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1. 모든 문제의 정답은 내 안에 있다.이 책과 관련하여 ‘데미안이 과연 실존인물인가? 싱크레어의 상상이 만들어낸 존재인가?’ 라는 질문과 관련한 논쟁이 있다고 들었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 '그럴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라고 생각했다. 데미안이 실제로 싱클레어 밖에 있는 존재라면 데미안은 세상의 입체성이라는깨달음을 얻게 하는 스승의 역할일 것이다. 한편 데미안이 상상 속 존재일 뿐 싱클레어와 동일한존재라면 이 소설의 메세지는 '모든 문제의 정답은 이미 내안에 있다' 라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있을 것이다.소설의 후반부 싱클레어가 전쟁 중 부상을 입고 다친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바라볼때, 마치 자신의 친구 데미안과 같은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싱클레어가 진정한 자신의 내면세계에대해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것이다. 그리고 또 동시에 어린시절부터 함께 해온 데미안의 모습은 싱클레어에게 있어 ‘문제해결사'였다는 점에서 결국 데미안이 “모든 문제의 정답은 이미 내안에 있다" 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2. 심리상담은 의지와 용기가 선행되어야 하는 일작가가 이 소설을 쓰던 당시의 상황적 배경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작가가 개인적으로 처한 여러가지 사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당시 헤세는 랑 박사라는 정신분석가로부터 상담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이점이 가장 흥미로웠는데, 그 이유는 내가 심리상담을 진로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나는 심리상담을 업으로 삼고 싶다면 반드시 상담을 직접 내담자의 입장에서 경험해보라는 심리학과 교수님의 말에 실제로 작년 여름 학교 생활상담소에서 상담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상담을 받기 전에는 마냥 ‘상담만 받으면 지금 내가 겪는 심리적 고통은 마법처럼 사라져 있겠지!' 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상담을 받는 과정은 끊임없이 나를 “재학습”하는 기분이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아예 재정의 하는 과정, 그리고 나를 현재 괴롭게 만드는 사건의 양면성에대해 재조명하는 과정을 거쳤다. 나의 여러 성격 중 부끄러운 면, 마주하고 싶지 않은 면을 끊임없이 바라봐야 하는 시간이었다.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헤세 또한 일종의 상담이라는 것을 경험하면서 결국 인생의 위기에서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용기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3. 어른이 된다는 것이 소설을 읽고 또 깨닫게 된 것은 ‘상반되는 것이 공존해야 비로소 완전해진다’라는 것이다. 물리학의 개념에 따르면 '존재한다’라는 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2 가지 이상의 것이 존재해야 한다고 한다. 오로지 A 한가지만 성립될 경우, A 는 어떠한 의미도 갖을 수 없기에 A 는 반드시 A 를 구분짓게 만들어주는 B 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소설 이전에도 나에게는상당한 울림이 있었는데, 소설 속에서도 이러한 메세지를 던지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꼬마 싱클레어, 잘 들어. 나는 떠날거야. 너는 어쩌면 다시 한번 나를 필요로 할거야. 하지만이제 네가 나를 부르면 나는 그렇게 거칠게 말을 타거나 기차를 타고 달려오지 못해. 그럴 때넌, 너 자신 안으로 귀 기울여야 해. 그럼면 알아차릴거야.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걸."개인의 내적 성장의 측면에서 바라보았을때도 마찬가지이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여러가지 면 중 한 가지에만 고집하려고 한다.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선’에만 집착하던 어린 싱클레어가 자신 내면의 ‘악’을 깨닫게 될때마다 불안하고 공포에 시달렸던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불안을 견뎌내지 못하면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를 먹는게 아니라, 이렇게 불안과 용기있게 직면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단 한가지 측면만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 사람만이 어른스러움을 누릴수 있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인정하기 싫은 측면을 인정하는 것. 이는 '자기객관화'라고 표현될수 있다.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는 과정이 굉장히 힘든 것 처럼 자기객관화는 매우 힘든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정한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고정된 나’라는 알을
