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가르침 ‘논어’논어란?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사서의 하나입니다.저자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공자의 제자들과 그 문인들이 공동 편찬한 것으로추정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저자가 일관적인 구성을 바탕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공자의생애 전체에 걸친 언행을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여타의 경전들과는 달리 격언이나 금언을모아 놓은 듯한 성격을 띱니다. 공자가 제자 및 여러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토론한 것이'논'. 제자들에게 전해준 가르침을 '어'라고 부릅니다.상론 10편과 하론 10편은 문체와 호칭 및 술어 면에서 분명히 차이가 나는데, 상론은 문장이간략하고 글자수가 짧고 하론은 문장이 길고 글자수가 많다. 또한 상론의 마지막 10편 향당은공자의 일상 생활을 담아 결말을 내는 셈이어서, 하론 10편의 사실성에 대한 의문이있습니다.(논어의 핵심글자 인)공자 사상은 한마디로 하면 인(仁)입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세부 덕목으로서 지(知, 지혜)와 인(仁, 어짊)과 용(勇, 용기)에서의 ‘인’은 협의의 ‘인’이며, 공자가 내세운 모든 덕목을 총칭하는 개념이 광의의 ‘인’이라고 합니다. ‘인’은 논어의 근본이고 공자의 핵심사상이며 논어 20편을 통해 일관되게 강조되는 내용입니다. 논어의 기본원칙은 인의예지신의 다섯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인은 가장 중요시 되는 덕목입니다. 그러나 인에 대해 공자는 획일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다양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인은 사람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공자는 “어진사람들은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하고 자기가 달성코자 하면 남도 달성케 해준다.”고 말합니다. 즉 다른 사람을 세워줌으로써 자신이 설 수 있다는 이립기립이 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배우고 익히는 학습의 기쁨)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시습(時習)하면 뭐가 생각나세요? 앞에 김만 붙여보세요. 김시습. 이처럼 논어는 옛날에 이름이나 자, 호 등을 지을 때 주로 활용된 책이었습니다. 논어의 첫 구절은 학(學)자로 시작합니다. 만약에 유일신 문화였더면 아마 믿을 신(信)으로 시작했을 겁니다. 하지만 논어는 믿으라고 시작하지 않고 배워라라고 시작합니다. 오늘날 교육학자들이 앞다투어 평생학습을 강조하는데 이미 2500년 전에 공자가 이를 주장하였습니다. 논어의 두 번째 구절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뜻인데 친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친구가 멀리서 찾아왔을 때 진실로 즐거워할 수 있으려면 먼 길을 찾아온 친구가 볼 것이 있어야하고, 배울 것이 있어야 하고, 얻을 것이 있어야 하고, 마음이 편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를 위해선 경제적인 여유도 무시할 수 없는데 친구가 편안하게 머무를 장소가 있어야하고 음식도 소홀히 대접해서는 안되며 돌아갈 때는 차비라도 줄 수 있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공자의 이 같은 상은 훗날 맹자에게 이어져 항산이면 항심, 즉 변치 않는 재산이 있어야 변치 않는 마음이 가능하다는 현실적인 철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세 번째 구절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라는 뜻인데 이는 자기관리에 관한 내용입니다. 공자는 누구나 교육과 노력에 의하여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질문의 힘)공자가 활동하던 시절에 공어라는 권력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죽은 후에 왕으로부터 문이라는 시호를 받아 공문자로 불리어졌습니다. 시호에 글월 문자가 들어가면 상당히 훌륭한 사람을 뜻합니다. 물고기 중에서 문어가 귀한 대접을 받는 이유도 ‘문’자가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문자의 행실에 다소 문제가 있어서 사람들로부터 절대적 존경을 받지 못했는데 이런 부분에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스승에게 공문자의 시호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공문자는 왜 시호를 문이라고 한 것입니까?”라는 물음에 공자는 “민이호학 불치하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바로 머리가 영민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라는 뜻입니다. 공문자가 민이호학(머리 회전이 빠르고 똑똑하면서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는 뜻)하는 자세는 당연하고 바로 공문자되게 해준 행동은 불치하문하는 자세라고 합니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아랫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는데 이런 자세가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바로 이 부분에서 공문자를 높이 평가하여 두둔했다고 합니다. 불치하문의 자세는 대인관계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세계화/정보화시대에 우리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살아가는데 분야와 성격이 다르면 서로 보완할 수 있기 떄문에 불치하문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배움에는 귀천이 없다)공자는 인류 최초의 시학 창시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공자를 따르는 제자가 3000명 정도였으니 어떻게 그토록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 수 있었을까요?바로 공자의 교육철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교육을 통해 사람은 변화될 수 있기 떄문에 누구에게나 교육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공자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르침에 있어서 차별을 두지 않는다 라는 공자의 유교무류입니다.(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군자무본은 군자는 먼저 자신의 근본적인 직무에 최선을 다한다는 뜻입니다. 기본을 지키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면 설득력이 없습니다. 유자는 그 기본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효제를 들고 있습니다. 