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다양한 음식1학기 동안 2강부터 7강까지 ‘일본과 일본 문화의 이해’ 강의를 통해 지역과 사회에서부터 연중행사, 그리고 의복·음식·주거 문화까지 일본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이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주제는 6강, 다양한 음식의 종류와 특징에 대해서 알아보는 ‘음식 문화’였다. 먹는 것을 좋아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큰 행복감을 느끼는 나에게는 당연히 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주제이다. 이 주제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이 외에 다양한 음식에 대해서 알아보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여, 책에서는 소개되지 않은 몇 가지의 일본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해보았다.1. 소바소바는 일본어로 '메밀'을 뜻하며, 메밀가루 반죽을 밀대로 펼쳐 말아 접어 길고 가늘게 썬 면을 의미한다. 오늘날에는 소바를 주재료로 만든 면을 소바키리라고도 부른다.소바의 주재료인 메밀은 조몬 시대에 전해졌는데, 그 당시에는 메밀을 익반죽 방식으로 익혀 먹는 소바가키 방법으로 요리하였다. 메밀 등 다양한 곡식의 가루로 면을 만드는 방식은 가마쿠라 중기 때, 유학을 떠난 일본의 승려, 송의 무역 상인, 그리고 중국 승려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도 시대에 찰기가 거의 없는 메밀을 제면하는 방식이 알려지면서, 소바는 전국적으로 빠르게 전파되어 대중적인 음식으로 정착하게 되었다.소바는 보통 먹는 방법과 소바 가루의 비율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뉜다. 먼저, 소바 가루의 비율에 따라 쥬와리 소바와 니하치 소바로 나눌 수 있다. 쥬와리 소바는 메밀가루를 100% 사용하며, 메밀 특유의 맛과 향이 진하고 면이 빨리 퍼진다. 니하치 소바는 메밀가루 80%와 밀가루 20%를 배합하여 사용하며, 쫀득하고 탱글탱글한 식감을 가진다. 먹는 방법으로는, 차갑게 먹는 츠메타이 소바와 뜨겁게 먹는 아타타카이 소바로 나뉜다. 또한, 채반에 건진 면을 츠유에 찍어 먹는 모리 소바, 모리 소바에 김 가루가 추가된 자루 소바, 그리고 자루 소바에 덴푸라가 추가된 텐자루 소바 등이 있다. 철판에 고기와 야채를'굽다'를 뜻하며, 밀가루 반죽에 원하는 재료를 넣고 철판에서 구워 소스를 뿌리고 가츠오부시를 올려 먹는 요리이다.오코노미야키의 원형인 후노야키는 쇼쿠호 시대에 등장하였는데, 밀가루 반죽을 철판에서 굽고 그 위에 미소를 발라서 말아 먹는 것이었다.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에는 밀가루 반죽을 얇게 굽고 재료를 올려 익힌 후 소스를 발라서 말아 먹는 돈돈야키가 등장했다. 간토대지진 이후 도쿄에서 구하기 힘든 쌀 대신에 오코노미야키를 먹게 되었고, 오사카로 전파되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돈돈야키와는 재료가 섞인 밀가루 반죽으로 요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며, 현대에서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면서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다.오코노미야키의 종류는 크게 지역에 따라 간사이풍과 히로시마풍, 그리고 재료와 만드는 방법에 따라 몬자야키와 모단야키로 나눌 수 있다. 간사이풍 오코노미야키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오코노미야키로, 밀가루 반죽에 잘게 썬 여러 재료를 섞어서 굽는다. 히로시마풍 오코노미야키는 얇은 반죽에 많은 양의 양배추와 여러 재료를 소량 쌓아 올리면서 굽는다. 간사이풍 오코노미야키는 밀가루 반죽과 양배추의 양이 1:1의 비율이지만, 히로시마풍 오코노미야키는 밀가루 반죽과 양배추의 양이 약 1:4인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모단야키는 간사이풍 오코노미야키에 중화면을 넣고 구운 것으로, 큰 포만감이 주어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다. 몬자야키는 여러 재료를 철판에서 굽다가 밀가루 반죽을 붓고 잘 섞어 구운 것으로, 보통 도쿄에서 많이 먹으며 간사이풍 오코노미야키보다 가볍게 먹을 수 있다.대표적인 간사이풍 오코노미야키를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오코노미야키용 밀가루, 다시 국물, 그리고 간 참마를 넣어 기본 반죽을 만든다. 이에 채 썬 양배추, 계란, 텐카스, 그리고 생강 절임을 넣고 잘 섞어 준다. 