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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미학과 리오타르 미학을 전공했습니다.
전문분야 인문/어학예체능독후감/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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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들뢰즈 관점에서 본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팔월의 빛
    들뢰즈 관점에서 본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팔월의 빛
    서론윌리엄 포크너의 『팔월의 빛』(Light in August, 1932)은 인종, 젠더, 신앙, 폭력, 그리고 시간의 여러 층이 교차하는 복합적 서사 구조를 지닌 작품이다. 특히 조 크리스마스(Joe Christmas), 레나 그로브(Lena Grove), 그리고 게일 하이타워(Gail Hightower)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경로를 따르지만, 정체성과 구원의 문제를 중심으로 교차된다. 이들의 내적 긴장은 고정된 주체로서의 인간, 즉 근대적 자아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 토대를 해체한다. 이런 점에서 『팔월의 빛』은 들뢰즈(Gilles Deleuze) 철학이 제시하는 사유와 깊은 접점을 형성한다.포크너의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은 단일한 정체성을 지니지 않는다. 조 크리스마스는 백인과 흑인의 경계선에 서 있는 존재로, 동일성의 질서 속에서 끊임없이 배제되고 재생산된다. 그의 불안정한 신체와 내면은 들뢰즈가 말하는 “다중성(multiplicity)”의 장으로 기능한다. 보편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고정된 표상은 경계면이 희미해지면서 타자와의 접속을 통해 이질적이고 다른 것으로 스스로를 정립해 나간다.반면 레나 그로브의 이동 서사는 전통적인 여성상과는 다른 리좀(Rhyzome)적 리듬을 지닌다. 그녀의 여정은 정착과 중심을 거부하며, 관계망 속에서 확산되는 “되기-여성(becoming-woman)”의 탈영토화된 생성을 보여준다. 레나에게서 구원은 초월적 개입이 아니라, 매 순간 접히고 펼쳐지는 삶의 지속적인 층위 속에서 실현된다.또한 하이타워의 서사는 시간의 층위를 가시화한다. 그의 기억과 현재는 직선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주름처럼 접히며 상호 침투한다. 포크너의 서사에서 는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텍스트로 자리할 것이다.조 크리스마스와 탈영토화조 크리스마스(Joe Christmas)는 작품 전체에서 가장 불안정한 존재이자, 동일성의 체계를 끊임없이 교란시키는 탈영토화라는 주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백인과 흑인의 경계 위에 서 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이 어디에 속했는가에 대해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혼종적이고 이질적인 존재로서 그는 사회의 안정적인 상징 질서에 포섭되지 않는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본다면, 조 크리스마스는 고정된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재현의 질서를 해체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는 “되기”의 운동을 수행하는 탈영토화의 신체라고 할 수 있다.들뢰즈와 가타리(Pierre-Felix Guattari)가 공저한 『천 개의 고원』에서 탈영토화는 고정된 의미와 질서를 벗어나 새로운 흐름과 접속을 생성하는 운동으로 정의된다. 들뢰즈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위계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비판한다. 형이상학은 신, 일자(一者), 이데아와 같은 근본 원리 아래 세계를 서열화하고 계열화한다. 그리고 계열화를 통해 위계적 구조에 복속, “너도 이와 같아져야 한다”는 도덕과 의무를 중심으로 동일화의 기제를 작동해 왔다. 그리고 동일화를 거부하는 존재를 배제하고 억압하는 방식으로 형이상학적 원리가 작동해 왔다는 것이다. 탈영토화는 자신이 가진 거리인 ‘영토’로부터 탈주하여 “내용물을 모든 코드(형태, 기능 혹은 의미작용)로부터 해방시키는 과정이다. 이런 측면에서 조 크리스마스는 ‘인종’이라는 사회-제도적 영토를 벗어나려 끊임없이 시도하는 존재이다.하지만, 사회는 그를 다시 포획하고 재영토화하려는 폭력적 장치를 작동시킨다. ‘흑인’과 ‘백인’이라는 이항 대립적 사고 속에 중간 지대는 없다. 그리고 언제나 ‘백’은 ‘흑’보다 우월하다. 이러한 동일성의 논리에 저항하는 것은 폭력적 배제의 대상이 된다. 그는 백인 사회가 부여한 ‘흑인성’의 낙인과 흑인 공동체가 부여한 ‘백인성’의 배제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경계적결코 고정된 기호가 아니라, 욕망의 흐름이 교차하는 다층적 표면이다. 들뢰즈의 용어로 말하자면, 그의 신체는 “기관 없는 신체(body without organs)”로 기능한다. 즉, 사회적 기호체계혈통, 성별, 종교, 도덕가 강제하는 기관적 구조를 거부하고, 순수한 흐름의 장으로서 새로운 접속을 모색한다. 물론 이런 조 크리스마스의 시도는 좌절되고 기각된다.조 크리스마스의 탈영토화의 운동은 폭력적 사회 기계에 의해 잔혹하게 종결을 맞이한다. 백인 사회는 조 크리스마스를 ‘불순한 존재’로 규정한다. 위계성에 기반을 둔 동일화된 백인 집단은 결국 그를 린치하고 거세함으로써 질서의 붕괴와 균열을 봉합하고자 시도한다. 이것이 바로 다양한 흐름을 억압하고 모든 차이를 동일화하려는 욕망의 역류이다. 집단은 조의 신체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질서를 유지하려 하지만, 그 폭력적 재영토화는 역설적으로 탈영토화의 불가역성을 드러낸다. 조의 죽음 이후에도 그의 흔적은 서사 전체에 잠재적 불안을 퍼뜨린다.