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을 보고지난 4월 22일, 나는 종로의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공연을 감상했다. 국악 감상 과제를 받고, 볼만한 공연을 선정하며 처음에는 상당한 막막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나는 전통음악 감상 수업을 듣기 전까지 국악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배운 것이 전부였고, 이 분야에는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의 첫 국악 공연을 의미 있고, 배울 점 많은 공연으로 선정하고 싶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공연이든 간에,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기 때문이다. 국악과의 아름다운 첫 만남을 위해, 나는 국악 공연 정보를 포스팅하는 다양한 블로그와 카페를 서핑하며 볼 만한 공연을 찾아보았다. 나의 공연 선정 기준은 두 가지였다. 첫째, 나 같은 초심자가 보기에 지루하지 않을 것. 둘째 배운 이론적 내용을 적용하면서 볼 수 있을 것. 그러던 와중 공연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서울시 청소년국악단의 청년들이 모여 준비한 무대로, 총 다섯 개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 , , , 가 그것이다. 모두 수업 시간에 조금씩 언급된 내용들이고, 다양한 국악 공연을 10~20분 내외로 짧게 보여주는 공연 구성이었기 때문에 나 같은 초심자가 수업 내용을 떠올리며 보기에 딱 적절한 무대라고 판단했다. 교수님이 수업 중 한번 소개해주시기도 한 공연이기 때문에, 더더욱 신뢰가 가는 공연이었다. 또한 공연 소개에 ‘전통을 기반으로 트렌드를 이끌어가며 다채로운 퍼포먼스를 통해 색깔을 담아낸 융복합 공연’이라 적혀있었기 때문에 고리타분하지 않고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4월 22일 단 하루만 공연했기 때문에,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스케줄을 정리해야만 했지만 그만큼 더 기대되었다.공연을 보기 전에, 더 즐겁고 반가운 국악과의 첫 만남을 위해 공연에 대한 이론적 정보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농악, 종묘제례악, 동해안 별신굿, 범패에 대해 배운 수업 PPT를 복습하고 인터넷으로 참고 자료도 찾아보면서 이론적 내용을 습득했다. 공부할수록 더더욱 기대되었다. 21세기 현대 사회에, 과거의 문화 요소들을 어떻게 구현해낼까? 특히, 공연의 마지막 챕터인 의 경우, 내가 좋아하는 BTS의 노래를 국악으로 편곡했다고 해서 더더욱 기대감을 안고 공연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학생 할인을 받은 티켓을 현장에서 수령하고, 공연 시작 10분 전 공연장에 들어갔다.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공연장이었기 때문에 공연자들의 생생한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극장이 어두컴컴해지더니, 다시 밝아졌을 때는 농악 공연자들이 무대에 서 있었다. 깜짝 놀랄 틈도 없이 시작을 알리는 징 소리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장구를 치며 춤을 추는 무용수들의 멋들어진 춤사위와 북 치는 사람의 씩씩한 추임새가 청중의 흥을 돋우기 시작했다. 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에 등재된 농악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이러하다. ‘농악은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화를 추구하는 공동체 의식 및 농촌의 여흥 활동에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설명을 좀 더 알기 쉽게 나의 언어로 풀어서 말해본다면, ‘서민 음악’, 오늘날의 ‘K-POP’ 정도 되겠다. 고로 일반 농민들이 모여 연습하고, 농민들의 마음을 음악으로 풀어냈다는 것인데, 이론적 설명을 공부할 때는 그냥 ‘그렇구나’ 했던 것이 실제 공연을 보니 텍스트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다가왔다. 공연장에서 실제로 본 농악은, 공연이라기보다는 놀이에 가까웠다. 일하다가 얻은 달콤한 휴식 시간에 저들끼리 모여 즐기는 놀이답게, 서양 음악 공연이나 피아노 콩쿠르를 보러 갔을 때 느껴지는 긴장되는 공기가 전혀 없다. 여기저기서 장구를 치고 추임새를 넣으며 흥을 돋우며, 다양한 타악기가 조화를 이루어 설령 한명이 틀린 박자로 연주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악기가 묻어줄 수 있다. 신나게 대화하다가 단어를 잘못 말해도, 삑사리가 나도 웃어넘기는 친한 친구들처럼, 그 자리의 모두가 놀이를 즐기고 있었고, 관객들도 그에 동화되어 신나게 손뼉을 쳤다. 특히 농악의 괄목할만한 특징은 서양음악처럼 4/4박, 6/8박자처럼 딱딱 쪼개지는 정해진 박자가 없단 것인데, 그저 자신들의 흥에 맞추어 느려졌다가, 빨라졌다가 한다. 정해놓은 박자가 없는데, 어떻게 타이밍을 맞추는 것일까? 아마 부단한 연습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공연하는 것이 아주 즐거워 보이는 게, 자신이 하는 일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의 열기가 느껴졌다. 