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뻬쩨르부르그 이야기)? 니콜라이 고골1. 코2. 외투3. 광인일기- 코는 고골식의 독특한 상상력과 풍부한 유머 감각, 예리한 사회 풍자를 압축시켜 놓은 대표작이다.주인공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8등관 꼬발료프다. 그는 어느 날 아침 코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이게 무슨 어이없는 사태인가?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알고보니 그의 코는 높은 지위의 5등관 관리로서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은 누가 봐도 비현실적이지만 동시에 사실적이다. 이 이야기에서 비현실적인 것은 오직 ‘코’ 하나뿐이며, 꼬발료프가 자신의 코를 찾아다니며 겪는 각종 수모와 그의 허영 가득한 심리, 졸렬한 절망, 그리고 사람들의 세태는 고골답게 극도로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골은 사회의 허영과 위선을 능청스레, 하지만 날카롭게 조롱한다. 이후 다른 작품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고골은 이런 방식으로 일상의 불합리함을 꼬집으며 사회를 풍자하는 데에 능한 작가다.결국 결말에서 코는 아무 이유도 없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코가 사라진 것에 아무 이유가 없었듯이. 꼬발료프는 다시 코가 생긴 것에 기뻐하면서 언제 절망했었냐는 듯 오만하고 속물적인 태도로 돌아오는데, 이 일련의 사건들과 그의 빠른 태세 전환은 그와 그를 포함한 사회가 얼마나 얄팍하고 피상적이며 권위와 위선에 찌든 것인지를 보여준다.- 외투삶을 잃어버린 한 인간의 이야기.그는 소심한 성격의 하급 관리인데, 지극히 평범하게 태어났다. 그는 헌 외투로 조롱의 시선을 받자 큰 맘 먹고 외투를 새것으로 바꾼다. 그 외투는 아주 사소한 것 같으면서도 그의 존재와 정체성을 한껏 살려주는, 그라는 사람을 치켜세워주고 번듯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였다. 그러나 그는 그 외투를 입고 나간 첫날,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여 그 소중한 외투를 빼앗기고 만다.이 외투는 평범한 외투가 아니다. 그는 외투를 빼앗기면서 자신의 노력의 결실,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사회적 품위와 지위까지 빼앗긴 것이다. 그것이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관심, 그의 저축, 그의 자긍심 모두가 그 외투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삶을 통째로 빼앗기고 절망한다.결국 그는 밤낮을 고민하며 외투를 찾아다니다 얼마 전 승진한 장관을 만나러 간다. 그는 자신의 외투를 찾아주십사 부탁을 하지만, 갓 장관이 된 고위 관리는 장관으로서의 위엄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일부러 그에게 엄하게 화를 내고는 자신의 그런 처사에 뿌듯해한다.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너무나 큰 충격에 비틀거리며 그곳을 떠난다. 그는 정신이 나가 앓다가 결국 숨을 거두고, 이후 그 지역에서는 유령 관리가 나타나 외투를 내놓으라며 떠돌게 된다. 생전보다 당당해지고 풍채가 좋아진 그(유령)는 마침내 자신을 내쳤던 그 장관의 외투를 빼앗아 복수를 마친 후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그는 불합리하게 인생을 강도당하고, 운 나쁘게 걸린 햇병아리 장관의 직위놀음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부조리한 것이 이 사건만이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모든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부조리해 왔다. 벗어날 수 없는 9급 관리 생활과 적은 봉급?이건 허울 좋은 노예와 무엇이 다른가??그리고 그의 헌 외투를 향한 사람들의 은근한 조롱과 연민. 그런 것들이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로 하여금 자신의 전 생애를 ‘외투’라는 외물에 의탁하게 만든 것이다. 그는 고작 자기 몸을 감싸는 그 거적대기 하나 때문에 삶에서 모욕당했다. 그것이 그의 자존감을 결정지었고, 그것이 사회에서의 그의 위치를 증명하는 신분증이 되었다. 그는 인생을 빼앗겼지만, 애초에 그가 외투에 그토록 집착하게 만든 궁극적 원인이 무엇이었겠는가?결국 이 모든 우스꽝스러운 부조리는 ‘돈’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된다. 돈, 그게 무엇이기에! 사람의 가치가 금전적으로 환원되고 사람의 인생이 돈에 결딴나다니. 그리고 마지막 일격은 신분의 벽이었다. 진짜 권위도 아닌, 정당하지도 못한, 단순한 감정으로 촉발된 장관의 멍청한 행위로 인해 그가 죽음을 맞다니. 이보다 어처구니없는, 하지만 현실적인 비극이 있을까?현실에서는 그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죽어서야 그는 당당해질 수 있었다. 뒤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돈이나 신분에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게 되고 나서야, 인간 세상의 법칙과 완전히 분리되고 나서야 말이다. 인간 존재를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현실의 불가능성, ‘살지’ 못하게 하는 부조리의 세계.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죽음밖에 없었다.- 광인일기주인공은 국장 따님을 사랑하지만 그러기엔 그는 너무나 보잘것없고 가난하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점점 불타오르고, 그는 어떻게 하면 국장과 그 따님에게 잘 보여서 사랑을 쟁취할 수 있을지에 골몰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그는 동물의 말을 듣는다. 그는 실은 최근 아무도 들을 수 없거나 볼 수 없는 것?즉 환청과 환각?이 잘 들리고 보이기 시작했다고 하며, 국장 따님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멧쥐와 피젤?그러니까 강아지들에게 말을 건다.‘(나를 보고 있던)그 계집아이는 너무 놀라서 나를 미친 사람으로 알았을 것이다.’그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강아지들과의 대화를 생각한다. 