서평1. 햄릿은 정말 우유부단한 인간인가?햄릿에 대한 다양한 해석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는 ‘우유부단’인 것 같다. 소위 ‘햄릿형 인간’, ‘돈키호테 형 인간’으로 구분할 정도라는 것을 본다면 분명 햄릿의 가장 큰 특징을 우유부단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책을 읽고 해설을 읽기 전까지는 햄릿이 우유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석을 읽고 나서야 햄릿이 우유부단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점검해보게 되었으니 말이다.물론 작품 속에서 기도하는 숙부를 죽일 수 있음에도 ‘천국에 갈 까봐’ 죽이지 않는 장면에서는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햄릿이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면, 나 또한 쉽사리 죽이려는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 같다. 과연 나는 과감하게 복수할 수 있었을까? 상상해본다면 나 또한 햄릿처럼 갈팡질팡하는 순간들이 분명 존재할 것 같다. 햄릿이 직면한 상황은 단순히 숙부에 대한 개인적이고 일차원적인 원망이 아니라, 여러가지 복합적 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이다.내가 만약 햄릿의 입장이라고 상상해본다면, 나는 여전히 숙부가 밉고 어머니가 원망스러울 수 있겠지만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서 아버지를 잘 보내드리고 숙부와 어머니의 행복을 기원했을 것 같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마음이 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그리고 나라면 더이상 숙부와 어머니 곁에 남지 않고 떠날 것 같다.내가 소설을 읽으며 햄릿이 우유부단하다고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가장 유명한 대사인 “죽느냐 사느냐”의 표현 덕분이었다. 이 장면은 물론 햄릿이 두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12 세기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햄릿은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기보다는, 신에게 질문하는 것이 더욱 익숙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햄릿은 선택의 순간에서 직면해야하는 불안을 신에게 미뤄두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혀 맞이한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햄릿이 우유부단하기보다는 오히려 심사숙고하는 용감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2. 소설과 영화 의 유사성햄릿을 읽으며 ‘아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스토리인데...’ 라는 인상을 계속해서 받았다. 그런데 여러가지 해석을 참조하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다름아닌 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의 제작진이 직접 의 영향을 받아 모티브로 사용했다고 언급하였다고 한다.두 작품의 줄거리는 상당히 비슷하다. 두 주인공 모두 죽은 아버지의 귀신을 만나 각성한 뒤 아버지를 죽이고 왕자를 차지한 삼촌을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딩은 다르다. 의 결말은 과 달리 비극적이지 않다. 의 주인공 심바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삼촌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를 죽이지 않고 그저 왕국에서 쫓아내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당당히 왕이 된다. 하지만 은 작품 내내 그를 죽이고 복수하고자 계획을 짜는 인물이고 끝내 삼촌은 물론, 어머니, 애인,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그야말로 비극인 것이다.그렇다면 무엇이 엔딩의 차이를 만들었을까?첫째, 햄릿은 의 주인공 심바와 달리 철저히 혼자서 고민했다. 미친 척을 하면서 자신을 고립시키면서까지 혼자 삼촌인 왕을 죽일 방도를 고민했다. 반면 심바에게는 티몬과 품바라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변 인물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아 결말에 결국 그들이 심바의 좋은 조력자가 되어준다.둘째, 심바의 아버지 무파사는 귀신이 되어 심바에게 찾아왔을 때 자신을 대신하여 복수해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알라’라고 조언했을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어쩌면 햄릿의 비극의 시작은 햄릿 아버지가 복수를 요구하였을 때부터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셋째,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햄릿은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이라는 이분법적인 주제를 고민한다. 이대로 사는 것을 택할지, 새로운 선택을 할지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런데 의 심바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좌우명이 ‘하쿠나 마타타’ 즉, ‘이것이면 어떻고 저것이면 어때’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 이다. ‘뭐든지 잘 될 거야‘ 라는 다소 낙관적인 메세지는 작품의 결말을 비극적이지 않게 이끌어준 메세지인 것이다.3.