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주의와 화가 에곤 실레1. 표현주의 예술의 특징표현주의는 특정 양식이라기보다는 예술사에서 되풀이되는 하나의 예술적 경향으로 반 자연주의, 반 사실주의라는 입장을 지닌 예술 현상 전체를 의미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19세기 말 독일 표현주의나 프랑스의 야수파는 물론, 보다 광범위하게는 1차 대전 전후 시기 일체의 전위적 경향 전체 또, 중세 예술 역시 포함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협의의 개념, 즉 19세기 말 독일에서 일어났던 새로운 경향의 예술운동을 지칭한다.표현주의 이후로 예술가의 내면이 예술의 출발지가 되어버림으로써 난해하고 추상적인 현대 예술이 탄생하게 되며 따라서 표현주의는 모더니즘 이후 현대예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표현주의란 명칭이 성립에는 회화에서 1905년 독일의 다리파의 결성이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표현주의는 비단 회화뿐만 아니라 시, 소설 등 문학과 연극, 음악, 그리고 영화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진행된 예술 운동이었다. 표현주의는 예술가의 내부를 문제 삼기 떄문에 외부 사실을 그 대상으로 하는 예술, 즉 인상주의나 전통적인 사실주의 계열의 예술과는 그 출발과 대상에서 대립된다. 그래서 세잔(P. Cezanne) - 큐비즘 (Cubism) - 몬드리안(P. Mondrian)으로 연결되는 지적, 논리적 추상과는 또 다른 칸딘스키 (W.Kandinsky) 류의 추상을 초래했다 이런 과정에서 그동안 서양 미술의 전통이었던 모방의 창작원리가 본격적으로 붕괴된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자의적인 왜곡과 자유롭고 과장된 표현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반 모방의 경향은 비단 표현주의 뿐만 아니라 모더니즘 예술 전체의 특징이기도 한다. 표현주의 예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표현주의가 외부 사물을 그 대상으로하는 예술(Eindruckskunst)과 정반대되는, 예술가의 내부에서 출발하는 예술(Ausdruckskunst)이라는 점이다. 외부 대상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으로 인해 촉발된 주관을 그리고자 하는 경향은 빈센트 반 고흐나 뭉크에게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외부 대상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묘사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던 것이다.빈센트 반 고흐 에드바르트 뭉크 고흐나 뭉크 식으로 한다면 그려낼 대상은 외부의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접한 주관의 심적 상태가 되어버린다. 이런 태도를 계속 밀고 나가게 되면, 이제 외부 대상은 아무래도 좋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이니까 여기서 표현주의가 탄생한다. 이것은 서양 회화사 전체에 있어 대단히 획기적인 전환이다. 회화의 궁극적인 묘사 대상이 외부 사물에서 화가의 내부로 이동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외부 대상을 그리기보다는 그 대상으로부터 촉발된 주관으 특정 심적 상태를 문제 삼는 표현주의는 한마디로 ‘마음 그리기’ 주의이다. 따라서 객관적 사실에 대한 자의적인 왜곡과 자유롭고 과장된 표현은 이들에게 당연한 것이었다.2. 에곤 실레에곤 실레는 1890년 6월 12일 오스트리아 툴른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에곤 실레는 역장이었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자연스럽게 자주 기차를 볼 수 있었다. 기차에 매료되었던 탓에 몇 시간씩 기차나 풍경을 그리곤 했다.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어릴 적부터 미술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던 에곤 실레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스케치 북에 그려냈다.(에곤 실레가 15살에 학교 창문 밖 풍경을 보고 그린 그림.)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그림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죽음이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1905년 에곤 실레가 15살 때 성병과 정신병을 앓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유년 시절의 이 같은 기억은 에곤 실레 작품의 뿌리가 되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에곤 실레는 오스트리아 최고 미술학교인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면서 그는 화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전통적인 방식의 회화를 앞세우며 매우 보수적인 교육이 이어지면서 색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던 에곤 실레는 실망하였지만 꾹 참고 학교의 교육을 충실히 따랐다. 하지만 그는 번번이 학교와 부딪혔다. 심지어 담당 교사는 에곤 실레를 향해 악마가 들여보낸 사람이라며 자신의 제자라 말하고 다니지 말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그의 삶을 뒤흔든 위대한 스승이자 화가인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나게 된다. 