이처럼 조 크리스마스의 존재는 ‘인종’이라는 위계적 구조를 넘어서는 탈영토화의 과정이자 상징이다. 그는 들뢰즈가 말한 “되기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형되며, 그 변형의 궤적 속에서 인간 정체성의 본질일 이루는 것들에 대해 질문을 야기한다. 조는 자신의 경계 위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경계를 통과하며, 그 경계 자체를 흔들고 재구성한다. 『팔월의 빛』에서 포크너는 조 크리스마스를 통해 고정된 정체성의 불안정성을 폭로하는 동시에, 참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탈주의 궤적을 제시하고 있다.2. 레나 그로보와 유목민적 사유레나 그로브는 『팔월의 빛』 속에서 조 크리스마스와 유사하지만 또 다른 장치로 기능하면서 탈중심적 가치관을 표상한다. 그녀는 정착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목적지를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가면서,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이러한 그녀의 이동 궤적은 자신만의 고유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우리는 이 텍스트를 들뢰즈가 제시한 리좀적 사적 운동의 형태를 띠며, 전통적 서사 구조가 전제하는 ‘출발목적완결’의 선형성을 해체한다. 임신한 여성은 유목적 생활 방식보다는 정주적인 삶의 행태에 머물기 마련이다. 하지만 레나는 임신한 몸으로 남부의 공간을 떠돈다. 이는 한 남자를 찾아 나서는 단순한 여정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이동을 통해 고정된 중심을 거부하고 경계를 넘나드는 유목민적 사유가 드러난다. 그녀는 유목민적 존재로서, 사회적 질서가 규정한 여성의 자리를 벗어난다. 그녀의 이동은 단지 공간적 이동이 아니라, 질서 지위진 사회로부터의 이탈이며, 자기 정체성을 탐색해 나가는 존재론적 생성의 과정이다. 즉,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나 ‘미혼모’로서 정의될 수 없는 다중적 위치를 점유한다. 레나는 이동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다시 만들어가는 것이다.들뢰즈가 말하는 리좀은 뿌리(root) 의 은유와는 달리, 단일한 기원이나 방향이 없다. 뿌리가 위계적이고 중심화된 존재라면, 리좀은 어느 지점에서도 성장할 수 있는 비위계적 연결망이다. 레나의 여정은 바로 이 리좀적 확산의 운동을 보여준다. 그녀의 길은 결코 직선이 아니며, 목표를 향한 긴장보다는 과정 그 자체의 지속에 가치를 둔다. 포크너는 그녀의 걸음을 “느리고 끊임없는 리듬”으로 묘사함으로써, 생명의 운동이 외적 목적이 아니라 내적 충동에 의해 지속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레나는 마을에 도착한 외부적인 인물로 기존의 질서와 정체성에 균열을 가져오는 인물이다.이런 유목적인 상징은 레나가 타인과 맺는 관계의 방식에서도 확인된다. 그녀는 소설 속 여러 인물과 마주치지만, 그 누구와도 영구적으로 결속된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녀의 만남은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흩어지고 다시 연결·접속된다. 그녀는 미혼모라는 마이너리티의 특징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집단의 질서 아래에 종속되어 이익을 누리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들뢰즈의 말처럼 그녀는 이동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 이동하는 유목민으로서의 존재 방식을 드러낸다.이러한 탈중심적 너는 레나를 통해 인간 존재가 지닌 근본적인 역동인 멈추지 않고 흐르는 생명의 운동을 포착해 낸다. 레나의 걸음은 중심을 해체하는 리좀적 사유의 실천이며, 이는 포크너가 보여준 가장 조용하지만 근본적인 혁명으로 읽힐 수 있다.3. 하이타워와 비선형 시간의 주름게일 하이타워의 서사는 시간의 본질을 사유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과거의 기억 속에 갇혀 현재와 단절된 인물로 보이지만, 그 내면에서 일어나는 시간의 흐름은 단순한 회상이나 반복이 아니다. 하이타워의 의식 속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중첩되고 교차한다. 이는 시간의 비선형적 구조를 문학적으로 드러낸다. 들뢰즈의 사유에서 시간은 사건의 인과적 순서로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잠재성이 내재된 주름의 구조를 지닌다.들뢰즈 철학에서 ‘주름(fold)’는 매우 독특한 개념이다. 『천개의 고원』에서 들뢰즈는 이질적이고 다양한 개념들이 접속되는 과정에서 접히고 중첩되는 방식에 주목했다. 개념들이 중첩되고 서로를 입체적으로 상호 참조하는 과정 가운데 새로운 개념과 사유가 수평적인 운동을 통해 파생되는데, 이러한 사건의 계열을 그는 ‘주름’으로 설명한다. 주름은 내면과 외면,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해체하며,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를 공존시키는 구조를 지닌다.등장 인물인 하이타워에게 시간은 직선적 연속이 아니라 주름진 구조를 가진다. 그의 의식은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인식이 끊임없이 접히고 펼쳐지는 운동 속에 동시에 존재한다. 그는 아내의 죽음과 교회에서의 몰락 등의 사건을 하나의 연속적 사건으로 경험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기억들은 주름처럼 그의 내면 속에 층층이 쌓여서 현재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의미를 발생시킨다. 하이타워의 삶은 바로 이러한 주름의 운동 속에서 비선형적인 시간으로 전개된다.그의 회상은 단순한 과거의 재생이 아니라, 잠재적 기억이 현재를 구성하는 과정이다. 들뢰즈에게 잠재(virtual) 는 단순한 비현실이 아니다. 잠재적인 것은 현실화될 가능성으로서 현재와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는 층”이다.