시험공부를 하느라 거의 좀비 상태가 된 내게 그들의 열정이 전염되는 것만 같았다.열기로 가득 찬 농악 공연이 끝나고, 다시 공연장이 어두워지더니 원색의 스카프를 두른 사람들이 등장했다. 분위기가 반전되어 엄숙하고 웅장한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궁을 떠난 종묘제례악 공연이 시작된 것이다. 미리 조사한 바에 따르면, 종묘제례악 또한 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이며, 왕실에서는 종묘제례를 통해 효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백성의 모범을 삼고자 한 것과 동시에 왕조에 대한 자신의 전통성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계기로 삼았다고 한다. 요컨대 ‘왕실의 제사’이자 ‘정치적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에서의 종묘제례악 공연은 기존의 ‘보태평’과 ‘정대업’중 대표적인 악곡을 골라 구성한 공연이다. 중간에 보컬 분이 서 계셨는데, 첫 소절을 부르자마자 깜짝 놀랐다. 마이크도 없는데 목소리가 엄청나게 크고 웅장했다. 하늘에 계신 조상에게 닿으란 의미에서 저렇게 크게 부르는 것일까? 앞선 농악에서 타악기를 통해 흥을 돋웠다면, 종묘제례악은 이와 대조되게 멜로디가 잘 느껴졌다. 구수한 소금, 대금 선율을 통해 마치 신선 세계로 들어온 듯한 웅장한 느낌이 들었다. 계속해서 한 서린 울음을 뱉어내던 보컬이 잠시 멈추고, 소금과 거문고만을 반주하는 상태로 보컬이 내레이션을 넣는 장면이 있다. 한자어로 중얼거려서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종교적이고 엄숙한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금방이라도 조상귀신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았고, 과장을 좀 보태자면 극장 온도가 내려간 느낌이었다. 수업 시간에 국악이 ‘불협화음 속의 협화음’을 추구한다고 배웠는데, 중간에 그걸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거문고와 피리 종류들이 다 같이 소리를 긁고, 끼익 거리는 부분이 있는데, 그게 왠지 듣기 싫지 않고, 여러 명이 자신의 한을 표현하는 것 같아서 묘하게 극장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다음 공연은 동해안 별신굿 공연이었다. 동해안 별신굿은 시나위의 일종으로, 동해안 자연마을에서 행해지는 마을굿이며, 1985년 2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82-가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동해안별신굿의 세습무 집단 김씨 집안의 무게가 끊겨 맥이 단절되기 시작되었고, 외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중이라고 한다. 아마 그 과정에서 에 동해안 별신굿이 포함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굿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그래서 더욱 기대되었다. 사실 작두를 타거나 하는 것을 아주 잠깐 기대했으나, 사실 동해안 별신굿은 세습무의 요소가 커서 신성성보다는 예술성이 강조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갔기 때문에 큰 기대를 버렸다. 무대에 악사들이 동그랗게 앉아 연주를 하는 와중, 화려한 색색 옷을 입은 무당이 중간에 들어와 징을 치기 시작한다. 징을 칠 때마다 노래의 흐름이 깨지는 것 같으면서도 기묘하게 잘 어울렸다. 정신이 확 들고 집중이 되는 것 같았다. 굿인 걸 알고 봐서 그런가, 왠지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은 느낌도 났다. 무당이 등을 꼿꼿이 세우고 매우 높은 소프라노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데, 그 소리가 마치 높은 산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듯이 섬뜩한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색동 꼬리가 달린 연등 같은 것을 들고 가사가 있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무슨 가산지는 잘 들리지 않아 아쉬웠다. 중간에 장구를 치시던 악사분이 일어나서 무당과 함께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확실히 굿이 종교적인 행사이긴 하지만 청중에도 신경을 썼기 때문에 무용적인 측면에서도 볼거리가 많은 것 같았다. 비록 정식 굿은 아니지만 공연을 본 것이 처음인데, 민간에 의해 행해졌다고 믿을 수 없는 정말 수준 높은 공연인 것 같다. 사실 굿이 일종의 종교의식임에도, 중요 무형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왕실의 음악인 종묘제례악과 비교해도 그 구성이 뒤처지지 않고, 종묘제례악이 절제된 한을 표현한다면 굿은 절제하지 않고 한을 부르짖는 매력이 있었다.다음은 사찰을 떠난 범패 공연이었다. 범패란 절에서 주로 제(齋)를 올릴 때 부르는 소리이며, 가곡·판소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성악곡 중의 하나이다. 