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의 역사목차1. 서론2. 본론1) 당의 건국2) 당의 발전3) 당의 멸망 과정3. 결론4. 출처1. 서론먼저 당나라의 성립과정을 살펴본다. 후한이 멸망한 후 중국은 통일 왕조를 형성하지 못한 채 221년부터 589년까지 위진남북조시대를 약 370년간 겪으며 군웅이 할거하는 혼돈의 격동기를 거쳤다. 위진남북조시대는 북주의 외척 출신인 양견에 의해 통일되었다. 양견은 12대장군 중 한 사람이었던 양충의 부친으로 양충이 수국공이 되면서 양견이 그 작위를 세습했는데 왕조의 명칭을 “수”나라로 고쳤다. 그는 581년 왕위에 올라 문제가 된다. 수 문제는 과거제를 정비하고 운하를 건설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문제를 이어 황제에 오른 양제는 고구려 정벌, 새 운하 건설 등의 무리한 정책을 남발하였고 이에 반발한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수많은 반란들 중 617년 이연이 일으킨 반란이 수의 수도인 장안(시안)을 점령하였고 1년 후인 618년 이연이 당나라를 창건하며 수나라는 멸망하게 되었다. 당은 태종, 측천무후 등 많은 업적들을 남긴 왕들이 많으며 율령제 등의 체제도 잘 정비된 국가이다. 하지만 안사의 난으로 나라가 큰 위기에 빠졌고, 이후 황소의 난으로 인해 당은 멸망하게 되었다. 본론에서는 당의 흥망성쇠 과정을 건국과 발전, 멸망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겠다.2. 본론1) 당의 건국수나라를 건국한 문제는 587년 후량과 2년 뒤인 589년 남조 진을 멸망시키고, 약 400년 만에 남북조를 통일했다. 문제는 과거제를 창건하고 운하를 건설하며 화북과 강남을 이어 수나라를 번영시켰지만, 문제를 이어 2대 황제로 등극한 양제는 많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대운하를 건설하였고 자신이 운하에서 유람을 즐기기 위해 큰 배를 건조하도록 명령하였으며 또한 황후의 배, 외국 사신들의 배 등 다양한 유람선의 제작에 백성들을 동원시켰다. 또한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많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세 차례 고구려 원정을 무리하게 시도했지만 세 차례 모두 고구려를 함락시키는 것에 실패하였다. 수나라에서는 수많은 반란들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611년 시작된 반란은 고구려 원정 중에도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 반란으로 인해 양제는 2차 침략을 포기하게 된다. 결국 수나라는 말기에 반란들로 인하여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617년 일어난 이연이 수나라의 장안을 점령하고 양제의 손자를 황제로 세웠지만 이후 618년 선양을 받아 수나라는 멸망하게 되고, 이연은 황제에 올라 당 고조가 되고 당을 세운다. 당이 건국했을 무렵에도 반란이 진압되지 않았는데 이세민 장군은 이 반란을 진압시킨다. 이로써 290년 간 중국을 다스리는 통일왕조인 당이 건국하게 된다.2) 당의 발전당나라는 고조 이후 이세민은 626년 현무문의 정변을 일으켜 이건성과 막내 동생을 죽이고 황태자가 되었다가 양위를 받아 황제에 올랐는데 그가 당 태종이다. 당 태종은 수의 제도를 계승하여 조용조 제도와 부병제, 관료 제도, 지방행정 조직을 정비하였으며 수나라와 당 고조 때의 최대의 적이었던 돌궐에게 630년 대승리를 거두고 주변 국가와 경쟁에서 우위에 서게 되었다. 돌궐 이후에는 설연타 부족이 강성해졌는데 태종은 여러 차례 군대를 보내어 646년 설연타도 평정하게 되었다. 당 태종 이후 이치가 황제에 올라 고종이 되었고 이치는 신라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서돌궐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는 등의 업적을 세웠지만 질병으로 인하여 정사를 돌보지 못했고, 그를 대신하여 측천무후가 정무를 처리하였다. 683년 결국 고종은 죽게 된다. 그 이후 중종이 고종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중종은 측천무후에 의해 쫓겨나게 되고 예종이 황제가 되었다. 측천무후는 690년 당을 “주”나라로 개명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르게 되는데 이것을 “무주혁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무후는 705년 황제에서 쫓겨나게 되고 중종이 다시 황제가 되면서 당은 재건된다. 710년 중종은 위후에게 독살되었고 위후는 이후에 이륭기에게 쫓겨난다. 712년 이륭기는 당 현종으로 황제에 즉위하였고 당 현종 초기에 당나라는 경제적으로 안정을 되찾게 된다. 