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구현을 위한 레드카펫김**‘정의’의 철학적 의미로서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라는 뜻이 있다. 나는 정의를 위해 사회악에 대항하여 고군분투하는 내용의 영화를 볼 때 그 어느 때보다 희열을 느낀다. 카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파헤치는 기자들을 다룬 영화 '스포트라이트'가 그러했고, 총기규제법의 통과를 위해 거대 권력과 싸우는 '미스 슬로운'이 그랬다. 그 중 ‘에린 브로코비치’는 나에게 유독 깊은 인상을 남겼다. 페미니즘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시점에서 본 영화이기 때문일지는 몰라도 한 명의 어머니로서, 또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사회의 부당함에 대항하는 작은 소수로서 ‘정의’를 위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글을 작성하며 영화에서 느낀 사회 내 만연한 문제의식을 정리해보고, 올바르고 건강한 사회 질서를 위해 앞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보았다.첫 번째는 사회 속 ‘여성’이라는 존재와 ‘경력단절’에 대한 것이었다. 영화는 에린이 구직 면접을 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녀는 오랫동안 경력이 단절되었던 여성이다. 임신, 출산으로 인해 자신의 꿈은 이뤄볼 수 없었다고 소개하는 그녀의 면접 장면은 다시 봐도 안타깝고 애처롭다. 요즘 경력단절여성을 줄여서 ‘경단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종종 보았다. 기사를 보면 기혼 여성 2명 중 1명은 ‘경단녀’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경단녀’가 생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육아를 '여성'의 역할로 제한하는 고정관념 문제, '육아 휴직'의 의향을 보이면 눈치를 주는 사회적 시선, 남편의 '육아 휴직'이 보편화 되지 않은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건강하지 않은 사회 인식들이 산후 우울증에 걸린 산모를 만들고, 독박육아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만들고, 경력이 단절된 여성을 만드는 것이다. 탐탁지 않은 면접관의 반응에 애써 미소 짓던 줄리아 로버츠의 웃음에서 쓴 맛이 느껴졌다.당시 영화의 배경에서 약 30년 정도가 흐른 지금, 과거와 달리 국가에서는 경력 단절 여성의 일자리를 지원하기 위한 여러 개선방안이 마련되었다. 우리나라 여성가족부에서도 경력단절예방 지원 사업을 확대하며 여성이 출산,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없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성평등한 환경을 조성하여 지속적으로 사업을 확대해 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경력 단절 여성을 위한 지원보다도 중요한 것은 더 이상의 경력 단절 여성이 생겨나지 않을 대책과 인식의 변화 아닐까? 스웨덴의 경우, 육아 휴직은 부부가 모두 480일을 쓸 수 있으며 그 중 최소 60일 이상은 반드시 다른 성별의 부모가 사용해야한다는 법이 제정되어 있다. 이와 같은 정부의 지원과 복지제도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육아 휴직’에 대한 부정적 시선의 변화와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지 않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책일 것이다. 영화에서 조지가 에린에게 일과 가정 중 하나만 선택할 것을 요구할 때, “지금까지 남자들이 원하는 것에 맞추며 살았어. 더 이상 포기하라고 하지 마.” 라는 에린의 대답이 가장 아팠다. 그녀가 굴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단지 비윤리적인 기업의 횡포만이 아니라 기울어져도 한참은 기울어진 현실이었을지도 모른다.두 번째는 ‘편견’에 대한 것이었다. 노출이 많은 옷을 즐겨 입고, 말투가 거칠고, 두 번의 이혼, 싱글맘, 6년 경력 단절 여성 등의 편견으로 인해 오해 받았던 에린조차도 결정적인 증거를 가진 남자를 편견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극 중 에린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옳지 않다고 분개하던 나조차도 그 남자를 위험한 인물로 규정했고 에린과 만나는 장면마다 불안하기까지 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나 또한 굉장히 모순적인 사람이었음을 느꼈다. 편견 때문에 오해받고 해고당한 그녀도 편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는 나조차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고, 아직 편견은 누구에게나 깊게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앞서 말했던 여성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도 모두 편견에 해당되며 때문에 제일 먼저 해결 되어야 할 문제의식은 ‘편견’이라고 느꼈다. 따라서 사회 내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인식의 확산이 급선무 되어야 할 것이다.