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책 읽고 독후감 써서 문서 판매 사이트에 올리기독후감 쓰는 방법제목지은이책 읽은 기간줄거리 요약내 생각양과 가격은 비례한다리스크가 없다. 안 팔려도 내 머리에 지식이 쌓인다.인용1(출처 밝히기) 느낌9독후감을 쓰다보면 일필휘지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나도 책 써볼만 하겠는데? 싶으면 책을 쓰자쉽게 쓰자 단문(주어+서술어)으로목차부터 잡기(꼭지글 70~100개)읽히려고 쓰지 말고 분량 채우는 데 목표를 두고 꼴리는 대로 써라생각독후감을 팔다니? 생각도 못해본 아이디어였다.난 작가가 꿈이었다. 사람들이 내 글을 읽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 짜릿했다. 하지만 습작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신선한 소재를 찾아내는 게 너무 어려워서. 첫문장이 그렇게 어려울 수 없었다. 글은 엄청난 짐이었고 부담이었다. 작가라는 꿈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하지만 이 책을 읽고 생각이 전환됐다. 독후감도 내 글이잖아. 이걸 읽고 싶은 수요도 분명 있을 거고. 이걸 판다? 그건 즉슨 내 꿈이 이뤄지는 것 아니냐.독후감은 진작부터 쓰고 있었다. 독후감은 쉬웠다. 누군가 쓴 책은 아름답고 싱싱한 소재였다. 이 재료를 가지고 칼질 좀 하고 조미료 착착 뿌리고. 끝. 첫문장이 어려울게 뭐 있나? 그 책을 읽고 느낀다. 그 느낌을 한꺼번에 표현할 문장을 쓴다. 끝. 아주 쉽고 간단했다. 어쩌면 누군가의 책에 기생하는 글이라 그럴지 모른다. 아무리 잘 써봤자 엄청난 명예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부담되지 않았을지도.하지만 부족했다. 난 내 글로부터 나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내 문장을 읽기 위해 누군가가 지갑을 여는 것. 그게 존재의 의미였다. 독후감은… 당시엔 누군가에게 판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그저 일기처럼 내 노트북 파일 속에 차곡차곡 쌓여갈 뿐이었다.겨우 생각해낸 건 블로그에 올리고 광고 달기. 하지만 느낌이 달랐다. 우연히 물건을 들춰보는데 들인 시간으로 돈을 받는 것. 진정한 내 글 팔기가 아니었다. 거기다 광고 승인 받기 위해서는 쓰기 싫은 글을 여러편 써야했다. 그 작은 인고의 시간을 못 견뎌냈다.그럼 ‘글쓰기’ 책을 읽자. 글쓰기 실력이 향상되어 내 글을 쓰자. 그리고 팔아야지. 완벽했다!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글쓰기 관련 서적 4권을 읽었다. 감이 오는 듯했다. 글쓰기 욕구가 마구 일었다. 아주 짧은 단편을 썼다. 뭐, 생각보다 괜찮았다. 내 눈에는 그랬다. 그래서? 끝이었다. 너무 짧고 단순해서 팔 수가 없었다. 다시 글쓰기 관련 책으로 돌아갔다. 이전에 읽었던 책의 주장과 상충되는 얘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팠다. 판단이 안 섰다. 책만 읽지 말고 내가 직접 써보면서 느껴야 했다. 그래야 이전에 읽은 책이 소화될 것 같았다. 그 다음에야 다른 책도 소화할 수 있을 테고. 하지만 습작을 더 하기엔 실력이 너무 부족했다. 시동이 걸리려다가 자꾸 꺼졌다.독후감이 그리웠다. 내 글쓰기 수준은 딱 독후감이었으니까. 거기다 다른 분야의 책도 눈 앞에 어른거렸다. 소설, 자기계발서, 심리학책… 그래서 읽었다. 읽기만 하기도 하고 독후감도 쓰기도 하고. 한심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구나. 내 뇌 속 허름한 카페에서 머무는 책과 조잡한 감상. 언제쯤 내 책을 써서 팔까. 하지만 독후감은 내 몸에 너무 착 맞았다. 맘이 복잡했다.그러던 중 만났다. ‘글쓰기로 부업하라’책 제목의 ‘글쓰기’가 독후감을 의미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읽으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 말고도 책 읽고 독후감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 이걸 팔았다고? 돈을 벌어? 그러다가 자기 책을 냈어? 10권이나?(지금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어느새 49권을 쓰셨단다.)희망을 봤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지금처럼 요약만 간단히 하고 느낀점 열댓줄 쓰고 끝!으로는 안 됐다. 3쪽 분량은 써야 팔린단다. 또한 그래야만 글쓰기 실력이 늘고 말이다. 막막했다. 3쪽이라니. 대학 과제로 썼던 독후감을 들춰봤다. 이 때는 그래도 방학 내내 책에만 푹 빠져있던 때였다. 성경과 소설을 읽고 감탄을 내뱉곤 했다. 그 책 내용때문만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한 해석과 깨달음에 탄복해서. 독후감 쓸 때도 열을 내며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렸었다. 엄청 길게 썼겠지? 어라? 창세기에 대한 독후감 1쪽 반. 출애굽도 1쪽 반. 그나마 소설 ‘생의 한가운데’는 2쪽반…3쪽이 이렇게 어려운 거였어?