기름을 두른 철판에 반죽을 올리고 구운 후 이 위에 고기를 올리고, 양배추에서 수분이 나올 때 반죽을 뒤집어 구워준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뒤집고 나서, 윗면에 오코각으로 잘라 헤라로 떠먹지만, 도쿄에서는 피자 조각으로 잘라 먹는다. 오사카에서는 오코노미야키를 밥과 함께 먹기도 한다.간사이풍 오코노미야키 히로시마풍 오코노미야키 모단야키몬자야키 오사카 도쿄3. 돈부리돈부리는 전용 용기인 돈부리바치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큰 그릇에 밥을 담고 그 위에 여러 재료를 얹어 먹는 덮밥이다. 한국의 덮밥과 다르게, 비벼서 먹지 않는다.돈부리는 무로마치 시대 때 유래된 것으로, 밥 위에 다섯 가지의 재료를 올려 왕실이나 무사들이 먹었다고 한다. 에도시대에 들어서는 밥 위에 다양한 재료를 올린 음식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육식의 시작으로 고기를 얹은 규동과 오야코동이 등장하였고, 이후에도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돈부리의 종류로는 해산물을 얹은 카이센동, 튀김을 얹은 텐동, 쇠고기를 얹은 규동, 장어를 얹은 우나동, 그리고 닭고기를 얹은 오야코동 등 다양하다. 이 중에 대표적인 메뉴인 돈부리는 밥 위에 돈까스, 양파, 계란 물, 그리고 소스를 얹은 것으로, '이긴다'는 뜻의 가츠가 연상되기 때문에 중요한 시합이나 전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음식이다.먹는 방식으로는, 재료에 일본식 양념장인 다레를 끼얹거나 다레와 함께 끓여 만들어진 것은 그대로 먹는다. 그러나 재료에 양념이 배지 않은 돈부리는 쇼유와 와사비를 섞은 와사비쇼유을 끼얹어 먹는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재료를 와사비 쇼유에 찍어서 먹기도 한다.카이센동 텐동 우나동4. 당고당고는 다양한 곡물가루를 모아 작고 둥근 모양으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모으다'라는 뜻의 '당'과 '작다'라는 뜻의 '자'를 의미한다. 이는 일본의 대표적인 화과자로, 밀가루나 쌀가루에 따뜻한 물을 부어 반죽하여 둥글게 빚어 찌거나 삶은 요리이다.당고는 켄토우시가 당으로부터 가져온 토우가시의 하나인 당키에서 유래되었다. 토우가시는 밀가루를 사용하여 만든 과자로, 이후 일본에도 밀가루를 사용한 음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꼬치에 끼워 먹는 만든 키비 당고, 구운 당고에 간장과 설탕을 섞은 소스를 바르는 미타라시 당고 등 다양하다.당고는 종류에 따라 다양한 곡물가루를 사용하여 만드는 방법이 다양하지만, 일반적인 당고를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쌀가루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잘 섞어 반죽을 만든다. 찜통에 이를 넣고 찐 후, 반죽이 투명해지고 탄력이 생길 때까지 치대준다. 그리고 반죽을 적당량씩 떼어내서 작고 동그란 모양으로 빚고 나서 꼬치에 적당량 끼워준다.5. 타코야키타코야키의 타코는 '문어'와 야키는 '구운 것'을 뜻하며, 밀가루 반죽에 문어 조각과 파를 넣고 동그란 모양으로 구워 가츠오부시와 소스를 뿌려서 먹는 요리이다.타코야키는 오사카의 대중적인 음식으로 아카시야키와 라디오야키가 결합한 요리이다. 아카시야키는 메이지 시대 때 아카시 시에서 만들어졌는데, 계란이 들어간 밀가루 반죽을 작은 구멍이 있는 철판에 붓고 삶은 문어를 넣어 구운 것으로, 아카시시 사람들은 이를 국물에 찍어 먹었다. 라디오야키는 원래 초보야키라고 불렸는데, 이것이 주로 판매되는 포장마차에서는 라디오를 틀어주는 곳이 많아 라디오야키라고 불리게 되었고 조리법도 조금 변화되었다. 초보야키는 다이쇼 시대 때 오사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한입 크기의 구멍이 있는 철판에 밀가루 반죽와 몇 가지 재료를 넣어 구운 것이다. 삶은 문어가 들어가지는 않지만, 생김새는 오늘날의 것과 비슷하다. 쇼와 시대에 초보야키가 라디오야키로 변화하였는데, 밀가루 반죽에 양배추, 파, 텐카스, 곤약을 넣어 구운 후에 소스를 바르고 가츠오부시와 김 가루를 뿌렸다. 오사카의 아이즈야라는 가게에서 이 둘을 결합하여 타코야키를 탄생시켰고, 이후 도쿄에도 알려지며 인기를 끌었다.타코야키는 가정마다 다양한 방법과 재료로 만들기 때문에 종류가 다양하다. 안에 문어, 파, 생강 절임뿐만이 아니라 떡, 치즈, 소세지, 옥수수, 새우, 김치 등 다양한 재료를 넣으며, 소스 대신 소금이나 간장을 뿌리기도 한다.오사카에서는 밀가루나 쌀가루를 이용해서 만드는 음식인 을 먹는 오사카인들의 가정에서 필수 조리기구이다. 오사카만의 독특한 문화로 가족과 같이 타코야키를 구워 먹으면서 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간장 타코야키 타코야키 기계6. 고로케고로케는 프랑스의 '바삭바삭한 소리가 난다'라는 뜻을 가진 크로켓트에서 유래된 음식으로 이를 일본식으로 표기한 단어이다. 