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과제과목명정치변혁의 세계사담당교수조** 교수전공****과학번202****이름이**제목: 『향수의 기억』: 조향사 장 루이 파르종의 삶을 통해 본 프랑스 대혁명『향수의 기억』은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왕실 조향사 ‘장 루이 파르종’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프랑스 혁명은 우리에게 익숙한 빅토르 위고의 저서 『레미제라블』의 배경이기도 하다. 『레미제라블』은 당시 프랑스 민중의 비참한 현실과 평등한 사회로의 개혁을 요구하는 민중의 목소리를 담은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오는 시민들의 모습과 부패한 권력에 대항하여 승리한 민중의 역사가 떠오른다. 『향수의 기억』은 새로운 사회를 갈망하지만, 왕실과 귀족이 그의 주요 고객이었던 시민 파르종의 시각에서 프랑스 혁명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생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혁명 이후 과격파 공화주의자들의 무자비한 학살이 이루어지던 프랑스 혁명의 또 다른 이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향수산업이 전문화되는 과정과 왕실 조향사로의 성장향수 산업의 주요 고객은 프랑스 왕실과 귀족이었다. 따라서 파르종의 삶을 살펴보면 당시 시민이 겪은 불평등과 프랑스 귀족과 왕실의 사치스러운 삶을 함께 볼 수 있다. 당시 프랑스 향수 산업은 각 지역의 길드 내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길드는 장인과 상인의 집단으로 국왕의 승인을 받은 길드 규약을 통해 상인과 조향사 장인을 길러내고 생산품을 관리·통제했다. 을 보면 제25조~제27조에 ‘도시로부터 반출되거나 혹은 노점 상인들이 반입한 제품은 감찰을 통해 통제할 의무’와 제30조에 ‘장인이 아닌 자는 장갑을 재단하거나 만들 수 없음’이 명시되어 있다. 파르종 가족은 몽펠리에에서 100년 이상 된 조향사 가문으로 명성이 높았다. 몽펠리에는 항구가 있어 외국으로의 향료 수입과 수출을 할 수 있었고 파르종 가족은 다양한 향료들로 질 좋은 향 제품의 생산하여 산업을 번창시킬 수 있었다. 책에서 몽펠리에는 ‘화학의 발달 수준이 높아 우수한 장인들을 도시의 어디에서. 하지만 향수의 주요 고객층은 지배층이었던 귀족과 왕실이었기에 파르종은 최고의 조향사로 성장하고자 프랑스 파리로 갔으며 비지에 부인 집안과의 계약을 통해 향을 파는 상점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는 선천적으로 뛰어난 후각과 아버지에게서 배운 향 조제 기술과 지식을 바탕으로 4년의 견습 기간 동안 다양한 교재들을 읽으며 향료와 기술을 학습했으며 3년간 직인으로 일하며 장인 밑에서 일하는 도제 교육을 담당하였다. 마침내 장인 시험에서 그동안 배운 비법으로 훌륭한 향을 내는 고급 천 ‘트왈레트’를 만들어내며 프랑스 파리의 장인 명부에 올랐다. 이후 그는 자신의 기술로 향수를 만들고 판매하며 향수 산업의 최대 고객이라 할 수 있는 왕비를 만난다.길드 체제와 장인 제도 이외에도 당시 향수 산업이 전문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적 영향도 있었다. 18세기 프랑스 파리는 오물로 악취가 심했으며 물과 공기를 통한 전염병의 확산이 심각했다. 이에 마리앙투아네트 왕비를 비롯한 귀족들은 위생을 중요시하며 목욕을 자주 하고 향수를 사용하였다. 소위 돈이 많은 지배층들이 향수 시장의 주 고객층이 되었고 그들의 수요를 중심으로 향수 산업이 크게 성장하였다.조향사로의 성장과 생존경쟁: 파르종의 뛰어난 후각과 그의 판매전략파르종은 향수의 도시 몽펠리에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100년 이상 된 조향사 가문으로 몽펠리에의 조향사 길드를 주도하였다. 그는 선천적으로 뛰어난 후각을 갖고 있었으며 아버지로부터 전문적인 조향 기술과 지식을 배웠다. ‘조향사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라고 말할 정도로 파르종은 조향사로서의 재능과 능력이 매우 출중하였다. 그렇다면 그가 루이 15세의 애첩, 드바뤼 부인과 마리앙투아네트 왕비 모두에게 인정받아 조향사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집안과 재능 덕분이었는가? 아니다. 귀족과 여왕의 까다로운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뛰어난 향수를 끊임없이 만들어 바쳐야만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따라서 그가 향수 사업에서 뛰어난 성과를 얻을 수 있우선 그는 향수 주문이 들어오면 고객의 니즈와 취향을 정확히 분석하여 고객 맞춤형 제품을 만들었다. 