우스웠다. 독후감 3쪽도 쓰기 힘들어하는데 책을 쓴다니. 씁쓸하기도 하고. 그래도 지금이라도 내 위치를 알게된 게 어디냐. 수준 안 맞게 소설 쓰려고 억지부리기보단 지금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보자. 그리고 독후감을 쓰다보면 일부는 소설 형식으로 써야할 때도 있을 테다. 가령 글쓰기 책을 읽었다고 하자. 그 책에서 알려준 기법을 활용해 이런 식으로 소설을 써보았다라면? 그럼 독후감에 소설을 적어야겠지. 그렇게 습작도 해보자. 그럼 된다.이와 별개로 정리할 것이 하나더 있었다. 주식. 얼마전부터 재테크에 빠졌다. 단순한 예금저축보다는 주식이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니 시장을 보는 눈이 어느정도 있으리라 여겨져서. 그런데 개뿔. 초심자의 행운으로 초반에 치킨값 벌기를 잠시. 이후 몇달째 파란불이었다. 하락 또 하락. 주식을 보느라 업무에 집중이 안 됐다. 책 읽고 글 쓰는 데에도 소홀해지는 건 당연. 관둬야 하나? 멈추기 쉽지 않았다. 매몰비용때문이다. 마이너스를 복구해야하니까. 경제학의 유명한 이론이 있다. 매몰비용을 포기하라. 주식을 붙잡고 있느라 회사 업무와 글쓰기 시간이 망가진다면 주식을 놔야한다. 주식을 손해보고 팔라는 건 아니다. 그냥 관심 끄는 것. 그런 사람들을 제일 한심하게 여겼는데. 그들이 현명한 것이었다. 나도 이제 그들처럼 할 때다. 내 시간을 소중히 여기자. 중요한 데에 초점을 맞추자.그리고 이렇게 독후감을 쓴다. 이걸로 돈을 벌어야지! 3쪽 겨우 넘겼다. 한계다. 끝.
여호수아드디어 끝이 났다. 다사다난했던 출애굽. 눈으로 읽는 것뿐인 데도 힘이 들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도착했고 그 땅을 누리며 사는 일만 남았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나도 이 정도인데 그들은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심지어 그들은 무척 성숙해졌다. 이 책 끝 부분에서 모세 때 정복했던 땅 중 한 곳에서 살기로 했던 지파가 등장한다. 그들이 그 땅과 여호수아 때 정복한 땅 경계선에 제단을 쌓았다. 그러자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던 다른 자파들이 그들에게 우상 숭배를 하려는 거냐며 따진다. 알고 보니 모세 때 정복한 땅에 살게 될 우리의 자손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축복받은 민족임을 잊을 까봐 염려되어 쌓은 기념물이라고 해명했다. 두 지파는 화합한다. 이 정도로 그들은 하나님 안에 아름답게 거하고 있었다.물론 완벽하지는 않았다. 어떤 지파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와 달리 적들을 완전히 내쫓지 않았다. 대신 노예로 부렸다. 정복을 미루며 지지부진하던 지파도 있었다. 그것을 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쟁과 살인이란 대단한 부담이었구나 싶었다. 이 책을 읽기 전 영화로 ‘나니아 연대기’를 보았다. 전쟁하는 장면이 나왔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칼로 찌르고 다치고 괴로워하는 모습. 이런 끝없는 전쟁을 겪어야하고 심지어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여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 엄청난 고통이었겠다는 생각에 무척 안타까웠다. 그런 명령을 하신 여호와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 민족의 잘못된 문화를 뿌리 뽑아야 하셨다. 그래야만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 살면서 헛된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어딘가에서 듣기로 사람을 계속 죽이다 보면 미치게 된다고 했다. 잔인해지고 음탕해지며 짐승처럼 행동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굉장히 엄격하셨다. 전쟁을 치룬 뒤 재물을 훔치는 것을 금하셨는데, 그 행동을 한 이 때문에 백성 전체에게 저주를 내리셨다. 그 사람의 가족은 죽이기까지. 모세를 통해 알려주신 규율을 철저히 지키게 한 것이 조금이나마 이해되었다. 이것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고통 속에서 망가지지 않도록 잡아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이들의 전쟁사를 읽으며 ‘나니아 연대기’와 무척 흡사하다고 느꼈다. 그 영화가 기독교를 바탕으로 씌어진 책을 각색한 것이니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싸움도 그렇고 그 영화에서 나니아인의 싸움도 그렇고 논리적으로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과 나니아인이 당연히 져야 했다. 수적으로도 무기를 보아도 상대가 월등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기도 없이 혹은 하나님의 명에 불순종한 채 임했던 전쟁은 모두 패했다. 