미친 사람이 자신의 행동의 본질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으면서 표면적 행동의 이상성에 대해서는 깨닫고 있다니. 재미있는 일이다. 그는 미친 짓을 하면서도 자신은 당연히 정상이라 믿으며 ‘남이 이 행위를 본다면 미쳤다고 하지 않을까’라고만 걱정한다. 이는 대부분의 정신질환자들이 ‘나는 미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는 레퍼토리대로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 광인일기의 매력이 있다. 광인이 화자일 경우 독자는 이것이 진짜 현실인지 아니면 광인의 헛소리인지 잘 판단할 수 없게 되며, 광인이 어떤 식으로 미쳐 가고 있으며 자기만의 논리를 어떻게 마련하는지를 하나하나 보게 된다.그는 강아지 피젤의 개집에서 편지 뭉치를 털어 오는데, 그 편지 역시 전부 망상이겠지만, 망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편지들의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그가 원하는 내용도 아니다. 왜일까? 그의 상상력이 그것밖에 안 되어서인가? 어차피 ‘그녀’는 그에게 있어서 망상으로도 불가침한 존재였기 때문일까? 미쳐 가는 그가 자신만의 상상 속에서조차 그녀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그의 자격지심과 현실의 벽이 얼마나 뿌리깊고 탄탄한가를 나타낸다. 또한 그가 인간이란 무엇인지의 답을 개들에게서 구하려 한다는 것은 고골식의 부조리한 위트 중 하나다. 그는 인간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 답을 같은 인간에게서 찾을 수도 없었기에 다른 종(흔히 인간보다 지성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겨지는)을 스승 삼으려 들 정도로 오리무중에 빠진 상태였던 것이다.개들은 편지에서 소피 아가씨가 째쁠로프, 시종무관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편지에서 개들은 ‘이따위 시종무관보다는 주인공이 더 나을 것 같다’고 말한다. 물론 그는 차악 정도로 취급되지만. 이것은 주인공의 열등감과 불안의 산물 같기도 하다. 시종무관과 장군에 대한 사회적 열등감과 피해망상, 자기 것을 빼앗겼다고 느끼는 불합리한 악감정이 개와 대화를 하고 개들의 편지를 훔쳐보는 망상을 하게 한 것일까?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 스트루가츠키 형제mungo며칠 전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을 읽었다.어느 날 천문학자 주인공 말랴노프는 과학 역사에 한 획을 그을 ‘M-캐비티 방정식’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갑자기 이상한 일들이 잔뜩 일어난다. 잘못 걸린 전화가 계속 걸려오는가 하면, 최고급 식료품과 술이 배달되고, 자칭 아내의 지인이라는 의문의 여자가 찾아오기도 하고, 몇 년지기 친구는 평생 안 하던 짓을 한다. 마치 온 우주가 그의 연구를 방해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알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던 와중, 이웃에 살던 물리학자가 권총자살을 한 채로 발견된다.진상은 이렇다. 알고보니 주인공과 죽은 물리학자를 포함한 주변 동료들이 저마다 발견한 것은 핵심적인 세계의 진리들 중 일부였다. 그런데 인류의 이러한 진리 발견은 전체 우주의 인과에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었고, 이는 결국 우주의 종말이 앞당겨지는 결과로 이어질 위험이 있었다. 물론 그래봤자 원래 우주의 수명이 수백억 년이라면 그걸 10억 년 정도로 줄이는 정도고, 우리 인류 자신은 결코 그 결과의 영향을 느끼지도 못할 것이었다.하지만 문제는 이 세계를 관리하는 인류보다 높은 존재, 전체 우주를 조망하고 관리하는 어떤 고차원 존재(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가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그들은 우주의 이른 멸망을 막기 위해 이 학자들의 연구를 오래 전부터 예의주시해왔고, 결국 이 학자들이 진리의 문턱에 다다르자 그 발견을 막고자 셀 수 없는 우연을 조종해 주인공과 동료들을 압박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연구를 포기하는 대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부득이하게 최후의 수단을 쓰겠다고 전해왔다. 물리학자의 죽음이 그 예시였다.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알게 된 과학자들은 터무니없는 현실에 절망한다. 인간이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고차원의 지성이 우리를 매 순간 감시하고 우리의 세상을 조작할 수 있다면, 인간이 아무리 저항해봤자 그것은 마치 게임 속 NPC가 게임의 개발자에게 저항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적, 세계의 원리, 자연현상에 저항하는 셈이다. 게다가 이들은 어디에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 이 압박은 마치 중력처럼 자연스럽고 비밀스럽게 가해지는 것이니까. 그리고 누구도 이들을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그들 스스로도 이 사태를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들을, 전세계인들을 납득시킬 수 있겠는가? 이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그들은 정신병원으로 끌려갈 게 뻔하다. 그들은 진리 앞에 철저히 혼자이다. 이제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할까? 개인과 전 우주의 안녕을 위해 뻔한 진리를 모르는 척하고 편안히 살 것인가, 오직 진리를 위해 설령 불가능하더라도 끝까지 투쟁할 것인가?“만일 그들이 어떤 전투적인 외계인이거나 아니면 4차원의 세계로부터 온 흡혈귀 같은 침략자들이었다면 내 마음은 훨씬 편했을 것이었다. 나는 적어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운명 공동체였을 것이니까. 내가 낄 자리가 있고 내가 할 일이 있고 심지어 나는 군대에 자원할 수도 있을 것이니까! 그러나 나는 아무도 모르게, 철저하게 혼자서 파멸할 운명이었다. 그 누구도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이다. 내가 삶으로부터 제외되었을 때 사람들은 놀라며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그리고 곧 잊을 것이다.”