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 촬영 및 임치 계약서[ ](이하 ‘갑’이라 칭함)와 [ ](이하 ‘을’이라 칭함)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스튜디오 촬영 및 임치계약을 체결한다.제1조(계약의 목적)‘갑’은 ‘갑’이 소유 또는 보관하는 별첨의 촬영대상 물품(이하 ‘임치물건’이라 칭함)을 본 계약의 내용에 따라 ‘을’에게 스튜디오 촬영을 위하여 임치하고, ‘을’은 이를 촬영을 위하여 보관할 것을 수락한다.제2조(계약기간)본 계약의 기간은 본 계약 체결일로부터 본 계약에 따른 촬영 용역이 최종 완료되고 임치물건의 반환이 완료된 때까지로 한다.제3조(촬영 및 보관일시)[ ]년 [ ]월 [ ]일 ~ [ ]년 [ ]월 [ ]일제4조(촬영 및 보관장소)[ ]제5조(촬영비용)1. ‘갑’은 ‘을’의 임치물건 촬영에 대한 대가로 일금 [ 원/부가세 별도]를 지급하기로 한다.2. ‘을’은 [ ]년 [ ]월 [ ]일까지 위 제1항 금액에 대한 세금계산서를 발행하며, ‘갑’은 세금계산서 발행일로부터 [ ]일 이내 지급하기로 한다.제6조(‘을’의 업무)1. ‘을’은 ‘갑’이 요청한 내용에 따라 성실히 임치물건에 대한 스튜디오 촬영을 진행한다.2.제7조(검수)1. ‘을’은 ‘갑’과 협의하여 정한 시기 및 장소에 본 계약에 따른 촬영 결과물을 인도하거나 촬영 용역을 제공하여야 한다.2. ‘갑’은 ‘을’이 수행하는 업무가 ‘갑’이 요청하는 수준이나 내용에 부합하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을’에게 언제든 설명 또는 협조를 요구할 수 있다.3. ‘을’의 용역 수행 정도 및 내용이 ‘갑’ 요청하는 수준이나 내용에 부합하지 아니하는 경우 ‘갑’은 ‘을’에게 수정 및 보완을 요청할 수 있고, 이 경우 ‘을’은 자신의 책임과 비용으로 ‘갑’의 요구에 응하여야 한다.제8조(‘을’의 의무)1. ‘을’은 자신의 책임과 비용으로 임치물건을 보관할 의무가 있다.2. ‘을’은 자신이 제공하는 용역 및 그 결과물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증한다.3. ‘을’은 자신의 귀책으로 용역 결과물에 하자가 발생하는 경우, 무상으로 수정하거나 재작업할 의무를 부담한다.제9조(손해배상)1. 본 계약을 위반한 당사자는 그로 인하여 상대방에게 발생한 손해 전부를 배상하여야 한다.2. ‘을’은 임치물건이 별첨의 종류 및 가액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본 계약기간 중 임치물건이 분실 또는 훼손되는 경우 별첨 가액 상당의 손해를 배상할 것을 확약한다.제10조(계약의 종료)1. 일방이 본 계약을 위반한 경우 당사자에게 서면으로 그 위반행위의 시정을 요구할 수 있고, 위반 당사자가 시정일로부터 2주 이내 위반 사항을 시정하지 않을 경우, 상대방은 본 계약을 계약의 해제 또는 해지할 수 있다.
비밀유지계약서주식회사 ㅇㅇ(이하 ‘갑’)과 주식회사 △△(이하 ‘을’)은 을의 비밀정보 제공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비밀유지계약을 체결한다.제1조(계약의 목적)이 계약은 을이 ㅁㅁ업무(이하 ‘본건 업무’) 관련하여 갑에게 을의 비밀정보를 제공하는 경우 해당 비밀정보를 비밀로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제반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제2조(비밀정보의 정의)① 이 계약에서 ‘비밀정보’라 함은 본건 업무를 진행함에 있어 을이 갑에게 서면, 구두, 전자적 방법에 의한 전송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제공하는 모든 노하우, 기술, 공정, 도면, 설계, 디자인, 코드, 시제품, 데이터, 프로그램, 명세서, 아이디어, 사업정보, 경영정보 등 일체의 정보로서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정보 또는 자료를 포함하나 이에 제한되지 아니한다.1) 제조, 수리시공, 또는 용역수행 방법에 관한 정보 또는 자료2) 특허권, 실용신안권, 디자인권, 저작권 등의 지식재산권과 관련된 기술정보 또는 자료3) 시공프로세스 매뉴얼, 장비 제원, 설계도면, 연구자료, 연구개발보고서, 영업 자료, 고객 리스트 등 을의 사업정보 또는 자료4) 기타 을의 기술개발(R&D), 생산, 영업활동에 기술적으로 유용하고 독립된 경제적 가치가 있는 여하한 정보 또는 자료② 비밀정보란 비밀임을 알리는 문구(비밀 또는 대외비 등의 국문 또는 영문 표시 등을 의미)가 표시되어 있는지 여부, 비밀로 관리되고 있는지 여부, 유·무형의 여부 및 기록형태를 불문한다.제3조(비밀정보의 목적 외 사용금지)① 갑은 을의 비밀정보를 본건 업무의 수행 또는 본건 업무와 관련된 계약에서 정한 본래의 목적 및 용도로만 사용하여야 한다. 갑은 본건 업무를 위하여 사용하는 경우에도 필요한 업무 수행의 범위를 초과하여 임의로 비밀정보를 복제, 수정, 변형하는 등으로 사용할 수 없다.② 갑이 본건 업무의 수행 또는 본건 업무와 관련된 계약에서 정한 목적 수행을 위하여 을의 비밀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하고자 할 때에는 사전에 을로부터 서면에 의한 동의를 얻어야 하며, 그 제3자와의 사이에 해당 비밀정보가 비밀로 유지되어야 함을 목적으로 하는 별도의 비밀유지계약을 체결한 이후에 그 제3자에게 해당 비밀정보를 제공하여야 한다.③ 갑은 이 계약 별첨에 기재되어 있는 임직원들에 한하여 을의 비밀정보를 보유할 수 있도록 필요한 합리적인 조치를 다하여야 하며, 해당 임직원 각자에게 을의 비밀정보에 대한 비밀유지의무를 주지시켜야 한다. 