고로케는 으깬 감자에 여러 재료를 섞어 둥근 모양으로 만들어서 바삭하게 튀긴 요리이다.화이트소스 베이스의 프랑스식 크로켓트가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으깬 감자 중심의 포테이토 고로케가 만들어졌다. 일본에는 이미 이와 비슷한, 으깬 두부 안에 다진 채소를 넣어 튀긴 요리인 간모도키가 존재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이에 대한 요리책이 많아지면서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는 고로케가 나왔다. 이때부터 서양음식점의 주메뉴로 나오면서, 고급 음식으로 인식되었다. 다이쇼 시대부터는 가정에서 만들어 먹을 정도로 대중화되면서, 3대 서양 음식으로 손꼽히게 되었다.고로케의 종류는 사용하는 재료에 따라 다양한데, 감자 베이스의 종류에는 일반적인 포테이토 고로케, 카레를 추가한 카레 고로케, 참치를 넣은 츠나 고로케가 있고, 이 외에는 크림 고로케, 라이스 고로케 등 다양하다.일반적으로 시중에서 파는 고로케는 소스를 뿌리지 않고 그대로 먹지만, 밥과 함께 반찬으로 고로케를 먹을 때는 돈가츠 소스나 우스터 소스를 뿌리고 채 썬 양배추와 함께 먹는다. 이외에 카레라이스에 위에 고로케를 올려 먹거나, 우동을 먹을 때 고명으로 돈가츠를 얹어서 먹기도 한다.카레 고로케 크림 고로케 라이스 고로케고로케와 양배추 고로케와 카레7. 스키야키스키야키는 관서지방에서 생선을 스키(호미) 위에 올려 익혀(야키) 먹은 것에서 기원하며, 간장 베이스의 육수에 여러 재료를 넣고 끓여서 날계란에 찍어 먹는 전골 요리이다.나라 시대 이후로 육식이 금지되었으나 에도 시대 후기부터 고기를 섭취하게 되면서, 이때 스키야키의 원조인 생선을 굽는 사카나스키가 등장하였다. 이때의 스키야키는 미소로 만든 다레에 두툼한 고기를 넣고 끓이었다.
2020년도 1학기 기말레포트학과(전공)학번성명제출기한2020.06.20※ 독도와 관련하여 아래의 4문제를 각각 5줄로 작성하시오(20점)1. 언제부터 현재까지 독도가 한국의 영토인가요?(한국 영토의 역사적 근거 제시)(5줄)이에 대한 사실적 역사의 증거는 1145년(인종 23)경에 김부식이 주도하여 편찬한 삼국의 역사서, 『삼국사기』를 통하여 알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512년(지증왕 13)경에 신라의 이찬 이사부가 정벌군을 이끌고 우산국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신라는 우산국을 정벌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우산국은 독도와 울릉도로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512년부터 한국의 영토인 독도의 역사가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2. 일본이 독도를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시기와 역사적 근거는 무엇인가요?(5줄)1904년(고종 41)경에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동해 해전에 유리한 독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05년 1월(고종 42), 일본은 독도의 영토 편입에 대해 의결하여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같은 해 2월, 시마네현은 현청 게시판에 무주지인 다케시마를 오키섬에서 관할하겠다는 내용의 고시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대한제국의 의사 없이, 일본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진행되었다.3. 일본이 독도를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최근의 행동에는 무엇이 있을까요?(5줄)올해 2월 22일, 일본 시마네현에서 지방자치단체 행사인 ‘다케시마의 날’을 기념하여 논란이 일었다. ‘다케시마의 날’은 시마네현 의회가 2005년에 의결한 기념일로, 이는 1905년 일본에서 독단적으로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 고시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번 행사를 통한 일본의 일방적 주장에 대해, 정부는 행사 폐지를 촉구하며 역사적 그리고 국제법적으로 명백히 한국 영토인 독도에 대한 부당한 주장을 중단하고, 겸허한 태도로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고 밝혔다.4. 일본의 독도 영토 주장에 대해서 한국정부가 어떤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나요?(5줄)명백히 한국 영토인 독도를 넘보는 일본에 맞서, 한국 정부에서는 독도를 지키기 위한 대응이 필요하다. 