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갈리아의 딸들을 읽고00000000000 교수님000000002022. 00. 00목차Ⅰ. 서론Ⅱ. 본론1. 여성들의 유토피아, 이갈리아2. 남성은 이렇게 살아왔다3. 미러링의 엇나간 초점Ⅲ. 결론참고문헌Ⅰ. 서론여성의 삶을 미러링한 페미니즘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의 저자는 노르웨이의 페미니스트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이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는 1941년 10월 27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태어났고, 1970년 오슬로 대학을 졸업한 뒤 1982년까지 코펜하겐과 오슬로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70년대 초반부터는 여성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해, '오슬로 여성의 집'과 '매 맞는 아내들을 위한 쉼터'에서 일해오고 있으며 노르웨이 작가연맹 위원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이갈리아의 딸들』(1977)은 작가가 지속해온 여성해방운동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요 저서로는 『전 세계의 동성애자여, 일어나라』(1973), 『그래, 이제 그만』(1978), 『성 크로와에게 바치는 노래』(1979) 등이 있다. 작품마다 수개국어로 번역되어 나올 정도로 유럽에서 상당한 독자층을 가지고 있다.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이갈리아의 딸들』 (서울: 황금가지, 1977), 저자소개란.『이갈리아의 딸들』은 1977년에 처음 출간되어 페미니즘 입문서로 불리고 있고, 대한민국에는 1996년에 출간되어 국내에서는 판매 부수 30만부 중 약 10만부가 최근 3년 사이 팔리기도 했다.신성아, 「'이갈리아의 딸들' 김수정 "뒤바뀐 성역할, 불편해도 직면해야죠"」, 『뉴스데일리』. 2019년 10월 19일.이 책은 앞서 말했듯이 남성중심주의와 그에 따른 가부장적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 이외엔 쓸모가 없으며 ‘움’의 욕구를 채워줘야 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에 비해 ‘움’은 말 그대로 세상의 중심이다. ‘움’은 어떤 성의 인간이든 인간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하며,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이갈리아의 딸들』 (서울: 황금가지, 1977), 8쪽.모든 단어들이 ‘움’을 중심으로 우모(womo, 움) 사피엔스, 봉건영주(overlady), 인류(huwom race), 영웅주의(sheroism), 상속자(heirass), 비인간적(inhuwom), 왕국(queendom) 등으로 묘사된다. 또한 이갈리아인들이 하느님 어머니의 딸이라고 믿는 ‘도나 제시카(Donna Jessica)’도 ‘움’이다.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이갈리아의 딸들』 (서울: 황금가지, 1977), 9쪽.1-2. ‘맨움’의 코르셋‘맨움’은 ‘움’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약하고 경제활동을 할 능력이 없어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육아와 집안일, 그리고 외적으로 ‘움’을 만족시키는 것뿐이다. 예를 들면 ‘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수염과 머리카락을 가꾸고, 통통한 체형을 유지하고 가슴털을 관리하는 것, 그리고 ‘움’을 성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 음낭에서 좋은 향이 나도록 유지해야 하는 것 등이 있다. 또한 매력적인 ‘맨움’이 되기 위해서는 페니스가 작아야 하는데,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의 아주 작은 페니스의 크기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내는 장면도 나타난다. ‘맨움’은 이러한 페니스를 받치기 위해 비싼 ‘페호(peho)’맨움들이 페니스를 받치기 위해 입는 옷.를 입어야만 하는데, ‘페호’를 입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며 가끔은 ‘움’을 유혹하기 위해 망사 스타일의 ‘페호’를 입기도 한다.1-3. 이갈리아의 이야기『이갈리아의 딸들』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1부는 특정 등장인물들에 집중하여 ‘움’과 ‘맨움’의 차별적인 인생을 간접적으로 나타낸다. 주인공인 ‘페트로니우스 브램’은 소설 초반부터 엄마인 ‘루스 브램’이 아빠인 ‘크리스토퍼 브램’에게 짜증내는 횟 ‘루즈 브램’의 친구인 ‘리즈 배러스커리’는 잠수 6과의 과장이다. 그 역시 ‘움’이며 하우스바운드를 무시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어느 날은 루스 브램의 부탁으로 페트로니우스를 배에 태워줬는데, 선실로 데려온 그에게 강제로 키스를 하려다가 거절당해 화를 내는 전형적인 ‘움’의 모습을 보여준다. ‘루스 브램’의 딸이자 ‘크리스토퍼 브램’의 ‘움’동생인 ‘바 브램’도 ‘움 우월주의’에 불만을 가지는 ‘크리스토퍼’와 노총각 ‘올모스’를 무시하며 조롱한다.2부에서는 이러한 사회에 불만을 품은 ‘맨움’들이 모여 맨움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장면이 나온다. ‘올모스’, ‘페트로니우스’, ‘시프리안’, ‘발드리안’, ‘릴레리오’, ‘판당고’가 모여 맨움 운동과 그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2부 내용이 전개된다. 그들은 정원을 돌보는 방법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고 그들의 힘으로 ‘올모스’의 소유지를 일궈나가기 시작한다. (물론, 원예법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움’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맨움’의 종속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페트로니우스’는 여전히 ‘그로’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발드리안’과의 동성애적인 사랑이 묘사된다. ‘맨움해방주의자’들은 의회에서 맨움해방주의적인 연설을 하고 페호 태우기 운동을 벌이는 등의 활동을 하고 이갈리아 사회는 그들을 ‘비정상’으로 바라본다. 