효는 부모님을 잘 섬기는 것이고 제는 형과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입니다. 본립이도생은 기본이 바로 서면 도가 생긴다는 뜻으로 흔히 줄여서 본립도생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군자와 비슷한 뜻을 가진 용어의 예로 지식근로자가 대체할 수 있다고 봅니다. 피터 드러커의 말을 인용하면 “지식근로자는 자신의 업무를 끊임없이 개선 개발 혁신하면서 부가가치를 높여가는 사람이다.” 라고합니다.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여 끊임없이 개선하고 개발하고 혁신하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길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오늘날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사회에서의 변신카프카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현대인을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의해 일체의 관계를 박탈당한 채 고독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기계 문명에 의한 인간의 자기 소외와 공동 사회에 대한 개인의 대립 속에서 인간 실존의 자각을 모색하였다. 즉, 그의 문학은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주제를 다룬 것이다. 이와 같은 카프카의 문학 세계는,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부조리로 규정하면서 그 부조리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참된 존재인 실존을 회복하려 했던 실존주의와 거의 일치하는데 주인공인 그레고르가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신하여 끝내 인간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외면 받아 죽게 되는 이야기이다. 첫머리에 불쑥 “어느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뒤숭숭한 꿈을 꾸다가 깨어나 흉측스런 벌레로 변한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라고 시작하는데 이렇게 말도 안되는 비현실적인 상황이 있나? 나중에는 인간으로 변해서 자신의 삶에 대해 반성하고 뉘우치겠지? 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읽고 있었는데 결말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그 충격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과연 벌레에게도 존재의 의미가 있을까? 라고 생각해보았다.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이 하루아침에 벌레가 되어 살아야 했던 그에게는 어떤 실존이 있을까? 인간으로서 실존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한 그는 방문의 손잡이를 입으로 돌려야하고 입맛이 변해서 신선한 음식이 아닌 오래된 채소와 같은 덜 신선한 음식에 식욕을 느끼게 된다. 또, 자신은 멀쩡하게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의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 심지어는 듣지 못한다고 취급해 그에게 상처가 되는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게 된다. 결국 실망감에 사로잡힌 그는 자신이 만든 그림 액자에 달라붙어 자신의 자아를 인식하고 간직하는데서 인간으로서 실존을 확인하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흉측한 벌레로 변신했어도 주인공은 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게 된다. 그렇다고 멀쩡한 정신에 인간의 삶을 포기하고 벌레라는 존재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럴수록 그의 ‘벌레’라는 새로운 정체성은 계속해서 드러난다. 끝내 쓸쓸히 빈방에서 숨을 거두는 그는 그가 처한 상황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자유, 즉 죽음만이 허락되어 있었다. 부모님의 빚까지 떠안아 외판원으로서 힘겹게 살아온 그에게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까? 그의 변신은 원해서 된 것인지 떠밀려서 된 것인지 그 이유는 끝까지 설명하지 않는다. 어느 하나 이해할 수 있는 연결고리도 상황의 전환도 없었다. 이런 의혹의 실마리를 오롯이 찾아보고 연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도대체 왜 그레고르가 한 마리 벌레가 될 수 밖에 없었는지 나름대로 분석을 해보았다. 그는 처음에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나게 되는데 그 불안한 꿈으로 인하여 벌레로 변할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고 빡빡하고 인간미 없는 사장 밑에서 단 5분의 지각도 허용치 않고 겪어야하는 일상들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그가 가지고 있었던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꿈은 이러한 각박한 세상을 등지고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한 불안감들이 그를 벌레로 변하게끔 몰아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우리가 흔히 읽었던 이솝우화나 동화에서처럼 저주였든 무엇이 되었든 벌레가 되었다면 되돌아갈 수 있는 길도 열려 있어야하는데 그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를 되돌릴 수 있는 힘은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주고 사랑과 관심으로 돌보아주는 가족들이 아니었을까? 가족들이 점점 지쳐가고 자신을 홀대하여 최후의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도 처음에는 자신이 벌레가 된 것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고 외면만 바뀌고 내면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을 인간이었던 본모습으로 되돌리고자 노력을 기울이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이 역시도 그를 되돌 있는 아버지는 그를 방으로 밀어 넣기 위해 발길질을 하고, 사과를 집어 던진다. 그리고 결코 거실에 나오는 걸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그를 가족의 한 사람, 자신의 자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카프카는 그저 그레고르가 변하기 이전부터 그를 냉대하며 변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에서 오는 압박과 존재의 상실이 만만치 않고 그 역시도 평소에 문을 걸어 잠금으로서 가족과 단절된 삶을 살아 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 역시도 영화 ‘겨울왕국’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love is an open door', ’Do you want to build a snowman?'