당시 클림트는 , 등 걸출한 작품을 연달아 선보이며 큰 주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미술을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또한 오스트리아 빈에서 자유로운 표현 활동을 추구하는 분리파를 이끌며 에너지 넘치는 젊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교수들은 지나치게 자유로운 클림트의 생각에 학생들이 물들까 봐 걱정하여 학생들에게 분리파에 연루되지 말라며 거듭해 말했고 심지어 전시를 방문하지도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학생들은 더욱 호기심을 가졌고 그중 하나가 에곤 실레였다. 이미 성공한 화가였던 클림트는 에곤 실레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림을 사주고 때론 자신의 그림과 교환해 주며 재원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왔고, 심지어 후원자까지 소개해 준다. 하지만 아직까지 에곤 실레의 화풍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에곤 실레와 그의 스승 클림트 에곤 실레 1906에곤 실레는 여전히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자연스레 보수적인 화풍이 묻어났다. 클림트를 비롯한 분리파 예술가들과의 지속적인 교류로 1909년 에곤 실레는 결국 아카데미를 그만둔다. 대신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친구들을 모아 '신예술가 그룹'을 결성한다. 그 이후 개성 있는 화풍을 고민하기 시작한 에곤 실레는 '인간의 내면을 미술을 통해 전달하자'라는 클림트의 한 마디가 마음을 맴돌았다. 자신의 화풍을 연구하기에 앞서 에곤 실레는 회화의 '진실'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에곤 실레는 죽음에 대한 공포, 성에 대한 욕망 인간의 실존 등 하나같이 어렵고 무거운 주제들을 고민하였다. 에곤 실레는 이것들을 불안에 휩싸인 인간으로 드러내고자 하였다. 치열한 고민 속 에곤 실레는 를 그려냈다.에곤 실레 1912 구스타프 클림트 1907~1908그림 속 무릎을 꿇고 키스하려는 남녀를 보면 자연스레 클림트의 가 떠오른다. 클림트는 금박 장식을 이용해 화려하게 담아낸 반면 에곤 실레는 붉은색과 어두운색의 대비가 강렬하다. 인물의 불안한 표정은 유독 눈의 띈다. 성직자를 주인공으로 한 발칙한 그림으로 이를 통해 작가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진실과 본성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것이야말로 에곤 실레가 그림을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였다. 인간이라면 성에 대한 욕망을 숨길 수 없고 다가오는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성과 죽음이란 주제로 누드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미성년자 소녀를 모델로 그리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예술계 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도 제기되었다. 때문에 그는 다시 한번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912년 4월 결국 에곤 실레는 미성년자를 모델로 외설적인 그림을 그리고 또, 미성년자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외설적인 그림들을 두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서게 된다. 재판부는 일부 죄목은 혐의가 없다 판단했지만 일부는 인정하며 그에게 죄를 물었다. 그리고 그는 3주간의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죗값을 치르는 와중에도 에곤 실레는 붓을 놓지 않았다.에곤 실레 1912 에곤 실레 1912이 시기를 기점으로 더욱더 불안한 그림 스타일을 완성해 나간다. 이때 그린 그림들을 보면 그의 불안한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다. 한 번은 한 수집가가 에곤 실레를 찾아와 그의 작품이 너무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그의 그림은 '포르노'라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작가는 단호하게 자신의 그림 중 선정적이라 할 만한 건 단 한 점도 없다고 말하며 맞섰다. 그는 여전히 '그림이야말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도구'라 생각하였다. 계속해 그림을 그리며 실력을 쌓은 에곤 실레는 화가로서 탄탄한 커리어를 쌓으며 승승장구하였다. 그런 그에게 또 한 번의 위기가 닥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는 징집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미술 재능을 인정받으면서 그는 전쟁 중에도 그림 작업을 계속한다. 덕분에 전쟁이 끝날 무렵엔 각종 전시회에 참가하며 작가로서 분명한 입지를 다지게 된다. 재정적, 사회적으로도 하나 둘 안정을 찾아가던 와중에 아내의 임신 소식까지 전해졌다. 무척 행복했던 에곤 실레는 을 그리게 된다. 맨 뒤에서 든든히 가족을 지키는 작가 본인과 사랑스러운 아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까지 이 그림에선 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전의 작품들과 비교하면 모두 통통하게 살집이 있는 사람들로 과거 작품들 속 앙상한 인물과는 다르다. 표정도 평온해 보이고 전체적인 색도 따뜻해졌다. 전에 비해 부드러운 선에서도 변화가 느껴진다. 에곤 실레를 둘러싼 환경과 정 에곤 실레 1918 서가 달라지자 작품 역시 달라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유럽을 휩쓸고 간 무서운 전염병인 스페인 독감이 그의 가족에게도 찾아왔기 때문이다. 강력한 전염병은 뱃속 아이는 물론이고 임신한 아내까지 모두 빼앗아갔다. 정성껏 간호하였지만 결국 가족들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3일 후 에곤 실레 역시 전염병을 이기지 못하고 스물여덟의 어린 나이로 눈을 감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