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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근대사 레포트(근대인에 관하여)
    전혀 근대적이지 못한 근대인근대인하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더 시민적이고 계몽되어있고 더욱 열려있는 그러한 이미지를 생각하기 쉽다. 물론 나 또한 그랬다. 근대인이면 당연히 중세보다 더 좋은, 더 신사적인 그런 이미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착각은 서울대 교수인 주경철 교수의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깨지게 됐다. 이들은 내 생각보다 미개했으며 잔혹했고 몰상식했다. 그들은 종교(특히 가톨릭)에 너무 심취해있었고, 이러한 종교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헤치는 것에 익숙해져있었다. 저자는 어떻게든 중립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한 게 눈에 보였지만, 잔혹한 사실은 차마 어떻게 할 수 없었나 보다.저자가 가장 처음으로 서술한 사람은 바로 피렌체의 유명한 가문인 메디치 가문의 사람이기도 하며, 프랑스의 왕비이자 대부분의 자식들을 왕으로 만든 여인이다. 그녀는 왕비가 될 일이 없던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프랑수아 1세의 아들인 제 2왕자 오를레앙 공작 앙리와 결혼하게 되었고, 오를레앙 공작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의 형인 제1왕자 프랑수아가 오래 살지 못하고 죽은 탓에 차남이 프랑수아 1세의 뒤를 잇는 앙리 2세로서 프랑스 왕좌에 오른다. 하지만 앙리 2세도 오래 가지 못한다. 마상 창 시합을 하던 도중 중상을 입고 죽고 만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아들인 프랑수아 2세가 왕위를 물려받지만 나이가 어린 탓에 카트린이 섭정을 한다. 그녀는 확실히 정치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여인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신교인 위그노와 구교인 가톨릭의 분쟁이 상당히 심각했다. 물론 카톨릭의 힘이 절대적으로 강했고 그녀는 가톨릭을 견제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당연히 이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고, 그녀는 신교도들과 구교도들의 갈등을 이용하기만 한다. 이렇게 중요한 때에 병약했던 프랑수아 2세가 즉위 1년 4개월 만에 사망하고 뒤를 이어 동생인 차남 샤를 9세가 왕이 된다. 그녀는 바시의 학살을 일으킨 기즈 가문과 연합하여 샤를 9세와 협력관계이던 개신교도들의 암살계획을 방조하게 되었다. 샤를 9세는 카트린과 기즈 공에게 설득당해 콜리니 암살계획에 협조한다. 결국 이로 인해 최악의 사건인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일어난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 이사건과 관련된 삽화를 보고 속이 메스꺼울 정도로 엄청나게 잔인한 사건이었다. 신생아를 죽여서 던지고, 여인을 토막 내서 끌고 다니고, 결혼을 축하하러 온 콜리니를 죽여서 그의 성기를 들고 다니는 등의 엽기적인 행위들이 일어난다. 저자는 이를 여러 가지 측면으로 생각하고 그녀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섭정을 맡은 왕의 모후이고 왕이 자신의 아들인데 이러한 학살을 막지 못했다? 절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녀의 명령 한마디면 살인을 자행하던 이들을 말리거나 포박하여 잡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분명 그녀의 정치적인 견해가 담겨있던 것이 분명하다. 아직은 위그노의 사상은 프랑스 왕정에 위험하고 가톨릭의 편에 서서 왕권의 강화를 노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나는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하여튼 이렇게 학살이 끝나고 샤를 9세는 대학살 당시의 아비규환을 떠올리는 환청에 시달렸고 스스로를 살인마라 성토하면서 정신적으로 급격하게 약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건강 또한 안 좋아지기 시작해 폐결핵 증상을 보이다가 2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것이 그의 동생인 앙리 3세이다. 앙리 3세는 위그노를 중용하려는 정책을 펼치려 했고, 당연히 기즈 가문과 부딪히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기즈 형제를 초대해놓고는 암살해버리는 기행을 저지르는데, 당시 몸이 좋지 않아서 앓아 누워있던 카트린은 그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고 한다. 기즈를 죽이고는 앙리 3세는 어머니인 카트린에게 와서 기즈를 죽였다고 말했다. 이에 충격을 받아서인지 카트린은 얼마 가지 않아서 죽는다. 물론 카트린이 행한 모든 것은 왕가를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아들들의 왕권과 발루아 왕조를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임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녀는 종교 갈등을 몰라도 너무 몰랐고, 그로 인한 학살 방조는 분명한 그녀의 책임이다. 그녀가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수만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나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후로 더 이상의 학살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착각마저도 금방 깨지고 말았다. 바로 마녀사냥이 등장한 것이다. 마녀사냥의 피해자는 시장부터 동네 늙은 여성까지 굉장히 광범위했다. 이 또한 가톨릭 측에서 행한 일인데, 이들은 점차 세력이 줄어드는 것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추측컨대 조금이라도 교리에 벗어난다거나 그러한 소문이 돌면 바로 마녀로 뒤집어씌워 죽임으로써 권위를 세운 것이다. 이들은 굉장히 잔혹했다. 근대를 떠나서 ‘어떻게 종교인이 이럴 수가 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책에는 디트리히 플라데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는 귀족 출신 법률가로 뢰벤과 오를레앙에서 수학한 후 슈파이어의 제국의회에서 박사 자격으로 일했다. 그는 재판관으로 일하면서 몇 차례의 사형선고를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좀 더 깨어있던 사람이었는지 고문을 비판했고 피고인들을 온건하게 대우하였다. 