먼저 독도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끊임없이 발굴하고 통일하여, 독도에 대해 왜곡된 정보를 신빙성 있게 바로잡아 이를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 한국의 섬 독도를 홍보하고 왜곡된 정보에 항의하는 세계적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방안도 있다. 무엇보다, 독도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일본에 맞서 역사를 정정하고 공식적 사과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아래의 1문제를 30줄로 정리하여 작성하시오(20점)5. 일본의 교과서왜곡과 중국의 역사왜곡(동북공정)에서 나타나는 공통점과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에 대해 논하시오(30줄)역사는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는 도구로써 객관적 사실을 기반으로 기록된다. 우리는 수많은 피와 희생 그리고 열정으로 이루어진 역사를 통하여, 자국에 대한 자부심과 애국심을 느끼고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한다. 그러나 이로 인한 민족주의가 지나치면, 역사를 왜곡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는, 일본의 새 역사 교과서 왜곡과 중국의 동북지역 역사 왜곡의 문제가 있다. 2001년 4월, 일본 문부과학성에서 ‘새 역사 교과서’를 최종 승인하여 큰 논란이 일었다. 이는 일본의 우익에 의해 추진되었는데, 일본의 우익은 과거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를 미화하며 폐쇄적 민족주의의 성향을 띈다. 일본의 새 역사 교과서에서는, 일본이 무차별적인 학살과 탄압으로 조선을 강점했던 시절을 근대화를 위한 노력이었다고 주장하며 조선의 식민화를 정당화한다. 또한, 중국에서는 오랜 세월 이어진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우리의 선조인 주몽이 세운 고구려를 포함해 중국 동북지역에서의 모든 역사를 중국의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논리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중국은 2002년부터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의 국가적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2003년과 2007년에 각각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의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 하는 등 체계적인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 이렇게 일본과 중국은 자국의 역사를 미화하고 합리화하며, 역사적인 책임을 상대국에 떠넘기고 있다. 또한,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정치적인 이점을 위하여 이용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 왜곡의 문제가 일회성 행사가 아님을 인식하고, 세부적인 대응책으로 수립하여 해결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국가적 차원에서, 왜곡된 역사에 대한 논거를 확실히 파악하여 이에 대한 대응 논리로 사실을 밝히고 거짓에 대해 사과를 요구할 수 있다. 정부 차원에서는 국제적 연대 추진과 공동역사연구의 방안이 있다. 시민적 차원으로는, 한국의 시민단체와 상대국의 깨어있는 시민과의 교류를 통해 일회적 행사뿐만이 아니라 교류 사업으로 확장해야 한다. 전 세계적인 소셜 매체의 활용과 함께, 과거사의 피해에 대한 교육과 홍보로 일본과 중국이 반성하고 각성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이처럼 다양한 창구로, 다차원에서 다 영역의 역사 대화를 시도하여 상호이해 중점의 협력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더는 분쟁이 아닌 삼국 공통의 역사 인식이 필요하다. 삼국을 묶어낸 동아시아 역사의 재구성은 민족과 국가의 틀을 깨지 않는 한 역사적 갈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논리를 근거로 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역사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역사의 진행자이며 주역임을 깊이 새겨야 한다. 물론 타국의 역사 왜곡에 대한 수정과 반성의 요구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역사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정신이다. 