    독후감/창작| 2025.10.28| 5페이지| 3,000원| 조회(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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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서평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서평
    1.레이첼 카슨의 새로운 이야기봄이 되면 자연은 소란스러워진다. 얼었던 강물이 녹아 흐르는 소리, 동면에서 깨어난 동물들의 움직임, 새들의 지저귐 등이 어우러져 생동감을 되찾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익숙했던 봄의 소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미국에서 봄을 알리는 울새의 노래가 멈췄지만, 사람들은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그러나 이 침묵을 이상하게 여긴 사람이 있었다. 1958년, 해양생물학자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은 매사추세츠 주에 사는 친구 허킨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정부가 모기 방제를 위해 DDT를 살포한 후, 허킨스의 새들이 죽어갔다는 내용이었다. 허킨스는 DDT와 새들의 죽음 사이의 연관성을 의심하며 당국에 항의했지만, 무시당했다. 분노한 허킨스는 이 사실을 신문사에 제보하고, 레이첼 카슨에게도 알렸다.카슨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살충제의 위험성을 조사하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연구 결과는 '뉴요커'에 연재되었고, 1962년 『침묵의 봄』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살충제가 자연과 생태계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폭로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결국, 1969년 미국 의회는 국가 환경 정책법안을 통과시켰고, 여러 주에서 DDT 사용이 금지되었다.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관심했던 봄의 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이게 했다.2.시간은 최고의 재판관이다지구상에서 자연에 이렇게 광범위하고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 종은 인간뿐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에 불과하면서도 가장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존재로, 자연에 존재하는 다른 생명체들과는 달리 '해충'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를 없애기 위해 200여 종의 화학물질을 개발했고, 수천 개의 제품으로 분화된 이 화학물질들은 무차별적으로 사용되어왔다.레이첼 카슨에 따르면 미국에서만 매년 500여 종의 새로운 화학물질이 등장한다. 이는 인간과 동물이 매년 500종의 새로운 화학물질에 적응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러한 적응은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선다. 이 화학물질들은 방사능과 비슷한 문제를 일으켜 심각한 돌연변이를 유발하고,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생태계 전반에 장기간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인간은 빠르고 신속한 효과를 기대하며 이 화학물질들을 사용해 왔지만, 그 결과는 눈에 보이지 않게 서서히, 그러나 치명적으로 나타난다. 이 화학물질들은 해충을 완전히 박멸하지 못하면서도 오히려 해충을 억제하는 천적들을 사라지게 만들어 해충이 더 창궐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라틴어 격언 "Tempus est optimus iudex" (시간은 최고의 재판관이다)처럼, 인간의 파괴 행위는 처음에는 느리게 진행되는 듯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영향은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이제 시간은 우리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3.이항대립을 넘어선 이야기인간은 자연에 존재하는 다양한 생명체를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으로 구분하며 타자화했다. ‘해충’으로 분류된 순간, 그 생명체는 더 이상 존중받지 못했다. 그러나 자연은 그 자체로 해롭거나 이로운 것이 아니다. ‘自然’이라는 한자의 뜻처럼, 자연은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독립적인 생명체들이다. 인간은 이를 인간 중심의 기준으로 나누고, 자연의 신처럼 해로운 생명체에 사형을 선고했다.그 결과 모든 생명이 인간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자연이기를 거부하며 무서운 이기심을 드러낸다. 이 이기심은 '나'와 '너', '바름'과 '그름', '가치'와 '무가치'를 나누며 소외를 일으킨다. 과학마저도 기업의 자본에 의해 좌우되며, 생명은 자본 앞에서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해충을 없애기 위해 화학제품이 팔려나가고, 자본은 생명보다 우선시된다.환경과 생태의 문제를 단순한 인식 개선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은 지나치게 순진하다.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촉구함과 동시에, 생태와 환경 문제를 둘러싼 권력 구조에 집중해야 한다. 『침묵의 봄』이 DDT를 퇴출했지만, 새로운 화학물질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카슨의 목표는 DDT를 다른 화학물질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DDT가 퇴출된 것에 만족하고 무관심해졌고, 그 결과 더 유해한 화학물질이 등장했다. 이는 자본의 논리와 구조의 힘을 보여준다.
