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개혁1. 광무개혁의 개요1897년 대한제국을 건국한 고종 황제가 시행한 근대화 개혁을 말한다. 고종의 연호를 사용한 광무 시기는 고종이 퇴위한 1907년까지의 기간이지만 1905년 을사조약 때부터 외교와 군사 부문에서 제약을 받았다. 광무개혁으로 한성부였던 서울의 모습은 급격히 변화하였고 지방은 13도로 개편되었다. 대한제국군이 창설되었고 12개의 신문발행과 시가지의 정비와 근대건축, 전기 ? 전신 ? 전차 도입과 같은 기간산업을 도입하였다. 공문서를 국문화 ? 국한문화하였고 근대 관립 ? 사립 ? 기술 ? 사범학교를 설립하였다. 국산은행을 설치하고 국산기업의 설립을 장려하여 상공업을 진흥시키는 등 빠르게 근대화하였다.광무개혁의 이념은 동도서기론이나 중체서용론에 기반한 구본신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한제국이 갑오개혁 이전 옛 제도로 복귀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신분제 철폐를 뒷받침하는 법적 조치나, 조세 및 토지 제도의 개혁, 아울러 탁지부를 중심으로 한 재정 운영 체계는 광무개혁이 갑오개혁의 일정 부분은 그대로 계승하였다. 여기에 을미개혁 때 실패했던 단발령을 재개하고 복식을 개편하였다.광무개혁의 복고적 경향은 왕권 강화의 측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갑오·을미개혁에서 왕의 지위는 개혁 이전에 비해 상당 부분 제한되었으나 아관파천 직후 새 정부는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899년 「대한국제(大韓國制)」가 제정, 반포되었다. 대한국제에 의하면, 국왕(또는 황제)은 무한불가침의 군권(君權)을 향유하며, 입법·사법·행정·사전(赦典)·강화·계엄·해엄에 관한 권한을 가진다고 규정하였다. 이는 격하된 왕권의 지위를 복고시키는 한편 구미국가의 절대왕정체제를 모방하여 왕권의 전제화를 법제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었다.광무개혁은 근대 개혁 중 다양한 측면에서 나름대로 효과를 본 유일한 개혁이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상황은 위협적이었고 그만큼 변화도 빨랐다. 광무개혁 이전에 방문했던 외국인 기자와 선교사들은 몇년 사이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을 얻었다. 1898년 이후에는 영국과 일본이 가세하였는데 열강의 이권침탈은 한반도 주변의 세력관계와 관련이 있었다. 특히 아관파천기의 이권문제는 러시아의 대일견제에 따른 외교적 조처에 의한 것으로, 러·일 대립의 결과에서 파생된 현상이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이권침탈로는 미국의 경인철도부설권과 평안도 운산금광채광권, 프랑스의 경의철도부설권, 독일의 강원도 당현금광채광권, 그리고 러시아의 함경도 경원과 경성 일대의 광산채굴권과 압록강,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등을 들 수 있다.이러한 상황이 벌어질 당시 정부는 개항 이래 청국과 일본의 대립하여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특히 청·일 전쟁 이후 거듭 왕궁이 유린되는 등 군사 ? 재정적 기반이 극도로 취약해진 정부로서는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 대응책은 첫째, 대외적으로는 ‘이이제이’식의 다변외교와 이권양여를 통한 외국의 지원모색, 둘째, 대내외적으로는 ‘상징(물)의 조성’과 언론 ? 집회의 지원을 통한 자주독립 의식의 환기와 배외운동, 셋째, 대내적으로는 군주로의 권력집중을 통한 정책의 추진 등이었다. 대한제국의 선포와 이후에 취해진 정부의 정책은 바로 이러한 대책의 일부이자 핵심인 것이었다.3.광무개혁의 전개3-1) 황제 중심 권력구조의 강화대한제국을 건국한 이후 고종은 측근 관료세력을 중심으로 권력기구를 만들었다. 