역사에 대한 연구와 노력이 있어야 그들의 잘못된 역사서술을 비판할 수 있고,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민족 정체성을 바탕으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몫으로서 자립적인 역사를 구축하고 당당히 외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역사에서 주변 국가와의 교류와 소통을 위한우리 민족의 노력에 대해 논하시오역사적으로 많은 국가들은 주변 국가들과의 왕래를 통해, 다양한 문물과 문화를 교류하며 발전해왔다. 한국 역시, 오랜 세월 동안 주변 국가와의 교류와 소통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과 쇠퇴를 거듭하여 성장해왔고, 그 결과 지금의 ‘한국’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지금부터, 몇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열정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우리 민족 역사의 일부분을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다.1. 일본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일본과의 교류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시작하였다. 이때, 일본이 한반도로부터 벼농사와 금속기를 받으면서 야요이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을 이루었던 야마토 시대에는 삼국시대의 백제, 가야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야마토 정권과 그 호족들은 백제와 가야로부터 선진 문물과 기술자를 받아들여 발전했다.10세기 초에는 일본이 고려와 국교를 맺지 않자, 일본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규슈와 고려의 금주를 오가며 교역을 전개했다. 14세기 규슈의 혼란으로 인한 왜구 창궐의 문제로, 고려는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구 근절 약속을 받아냈다. 그런데도 침탈이 계속되자, 고려는 군사력을 보강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강경책과 유화책을 병행하였다. 이후 내란을 종식한 무로마치 막부의 요시미쓰가 국서를 직접 보냄으로써, 조선의 국왕과 일본의 쇼군은 평화적인 교린 관계를 맺게 되었다. 또한, 무로마치기 왜구의 약탈에 대한 군사적 징벌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는 조선에 재정적 부담 문제가 있었으나, 사전에 왜구의 도발을 방지하는 회유책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정책이었다. 이를 통해, 고려는 일본과의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하여 힘썼으며, 이에 장애가 되는 요소는 현명하게 대처하여 해결했음을 알 수 있다.19세기가 되어, 메이지 정부는 조선 정부가 조약 체결을 거절하자, 무력으로 정벌하는 ‘정한론’을 내세우며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조선에서는 농민운동,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 추진, 의병항쟁을 펼쳤으며, 식민지화되어 일본인들에게 억압을 받으면서도 자유, 해방, 자주권을 되찾기 위해 항일 독립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광복을 이루게 되었다.아픈 과거에 대한 한국과 일본 간의 역사적 갈등은 진행 중이다. 현재까지도 한국은 일본으로부터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유공자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하며, 독립운동가의 숭고한 희생을 통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이와 동시에, 과거를 반성하는 일본 시민들과 함께 ‘추모 묵념’, ‘국가유공자 손편지 쓰기’, ‘평화의 소녀상 캠페인’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며 한·일 우정을 나누고 있다.2. 중국넓은 토지와 많은 인구를 가지며 경제적·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국과의 교류는 오랫동안 이어왔다.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된 고조선은 중국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았으며, 전국시대의 이주민으로부터 철기를 받아들였다. 