사실 범패에 대해 아직 자세히 배우지 않아서 잘 알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인터넷을 통해 조사하고 공연을 보았다. 악사들이 마름모꼴로 서 있고, 보컬이 알 수 없는 가사로 중얼거린다. 아마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가사이지 않을까 추정만 할 수 있었을 뿐이다. 악기들이 자기 마음대로 연주하는 것 같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조화를 이루는 것이 ‘불협화음 속의 협화음’이라는 말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범패가 스님들이 하는 음악이다 보니 왠지 고리타분할 것 같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비트가 K-POP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았다. K-POP처럼 기계음으로 다양한 소리를 찍어낼 수도 없을 텐데, 그렇게 중독성 있는 비트와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 낸 스님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부처님의 은총이 아닐까’라는 우스갯소리를 던져본다. 중간에 독주 이어달리기 느낌이 나는 부분이 있었는데, 다른 악기들의 소리가 살짝 줄어들고 한 악기씩 자신의 소리를 자랑하는 부분이었다. 나머지 악기들은 보조를 맡아주는 것이, 마치 쇼미더머니 단체 곡 연주를 듣는 것 같았다. 한 래퍼가 나와서 랩을 하고, 나머지 래퍼들이 더블링을 해 주는 훈훈한 장면이 떠올랐다. 사실 가사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인 노래 분위기가 굉장히 낙관적, 긍정적, 따스하게 느껴졌고, 나의 근심을 덜어주고 가볍게 하는 것 같았다. 조상들이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절에 갔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인간 붓다(법륜)’을 읽고: 붓다와 예수의 비교를 중심으로불교사상과 인생 중간고사 대체 과제본격적으로 ‘불교사상과 인생’ 에세이를 작성하기 전에, 내 인생에서 종교의 의미에 대해 짚어보고자 한다. 그리 오래 되지는 않은 나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을 꼽으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종교를 말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날 때부터 종교인으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부모님 덕에 나의 유아 세례는 태중부터 이미 예약되어 있었으며, 나는 이솝 우화 대신 어린이 성경을 읽으며 유년기를 보냈다. 다른 독실한 종교인들과 비교해서도 우리 어머니의 육아는 조금 독특한 부분이 있었는데, 애초에 나는 ‘예수님의 은총’ 없이는 태어나지 못했을 늦둥이 셋째 아이였기 때문이다. 영어 유치원 대신 성모 유치원을 다녔고,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으로 한글을 뗐다. 오순적 평화의 마을과 꽃동네 피정은 방학마다 가는 나의 놀이터였으며, 내가 철이 들 때쯤 나와 열한 살 차이 나는 우리 오빠는 이미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간 상태였다. 가족 모두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상황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탈출을 꿈꿨다. 정말 엄마의 말처럼 내 마음에 마귀가 깃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사춘기 무렵부터 예수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신에게 의지하는 건 엄마가 나약해서 그래.’ ‘공부 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시간에, 책 한 자라도 더 보겠다.’ 지나친 운명론과 목적을 알 수 없는 계명들을 지키면서, 나는 ‘성가정’에서 자라난 극성 무신론자가 되었다. 유년시절 형성된 종교에 대한 커다란 거부감은 비단 기독교 뿐만 아니라 불교, 이슬람교 등, 관념적인 것을 추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졌다. 엄마와의 말다툼에서 나는 종종 종교를 ‘패배자들의 현실 도피’ 혹은 ‘비생산적이고 맹목적인 과거 악습의 연장선’으로 묘사하곤 했다. 이런 내가 ‘불교 사상과 인생’ 교양을 찾아서 듣는다는 것이 어쩌면 굉장히 역설적인 상황으로 보일 수 있겠다. 사실 ‘트로이 목마 마에게 신부 동생이 비구니가 되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내 말이 농담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불교 사상과 인생 강의를 수강신청한 후 엄마에게 인증샷을 보냈다. 일종의 치기로 인해 수강을 시작한 것이 무색하게도, 강의를 듣고 관련 도서를 읽을수록 나는 이 과목이 꽤 흥미로울 뿐 아니라 심지어 나와 잘 맞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이번에 중간고사 대체 과제 지정도서 중 하나로 선정된 법륜 스님의 ‘인간 붓다’를 읽으면서, 나는 기독교 이외에 처음 접해보는 타 종교인 불교 이론이 오히려 종교에 대해 내가 가진 편견을 바로잡아주고 심지어 예수에 대한 이해까지 도와준다고 느꼈다. 