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이상주의자“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는 표현에 대해 다양한 번역의 논란이 있다는 사실을 접한 바 있다. 원문으로는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인데, 혹자는 이것을 죽음과 삶의 것으로 분석한 것이 초월 번역이라고 보는 것이다. 나 또한 이 문장을 작품 속에서 만났을 때 왜 이 맥락에 이런 말을 하는지에 대해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내가 받아들인 표현은 “이대로 살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숙부의 부조리함을 알고도 모른 척 하고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변화를 꾀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라고 본 것이다.크게 바라본다면 햄릿은 기성세대의 타락을 그저 냅 두고 바라볼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를 고민했다고도 볼 수 있다. 나의 부모님 세대가 어린 시절부터 가장 많이 들어온 말은 “대학 가서 데모하고 다니지 마라” 였다고 한다. 이처럼 그 당시만 해도 대학생들은 데모를 통해 기성세대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익숙한 시대였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학생들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기 어려운 것 같다. 오히려 기성세대와의 차이점을 강조하고 세대갈등이 더욱 강조되는 것으로 보인다. 기성세대에게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햄릿은 오히려 변화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은 인물인 것 같다. 햄릿을 둔 여러가지 평가 중 ‘이상주의자’라는 말이 있다. 이상을 추구하다가 선택을 내리지 못한 우유부단함을 비판하는 의견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햄릿과 같은 이상주의자는 여전히 필요한 것 같다. 많은 대중들이 염세주의적인 자세로 변화를 기대하지 않고 변화를 희망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햄릿의 숙부인 왕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평출판사 : 별글 (2018.2.20)1. 뫼르소는 외계인인가 여행자인가?‘이방인’을 사전에 검색하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 이라는 뜻이 나온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의미가 충분히 담기지 못하여 영어 단어를 찾아보았다. 이방인을 영어로 하면 크게 두가지가 있다. ‘alien’ 그리고 ‘foreigner’. 둘은 비슷한 듯 보이면서도 꽤나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alien 의 뜻은 ‘생경한’, ‘이질적인’, ‘성질이 다른’, ‘조화되지 않는’ 등으로 번역된다. 흔히 알고 있는 명사로는 ‘외계인’이 있다. 반면, foreigner 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일종의 ‘여행자’라고 할 수 있다.나는 처음 책을 읽을 때 주인공 뫼르소가 alien, 즉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태양이 눈부셔서 타인을 살해하는 행위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사이코패스를 표현한건가?’ 라는 생각도 들면서 사회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책이 끝날 때까지도 작가는 뫼르소에게 연민을 느낄만한 여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흔히 소설 속 가련한 주인공, 그 주인공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하여 동정을 느끼게 할 만한 장치는 조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뫼르소는 소설 속에서도,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도 외계인처럼 느껴진다.그런데 이방인이라는 단어를 ‘여행자’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뫼르소에 대한 이해는 완전히 달라진다. 여행자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있다. 그리고 그 여행지에 평생 머무르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잠깐 머무른 것일 뿐, 언젠가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뫼르소가 여행자라면 뫼르소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뫼르소는 소설 전반에 걸쳐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모르겠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등의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나는 왜 이렇게 주인공이 수동적인 태도, 무기력한 태도를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런데 뫼르소를 ‘삶과 죽음 사이를 여행하는 여행자’라고 바라본다면 뫼르소의 자세가 조금은 이해되었다. 