실체 없는 것과 홀로 싸운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리고 그 상대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소위 ‘어나더 레벨’의 무언가일 경우 한 인간이 거기에 맞서 싸운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작가가 살던 당시 소련의 시대적ㆍ국가적 상황을 고려해보면 이는 개인이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독재권력의 압박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고 온 사회에 압제의 공기가 깔려 있지만 누구도 그에 대해 말할 수 없고 누가 적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황. 결국 주인공 말랴노프를 포함한 다른 동료들은 전부 정체모를 상위의 존재에게 항복하고 만다. 그들은 여전히 그 ‘고차원 존재’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꿈이거나 착각이거나 고도로 계획된 질 나쁜 장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누구도 불확실하고 거대한 공포에 자신의 목숨을 맡길 배짱은 없다. 그들은 항복을 명확히 선언한 것은 아니지만 서서히, 천천히, 어쩌면 타성에 젖어서, 조용하고 소심하게 ‘체념’한다. 극적인 패배는 없다. 눈에 거의 띄지 않지만 당사자에게만은 극도로 비참한 포기가 있을 뿐이다.패배한 모두는 당장은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이득까지 보았지만, 연구를 포기한 시점에서 그들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높은 직위에 오르고 아무리 많은 돈을 얻는다 해도 그들의 마음 속에는 짙은 패배감이 도사린다. 그들은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고 매사에 무기력해지게 될 운명이다. 모두는 조용히 절망한다.“나는 아침마다 면도할 때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며 수치감에 치를 떨 것이다. 거울 속에 비치는 것은 길들여진 소인배 말랴노프이리라.”그러나 이 와중에 오직 단 한 사람, 베체로프스끼만이 이 싸움을 계속하고자 한다. 모두의 버려진 연구를 끌어안은 채, 굴하지 않고. 말랴노프는 그를 말리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지금 우리는 자연의 법칙과 대항하고 있어. 자연에 대항한다는 것은 어리석어. 그리고 자연에 복종한다는 것은 수치스럽고. 게다가 궁극적으로는 역시 어리석어. 자연의 법칙이란 연구되고 유용한 목적에 이용되어야 해. 그게 유일한 접근 태도야.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하려는 일이야.”자연에 대항하는 것은 어리석다. 일개 인간이 맹수, 가뭄, 홍수, 지진에 대항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그러나 또한 자연에 복종하는 것은 수치스럽다. 인간 이성의 잠재력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절대적 자연 앞에 그저 순종했다면 인류는 아직도 원시 시대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인류는 자연과 현실을 부수고 나가 그 너머의 세상에 닿기를 추구했고 그 결과로 수많은 학문이 발전해 인간을 개별 생물 그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형이상학과 과학과 허구의 환상들이.끝내 베체로프스끼는 “모든 것은 순리대로 되어야만 한다는, 그리고 그 밖에는 아무 다른 해결책도 없다는 확신”을 품고 차분히 대항의 자세를 갖춘다. 말랴노프는 그를 설득하지 못하고, 베체로프스끼는 그에게 그의 자식이 다 클 때까지,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한다. 아무리 늦더라도 언젠가, 마음의 준비가 된다면, 학자들은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해야 하므로. 말랴노프는 확실히 대답하지 않는다. 둘은 눈빛을 나눌 뿐이다. 확고함, 상대에 대한 연민, 불가피함, 비극에 대한 인식이 담긴 말 없는 눈빛을.“”?라는 말랴노프의 되뇌임으로 작품은 끝난다.이 구절은 베체로프스끼에게 곧 닥쳐올 비극을 암시하는 듯하기도 하지만, 내적으로 죽어버린 말랴노프의 앞으로의 삶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어떤 식으로든 이들 앞에는 전락의 길이 뻗어 있다. 작품은 별다른 희망 없이 절망과 혼란, 학자의 미약한 확신의 빛만을 남겨두고 이렇게 끝난다.작가는 어떤 답도 제시하지 않는다. 일부 독자들은 무언가 반전이 일어나거나 극적인 결말로 마무리지어지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일은 없다. 고차원 존재의 문제가 해결되거나, 혹은 모두가 걱정하는 것처럼 베체로프스끼가 죽거나, 그것도 아니면 최소한 베체로프스끼가 실질적인 계획을 준비하고 개시하며 희망적인 미래를 제시하는 것조차 나오지 않는다. 삶은 아기자기한 동화나 소년만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베체로프스끼의 미래는 끝까지 불투명하고 긍정적인 전망의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그 ‘고차원 존재’도 과연 진짜였는지 알 길이 없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서 형체 없는 적을 상대하는 막막함, 그 막막함 속에서도 나아가야 하는 진리 탐구의 자세가 이 작품의 전부다.
나의 미카엘 - 아모스 오즈오답을 내지 않을 수 없는 우리들나는 몽상가다, 나는 위대한 세기의 걸작을 쓸 작가의 씨앗이었다. 나는 어느 날 한 남자를 만나고, 그에게서 운명적인 반쪽을 느끼고 그와 결혼한다. 어쩌다보니 아이를 만들고, 예상치 못한 신체와 환경의 변화에 휩쓸려 나는 나를 잃어버린다. 나는 힘들다. 공부를 잠시 쉬기로 하는데, 결론적으로 영원히 그만두게 된다. 남편은 지질학이든 경영학이든 어쨌든 뭔가를 공부하고, 나는 박사나 사업가가 되겠다는 그를 응원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돌본다. 행복해야 하겠지만 무언가 단단히 틀어진 것 같다. 나는 남편이 낯설고, 내 아이조차 낯설게 느낀다. 나는 아름다움과 총명함을 잃어가고 있다. 내 안에 잠든 자유로운 천재, 눈부신 잠재력이 뭔가 전혀 다른 것을 위해 갈려나가고 있는데, 그 무언가 다른 것, 아이와 남편과 가정이 정말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겠다. 나의 이 혼란스러움이 이들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게 한다. 아, 차라리 꿈을 몰랐으면 좋았을걸. 좋았을까? 