이때 을은 갑에게 해당 임직원으로부터 비밀유지서약서를 제출받는 등의 방법으로 해당 비밀정보의 비밀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합리적인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할 수 있다.제4조(비밀정보의 비밀유지 의무)① 을이 사전에 서면(전자문서 포함)으로 동의하지 않는 한, 갑은 제공 받은 비밀정보를 타인에게 누설하거나 공개하여서는 아니된다.② 갑은 을의 비밀정보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물리적 설비 설치 및 내부비밀관리지침 마련, 정보보안교육실시 등 비밀정보를 보호하고 관리하는 데에 필요한 합리적인 모든 조치를 다하여야 한다.제5조(비밀유지 기간)이 계약은 이 계약 체결일로부터 [*]년 간 그 효력을 가진다. 단, 이 계약이 기간의 만료 등의 사유로 종료된 이후에도 [*]년간 효력을 가진다.제6조(비밀정보의 반환 또는 폐기방법)이 계약이 기간의 만료 등으로 종료된 경우, 을이 요청하는 경우 갑은 즉시 을의 비밀정보 원본 및 사본 일체를 을에게 반환하여야 한다. 단, 을의 선택에 의해 이를 반환하는 대신 폐기하는 경우에는 을이 요청하는 시점까지 이를 폐기하고 갑은 그 폐기를 증명하는 서류를 을에게 제공하여야 한다.제7조(권리의 부존재 등)① 이 계약은 을의 비밀정보를 제공받는 갑에게 비밀정보에 관한 어떠한 권리나 사용권도 부여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초기 불교의 현대 사회 윤리로서의 유의미성초기 불교 개괄초기 불교의 이론적 출발점이자 종착점을 이루는 근본문제, 곧 화두는 ‘괴로움’이다. 붓다는 인간의 삶이 괴로움인 것을 자각한데서 시작하여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다. 쉽게 말해보자.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다(생로병사). 인간은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영원히 살기를 바라거나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면서 삶에 집착한다(탐). 전자의 경우 불가능한 것을 희망하는 것, 달리 말하면 불가능한 것이 사실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 불가능한 사실임을 알면서도 (그 사실이 원하는 바와 다르기 때문에) 외면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서건, 그것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무상’함에 대한 ‘제대로’ 된 앎이 없기 때문이다(치). 무상에 대한 제대로 된 앎은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을 찾을 수 없고, 따라서 차마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이, 매순간 자각되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탐과 탐이 만족되지 못하는 데서 오게 되는 성냄(진)은 치를 조건으로 하며, 괴로움은 무상하다는 외부적 사실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무상한 것에 대한 내면의 집착에서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부적 교정을 통해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상태가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다.초기 불교의 도덕 체계적 성격과 현대 사회 윤리로서의 가능성그런데 붓다는 괴로움을 일으키는 탐진치를 ‘악’의 뿌리, 근원이라고 말한 반면, 탐진치가 제거되어 괴로움이 소멸한 상태인 열반에 대해서는 ‘선’이라고 표현하였다. 즉, 초기 불교는선을 목적으로 하여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도덕적 방법론(팔정도)으로 구성된 하나의 도덕 체계인 것이다. 나아가 붓다는 열반에 대해 행복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따라서 초기 불교에서 선한 것, 곧 도덕적으로 옳은 것과 행복한 것, 이로운 것은 같다. 혹자는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 항상 이왔다. 우선 초기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행하는 방식인 명상이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초기 불교는 사회참여성이 크게 결여되어 있고, 따라서 초기불교는 사회 윤리로서 부적합하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다. 그렇지만 붓다는 불교의 가르침과 수행방식을 주변에 널리 적극적으로 전하라고 했는데, 이는 초기 불교의 도덕 함양이 기본적으로는 개인적 차원에서 이뤄지지만, 개인에서 개인으로, 곧 사회전체로 확산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초기 불교는 생로병사라는 인간 생활의 보편적 문제, 바꾸어 말하면 인간 생명의 실존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 문제의식을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 윤리로서의 필요조건을 충족한다. 