뫼르소는 인간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소유하 려하거나 집착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모두 두고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그래서 뫼르소는 어쩐지 해탈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장례식에서 타인의 슬픔에 무덤덤하고, 파리에 갈 수 있는 좋은 기회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사랑하는 연인이 있어도 굳이 결혼을 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닥친 여러가지 사건들의 정당성을 찾으려 하거나, 거짓말을 사용하여 운명을 거부하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저 일련의 사건들을 모두 ‘우연’에 의한 것, ‘불운해서’ 발생한 일 정도로 여긴다.2. 뫼르소가 햇빛을 견디지 못한 이유해탈의 경지에 가까운 뫼르소가 처음으로 ‘소유하고 싶다’는 마음을 느낀 것은 알제 별장에서 부터였다. 그는 처음으로 맑게 웃는 마리를 보며 처음으로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pg59) 함께 수영을 하며 그녀를 갖고 싶어 졌다고 표현한다. 허기를 느껴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기도 한다. (pg61) 그는 알제 별장에서의 이러한 경험을 책 후반부 ‘행복’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런데도 뫼르소는 왜 알제 별장에서 끝내 사람을 죽인 것일까? 그는 왜 햇빛을 견디지 못했는가?나는 이 소설에서 ‘햇빛’이 의미하는 것이 “부질없음”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햇빛이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였다. 그는 여행자의 마음가짐으로 살기에, 어머니의 죽음이 그저 죽음으로 다시 ‘돌아간 것’ 쯤으로 여긴다. 삶은 그저 태어나서 돌아가는 그런 부질없는 것으로 느껴질 뿐인 것이다. 그리고 뫼르소는 장례식장에서 아스팔트를 녹여버릴 정도로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그런 ‘삶과 죽음의 부질없음’을 느꼈을 것이다.이렇게 강렬한 햇빛이 다시금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아랍인과 대치하고 있을 때이다. 뜨거운 햇볕에 뺨이 타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태양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그날과 같은 태양이었다고 표현한다. 그는 그날처럼 머리가 아프고, 이마의 모든 핏줄이 펄떡거리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한걸음 나선다. 그런다고 태양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걸음 나선다. (pg68)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느꼈던 삶의 부질없음을 견디지 못하고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뫼르소가 아랍인을 향해 총을 한발이 아닌 4 발을 더 쏜 이유는 그가 알제 별장에서 느낀 행복감을 더이상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표현대로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노크’ (pg69)였던 것이다.2. 따뜻한 무관심나는 평소에 오지랖을 부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타인에게 늘 관심이 많고, 타인이 안녕하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도움이 될만한 행동을 해야 내 마음이 편안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나의 경향성이 타인을 전적으로 위하는 행동이라기보다는, 그저 나의 안위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저히 나의 관점에서 타인의 안녕을 고려한 것이기 때문에, 타인을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본 것이다. 이는 어쩌면 ‘폭력적인 배려’였을 수 있는 것이다.예를 들어, 내가 만약 소설 속 피부병을 앓는 개를 키우는 노인을 이웃으로 두었다면, 그 노인을 위해 어떤 동물 병원이 좋은지 검색해서 추천해줬을 것이다. 나는 그 정도로 오지랖이 넓다. 반면,뫼르소의 특징과 가장 반대되는 단어가 바로 ‘오지랖’인 것 같다. 뫼르소는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덤덤하다. 그의 슬픔과 혼란에 대해 섣불리 공감하지 않는다. 그저 동물보호소에 가면 보관료를 얼마쯤 돌려받을 수 있다 등의 팩트만을 전달한다.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뫼르소가 인정머리 없는 이기주의자는 아니다. 뫼르소는 이기주의자가 아니라, 그저 여행자의 관점에서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국에 여행을 갔을 때 그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고자 애쓴다. 여행자의 입장에서 우리는 ‘입체성’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다름을 직면했을 때 “우리랑 문화가 다르니까” 라는 판단이 가능하다.하지만 우연히 여행지에서 한국인을 만난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나와 다른 사람임에도 ‘같은 문화의 사람이니 나와 비슷하겠지’라고 생각하며 교집합을 찾게 된다. 