    독후감/창작| 2024.07.02| 2페이지| 1,500원| 조회(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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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카톨릭 성당 기사단에 관한 연구
    카톨릭 성당 기사단에 관한 연구
    들어가면서“인간은 왜 초자연적이며, 마술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가?” 이 물음은 바로 움베르트 에코(Umberto Eco)가 『푸코의 진자』를 집필한 동기라고 한다. 이 물음은 곧 인간의 종교성에 대한 물음이며, 동시에 세계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기도 하다.이성 만능 주의가 극으로 치달았던 세기나, 종교나 신은 더 이상 불필요하다고 믿는 세기에서조차도 여전히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신비에 몰두하곤 해왔다. 이는 지나친 이성주의에 대한 반동이라고 설명할 수 도 있겠으나 흔들리는 존재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종교성의 발로라고 하는 편이 옳다. 그러나 객관적인 진리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경전의 형태로 지니고 있는 기독교조차도 이러한 현상의 예외는 아니라는 점에서 의문을 자아내게 한다.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사람들조차도 점집에 드나들며, 스포츠 신문의 를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와 같은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었다. 과거에도 이와 유사한 일은 반복되어 왔다. 따라서 중세라는 시대를 다시 읽어보면서 이와 같은 의문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하고 싶은 말본인이 성당 기사단에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에코의 『푸코의 진자』라는 소설에서부터다. 중세는 이성주의자들에게는 암흑기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적 정신이 충만한 시대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와 같은 분위기 속에 그 저변에는 수 많은 층위들이 존재했다. 기독교적인 분위기 속에는 이교적인 주술과 관념들이 깔려 있었다.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점은 바로 여기다.특별히 십자군 시대에 생겨난 일단의 기사단들은 기사도와 수도원 정신을 모두 지닌 그야말로 십자군 원정의 중추이자 중세 기독교적인 정신을 그대로 재현해낸 단체였다. 그러한 이 단체가 후대에 이르러 주술과 비의로 기울게 된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간략하게나마 성당 기사단의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제 1차 십자군 원정 결과 각종 기사단들이 재생되었다. 이들은 전투에서의 용기와 기도 및 자기 부정의 정신으로 금욕주의에 정진하였던 수도사들의 생활 태도를 혼합하였던 수도원운동과 기사도의 연합체라 볼 수 있겠다. 이들은 처음 순례자들을 안전하게 성지에까지 보호하고 이곳에 머무는 동안의 안전과 보호를 제공하기 위해 생겨났다.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호스피탈러(The Knights Hospitalers)라고 불리었던 예루살렘의 성 존 기사단(Knights of St John of Jerusalem)과 템플러(Templers)라고 불리웠던 성당 기사단들이었다. 이들은 후에 본거지를 따라 로데스 기사단(the Knihgts of Rhodes)과 말타 기사단(the Knights of Malta)라고 개칭되었다. 이들은 군인들과 같이 무장하였으며, 갑옷 위에 호스피탈러들은 검은 외투에 하얀 십자가를 그렸으며, 템플러들은 하얀 외투 위에 붉은 십자가를 표시하였다.1118-9년에 기사 계층의 경건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리스도의 봉사에 헌신하는 기사 계층의 귀족들이 예루살렘 대주교에게 맹세하며 수사 규칙에 따라 영원히 정결과 순종과 가난으로 살기를 희망한다고 선언했다. 이 귀족들의 장은 휴고 드 페이언과 성 오메르의 게오페리였다. 그들은 집도 교회도 없었다. 이들을 위해서 예루살렘의 왕은 그들에게 성전의 서쪽 지역에 궁전에 일시적인 거주지를 마련해 주었다.그들은 순례자들을 약탈하는 도둑으로부터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길을 가도록 들을 맹세 시켰다. 9년이 지난 이후 트로이스에서 공의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기사들을 위한 규칙이 제정되고 그들의 복장으로 하얀 옷을 입도록 정해졌다. 9년째까지 그들은 단지 9명의 멤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그 이후로 숫자가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소유물도 증가했다.이들은 재산이 증가하고 규모가 커지자 자신들에게 자리를 내어준 예루살렘 주교에 대해서 불순종하고 교황에게 대적하게 된다. 나중에는 십일조를 횡령하기도 하고, 자신들이 맡고 있던 지역에 자체적으로 십일조를 부과하는 등의 타락상을 보여주게 된다.Friedrich Heer는 그의 저서인 『The Medieval World』에서 성당 기사단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즉, 중세 종교의 복잡성은 십자군의 상이한 다양한 차원에서 영향력을 미치게 했는데, 사실상 외적으로는 고귀한 목표를 지니고 있었던 십자군 원정도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위와 재산을 얻으려는 물질적인 동기가 다른 시대에는 순전히 종교적이고 관념론적인 것으로 서술될 수 있는 다른 동기와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예는 성당 기사단의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직접적인 평가를 인용해 보도록 하자.순례자와 약한 자를 돌보는 소수귀족의 동포애로 시작한 이 기사단은 곧 강력한 조직이 되었다.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진 그들의 재정적 활동(특별히 성전 기사단) 그들의 의도적인 권력 정치 활동(회교와도 연합함) 구성원의 지독한 오만은 모두 이중적 명성을 그들에게 주었다. 이 기사단은 의료 기사도 자선 활동으로 유명했고, 전투원으로서는 비통한 최후까지 싸우는 용기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이것과는 반대로 그들의 크고 작은 정치적 음모 증오스러운 개인적 싸움 군사 단체의 집단 이기주의에 대한 기록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결국 집단의 비대화와 함께 원래 가지고 있던 기사도, 수도사의 맹세 등을 모두 저버리게 된다. 이들은 후기에 이르게 되면 일종의 비의와 주술, 연금술적인 지식에도 몰두하였던 것 같다. 현재 시중에서 유행하고 있는 환타지 소설에서 장미 십자단이라든지 성당 기사단이라든지 하는 기술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그러한 전승들 가운데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신비로운 흥미가 19세기 말에 점점 증대하면서 장미십자회와 동방의 성당기사단(The Order of the Temple of the Orient)이라는 이름의 단체가 설립된 배경도 이런 맥락에서다.움베르트 에코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전한다. 1307년 공정왕 필립은 프랑스에 있던 성당 기사들을 모두 체포하려고 하는데 필립 왕의 체포령이 떨어지기 이틀 전에 황소가 이끄는 대형 짐수레의 건초 더미 속에 성당 기사들이 숨어서 떠났다. 전설에 따르면 오몽이라는 한 무리의 성당 기사들이 이 속에 숨어 있었고 이들이 스코틀랜드에 숨어 들어가 킬위닝에서 석공의 무리와 합류해서 프리메이슨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에코는 말한다. 