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유럽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본인이 관심 있는 분야는 유럽의 중세와 근대이다. 이 주제를 한국사와 연결 짓고자 하니 여러 혁명들과 르네상스가 가장 먼저 생각났다. 그리고 한국사 시민강좌 40 (김성윤) 의 부록에 실린 영.정조 시대 (18세기)는 한국사의 르네상스였는가 라는 글을 접하게 되었다. 르네상스라는 말은 실제 유럽, 특히 이탈리아에서 민간 주도로 일어났던 문화 부흥 운동을 뜻하지만, 문화적 전성기라는 수식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르네상스를 연 시대라고 한다면, 당연히 세종대왕이라고 할 것 같은데, 이 글에서는 왜 굳이 영, 정조 시대를 르네상스로 칭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영, 정조 시대가 왜 우리나라의 르네상스인지, 유럽의 르네상스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탐구하게 되었다.Ⅱ. 서양과 조선, 르네상스를 맞이하다. 1. 서양 르네상스의 배경과 일어난 변화들. 르네상스는 14~16세기에 서양에서 일어난 문화운동으로 프랑스어로 부활, 재생이라는 뜻이다. 이는 흔히 어두웠다고 표현하는 중세에서 벗어나 고대로 돌아가자는 취지를 반영하고 있다. 예술, 문화, 정치, 과학, 사회 모든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전들이 일어났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지만 독일, 프랑스, 영국 등 많은 유럽에 영향을 끼쳐 ‘서양 문화의 어머니’로 비유되기도 한다.
작년 12월, 거의 모든 입시 준비가 끝나고 많은 주변인들이 다가올 2021년과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할 때,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잠 못 이루는 밤들을 보내고 있었다. 고등학교 생활에서 비롯된 스트레스와 혹독한 입시경쟁에 대한 거부반응으로 대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였기 때문이다. 나의 친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지금 당장 무얼 해야 할지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방황하고 있었다. 작가, 디자이너, 영화감독 등 이루고 싶은 꿈은 많았지만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나는 친구가 잠이라도 제대로 잤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달러구트 꿈 백화점>을 친구에게 선물했다. 책에서도 언급되듯이, 목표와 소망을 뜻하는 ‘꿈’과 잠을 잘 때 겪을 수 있는 ‘꿈’은 동음이의어이다. 책을 선물하며 나는 친구가 잘 때 예쁜 꿈들을 꾸면서 자신의 꿈들을 하나둘씩 이뤄나가길 빌었다.
인류학의 네 가지 갈래인류학이라는 학문을 아는가? 인류학이란 인간역사의 전 시대에 걸쳐 나타난 인간과 인간 사회의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필자는 인류학의 다양한 연구분야들 중에서도 ‘문화’에 관심이 많은데, 문화인류학이라는 학문을 접하게 된 것은 ‘인류의 위대한 여행’이라는 책을 읽으면서였다.인류학 (Anthropology)은 인간이라는 뜻의 Anthropos와 학문의 Logia가 합성된 말이며, 무언가 거창한 느낌이 드는 이름이다. 연구 분야도 전 세계의 모든 인간과 그 활동이다. 하지만 인류학이 처음 대두되었을 때에는 주로 서구의 학자들이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오지의 문화와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인류학은 다양한 학문들 사이에서 그 입지를 다지고 있으며, 오지에서 서구문명까지 다양한 사회를 현지 조사하는 학문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인류학을 연구하거나 공부하려면 필요한 세 가지 관점이 있다. 우선, 인류학은 일반적인 학문과 달리 사회, 심리, 정치, 경제까지도 한 번에 다룬다. 