이제 나는 이 남자와 아이를 떠나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차가운 젊은 시인처럼 감상적인 모험을 시작할 수도 없다. 이렇게 나를 이입해보면, 드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와, 내 인생 X됐다.은 내가 읽은 가장 현실적인 러브스토리다. 결혼이란 무엇일까?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결혼 때문에 두 사람의 인생이 끝나버렸다고 생각했다. 결혼의 실체는 끔찍하다. 야만적이다. 사소하고 당연하고 평범하다, 그래서 더 야만적이고 절망적이다. 나는 마치 멋진 신세계의 문명인이 존을 바라보듯 그들을 바라보는 기분이다.그들에게, 그리고 나의 부모님에게 결혼과 배우자라는 게 얼마나 낯설었을지 이 작품을 읽으며 상상했다. 나는 지금껏 부모님의 결혼 초를, 부모님의 20대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공감해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이 소설은 내게 충격적이었다. 두 개의 성이란 무엇이고, 사랑이란, 결혼이란, 정말 무엇이기에 20세의 갓난 어른들이 만나자마자 영원한 계약을 맺으려 할까? 그저 잘 맞는 또래 이성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타협하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자신과 비슷한 자식을 남기고, 죽고, 잃고, 또 다시 반복한다. 그 모든 과정이 고통이고 허무함이고 인생이라서, 나는 책을 덮고 난 후 내가 늙어버린 것 같다고 느꼈다. 독서토론에서 어떤 친구는 ‘비혼주의자들이 옳았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굳어졌다’라고 말했는데, 나는 본래 결혼에 긍정적인 편임에도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비혼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결혼은 확실히 야만적이다?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도 마찬가지로 느껴진다.진부한 얘기를 해보자. 그들의 인생은 결혼을 분기점으로 송두리째 변했고 그들 자신도 변했는데, 그 중에도 한나 쪽이 더욱 심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바로 이 부분이 내가 한나를 긍정적으로 보고 한나에게 공감하는 점이다. 한나가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는다면?이유라는 말은 함부로 써서는 안 되지만?한나는 결혼과 동시에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한나와 미카엘의 차이는 ‘결혼을 하면서 인생과 정체성이 180도 달라졌는가 아닌가’의 여부다. 한나는 학업을 포기했다. 교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20살에 결혼했고 1년 뒤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결혼하는 순간, 정확히는 아이를 갖는 순간부터 문학도가 아니었다. 진부한 괴로움. 그러나 미카엘은 조금 달랐다. 그는 학업을 이어갔다. 그의 생활은 결혼과 함께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그는 여전히 지질학자였다. 반면 한 문학도는 아내이자 엄마가 되었다. 미카엘에게 남편이라는 호칭은 이명이자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는 고넨 박사라 불렸다. 하지만 한나는 아내로서만 존재했기 때문에 고넨 부인이라 불렸다. 한나에겐 그것이 주어진 전부였다. 그게 문제였다. 그래서 한나는 뿌리째 변할 수밖에 없었다.물론 한나가 옳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먼저 한나가 왜 이렇게 행동했는가를 생각할 기회는 가져봐야 한다. 그럴 기회도 없이 표면만 보고 무조건 한나를 이기적인 미친 여자로 치부하는 것은 편향된 사고이고, 이 저울을 맞추기 위해 작가는 여성의 시점을 택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이 소설이 미카엘의 시점에서 서술되었더라면 대부분의 독자들은 한나를 이해할 일말의 가능성도 없었으리라. 대충 보면 미카엘은 헌신적이고 상냥하며 완벽하지는 않아도 항상 노력하는 좋은 남편이고, 한나는 그냥 히스테리를 부리는 부인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렇게 한나의 심리라도 묘사되지 않았더라면 한나는 그저 짜증나기만 할 뿐인 이해할 수 없는 악역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글릭 부인처럼.그렇다면 왜 이렇게 저울을 맞추어야 하는가? 이 시대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어느 정도는 이어지고 있는 악습 때문이다. 남성은 고사하고 여성 스스로조차도 어느 정도는 여성 혐오를 갖고 있다는 점, 그래서 여성마저도 여성을 쉽게 이해해줄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실제로 작중에서 한나가 그랬듯(여자애인 게 싫었다, 부인들이 혐오스러웠다, 남자애처럼 행동하면 커서 남자가 될 줄 알았다), 일부 여성들은 여성으로서 당당해지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비슷해짐으로써 당당해진다. 때때로 이들은 전형적인 여성의 특질들을 경멸하기도 한다. 필자도 가끔은 그래왔고, 그래서 한나 같은 히스테릭한 여자들에게, 솔직히 말하자면 편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작가는 여성의 시점을 택하고, 한나를 통해 흔히 전형적인 여자의 나쁜 특성이라 여겨지는 행동들?낭비벽, 변덕스러움, 경박함, 즉 히스테리?과 함께 그에 따른 한나의 심리를 보여주었다. 그 덕에 그나마 한나를 이해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고, 나는 반성했다. 그 모든 것에도 이유가, 의도가, 의미가 있음을 이해했다. 작가는 그 점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결국 한나도 하나의 사람일 뿐임을. 그 사람을 이해할지 말지는 각자의 선택이지만, 일단 그녀를 “스테레오타입”이 아닌 살아 있는 한 인간으로 본다는 것은 중요하다.이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어딘가 잘못되어 있는데(한나, 글릭 부인, 제니아 고모 등) 나는 이것이 궁극적으론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 방식이 어떠하든,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 스스로가 바란 자신이 되지 못한 사람은 비틀린다. 