또한 그는 켈트족의 흑성모라는 이미지와 성당 기사단 그리고 연금술은 같은 근원에서 나온 가지라고 추정한다.정리하자면 에코는 성당 기사단이 동방의 이교적인 신앙들과 접촉하면서 이러한 비의적 관념들을 발전시켰다고 생각한다. 마니교와의 접촉 혹은 가타리파와의 접촉이 있었을 것이라는 전승에 관한 언급도 하고 있다.성당 기사단의 이와 같은 비밀 결사로써의 성격에 대해서 본인의 관점은 다음과 같다. 십자군 원정을 통한 회교와의 접촉, 그리고 동방과 서방의 교류 속에서 이교적 단체와의 접촉은 교전 중이든 혹은 그 외의 상황에서든 가능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것이 특정 부류인 마니교인지 가타리파인지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진다.그러나 그들이 이와 같은 비의적 주술 관념에 끌리게 된 이유는 결국 전쟁이라는 한계 상황에 직면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성당 기사단은 ‘신의 이름’으로 시작한 전쟁이 가진 인간적인 비참함을 목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한계상황에서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신의 뜻에 대한 불안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불안이 그들을 그들이 접촉 가능한 이교적인 관념으로 이끌었을 가능성이 있다.물론 이와 같은 추측은 제한된 자료만으로 구성된 본인의 추정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더 깊이 한번 연구해 보고 싶다.나가면서성당 기사단이 애초가 가지고 있던 고귀한 신념들을 저버리고 비의쪽으로 기울게 된 데는 전쟁이라는 한계 상황에서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신의 뜻을 다른 초월적인 무엇인가에 의지해서 명확히 하고자 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극도의 비참함과 고독 가운데서 성경의 계시는 다양한 해석의 루트로 인해서 명확한 신의 뜻을 전해주는 통로로 인식되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현대에도 이와 같은 문제들은 여전하다.
    인문/어학| 2023.02.01| 4페이지| 1,500원| 조회(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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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에 나타난 무정한 종의 비유에 관한 연구
    들어가면서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에 사용된 형태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비유이다. 비유는 예수님의 교훈의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서 공관복음서에 등장하는 그의 교훈의 약 35 퍼센트 이상이 비유의 형태를 지녔다고 한다.) Robert H.Stein, The Method and Message of Jesus' Teachings, 오광만 譯,『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셨는가』(서울: 여수룬, 1990), p. 95.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심으로 그의 주변 세계의 그림을 언어로 그리셨다. 비유로 가르치심을 통해 그는 현실 생활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묘사한 것이다.) Simon J.Kistemaker, The Parables of Jesus, 김근수 최갑종 譯,『예수님의 비유』(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86), p. 11.예수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그가 경험하고 들은 모든 사건들을 배경으로 비유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효율적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예수님의 비유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의 일부분이며,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위대한 주제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Ibid., p. 15.탕자의 비유, 두 빚진 자의 비유, 포도원의 비유 그리고 달란트의 비유 등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이 비유와 관련이 되어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삶에 대한 광범위한 이해력을 기반으로 사회 모든 계층을 향해서 사역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비유였기 때문이다. 그는 평민의 언어로 대화하고 그들 수준에 따라 가르치셨다. 따라서 그의 비유는 우리를 압도하며,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각인되기도 한다.또한 예수님은 구원의 메시지를 명확하고 간결하게 전달하기 위해 비유를 가르치셨다. 비유 속에서 청중은 권위있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비유에 주목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그러나 비유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다양한 형태의 비유가 있으며, 그 구는 히브리어 마샬(mashal)의 번역어인데, 이는 구약에서 속담, 풍자나 비웃음, 수수께기, 이야기식 비유(story parable)나 풍유(allegory) 등에 사용되었다.) Robert H.Stein, The Method and Message of Jesus' Teachings, 오광만 譯,『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pp. 97-105.따라서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비유는 다양한 형태들로 나누어 질 수는 있겠으나 은유(Metaphor), 직유(Simile), 비사(Similitude), 알레고리, 예화(Illustration)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하겠다.예수께서 이러한 비유로 가르치신 데는 몇 가지 이유와 목적이 있다. 첫 번째는 그의 교훈을 외부로부터 감추기 위한 것이고, 두 번째는 그의 메시지를 그의 추종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계시하고 예증하기 위해서이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청중들의 적개심을 없애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Ibid., pp. 107-114.이 같은 일반적인 사항을 염두에 두고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에 대한 특성과 그 문학적인 구조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2.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의 특성과 문학적 구조소위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라고 불리는 마태복음 18:23-35에 등장하는 이 비유는 다른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고 오직 마태복음에만 등장하는 비유 중에 하나이다.이 비유는 종종 다음과 같은 여러 명칭으로 불리우고 있다. "용서하지 않는 종(the unforgiving servant)의 비유", "무자비한 관리(the unmerciful servant)의 비유", "무자비한 청지기(the unmerciful steward)의 비유" 등으로 불리운다.) 김득중,『복음서의 비유들』, p. 185.