즉, 타인을 매우 ‘평면적’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납작한 시선은 다분히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뫼르소는 여행자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과 타인을 입체적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그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개별적 욕구를 지닌 복합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가령, 그는 개를 잃어버린 노인에게 함부로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인의 곤란함을 모른 체 하지도 않는다. 또다른 예시로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내내 눈물을 흘리는 여자를 보며 뫼르쇠는 순간적으로 ‘울음소리를 그만 듣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차마 울지못하게 다그치지는 않는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따뜻한 무관심”이라고 표현해볼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 태도는 ‘무관심’하지만, 오히려 오지랖보다 비폭력적인 자세이기 때문이다.뫼르소는 재판 과정 전반에 걸쳐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다가 갑자기 몇 년만에 처음으로 울고싶다(pg102) 고 느낀다. 그 이유는 재판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한다’는 표현한 것은 그 공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매우 “평면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그를 어머니의 죽음에도 눈물 흘리지 않는 냉혈안으로 설정하고 범죄자라고 기정사실화한 시선은 그에게 분명 폭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셀레스트에게 인생 처음으로 껴안고 싶은 마음이 들었(pg106)던 이유는 그가 그 공간에서 유일하게 뫼르소를 “입체적”으로 바라봐 준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3. 마무리하며영화 을 보지 않아도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대사가 있다. 바로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라는 대사이다. 이 책을 덮고 나서 이 대사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 같다. 특히 맨 마지막 뫼르소가 신부와의 대화에서 갑자기 분노하게 되는 장면에서 그 대사가 계속해서 떠올랐다.그리고 그 장면은 마치 정말 뫼르소가 신부에게 소리치는게 아니라, 독자인 나에게 정말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알아차리라고 호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만약 삶이 끝이 정해진 사형수와 다를 바 없다면, 과연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에 나에게 따져 묻는 것 같았다.
서평1.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본 제목의 의미초등학교 권장 도서로 뽑히는 을 읽으며 가장 많이 떠오른 생각은 놀랍게도고등학교 내내 배운 ‘실존주의’ 철학이었다. 실존주의의 가장 중요한 기조는 인간은 자유로운 실존이기 때문에 선택을 통해 본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실존주의 철학은 인간과 사물을 비교한다.물건은 처음부터 그것의 쓰임새가 정해져 있다. 의자는 앉기 위해 만들고, 펜은 쓰기 위해 만든다. 앉지 못하는 의자는 그것의 기능을 잃은 것이다. 마치 건강한 알을 낳는 닭은 포동포동 살을찌우지만, 그렇지 못한 병약한 닭은 기능을 다했다고 생각하여 내다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인간은 물건과 달리 쓰임새 즉 본질이 정해져있지 않다. 정해진 본질 없이 그냥 태어나는 존재,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본질을 만들기 위해 끝없이 “선택”해야한다.소설 속 철장 속에 갇힌 닭들은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물건’과 같은 존재다. 알을 낳는 쓰임만이존재할 뿐이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선택함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박탈된양계장 속에서 잎싹이는 조금 다른 존재이다. 잎싹이는 주어진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어쩌면선택을 통해 자신의 실존을 만들어가고자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물론 실존을 향한 잎싹이의 여정에 첫단추는 다분히 수동적이라고 볼 수 있다. 양계장 탈출이본인의 선택이 아닌, 주인장이 임의적으로 처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양계장 탈출 이후 마당에서 살게 해달라고 애원했으나, 헛간에 살고 있는 구성원의 텃새로 인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이러한 점에서 볼 때 잎싹은 아직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선택’을 내렸다고 보기 어렵다.잎싹이 본격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으로 실존적 선택을 하기 시작한 것은 마당을 나가고 나서부터이다. 잎싹은 더이상 안온한 마당에 머무르지 않는다. 잎싹은 이후 아이를 낳고, 족제비와 수없이싸우고 투쟁한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입싹은 외면은 초라할지라도 내면은 그 누구보다 강인한존재가 된다. “겨울 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군. 너무 말랐어, 쯧쯧.” 