한나가 스스로 글릭 부인처럼 미쳐버릴 것이라며 두려워했듯, 누구든지 이 같은 상황에 놓여 인생을 잃어버린다면 한나처럼 되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나는 한나에게 이입해보면서 이번 생은 끝장났다는 예감, 모든 게 망가져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끔찍함을 느꼈고(어쩌면 나 역시 한나 같은 몽상가류 인간이어서일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죽거나 도망치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다?자유롭고 방탕한 이본 아줄라이 양, 마치 랭보가 된 것처럼. 그래, 내가 랭보라면야, 왜 안 되겠는가?그렇다고 내가 한나만을 전적으로 긍정하려는 건 아니다. 이 글의 진짜 주제는 지금부터다. 한나와 미카엘의 결합은 둘 모두의 인생을 뒤틀었고, 이들 앞에는 똑같이 풀 수 없는 문제, 불가해한 인생이 놓여 있다. 둘은 똑같이 삶의 근원적인 부조리에 직면해 있을 뿐이다. 이는 둘 중 누구 하나만의 문제도, 둘만의 문제도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다. 어쩌면 이게 작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 사람은 세상을 향해 이렇게 묻는다.한나: 사람은 왜 성숙해야만 하는가? 몽상은 왜 악으로 취급되는가?미카엘: 무엇을 더 해야 완벽해질 수 있는가? 정답은 무엇인가?그들의 입장에서 답해 보자.한나는: 열정적인 몽상가다, 하지만 몽상이 왜 나쁜가? 현실적이지 못해서? 현실적이지 못한 건 나쁜 건가? 남에게, 미카엘에게 피해를 주니까? 그건 자본주의식 윤리와 공리주의에 기초한 판단이겠지. 애초에 피해를 주는 것이 왜 나쁜가부터 묻기 시작하면, 현실주의자들은 혼란에 빠진다. 그들은 그저 무위는 비효율적이고 비효율적인 것은 나쁜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왜 나쁘면 안 되는지를 깊게 고찰해본 적이 없으니까. 어째서 사람은 커 가면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왜 얼룩져야 하지? 왜 그걸 당연하게 여기지? 내가 하고자 하면 뭐든 될 수 있지 않은가? 설령 이루지 못한다 해도 한번뿐인 인생에 꿈을 꾸는 것이 나쁜가? 왜 광기는 철없음으로 해석되는가? 어째서 사회에 섞여 유전자를 실어나르는 배로 살아야만 하지? 엄마와 할머니와 조상들과 똑같이. 난 하늘 아래 걸었고, 시의 여신이여! 난 그대의 신도였거늘. 오, 라 라! 나는 얼마나 많은 눈부신 사랑들을 꿈꾸었던가! 땅에 발 딛지 못하고 뜻 없는 한량처럼 떠돌면?마치 백야의 주인공처럼?그러면 틀린 건가? 어차피 인생은 한바탕 덧없는 꿈 같은 것일진대, 삶의 방식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 정동호철학은 자기계발서처럼 몇 줄로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게 아니다.가끔 철학을 정리해 자기계발서처럼, 위로가 되는 감성 글귀처럼 모아놓은 책들이 있지만 그런 것들은 읽어도 별 도움이 안 된다. 혹하긴 하지만 금방 잊힐 수밖에 없어서 그렇다.‘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신은 죽었다’… 얼핏 듣기엔 파격적이고 있어 보이는 말인데, 그 진짜 뜻은 뭘까? 이 말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하다. 물론 세계관이라고 해서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다.??- 새로운 세계관: 3000만큼 사랑해!?에 나왔던 대사다. 그런데 이 단순해 보이는 말은 수학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다. 이 아이는 10이 1보다, 100이 10보다 크다는 것을 알고 있고, 3000이 자신이 아는 최대의 숫자였기 때문에 3000만큼 사랑한다며 자신의 사랑의 크기를 표현한 것이다.반면 숫자와 산수를 배운 적이 없는 아이에게 ‘3000만큼 사랑해!’라고 하면 아이는 그 뜻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3000을 모르는 건 둘째치고, 3000이 1이나 100에 비해 ‘많다는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기쁨을 나누자’, ‘백 배는 낫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우리 삶에 수학적 세계관이 깔려 있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들이다. 우리는 숫자와 사칙연산을 배우고 숫자의 세계관을 터득한다. 이후 우리는 살아가면서 만나는 것들을 자연스레 수량화하고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면서 생활한다. 합리적인 이의가 있거나 미친 게 아닌 이상, 1+1은 2임을 배우고 그 원리를 이해했는데도 1+1=3이라고 믿을 사람은 없다.?위에서 언급한 문장들도 이런 식으로 새로운 세계관을 필요로 할 뿐이다. 저 문장 하나만 읽은 사람은 저 구절을 그냥 ‘오 그럴듯한데?’ 혹은 ‘뭔 개소리야?’ 정도로 받아들이지만, 니체의 세계관으로 저 문장을 읽는 사람은 그 진의를 이해할 수 있다.?흔히 대중은 철학을 감성적인 명언집으로 오해하곤 하는데, 철학은 엄연히 물리학이나 수학과 같은 학문이다. 애초에 물리학이나서가 아니라, 마치 1+1 덧셈의 원리처럼 그게 옳고 당연하기 때문이다.??- 동정심 많은 사람은 착한 사람일까??예시로 가장 소박하고 일상적인 얘기를 한번 해 보자. “동정심은 선한 게 아니라 오히려 열등한 감정이다.” 이 말만 딱 들으면 그냥 좀 반항적이고 특이한 주장인가? 싶은데, ‘왜’를 알고 나면 이건 단순한 말 한 마디가 아니라 원리이자 세계관이 된다. 한번 이렇게 사고를 전개시켜 보자. 이것이 옳다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생각 놀이를 해보자는 거다.?1. 동정심이 왜 나쁜 감정인데??? 동정심은 때와 장소,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불안정한 감정이고, 공정한 판단을 방해하는 일종의 도덕적 ‘질환’이니까. 우리는 스트레스에 절여져 있을 때는 동정심을 잘 느끼지 못하고, 평소 싫어하던 사람에게도 동정을 느끼지 않는다. 반면 친한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동정을 느껴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동정은 긍정적인 지지의 감정이 아니라 부정적인 고통의 감정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태생적으로 열등한 감정이다. 또한 동정은 베푸는 자와 받는 자 모두에게 자기기만과 안주, 도태를 유발할 뿐 하등 도움이 안 된다.??2. 하지만 동정할 줄 알아야 다같이 고통을 나누고 고통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고통은 나눈다고 줄어들지 않는다. 