이와 같은 명칭의 차이는 비유에 등장하는 "종"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의 현재 문맥으로 보나 또는 예수님의 비유 의도에 비추어 보나 "용서하지 않는 종"까지에서 전반적으로 범죄한 형제에 대한 교회의 권징을 논하고 있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베드로의 이러한 질문은 다소 문맥의 흐름에서 어긋난 질문으로 보인다.본장의 서두는 천국에서 크고자 하는 제자들의 야심에 대해 예수께서 어린아이와 같이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연약한 소자를 실족케 하는 경우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내리는 장면으로 출발한다.여기서 베드로는 믿음이 연약한 소자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와 용서에 관한 말씀임을 깨닫고 형제 용서의 한계성에 대한 질문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일 것이다.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랍비들의 교훈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당시 랍비들의 교훈에 나타나는 용서의 한계인 세 번을 뛰어넘는 일곱 번의 용서를 제시했을 것이다.) 제자원 편, 그랜드 종합 주석 vol.12 : 마태복음(서울: 성서교재 간행사, 1991), p. 482.당시 근동 문화권에서는 7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제 7일에 천지 창조를 완결 지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완전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베드로가 일곱 번의 용서를 제시했다는 것은 당시 문화에 비추어 본다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제자원 편, 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 마태복음 제11-20장(서울: 성서교재 주식회사, 1998), p. 620.그러나 예수님께서는 7이라는 숫자를 중복으로 사용하여 무한대의 용서를 제시하고 있다.그리고 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다. 23절에 등장하는 "천국은 ~과 같으니"라고 시작하는 이 구절은 마치 용서라는 이야기의 맥락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으나 천국이란 무한대의 용서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 답변하려는 예수님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Ⅱ. 첫 번째 단락: 일만 달란트 빚진 종 (18:23-27 절)1. 왕의 앞에 선 일만 달란트 빚진 종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라고 불리우는 이 비유의 첫 번째 장면의 주요한 내용은 일만 달란트 빚진 종과 왕이 가지고 있는 죄의 심각성을 보여주기 위한 비유이다.이런 그 종에게 왕은 빚을 갚기 위해서 자신을 비롯해서 가족을과 모든 소유를 팔아서라도 값게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노예 한명의 몸값이 5백에서 2천 데나리온이었으므로 자신을 포함하여 그의 가족을 다 판다고 하더라도 6천 데나리온 즉, 1 달란트를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제자원 편, 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 마태복음 제11-20장, p. 623.이는 주인이 빚을 회수하기 위하여 벌을 내린다는 의미이기보다는 달란트를 허비한 그를 형벌에 처한다는 의미가 깊다.2. 빚을 탕감 받은 종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은 자신이 그 빚을 값지 못할 것을 알고 임금 앞에 엎드려 절하며 자비를 구한다. 본문에서 '엎드리다'에 해당하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 '프로세퀴네이( )'는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었는데 현재 닥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거듭 절하면서 주인에게 자비를 호소하는 종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Ibid., p. 624.이런 종을 불쌍히 여긴 주인은 종을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주며 빚을 탕감해 준다. 여기서 '놓아 보내주며'와 '탕감하여 주었더니'에 해당하는 두 동사인 '아펠뤼센( )'과 '아페켄( )'은 모두 과거의 단회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부정 과거형이다. 이는 주인이 두말하지 않고 그 많은 빚을 완전히 면제해주었음을 의미한다.) Ibid., p. 625.이 구절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인간의 죄를 단번에 없애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암시하는 구절이다.이런 커다란 은혜를 입은 종은 돌아가는 길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관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이제 연극의 다음 막인 두 번째 단락으로 넘어가게 된다.Ⅲ. 두 번째 단락: 무정한 종의 행위 (18:28-30 절)1. 동관을 만난 종두 번째 단락은 첫 번째 단락과 평행을 이루는 단락이다. 빚을 탕감 받은 종은 내려오는 길에 왕의 또 다른 신하를 만나게 된다. 이 동관은 자신에게 100 데나리온의 빚을 진 자였다. 1갚도록 기회와 시간적 여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빚을 단번에 갚을 것을 요구하면서 옥에 가두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는 무자비한 종의 강팍함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이 단락은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면서도 자신의 형제들에 대해서는 자비를 베풀기를 싫어하는 완악한 인간들의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다.이 광경을 목격한 다른 종들이 왕에게 가서 이 억울한 장면을 고함으로써 사건은 클라이막스로 치닫게 된다.Ⅳ. 세 번째 단락: 심판을 받는 악한 종 (18:31-34 절)1. 다시 왕 앞에 서게 된 종31절을 보면 다른 동관들이 이 용서하지 않는 종의 처사를 보고 난 후에 민망히 여겨서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고했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여기서 새로운 사건의 국면이 열리게 된다.다시 왕 앞으로 소환된 종에게 왕은 '악한 종아'라는 첫 마디 말로 이 종을 책망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악하다'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네로스( )'는 윤리적으로 비열하고 무가치하고 악독하다는 의미를 지닌다.왕은 이 용서하지 않는 종에게 자신이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탕감해 주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자신이 불쌍히 여김과 같이 동일하게 행하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고 반문하고 있다.여기서 '마땅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데이( )'를 원형으로 하는 단어로 신적인 운명이나 피할 수 없는 숙명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반드시 그러해야만 하는 내적인 필연성을 강조하는데 사용되었다. 특히 서두에 등장하는 '우크'는 원형 '우( )'의 설의법적인 의문문에 사용되는 단어로 동관을 용서해주는 것이 마땅한 일임을 거듭 강조하는 기능을 가진다.) Ibid., p. 630.2. 공의의 심판을 받은 악한 종그리고 주인은 노하여서 빚을 다 갚도록 이 종을 옥졸에게 넘겨준다.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주인의 자비를 본받지 않았기 때문에 주인은 그의 처음 결정을 취소하고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행동을 그대로 본받아 종을 처벌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단락과 두 번째 단락에서의 '내