지금부터 ‘인간 붓다’의 전체적 내용을 바탕으로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깨달음과 종교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과정을 기독교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얻은 경험과 비교 분석하여 적어보고자 한다.우선 책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하자면, ‘인간 붓다’는 불교계에서 높은 명망을 가진 법륜 스님이 부처님의 일생과 다양한 불교 이론을 경전에 주석을 다는 방식으로 해설해둔 상당히 두꺼운 도서이다. 처음에는 그 방대한 분량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처음부터 한 자 한 자 읽어나가다보니 마치 위인전 또는 자서전을 읽듯,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인물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사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원래부터 종교, 특히 종교 창시자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종교를 국가 등의 지배 집단에서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해왔다. 내가 그동안 보아온 종교에 심취한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도피한 채, 초월적인 존재에 의탁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적인 것을 모두 버리고 신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 이라고 표현될 수도 있지만, 다르게 말하면 ‘자신이 처한 문제 상황을 정면으로 맞설 용기가 없는 것’이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이는 로널드 피셔의 ‘마음챙김의 배신’에 채로 ‘인간 붓다’를 읽기 시작했지만, 책을 읽을수록 나는 부처의 사상이 ‘초월적 존재로 도피’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다르타’는 그야말로 의탁해야 할 신이 아닌 책 제목 그대로의 ‘인간’ 이었기 때문이다.불교와 기독교는 같은 ‘종교’라는 카테고리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책을 읽으며 불교와 기독교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럼에도 ‘신’으로서 온 예수와 ‘수행자’로 세상에 온 부처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점 또한 존재함을 알 수 있었는데, 그 차이에서 발생하는 양상이 꽤나 흥미로웠다.우선 첫 번째 차이는 역시, 종교 창시자와 인간들 사이의 관계로 볼 수 있겠다. 이는 기독교에서 예수-신도의 관계, 불교에서 부처-중생의 관계로 나타난다. 기독교에서 예수와 신도의 관계는 수직 관계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왔으며, ‘그 그물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명한다.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경외를 받고, 사람들의 갈등과 흔들리는 마음을 받아주시고 병과 마귀를 물리친다. 예수는 ‘하느님’이라는 초월자의 아들로서 사람들 위에 서 있으며, ‘하느님 나라’에 도달하는 방법을 설교하곤 한다. 그 반면, 부처와 중생의 관계는 수평 관계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우주 간에 나 자신보다 높은 존재는 없다’ 라는 부처의 탄생게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교에서는 부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동등한 수행자이다. 본인의 깨달음을 스스로 추구해야 하는 자율적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요소는 부처가 열반하기 전 아난다 존자의 지도자 계승에 대한 질문에 대답한 일화에서도 나타난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뒤 승단을 누가 지도해야 하냐는 아난다 존자의 물음에 부처는 이렇게 대답한다. “여래는 지금까지 ‘나는 대중들을 이끌고 지도하고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대중들에게 교단의 후계에 대한 가르침과 지도가 있을 수 있겠느냐.” 물론 부처 또한 신도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입장이 수 있다. 예수는 이미 열두 살 때부터 성전에서 율법 박사들과 토론을 할 정도의 종교적 비범함을 가지고 있었고, 서른 살 즈음 물을 포도주로 만들고 본격적인 회당에서의 연설을 시작하는 등 날 때부터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반면, 고타마는 크샤트리아 집안에서 태어나 사치와 향락을 즐기며 오랜 방황의 시기를 걷다가 출가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심지어 고타마는 출가한 뒤에도 바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6년간의 고행과 이리저리 떠도는 시간을 거치며 비로소 힘겹게 진리를 터득하게 된다. 물론 부처에게도 비범한 순간은 많이 있다.