기원전 108년에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가 그 자리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고조선의 통합을 훼방하면서도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전래하여, 삼국이 성립하고 발전하는 데에 기여했다.4세기 중국을 통합한 서진이 혼란에 빠지면서 주변의 여러 국가가 성장했고, 중국 왕조와 주변 국가 간의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한자와 불교 기반의 동아시아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5세기 남북조 시대가 열리자, 고구려는 남북조와 형식적인 조공·책봉 관계로 활발히 교류하여, 중국의 선진 문물이 널리 퍼지면서 동아시아 공통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또한, 삼국통일은 신라와 중국의 교류가 기반이 되었다. 6세기에 고구려는 침략하러 온 수를 을지문덕 장군의 유도 작전을 통하여 승리하였고, 7세기가 돼서 신라는 나당동맹을 통해 삼국통일을 이루며 나당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 중국은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신라는 이를 통해 발전하여 삼국 백성들과의 통합을 강화하고 우리 민족 형성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통일신라는 8세기 이후 당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활발한 왕래와 빈공과 실시 등 많은 교류를 했다. 한편, 이 시기에 건국된 발해는 당의 압박을 받았다. 그러나 문왕의 대외 정책으로 친선관계를 맺고 중국의 문물제도를 수용하였으며 당의 3성 6부 제도를 발해의 실정에 맞게 독자적으로 받아들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15세기, 조선은 명에게 사대를 하고 책봉을 받는 사대교린 정책을 실행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조선은 명의 문물을 얻기 위해 사대로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으며, 영향력 있는 명을 섬김으로써 국가의 존립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그리고 18세기가 되어 만주족은 중국을 통치하게 된다.이처럼 과거에 한국은 중국과 여러 정책, 교류를 통해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문화와 문물을 수용하여 나라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중국의 문화와 문물은 한국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도 한국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있으며, 전 세계에 미치는 중국의 영향력 또한 매우 큰 수준이다.3. 유목 민족흉노, 몽골, 거란, 여진, 선비, 위구르, 돌궐 등으로 구성되는 유목 민족과의 접촉은 7세기에 시작했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어 발해를 건설하였다. 발해의 사회 구조는 지배층이 고구려인이고, 피지배층이 말갈족이었다. 또한, 고구려 토대의 문화에서 당의 문화를 수용하고 말갈의 문화를 융화하여, 발해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 시켜 융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10세기, 국명을 요로 바꾼 거란은 고려를 세 차례에 걸쳐 침략하였다. 993년 1차 침략은, 성종의 지시로 서희가 소손녕과 외교 담판을 벌이며 거란군을 철수시킬 수 있었다. 평화적 협상인 ‘서희의 담판’의 결과로 고려와 거란은 외교 관계를 맺으며, 고려는 강동 6주를 받을 수 있었다. 2차 침입에는 개경이 함락되었으나, 양규가 이끈 고려군이 강화 체결 후 물러가는 거란군을 크게 물리쳤다. 마지막 3차 침입에는 강감찬이 이끈 고려군이 귀주 대첩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동아시아는 3국(고려, 송, 요) 세력의 균형으로 평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처럼 고려는 거란과의 위기를 평화적인 소통을 통하여 모면하거나, 현명하면서도 신속한 전략의 대처로 극복하였다.13세기 테무친이 몽골을 통합하여, 고려와 형제의 맹약을 맺게 된다. 그러나 몽골의 과도한 요구와 불손한 태도, 그리고 저고여 피살 사건으로 몽골의 고려 침입이 시작되었다. 1차 침략에서 박서는 귀주성을 지켜냈으나, 몽골의 개경 포위로 불공평한 요구의 화친을 맺게 된다. 이후 2차 침략으로 몽골군은 광주 산성을 공격하나, 몇 달간의 공격에도 실패한다. 