향수 제작 전 고객의 화장, 옷차림을 관찰하고 고객에 관한 이야기를 경청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는 오늘날 기업의 시장조사와 같다. 게메네 공주의 제안으로 마리앙투아네트 왕비를 놀라게 할 제품을 만들게 되었을 때 그는 왕비의 취향을 먼저 분석하여 유행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아냈고 이를 반영하여 영리하게 향수를 만들었다.두 번째로 다른 장인들의 향수와 차별성을 갖고자 노력하였다. 마리앙투아네트 왕비의 장갑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조향사는 어떤 향을 장갑에 먹일지, 어떤 향을 먹어야 왕비가 좋아할지를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 나아가 장갑의 가죽으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가죽을 처리하고 염색할지를 고민하였다. 향수를 만들 때도 향수병의 장식과 디자인까지도 세심하게 고려하였다. 기존에 과제 이외에 여러 요소를 함께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그는 특색 있는 향수를 만들 수 있었다.세 번째 전략은 상품의 네이밍(naming)이다. 기업에서 화장품, 향수를 제작할 때 상품과 잘 어울리는 상품명을 만드는 것도 매우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마리앙투아네트 왕비에게 목욕제품 제작 요청받았을 때 그는 ‘검소한 목욕(bain de mdoestie)’이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왕비가 낭비벽 있는 귀족을 옆에 두지 않는다는 소문을 떠올렸기 때문이다.조향사로서의 성공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부분과 영리한 판매전략이 합쳐진 결과물이다. 그리고 꾸준히 노력한 결과 ‘트라이농의 향수(perfum du Trianon)을 만들어내며 최고의 전성기에 올랐다. 왕비는 트라이농 정원을 어디든지 지니고 다니고 싶다며 ‘트라이농 정원 전체를 병 속에 고스란히 담아달라’는 엄청난 주문을 한다. 선천적인 재능에도 끊임없이 노력하며 프랑스 최고의 조향사로 성공하고자 했던 파르종에게 어쩌면 기다려왔을 순간이었을 것이다.절대 왕정 시기의 궁중의례: 민중의 비난의 화를 수행하는 수많은 시녀와 시종이 존재했다. 책에 언급된 바에 따르면 루이 16세 재위 기간 동안 왕비의 처소에 소속되었던 종사자들은 약 450명에 달했다고 한다. 왕비 처소 업무의 최종적인 결정권자인 ‘대시녀’, 행사에 맞게 왕비의 옷차림을 관리·감독하는 ‘명예시녀’, 의상 및 액세서리를 담당하는 시녀 등 고유의 역할을 가진 시녀와 시종이 존재했다. 또한 왕비의 건강 및 취미 생활과 관련된 일을 수행하는 업자들도 존재했으며 왕실 처소와 관련된 일을 하는 이들은 명부에 올라 관리되었다.왕비의 치장은 ‘초기 지장-공개 치장’ 순으로 진행된다. 초기 치장은 비공개로 진행되지만, 공개 치장에는 다양한 지위의 시녀와 시종이 참여하여 왕비의 치장을 돕는다. 치장이 시작되면 침전시녀장이 왕비에게 내의 입혀주고 명예시녀가 치장 물품으로 왕비를 꾸며준다. 치장하는 동안은 수행시녀들과 왕자와 공주들이 왕비의 주변에 둘러앉아 왕비에게 아첨하기도 한다. 왕비의 치장이 끝난 후에는 왕실 귀족과 손님들이 알현하여 왕비와 이야기할 수 있다. 이에도 각 수행시녀들은 일정한 법도와 규칙에 따라 일을 수행하며 자신의 지위보다 높은 이가 왕비의 처소로 들어오면 상위의 직위를 가진 사람에게 왕비의 물품을 전달하여 그가 왕비를 치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왕족과 왕비의 치장이라는 궁중의례는 본래 왕실의 전통과 위엄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실의 사치와 낭비가 심해지면서 궁중의례는 실속 없는 허례의식으로 변질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중은 왕실의 궁중의례라는 제도 자체가 아닌 궁중의례를 핑계 삼아 왕실의 사치와 낭비를 일삼는 왕실에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장 루이 파르종의 혁명재판과 프랑스 혁명에 대한 그의 입장 변화: 프랑스 혁명의 전개과정을 중심으로왕실을 향한 민중의 비난은 마리앙투아네트 왕비를 향하였으며 귀족들도 그녀를 ‘국고를 바닥내는 여자’라고 비난하며 왕비의 명예가 점점 추락하기 시작했다. 역설적이게도 왕비는 물욕이 없고 낭비벽이 없는 사람을 곁에 두려고 했으나 자신그녀는 순진하고 너그러우며 인간적인 사람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그 시대의 평범한 귀족 여성이라고 말한다. 