하지만 물론 초기 불교가 증명될 수 없는 형이상의 세계, 곧 종교적 믿음의 영역에 의존하여 도덕적 실천 원리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전생과 현생, 후생으로 이어진다는 윤회설과 업론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초기 불교는 논리적으로 상정, 추론하여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무아설과 연기설만으로도 도덕적 주체, 근거와 실천 방식을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현실세계 외의 세계의 유무와 결부되어 있는 영혼의 상주론, 단멸론, 중도의 논쟁을 벗어나서도, 초기 불교는 현실에서 모든 존재들은 조건에 의해 생멸한다는 법칙을 확인함으로써 사회 윤리의 논의를 충분히 진행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초기 불교의 사회참여성, 보편성, 객관적 설득가능성은 따라서 초기불교의 사회 윤리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무아설과 도덕적 행위 주체현대 사회 윤리로서 초기 불교의 유의미성을 본격적으로 검토하는 데 앞서 필수불가결하게 선결되어야 할 작업이 바로 초기불교에서 무아설과 도덕적 행위 주체의 문제이다. 일견 무아설은 도덕적 주체를 상정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아’가 없다면 누가 도덕적 행위를 하고, 누가 도덕적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겠는가, 행위의 담당자라는 개념을 적극 수용하는 것이다. 즉 초기 불교에서 도덕적 행위를 담당하는 나, 행위의 담당자는 인정되는데, 단지 바로 그 나, 행위의 담당자가 불변하거나 독립적이지 않을 뿐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혼란이 발생하는 것은 나, 행위의 담당자인 주체에 대한 언어 정의, 즉 언어가 함축하고 있는 내용의 문제, 그리고 통용의 문제 때문이다. 초기 불교가 비판한 힌두교의 나(아트만)와 서양 철학, 그리고 그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현대인의 사고에서 나와 주체라는 언어는 영원불변성과 독립성을 함의하는 것으로 정의되어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초기 불교에서는 나와 주체라는 개념을 영원불변성과 독립성의 의미가 배제된 변화하는 행위의 담당자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주체에 영원불변성과 독립성을 전제하고 있는 서양철학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초기 불교에서는 도덕적 주체가 상정될 수 없는 것이지만, 영원불변성과 독립성이 배제된 주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의내린 초기 불교의 입장에서는 도덕적 주체가 상정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붓다가 언어의 사용을 경계하고 최대한 침묵한 사실과 연관된다. 붓다는 현실에서 용어가 갖는 쓰임의 차이와 한계로 말미암아 진리에 대한 혼란이 오히려 가중되는 것을 염려한 바 있는데, 무아설과 도덕적 주체 문제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여전히 남는 문제는, 영원불변성과 독립성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나, 행위의 담당자, 주체가 어떻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고, 일관된 도덕적 수행을 지속할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다면, 어제의 내가 지은 죄를 오늘의 내가 책임질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는 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질문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것이 바로 정도, 강조점, 방점의 문제이다. 초기 불교에게는 서양 철학과 같이 자아의 영원불변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힌두교에 대한 비판이 중요한 과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불교는 영원불변성이 아닌 변화, 무상함,초기 불교에서도 도덕적 주체의 문제는 보다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연기설과 도덕적 실천 방식이론상 무아설을 철저히 따르면 자아 개념은 완전히 분해되고 해체되어 나, 혹은 자기라고 부를 것이 없고 너, 혹은 타자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다. 이것은 과학적 이론에서도 확인되는 부분이 있다. 미시적 차원에서 입자의 파동성을 관찰하면, 입자가 ‘있다’라고 생각되는 위치에서 파동이 가장 세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나머지의 아주 미세한 파동은 주변으로 무한히 퍼진다. 따라서 소입자는 그 자리에 ‘있다’라고 단정 짓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만물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거시적 차원에서 보아도 세계는 운동하는 것과 멈춰있는 것, 곧 중심과 주변을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중심, 기준이랄 것이 있지 않고, 물리법칙은 어디에서건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 상대성의 원리의 내용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아설에 따르면 궁극적으로는 중심, 자기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에 도덕 법칙, 도덕적 실천은 정도의 차이 없이 어디서건 동일하게 이뤄져야 한다. 