우리는 고통을 겪는 타인을 보면 불편함과 슬픔, 동정을 느끼는데, 이는 ‘감염되는 고통’일 뿐이다. 동정은 말랑한 마음에 전염되고 확산되는 고통의 역병이다.??3. 힘든 사람의 괴로움을 덜어줄 수만 있다면야 내가 그 정도 고통은 감수할 수 있어.?? 동정 받는 사람들이 고통을 조금 덜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동시에 그들은 ‘동정 받을 수밖에 없는 나’ 때문에 자존감에 상처를 받고 삶을 비관하게 된다. 정말 순수한 감사의 마음만으로 동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동정은 도덕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도움과는 다르다. 동정은 시혜다. 동정 받는 이들은 누구나 약간의 부끄러움과 미안함, 고마움을 느끼는데, 바로 이것이 그들의눈길에 감싸여 자기연민에 빠진다. 어차피 동정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스스로 삶을 개선할 동기도 점차 잃어버린다. 게다가 동정에 익숙해지면 이른바 관심종자가 되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고통을 과장하고 동정을 권리로까지 여긴다. 동정은 중독적이다. 동정을 받다가 받지 못하게 되면 아예 동정이 없었을 때보다 삶을 두 배로 비관하고 서운해한다. 관심을 끌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울고불고 떼쓰는 어린아이와 같다. 이게 심해지면 그는 ‘내가 너보다 더 불행하니 나야말로 동정받아야 해’ 따위의 불행배틀을 벌이기도 한다. 끝내 그의 삶은 실질적으로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도와주는 이들의 삶까지 좀먹는 해로운 잡초가 된다.??5.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거 아닌가? 그래도 동정은 이타적인 마음에서 비롯되잖아.?? 동정의 근본 동기를 분석해보면 결국 본질은 이기심이다. ‘동정을 베풀 수 있는 나’의 여유로운 위치를 확인하며 얻는 우월감, ‘나는 동정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도덕적 자부심. 마땅히 동정을 해야만 착한 사람이라는 의무감. 동정심도 없는 놈이라는 죄책감이나 부채감에서 벗어나려는 도피. 또는 동정의 대상에게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는 자기연민, 자기애. 때로는 자기혐오 때문에 남에게 대신 사랑을 퍼부으며 맛보는 헌신과 희생의 자해적인 만족감. 마지막으로 동정을 베풀어 고통을 없애줌으로써 더 이상 그 고통스럽고 추한 꼴을 눈앞에서 안 봐도 된다는 심적 편안함.??6. 그래그래, 난 이기적인 사람이야. 그냥 내가 편하려고 이기적으로 오지랖부리는 거라고 치지 뭐.?? 정확히 말해 그건 이기심도 아니다. 그건 위선이자 가짜 이기주의고, 이는 이기심 중에서도 아주 나쁜 종류다. 이기심에도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있다. 애초 이기심은 ‘자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생물의 발전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가짜 이기심은 그 이기심을 숨기고 스스로조차 속이면서 교묘하게, 무의식적으로, 소극적으로 이득을 챙기는 것, 위악을 부리는 척 어물쩍 넘어가려는 사람들이다. 이중의 위선을 통해 내적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외적으로는 끝까지 ‘너무나 선해서 어떤 매도에도 동정심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으려는 것이다. 스스로가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견고한 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입으로는 ‘위선이든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고 말하면서도 내심 그것이 ‘옳으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건 이미 선악의 문제도 아니며 옳지도 않다. 내가 위악이나 위선을 인정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나는 선하지도(good) 악하지도(evil) 않다. 다만 질적으로 나쁜(bad) 인간, 좋지(good) 않은 인간, 노예적인 인간일 뿐이다. 자신을 고양하려 하지 않고 우울하고 퇴폐적인 환자들을 껴안은 채 다 함께 밑바닥에 남으려는 퇴행적인 도덕, 해로운 잡초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하지 않고 말없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 인내하는 성정, 현실을 직시하기를 거부하고 이중의 위선으로 미리 매를 맞아 치우려는 회피적인 심리는 선함의 탈을 쓴 하인 근성에 불과하다.??7. 그럼 힘든 사람들을 어떻게 도우라고??? 그들에게 냉담하고 무관심한 시선을 던져라. 길가에서 구걸하는 거지에게 몇 푼을 적선하면 그들은 평생 구걸하고 살게 된다. 그런 적선이 전혀 없다면 거지는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놓일 것이고, 선택할 것이다. 도태될 것인지 살아남을 것인지. 스스로 불행을 부정하고 어떻게든 일어서는 것 외에 현실적으로 그가 구걸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만약 그가 스스로 도태되기를 선택한다면 도태되도록 두면 된다. 안타깝게도 그는 스스로 몰락하는 것이고, 그에게 손을 내밀면 그는 내게 기생할 것이다. 살아갈 의지도 능력도 없는 생명은 삶을 축낼 뿐이다. 눈앞의 고통에 쉽게 유혹되지 말라.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보자. 나는 그가 사람답게 살기를 바라는가, 그가 오늘 하루 배를 불리기를 바라는가? 오늘 나의 알량한 사랑이 그를 하루 더 거리에 주저앉힌다. 그 감해주면 어디가 덧나?’라며 동정을 구걸하는 사람들, 이들은 감미로운 약간의 적선에 취해 전의를 상실한 걸인과 다르지 않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달콤한 빈말을 바라다니! 그건 자기기만이다. 사회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강하고 올곧은 영혼들이 거리를 채워야 한다. 무기력하고 병약한 사람들은 사회 전체를 우울에 빠뜨린다.??- 세상은 한 권의 책이며, 내가 얼마나 많은 관점을 갖느냐에 따라 그 책이 팸플릿인가 대서사시인가가 결정된다?“동정심은 선한 게 아니라 오히려 열등한 감정이다.” 이 문장이 아까와는 다르게 읽힐 수 있을까? 물론 여기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기존 생각을 뒤집어 엎는 거지 여기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다. 