다만 당시 프랑스는 선대 루이 15세 때부터 이어져 온 왕실과 귀족의 사치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점차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그녀의 사소한 행동들이 민중의 입방아에 오르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에게 차별적인 비난과 소문이 집중되었던 요인으로 그녀가 프랑스 국민이 아닌 오스트리아에서 시집온 외국인 왕비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시민의 성장과 왕정의 붕괴로 가는 자연스러운 시대적 흐름 속에서 그녀가 일종의 희생양일 수도 있다는 의견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이처럼 파르종이 왕실과 여왕에 대해 다른 시민들보다 우호적이면서 연민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사치와 낭비를 일삼는 왕실에 대한 불만과 커져가는 프랑스 사회 개혁에 대한 갈망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의 불씨는 루이 14세 때부터 시작되었다. 루이 14세는 유럽 내 세력 확장으로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자 수많은 전쟁에 참여하였고 이로 인해 프랑스의 재정위기가 시작되었다. 루이 16세는 루이 14세로부터 이어져 온 재정 악화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미국의 독립전쟁에서 미국 편에 서서 전쟁을 지원하였다. 이는 영국 정부와 오랜 적대 관계였던 점 때문이었다. 이러한 국가 재정의 과도한 지출로 인한 부담은 제3신분이었던 시민에게 돌아갔다. 그동안 누적되었던 지배계층의 차별로 인한 분노와 세금 부담으로 시민과 평민에게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때 제1신분인 사제, 제2신분인 귀족, 제3신분인 평민·시민이 함께 모여 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삼부회가 있었지만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국가 재정 악화로 세금 인상 문제를 논의할 당시 제3신분이 2배의 인원수로 삼부회에 참여하였지만, 표결방식으로 지배층과 갈등이 생기면서 세금에 대한 합의는 결렬되었다. 이에 시민들은 다시 베르사유 테니스코트에 모여 ‘헌법을 제정하고 사회질서를 회복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라는 선언문을 발표하며되었다.
2021***** 이**정치변혁의 세계사 기말고사 과제1. 율령, 법가와 유가의 융합①율령이 기본적으로 법가의 사상에 뿌리를 둔 통치 체제임에도 유가의 통치 이념이 율령에 반영되었다고 보는 이유?율령은 동아시아 사회에서 국가를 다스리는 데 널리 이용된 법이다. 율은 범죄 행위와 처벌을 규정한 것이고, 령은 국가의 조직과 운용, 신분과 수취 제도 등을 폭넓게 규정한 것이다. 이때의 율과 령은 어떤 가치를 기반으로 정해야 한다. 이때 사용된 것이 유교의 통치 이념이었다.유교는 공자를 시조로 하는 중국의 사상으로, 천명사상, 충, 효, 인의예지를 강조한다. 천명사상은 황제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유용했으며, 군주에 대한 충성의 강조는 국가를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인의예지는 공동체 질서 유지의 명분이 되었다. 즉, 유교는 법가의 사상이 성립될 수 있는 근거를 주었기 때문에, 국가를 정교한 법으로 통제하려는 생각과 가족 및 공동체의 질서를 존중하는 유교적 사고가 함께 율령에 반영되었다. 따라서 율령은 법가와 유가가 통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다.유가의 통치이념이 반영되어 만들어진 율령은 가부장적 질서와 신분 질서, 연장자에 대한 우대 등을 위반하는 범죄를 엄중하게 처벌했고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선발하기 위해 과거제를 시행했다.②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율령 체제를 직수입하지 않고 변형시킨 이유?율령은 중국 수·당 시대에 완성되어 사용되었던 법전 체계이다. 이것은 중국이라는 국가에 맞게 완성되었기 때문에 주변 나라에 전파되어 그대로 사용되기엔 무리가 있었다. 각국의 통치 형태와 관습, 문화 등이 달랐기 때문에 각국은 율령을 현실에 맞게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변형하여 자국에 사용했다. 신라의 경우 율령을 도입하였지만, 중국의 호적제도를 변화시켜 사용하였고 과거제 대신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여 실무를 담당하는 관인을 충원했다. 발해 역시 당의 통치 제도를 수용하여 중앙 관제를 3성 6부로 시행했지만, 명칭과 운영 방식 등은 당과 달랐다.2. 이슬람, 서양 문물의 원 산업에 필요한 지식을 모았다. 또한 이슬람 종교는 다른 나라의 지식을 쉽게 수용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0’이라는 존재였다. ‘0’은 고대 그리스에서 종교적 이유로 거부당했지만, 인도와 이슬람에서는 종교로 인해 오히려 쉽게 받아들여졌다. 