하지만 당 현종은 후반에 정치를 총신들에게 맡기고 애첩 양귀비와 도교에 몰두하면서 국부를 낭비하고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3) 당의 멸망당나라는 안사의 난과 황소의 난 등의 반란으로 인해 멸망하게 되는데 현종 말기 때 당나라는 인구 증가로 인하여 토지 부족 현상이 나타나며 민심이 이반되기 시작했고, 주변 민족의 이탈과 농민에 병역을 의무화한 군사 제도로 인한 백성들의 동요 등으로 국정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변방에는 절도사라고 하는 여러 무인들이 배치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안록산이 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안록산은 755년 양국충과의 권력다툼 끝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30여일 만에 낙양을 점령하고 반년 만에 당나라 수도인 장안을 점령하여 대연을 건립하였다. 이것이 ‘안사의 난’이다. 하지만 반란군의 내분으로 인해 안경서에게 안록산은 살해되었고 안경서는 사사명에게 사사명은 사조의에게 살해되었다. 그 후 이회선이 사조의를 살해함으로써 안사의 난은 실패로 끝이 나지만 안사의 난으로 인하여 호구 수가 급격하게 감소하고 반란에 가담했던 절도사들이 그대로 해당지역을 장악하였고 부병제가 모병제로 전환되었다. 또한 균전제와 조용조제도 역시 붕괴되었다.이후에 관료 사이에 사적인 당파가 생기고 이들이 붕당을 결성해 다투는 사태인 우이당쟁이 발생했는데 이 당쟁은 과거 출신 관료와 귀족관료 사이의 당쟁으로 820년부터 40년간 계속되었다. 그리고 환관이 정권의 중추에 가담했으며 안사의 난 이후 환관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12대 목종부터 19대 소종까지 13대 경종을 제외한 황제들은 모두 환관에 의해 옹립된 황제였고 11대 헌종과 13대 경종은 환관에게 살해되었다. 이로 인해 황제권은 추락하였고 중앙 정치의 문란으로 인하여 민심의 불만이 커졌다.
동아시아의 불교전래와 발전목차1. 서론2. 본론1) 대승불교의 출현2) 불교의 전파3) 동아시아 불교의 특징(1) 호국불교(2) 선종의 발전(3) 전통사상 및 신앙과의 결합4) 동아시아에서 불교의 기여(1) 예술과 문화의 발전(2) 인적교류 증대4) 불교의 폐단과 숭유억불정책3. 결론1. 서론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고타마 싯다르타(훗날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이며, 깨달음을 얻어 해탈의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붓다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원전 6세기 인도에서는 브라만교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고 카스트제도라는 신분제도가 운영되고 있었다. 고타마 싯다르타(훗날 석가모니)는 수행에 의한 진리 터득을 내세웠고. 윤회사상과 인과응보사상을 통해 대중에게 접근하였다.2. 본론1) 대승불교의 출현기원전 1세기경이 되자 개인의 진리 터득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해 행동하는 중생구제에 힘쓰는 이타행을 추구하는 대승불교가 등장하였다. 대승불교를 추구하는 이들은 싯다르타를 신격화하고 그의 자비로 중생이 구원될 수 있다고 밝히며 보살이라는 깨달음의 길을 함께 걸으며 중생구제를 위해 노력하는 관음보살, 문수보살 등의 존재를 제시하였다. 반면에, 개인적인 수행을 통해서만 해탈에 이른다는 기존 불교는 소승불교라고 지칭되었다.2) 불교의 전파불교는 기원전후 인도·스리랑카 등지로 전파되었고 그 이후에 동남아시아와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전파되었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특히 한이 내세운 유교이념이 한의 사회혼란으로 외면받게 되자 5호 16국 시대에 불교가 유목민족 국가들의 후원을 받아 본격적으로 화북지역에 확산되었다. 불교는 육로뿐만 아니라 해로를 통해 동남아 지역에도 전파되었다. 한편, 한반도에서는 육로를 통해 불교가 전파되었다. 북중국의 전진이 고구려 소수림왕 시절에 불교를 전파하였고, 남중국의 동진이 백제 침류왕 1년(384)에 인도의 승려인 마라난타가 전파하였다. 신라는 미추왕 시절에 고구려 승려에 의하여 전파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불교의 공인은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법흥왕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룩되었다. 백제, 고구려, 신라는 국가 정비에 불교를 활용하였고, 통일신라 후 원효대사 등의 활약으로 불교는 일반 민중에게 확산되었다. 나아가, 일본은 6세기경 백제에 의해 불교가 전파되었으며 야마토 정권이 왕권 강화를 위해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3) 동아시아 불교의 특징불교의 발원지인 인도와 달리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의 불교는 인도 불교와 상당히 다른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이는 호국불교, 선종의 발전, 전통사상과 신앙의 결합으로 요약될 수 있다.