마지막으로 많은 생각을 갖게 한 화제는 영화의 주된 화제인 대기업의 횡포이다. 대기업 PG&E사의 공장은 인체에 유해한 크롬 성분을 수년 간 불법적으로 폐기했고, 이에 힝클리의 주민들은 심각한 질병에 시달렸다. 에린은 우연히 발견한 의료 기록을 통해 PG&E사의 환경오염 실태를 파악하게 되고 정의를 위해 대기업에 맞선다. 피해 보상을 막기 위한 기업의 술수가 치졸하고 악랄했다. 극 중 PG&E사 사건의 피해자인 도나 존슨은 처음 자신의 병이 PG&E사 때문이 아니라는 기업의 말만 믿고 괜찮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PG&E사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을 만들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민들을 속인 것이다. 게다가 물의 오염사실을 공지한 1년 후부터는 소송 금지 등의 법적 조항을 이용하며 자신들에게 판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려 했다.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을 대기업이 비양심적인 사건을 덮고, 피해자들의 주장을 묵살하는 사실이 개탄스러웠다. 이 사실에 분노한 에린은 익명의 협박 전화를 통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끈기 있게 마을 주민 대다수의 서명을 직접 받아낸다. 결국 법원은 PG&E사에 엄청난 금액의 배상액 지불 판결을 내리며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배상 판결을 만들어 내었다.이렇듯 영화는 법과 정의가 올바르게 이루어지는 세상이라는 희망적 메시지를 제시했지만 한 편으로 우리의 현실은 정의로운가 하는 회의감을 느끼게 했다. 영화 속 PG&E사에 대한 법정의 판결은 그곳이 ‘미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바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이란 가해자의 악의적, 비도덕적인 불법행위를 응징하기 위해 실제 손해에 대한 보상적 배상 외에 추가적으로 징벌적 성격의 손해배상액을 물리는 것을 말한다. 덕분에 힝클리의 주민들이 효과적으로 PG&E사에게 어마어마한 배상액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이에 자연스럽게 2016년 국민의 공분을 샀던 옥시사태가 떠올랐다. 옥시 레킷 벤키저사는 안전성 검사를 조작하고 허위보고를 하는 등의 비윤리적 행동으로 소비자들을 농락했으며 시중에 나온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많은 이가 사망했다. 문제의 살균제가 출시된 것은 15년이 흘렀고, 지난 몇 년 간 여러 피해자들의 반발이 있었음에도 옥시 사는 살균제 사망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어서야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자본주의 사회이기에 이익 추구에만 몰두하여 양심, 책임감, 윤리 의식마저 저버릴 수 있는 걸까? 과연 각각의 양심은 집단 이기주의로 변질된 것일까? 집단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기업의 환경오염, 생산품의 책임 회피, 채용 비리, 오너의 갑질을 포함한 기업의 불공정 행위들이 더 이상 확산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업윤리가 필요하다. 갑질 논란으로 이슈가 된 '미스터 피자'와 제조물 책임 회피 문제로 인해 비난받은 'BMW'의 경우, 해당 기업에 대한 윤리 의식은 급락했으며 많은 소비자들의 신뢰를 잃는 등의 치명타를 입은 바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업윤리가 사내 자체적으로 형성되고 지속적으로 실행된다면 더 이상 기업의 횡포로 인한 피해도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더불어 우리 사회에도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와 같은 부패를 엄벌하고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법적 제도와 사회적 장치가 도입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도 옥시 사태 이후 징벌적 손해배상 법안이 발의되었으나, 특수 상황에서만 발휘되는 제도가 아닌 소비자를 확실하게 보호할 수 있는 제도의 보편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프란츠 카프카, ‘변신’ 독서감상문김**중학교 1학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주인공에게서 조금의 행복조차 느낄 수 없는 비참함과 처절함만이 점철된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에겐 그만큼 의미 있는 책이었다. 첫 문장부터가 강렬했다. "자고 일어나니 벌레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벌레가 된 후의 주인공의 삶은 처참함, 절망, 좌절 그 자체였다.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던 아들이 갑자기 벌레로 변신하고 그에게 능력이 사라지자 외면하는 가족들의 이중적 모습. 그의 동생도 처음에는 주인공을 보살피지만 점점 주인공을 경멸하게 되고, 결국 집안에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나 자신에게서 느끼는 자괴감과 사랑하던 가족들의 외면에서 느끼는 엄청난 상실감, 언제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과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끝없는 걱정과 우울한 전개. 