잎싹은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헛간에서 피둥피둥 살만 찐 오리들이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 (중략) “하지만, 왠지 좋아 보이는걸. 내 말은, 모양새는 뭐 그저 그런데, 뭔가 (중략) 헛간의 암탉과는 다른 것 같아. 훨씬 당당해진 것 같고, 우아하고. 참 이상도 하지. 깃털이 숭숭 빠졌는데도 그렇게 보이다니!”이 책의 제목이 이 아닌, 인 이유는 마당을 벗어나고자 한 시점부터 비로소 잎싹이의 자유로운 선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잎싹이의 실존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2. 궁금증이 책을 읽으며 초등학생 시절 읽고 느낀 것과 다른 새로운 궁금증들이 있었다.먼저, 입싹이의 양육방식은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잎싹이의 양육행동은 다소 과잉보호의 면을 띄고 있다. 예를 들면, 족제비가 나타날 때마다 잎싹이가 대신 투사가 되어 늘 지켜주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잎싹이는 초록머리가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제지한다. 우두머리오리의 말대로 어린 시절부터 날개끝을 잘라 집 오리로 살게 했다면 초록머리는 덜 외로움을 느꼈을까?둘째, 만약 내가 이 책 속 닭이라면, 나는 어떤 위치에 놓여있을지에 관한 것이다. 나는 양계장에 갇힌 닭보다는 마당에서 살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닭에 가깝다고 느꼈다. 양계장 같던 정규교육과정 12년을 마쳤고, 지난한 수험생활 끝에 대학에 입학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해방감이 아니라 내가 양계장 속 닭같은 존재라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허무함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는 ‘양계장만 탈출하면...’ 이라는 마음을 안고 사는 잎싹이처럼, ‘대학에만 합격하면...’ 이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런데 막상 양계장을 탈출해보니 즉 대학에 와보니, 마치 마당 밖으로 나가기엔 용기가 부족해마당에서 살게 해 달라고 빌어야 하는 잎싹이처럼 용기가 부족했다. 창업에 도전하는 친구, 유학을 떠난 친구 등을 보면서 나는 겁먹기에 바빴다. 마당 밖에는 아카시아 나무, 멋진 하늘이 있는줄도 모르고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 모습이 헛간에서 피둥피둥 살만 찐 오리 같아 부끄러웠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나에게 안온한 마당을 떠날 용기를 심어준 것 같다.3. 마무리하며최근 ‘금쪽상담소’라는 프로그램에 홍석천씨가 출연한 에피소드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는 한국 연예인 중 최초로 성소수자라고 커밍아웃을 한 인물이다. 그가 커밍아웃 하던 당시가 2000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동성애자에 대한 시선이 달갑지 못하던 때였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그의삶을 돌아본다면 그의 삶은 말그대로 투쟁이었을 것이다.‘금쪽 상담소’ 프로그램을 통해 홍석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던 패널 중 정형돈씨가 이야기말미에 홍석천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과연 석천이형만큼 내 삶의 가치있는 무언가를 위해 저렇게 싸워본적이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말을 들은 홍석천씨도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나 또한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금쪽상담소’ 프로그램에서 정형돈씨가 홍석천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 듯, 나는 잎싹이를 바라보며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포식자의 눈을 멀어버리게 만들 정도의 용감한 기상과 투쟁에 대한 의지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어떤 가치를 지키고자 그렇게 싸웠을까? 나는 저렇게 내 몸 다바쳐 싸워볼 자신이 있는 무언가가 있는가?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삶의가치를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계속 탐구해볼 가치가 있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어린 시절 을 읽었을 때에는 잎싹이가 계장을 탈출하려는 의지, 그리고 족제비와 맞서 싸우는 전투력이 그저 “모성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른이 된 지금 다시 읽어보니, 잎싹이에게는 모성애 이상의 근원적 소망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바로 “‘나’로 살고 싶다는 마음”. 누군가의 도구로 쓰이지 않고, 나라는 존재 자체로 살고 싶다는 그 마음 하나로 그렇게 싸울 수 있었던게 아닐까. “한가지 소망이 있었지. 알을 품어서 병아리의 탄생을 보는 것! 그걸 이루었어. 고달프게 살았지만 참 행복하기도 했어. 소망때문에 오늘까지 살았던 거야. 이제는 날아가고 싶어. 나도 초록머리처 럼 훨훨, 아주 멀리까지 가보고 싶어!” 입싹은 날개를 퍼덕거려 보았다. 그동안 왜 한번도 나는 연습을 하지 않았을까. 어린 초록머리도 저 혼자 서툴게 시작했는데. “아 미처 몰랐어! 날고싶은 것, 그건 또 다른 소망이었구나. 소망보다 더 간절하게 몸이 원하는 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