이들은 고종의 개화정책기구인 궁내부의 궁내관으로 주로 등용되어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고, 원수부 산하에 측근 인물들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개혁 기구는 서양의 근대적인 관료제와 상비군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근대적인 경제체제를 위한 산업진흥정책의 지휘도 측근세력인 이용익을 중심으로 한 궁내관들이 담당한다. 개혁의 중추 기구인 궁내부 산하에는 궁내부 아래에는 군사기구로 원수부(元帥府)와 경찰기구로 경위원(警衛院), 재정기구로서 내장원(內藏院) 등을 설치하여 근대화 사업을 실시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1899년 황제가 군권력을 장악하고자 원수부를 설치한 것은 황제 중심의 근대적 군대로 개하였다.갑오개혁 때 신설되었던 통치 기구이면서 개혁 기구였던 궁내부(宮內部)는 을미개혁 때 궁내부 기구가 재편성됨과 더불어 광무개혁에서도 개혁 기구로서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궁내부의 사람들은 대체로 외국 유학생 출신으로 근대교육을 받은 자였고, 그 중 근대화 개혁을 추진한 관료들은 문과출신으로 근대문물을 습득한 관료층, 무과 출신의 고종을 호위한 경력이 있는 친위세력, 황실과 특수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광무정권의 핵심적 정치세력으로 이들을 통하여 황제 중심의 권력구조와 더불어 근대화 개혁이 이루어졌다.또한 보부상 세력과 고종측근 관료세력 등이 결탁하여 설립한 황국협회(皇國協會)가 근대적 제조업과 회사설립 등을 통하여 근대화 개혁을 착수하려 한 것을 통하여 황실중심의 봉건 지배층이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수행하려 함으로써 외국인의 경제적 침략을 방지하고, 자본을 집적하고 근대화로 나아갈 수 있게 하였다. 이를 통하여 고종 측근 관료세력들은 서구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인 개혁 사상과 특권상인중심의 자본주의적 개혁의지를 통해서 근대사회로의 이행에 주된 역할을 담당하였다.3-2) 행정 교육 부분이 시기 대한제국은 서울 도시개조사업을 강력히 추진했다. 1896년 9월 28일 내부령 제9호 '한성부 도로의 폭을 규정하는 건'을 발령하고 주미 공사를 2년간 지냈던 이채연이 한성부판윤을 맡아 추진하였다. 그는 워싱턴 D.C.를 모델로 하여 지금의 서울시청 일대를 방사형 도로로 만들고 간선도로를 연결시킨다. 현재의 광화문 광장과 시청 앞 광장의 모습은 이 때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황토현(현재 광화문 부근) ~ 흥인문, 광통교(광교) ~ 남대문의 도로 폭을 50척으로 하였고 기존의 도로를 침범하는 무허가 가옥을 철거시키고 도로에서 상거래를 하는 행위들을 철저히 금지했다. 오수를 처리할 배수시설과 수도도 정비하였다. 고종에 반대하던 독립협회조차 서울개조사업에 관해서 칭찬하는 기고를 신문에 실었다.1887년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가 경복궁 내 건청궁에 가설한 전등은련하기 위해선 세금제도 개선과 세율을 끌어 올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토지는 조세에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만큼 필수적이어서 이에 대한 논의로 1898년부터 1904년까지 전 국토를 대상으로 양전사업과 지계발급사업, 역·둔토 정리사업을 실시하였다.1898년 6월 23일 내부대신 박정양과 농상공부대신 이도재는 토지측량을 건의하면서 양전사업의 찬반이 대립하였다. 의정부 회의에서는 박정양을 포함한 4명이 찬성한 반면 시행이 힘들다는 6인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최종 검토한 고종은 직권으로 결정하여 양전아문과 관련규정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대한제국이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을 광무양전이라 한다.