그레고리는 벌레로 변하기 전 가정을 책임지는 듬직한 가장이었다.그러던 어느 아침, 그는 갑자기 벌레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때 그레고리는 벌레로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보다는 지금 당장 이 꼴로 출근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더욱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한다. 결국 가족들도 경제 능력이 없어진 아들로 인해 아버지는 다시 경비원으로,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고, 동생은 상점 점원으로 살림을 다시 꾸려나간다. 아버지는 그런 그레고리에게 먹던 과일들을 던지며 그레고리에게 분노를 표현하고 그레고리와 가장 친했던 여동생마저 그가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력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바랄 수 없던 가족들은 그를 증오하게 되고 이 집에서 쫓아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가정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았건만 벌레로 변해버린 데다가 가족들에게 외면당하다 못해 경멸까지 당하는 그레고리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저 평범한 인간, 아니 가족들을 위해 헌신뿐인 인간상이었기 때문에 더욱 비참했다. 그리고 생각해보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가정에서도 갑자기 경제력을 잃은 일원이 생긴다면, 다시 말해 쓸모없어진 사람이 생긴다면?우리의 가족은 어떤 행동을 보이게 될까? 그저 그에게 동정을 느끼며 사랑으로 그를 보살필까? 아니면 경제력도 잃고?몸도 성치 않으니 그냥 알아서 죽어버리도록 무시하거나 시설에 격리시켜야 할까?만약 그레고리가 벌레로 변하지 않았어도 식물인간이 된다거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그때에도 가족들의 반응은 벌레가 되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족들은 충분히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경제력을 그레고리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족들은 그레고리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경제력을 책임지지 않았다면 마치 벌레가 된 것처럼 쓸모없음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 그레고리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 또한 자신들이 사용할 생활비를 책임져 줄 경제적인 능력자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걱정이었을 것이다. 가족들이 취업을 하고 경제적 능력을 가지게 되어 더 이상 그레고리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아도 되었을 때, 가족들은 그레고리가 인간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완전히 외면한다. 그들은 그동안 가정을 위해 희생 해 온 그레고리처럼 앞으로는 자신들이 아들을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 다만 경제적 능력이 없어진, 심지어 기괴한 모습의 그레고리에게 죽음이 오길 바란다. 그렇기에 결국 끝내 숨을 거둔 그레고리의 모습이 가족들의 기쁨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볼 때 그
글로벌 경쟁시대에서 살아남기-독일의 기네스와 우리나라의 CJ제일제당의 사례를 중심으로김**최근 글로벌 경쟁이 심화되며 기업은 경쟁우위 확보를 위해 다양한 측면에서 생산 관리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21세기 융-복합시대에서 하나의 생산전략에만 의존해서는 세계적인 기업이 되는 데에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기업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생산의 차별적 능력이다. 차별적 능력이란 생산에 있어 경쟁자가 쉽게 모방하기 힘든, 경쟁자와 차별화되는 특별한 능력이나 우월한 능력을 의미한다. 즉 차별적 능력은 기업의 경쟁우위를 가져오는 생산전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세계적인 기업들 또한 다방면에서 ‘차별적 능력’에 주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어떤 차별적 능력을 적용하여 효과적 생산관리를 실시하고 있는지 조사해보았다.흑맥주를 떠올리면 단연 손꼽히는 ‘기네스’사는 제품의 성능으로 맥주 시장에서의 차별화에 성공한 기업이다. '아일랜드의 걸작'이라 불리는 기네스는 부드럽고 고소한 맛도 으뜸이지만, 크림처럼 풍부한 거품과 흑 빛의 맥주 색깔 덕분에 더욱 대중들의 주목을 끌었다. 특히 흑맥주와 선명히 구분되는 하얀 거품 층은 '크림 헤드'라고 불리며 기네스 맥주의 상징으로 인식된다.