이때, 광주 산성 전투는 고려 지방민(광주인)이 정부군의 도움 없이 방어에 전력하여 거둔 승첩으로서 큰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 이후에도 몽골의 공격이 계속되면서, 고려는 사회적·재정적으로 큰 손해를 입게 되었다. 대략 40년 넘게 이어진 전쟁으로 백성의 생명과 재산, 문화재 등의 피해가 커서 힘든 시기에, 고려인들은 불심으로 국난을 이겨내자고 대동단결하여 불경을 나무에 새긴 팔만대장경을 지켰다. 그리고 삼별초가 끝까지 대몽 항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의 투쟁과 지지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삼별초는 항쟁의 실패로 나라를 되찾지는 못했으나, 그들의 대몽 항쟁은 고려인의 자주정신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이후 ‘원 간섭기’에서, 제후국이 된 고려의 공민왕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개혁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 고려는 상실한 국토를 되찾고 원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소개“걱정 마, 내가 꼭 구해줄게…”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한 구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을 맡아 스튜디오 지브리사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지금으로부터 약 19년 전인 2001년 일본에서 개봉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개봉 당시 일본 내에서 영화 흥행 순위 1위와 2,400만 명의 관객수를 기록하며 총 308억 엔의 수익을 거두었다. 또한, 2003년 이래로 '애니메이션 영화 부문'에서 1위를 유지하고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 공상을 수상하며 뉴욕타임스의 '21세기 최고의 영화 리스트'에 2위로 선정되는 등,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2 줄거리이야기는 주인공인 치히로가 가족들과 함께 차를 타고 이사할 집으로 가게 되면서 시작된다. 가던 중에 길을 잘못 들어 터널 앞에 차를 세운 가족들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간다. 주위에 아무도 있지 않지만 이에 신경 쓰지 않고 가게에서 음식을 먹는 데에 정신 팔린 부모님을 뒤로하고, 치히로는 주위를 돌아다니다. 온천에서 하쿠라는 이름의 소년을 마주한다. 어서 돌아가라고 재촉하는 하쿠의 말에 돌아간 치히로는 돼지로 변한 부모를 보고 이후에 위험에 처하게 되자, 하쿠의 도움으로 온천에서 센이라는 이름으로 일을 하게 된다. 오물 신을 도와 보답받은 경단으로 용으로 변신하여 다쳐있는 하쿠를 구하고, 모습이 변한 가오나시가 원래 모습으로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일본판, 한국판 포스터 돌아가도록 도와준다. 한편, 훔쳐 온 도장을 온천 주인인 유바바의 언니에게 돌려주고 돌아오는 길에 치히로는 이전의 이름을 잊어버린 하쿠에게 그의 진짜 이름이 코하쿠임을 알려준다. 온천으로 돌아간 치히로는 유바바의 테스트에 통과하여 하쿠와 작별인사를 하고 온천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터널로 돌아간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서있는 부모님을 마주하고 이 가족은 다시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1. 다음 중 국민 축일 중에서 23일에 행해지지 않는 축일을 고르시오. ①텐노 탄생일②근로 감사의 날③건국기념일④추분의 날정답: ③①2월 23일 ②11월 23일 ③2월 11일 ④9월 23일2. 빈칸을 채우시오. 9월 15일인 경로의 날이 ①_____ 에 의해 9월 세번째 월요일로 변경됨으로써 9월 20일~21일이 경로의 날로 된 경우가 있었다. 이처럼 특정 해에 5일의 연휴가 생긴 이 시기를 제 2의 ②_____라고 불렀다. ①4개의 공휴일이 날짜 대신에 ?월 ?번째 월요일로 변경한 것②4월 말~5월 초에 국민 축일이 많이 모인 기간①_____ ②_____ 정답: ①해피 먼데이 제도 ②골든 위크3. 다음 중 가부키에 대한 설명으로 올바른 것을 고르시오. ①가부키-헤이안 시대의 서민 중심 예능으로, 약 400년 동안의 전통인 헤이안 시대 최고의 대중오락이다. ②와카슈가부키-여자 역까지 남자 배우가 대부분 맡지만, 주인공 여자 역은 여자가 맡았다. ③가부키의 음악-게자 음악만 단독으로 나온다.④특수 연출- 구마도리로 선량한 사람은 푸른색을, 악인은 붉은색을 썼다. ⑤다카라즈카-여성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일본의 가극단이다. 정답: 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