(1) 호국불교동아시아 지역의 나라들은 불교를 왕권의 강화와 사회안정을 위해 지배층이 먼저 수용하였으므로 왕을 재림한 부처로 바라보는 일이 빈번하였다. 불상을 만들 때에도 부처의 얼굴을 군주의 얼굴과 유사하게 만들었고, 세속오계에서 볼 수 있듯이 승려들은 국가를 수호하는 전사로서, 이는 전쟁과 재난 시 호국불교의 성격으로 나타나게 되었다.(2) 선종의 발전중국의 남북조 시대에는 남인도 출신의 달마대사가 도교의 영향을 받아 직관적인 꺠달음과 참선을 중시하는 선종을 세웠고, 한반도에 전파되어 삼국의 왕실과 지방호족의 후원 속에서 선종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통일신라 말에는 선종세력이 지방호족과 결합하여 고려왕조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고려 때는 선종이 천태종과 조계종으로 분화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정권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선종이 사무라이 정신과 부합된다고 판단하여 이를 장려하였다.(3) 전통사상 및 신앙과 결합동아시아 사회에서 불교가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각 지역의 전통사상 및 신앙과 결합하였다. 유교가 먼저 자리를 잡은 중국에서는 효사상과 접목되어 인도불교와 다른 양상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는 한반도와 일본지역에 전파된 불교에도 유사한 양상으로 발현되었다. 일본에 불교가 정착될 때에는 일본 고유 신앙인 신토 사상과 결합하여 나타났다.4. 동아시아에서 불교의 기여(1) 예술과 문화의 발전불교는 불상과 탱화, 사원건립을 통해 미술, 건축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불경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목판인쇄술과 금속활자 발명 등을 초래하였다. 특히 몽골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극복하려는 시대적 배경에서 탄생한 고려의 목판인쇄술 중 팔만대장경은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또한 세계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경은 서양의 금속활자 발명보다 앞선 동아시아 인쇄술의 우수성을 증명하였다.(2)인적교류 증대중국 와 혜초의 의 사례에서 보듯이 불경의 전파를 통해 동아시아지역에서 불교가 전파되었다. 이는 승려들의 인적교류로 이어졌으며, 불교사찰을 만들기 위하여 많은 건축가들이 동아시아 각국을 오가는 교류로 이어졌다.
고구려 역사 정리-역대왕을 중심으로목차1.서론2.본론1) 시조동명성왕-제10대 산상왕2) 제11대 동천왕-제20대 장수왕3) 제21대 문자명왕-제28대 보장왕3.결론1.서론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한민족의 나라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절의 대대적인 정복사업을 통해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였고 중국의 삼국시대, 남북조시대, 수나라, 당나라 등과 교류하거나 이들의 침략에 맞서 한반도를 지켜준 나라이다. 본고에서는 고구려의 역대왕들을 시조인 동명성왕부터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했던 668년의 마지막왕 28대 보장왕까지 이들의 업적을 중심으로 고구려사를 요약하여 살펴본다.2. 본론1)시조 동명성왕-제10대 산상왕기원전 37년 부여국의 왕자 주몽이 부여에서 쫓겨남에 따라 남쪽으로 가서 압록강 유역의 졸본성에서 고구려를 건국하고 시조가 되었다. 고주몽은 동명성왕(기원전 37-기원전 19)으로서 고구려를 다스리고 기원전 19년 서거하였으며, 제 2대왕인 유리명왕(기원전19-서기 18년)라 부여국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 졸본성의 토착세력으로기 위해 압록강 근처 국내성으로 도읍을 천도했다. 서기 12년, 한나라 외척 왕망이 세운 신나라가 고구려에게 흉노정벌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으나 고구려는 이를 거절했고, 오히려 신나라를 공격했다. 