아름다운 검은 빛과 하얀 거품이 조화를 이루는 시각적 아름다움과 더불어 우리는 종종 4캔에 만원짜리 기네스 캔맥주를 마시며 캔 속에 무언가가 들어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바로 기네스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드높였다고 할 수 있는 '질소공 위젯'의 존재이다. 맥주를 포장할 때, 위젯을 안에 넣고 액체 질소를 주입 후 뚜껑을 닫으면, 액체질소에서 맥주가 다 녹일 수 없는 양의 질소가 나오고, 캔 안의 압력이 높아진다. 이 압력 때문에 여분의 질소가 미세한 구멍을 가진 위젯 속으로 투입되고, 이후 유통된 맥주를 구매한 소비자가 캔을 따는 동시에 캔 속의 압력이 낮아지고, 위젯 속의 질소가 미세한 구멍을 통해 다시 빠져나오게 된다. 그 미세한 구멍을 통해 빠져나온 질소 방울이 표면으로 떠올라 기네스의 트레이드 마크인 거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1989년에 개발된 이 기술은 기네스 맥주를 개봉했을 때 공기가 쑥 빨려 들어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질소를 방출하여 신선한 맥주 맛을 즐기려는 고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방금 따른 듯한 신선함과 더 비싼 값을 지불하더라도 250년의 역사를 지닌 프리미엄 맥주가 주는 만족감으로 기능적 브랜드 이미지를 차별화한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기술이 현재 기네스가 명성 있는 기업일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다음으로 바로 우리나라 기업인 CJ제일제당의 ‘비비고’의 성공이다. 최근 국내 만두 시장을 넘어 세계로 뛰어든 CJ제일제당의 비비고 만두가 매출 6,400억원, 글로벌 매출 비중 50%를 돌파하며 ‘K-만두’ 열풍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미국 만두 시장을 25년간 독식해온 ‘링링’을 꺾고 미국 만두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한 것이다. 같은 시기에 만두의 원조 국가인 중국에서도 그 잠재력이 입증되었다. 중국 광둥성 일대에서 비비고 만두가 좋은 반응을 얻어 일부 대형마트에서는 판매량 1위를 차지한 것이다. 타 업체와 다른 생산전략을 수립한 CJ 제일제당 비비고의 차별화 능력은 철저한 시장조사와 소비자 니즈, 꼼꼼한 식문화 트렌드 분석, 현지 소비자의 취향 저격 등을 꼽을 수 있다. 현지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끊임없이 제품을 연구하고, 현지 업체를 인수해 유통망과 생산 인프라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식품의 세계화는 결코 쉬운 전략이 아니다. 우리나라 음식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현지인이 좋아할 만한 매력적인 요소를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J제일제당은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비비고 만두의 글로벌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CJ는 세계시장으로 진출 이전에,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을 아이템으로 어떤 제품을 선택할지 고민했다. 비빔밥, 고추장 등 한국 음식 고유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제품들은 대상에서 제외했다. 외국인이 어떻게 먹어야할지 모르거나 자국 음식과 괴리가 큰 제품을 내놓으면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치열한 논의 끝에 CJ의 데이터와 경험을 바탕으로 만두가 결정되었다. 중개상을 통해 미국, 유럽, 일본 등에 각종 한국 조미료등을 판매한 결과, 만두의 반응이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이에 CJ제일제당은 철저히 현지인의 식습관을 겨냥한 제품을 출시했다. CJ는 현지 시장에서 이미 활약하고 있는 메이저 업체들을 따돌리기 위해선 비비고 만두만의 차별성을 확실히 드러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 국가와 지역마다 사람들이 익숙하다고 느끼는 맛과 향이 분명히 있으므로 이를 내세워 미국에는 비비고 스팀 덤플링과 미니완탕, 중국에는 비비고 교황, 왕수교자를 출시했다. 더불어 베트남에선 비비고 해산물 만두와 고기와 옥수수가 들어간 '미트 앤 콘' 만두가 주력 제품이며,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비비고 왕교자도 한국의 생산품과는 완전히 다르다. 러시아 사람들이 즐겨 먹는 펠메니에 고기가 많이 들어가있는 것을 고려해 소고기 양을 대폭 늘렸기 때문이다. 일본에선 수교자(물만두)를 중심으로 판매하는데, 일본인들이 만두를 보통 국물 요리에 활용한다는 점에서 착안한 것이다. 이 같은 과정으로 새롭게 탄생한 비비고 만두는 건강하고 익숙한 맛으로 현지인들을 사로잡았다. 더불어 제품 개선 활동도 신속하게 진행하여 현지 소비자들의 제품에 대한 반응을 살피며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를 실시했다.