이러한 인간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인류학은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하나의 총체로서 연구한다. (총체적 관점)또한, 인류학은 지역마다, 집단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인간의 신체, 사회, 문화적 특성을 인정하며, 이를 비교 연구하는 것을 주된 연구 방식으로 삼는다. (비교의 관점) 이때 주의할 점은, 문화등을 비교할 때, 이를 절대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같은 연구대상이 서로 상대적이라는 전제 하에 그 가치나 맥락을 고려하여 비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적 관점) 그리고 인류학의 모든 연구는 현지조사를 기본으로 한다.인류학은 다루는 범위가 너무나도 광범위하기 때문에, 국가나 지역마다 인류학을 세분화시키는 기준이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보통 인류학을 구분하는 것은 미국식을 따른다. 일반적으로 인류학은 체질인류학과 문화인류학으로 크게 나뉘는데, 미국에서는 이를 체질인류학, 고고학, 문화인류학, 언어인류학의 4가지 범주로 세분화시키고 있다. 그럼 이제 인류학의 4가지 갈래를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고고학, 혹은 고고인류학은 인간, 특히 선사시대의 인간들이 남겨놓은 유물들을 가지고 그들이 어떻게 살았었는지, 그 사회, 문화, 경제 등의 측면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선사시대의 유적, 유물에 대한 해석은 해석의 주체나 지역이 믿는 신화, 종교에 따라 바뀌었었는데, 고고학이 발전하면서는 퇴적층의 분석, 연대측정 방법 등을 통해 보다 객관적인 추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인류의 위대한 여행’이라는 책 역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선사시대의 유골들을 분석하며 인류가 어디에서 퍼졌을지를 알아보는 내용이었다. 고고학은 과거에 대한 학문이라고 하여 역사학과 혼동되기도 하지만, 역사학과는 엄연히 다른 분야이며, 현대의 고고학자들은 쓰레기를 통해 현대의 물질문화를 연구하고 있다고도 하니, 그 연구영역은 계속 확대되어 갈 것이다.언어인류학은 문화인류학과 유사성을 띠지만, ‘언어’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언어인류학은 언어가 그 지역 사회의 제도, 습관 등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라고 기본적으로 가정한다. 또한, 문화가 언어에 영향을 준 부분과, 반대로 언어가 문화에 영향을 준 부분들도 다루는데, 바로 이 점에서 문화인류학과의 교집합이 생기는 것이다. 초기의 언어인류학은 북미 인디언의 언어를 연구하기 위해 시작되었으나, 미국에서 이를 발전시키며 언어학과 구분지음으로써 인류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게 되었다. 언어학은 언어의 구조, 문법 등을 다루는 반면, 언어인류학은 언어와 언어 사용을 분석해 언어사용 사회의 문화, 사회 등을 분석한다는 것이 미국의 인류학자 델 하임즈의 설명이다.다음은 인류학의 가장 주된 갈래인 문화인류학이다. 문화인류학은 인류의 발전과정과 현재의 인류를 관찰, 분석하여 이를 문화적 측면에서 탐구한다. 영국에서는 사회 인류학, 대부분의 유럽에서는 민족학이라고 부른다. 문화인류학은 앞서 살펴 본 인류학의 특성 (관점)이 인류학의 4가지 갈래 중 가장 잘 나타나는 갈래이다. 18세기, 19세기만 해도 서구인들의 입장에서 미개한 문화를 다루던 학문에서 모든 인류의 문화를 다루는 학문으로 그 분야가 확장되었다는 점이 인류학의 전체적 발전과정과 비슷하다. 또한, 인간생활의 모든 영역 (혼인, 사회조직, 종교 언어, 예술 등)을 상호관련적이라 보고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총체적관점도 문화인류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문자가 없는 곳들을 연구할 때에는, 장기간에 걸친 현지조사와 유물 발굴 등이 필수적인데, 그렇기 때문에 문화인류학은 대상을 문화의 상대성과 비교의 관점에서 연구한다는 상대적 관점과 비교의 관점이 가장 강조되는 갈래이다. 문화인류학에서 다루는 것은 분야가 한정되어 있지 않다. 무엇이든지 폭넓게 문화의 대상으로서, 연구대상이 될 수 있다.