처럼 문에는 깊은 유대관계가 숨어있는 것이다. 주인공인 엘사는 자신의 마법의 힘 때문에 사랑하는 동생이 와서 놀자고 해도 자기 자신을 방안에 가둬두고 있었다. 이처럼 가족들은 그를 방안에 가두고 돌보아 주지 않기 때문에 쓸쓸한 결말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싶다. 이를 되돌리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출구를 찾지만, 출구는 보이지 않고 더욱더 악화만 될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변신은 가족의 힘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시대의 힘이라고 하는데 카프카가 글을 썼던 시대는 더 이상 혈연과 지연, 가족 간의 끈끈한 정서적 유대로 사회가 유지되는 전통적인 시대가 아니었다. 산업 사회의 발달과 함께 변화한 현대 사회의 가족은 생활력을 상실하는 순간 가족으로부터도 얼마든지 소외될 수 있으며 순식간에 고립과 고독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절망적 상황을 ‘벌레’라는 상징을 이용해서 그려 냈다. 생각해 보면 지금의 청년들 역시 똑같은 갈림길에 서 있다. 다만, 그레고르가 조금 더 일찍 온몸으로 감당해서 간접적으로 얘기해주는 것처럼 느꼈다. 한 집안의 가족에 초점을 맞춰두고 서술한 카프카의 작품을 통해서 가족 사이의 사랑조차 경제적인 관계, 돈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쉽게 받아들서도 안되는 일인데 왜 자꾸만 발생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악해진게 아니라면, 가족 관계의 변화를 꿰뚫는 커다란 변화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괴테는 가정을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라고 했다. 즉 가정이란 사람이 외모나 성격, 재능, 재산 때문에 인정받거나 사랑받는 곳이 아니라 있음 그 자체, 즉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장소라는 것이다. 가족이란 설령 누가 특별히 못생겼어도 사교적이지 않아도 특별한 재능이나 재산이 없어도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기뻐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카프카는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희생적 사랑, 가족 간의 사랑에는 경제적 관계가 바탕이 되어있다는 점을 꼬집어 비판하려고 했던 것 같다. 가족중 누군가 물질적인 면이 변하면 가족이 그에게 베푸는 사랑도 따라서 변한다는 것을 흉측한 곤충으로의 변신이라는 기발한 장치를 사용해서 보여준 것이다. 21세기는 돈이 최고의 가치로 떠받들어지는 자본주의 시대이다. 전처럼 사랑과 희생만으로는 가족을 설명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오죽하면 돈이 돈을 만들고 사람보다 돈이 먼저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놓여야 할 자리에 돈이 놓이고, 인간이 돈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돈이 인간을 부리게 되는 거꾸로 세상이 등장하고 이로부터 인간이 인간다움을 상실하는 인간 소외의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비인간적 상황에 놓이는 일이 고대 사회에도 있었지만 현대의 인간 소외는 돈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자본주의의 본질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그레고르를 없애 버려야 하고 생명체를 ‘저것’이라고 표현하고 더 이상 가족의 구성원으로 대하지 않고 가족의 생활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존재로 취급하여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인간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가 죽었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그의 죽음을 뒤로한 채 행복한 나들이를 떠난다. 밝은 전망을 찾아 그들도 자본주의 시대에 맞춰 살길을 추구하는 길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현대사회에서 모두들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변신을 통해서 드러난 불안과 고독, 허무와 부조리한 삶은 실존주의의 핵심 단어이다. 인간 개개인의 실존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본모습을 잃고 신음하는 현대인의 삶이 보인다. 나 자신도 언젠가 모두가 멀리하고 피하는 징그러운 벌레가 될 것 같아 불안한 심리가 보인다. 상대와 끊임없이 경쟁해야하고 하나라도 더 좋은 스펙을 쌓아야만 하는 우리 시대의 청년들의 불안심리를 카프카는 미리 꿰뚫어 본 것이다. 한 교사가 카프카를 칸트가 한 말에 빗대어 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인간이 수단이나 도구로 취급될 때, 우리는 벌레가 되었다고 느낀다’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도 인간이 수단이나 도구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갑질논란이나 정리해고등과 같이 지금 이순간에도 발생하고 있는 사회적 논란이 많다. 그레고르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것은 혼자서는 절대 풀 수 없고 심지어 작품이 출간되어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현대사회도 그만큼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나 조차도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했다면 돌보아주고 챙겨주는 사람이 있을까? 처음에는 가족들도 돌보아 주겠지만 나중에는 하찮고 귀찮은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사회적 약자를 한 번 더 둘러보고 감싸 앉는다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카프카가 남긴 말처럼 우리 안에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보는 것은 어떨까? 3편의 짧은 ‘시골 의사’의 장면에서 누구도 돕지 못한 채 끝없이 추위 속을 헤매고 환자가 살려 달라는 게 아닌 죽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 사회. 존재의 의미가 철저히 부정되고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묘사함으로써 그가 말하고자 했던 날카로움이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남들과 비교하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 자괴감과 괴리감이 날로만 늘어가는 시점에서 카프카의 책을 이런 우리들의 마음을 산산조각 낼 수 있을 지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