? 목 차Ⅰ 서론1. 평소 장개석에 대한 인식 3Ⅱ 본론1. 군인이 되기까지의 생애 32. 혁명 생애의 시작 43. 쑨원 휘하의 권력 도모 44. 국민당 장악 5가. 송미령과의 결혼 5나. 북벌원정 개시 5다. 중원전쟁 6라. 제 2차 국공합작과 중일전쟁 6마. 국공내전의 발발 75. 타이완으로 8Ⅲ 결론Ⅳ 참고문헌중국혁명의 기로에 선 장개석,-중화제국 건설에 실패한 풍운아김**고등학교 때, 중국 영화 “인생”을 본 적이 있다. 인상 깊었던 내용 중 주인공 부귀는 당시 전역을 떠돌며 그림자극을 하는데, 떠돌이 일정 도중 국민당 군대에 징집 당해 군대 내에서 그림자극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국민당 군대를 습격한 공산당 군대에게 발견되어 죽음을 맞을 뻔 했으나 공산당 군사들에게도 그림자극 재능을 인정받아 목숨을 연명한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당시의 중국은 국공내전이 치열했음을 알 수 있었지만,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리포트 자료를 조사하며 당시 국민당을 장악했던 이가 장개석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영화를 보여 주시던 선생님께 들은 바로는 국민당이 공산당보다 중국 국민의 통치에 좀 더 유한 편이었다고 들었는데, 이번 과제를 통해 당시 국민당의 총수이던 장개석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통치를 했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장개석의 아버지는 소금장수였다. 그가 8살일 적에 돌아가셨다. 그 뒤 홀어머니에게 길러진 장개석은 어릴 때부터 잠시도 쉴 새 없이 집안일을 거들고, 또 공부에 힘써야 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유교적 예법이 몸에 밴 사람으로서 엄격한 편이었다. 어린 장개석에게 행동 하나하나를 예법대로 하길 강요하고, 조금만 어긋나도 가차 없이 매를 들었다고 한다. 그는 어릴 적 당시 한학을 공부하다, 17세가 되던 해에 서양 학문을 배우기 위해 근대식 고등학교에 다니다 일본으로 떠난다. 사관생도후보를 가르치는 학교였다. 중국을 떠나기 전 장개석은 청나라에 굴복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변발을 잘라 집으로 보냈다고 한다. 자신이 혁명의 길에달 받지만, 병기 공장으로 가던 도중 그는 경비병에게 적발되어 도망친다. 수적으로 열세인 그의 군사가 커다란 손실을 입은 뒤, 부대를 포기하고 공동 조계지로 달아난 장개석은 천치메이와 함께 일본으로 배를 타고 도주한다. 쑨원은 혁명 자금 조달을 위해 천치메이와 장개석에게 동남아 여행을 지시하지만, 혁명가들은 끝없는 실패와 더불어 나날이 심각해지는 재정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거래를 확정하기 위해 회담을 갖던 천치메이는 위안스카이가 고용한 암살자로 인해 사살 당한다. 가까웠던 동료 천치메이의 죽음으로 장개석은 큰 충격에 빠졌다. 아마 천치메이의 죽음이 그의 혁명 단계에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된다. 혁명 동지의 죽음을 비롯한 침체기에 드디어 반 위안스카이 세력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위안스카이가 패혈증으로 사망한 것이다. 이후 중국 대륙 전역은 군벌혼전 시대, 군벌할거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후 쑨원의 지시로 장개석은 각 국을 오가며 정세파악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당시의 쑨원은 소비에트 연방과 관계를 발전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는 장군 계급에 오른 장개석을 모스크바로 보내 국민당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살피도록 지시한다. 그는 레닌이나 스탈린 등의 고위 인물들은 만날 수 없었으나, 트로츠키와의 회견에서 소련이 그들을 있는 힘껏 도와줄 것이라는 언급을 들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반대로 코민테른은 장개석에게 불쾌한 타격을 가한다. 당시 코민테른은 군사원조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쑨원의 지원 요청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코민테른은 국민당이 단지 ‘조직단계’에 불과하며 청 제국의 토대위에 세워지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을 통해 장개석은 공산당은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사건들이 앞으로 장개석이 항일전쟁을 준비하면서도 공산당 토벌을 강하게 주장했던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그의 목표는 국민당의 군사 부문의 지도자로 점차 자리매김하는 것이었다. 1924년 쑨원은 그에게 황푸군관학교를 세워 혁원 사후, 장개석과 국민당 좌파의 영수 왕정위의 관계는 위기에 이른다. 장개석은 왕정위가 자신의 기반을 약화하고자 갖은 애를 쓰고 있다고 두려워했다. 따라서 우파의 걱정은 날로 커져만 갔다. 국민당은 공산당 정치 활동가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 왕정위가 국민당의 모든 군대 내에서 총 당 대표로 임명되고, 군대 내에서 정치 위원의 권력을 더욱 강화한다고 결정하자 장개석의 두려움은 더욱 깊어졌다. 잇따라 광저우 곳곳에 장개석을 비판하는 전단지가 뿌려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26년 3월, 장개석이 주도한 ‘중산함 사건’이 터진다. 지금까지도 정확한 내막이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이 사건은 소위 ‘장개석 납치설’이 정설이다. 장개석은 자신이 당내 좌익계에 의해 모스크바로 납치될 뻔 했다고 주장한다. 중산함은 장개석이 평소 황푸와 광저우를 오갈 때 탑승하던 해군함정 중 하나였다. 