유리명왕이 죽고 왕위에 오른 3대 무신왕(18-44년)는 서기 21년에 부여정벌을 감행했고, 고구려는 한나라의 지배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 낙랑현, 현도현, 요동현에 대해 여러 차례 공세를 펼쳤다. 4대 민중왕(44-48년)과 5대 모본왕(48-53년)의 짧은 치세를 거친후 2대 유리명왕의 손자였던 6대 태조왕(53-146년)이 7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93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고구려의 정복전쟁을 주도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하였다. 7대왕인 차대왕과 8대왕인 신대왕 시절의 내정의 혼란을 수습하고 왕위를 이은 9대왕인 고국천왕(179-197년)에 이르러 빈민구휼정책인 진대법이 실시되고, 고구려의 국가기반이 다져졌다. 10대왕 산상왕은 중국세력의 침략에 맞서 일생 동안에 만주와 요동지역의 64성, 1,400여 촌을 복속시키는 업적을 이루었다.2) 제11대 동천왕-제20대 장수왕고구려 11대왕 동천왕(227~247년)은 요동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공손씨와 대립하면서 238년에 위나라 조예와 화친후 그를 도와 오나라의 손권과 동맹이었던 요동의 공손씨 세력을 멸망시켰다. 12대왕 (248 ~ 270년)은 고구려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양맥에서 싸워서 위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8천여 명을 목베었다. 촉나라의 재상인 제갈공명은 고구려에 대하여 지형이 험준하고 사람들이 호전적이고 단합력이 높아서 정복하기 어렵다고 설명하였다. 13대왕 서천왕(270~292년)의 아들인 14대왕 봉상왕( 292~ 300년)이 폭정으로 폐위된 후 15대왕으로 즉위한 미천왕(300-331년)은 즉위 초부터 중국 군현 세력과 치열하게 대립하였는데, 한사군지역과 요동지역을 공략하여 고구려에 남아있던 중국 군현세력들을 축출하였다. 결국 314년에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하여 이들을 몰아낸 후 대동강유역을 확보하였다. 16대왕 고국원왕(331-371년) 시기에는 342년에 전연이 고구려를 침략했고 모용황과 요동 지방을 두고 공방전을 하다, 수도 국내성까지 함락당했다. 결국 고국원왕은 371년, 평양성에서 백제 근초고왕과 전쟁을 치르다가 전사하였다. 17대왕 소수림왕(371-384년)은 티베트계 국가인 전진과 수교한 후 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고 태학을 설립하여 유학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힘썼으며, 율령을 반포하여 법치주의를 확립하였다. 또한 378년 거란족의 침략을 물리치고 백제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지속하였다. 18대 고국양왕(384-391년)은 후연 및 백제와 영토분쟁을 지속하였고, 백제를 견제하기위하여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었고 불교를 장려하였다. 19대왕 광개토대왕(391-412)은 고구려 역대 왕조 최초로 독립적인 연호(영락)를 사용하였으며, 동예와 동부여를 정벌하여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한강 이북까지 진출하면서 고구려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또한 399년 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병하여 신라를 도와 왜를 무찔렀다. 또한 광개토대왕은 거란족, 선비족, 여진족을 정벌하여 만주전역을 확보하고 백제의 몽촌토성을 공격하여 백제 아신왕을 굴복시켰다. 20대왕 장수왕(412~491년)도 정복군주로서 활약을 멈추지 않았으며 선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웠다. 또한 417년에는 평양으로 수도를 천도한 후 남하정책을 실시하였고 경당을 세워 교육을 장려하였다. 475년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개로왕을 살해하였다. 장수왕은 중원고구려비를 세워 남하정책을 후대에 남겼다. 중국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는 다면적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유목 민족인 유연과도 통교하였다.3)제21대 문자명왕-28대 보장왕21대 문자명왕(491-519년)도 부여를 복속시킴으로써 장수왕 시절에 확보된 영토를 유지하였으며, 22대 안장왕(519-531년)은 양나라와 교류하였고, 장수왕이래 백제와 벌어진 전투 중 최대 규모의 전쟁을 치루며 고구려 영토를 지켰다. 23대 안원왕(531-545년)은 북위에 조공을 바쳐 중국과 교류하였으며, 24대 양원왕(545-559년)을 거쳐 25대 평원왕( 559~ 590년)은 쇠락해가는 고구려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바보온달-평강공주 설화의 배경이되는 왕으로도 유명하다. 26대 영양왕(590-618년)은 수나라 문제와 그의 아들 양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고구려를 위협하며 각각 30만 대군과 113만 대군으로 침공해오자, 을지문덕장군을 앞세워 살수대첩의 승리를 쟁취하며 수나라를 물리쳤다. 이 시기의 담징은 일본에 종이와 먹 제작법을 전파하고, 호류사의 금당 벽화를 그렸다. 27대 영류왕(618-642년)은 수나라가 무리한 고구려 원정으로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자 당과 우호관계를 맺는 양국수교를 단행하고, 당의 요구로 백제 및 신라와도 화친정책을 펼쳤지만, 연개소문에 의하여 살해당했다. 28대 보장왕(642-668년)은 당시 실권자인 연개소문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다. 645년에 당 태종은 10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고 양만춘이 안시성 전투에서 당태종의 군대를 무찔렀다. 하지만 계속된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고구려는 멸망하게 되었다. 보장왕은 요동지역의 군주로 봉해졌지만, 결국 유배되어 사망한 고구려의 마지막 군주로 기록된다.
