여성보다 더 높게 나타난다. 이것은 남주인공은 대학교수, 여주인공은 판매원이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는 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현대로 와 그러한 고전적인 사회적 지위의 설정은 변화하게 되었다. 의 경우엔 오히려 여주인공인 ‘보라’가 학원강사로써 가정의 경제권을 도맡고 있으며, 남주인공인 ‘민기’는 실직한 채 가정을 돌보고 있는 설정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점들은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사회적인 특성을 드러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만들어질 당시는 가부장적 사고가 팽배했고, 가정에서의 성별에 따른 역할이 고정적이었기에 이와 같은 설정이 나왔으나, 의 경우엔 당시 IMF 경제위기를 겪던 시대로써, 실직 가장들이 우후죽순 늘어나 남성들의 지위가 한없이 떨어지던 때였기에 이러한 설정이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남녀의 사회적 지위가 정반대인 두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남성 주인공들은 여전히 가부장적 사고에 갇혀있다는 것이다.기본적으로 과 의 두 여주인공 모두 주체적인 행동을 취한다. 그러나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의 사회적 배경들로 인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두 영화에서 굉장한 차이를 보인다. 한형모 감독님의 은 기본적으로 가정으로부터의 도피를 꿈꾸는 여주인공의 이야기이다.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계속되는 가정에서의 일상반복과 지겨움으로부터 파생된 도피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극 중 남편에게서도 나타난다. 한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각각 불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플롯을 담아내는 의 전제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영화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엔딩으로 끝맺음된다. 특히 한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모두 서로 다른 사람과 이른바 불륜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불륜보다는 여성의 불륜에 집중하는 시선을 영화는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를 집에서 쫓아내고 아내에게 꾸지람을 하는 남편의 모순적인 장면은 당시 여성의 가정적 역할에 대한 집중도와 중요성에 대해 영화가 보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영화는 여주인공의 가정으로의 회귀와 여성의 가정 역할에 집중하여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현대적 사례인 정지우 감독님의 역시 가부장적 요소가 등장한다. 이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남성들의 놓지 못하는 한 줄기 끈, 또는 자신의 무력함을 가정에서라도 보상 받고 싶어하는 유세이자 외적으로는 그들을 위한 위로의 장치일 수 있다. 의 남주인공 ‘민기’도 그러하다. 그는 실직한 가장으로써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도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려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불륜한 아내를 살해하는 장면에서 절정에 치닫는다. 이것은 가정을 파탄내고 불륜을 저지른 아내에 대해 권위를 내세우며 이를 단죄하는 가부장적 플롯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은 표면적으로는 과 같은 가부장적 엔딩으로써 여성의 가정 도피와 주체성을 파괴한 것으로 보이나, 오히려 더 나아가 여성을 살인하는 정도의 극한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가부장적 사고와 폭력성에 대한 비판적 관점으로 볼 수도 있다. 에서의 메시지와 구별되는 부분이다. 이러한 차별점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사고의 전환과 서사적 변화로 볼 수 있다.모성애의 부재도 두 영화를 비교하는 좋은 키워드가 될 수 있다. 특히나 현대적 사례인 에서는 이러한 모성애의 부재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의 여주인공인 ‘보라’는 가정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 점은 애인을 만나러 가기 위해 아이에게 수면제를 먹이는 모습과 개미가 든 분유를 아무 생각 없이 아이에게 주는 등과 같은 행동들로부터 보여진다. 더 나아가 간접적으로는 ‘불륜’ 그 자체로서도 모성애의 부재를 드러내고 있다. 오히려 이러한 모성애의 역할은 남주인공인 ‘민기’가 도맡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부성애가 강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여주인공과의 대조를 영화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전적 사례인 에서는 이러한 모성애의 묘사가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의 여주인공 역시 처럼 반복되는 지루한 가정을 벗어나 문화를 향유하고, 또 애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며 점점 아이를 자신의 사생활보다 후순위로 미루는 행동을 보인다. 이 점을 영화 역시 의식하는 듯 밤중에도 혼자 집에 남아있는 아이의 모습을 인서트로 영화 중간중간마다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모성애는 여주인공이 이후 이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며 다시금 가정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장치로써 영화 속에서 사용된다. 여기서 모성애의 부재란 단발적인 요소로써 여주인공을 좀 더 부도덕하게 보이기 위한 장치로써 사용된다. 그러나 에서는 부도덕과 동시에 여성의 주체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영화 속에 표현되었다.