이 사건은 쑨원 사후 내부적으로 전개된 권력투쟁의 절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황푸군관학교와 제1군에 있던 공산당원들은 퇴출되고, 1차 국공합작 또한 자연스레 붕괴된다. 장개석이 군사위원회를 장악하며 왕정위는 프랑스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국민당의 조직부장과 국민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된 장개석은 국민당의 1인자로 떠오르며 새로운 난징정부가 수립된다.장개석은 국민당의 1인자가 되자마자 “북벌”을 추진한다. 그러나 자신의 군대를 유지하고 북벌이라고 하는 거대한 ‘사업’의 진행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장개석은 자신을 지지하는 상하이의 은행가나 기업가들을 쥐어짰다. 하지만 각종 명목을 동원해서 자금을 확보하려 해도 필요한 만큼의 돈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한 와중에 장개석의 군대는 전략적 요충지인 서주를 차지하기 위해 벌인 전투에서 군벌 군에게 패퇴한다. 장개석은 여러 힘든 상황에 닥쳐 일시적으로 국민 혁명군 총사령관을 사임하고 하야한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부유한 집안의 딸인 송미령과의 결혼을 추진한다. 결국 그는 아내로서, 동반자로킬 목적에서 군대정리를 구체화한다는 명목으로 편견회의를 개최한다. 편견회의는 북벌 과정에서 엄청나게 팽창한 군대를 축소개편하고, 지휘권을 중앙에 집중시키는 것이 골자였다. 이는 곧 지방군벌의 세력기반 해체를 의미했기 때문에 3대 세력이었던 이종인, 풍옥상, 염석산 모두 크게 반발한다. 장개석을 포함한 4명의 세력들은 곧 전투로 발전한다.장개석의 군대는 3개월 만에 반 장개석 연합전선의 주력군을 거의 괴멸시켰다. 그러나 이는 서막에 불과했다. 이를 계기로 풍옥상과의 싸움을 비롯한 두 번째 전투 등을 총칭하는 소위 중원대전이 빚어진다. 결국 중원대전은 장개석의 승리로 끝을 맺고, 국민당 당 중앙 또한 장개석 일파가 장악한다. 장개석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이로써 중화민국 총통이자 전군의 통수권자가 된 장개석은 난징을 수도로 한 국민정부를 수립한다. 위안스카이 사후 여러 개로 나뉘었던 대소 군벌들이 장개석의 지휘 하에 들어간 것은 중국 현대사의 새로운 흐름이라 할 수 있었다.‘중원대전’ 이후 장개석은 공산당을 초기에 소탕하고자 했기 때문에, “소공전”이라 하여 공산당을 토벌하는 전쟁을 벌인다. 하지만 그는 모택동에 대한 원정을 도중에 중단해야만 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무력 점령하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운 만주국을 주장하여 중국 침략을 본격화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장개석은 만주사변 이후에도 공산당 척결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일본군의 즉각적인 위험이 제거되자 장개석은 ‘안내양외’를 외치며 국내를 평정하는 것이 먼저이고, 외국의 침략을 물리치는 것은 다음이라고 주장하며 공산당군을 공격하려 하였다. 심지어 장개석은 외신에게 중국에 있어 ‘일본은 피부병이고 공산당은 심장병이다’라 말할 정도로 공산당을 혐오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항일전쟁의 필요성이 급박해짐에 따라 장쉐량이 1936년 시안 방문 중의 장개석을 감금하고 ‘항일구국, 내전종식’을 호소하며 국공합작을 촉구한다. 결국 장개석도 고집을 꺾고 제2차 국공합작에 동의한다.일본의나, 공산당은 중일 전쟁을 통해 군사 역량을 한층 더 발전시켜 나갔고, 모택동을 중심으로 한 중국 공산당의 세력은 날로 팽창했다.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고,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함으로써 중국의 앞날은 개는 듯했다. 장개석은 1943년 11월, 미국의 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을 카이로에서 만나 회담을 갖고 만주, 대만 등 1914년 이래 일본이 점령한 모든 중국 영토의 반환을 약속 받음으로써 한껏 승리감에 취할 수 있었다. 이 회담들은 그의 아내 송미령의 영향 또한 컸다. 비록 그 승리감은 뒤이은 테헤란 회담과 얄타 회담에서 소외되고, 미국이 파견한 총사령관 스틸웰과 견원지간이 되면서 다소 빛이 바랬으나, 장개석의 지휘 하에 중국은 사상 최대의 국난을 극복하고, 일본의 제국주의 시대 내내 시달려온 반식민지의 그림자에서도 벗어나 “세계 5강”의 하나로까지 우뚝 서게 되었다.1945년 전쟁이 끝난 후, 장개석은 두루 화해를 시도한다. 일본에 대해서는 중국에 잔류하고 있던 일본군과 거류민을 안전히 귀국시키고 대일배상 청구권과 분할 점령권을 자진 포기하며 덕으로 원수를 갚는다는 정책을 취한다. 또한 소련과 우호 동맹, 모택동을 충칭으로 초천해 회담을 갖고 협력을 다짐한다. 국민당의 장개석과 공산당의 모택동 두 사람간의 간격은 매우 컸다. 장개석은 실질적인 정치 및 군사 권력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는 모택동의 군대인 홍군의 규모를 현저히 감축하고, 국민당 정부의 권위를 중국 전역으로 확장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반해 모택동은 공산당 지도부가 베이징 군사 위원회 주석 직위 등 실체적인 군대를 갖길 원했다. 이 둘의 회담을 통한 국공의 화해는 길지 않았다. 장개석은 수적 우위만 믿고 얼마 후 일방적으로 협정을 깨트리며 모택동에게 공격을 재개한다. 국공내전의 발발이었다. 국공내전 당시 초기에는 국민당이 절대 유리했다. 공산군 120만 명에 비해 국민당 정부군은 43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후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군이 방심한 틈을 타 동북 만주에서 점차다.