漢의 역사목차1. 서론2. 본론1) 漢의 건국2) 前漢시대(기원전 202년~기원후 8년)3) 王莽의 치세기(기원후 8-23년)4) 後漢시대5) 漢의 멸망3. 결론1. 서론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시킨 秦의 진시황제가 죽은 후 秦은 진승·오광의 난 등의 많은 반란들이 일어났다. 그 중 漢의 유방과 楚의 항우가 중원의 패권을 앞두고 치열한 전쟁 끝에 漢의 유방이 중원을 통일하면서 기원전 202년 漢을 건국한다. 漢은 기원후 220년까지 중국을 다스린 통일 왕조였다. 漢은 前漢과 後漢으로 분류되는데, 前漢은 유방이 漢을 세운 기원전 202년부터 漢의 외척인 왕망에 의해 왕조가 단절된 기원후 8년까지를 시기이며 後漢은 15년간 왕망에 의해 세워진 新(기원후 8-23년)이 멸하고 다시 유씨 왕조가 계승되어 220년 12월 조조의 아들 조비가 後漢의 황제 자리를 양위 받을 때까지 지속된 시기를 의미한다. 이후 漢 황족 출신인 유비가 한소열제로서 221년 한중과 파촉 지역에서 蜀漢을 세웠지만 그가 죽은 후 263년에 蜀漢도 멸망하여 470여년간의 漢의 치세는 모두 끝나게 되었다.2. 본론1) 漢의 건국진시황이 기원전 221년에 건국한 秦은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였다. 진시황은 전국시대에 전쟁을 통해 각 국가를 정복하여 중원을 통일하였지만, 그가 죽자 정국은 불안정해지고 결국 기원전 206년에 중국은 다시 격동기에 빠져들었으며, 두 영웅호걸이었던 항우와 유방이 중원의 패권을 다투었고 결국 한신 등의 도움을 얻은 유방이 항우를 무찌르고 18개 제후국을 통일하여 漢을 건국하게 되었다. 漢의 수도는 시안(장안)이었으며, 전국을 13개 군으로 나누고 동쪽지방에는 10개의 제후국을 두었는데, 유방을 도운 개국공신들 제후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2) 前漢시대고조 유방에 의해 건국된 漢은 시간이 흐르면서 기원전 157년까지 모든 제후왕이 유씨 일족의 황실 세력으로 교체되었다. 일부 반란들이 일어난 이후, 漢왕조는 기원전 145년 이후 제후국의 크기와 군사력을 제한하였으며, 제후들은 더 이상 직접 자신의 신하를 임명할 수 없었고, 오직 漢 황실의 황제만이 신하의 임명권을 갖게 되었다. 제후들은 자신들 영지의 명목적인 지배자였고 세금의 일부만을 거둬 그들의 개인 수익으로 가질 수 있었다. 제후국 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지는 않고 후한 때까지 이어졌다. 한왕조의 통치이념은 유교였으며, 이는 漢의 무제 시기에 확립되었다. 형법주의를 지향한 선제는 재위기간(기원전 73 ~49)에 漢왕조의 법도를 왕도와 패도 사이의 조화, 즉 유법 절충주의라고 선언한 것도 이러한 유교이념 채택의 본질을 재확인해준다. 한편, 漢의 수도는 장안(시안)인데, 이는 唐 시대까지 단속적으로 이어졌다. 漢의 前漢시대에는 태조, 태종, 세종 등이 초기 漢왕조의 통치체제를 정비했고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일컫는 문제와 경제 시대에는 내실을 다졌고, 무제는 흉노족을 공격하여 흉노의 요새를 점령했고 고대왕국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이 시기에 서역으로 교통과 교류의 확장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실크로드로 이어져 동서교통로가 개척되었다. 실크로드는 장건에 의해 개척된 무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다양한 동서교역로를 말한다.前漢시대에 漢나라는 古朝鮮을 침범하여 낙랑군·진번군·임둔군·현도군의 한사군(漢四郡, 기원전 108년 ~ 기원후 314년)을 설치하였는데, 前漢 무제가 衛滿朝鮮을 멸망시킨 뒤 그 영토를 통치하기 위한 지역이었으며 한사군은 漢이 멸망한 뒤에도 이어져 기원후 314년까지 지속되었다.3) 王莽의 치세기효원황우의 조카였던 황실의 외척인 왕망은 신하들로부터 신망이 높았고, 기원후 6년에 평제가 서거하자 태황태후는 2세에 황위에 오른 유영을 대신해 왕망이 황제의 역할을 하도록 임명했다. 왕망은 유영이 성년기에 이르면 황위를 물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천명임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킨 후 新(기원후 9년 - 23년)을 건국하였다. 