1. 우리나라 1980년대 디자인의 양상을 사회상-정치, 경제, 문화 등-과 연관하여 서술하시오.1979년 박정희가 서거한 후 80년대는 전두환이 집권한 시기이다. 1980년대는 1970년대의 흐름을 기본적으로 이어받았지만, 전통에 대해서는 덜 억압적이고, '민중'문화가 형성되는 시기였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군부독재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한 정부의 의도가 깔려있었다.전두환 군부는 광주 민주화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면서 민중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3S (Screen:영화, Sport:스포츠, Sex:성) 대중문화 개방정책 등의 우민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때 컬러 TV가 최초로 방영되어 대중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사실 1970년대부터 한국은 컬러 TV를 수출하고 있었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사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1982년에는 프로야구가 개막했고, 1987년에는 영화 시나리오에 대한 검열이 폐지되었다. 장발단속이 완화되고 통행금지가 해제되고 교복 자율화, 해외여행 자율화등, 다양한 조치들이 해제되거나 완화되었다.그리고 1980년대는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이 개최된 역사적 시기이기도 하다. 오늘날까지도 최고의 올림픽 마스코트중 하나로 손꼽히는 호돌이가 디자인되었고,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35년만에 귀화해 다다익선이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국제무대들을 준비하면서 심볼마크나 엠블렘, 로고, 포스터 등 다양한 디자인들의 수요가 늘었고, 그만큼 디자인은 독립적인 분야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또한, 여러 국제무대를 통해 한국이 세계로 진출하게 되면서, '한국성'과 '한국문화'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시작되었다. 1960,1970년대의 박정희 정권 전통문화와 민간신앙들을 억압했다. 대외적으로는 ’애국‘을 강조했지만 새마을운동의 ’조국근대화‘라는 슬로건과 함께 전통문화들을 봉건의 잔재이자 미신으로 전락시켜 소멸시키려고 했다. 이때 무당, 당산제, 풍어제 등 수많은 우리의 고유 문화는 사라졌고, 전통문화는 단절되었다.하지만 1980년대에는 그동안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국립민속박물관을 디자인할 때 ’전통‘이라고 여겨지는 온갖 건축물들을 짜깁기 하도록 유도했던것처럼, 1980년대에도 역시 전통문화를 이어받고 자각하는것이 아니라 관광상품을 위한 용도가 강했다. 시각적으로 강렬하고 상징성을 띠어서 외국인들을 유치할 수 있는 것들이 특히 한국의 고유성이자 민족성이라고 인식되었다.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의 문화를 국민들이 충분히 즐기고 아껴서, 그것들을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으로 홍보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전통문화가 관광객유치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렇게 ’한국성‘과 한국의 문화정체성에 대한 담론은 생산적이지 못하고 중심이 아니라 주변만 겉돌았다. 이는 1990년대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고 문민정부가 전통음을 표준화하고, 고유한 색채문화를 재정립하는 등, 전통문화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기 전까지 그대로 이어졌다.1970년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어느정도 성공을 거둔 것 역시 1980년대의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다. 70년대에는 디자인이 정부 주도하에, 수출을 위해 동원되었다면, 1980년대에는 기업위주로 디자인계가 활성화되었다. 일례로, 1970년대에 건립되었던 ’한국 디자인 포장센터‘는 국가의 지원이 줄어 1980년대에는 그 활동이 축소되었다.특히 1986년에서 1988년에는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의 3저호황으로 인해 경제상황이 매우 좋았다. 경기가 호황을 이루자 기업들은 디자이너를 더 많이 고용하기 시작했고, 디자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개선되어 디자인 교육의 질이 높아졌다. 1963년에 이미 금성사가 회사 내부에 디자인과를 신설해 인 하우스 디자인을 시작한 적이 있으나, 사실상 회사의 디자이너들이 창조적인 디자인을 하기 보다는, 일본제품의 카탈로그를 얼마나 많이 수집하고 모방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반면에 1980년대에는 ’우리의 디자인‘의 중요성이 조금 더 주목받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74년에는 동양맥주가 OB맥주의 CI를 만들었는데 이게 꽤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자 금융계를 디자인전을 개최하였다.디자인적으로 또 주목할만한 것은 1985년에 만들어진 Good design제도이다. 굿 디자인 제도는 산업디자인의 개발을 장려하여 국민들의 산업디자인에 대한 관심과 이해, 디자인의 수준, 국민 생활의 질을 모두 높이는데 기여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한국디자인사'의 저자인 김종균 박사는 굿디자인의 등장으로 인해 1980년대 한국 디자인은 '계몽적 디자인'과 '상업적 디자인'으로 양분화되었다고 본다. 계몽적 디자인은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 (구 상공미전)에서 수상한 작품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70년대처럼, 주로 국가의 취향에 맞는 수출품, 전통상품, 포장용품, 혹은 여러 가지의 기능이 겸비된 디자인들이 수상했다. 반면에 상업적 디자인은 굿디자인전에서 수상한 작품들이 보여준다. TV, 카세트테이프, 전화기등의 일상용품들이 주로 수상작품이었다. 이처럼 1980년대에는 1970년대에 주로 강조되었던 디자인과 함께, 기업적,산업적,상업적,대중적인 새로운 디자인이 함께 주목받았던 시기이다.그리고 1980년대는 디자인 작업에 컴퓨터가 처음 도입되 그래픽 디자인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시대이다. TV와 지하철 광고, 경제호황을 타고 일던 건축붐까지, 1980년대에 디자인의 분야들은 끊임없이 확대되었다.