하지만 하나님, 그리고 영화에서는 아슬란을 앞세웠을 땐, 그들이 나머지를 이끌고 기적을 통해 모든 싸움에서 승리한다.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힘을 받아 우박을 내리게 했다. 해와 달이 멈추게도 한다. 아슬란은 나무와 물을 움직여 상대편 병사들을 모조리 휩쓸어 버린다. 말도 안 되고 믿을 수 없는 기적이다. 하지만 ‘나니아 연대기’에서 막내 동생이 옷장을 통해 나니아라는 상상의 세계에 다녀왔다고 말하자 콧웃음 치던 나머지 형제들에게 집 주인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말하는 논리라는 게 뭐냐. 너의 동생이 거짓말을 한 적이 있느냐? 그런 동생이 보았다고 하는 것을 믿지 않고, 너희 동생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이 논리니?’ 기독교인들이 이런 기적이 가득 차 있는 성경을 믿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신명기드디어 모세가 명을 다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40여년 간의 그의 여행에 관한 서술이 끝맺은 것이다. 어마어마했다. 여호와 하나님을 대면했고, 이집트에 저주를 내렸다. 몇 십 만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나아갔다. 악독한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시려는 하나님을 눈물로 막았다. 홍해를 반으로 갈랐으며, 많은 민족을 죽였다. 그렇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이스라엘 백성의 선두에 섰다. 그러나 그는 가나안 땅에 발을 디디지 못한다. 백성의 죄로 인해 그 땅을 코앞 두고 바라만 보며 죽는다. 하지만 모세는 원망하지 않았다. 그 땅을 얻기 위해 긴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백성들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는 이미 이루었다.많은 이들이 하는 말들 중 틀린 말이 하나 있다. 구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무자비하고 잔인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얻기 위해 많은 나라가 망했고 여러 사람들이 죽었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살려두라고 하시기는커녕, 어린아이까지도 모조리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 자기 자식 말고는 다른 자식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인가? 대체 그 땅이 뭐길래, 많은 이들이 희생의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인 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악한 자는 자신이 처벌하고 벌 주신다고 하셨다. 우리가 원수를 가려내어 알맞은 형벌을 정해 저주하길 원하시지 않으시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되 심판은 주께서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의 원정도 그러했다. 그들 때문에 다른 이들이 희생된 것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길을 간 것이고 다른 민족들은 그들이 받아야 할 벌을 받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기도하고 소망해야 할 것은, 우리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악한 행동을 하여 벌 받을 일이 없길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우시고 인내하시는 분이시다. 그 분께서 참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도 진작에 죽고 없어져 티끌로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께서 그들을 붙드시고 계셨기에 그들은 살아남아 지시하신 땅으로 갈 수 있었다.모세가 창세기부터 민수기까지 집필했다는 것은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다. 광야에서 먹고 살기도 힘든 그 장소에, 전쟁을 하고 울부짖는 백성들을 달래고 하나님과 대면하며 눈 코 뜰 새 바빴을 그 시기에, 거대한 분량의 양을 써내려 갔다는 건 믿기지 않는다. 모든 역사를 정리하고 규율을 기록하였으며 신명기에서는 방대한 분량의 규율을 한 번 더 재정비하여 요약 서술 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을 이 규율을 이마와 팔에 붙여 보고 또 보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우리는 목이 곧은 자이며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주께서 사랑하셨던 다윗은 밤 낮으로 규율을 즐거이 묵상한다고 하였다.