이후 ‘페트로니우스’는 사랑하는 ‘움’인 ‘그로’에게 폭행을 당하고, ‘그로’는 그 행위를 정당화했지만 정작 ‘페트로니우스’는 겁을 먹고 그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페트로니우스’는 이러한 폭행 사실을 아버지인 ‘크리스토퍼’에게 털어놓으면서 같이 ‘맨움’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맨움해방주의자’들은 월경 축제에서 상의를 탈의한 채 ‘맨움’ 몸의 자유를 외치고 결과적으로는 ‘노출증 움 혐오자’ 취급을 받는다. 이후에는 이갈리아 사회가 ‘맨움’이 차별받는 현상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듯 하지만 결국지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는 사실과 이갈리아의 사회를 미러링한 『민주주의의 아들』에 대해 ‘움’은 혐오감을 느끼고, ‘맨움해방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나뉘고, 그래도 결국 대부분의 ‘맨움’들은 이러한 미러링에 통쾌함을 느꼈다는 사실이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 페미니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 그 자체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2. 남성은 이렇게 살아왔다‘미러링’은 기득권층으로 하여금 그들이 권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새롭게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현실에 익숙해져 자신의 현재 상황이 부당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약자 스스로에게도 깨우침을 준다. 『이갈리아의 딸들』도 마찬가지로 ‘미러링’이라는 요소를 사용해 어느 순간 고통받는 약자인 ‘맨움’의 상황에 이입하여 읽도록 만든다. 이러한 과정에서 ‘맨움’이 받는 차별과 억압에 집중하여 불쾌한 감정을 가지게 되지만, 결국 그 모습이 여성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통쾌함을 느끼게 된다.여성들은 이렇게 완벽하지도 않고 현대 사회의 문제가 반영되지도 않은 미러링 소설 하나로도 통쾌함을 느끼는데, 그럼 이 소설 속 ‘움’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남성들은 지금까지 얼마나 좋은 세상에서 살아왔다는 것인가? 현대에도 여전히 페미니즘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남성중심주의’ 사회와 ‘유리천장’은 페미니스트들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며 현실을 부정하는 여성들이 아주 많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소설을 봐라. ‘맨움’은 높은 지위에서 돈을 버는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하루종일 집안일과 육아, 내조를 도맡아야 하는 현실에 만족하고 있는가? 오히려 ‘맨움’은 육아에 최적화되어 있다며 ‘움 우월주의’를 부정하는 ‘맨움’들이 우습게 보이지 않는가? 또한 사회의 모든 단어와 종교가 ‘움 중심적’인데 이 현상이 우리 사회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꾸밈에 대한 ‘자기 만족’과 ‘주체적 섹시’ 또한 마찬가지이다. ‘메이드맨의 무도회’에서 ‘움’을 유혹하기 위해 망사로 된 페호를 입는 것, 고통과 불편함을 감 오로지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성적인 분위기를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성관계’ 자체로 인해 쾌감을 느끼는 경우보다 만족하지 못하거나 고통을 느끼는 경우를 더 많이 봤는데, 지금까지 여자들은 그러한 방식에 아무런 의아함을 느끼지 못했다. 남성이 피임약을 먹고 부작용을 감수하는 것, 아이가 생겼을 때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는 명확히 알지 못하지만 그 아이를 낳은 여성은 유일하기 때문에 사회가 여성 중심이 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여성의 몸만 성적 대상화하는 것, 답답한 속옷을 여성만 입어야 하는 것, 여교사를 수업 시간에 조롱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사회분위기, 몽정은 당당하지만 월경은 숨겨야 하는 등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새로운 물음으로 다가오고 각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남성은 이렇게 살아왔다”는 사실에 분노하게 된다.3. 미러링의 엇나간 초점이 소설이 ‘미러링’의 역할을 하여 많은 여성들의 입장을 대변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지적하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번역본에서의 ‘그’와 ‘그녀’, ‘남녀’, ‘여왕’ 등의 표현이다. 한국어로 완벽하게 번역이 된 것은 아니지만, 저자는 계속해서 왕국을 ‘queendom’으로, 왕자를 ‘princeass’, 상속자를 ‘heirass’ 등으로 표현하고, 핵심적으로는 여성(woman)을 ‘움’, 남성(man)을 ‘맨움’이라고 표현하며 재미있는 언어유희들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번역본에서는 그러한 언어유희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과 더욱 실망스럽게는 ‘그’와 ‘그녀’, ‘남녀’, ‘여왕’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움’과 ‘맨움’을 지칭하였다는 사실이 ‘미러링’ 소설을 읽는 데에 큰 방해 요소가 됐다. ‘그’와 ‘그녀’, ‘남녀’, ‘여왕’이라는 표현은 결국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비롯된 지칭이다. 여성 중심 사회를 나타내기 위해 굳이 ‘맨’+‘움’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소설을 번역하면서 ‘그’+‘女’, ‘男’+‘女’, ‘女’+‘왕’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했을까? 필자는 이러한 점을 충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