글이 다소 공격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건 설득보다 혼란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니체가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제 이걸로 나는 세상을 보는 렌즈를 하나 더 갖게 된 셈이다. 만약 지금껏 막연히 동정을 무조건 좋은 것으로만 여겨왔다면, 이제는 의문을 던져볼 수 있다.?동정이 사회적으로 정말 좋은 영향만을 불러오나? 동정이 당사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나? 그 사람은 힘들 때 솔직하게 응원받길 원하는 사람인가, 추하게 동정받길 기대하는 사람인가? 주변을 둘러보면 슬픈 대화를 해도 진심으로 긍정적으로 격려하게 되는 친구와, 대화하고 있으면 묘하게 내 기분까지 가라앉고 우울해지는 친구가 있다. 후자의 친구는 내게 해로운 존재 아닐까? 그리고 만약 그가 애초 의지도 능력도 없는 인간이라면 우리는 굳이 그런 사람을 도울 필요가 있을까? 그가 같은 인간이고 지인이나 이웃이라는 이유만으로? ‘어쨌든 모든 사람은 사랑스러운 존재이니까 돕고 싶어’ 같은 감상적인 이유로?(물론 이런 논리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필자도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을 긍정한다. 하지만 항상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여러가지 견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게 정말로 순수한 사랑일까, 아니면 5번의 무의식적인 이기심들 중 하나일까? 어쩌면 …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잔인한 운명의 여신이 이 시논을 비참하게 하더라도저를 거짓되고 기만하는 자로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목차1. 소인국 릴리펏과 거인국 브롭딩낵의 대비2. 거인국 국왕의 화약 거절3. 후이늠: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4. 인간은 자신의 세계 테두리 안에서 생각한다- 소인국 릴리펏과 거인국 브롭딩낵의 대비거인국 왕은 걸리버에게 걸리버 크기의 여자를 얻어 주어 후손을 보기를 바란다. 그러나 걸리버는 후손을 남길 바에는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가 그곳에서 자식을 남긴다면 그의 후손들은 ‘카나리아 새처럼 조롱에 가두어지고’ ‘진기한 물건으로 팔려나갈’ 것이기 때문이다.그런데 여기에 흥미로운 포인트가 있다. 걸리버가 소인국에 있었을 때도 역시 소인국의 동물들을 영국으로 데려갔고, 소인국 사람들까지도 12명 정도 데려가려 하지 않았던가? 그때 소인국 왕은 ‘설령 그것을 희망하고 동의하는 자가 있더라도 단 한 명도 데려가지 말라’고 강하게 당부했었는데, 이 대목에서 그 이유를 새삼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소인국 왕은 소인들이 걸리버들로만 이루어진 나라에 가게 되었을 때 어떤 취급을 받게 될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걸리버는 그들의 처지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하지 못했었다. 단순히 ‘신기하니까 고국에 좀 데려가면 좋겠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소인들을 데려가고자 한 것이다. 결국 걸리버는 소인들이 아무리 대단한 기술과 지능을 가졌던들 상관없이 오직 자신보다 크기가 작다는 이유로 그들을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애완동물 정도로 여겼던 셈이다. 그리고 정작 본인이 거인국에서 그런 취급을 받았을 때에는 분개하고 슬퍼하며 끊임없이 자신도 동등한 인격체임을 증명하고자 애쓴다. 하지만 거인들은 걸리버 자신이 그랬듯 끝까지 걸리버를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해주지 않는다.브롭딩낵에서 돌아온 걸리버의 반응은 릴리펏에서 돌아왔을 때의 반응과는 사뭇 다르다. 릴리펏에서의 경험은 걸리버의 정신에 큰 부담을 주지 않았다. 약간의 위협이 있기는 했어도 그냥 장난감 모형 도시에서 사는 기분이었으니. 그래서 걸리버가 릴리펏에서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에게 그렇다할 변화는 없었다. 그런데 브롭딩낵에서는 모든 사소한 것들이 생존의 위협이고 두려움이었다. 거기에 익숙해진 걸리버는 영국인들을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을 갑갑한 난쟁이들로 느낀다. 한때 거인과 함께 지냈었다는 이유로 마치 자신을 거인처럼 느끼는 걸리버의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단지 크기의 차이일 뿐인데, 이 크기의 차이만으로 우월감을 느끼며 여유로운 관용을 베풀었다가 무력감을 느끼며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그의 변화를 통해 독자들은 역지사지란 무엇인가를 그대로 느껴볼 수 있다.- 거인국 국왕의 화약 거절“자네 나라의 국민들 대부분은 가장 해로운 자그마한 벌레 같은 족속일세. 자연이 일찍이 땅 위에 기어 다니도록 허용한 벌레들 중에서 말이야.”브롭딩낵의 국왕은 걸리버의 고향 이야기를 듣고는 이런 평가를 내린다. 자존심이 상한 걸리버는 이러한 국왕의 판단을 지식 부족과 편협한 사고 탓으로 돌린다. 그러면서 걸리버는 자신의 고향이 얼마나 대단한지 과시하기 위해 보답으로 화약과 대포 제조법을 알려주겠다고 제안하는데, 이에 국왕은 놀라며 공포를 느끼고 제안을 거절한다. 하지만 걸리버는 이 역시 근시안적 견해(절대 군주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흘려보냄)로 치부한다.화약을 거절하는 국왕의 판단은 인간적이고 정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제국주의와 식민지 역사를 겪은 우리 인류로서는 사실 걸리버의 판단이 장기적으로 옳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언젠가 발전한 인류(현대 인류를 생각해도 좋다)가 여전히 냉병기 시대에 머물러 있는 브롭딩낵을 발견하고, 우리의 첨단 무기, 즉 전투기와 폭탄, 핵 등을 가져와서 침략한다면 이 거인들은 어떻게 될까?한번 따져 보자. 1945년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16~21kt급이었다. 15kt 규모 원자폭탄의 광구 지름은 1km이며, 원자폭탄이 터지면 그 반경 안은 광구화하여 증발한다. 그리고 지름 7km의 열복사 반경 내에서는 사람이 탄소화되거나(직접접촉) 화상을 입게 된다(간접접촉). 