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탄생하는 장면이나, 아시타 선인의 예언은 부처가 훗날 범상치 않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복선을 준다. 그러나 이는 ‘비범한 신’의 모습이라기보다, 오히려 ‘홍길동전’, ’오디세우스’ 등의 영웅 서사를 따르는 비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보인다. 이는 ‘인간 붓다’라는 지정 도서의 제목과도 연관되는 부분이다.이러한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신도를 보유할 수 있었던 매력적인 종교답게 불교와 기독교는 상당한 공통점 또한 가지고 있다. 먼저 단순하고 확실한 공통점을 언급해보자면, ‘인간 붓다’를 읽으며 나는 불경과 성경 사이의 서사적인 유사성이 상당히 돋보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선, 성경에는 예언자 시므온이 갓난아기 예수를 처음 안아들고 살아 생전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를 표하며 예수를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이라 표현한 장면, 동방 박사들이 예수의 탄생을 별을 통해 알아채고 유향, 황금, 몰약을 바친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부처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아시타 선인이 슈도다나 왕에게 ‘이 아이는 장차 전륜성왕이 되거나 진리를 깨닫는 부처가 될 것이다’ 예언한 장면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러한 유사성은 종교 창시자에게 비범함을 추가하려는 목적으로 보이며 단지 불교나 기독교 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다. 또한 성경에는 40일 간의 순간에서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신념을 지켜내는 부처와 예수의 모습은 서로 다른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닮아 있다. 이는 삶에서 유혹에 빠질 기회가 많은 신도들에게 귀감을 주는 장면이다.또 다른 불교와 기독교의 공통점은 두 종교 다 ‘평등한 인간 존엄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당시가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 평등주의 사회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부처는 전 생애에서 항상 ‘가장 낮은 자’를 위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예수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외치며 힘없는 사람에게 기적을 베푼다. 이는 돈이 많고, 권력이 있는 자를 우대하는 일반적인 사고방식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또한, 고타마는 늙고, 힘없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사문 유관을 통해 접한 후 자신의 윤택한 인생을 버리고 출가했다. 이러한 부처의 평등 중심적 가치관은 한 브라만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드러난다. ‘인간은 태어나는 것에 따라 성인이 되고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브라만이나 수드라라고 해서 자식들이 성인이나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오직 그 행위에 의해서만 그의 성품이 결정된다.’ 이러한 평등 사상이 많은 사람이 예수와 부처를 믿고 사랑할 수 있게 만들었던 근본적 요인이 아닐까 싶다.이렇게 법륜 스님의 ‘인간 붓다’를 기독교와 비교해서 읽어 보고 글을 쓰면서, 나는 종교에 대해 항상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왔던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현실에서 종교는 종종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사용되곤 한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바라본 부처는 결코 마음 챙김에 심취해 현실을 외면하는 것을 긍정하지 않았다. 물론 그러한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종교에 대한 나의 생각이 갑자기 극적으로 변화한 것은 아니다. 유년 시절의 영향인지 아직 나는 종교에 심취한 사람들을 보는 것이 썩 달갑지는 않다. 하지만 최소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들의 생각과 사상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동안 내가 종교를 ‘현실에 대한 무책임한 회피’라고 생각해온 것이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다.