이것을 현대 사회에 적용시켜보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인, 그리고 독립적인 개인이 생활하는 개인적인 삶의 공간인 사적 영역이 부정되고, 나아가 사적 영역이랄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반의어인 공적 영역이랄 것도 실은 존재하지 않게 되며, 오직 모든 영역에 대한 동일한 도덕 원리가 적용될 뿐이다. 이는 곧 사회 윤리의 최대윤리화를 의미하게 된다. 점차 다원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사회 윤리는 계속해서 최소윤리화 되어 왔고 프라이버시권이라는 이름하에 사적 영역에서의 사회 윤리는 지나치게 배타되어 왔다. 그렇지만 사적영역에서 옳은 것을 옳게 행하라는 사회 윤리의 요청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이들의 보편적 프라이버시권을 위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무아설에 이론적 바탕을 둔 사적영역에의 사회 윤리 확대 적용은 사적 영역의 비대화와 성벽화로 인한 현대 사회의 도덕적 위기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그쌓거나 도덕적 법칙을 실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앞에서 밝혔듯이, 자기를 위하는 것, 자기에게 이로운 것, 곧 행복이 타자를 위하는 것, 도덕적인 것, 곧 선이 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초기 불교에서는 자기를 위하는 것과 남을 위하는 것이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단지 그것이 옳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당위적 차원의 도덕적 실천이 아닌, 그것이 이롭고 옳기 때문에 도덕적 실천을 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당위적으로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이로움과 함께 도덕적 실천이 독려되는 초기 불교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도덕적 행위를 쉽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하게끔 이끌어낼 수 있는 사회 윤리로서의 장점을 갖는다. 나아가, 이는 온전히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혹은 베푸는 형태의 현대 사회의 시혜적, 자선적 복지 개념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런데 초기 불교에서의 사회아, 관계아는 기존 사회 윤리의 가장 강력한 근거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 개념과 유사해보일 수 있지만, 절대로 같지 않다. 도덕 교과서를 통해 대부분이 접했을 기존의 보편적 사회 윤리는,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 때에도 상호의존성이 인간들이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할 근거로서 제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호의존성에는 물리적 차원에서의 필요성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사람이 얼마만큼의 물리적 필요성을 제공하고 충족시켜주느냐에 따라서 상호의존성이 다르게 책정된다. 특히나 다수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는 물리적 필요성을 상대적으로 덜 충족시켜주는 인간이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물리적 필요성의 정도, 곧 상호의존성의 정도 차이도 심화되기 때문에 물리적 의미에서의 상호 의존성에 입각한 사회 윤리는 보편타당하게 적용되기 어렵다. 하지만 연기설에 입각한 상호 의존성은 생존적 차원, 존재론적 차원의 것이다. 즉, 타자가
‘공(公)법’과 ‘공동체주의’ 국가의 이론과 실제 : 상앙과 법가- 상앙과 법가에 대한 전체주의적 해석 비판 -< 목 차 >Ⅰ. 문제제기Ⅱ. ‘공(公)법’의 이론과 실제1. 풍속의 변화에 따른 ‘공적 제도’의 등장2. 법의 ‘공평무사함’ : 개별적 특권의 배제2.1. 상벌의 집행 : 일형 ? 일상의 원칙2.2. 토지제도와 세수개혁3. 공법 제정과 집행의 ‘객관성’ : 군주의 자의적 정치력 행사 방지4. 공법의 ‘절대성’과 무위(無爲)의 군주Ⅲ. ‘공동체주의’ 국가의 이론과 실제1. 우선순위의 설정 : “나라가 제일 중요하고, 다음이 민”2. 나라와 개인(民)의 관계 : 후견적 국가주의3. 사회 질서와 법적 안정성의 가치Ⅳ. 상앙과 법가 이론의 한계와 의의Ⅰ. 문제제기≪중국에서의 개인과 국가: 공자, 묵자, 상앙, 장자의 사상 연구≫의 저자 ‘비탈리 루빈’은 상앙과 법가를 전체주의 사상으로 본다. 여기서 전체주의란, 통치자 개인의 절대 권력을 위하여 국가가 백성의 삶의 영역에 전방위적으로 간섭하여 통제하고 그들의 인력을 착취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루빈의 견해에 따르면, 상앙의 국가는 백성들에 봉사한다는 생각을 애초에 거부하고 있고, 국가의 법은 오로지 함 사람, 통치자의 지배권 성취를 위한 것으로만 기능한다. 