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살아야만 죄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규율을 읽다 보면 신기한 부분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 중 하나는 주께서 첫째로 난 것을 가장 귀히 여기시며 맏아들을 통해 족보를 이어가길 원하셨다는 것이다. 하나의 질서를 만드셨으며 전통과 민족성을 이어나가게 하셨다. 또한 땅을 나눌 때는 제비뽑기를 이용하라 명하셨다. 땅처럼 애매한 것은 사람의 눈과 자로 아무리 정확히 분배하려고 해도 불만과 원성을 낳기 마련이다. 이런 때에 운이라는 사람의 영역 바깥의 방법을 이용하여 그들의 화합을 도모하셨다. 그리고 생각보다 여자들을 존중해주셨다. 삼국지를 보면 조조가 친구들과 장난으로 지나가던 여자를 납치해 강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정도로 과거에는 여자란 하나의 장난감에 불과했다. 하지만 구약을 보면 아들이 없는 집안엔 딸에게 재산을 상속하게 하셨고, 만약 남편이 첩에게 부부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집을 나갈 수 있게 하셨다. 여자가 강간을 당했다면 남자에게 큰 벌을 주게 하셨고, 남자와 여자가 간통했다면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까지도 똑같이 벌을 주었다. 과부와 고아가 굶주리지 않도록 이스라엘 백성은 땅에 떨어진 곡식까지 거둬서는 안 되었다.신학대학에 다니는 지인께 여쭤보니 규율 하나 하나마다 다 의미가 있다고 한다. 아직은 성경을 보는 눈이 어두워 깊은 뜻과 의도를 살피기 어렵지만, 점차 더 나아지길 바란다. 다음 책은 여호수아를 다룬 것으로, 이상하게 아직 그가 별로 등장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젊은 혈기와 열정, 충성됨이 마음에 끌려, 무척 기대된다.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 지기를…
출애굽기출애굽기를 읽으며 계속해서 떠올랐던 티브이 방송의 한 장면이 있었다. ‘꽃보다 누나’라는 방송에서 김희애씨가 말했다. ‘아이들 때문에 9번 울고 1번 웃어요. 그들이 날 울리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해요.’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광야로 탈출하고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을 조금만 풀어주면 그들은 우상을 만들고 하나님을 배반했다.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기가 부지기수였고 노예로 살았던 때가 나았다며 하나님을 욕했다. 하나님은 최초에 사람에게 숨을 불어넣으실 때부터,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욕되게 할지 모르셨을 리 없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화나게 할 것이고, 어둠의 길로 신이 나서 달려갈 그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시기로 작정하셨고 처음 사람을 보았을 때 보시기에 좋다며 기뻐하셨다. 대체 뭐가 기쁘셨던 걸까?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신 일을 보며 한가지 깨달았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같은 리더를 뽑을 때 무리 중 1등을 뽑지 않으셨다. 그 보다는 특정 과업을 이루시기 위해 그에 필요한 성향을 가진 이를 뽑으신 것 같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과업에는 똑똑한 이가 필요했다. 그게 모세였다.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이집트 왕족이 길렀고 지혜와 학식이 뛰어났다. 그는 하나님을 뵈었을 때 끊임 없이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될까요?’ ‘이런 상황이 닥치면 어떡하죠?’ 모르면 무식하다고, 다른 이들이라면 다양한 가정을 세우고 고민하지 않은 채 행동으로 옮겼을지 모른다. 똑똑했던 모세는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하나님은 그의 물음에 답답해 하시면서도 하나하나 꼼꼼히 답하시고 대책을 세워주셨다. 심지어 모세의 형 아론까지 붙여주셨다. 모세는 왕족의 교육을 받은 이로써 달변가 중의 달변가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말을 잘 할 줄 모른다며 괴로워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이 그를 대신하도록 하신 것이다. 아이러니하다. 누구보다 말을 잘하는 자가 자신이 못한다며 울부짖는다. 더 현명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니라며 너는 잘한다며 그를 토닥여 주시기는커녕 다른 자가 그를 돕도록 하시다니. 나는 이렇게 해석하였다. 모세가 다른 사람에 비해 잘하고 못하고는 상관이 없다. 