1. 육바라밀에 대해 서술하시오.바라밀이라는 개념은 대승 불교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이미 건너갔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원성을 넘어서 진정한 지혜에 다다르는 법을 의미한다. 대승 불교에서 말하는 바라밀은 총 6개로, 육바라밀이라고도 부른다. 그 종류는 인욕바라밀, 지계 바라밀, 보시 바라밀, 반야 바라밀, 선정바라밀, 정진바라밀 등이 있다. 그 중 반야 바라밀은 변화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 궁극적인 지혜의 완성을 말한다. 반야 바라밀은 모든 차별을 부정하지만, 차이는 인정한다.바라밀이라는 개념은 대승 불교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바라밀이라는 용어의 뜻은 ‘이미 건너갔다’란 뜻이다. 이원성에서 벗어나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지혜에 다다르는 법을 의미한다. 바라밀의 종류에는 6가지가 있어 6바라밀이라고도 불린다. 인욕바라밀, 지계바라밀, 보시바라밀, 반야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 등이 있다. 그 중 반야 바라밀은 변화하지 않고 고정된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진실을 연기적 관점에서 깨달은 궁극적인 지혜의 완성이다. 반야 바라밀은 모든 차별을 부정하지만, 차이는 인정한다.2. 대승 불교에 대해 서술하시오.대승 불교는 개인의 해탈을 추구하는 초기 불교의 흐름을 비판하며 등장한 불교이다. 대승은 ‘커다란 수레’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대승불교에서 보살의 의미는 ‘성불하기로 예정된 이’에서 ‘서원을 세운 모든 이’로 변화하였다. 모든 중생을 구하기 위해 열반에 들지 않고 서원을 세운 존재를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라고 한다. ‘위로는 깨달음을 얻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라는 말이 대승불교의 중생 구제적 성격을 잘 나타낸다.대승불교는 개인의 해탈을 추구하는 초기 소승 불교의 흐름을 비판하며 등장한 불교이다. 대승은 커다란 수레라는 뜻으로, 대승 불교에서 보살의 의미는 이전과 변화하였다. 예전의 보살의 의미가 ‘깨달음을 얻기로 예정된 이’였다면, 대승불교에서의 보살의 의미는 ‘서원을 세운 모든 이’이다. 모든 중생을 구하기 위해 열반을 미루고 서원을 세운 자를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라 부른다. ‘위로는 깨달음ㅇ르 얻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는 말이 대승불교의 중생구제적 성격을 잘 나타낸다.3. 사념처에 대해 서술하시오.사념처는 불교에서 마음을 깨어있게 하는 네가지 수행법을 말한다. 첫 번째는 몸을 관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느낌을 9가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마음을 16가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진리(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탐욕과 혐오를 극복하며 진리를 관찰한다.사념처는 불교에서 마음을 깨어있게 하는 네 가지 수행법을 말한다. 첫번째로는 몸을 관찰한다. 몸을 관찰하는 방법에도 다섯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몸을32등분 해서 관찰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네가지 자세: 행주좌와를 관찰한다. 네 번째로는 네가지 요소를 관찰한다. 마지막으로 백골이 썩어가는 모습을 관찰한다. 두 번째로는 느낌 9가지를 관찰한다. 세 번째는 마음을 16가지를 관찰한다. 네번째는 진리를 관찰한다. 진리를 관찰할 때는 탐욕과 혐오를 극복하려 노력한다.4. 팔정도에 대해 서술하시오.팔정도는 도성제의 방법이다. 여덣가지의 옳은 길을 말한다. 여기서 ‘정’이란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적인 길을 말하는 것이다. 팔정도는 크게 계, 정, 혜의 세 가지 방법으로 나눌 수가 있다. 우선, 혜를 얻기 위한 방법에는 두가지가 있다. 정견과 정사유이다. 정견은 팔정도의 한가지 요소이지만, 팔정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궁극적 목표이기도 하다.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정견이다. 정견은 세간에서의 정견과 출세간에서의 정견으로 나누어진다. 속세에서의 정견은 보시, 제사 등의 공덕을 아는 정견이다. 이는 공덕이 있긴 하지만 번뇌와 집착이 따른다. 출세간의 정견은 사성제를 통찰하는 바른 이해를 얻는 것이다. 정사유도 마찬가지로 팔정도를 통해 얻어야 하는 목표인데. 올바른 방향을 지향하는 것이다. 선과 불선을 구분하는 것이 정사유의 방법이다. 계를 위한 방법에는 세가지가 있다. 정어,정업,정명이다. 정어는 옳은 말을 뜻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과, 남을 괴롭히는 말을 하지 않는 것 등이 정어에 포함된다. 정업은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다. 살생을 하지 않는 것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정명은 옳은 생계를 가지는 것이다. 사기를 치거나, 점술을 보는 등의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정을 얻기 위한 방법에는 세가지가 있다. 정념, 정정, 정정진이다. 정념은 올바르게 ‘깨닫는’ 것이다. 이를 sati 라고도 한다. 