    인문/어학| 2023.02.01| 12페이지| 2,500원| 조회(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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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존 드레인 <예수와 4복음서> 독후감
    존 드레인 <예수와 4복음서> 독후감
    존 드레인, 예수와 4복음서 ( 두란노서원, 1989 ,3 ,31 )Ⅰ. 내용개관1. 하나님이 약속한 구원자우리는 복음서를 볼때 우리가 가지는 현실적인 한계점들을 먼저 생각해면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역사적인 문헌이든 시대와 공간의 한계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저작은 전적으로 존재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도 하나의 역사적인 저작물이므로 씌여질 당시의 상황을 살펴봄으로써 성서에서 말하는 사건들과 진리들에 조금더 사실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지금과 현격한 차이를 지닌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의 모습들 중에서 예수가 살던 당시에도 동일하게 존재했던 모습들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한다. 예수가 탄생할 당시의 왕은 헤롯 대왕이었다. 로마 치하에 들어간 유대에서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다른 왕들과 같이 권모술수에 능해야 했고, 포악한 면까지 지니고 있어야 했다. 어린이들을 모다 모아서 죽인 성서의 기록은 이런 그의 성품을 잘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국가 내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는 어느 정도까지는 성공했던 것으로 사려된다. 일부의 소수의 유대인들이 로마의 지배에 있어서 반발을 하기는 했어도 말이다.그러나 대체로의 유대인들은 로마 생활에 매우 익숙했던 것으로 보이며,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생활을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유대 사회를 이끌어 가는 그룹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사두개인(The Sadducees)과 바리새인(The Pharisees)과 혁명당원(The Zealots)들 그리고 엣센파(The Essenes)라 불리우는 사람들이었다. 사두개인들은 “사독의 자손”이라는 뜻을 지닌 자들로써 정치적인 변혁에 대해서는 매우 보수성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동시에 부활이나 구속사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이나 종말에 이루어질 심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자들이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정통적인 학자로써 구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얻고 있는 계층이었다.그러나 이런 시도들은 반대로 매우 불합리한 규범의 체계로의 사람이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엣센파는 광야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역사상의 위기의 날의 도래를 고대하는 금욕적인 집단이었다.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도 이들의 저작으로 보이며 종말에 자신들의 집단만이 구원을 얻는 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이런 크게는 4부류의 집단이 있었으나 그저 평상민들은 정치적인 메시야의 도래만을 대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회적 배경하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나게 되는데, 우리는 보통 예수의 탄생년도가 주전 1세기나 주후 1세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은 후대에 년대 계산에 있어서 착오가 생긴 결과이다.예수님 탄생 당시의 왕이 헤롯이라는 점이 미루어 헤롯의 죽음이 주전 4세기였기 때문에 그 이전에 예수님이 탄생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예수는 헤롯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중 안티파스(Antipas)의 지배하에 있던 나사렛 마을에서 생활을 한다. 예수님은 목수로서 자라났지만 그 외의 잡일에도 능통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가 회당에서 히브리어를 읽기에 적합한 자였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보아 정규적인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아마도 그 중에서도 뛰어난 학생이었을 것이다. 갈릴리 지방이 이방과의 접촉이 잦았다는 것으로 보아서 로마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의 공용어였던 헬라어도 예수는 사용했을 것이다. 또한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아람어도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아마도 적어도 4개국어를 구사했던 것으로 보인다.유년기가 약술되어 있는 까닭은 복음서의 주된 관심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전의 몇주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던 까닭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는 하나님 앞에서의 다른 인간들과 자신을 동일시함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곧 광야에 나가서 시험을 받게 되는 데 이것은 예수의 사역에 대한 도전이었다.첫번째시험인 돌로 떡이 되게 하는 것은 경제적인 수단으로 당시의 굶주리고 있던 자들에게 물질적인 메시야로써 나서라는 시험이었다. 두번째의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은 기적으로 막 사탄에게 절을 함으로 만국을 통치할 권세를 얻는 것은 정치적인 메시야로써 당시 일반적인 이스라엘 자손들의 기대에 합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예수가 하고자 하는 일들이 아니었다.그는 스스로를 메시야라고 부르기보다는 인자(son of God)라는 단어로 표현을 많이 했다. 이 인자(人子)의 사용 용도가 주로 그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나라와 자신의 사역이 인간의 구속에 있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예수가 자각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는 단지 역사적인 사실로써 바라보는 견해와 인류의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견해가 있다. 그는 종교적인 고발과 함께 정치적인 고발을 받았다. 