왕망은 노비제폐지, 화폐개혁, 토지의 국유화 등 개혁정책을 펼쳤지만 적대세력의 반대와 대홍수 등으로 인하여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왕망은 漢황실의 복위를 천명하며 반란을 도모한 반대세력에 의하여 살해당했다.4) 後漢시대왕망을 살해한 후 다시 漢황실을 옹립한 後漢 정권은 前漢 후반기 이후 등장한 유교를 공부한 관료층과 호족지배층으로 이루었다. 秦 제국이나 前漢시대에 비하여 後漢시대에는 더욱 황제위주의 정사가 펼쳐졌고, 이런 배경은 궁정에서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던 환관을 정치에 더욱 끌어들이게 하였다. 後漢시대에는 채륜이 세계 최초로 종이를 개발했고, 위탄에 의하여 먹이 만들어졌고, 장형은 혼천의와 지동의를 창조하였다. 後漢시대의 장군인 반초는 기원후 91년, 서역지방에 파견되었으며, 漢왕조는 쿠샨제국 뿐 아니라 왜국의 통치자, 파르티아 등으로부터 조공을 받았고, 또한 97년에 감영을 사신으로 보내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맺고자 했다. 하지만, 환제와 영제의 치세부터는 유능한 선비들이 정가에서 축출되거나 제거되면서 漢 조정의 자정 능력이 현저히 저하되었고, 매관매직과 각종 수탈이 빈번해지면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 갔다. 특히 영제의 재위기간 동안 환관들의 권력은 더욱 세졌으며 정치는 환관들인 조충과 장양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영제는 후궁들과 놀면서 세월을 보냈다.5) 漢의 멸망後漢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는 호족 지주에 의해 착취당하던 漢 농민들이 황건적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다. 황건적의 난은 漢황실의 쇠퇴와 조조·유비·손권으로 대표되는 영웅들의 魏蜀吳 삼국시대를 촉발시킨 큰 원인이 되었다. 황건적의 난은 漢 군대에 의하여 진압되었지만 각 지방에서 크고 작은 봉기는 지속되었고 지방호족들은 중앙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사병을 모집하고 자신의 힘을 키우는 명분을 제공하게 되었다. 漢황실의 헌제는 195년에 수도 장안에서 낙양으로 도망쳤고 196년에 조조의 설득으로 그는 수도를 허창으로 천도하였다. 208년 조조가 제갈량이 이끈 적벽 대전에서 蜀과 吳의 연합군에게 패배한 후, 중국은 魏蜀吳의 삼국시대를 맞이하게 되었고, 조조는 헌제를 내세워 後漢의 정통성을 주장했고, 손권은 동쪽의 吳를 건국하였고, 유비는 서쪽의 蜀을 건국하며 漢황실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서로 협력하며 대립했지만 220년 12월 조조의 아들이었던 조비는 헌제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선양받고 魏를 건국하면서 漢은 멸망하게 되었다.3.결론漢는 楚패왕인 항우와 중원의 패권대결 끝에 유방이 승리하여 개국한 중국 고대왕국이다. 漢시대는 중국의 기본적인 틀을 형성하였고, 중국민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의 기원을 형성하며 정체성을 수립한 왕조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 시기는 제지술과 먹의 발명, 한자의 정립 등을 통한 문명의 서막을 열었고 흉노정벌, 주변국으로부터 조공, 서역과 교류, 실크로드의 개척 등 중국을 강성하게 만드는 토대를 세운 시기였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환관정치의 폐단과 황건적의 난에서 볼 수 있듯이 백성의 삶을 등한시하여 漢의 멸망으로 이어진 것에서 부국강병의 초석은 민생의 돌봄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고조선(古朝鮮) 역사 보고서목차1. 서론2. 본론1) 단군 조선의 역사2) 기자 조선의 역사3) 위만 조선의 역사4) 고조선에 대한 역사 계승3. 결론1.서론고조선(古朝鮮)은 신화적으로는 기원전 2333년경 단군왕검이 개국했다고 전해지는 한반도의 최초 국가이며, 역사적으로는 기원전 7세기 이전 요서의 비파형동검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었다고 보고된다. 중국 한나라 시대의 기록상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나라였음은 분명하나 관련 기록이 매우 적고 추상적이다. 고조선에 직접 속한다는 유물이나 유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국내외 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시대와 지역, 역사, 문화 등에 대한 논란이 많다.고조선의 원래 국호는 조선(朝鮮)이지만, 기원전 194년 중국의 연나라에서 이주한 위만이 찬탈하여 세운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려시대 역사가이자 승려인 일연이 에서 고조선이라고 지칭한 것으로 확인된다. 