또한 초고기압이 발생해 음속 이상의 폭풍이 일어나고, 버섯구름을 통해 지름 40km 범위에 방사성 물질이 뿌려진다. 이 낙진은 바람을 통해 더 멀리까지 퍼져 나갈 수 있다.인류 역사 최대의 핵폭탄이었던 차르 봄바는 50mt(50000kt)급이었는데, 이는 지름 8km의 광구를 발생시켰고, 버섯구름의 규모는 높이 64km, 폭 3~40km에 달했다고 한다. 총 피해 범위는 지름 약 200km 이상이었다. 원자폭탄이 비인간적인 병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정확한 수치로 알아보니 그 거대하고 무관심한 폭력의 규모에 어이가 없어진다.그럼 이 병기들이 브롭딩낵의 거인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을까? 이 거인들은 키가 20미터 정도이고, 영토는 길이 1만km에 폭 5~8천km라고 한다. 수도 도시는 길이가 약 86km, 폭은 약 72km에 달한다. 왕궁은 약 11km 둘레의 크기이다(지름이 약 3.5km).즉 차르 봄바 하나를 왕궁에 떨어뜨리면 왕궁은 즉시 증발하며, 수도 전체에 피해를 가할 수 있다는 소리다. 굳이 차르 봄바까지 갈 것도 없이 훨씬 약한 15kt급의 폭탄을 몇 개만 사용해도 거인국에 막대한 피해를 끼칠 수 있다. 이런 폭탄 앞에서 거인은 별것이 아니다. 인류 입장에서 거인은 지능이 좀 높은 공룡 정도의 존재에 불과하다. 그 외에도 각종 생화학 무기까지 생각한다면, 우리 인류가 거인국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들을 노예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이러한 현실을 고려하면, 거인 국왕의 인도적 선택은 파멸의 길일 뿐이다. 만약 세상에 우리만 존재한다면 순박한 브롭딩낵의 거인들처럼 그런 끔찍한 무기를 아예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낫겠지만, 외세가 존재하고 각자 다른 속도로 발전하는 이상, 경쟁에 의한 강제적 진보는 멈출 수 없다. 그러니까 인간은 전쟁을 통해 태생적인 자멸의 습성을 증명한 셈이다. 거인 국왕이 말한 대로, 인간은 최악의 해로운 벌레인지도 모른다.- 후이늠: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이성을 지닌 말들의 나라인 후이늠국에서 총회의 후이늠들은 걸리버가 신체적으로 자신들과 다르니 일반적인 야후(이성 없는 인간)와 동일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후이늠의 본질은 무엇인가? 무엇이 후이늠을 후이늠이게 하는가? 이성 없이 후이늠의 신체만으로 족한 것이라면, 과연 후이늠들은 인간 땅의 ‘말’들도 자신들과 동일한 고귀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대우해줄까? ‘후이늠’들이 보는 ‘말’은 ‘인간’이 보는 ‘야후’와 비슷할 텐데? 자신과 껍데기만 같을 뿐 이성은 없는, 동물이나 다름없는 존재 말이다.카프카의 를 생각해 보자. 주인공 로트페터는 원숭이지만 인간의 말을 하고 이성을 습득해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고 학술원에 보고를 올리기까지 한다. 이때 로트페터는 인간인가? 언어를 가진 원숭이 로트페터가 인간이라면, 역으로 언어 없이 자연에서 살아온 야만인은 인간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을 짐승 취급해도 되는가?반대로 만약 로트페터가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인간을 다른 짐승과 구분지어 그토록 추앙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저 다른 껍데기를 가졌을 뿐, 인간 자체는 다른 짐승들보다 우월한 점이 없는데? 그리고 그렇다면 인간의 신체를 갖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성 있는 존재를 짐승으로 대해도 된다는 건가? 로트페터를 짐승으로 대해도 되는가? 후이늠들의 처사는 이 모든 의문들에 부딪힌다. 그런데 후이늠들만이 문제인가?우리는 충분한 이성을 지닌 걸리버를 ‘야후의 껍데기를 가졌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는 후이늠들을 보고 답답해 한다. 야후가 이성을 갖게 된다면 후이늠이 될 수도 있을 텐데, 껍데기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어느 날 이성을 지닌 말이 나타나 나도 당신들과 같은 이성적 존재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할 수 있을까? 분명 껍데기는 말인데, 인간과 동일하게 말하고 고차원적 사고를 한다면?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그 말을 우리 시민들 중 하나로 받아들이고 총회에도 참가시켜줄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 같다.후이늠국 부분을 읽다 보면 또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이성 없는 인간인 야후는 정말 인간의 자연 상태인가? 탐욕은 어느 정도는 이성의 증거다. 자연의 동물들은 대개 현재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에 따라 행동하지, 생존과 번식에 불필요한 것, 먼 미래의 것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이늠국에서 묘사되는 야후들은 생존을 저해할 만큼 불필요한 경쟁을 일삼고, 생존과 관련 없는 것들에 집착하며 비본능적인 욕구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이런 탐욕이 이성과 별개일 수 있는가? 이런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즉 인위적이다.그러면 야후에게 약간이라도 이성이 있는 것인가? 만약 야후에게 이성이 있다면 이성은 이런 야만 상태와 양립할 수 있는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론이 있다. 성악설, 성선설, 성무선악설… 그런데 본디 자연에는 선악이 없다. 선악은 이성적 존재들이 만들어낸 개념이며, 실제로 이성적 존재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특성이다. 그런데 야후들은 지나치게 ‘악’의 측면에 쏠려 있다. 이는 전혀 자연적이지 못하다. 만약 이에 따라 ‘야후가 이성을 가졌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동시에 야후는 이런 야만 상태에 오래 머물 수도 없을 것 같다… 야후는 인간처럼 금세 발전했어야 할 것이고, 후이늠국에서처럼 오랫동안 야만 상태에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가 인간 풍자를 위해 야후의 끔찍함을 과장하면서 약간의 논리적 오류를 감수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