그의 죽음은 어떠한 면에서는 매우 평범했다.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저 십자가 위에서 6시간만에 죽었다는 사실이다.그것은 아마도 이튿날 안식일을 지내기 위한 제사장들의 편법이었다고 생각이 된다. 보통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 몇일 동안 고통을 당하다가 죽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말이다. 그의 죽음은 종합적인 사건으로써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죽음이 지니는 의미는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적인 모범으로써의 죽음이기도 하고, 동시에 희생 제물로의 어린양이기도 했으며, 죄악의 노예된 우리를 해방하는 몸값으로의 의미를 띄고 있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비유적인 것들로써 예수의 죽음 자체가 하나의 신비였다. 그는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부활을 하게 된다. 이런 부활과 같은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맹신을 할수도 없지만,그렇다고 무조건 불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활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반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초기 사도의 세움이 예수의 부활을 목도했느냐 하지 못했느냐로 결정이 지었졌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시사 받을 점이 있을 것 같다. 바울이 사도로 세움을 받은 것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한 여러가지 복음의 전통들이 전하는 기사들과 일시에 5백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바울의 기사를 바보들이 아니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모를 사람들도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서 예수의 부활의 기사를 전적으로 배격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이런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잠자는 자의 첫 열매로써의 깊은 신앙적인 의미를 더해준다. 또한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확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2. 하나님의 새 사회이스라엘 대중들은 다윗의 영광을 고대하면서 시오니즘에 빠져서 미래에 도래하는 새나라의 성격을 지금의 로마를 타도하고 세워지는 정치적인 국가로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하나의 통치의 영역이 아닌 활동의 영역으로 교회적인 나라를 뜻하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새사회와 가시적 정치세력 사이의 역설이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는 있었던것이다. 이런 새 사회에 대한 예수의 설명을 비유적인 수법을 통해서 직유,은유,속담 등으로 나타났다.이런 비유적인 표현들을 이해할 때 우리는 그 비유가 가지는 다양한 의미를 잘 이해야만 한다. 맥락에 따라서 어떤 부분은 풍유적으로 다른 부분은 직설적으로 해석이 되어야 한다. 성서 전체에 하나의 방식으로 해석을 가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고 하겠다. 비유란 결국 하나님의 자기 권리의 주장으로써 순종하는 의지와 이해하려는 마음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들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비신자들도 매우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기적적인 초자연적 현상이 나오는 대목에 이르면 문제는 매우 다른 성격을 띄게 된다.이러한 기사들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반대를 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객관적인 증거들을 확보해야 한다. 이런 증거들 중에서 비기독교적인 전승들에 있어서도 예수의 기적의 기사가 서술되어 있다는 사실을 들 수가 있다. 당시의 유명한 사가인 요세푸스는 예수가 “기이한 행사”를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또한 유대의 전통적인 전승으로 탈무드에는 예수가 마술을 행했기 때문에 처형되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이런 비기독교적인 문헌에 이렇게 대답을 한다. 눈먼 자가 눈을 뜨고, 저는 자가 겉게 되고, 억눌리자가 풀려난다는 것으로 자신의 메시야됨을 말하여 준다. 이 대목은 예수가 이사야서 예언의 성취로 자신을 계시하고 있다. 이런 기적을 통해 사람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기적의 목적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계시의 도구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어느 시대의 어느 사회이든 기본을 이루는 법규가 있다. 당시의 법규들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기보다는 매우 무거운 짐을 지우는 하나의 멍에였다. 이런 멍에에 대해서 예수는 새로운 해석으로 근본적인 자유를 누릴 것을 설교한다. 인간의 선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찾아야 한다. 법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의 행위에 중점을 둔 도덕적인 해석보다는 진실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질적이고 자유를 주는 방식으로 해석을 하여 행위가 아닌 안간됨됨이를 중점으로 예수는 말씀을 하셨다.3. 예수를 아는 일먼저 약술을 했듯이 복음서는 예수의 어린 시절의 기사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복음서 저자들의 관심은 예수의 구속사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로 기술된 부분은 바로 예수가 죽기전의 몇 주일의 일들이다. 공관복음서를 보면 동일한 언어, 어휘 및 문법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의 가상적인 문서가 존재했었다는 것으로 생각이 되어지고 있다. 예수의 말씀들을 모아놓은 문서로 로기아(logia)라고 불리우는 것이 있었다고 추측이 된다. 이것을 참조로 하여서 썼기 때문에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기사들이 같다는 설명이다. 이것을 공관복음서의 문제(Synoptic problem)라고 한다.주로 이러한 것들은 양식 비평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마가복음은 교회사에 있어서 장수가 적어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런 양식비평적인 방법을 통해서 마태와 누가 복음서의 기사들이 마가복음서의 기사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마가복음을 참조로해서 두 복음서가 기술되었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증거라는 결론이 이루어지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복음서에 대한 접근방법은 매우 다양
    인문/어학| 2023.02.01| 5페이지| 1,500원| 조회(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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