그러면서 “법가의 법이 백성들과 똑같은 정도로 통치자를 속박하고 있고, 그러므로 현대적인 법의 속성과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지적은 옳지 않다.”라고 언급하며, “법가들이 조국이라든가 공공의 이익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던 것”이라고 하는 Mei Yi-Pao의 말을 인용한다. 요컨대, ‘루빈’은 상앙과 법가의 이론은 오직 국가, 정확히 말하면 군주 한 명을 위해 모든 일반적 개인의 희생이 강요되는 전체주의로서, 이 때 법은 철저히 군주의 사적 권력 확장과 유지에 봉사하는 본질적으로 사적(私的)인 수단이라고 냉혹하게 비판한 것이다.그러나 이처럼 상앙과 법가의 이론에서 법과 사회질서의 유지가 오직 통치자의 사적 안위를 위한 지극히 사적인 수단과 극단적인 사적 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상앙과 법가의 법이 애초에 오로지 군주의 권력 안정화를 위해 사적으로 강구된 처세술적인 발명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상군서≫ “분수가 정해져도 제도가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금령을 세웠다. 금령을 세워도 이를 관리할 수가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관리를 세웠다. 관리가 세워져도 이들을 통일하여 다스릴 사람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군주를 세웠다.”여기서도 시대적 요구에 의해 먼저 금지령(법과 제도)이 세워지고, 이것을 관장하기 위해 관리가 세워지고, 또 이 관리를 통일하여 다스리기 위한 필요에 의해 군주가 최후에 세워지는 단계적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다시 한 번, 시대와 법의 필요적 요청에 따라 군주가 세워진 것이지, 그와 정반대로 군주의 편의적 요청에 따라 법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인식된 문제 상황과 해결책 : 사(私)적 이익의 추구와 공(公)법≪상군서≫ “나라가 혼란한 것은 백성들이 사적인 의로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군사력이 약한 것은 백성들이 사적인 용기를 발휘하기 때문이다.”≪상군서≫ “지금 통치자들은 대개 법을 버리고 사적인 의논을 따르는데, 이것이 나라가 혼란해지는 이유이다.”≪상군서≫ “지금 난세의 군주와 신하들이 모두 구구하게 한 나라의 이득을 독점하고 한 관직의 직권을 농단하여 그들의 사익을 도모하니 이것이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원인이다. 따라서 공사의 관계가 (국가) 존망의 근본이 된다.”≪상군서≫ “법이라는 것은 나라의 저울이다.…… 밝은 왕은 법에 의거하고 사사로움을 제거하여, 나라의 틈이 벌어지는 것이나 좀벌레가 없다.”결국, 상앙과 법가가 문제적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 불안과 나라의 혼란으로, 그것의 원인으로 파악된 것이 ‘사(私)적인 것의 추구’이다. 따라서 문제 상황의 해결책으로서 제안된 법은 정확히 ‘사적인 이익’에 대척점에 서 있는, ‘사사로움 없음’의 극치로서 엄격히 공익(common good)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험적으로제개혁은 사적 이익을 공적 이익으로 돌리는 일종의 재분배 효과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3. 공법 제정과 집행의 ‘객관성’ : 군주의 자의적 정치력 행사 방지법의 제정 : 군주의 공사(公私) 구분≪상군서≫ “백성이란 일의 시작을 함께 도모할 수는 없지만 이루어진 일을 함께 즐길 수는 있다.”≪상군서≫ “위대한 성취를 한 사람은 민중들과 더불어 계책을 논의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 지혜로운 자들이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에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상앙과 법가의 이론에서 법은 철저히 군주 개인의 결단으로 만들어지는 군주입법이다. 따라서 입법 과정에서 신하는 물론, 백성도 철저히 배제된다. 그러나 군주입법이라는 사실 자체가 곧, 법이 군주를 위한 사적인 수단으로 기획된 것임을 보여준다는 주장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군주입법도 천하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나름의 정당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인데, 특히 군주에 대해 상앙이 입법자로서의 엄격한 공사구분책임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똑같이 진정으로 백성과 나라 전체를 위하는 목적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입법에는 두 가지 상반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유가가 주장했듯, 백성의 여론과 지식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법가와 같이 백성의 여론이나 지식인의 의견에 휘둘리기 보다는 통치자가 단독으로 무엇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중요하고 필요한 것인가를 통찰, 판단하여 결정하는 엘리트적 방법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은 각각 선과 악의 방법이 아니라, 각자의 장단점을 가지는, 공익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서로 다른 방법일 뿐이다. 