서양의 의복 문화김**서양인들은 각 시대별로 무엇을 입고 어떤 유행을 만들어 나갔을까? 서유럽 중세시기의 복장을 생각하면 풍성한 치마와 화려한 장신구들이 먼저 떠오른다. 아마 어머니가 좋아하던 만화영화 ‘베르사유의 장미’나 ‘마리 앙투아네트’를 다룬 영화의 영향이 클 것이다.르네상스의 복식은 15세기 후반의 초기 르네상스와 16세기의 후기 르네상스 복식으로 분류한다. 이 시기의 의복은 신분과 물질적 풍요의 표현수단이었다. 창조적인 것을 좋아했다는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의 기질은 복식에도 나타났는데, 그 중 주목받는 것은 15세기말부터 유행한 슬래시이다. 슬래시란 의복의 일부분을 속옷이 보이게 길게 터놓은 것을 말한다. 슬래시는 독일 군인에 의해 유행하였으며 처음엔 전쟁 중 찢어진 군복을 텐트나 깃발 조각 등으로 기워서 착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러한 기법이 하나의 패션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여성복의 경우, 슬래시 사이로는 화려한 속옷이 보이기도 하고 가장자리를 자수와 보석으로 장식하는 등,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러워 마치 옷 여기저기에 꽃이 핀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슬래시는 당시 유럽에서 열병과 같이 유행되었고, 사치와 낭비로 인해 금지령이 내리기도 했으나 유행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또한 남자들은 남성미를 강조하기 위해 어깨와 소매를 과도하게 부풀렸다. 가슴 강조를 위해 패드를 넣어 불룩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는 원래 신체 보호의 목적이었으나 후에 신체의 선을 과장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다리에는 꼭 끼는 바지를 입고 심을 넣어 바지 가랑이 전면 부분, 생식기가 위치한 부분을 덮개를 통해 돌출시킨 코드피스로 남성미를 강조하기도 했다. 여자들은 여성미를 선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목둘레선을 가슴 깊이 파고 허리를 가늘게 조였다. 허리는 더 가늘어 보이도록 소매와 스커트를 부풀리며 인위적으로 신체의 각 부위를 강조하는 디자인이 시작됐다. 이를 통해 르네상스 시기엔 대조적인 남녀 성차가 극한적인 매력의 대상으로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셔츠에서 러프가 유행했는데, 러프는 맞주름을 잡은 수레바퀴형 칼라를 말한다.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겹의 레이스와 주름이 있는 러프는 러프 칼라의 극치를 보여준다. 러프칼라는 머리를 곧게 세우는 자세를 취해야 했기에 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귀족문화의 전형이었다. 스커트는 파팅 게일 착용을 통해 원추형으로 부풀게 했다. 파팅게일이란 16세기 후반에 스커트를 부풀게 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속치마의 일종이다. 파팅게일은 메리 튜더와 펠리페 2세의 결혼식 때 영국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파팅게일을 하고 원통형 스커트를 입은 모습은 호화로우며 위풍당당한 외관이기 때문에 주로 궁정복이나 의식복으로 이용되었는데, 일상생활을 하는데 불편해서 소수의 귀족들만 착용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를 즐겨 입으며 화려함과 위엄을 과시했다고 한다. 또한 16세기엔 자수법이 발달하며 의복에서부터 신발, 머리 수건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를 놓았다. 자수 기법이 다양하게 개발됨과 아울러 수공업에 의한 레이스의 보급이 16세기 복식미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또한 16세기는 펄 에이지라 불릴 만큼 진주,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등의 보석들을 왕과 귀족의 의상, 장신구에 많이 사용했다.17세기에 이르러 바로크 양식이 나타난다. 바로크는 ‘일그러진 진주’를 의미하는 에스파냐어 ‘바루카’에서 유래된 말로 ‘이상한 모양, 기이한 모양’을 의미한다. 이 시기에는 왕의 취향이 복식의 유행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궁정이 중심이 되어 복식 문화를 이끌어 간 것이다. 프랑스는 루이 13세와 14세의 통치 시기에 절대왕정을 기반으로 유럽의 패션을 선도해갔다. 특히 17세기 후반에 등장한 퐁탕주 머리장식은 루이 14세가 총애하던 마담 퐁탕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퐁탕주 헤어의 유래는 퐁탕주 부인이 사냥에서 돌아오다가 그만 머리카락이 풀어지고 흐트러지는 바람에 이를 걷어 올려 자신의 양말 대님으로 붙들어 올려 맸던 것에서 유행, 다음 날부터 궁정의 모든 여자들이 머리를 양말 대님으로 올렸다는 일화가 있다. 이처럼 궁정 생활 배경이 당시의 의복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바로크 시대 초기의 여성의복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려함이나 인체의 과장이 사라지고 잠시 소박해졌다. 