감상문명작은 시대의 흐름을 타지 않는다. 그 당시의 유행은 있었을지라도 그 주제의식은 천년을 넘어 살아간다. 그렇게 이어져온 작품이 바로 이다. 셰익스피어 일생의 명작인 은 플롯과 캐릭터 설정, 그리고 상징과 주제의식에 이르기까지 과거와 현재를 관통한다. 그중에서도 나는 셰익스피어가 인물을 다루는 법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첫째는 인물들의 개성과 관계들이다. 햄릿에서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며 이들은 이른바 ‘멋’이 있다. 이 멋이라는 것은 다른게 아니라 설정이 확실히 잡혔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들에 타당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인물에 맞는 합리적인 그들의 행동들은 이야기의 완성도를 높일 뿐만 아니라 인물 하나하나의 품격을 높여준다. 이는 햄릿과 클로디어스, 선왕과 더불어 어머니와 레어티스, 그리고 오필리어까지, 이야기에 등장하는 캐릭터 한명 한명에게서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러한 인물들이 서로 관계를 엮어가며 이야기를 펼쳐나가니 이야기가 멋이 없을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캐릭터 설정은 바로 주인공인 ‘햄릿’이다. 특히 셰익스피어는 딱 한 장면으로 햄릿이라는 인물의 성격을 설명하는데, 나는 바로 이 장면이 왜 이 명작이며 셰익스피어가 거장인지를 알려주는 좋은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정적인 요인을 하는 씬은 바로 성당씬이다. 숙부인 클로디어스를 죽일 기회를 본 햄릿은 클로디어스가 성당에 홀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뒤따라간다. 그러나 햄릿은 클로디어스가 성당에서 회개하는 것을 보고는 그의 복수를 미룬다. 하지만 햄릿은 여기서 그를 죽였어야 했다. 이 일로 인해 햄릿의 죽음은 이미 자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기회를 놓친 햄릿은 결국 파멸한다. 바로 이 장면으로 인해 ‘햄릿’은 우유부단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 장면의 의미를 단순히 ‘우유부단’이 아닌 그 너머에 있다고 생각한다. 왜 햄릿은 클로디어스를 죽이지 못했을까?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책에 저술했다. 당시 성당에서 클로디어스는 자신이 선왕을 죽인 것에 대해 자책감을 느끼며 회개를 하고 있었다. 이에 햄릿은 지금 당장 그를 죽이게 되면 그가 천국에 갈 것이 두려워 잠시 복수를 미룬 것이다. 사실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부분이다. 영혼의 복수까지 원한다고 이 결정적인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현대의 관점으로는 맞지 않다. 그러나 당시는 신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때이니 어느정도 이해한다고 치자. 그러나 또 한편으로 궁금한 점은 왜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이렇게 설정했는가이다. 그는 충분히 햄릿을 선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으며 인간미 있게 만들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서 나는 ‘햄릿도 인간이구나’를 느꼈기 때문이다. 복수를 꿈꾸며 성당에 들어갔으나 회개하고 있는 악역이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누구나 여기선 잠깐일지라도 당황과 연민의 정서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그러지 않았다. 햄릿은 단 한번의 눈 깜빡임도 없이 ‘그를 여기서 죽이면 지옥에 보내지 못한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복수를 미루었다. 이 부분에서 나는 감탄했다. 햄릿이라는 인물을 단 한순간으로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으로 인해 햄릿은 ‘복수에 눈먼 자’가 되었다.