인도에서 탄생한 0은 이슬람으로 전파되어 정확하고 빠른 계산을 통해 다른 나라와의 교역을 더욱 활발하게 하였다.따라서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영토와 다른 나라의 지식을 쉽게 수용하도록 장려했던 종교로 인해 이슬람은 동서 중계 무역의 중심지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②당시 선진 이슬람 학문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과학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이유?선진 이슬람 학문은 이슬람의 지역적 특성과 종교로 인해 크게 성장하여 르네상스와 과학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르네상스 사상의 기본 요소는 중세를 인간의 창조성이 철저히 무시된 암흑시대로 보지만, 고대를 문화의 절정기로 보는 것이다. 이에 그리스·라틴 학문을 부흥시킴으로써 억제되고 있었던 인간의 지적 능력과 창조적 잠재 능력을 다시 불러오고자 했다. 이때, 7~8세기에 걸쳐 인도와 중국 국경에서부터 스페인의 피레네산맥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이슬람은 고대 그리스의 과학을 중세의 암흑시대에서 눈 뜨기 시작하는 후기 중세 유럽에 전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그리스 과학의 아랍어 번역본이 유럽에 알려지며 르네상스와 과학혁명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서로의 문화 교류를 이루게 해준 상당히 모순적인 상황이 이루어진 것이다. 대표적으로 이때 이슬람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분야 중 하나가 연금술이었다. 연금술은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되어 4가지 원소의 배합을 통해 모든 물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발상을 기반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다양한 실험 도구들과 기술들이 개발되었다. 이는 과학의 기초가 되었다.더불어 이슬람에서 학문이 왕성하게 연구된 것은 이슬람교의 교리 때문이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 ‘지식의 탐구는 천국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목요일’의 패닉①1929년 세계 대공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이 마련한 공황 대처법은?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인해 유럽의 소비력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생산력은 크게 증가하여 오히려 과잉생산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이 계속 증가하였고 1929년 뉴욕 증시가 폭락하면서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대공황은 세계 경제의 메커니즘에 따라 독일·영국 등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이어서 그들과 긴밀히 연관된 남아메리카·동남아시아 각국으로 확산하였다. 미국의 대공황을 시작으로 강국과 빈국 모두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세계 대공황이 전개된 것이다.대공황의 위기에 영국이 먼저 1931년에 금본위제를 폐지하였다. 또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를 인정하고 저금리 정책을 시행하였다. 영국은 연방국 및 식민지를 동일 통화권의 블록으로 설정하고, 특혜 관세를 부과하는 이른바 관세 협정을 맺었다. 아울러 제3국에 대해 높은 관세율 등을 적용해 관세 장벽을 만들고 통상조약을 파기함으로써, 다른 블록과의 무역을 차단하고 독자적인 경제 블록화를 이루었다. 블록 경제를 통해 보호무역주의 체제를 세운 것이다. 경제 블록을 형성하여 일부 국가에는 특혜를, 그 밖에 나라들에는 큰 교섭력을 가졌고 이는 수출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도록 했다.미국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을 통해 대공황을 극복하려 했다. 뉴딜 정책은 1933년부터 실시하는 경제 · 사회 정책이다. 긴급은행법을 제정하여 금융공황으로부터 은행 업무를 정상화하였고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관리통화법을 도입해 정부의 통화 규제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농업조정법과 산업부흥법을 제정하여 농산물의 균형가격으로 농민들을 구제하고 노동자들의 안정된 고용과 임금을 확보하였다. 