여기서 중요한 건 모세는 하나님을 보았고 그에게 비교하면 그는 잘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 중 하나가 백성들에게 말을 하는 것이었고 그는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에 비해 보잘것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해하시고 아론을 데려오셨다. 아론이 말을 더 잘하기 때문이 아니다. 모세가 지고 있는 짐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아론은 모세에 비해 백성들에게 나서기가 더 수월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일하셨기에 모세가 느끼는 책임감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론은 보조자로써 모세에 비해 책임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덕분에 실수하더라도 그에 대한 책임의 무게는 모세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모세는 꼼꼼하고 학식이 풍부한 이였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집필하게 하셨다. 또한 십계명을 포함한 구체적인 규율들을 정리하게 하셨고 하나님의 구체적인 설계를 바탕으로 성전을 짓게 하셨다.하지만 단순히 모세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려는 방향과 같다는 이유만으로 택하신 걸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민족에 대한 애정이 강했다. 그는 젊은 시절 이집트의 종이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인에게 학대당하자 분에 못 이기고 이집트인을 살해했다. 또한 겸손한 사람이었다. 왕족으로 살았기에 자신에 대한 자부심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처음 뵐 때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의 능력에 대해 조금도 자신 있어 한 적이 없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경외했다. 그리고 역시나 창세기의 의인들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과정에서 더욱 성숙해져 갔다. 리더십을 익혔다. 또한 하나님께서 악한 행동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분노하시는 것처럼 그도 분노했다. 악한 행동이 사람을 얼마나 고통과 추락으로 이끄는 지 꿰뚫어볼 수 있는 눈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자신의 이름을 당신의 책에서 지우시는 한이 있더라도 저들만은 용서해 달라고.또한 이상하게도 이 책에서 두 세번밖에 등장하지 않는 여호수아에게 관심이 크게 쏠렸다. 그가 하나님과 모세에게 충성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죄악과 타락으로 가득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빛을 지닌 이들이 얼마 없었기에 그가 더 눈에 띄었던 것 같기도 하다. 혹은 늙은 모세와 달리 젊은 나이인 순수한 그의 모습에 괜한 동질감이 느껴졌을지 모른다. 이럴 때 드는 생각은, 시간을 헛되이 보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목표가 무엇이 될 지는 누구에게나 다르겠지만 하루 빨리 화살표를 굳건히 두고 달려가야겠다.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지금 이 나이 때의 향기가 지기 전에.
창세기나이를 먹을수록(?) 성경을 찾게 된다. 세상을 알아가고 입 맛에 맞는 길이 있어 대담하게 발을 디뎌 걸어보니 실수였음을 깨닫게 되곤 한다. 피가 나는 다리를 붙들고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오면, 곧바로 또 눈에 띄는 길이 보여 또 걸어본다. 그러나 다시, 또다시 나는 시작점에 돌아와있다. 몸은 만신창이지만 나의 경험에 의의를 두고 뿌듯해하며 뭔가 성장했다는 기분에 도취한다. 하지만 예전과 똑같이 남에게 함부로 대한다. 누구에게도 희망을 주지 못한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나에 대한 고집이 강해진 것과 순수함과 예민함이 퇴색됐다는 것. 그래서 성경에 손이 가게 되었다. 당연한, 그러나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아가페 사랑을 노래하는 책. 그 책을 읽으면 내 자신이 좋은 방향으로 조금이나마 성숙해질 수 있을까 싶어서.창세기는 예전에 한 번 읽었던 적이 있다. 끊임없는 고민과 의문이 꼬리를 이었었다. 왜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한다면서 선악과를 만들어서 죄를 짓게 하고 이 고생을 하며 살게 한 걸까. 사랑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만 챙길 뿐 다른 이들은 죽던 말던 상관도 안 하는 건가? 왜 남의 땅을 뺏게 하고 전쟁을 부추기는 거지? 야곱은 형의 자리를 탐내고 결국 빼앗아 축복까지 대신 받은 자인데 왜 하나님은 그를 아끼고 의인이라 여기는 것일 까. 