상앙의 경우, 백성 스스로가 당장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보다는, 진정으로 백성에게 이로운 바가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군주자의 역할이 중요한 것으로 본 것이고, 법의 제정에 있어서 귀족 혹은 지식인의 의견에 군주가 귀 기울일 경우 법이 오히려 그들의 사적인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변질될 부작용이 더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군주입법은 군 시행의 전제조건으로서 매우 강조한다. 상앙은, "군주는 국가의 통치를 위해 법을 제정하고 법을 행사할 수 있지만 법이 일단 제정되면 군주도 자신의 사욕 또는 임의에 의한 법의 남용 내지는 오용을 스스로 금지하고 법을 지키고 복종해야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관자≫ “현명한 군주는 법을 만들어 스스로 다스리고 의를 세워 스스로 자정한다.”≪관자≫ “군주를 위해 법령을 변경해서는 안 된다. 법령은 군주보다 존귀하다.”≪상군서≫ “군주든 신하든 사적인 이유로 법을 해석하면 이 나라는 반드시 어지러워진다.”이에 대해 ‘장현근’은 "법을 지키고 공적인 것을 숭상하라는 그의 외침은 근본적으로 군주권 강화라는 혐의를 벗을 수 없다. 군주 입법 하에서 아무리 공적인 일을 강조해도 군주 권력이 법보다 높은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다. 결국 최후에는 군주의 자의성과 사사로운 행위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유가에서 통치자로 하여금 덕치를 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통치자가 덕치를 따르지 않고 자의성과 사사로운 행위를 일삼을 경우에 그것에 대한 대안적 ‘제도’를 갖추지 않았다고 해서, 유가적 이론이 덕 위에 군주가 서게끔 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논리로, 법가에서 통치자로 하여금 법치를 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법치를 하지 않았을 경우 그것에 대한 대안적 ‘제도’를 미처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상앙과 법가의 이론이 법 위에 군주가 서게끔 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무위(無爲)의 통치자≪전국책≫ “효용이 18년 동안 상앙의 법치를 행하다가 병이 들어 일어서지 못하게 되자, 상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였으나 상군은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비탈리 루빈’은 상앙과 법가의 이론에서 통치자를 “권력을 향한 의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인간적인 자질을 상실한 채 활동하는 인간”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상앙과 법가의 통치자는 오히려 절대로 원하는 바를 드러내지 않는 ‘무욕’, 법 이외의 지혜를 말하지 않는 ‘무지’, 그리고 사사로운 마음을 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공동체와 사회의 유지와 안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공동체주의적 입장이 첨예하게 갈등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을 우선시 하든지 간에, 그 목적은 공통적으로 개인 모두를 위한 ‘공익(common good, 公同善)'의 달성에 있다. 유가가 개인 권익에서 출발하여 공동체의 공익을 달성하고자 하는 시도였다면, 법가에서는 개인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공동체의 유지 자체가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파악된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상앙과 법가를 전체주의 국가이론이라고 비난할 때, 주로 근거가 되는 점은 상앙과 법가가 공동체의 유지에 절대적인 우선성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사안만으로는 상앙과 법가가 전체주의 국가이론인지, 아니면 다소 극단화된 형태의 공동체주의 국가이론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따라서 여기서 규명되어야 하는 부분은 상앙과 법가에서 사회안정에 절대적 가치를 두는 것의 목적(end)을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이다. 쉽게 말해서, 사회질서의 안정이 군주 개인의 권력 안정화에만 좋은 것이냐, 아니면 그것이 개인 모두를 위한 것이냐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앙과 법가이론이 기본적으로 공동체주의 이론이라면, 사회가 우선적으로 안정되어야 개인도 보호된다는 통찰에서 사회의 안정을 최고의 목표로 하더라도, 이는 결국 개인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인본주의’와 본질적으로 같게 된다.부국강병을 통한 사회 안정의 공익(公益)적 효과≪상군서≫ “국가는 질서가 안정되면 반드시 강해진다.”≪상군서≫ “어떤 나라는 강성하고 어떤 나라는 쇠약한 것은 혼란함과 잘 다스림 때문이다.”≪상군서≫ “밖으로 공격할 수 없고 안으로 수비할 수 없는 나라에서 비록 순이 군주라 해도 이른바 나쁜 나라에 굴복하고 타협하지 않을 수 없다.”당시 시대적 배경을 고려했을 때, 국가는 개인의 존립 기반으로서 국가의 질서가 무너지면 개인의 자유 또한 보장 받을 수 없을 것이므로, 개인의 자유보다 사회 공동체 질서 유지가 우선해야 한다는 논리는 상앙에게 더욱 설득이다.”