내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망상이 사라진다. 정념을 위한 네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마음 안으로 들어간다. 그 다음 거머쥔다, 그리고는 들어가서 확립한 후 마음을 지킨다. 이 과정을 통해 망상임을 알아차리고 본래의 마음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 정정은 바른 정신 집중을 말한다. 정념이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것을 정정이라 한다. 정정진은 앞선 계와 혜를 수행하고 난 뒤에 남은 미세한 번뇌를 명상 수행을 통해 다스리는 것이다.5. 정념에 대해 서술하시오.정념은 정신 집중이다. 대상을 분석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을 정념이라 한다. 이를 sati라고도 하는데, 내가 망상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망상은 힘을 잃게 된다. 정념의 단계에는 총 네가지가 있다. 우선 대상 안으로 들어간다, 두 번째로 거머쥔다, 세 번째로 깊이 들어가 확립한다. 마지막으로 마음을 지킨다. 이렇게 정념을 수행하면 망상임을 알아차리고 본래의 마음상태로 들어올 수 있다. 정념은 내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행위이기도 하다.6. 사성제에 대해 서술하시오.사성제는 성스러운 네가지의 진리라는 뜻으로,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로 구성된다. 고성제는 세간의 결과이며, 집성제는 세간의 원인이다. 멸성제는 출세간의 결과이며, 도성제는 출세간의 원인이다.고성제의 고는 ‘고통’이다. 고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오온에 대해 집착하며 생겨난다. 고의 세가지 특성이 있다. 고고성, 괴고성, 행고성이다. 괴로운 것이 고이며, 소멸하는 것이 고이며, 형성된 것이 고라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8가지의 괴로움이 있다고 본다. 생로병사의 괴로움, 사랑하는이와 헤어지는괴로움, 미워하는이와만나는괴로움,원하는 것을 얻지못하는 괴로움,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생겨난 괴로움이다.집성제의 ‘집’은 ‘불러오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갈애’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갈애란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에 대한 집착이다. 좋은 느낌에 대한 집착은 욕망이며, 싫은 느낌에 대한 집착은 분노이다. 갈애는 불변하는 실체적 자아를 전제함으로써 생기는 근원적 집착이다.멸성제의 ‘멸’은 소멸이다. 갈애를 떠남으로써 지혜를 되찾는 상태가 멸이다. 이는 애착에 머물지 않고 마음이 자유로운 상태이다. 이를 수행하는 방법에는 견도소단과 수도소단이 있다. 견도소단은 혜해탈이라고도 하며, 진리를 이해함으로써 번뇌를 끊는 것이다. 위파사나를 통해 증득할 수 있다. 수도소단은 심해탈이라고 하며, 수행을 통해 번뇌를 끊는 것이다. 사마타를 통해 증득할 수 있다. 견도소단과 수도소단은 상호 순환적 관계이다..멸성제의 ‘멸’은 소멸이다. 갈애를 떠남으로써 지혜를 되찾는 것이 멸이다. 이는 애착에 머물지 않고 마음이 자유로운 상태이다. 이를 수행하는 방법에는 견도소단과 수도소단이있다. 견도소단은 혜해탈이라고도 하며, 진리를 이해함으로써 번뇌를 끊는 것이다. 위파사나를 통해 증득할 수 있다. 수도소단은 심해탈이라고도 하며,수행을 통해 번뇌를 끊는 것이다. 사마타를 통해 증득할 수 있다.도성제는 멸성제에 이르는 길이다.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이기도 하다. 도성제에서 중요한 것은 ‘팔정도’이다.7. 갈애에 대해 서술하시오.갈애는 사성제 중 집성제를 논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변화하는 오온에 집착하여 괴로운 상태를 갈애라고 한다. 갈애의 원인은 삼법인을 깨닫지 못하고 , 오온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것이다. 갈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온의 변화에 대해 알아차려야 한다. 갈애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다. 이는 삼계에 각각 대응하는데, 욕계의 갈애는 욕애이다. 생리적 욕구에 대한 집착이다. 색계의 갈애는 유애이다. 존재에 집착하는 것이다. 명예욕 등이 이에 해당한다. 무색계의 갈애는 무유애이다. 이것은 비존재, 즉 해탈에 대한 집착이다.8. 삼법인에 대해 서술하시오.삼법인은 제법무아, 제행무상, 일체개고이다. 제법무아는 세상에 불변의 참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제행무상은 세상 모든 행, 즉 경향성은 특정한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일체개고는 세상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뜻이다. 이는 오온이 항상 변화함에서 비롯되는데, 영원한 게 없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이다. 일체개고에서 말하는 고통은 단순히 신체적 정신적 괴로움이 아니라, 실존과 관련한 괴로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