스커트에 파딩 게일을 넣어 부풀리지 않고 속에 코르셋을 입지 않았으며, 짧은 길이의 소매와 편안한 실루엣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왕을 중심으로 한 상류층의 화려한 의상이 이러한 검소한 의상의 유행을 막았다. 중기가 되자 또다시 바로크적 특색을 나타내며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이고 허리선을 나타냈다. 그러나 스커트에서는 파딩 게일을 사용하지 않고 여러 겹의 페티코트, 속치마들로 부풀렸다. 후기에는 드레스 윗부분에 보석이나 장신구를 단 스터머커, 여러 겹의 목둘레 레이스 등이 특징으로 나타났다. 러프가 유행한 16세기와 달리 네크라인 칼라가 비교적 낮아지고 후기로 가며 네크라인이 깊이 파지기 시작하면서 그 사이로 어깨가 노출되었다. 이 시대 남성의 머리 모양은 가장 여성스럽고 풍성했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가발도 유행했는데, 크기가 커진 가발로 인해 대부분 모자를 손에 들고 다녔다. 여성들은 대부분 가발을 쓰지 않았다. 바로크 초기에는 머리를 높이 빗어 올린 후 뒤로 넘기고 리본, 진주, 보석등으로 장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카락을 양옆으로 부풀리거나 어깨까지 늘어뜨렸다. 옷의 네크라인이 깊게 파져 어깨가 노출된 것과 함께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에는 의복이 사람을 보호하는 기능 외에 의상 착용자의 지적 태도와 종교적 성향, 사회.경제적 지위 그리고 성적 역할을 나타내었다. 따라서 의상의 사회적 역할이 이 시대에 가장 극명히 나타났다고 한다. 르네상스 이후 의상에 나타난 에로티시즘의 표현은 이 시대에 극치를 이룬 것이다. 남성들은 어깨에 심과 패드를 넣어 볼록하게 입음으로써 상단 부분이 넓게 보이게 해서 위용을 나타내려 했고,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날렵해지는 몸매를 보이고자 하의를 꽉 조이게 입어 역삼각형의 자태를 추구했다. 이는 남성의 복식에 나타난 에로티시즘의 표현이었다. 그 반면에 여성들은 네크라인을 크게 트고 목덜미나 앞가슴을 드러낸 이브닝 드레스, 로브 데콜테를 통해 가슴이 돋보이게 하고 허리가 가늘어 보이게 하는 동시에 상의가 몸에 꼭 끼게 했다. 하의는 부풀어 오른 스커트를 입어 에로티시즘을 강조했다.로코코시대. 18세기는 바로크 시대의 중후하고 화려한 복식에서 로코코 스타일의 우아하고 섬세한 복식으로 변화한 시기이다. 대중들이 베르사유의 장미나 숱한 영화등을 통해 막연히 떠올리고 있는 중세 의상이 이 시대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코코는 루이 14세 사후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유럽의 예술 양식이다. 로코코의 어원은 프랑스어의 ‘로카이유’와 ‘코기유’로 정원의 장식으로 사용된 조개껍질이나 작은 돌의 곡선 장식을 의미한다. 로코코 예술 양식은 프랑스 살롱을 중심으로 유럽 여러 나라로 전파되고, 부유층 부인들을 중심으로 제각기 독자적인 장식미술의 양식으로 발전해 아름다운 곡선을 주제로 하면서 화려하고 세련된 귀족풍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에는 부르주아층의 급성장으로 인해 부인들의 살롱문화가 만연했다. 살롱문화는 우아하고 섬세하며 부드러웠다. 부인복은 사교장의 주요한 실내 장식이 되었다. 따라서 복식 측면에서도 남성보다 여성 복식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프랑스 루이 15세의 애인 마담 퐁파두르와 마담 뒤바리,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당시 프랑스의 복식에 많은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서도 프랑스의 복식 유행을 따랐기 때문에 이들은 당시 유럽의 패션리더 역할을 했다. 특히 1770~1780년경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의 패션을 주도했다. 그녀는 로즈 베르를 왕실 전속 디자이너로 기용해 자신의 의상을 만들게 하고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에 작은 농장을 만드는 한편, 젖을 짜는 처녀 역을 맡아 시골풍의 옷을 입고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러한 왕비의 옷차림에서 비롯된 새로운 아이디어가 복식에 도입되어 유행하기도 했다. 로코코시대 복식은 꽃, 리본 장식, 루프, 꽃바구니 등이 건축의 벽면 장식, 직물의 문양, 의복 장식 등에서 기묘하게 어울리며 부드럽고 섬세하며, 우아한 느낌을 준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수세기동안 여성의 옷차림은 코르셋, 어깨와 가슴 그리고 등허리의 곡선이 드러나는 드레스등 점점 더 에로틱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그 중 18세기의 복식은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과도한 장식들과 섬세함으로 로코코 시대의 복식을 대변했다. 여성의 헤어스타일은 1760년경부터 크고 높아져서 마치 탑을 쌓아 올린 것 같은 형태가 되었는데, 어떤 머리 모양은 높이가 3피트나 되는 것도 있었다. 이런 건축적인 머리형은 남성 미용사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러한 높은 머리를 만들 때에는 말총을 채워 넣은 일종의 쿠션과 같은 패드와 가발등을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