철학개론 기말고사 : 자신의 인생철학을 담아 자녀에게 편지 쓰기우리 딸, “안녕?”엄마가 퇴근하면 우리 딸은 엄마한테 항상 “엄마, 잘 다녀오셨어요?”하고 묻는데^^문득, 바쁜 엄마를 ‘맞이하는’ 역할을 하는 게 언제부턴가 우리 딸만의 몫이 되어 버렸다는 걸 느꼈단다. 그래서 엄마가 이제부터는 우리 딸이 ‘안녕’한지 궁금해 하려고 해.얼마 전에 우리 딸한테 엄마가 물었었잖아? “딸, 딸은 어떻게 매일 일기를 써? 엄마는 귀찮아서 그렇게 매일 못 하겠던데. 엄마는 초등학교 때 의무적으로만 만날 썼었거든^^;;” 그랬더니 우리 딸이 그랬지? 방 안에 혼자 조용히 앉아서 글로 속마음을 다 털어내면 후련해진다고. 그 때 엄마는 순간 가슴이 턱 막혀 버렸단다. 우리 딸이 ‘대화’할 곳이 방 안, 종이 속 밖에 없었나. 그리고 우리 딸이 매일 뭔가를 털어낼 만큼의 아픔을 하루하루 쌓아가고 있었던가. 어쩌면 우리 딸이 엄마에게 “잘 다녀오셨어요?”라고 물을 때마다, 사실 그것이 엄마에게 “저, 조금 힘든 일이 있어요. 같이 고민해 주실래요?”라고 묻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어. 그리고 그런 절박한 신호를 외면당한 우리 딸이 혼자 ‘소통’의 부재에 얼마나 좌절해 버렸을지 생각하면 엄마는 무서워지기까지 한단다.그래서 엄마가 이제는 우리 딸의 걱정이 뭔지 같이 열심히 고민해 보려고!(불끈x2)이제 우리 딸, 고등학생이 되는데, 공부와 입시만이 삶의 목적이자 행복이라고 강요되는 그 희한한 공간에 솔직히 우리 딸을 보내주기 싫기까지 하기도 하단다. 입시 제도를 둘러싼 환경들은 대학이 이데아라고들 말하는 듯 하거든. 대학에 가면 완전한 삶을 살고,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 같이 포장되지.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많은 학원에 ‘아카데미’라는 이름을 붙여 자기 정체를 미화시켜 놓은 것인지도 몰라ㅎ. 하지만 엄마는 이런 대학에 대한 플라톤주의(엄마 마음대로 명명해 봤어, 괜찮지?ㅋ)가 불편하단다. 아주 쉽게 말해서, 대학이 이데아라면, 목적이라면, 그 이후에는 또 다른 목적을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겠지? 하지만 대학에 가서는 또 다른 목적을 위해 애써야 될 거야. 어쩌면, 행복을 위해 사는 것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엄마는 우리 딸이 이상만 달성하려고 아등바등하는 것보다, 삶을 행복하게 운영해 나가는 지금, 바로, 이 순간, 방식으로서의 행복을 잊지 않고, 직시하길 바라. 그런데 이런 선택은 비주류적인 것일 거야.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열정을 다 바치는 헌신은 찬양받지만, 현재적 여유를 즐겨보려는 시도에 많은 사람들은 불안해하거나 나태하다고 비난하는 경향이 강하거든. 방식으로서의 행복을 좇아 보려던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분이나 엄마 모두 사실은 이런 비주류적인 선택을 할 용기가 없었던 것인 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엄마는 목적을 위해 살면서도 그 목적에 지금 이 순간이 지나치게 희생되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아 왔단다. 성숙하지 못한 채 제자리를 답습하지 않으면서도, 오직 나중을 위해 지금을 지나치게 잃어버리지는 않도록- 그 균형점을 유지하고자 한단다. 그렇다면, 우리 딸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엄마는 일단 우리 딸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회의, 의심해 보려는 ‘의식’만이라도 있다면, 너는 너의 삶의 선택권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너만의 자유를 찾아 살아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엄마가 우리 딸 고등학교 보낼 걱정에 말이 길어졌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딸이 직접 고등학교 생활을 해보면서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눴음 좋겠어. 사실 오늘 엄마는 우리 딸하고 소통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어. 모든 고민, 상처를 공유하기 위해서, 전제되는 것은 ‘소통’일 것이니까. 엄마가 우리 딸을 이해하고, 우리 딸과 상담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제, 그것이 소통이겠지.엄마가 네 나이였을 때, 타인과 소통 할 수 없음에 너무나도 힘들어한 적이 있었어. 첫째로는, 그 때 엄마는 모든 사람들이 엄마를 ‘판단’하려 한다고 생각했었단다. 