이 때부터 집세 개념이 등장하여 서울은 가옥세가 부과되었다. 또 당시 외국인들은 땅주인이 불분명한 국내의 땅을 사들여 분쟁이 잦았는데 이에 외국인이 소유한 나대지는 원천적으로 불법으로 규정하여 통제를 강화한다는 규정을 세웠다. 다만 외국인이 현재 거주 중인 집에는 소유권을 허용하였다.1899년 4월 1일 남대문을 시작으로 서울 측량이 진행되었다. 이어 청계천에 이르는 도로 인근과 외국 공관, 교회, 상점 등 외국인 거주지도 측량하였다. 측량이 진행되면서 각국 공사관과 외국인들은 이 사업에 관심을 가졌으며 일본 공사관에서는 외국인 토지 소유에 대해 합법화를 요구했다. 1899년 6월 20일에는 아산군에서 3개월동안 시범양전사업을 하였고 이후 전국에서 양전사업이 진행되었다. 그렇게 124개 군에서 양전이 완료되었고 양전아문 이후 설치된 지계아문은 94개의 양전을 완료하여 1903년까지 218개 군에서 양전을 완료하였다. 이 광무양전으로 종래의 토지보다 훨씬 많은 토지를 찾아냈으며, 호구와 가옥조사도 병행해서 진행되었다.양전 사업이 소유주와 경작자 파악이라면 지계발급은 그 소유권을 국가가 공인하는 사업이었다. 각 군마다 양전이 완료됨에 따라 1902년 1월에 지계아문이 출범하였고 곧 양지아문과 통합하여 양전사업과 지계발급사업을 같이 담당하였다. 지계아문의 양전사업에서는 양전척1903년 발행)은 또 금도금금화로 제작되었고, 반원(1899년, 1901년 발행)은 은화, 5전은 백동화, 1전(5전, 1전 모두 1902년 단년도 발행)이 청동화로 발행되었다. 이 때의 본위화폐는 금화였다. 잘못 알려져 있는 메가타가 금본위제를 처음 도입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문제는 다시 나온다. 조선에는 금이 부족했다. 금화의 생산량은 적었고, 기존의 백동화를 포함한 화폐들은 회수되지 않았다. 사실 금본위제를 본격적으로 실행하려면 러시아와 합작해서 한러 은행을 설치하거나 이후에 중앙 은행 설치 등이 따라야 했으나, 독립 협회가 크게 반대했고 러시아의 의욕도 부족해서 엎어진다. 교과서에서는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막아냈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에서 일본 국립 제일 은행이 제일 이득을 봤다. 당시 대한 제국은 국립 중앙 은행이 존재하지 않아서, 중앙 정부의 자금 상당수를 일본 제일 은행의 한양 지점에 예금하고 있었고, 이는 일본 상인들에게 대출되고 있었다. 때문에 한러 은행 설치는 일본 제일 은행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었는데, 독립협회가 이 한러 은행의 설치를 반대하면서 무산되어 버렸다.한양의 근대적 변모는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해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한제국 초기에 농상공부가 주관해 심혈을 기울인 업무는 제언(堤堰·둑) 수축을 통한 농업용 저수지 건설과 황무지 개간이었다. 동시에 양잠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농업·양잠업 진흥정책에 힘입어 농림회사들이 잇따라 창설됐다. 농림업 부문 최초의 회사는 1899년 정부 관리와 유학생 출신들이 함께 세운 ‘대한제국인공양잠합자회사’였다. 합자회사라는 명칭도 이 회사가 최초다.(황성신문 1900.11.21) 이후 개간회사·목양사·양잠회사(1900), 농업회사(1901), 농광(農鑛)회사·인공잠농회사(1904) 등이 속속 등장했다. 활발하게 근대적 농업회사들이 설립됐다. 그러나 을사조약에 따라 일본이 통감부를 설치해 내정을 간섭했기 때문에 더 이상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 없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