그는 마녀재판이 일어났을 때에도 어린아이가 이상한 증언을 하자 제동을 걸려고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그는 반격을 당했고, 그를 마녀집회에서 보았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등장했다. 겁에 질린 플라데는 시외로 도주하지만 잡히고 자신의 죄를 모두 인정하고 참회한다고 말한다. 당연히 통할 리가 없었고, 결국 그는 교수형에 처해지고 그의 시체는 불에 태워진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나는 이를 읽으면서도 ‘이게 실제란 말인가? 근대에 이러한 일이 저질러졌다고?’라고 생각을 거듭 하였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었다. 이보다 더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 바로 전(前) 시장인 사람이 마녀로 몰려서 죽은 것이다. 바이에른 지방의 밤베르크 시의 시장이었던 요한네스 유니우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이 마녀로 몰리자 당당하게 자신이 마녀집회에 간 것을 본 사람이 있으면 데려와 보라고 호기롭게 말한다. 그런데 그의 바람과는 달리 다수의 증인이 등장하고 만다. 심지어는 그의 동료였던 게오르크 아담 한 박사는 1년 반 전에 시 청사 대회의실에서 열린 마녀집회에서 유니우스를 보았다고 증언한다. 결국 유니우스에게 엄청난 고문이 가해진다. 엄지손가락 죄기, 다리를 죄기 등이 행해진다. 유니우스는 끝까지 결백함을 주장하는데, 결국에는 가장 심한 고문인 스트라파도를 시행한다. 이는 사람의 팔을 뒤로 묶어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가 뚝 떨어뜨리고는 중간에 줄을 낚아채는 고문인데, 어깨를 비롯해 몸의 여러 관절에 탈구를 일으킨다. 책의 삽화를 보고는 정말로 과장하지 않고 내 어깨를 만지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나는 끊임없이 생각하였다. 이게 근대인인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이 근대인인가. 중세 아니 고대만큼 미개한 행동을 어찌 그들이 자행하는가. 결국 유니우스는 고문에 굴복하였고 자신이 기관장을 맡았던 곳에서 화형에 처해지고 만다. 그는 자신의 딸인 베로니카에게 편지를 썼는데, 여기서도 고문이 얼마나 심하게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스트라파도를 8번이나 당했던 경험을 그는 “하늘과 땅이 다 끝나버리는 줄 알았다”라고 서술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주교 지배자들은 ‘고문과 처형이 곧 구원이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들은 신성한 국토를 지키려 할 때 이를 저해하는 죄인들을 박멸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쳤다. 다시 말하면 마녀로 몰아서 고문하고 죽이는 것은 이 땅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고, 죽임당하는 이들도 이로 인해 구원을 받는다는 얘기다. 이러한 마녀사냥도 결국에는 종식되는데 이는 종교의 개혁이 아닌 사법의 개혁으로 인해 종식된다. 사법개혁을 일으킨 사람으로는 프리드리히 슈페가 대표적이다.
    인문/어학| 2021.04.27| 3페이지| 2,000원| 조회(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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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국의 정치 독후감
    건국의 정치 독후감 ? 난세도래(亂世到來)공민왕 사후의 시대는 난세라는 말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난세에는 늘 그래왔듯이 영웅이 출현한다. 삼국시대의 조조, 원소, 유비 등이 있었듯, 우왕 대에는 이성계, 최영 등의 걸출한 무장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누구나 그랬듯이 이들은 왕에 충성을 바쳤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도 처음에는 고려에 대한 충심이 최영 못지않았다. 심지어 위화도회군 당시에도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시킬 생각도 없었다. 우왕이 평소처럼 여색을 탐하고 가만히 있었다면 아마 우왕은 조금이라도 더 왕의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왕은 평소와는 다르게 갑자기 판단력이 좋아지고 결단력까지 갖춰서 회군한 무장들의 집을 습격한다. 아쉽게도 무장들은 여전히 숭인문에 머무르고 있었고, 결국에는 습격이 실패로 돌아간다. 우왕에 대해서 별 생각 없던 무장들은 이 습격을 계기로 우왕과는 상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우왕을 폐위한다. 그리고 조민수와 이색의 추대로 창왕이 왕이 된다. 하지만 창왕도 결국에는 우왕의 아들인지라 이성계 일파는 창왕도 폐위시킬 명분을 찾고 있었고, 1389년 전 대호군 김저와 전 부령 정득후가 여주로 폐위된 우왕을 만나 이성계를 살해하라는 부탁을 받고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었고 이를 계기로 창왕도 폐위된다. 그렇게 공양왕이 옹립되지만 3년 만에 폐위되고 이성계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이로써 고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조선이 등장하게 된다. 조선이 건국되자 공양왕은 원주로 방치되었다가 간성군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으로 강등되었고, 1년 뒤 삼척부로 옮겨졌다가 그곳에서 살해된다.위화도 회군 전까지도 최영은 이성계를 자신의 정치적 파트너로 생각했다. 최영은 그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백성에 대한 배려 등을 이유로 그를 높이 평가했다. 또한 명망과 정치적 영향력에서 최영과 비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최영에게 정적이 될 수 없었다. 더구나 성장하는 이성계의 군사적 영향력을 자신이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영은 우왕과 고려에 대한 충심이 너무 강했던 탓에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였고, 결국엔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한다. 물론 후대에 의해서 최영은 충신으로 추앙받지만 그의 판단실수로 고려의 수명이 더 짧아진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한다.
    독후감/창작| 2021.04.27| 1페이지| 1,000원| 조회(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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