부모님이나 선생님들, 혹은 친척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엄마가 얼마나 착하게 구느냐, 엄마의 성적은 얼마냐, 몇 등이냐 등을 평가하고 있다고 느꼈어. 엄마는 그런 것들이 너무나도 지겨웠단다. 엄마를 지치게 했어. 후설의 말처럼, 제발 나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고, 나의 본질을 봐줄 수는 없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어. 둘째로는, 엄마가 중학교 3학년 때, 반 친구들끼리 싸운 적이 있단다. 다수와 한 명이 대치되어서, 한 명이 따돌려지는 식이었지. 엄마는 다수가 한 명을 욕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엄마는 다수 쪽과도, 그 한 명과도 모두 어울리려 했지. 엄마는 나름 중립자, 중재자의 역할을 자처했던 거야. 하지만, 다수 쪽에서는 엄마를 가식적이라고 어느 순간 부르더구나. 엄마는 혼란스러웠어. ‘내가 정말 가식적인 것인가?’타인과 소통할 때, 그들은 끊임없이 나를 재고, 저울질하고, 판단하고, 상처를 냈지. 그래서 엄마는 소통의 단절이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했다. 밑에는 그 때 엄마가 쓴 글이란다.그곳에서 비로소 나는 나일 수 있었다. 억지로 웃을 필요가 없었고 굳이 착한 행동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나를 판단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나도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저 내 본래의 모습대로만, 가장 편안한 상태의 나로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나에게 있어 방은 단순한 쉼터, 혹은 피난처의 의미를 뛰어 넘었다. 나의 방은 오직 나만을 위한 공간이었고, 그 안에서만큼은 내가 주체였다.나는 너무나 피곤했다. 선생님들에게 착실한 학생인 나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친구라는 이름표를 붙인 사람들에게 웃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나를 짓눌러 왔다. 나는 방에 돌아오면 그대로 지쳐 쓰러졌다. 방은 나를 위로해주었고,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쓰다듬어 주었다. 그 때 생각했다. 방에만 있으면 이렇게 계속 행복할 것이라고. 그 이후로 나는 항상 방 안에서만 살아가기로 결심했다.교실에서도 나는 나의 방에 있었다. 그들은 나의 방을 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나의 방 안에 있었다. 내가 문을 열어 주지 않는 한, 그들은 나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나는 나의 방에서 방 밖에 있는 사람들을 밑으로 내려다 봤다. 그들과 소통할 것인지의 여부-방문을 열어주는 허락의 열쇠-는 이제 오직 내 선택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원치 않는 사람, 어쩌면 나 이외에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 역시 받지 않았다. 가끔은 답답했지만, 고통을, 상처를 피할 수만 있다면 그 정도쯤이야 감내할 수 있었다. 방은 나의 최대 방패였다. 나는 방문을 더욱 굳게 걸어 잠갔다. 참 안전했다.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겨났다. 그 날 나는 분명 ‘그’에게 나의 방문을 열어 줬다. 내 방 안에 ‘그’가 들어오는 것을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그는 나의 방에 들어오기를 거부했다. 나는 방문을 열었지만, 나의 방의 크기는 너무나 거대해지고 두꺼워져서 ‘그’에게 겁을 주었다. 내가 선택적으로 소통하겠다고 오만하게 구는 동안, 나의 방은 나의 소통 능력을 가로챘다. 방이 나를 삼켰다. 나는 방이라는 공간 속의 사람으로 남았지만, ‘그’는 현실의 사람이었다. 나는 현실에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나약해져 있었고, 현실의 ‘그’ 역시 나를 이해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현실과 대화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나는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전달할 수 없었다. 말하기 전에 눈물부터 흘렸고, 거칠어진 호흡에 소통 기회를 늘 놓쳐 버렸다. 화해하는 법을 몰라 현실의 ‘그’에게 다시 한 번 상처부터 냈다.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방 안에 있다. 그리고 밖을 본다. 현실이 보인다. 서로 부딪치다 상처를 입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치유하면서 강해지는 ‘그’들을 ‘바라’ 본다. 방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는 나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과 열등감. 소통할 수 없는 무기력감과 소외감에 잠겨 간다. 방 안에서 울고 있는 나의 목소리는 두꺼운 방의 콘크리트 벽을 뚫지 못하고 또다시 방 안으로 반사되어 돌아온다. 또다시- 평화의, 지옥의, 한계의, 참을 수 있는, 참을 수 없는, 내 방이다. 다시 이 곳이다. 끔찍하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