본고는 아래에서 단군조선의 역사를 비롯하여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역사를 살펴보고, 고구려 등 후대 왕조의 고조선에 대한 역사계승을 분석해 본다.2. 본론1) 단군 조선의 역사고조선은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기시대(BC 2333년~ BC 108년)까자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 존속되었던 국가라고 알려져 있지만, 고조선의 건국이 기원전 2333년이라는 연도는 일연의 에 기록된 것으로 저자조차도 이를 확신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일연은 에서 “요임금 즉위 50년(경인년)에 단군이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을 개국하였다”고 서술하였다. 고조선은 기원전 323년경에 전국 연(燕)나라와 대립하였다는 기록이 기원전 4세기 연나라와 관련된 역사서인 과 한나라의 역사서인 에서 확인되는데, 당시 고조선은 요동지역에 위치하였고, 고조선은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칭왕(왕이라고 칭함)하며 요서지역과 광범위한 연맹을 형성하였다. 고조선은 점차 세력을 키워서 기원전 4세기경에는 중국의 연나라와 대등하게 경쟁할 만큼 강성해졌지만, 연의 침략을 받아 2천여 리의 광대한 영토를 상실하면서 고조선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한나라가 건국된 후 고조선은 요동지방에 진출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한나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 것으로 에 기록되어 있다.고조선의 건국은 환웅으로 대표되는 이주민집단과 곰으로 대표되는 토착세력의 결합으로 이해되며, 환웅의 아들이라는 단군왕검이 다스리던 아사달사회는 신석기 문화 전통을 강하게 지닌 초기청동기사회로 보고된다. 단군조선을 신화로 해석한다면 환인의 아들인 환웅이 홍익인간의 이념을 갖고 태백산에 내려와서 고조선을 세웠다는 것이며, 이는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13세기 고려시대의 승려 일연이 에서 기록화하며 현재까지 전해진다.여러 선행연구들에 따르면, 고조선은 요서지역부터 한반도의 서북쪽에 위치한 요동지역과 서편의 요하지역에 걸쳐 성장한 다양한 집단의 사회 및 정치세력으로 비파형 동검문화를 공유하고 시간이 흐르며 고조선이라는 고대국가의 건국으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요약하자면,고조선은 기원전 9-8세기경에 요하유역에서 군장사회로 출발하여 기원전 4-3세기경에 고대국가단계로 진입하였다고 설명될 수 있다.2) 기자조선의 역사기자가 조선의 왕이 된 것은 기묘년(기원전 1122년)의 일로 전해진다. 기자는 기원전 1122년경에 5천여 명의 중국인 무리와 함께 고조선으로 건너와서 고조선 백성들에게 선진문명을 가르쳤다고 한다. 일연은 에서 “기자가 고조선에 건너오자 원래 조선의 군주였던 단군이 기자를 피해 장당경으로 갔다(기묘년에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하니 단군은 장당경으로 떠났다)”라고 서술하였다. 한편, 기자는 평양 왕검성에 도읍을 두고 8조법을 시행하면서 고조선을 다스린 것으로 전해진다.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에 따르면, 8조법 중 3가지 기록이 남겨져 있다. 즉,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타인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그 죄를 갚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피해자의 노비로 삼는다. 8조법 중 현재 전해지는 3개 조항에서, 고조선 사회의 화폐에 대한 개념과 노비의 존재, 그리고 사유 재산에 대한 보호 조치가 시행되었음 볼 수 있다.기자조선은 한반도 정권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를 초래한다. 중국학계의 고조선문제와 관련된 기본입장은 단군조선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고조선은 주(周)나라시기 은(殷)나라의 유민인 기자와 한나라 초기 연(燕)나라 지역의 중국인 위만이 건립한 제후국이라는 입장이다. 