요셉은 형제들의 잘못을 일러 바치는 얄미운 아이였을 뿐인데 월등히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며 크게 쓰셨을 까.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의 뜻을 알기가 더 어려웠다. 그런데 처음 읽은 것이 아니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나의 신앙 상태가 조금 더 좋아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존의 궁금증이 모두 해소되었다.우선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단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그들의 우위에 두고 이를 인정하는 것. 모든 복과 즐거움을 주셨지만 그들이 자신들을 신성시 여기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망가진다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그래서 이를 막고자 그들이 하나님의 위치를 탐낼 수 없게 금기를 하나 정하셨다. 그러나 최초의 인류는 배의 꼬임에 그대로 넘어가 선을 넘었다. 비옥한 에덴 동산에서 척박한 이 땅으로 고꾸라졌다. 하지만 단순한 저주로 치부할 수 없다. 이 땅에서 우리는 인간의 무력함을 뼈 저리게 느낄 수 있다. 땀 흘려 일하고, 고통스럽게 잉태하면서 하나님과 인간의 간격의 어마어마함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하나님은 아무 이유 없이 인간이 자신을 경외하길 바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식으로 여기셨고 사랑하셨다. 그렇기에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셨고, 그의 방법이 사람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사람이 사랑을 주고 받아야 한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사람과 비교했을 때 훨씬 강하고 높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또 알려주길 원하셨다. 그 외의 물음들도 위의 측면에서 이해하면 충분히 넘어갈 수 있다.이번에 창세기를 읽으면서 가장 충격 받았던 부분들 중 하나는 요셉에 관한 부분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의 의인들 중 가장 큰 명예와 권력을 가진 이들 중 한 명이다. 나는 이것을 복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창세기를 읽다 보면 요셉은 결코 그것을 누리고 거기에서 기쁨을 누린 것이 결코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보다는 그 큰 권력만큼 많은 일을 해야 했다. 그는 굉장히 바빴다. 그럼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묵상하며 기도했음을 알 수 있다. 돌이켜보면 요셉의 인생에 있어 그가 원했던 데로 이루어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집트에 팔려가는 것은 물론이요, 집사가 된 것도, 감옥에 간 것도,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가진 것도, 총리가 된 것도 요셉이 꿈 꿨다던가 욕망하고 있던 것이 전혀 아니다. 그저 살다 보니 그리 되었을 뿐, 그는 어느 상황에서든 일해야 했고 고생해야 했다. 그 와중에 하나님을 의지했고 사랑했고 묵상하며, 성숙해져 갔다. 어린 시절 형제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일러바치던 미성숙한 그였다. 그랬던 그가 온유하고 지혜롭게 자신의 일을 성실히 수행해 나갔다. 나중에는 형제들을 만났을 때 그들을 원망하기는커녕 너무나 기뻐했다. 심지어 그들이 요셉을 두려워하는 모습에 소리가 들릴까 두려워 입을 막고 흐느끼는 모습으로의 변화했다. 이 모습은 그가 총리라는 높은 자리에서 산 것이 아닌 하나님의 품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대변해준다.아브라함도, 야곱도, 모두 그러했다. 하나님은 결코 모든 면에서 선하고 완전한 이를 찾지 않으셨다. 누가 더 자신을 의지하고 믿으며 그의 안에서 살아가길 원하는지를 보신다. 나는 어떠한 가. 눈 앞에 뻔히 보이는 돈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등지고, 믿음과 진리의 세계에서 살아갈 용기가 있는가? 선택을 미룰 수 없다. 선택을 보류한다는 것은 실제 세계를 택한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실제 세계는 유한하다. 그리고 이 세계의 사회 구조나 그를 뒷받침하는 학문들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놓아 버리는 건 참 어렵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갖는다는 건 참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