뉴딜정책으로 마비 상태에 있던 미국의 자본주의와 혼란했던 사회를 재건하여 경제에 안정을 이루었다. 또한, 뉴딜 정책으로 인해 미국의 전통적인 자유방임주의가 변화하여 정부의 권력이 일부 작용하여 소득 불평등과 독점이윤과 같은 모순과 이는 실업률을 상승시켰다. 국가들이 시행했던 경제 블록화와 관세 상승은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두어, 세계 무역을 위축시키고 나아가 경제 규모 자체를 축소하는 악순환을 가져왔고 결국 자국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이렇게 보호무역주의는 국제 교역량의 격감을 불러오고 불황을 오히려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으로 세계 경제의 분위기가 세계화에서 탈세계화로 변화하고 있다. 세계화를 통해 글로벌 유통망에 의해 국제 분업과 협업이 가능해졌고 이에 세계 소비자들은 더욱 싸고 좋은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탈세계화가 이루어지면 1929년 경제 대공황과 같이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고 자국 우선주의가 나타나 세계 시장이 다시 분열할 것이다. 다시 경제 블록화로 이어져 무역과 투자가 위축되고 세계 경제가 장기 침체에 직면할 것이다.보호무역주의는 자국의 경제를 지키는 방안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경제를 악화시키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4.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승리①고르바초프와 덩샤오핑은 개혁 개방 정책을 통해 공산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스스로 반성함. 공산주의가 안고있는 문제점은?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성립된 공산주의 정권들은 서로 같은 문제점들을 공유하고 있다. 대체로 공산주의 통치는 독재와 경찰 테러, 인권 유린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소련과 동유럽, 쿠바 등에서의 공산주의 체제는 초 중앙집권주의, 국가 통제 경제, 동원 사회의 성격을 공동으로 가지고 있었고 독재와 경찰의 테러, 시민들의 인권 유린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이는 이들 나라의 공산주의 모델은 레닌의 마르크스주의 해석을 근거로 실행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레닌은 독재로 중간계급의 권리를 억압하고 급진적 개혁을 실행하는 사회주의 단계를 거쳐야 공산주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의견과 다른 세력을 구분하기 위해 공산주의폭력으로 바꾸려 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생명력을 이어가려 했다. 공산주의로 인해 이루어지는 억압과 폭력이 공산주의 실패를 가져왔다.②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체제 경쟁에서 자본주의가 승리한 이유?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의 경쟁은 냉전체제로 전개되었다. 주로 미국과 소련 사이에 전개되어 당시 사상적 이념의 대립이 모든 분야에서 발생했다. 그중에서 정치와 외교 분야의 대립이 강했다.트루먼독트린은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1947년 의회에서 선언한 미국 외교정책이다.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자유와 독립의 유지에 노력하며 독재를 거부하는 의사를 가진 나라에 대하여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에 근거하여 당시 공산 세력으로 인하여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하고 있던 나라에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원조가 제공되었다. 이 원칙은 그 후 미국 외교정책의 기조가 되었으며, 북대서양조약으로써 구체화하였다.소련이 공산주의 세력을 확장해 동유럽을 공산화하기 시작하였고 서유럽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이 1949년 북대서양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북대서양조약기구는 유럽 내에서 반공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서유럽 국가들의 집단방위조약이다. 