즉 중국역사하계는 한반도 국가들의 기원이 되는 고조선을 중국에 예속된 정권에서 시작되었다고 바라보면서 고조선이 주와 한의 제후국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2017년 4월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에서 중국의 지도자 시진핑 주석은 “과거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는 역사인식을 드러낸 바 있는데, 이는 고조선사에 대한 중국역사학계의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하지만, 한국역사학계는 기자조선이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먼저, 제왕운기(帝王韻紀)와 같은 기록으로 남겨진 고려시대의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기자조선은 고구려가 평양지역을 차지하며 당시 낙랑군에 살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기자에 대한 신앙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는 고구려가 기자를 선조로 생각한 낙랑유민들의 신앙을 흡수한 것으로 추정되며 고구려를 계승한 것으로 대내외에 표방한 고려왕조는 외교적으로 기자를 인정했지만고려 내부에서는 기자가 고조선의 왕이 되었거나 ‘기자조선’이 존재했다고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자조선은 단군신화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기자(箕子)의 실재와 기자조선을 중화문명의 전파자로서 강조하고 있는 동북공정의 일부라는 것이 한국역사학계의 입장이다. 한국역사학계는 그동안 축적된 연구를 통해 중국역사학계의 기자의 실재와 기자조선설의 허구성은 어느 정도 밝혔다.3) 위만조선의 역사기원전 195년에 연나라 지역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많은 연나라 사람들이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하였는데 위만도 이들 중 하나이다. 준왕은 위만에게 고조선 관직을 주고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하지만 위만은 반란을 도모하고 준왕이 머물던 왕검성에 쳐들어왔으며, 준왕을 몰아낸 후 고조선의 왕이 되었는데, 이를 위만조선이라 한다. 건국 초의 위만조선은 한나라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팽창정책을 추진한다. 이에 한나라의 무제(武帝)는 기원전 108년에 군대를 이끌고 고조선을 침략하여 멸망시킨 후 “한사군”이라는 낙랑군, 현토군, 임둔군, 진번군을 한반도 서북지역에 설치한다. 고조선의 몰락은 대내외적 요인에 의해 야기되었는데, 내부요인은 사회질서의 붕괴와 철기 보급에 따른 경제적 개념의 변화였다. 외부요인으로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연나라, 위만조선 등의 외부세력의 등장으로 인하여 고조선의 국가권력이 상실되었다고 볼 수 있다.4) 고조선에 대한 역사 계승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성과 정통성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보거나 인정하지 않는 주장도 있지만, 고조선 지역을 차지하고 장수왕의 평양성 천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는 고조선을 역사적으로 계승한 정통왕조라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즉, 이승휴의 에 따르면 “고례(高禮 ; 고구려를 지칭)는 다른 나라들처럼 단군의 자손임을 칭했다”는 구절에서 고구려는 ‘선인’의 후예임을 자처하면서 고조선 계승에 대한 역사인식이 나타났다고 보고된다.또한, 고조선의 멸망 이후 단군신화가 고조선 영역의 대부분을 계승한 고구려 사회에 전해져 고구려 건국신화에 일부가 반영되었으며, 이는 고려로 이어졌다는 점도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인식을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승휴는 에서 고구려는 고조선의 계승자임을 분명히 밝혔고, 이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통해 고려에 전달되었다는 사관을 밝혔고, 현대 한국역사계에서도 고조선의 정통은 고구려를 통해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져 왔다는 것이 인정되고 있다. 조선왕조는 단군조선과 한국상고사에 대한 인식의 확대로 고조선으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국 역사를 계통적으로 이해하는 통사체계를 구상한 것으로 확인된다.3. 결론이상 본고에서는 고조선의 역사를 단군 조선, 기자 조선, 위만 조선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또한 고구려 등 고조선의 역사의식도 분석해 보았다. 단군은 신화적 존재일 수 있지만, 그 당시 우리 선조는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거주하였고, 그 세력이 고조선을 건국하고, 이는 고구려와 발해, 고려 및 조선을 통해 대한민국까지 계승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일대일로의 정치적 노림수에 따른 역사의 왜곡이며, 대한민국은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임을 더 많은 사료를 통해 밝혀야하는 것이 역사학계의 시대정신이 될 것임이 명확하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