하지만,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표절이나 유행과 관련된 경향도 여전했다. 롯데월드의 마스코트 표절사건이 이를 잘 보여준다. 표절이 너무나도 심했던 나머지, 1987년에는 해외 국가들의 압력을 받아 세계저작권협회에 가입한다. 그리고 우민화정책의 일부로 정부가 시행했던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로 인해, 해외의 디자인들을 국민들이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면서, 표절디자인에 대한 인식 역시 조금씩 높아져갔다. 마침내 1995년, 대한민국이 WTO에 가입하면서, 기구의 규정과 타 국가들을 의식해서라도 표절을 줄여나가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모방이 아니라 창작에 힘을 쏟다보니 한국 디자인은 급격히 발전하였고, 고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은 1996년을 ‘디자인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기업들이 디자인을 중시하면서 디자인은 시장논리 속에 편입되었다. 마지막으로, 대중문화가 개방되고 국제행사를 연달아 2번 개최하면서, 세계속에서 ‘한국적’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중문화를 개방하고 ‘한국적’인 소재를 찾는 것이 우민화정책, 관광장려 등, 그 배경에는 다소 불순한 의도가 숨어있었을지라도, 확실히 1980년대에는 한국적인 디자인, 산업디자인이 발달할 수 있는 시기였다.2. 미술공예운동의 등장 배경과 개요를 서술하고, 아래의 글에 대한 본인의 의견과 오늘날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이 지니는 의의에 대해 답하시오.“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의 미술공예운동은 기계를 부정하고 중세시대의 수(手)공예생산방식으로 복귀하는 것을 주장하였다.당시 수공예 제작 방식을 통해 생산된 제품은 기계제품보다 저렴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중을 위한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는 ‘반(反) 기계'라고 하는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인 측면을 옹호한 것이다.”1760년에서 1830년 사이,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했다. 많은 제품들이 기계화, 공장화되었다. 산업혁명과 기계는 더 많은 제품들을 생산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그 결과 그 전까지 농가와 결합되어 있던 자급자족적인 경제시스템은 파괴되었다.그리고 자본이 노동을 지배하면서, 자본주의가 사회 전반을 다스리게 되었다. 부를 기반으로 한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이 대립하게 된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노동자들은 분업화되었고, 결과적으로 비 숙련화되었다. 작업들은 단순하게 기계화되거나, 자동화시스템으로 대체되었고, 노동의 가치는 일회성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떨어졌다.당시 영국은 물가가 높이 뛰었고, 빈곤은 심각해졌고, 도시로 사람이 몰리면서 실업과 범죄도 급증해 사회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산업혁명 시기였던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은 지식층 위주로, 산업의 발달의 장단점과 폐해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급기야, 감성적이거나 장식적인 것은 배제하은 언급한 순서대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다.칼라일과 존 러스킨의 영향을 받은 윌리엄 모리스는 산업사회에 대한 비판정신과 예술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미술공예운동을 이끌게 된다. 미술공예운동은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낭만주의적 시각에서 인간의 노동과 삶의 질, 수공예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미술운동이다.모리스는 예술은 본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일상용품을 제작하는 수공예가 산업화되면서, 미학과 예술이 퇴화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게다가 대량생산을 통해 만들어진 물건들은 질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수공예제품보다 떨어진다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는 예술이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소수를 위한 전유물이 되어버리는 것을 비판했다. 예술가들은 상류층들을 위해 예술품을 만들었고, 예술은 비평가나 또 다른 예술가 등, 소수만의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모리스는 예술은 인류 모두에게 올바르고 건강한 메세지와 감동을 줄 수 있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라며 이러한 예술사회에 대해 비판했다.미술의 퇴화 + 노동적 측면에서의 산업사회의 폐해 + 일상생활에서의 심미성 결여." 이 세 가지가 윌리엄이 특히 관심을 가졌고, 미술공예운동을 통해 극복해내고자 했던 문제들이다. 따라서 그의 미술공예운동은 사회적 문제인식과 예술적 문제인식이 합쳐진 운동이다.앞서 언급한 세 가지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기 위해서 모리스가 생각한 대안은 전통 수공예를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모리스는 수공예란 인간이 더욱 창의적이고, 개성적이고, 예술적이게 하며, 노동의 기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수공예가 부활하면 다시 더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예술과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고, 이는 개개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모리스는 미술과 공예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 일상생활에서 밀접히 존재하는 상태를 그렸다. 미술공예운동은 ‘생활 속의 예술’을 꿈꾼 운동인 것이다. 기계화가 진행되고 수공예는 하찮은 단순노동으로 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