감상문세계적 비극 작품이라 일컬어지는 . 무수히 많은 장점들이 있는 작품이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상징’과 ‘신탁’이라는 요소에 집중한다. 신탁이란 과연 무엇인가. 신탁은 예언이며 미래를 보는 힘, 누군가에겐 인생의 길잡이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슬픔이 될 수도 있고 비극이 잇따르기도 한다. 신탁은 이른바 절대자가 인물에게 전달하는 가이드이자, 어쩌면 관객에게 전하는 플롯의 가이드이기도 하다. 하지만 적어도 ‘오이디푸스’에게만은 이 신탁이 그를 비극으로 치닫게 만들었다.사실 ‘신탁’이라는 요소는 요즘의 영화들에 따르면 그렇게 썩 좋은 요소같이 보이지는 않는다. 여러 인물들이 치열하게 부딪히는 극 속에서 절대적인 힘을 한 인물에게 쏟아주는 꼴이기 때문이다. 절대자가 생겨나면 이야기의 전개를 관객이 예상하게 된다. 관객이 예상한대로 극이 흘러가게 되면 관객은 실망한다. 더 깊게 들어가면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 혹은 이야기의 인과율이 전혀 맞지 않을 때, 꼼수로서 신탁을 사용하는 영화들도 많다. 가령 로맨틱코미디 영화들에서 타로를 보러 간 여주인공에게 “주변에 귀인이 나타날거야..”와 같은 클리셰적인 말을 한다던가 하는 경우 말이다. 할리우드나 무수히 많은 세계의 영화들에서 이것은 반복된다. 하지만 꽤나 많은 작품들에서 신탁과 같은 요소를 사용함에도 훌륭한 영화들을 만들어낸다. 바로 과 같은 훌륭한 길라잡이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의 수많은 신탁 영화들은 의 전개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또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신탁의 요소를 이만큼 잘 활용한 작품은 없을 것이다.기본적으로 은 신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신탁을 통해 인물들의 갈등이 만들어지고, 결말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소포클레스는 에서 왜 신탁이라는 요소를 끌어들였을까? 그 시대의 희곡 특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이 극에서는 절대자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이미 이 극에서 절대자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왕이 되었으며 왕비도 가졌다. 비록 부족한 점들이 있는 인간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으나 가질 것 다 가진 왕으로써 오이디푸스의 위치는 건재하다. 이러한 인물에게 갈등을 주기 위해선 더 커다란 존재가 필요하다. 그것이 신탁이다. 하지만 여기서 또 흥미로운 점은 직접적인 신탁이 아닌 ‘테이레시아스’라는 인물을 통해 오이디푸스에게 신탁을 전달했다는 점이다. 주인공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인물, 혹은 재산이나 계급적으로 보아 오이디푸스보다 하위에 있는 인물을 통해 그의 비극을 전달하는 것을 보라. 참으로 통쾌하고도 현명한 방법이다. 한 나라의 왕임에도 진실에 대해 알지 못하는 오이디푸스와 왕보다 낮은 존재임에도 진실을 알고 있는 테이레시아스의 대비는 극을 한층 재밌게 만든다. 이야기의 셋업부터가 흥미로우니 극의 전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점에서 신탁의 요소가 잘 사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고대의 작품이 이렇게나 세련될 수 있다니.이러한 예언을 배경으로 오이디푸스는 진실을 알게 된다. 그 끝은 파멸이다. 그의 엄마이자 아내였던 이오카스테는 자살을 했고, 오이디푸스는 눈을 찔렀다. 수많은 방법중에 눈을 찔렀다는 점도 너무나 흥미로운 점 중 하나이다. 소포클레스의 능력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극 속 ‘상징’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비록 그 상징성에 대해 대사로 내뱉는 것은 아쉬우나 어쨌든 의도적으로 그러한 상징성을 만들어내어 극 속에 넣었다는 것이 참 대단하다. 사실 오이디푸스의 죽음이라는 것이 별거 아닐 수 있다. 예언에 따라 오이디푸스가 파멸할 것은 자명한 것이니 길에서 객사를 하든 쿠데타로 사망을 하든 그를 파멸로 끌어들일 무수히 많은 방법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소포클레스는 그중에서도 ‘눈’을 찌른다는 아주 상징적인 행동을 인물에게 취한다. 참으로 현명하고도 대단한 능력이다. 현대에 살고 있는 본인이지만 먼지 풀풀 나는 고대의 그 문장 한 줄에 탄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