소련에 대한 집단안전보장을 위해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서유럽 내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도와준다.이후 서독과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항하기 위해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8개국의 총리가 모여 조약을 체결했다. 이때 만들어진 바르샤바조약기구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심각한 동서 대립 속에서 체결한 군사 동맹조약기구이다. 소련의 위성국들에 대한 지배 강화 및 사회주의 국가들의 동맹 강화를 목적으로 조약이 체결되었다.이렇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세력 경쟁이 계속되던 중, 1960년대에 진입하면서 양 진영은 더 이상의 견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이에 1969년 미국 닉슨 대통령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국제 질서에서의 현상 유지를 목표로 공산주의와의 화해가 시작되었다.이후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
기말과제과목명전환기 근대사의 조명담당교수구** 교수전공****과학번202*****이름이**제목: 제주도의 근대화와 도시의 변화제주도는 한반도 남쪽에 있는 섬이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섬이다. 섬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제주도는 전통적으로 육지와는 다른 생활방식과 모습을 갖고 있다. 하지만 1970년대 박정희 정부를 기점으로 한반도 근대화 국가사업을 통해 관광지로서 급속한 변화 과정을 겪은 이후 2000년대 중국 자본 및 중국 관광객의 유입, 20~30대를 중심으로 한 제주 이주 및 한달살이 열풍으로 대안적 삶의 터전으로서의 부상 등을 겪으며 제주는 다양한 집단과 끊임없이 충돌하고 공존하며 변화를 경험해오고 있다.제주도는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육지의 여러 해안 지역과는 다른 고유한 문화를 형성해왔으며 이는 공동체 문화, 주거 문화, 외지인에 대한 인식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궨당 문화’는 제주의 특성을 반영한 전통적인 공동체 문화이다. 과거부터 제주에서는 ‘사돈에 팔촌으로 걸린 궨당’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이는 굳이 친척 관계가 되는지 확인해 보지 않아도, 고향 마을을 밝히고 계보를 따지다 보면 하다못해 사돈의 팔촌이라도 된다는 말이다. ‘궨당’은 지연과 혈연에 중복이 생기면서 모두가 친척이라는 의미로서 사용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제주는 ‘마을 내에 매놈(완전한 남)이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네 사람들이 모두 친척 관계로 얽혀 있다. 이 때문에 동네 어른 모두를 ‘삼촌’으로 부르는 관행이 정착했을 정도로 궨당은 제주 지역만의 독특한 문화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궨당 문화는 일상생활에서 같은 마을이나 이웃 마을에 부계 친족, 모계 친족, 처가 친족, 시가 친족이 함께 생활하는 문화로도 나타났다. 이에 따라 한 마을이나 이웃 마을에서 혼인한 자매들이 함께 살게 되면서 모계 친족이 상당한 참여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와 같은 궨당 문화는 남녀평등 사상을 낳게 되었고 제주 여성의 강한 자의식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두 번째, 제주도는 ‘안거리-밖거리’라는 전통주거문화를 가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제주도 가옥은 하나의 울타리 내에 두 채의 독채가 있다. 대문(출입구)을 기준으로 안쪽에 위치한 독채를 ‘안거리(內棟, inside unit)’라고 부르며, 대문을 기준으로 바깥쪽에 위치한 독채를 ‘밖거리(外棟, outside unit)’라고 부른다. 안거리-밖거리 전통주거문화의 공간적 구성은 ‘따로 또 같이’의 개념이 반영되어 있다. 즉, 안거리-밖거리 주거 형태 속에 노부모와 혼인한 자녀가족 간의 완전히 분리된, 그러나 고립되지 않은 공존의 삶을 살아가는 문화가 반영된 것이다. 이러한 주거 형태는 노부모와 혼인한 자녀 가족이 각자의 부엌을 두고 취사의 완전한 분리를 통해 독립된 생활공간에서 각자 생활하게 된다.마지막으로, 제주도민이 외지인을 대하는 전통적인 인식이다. 과거 제주 사람들은 마을에 새로 들어온 외지인에게 관심을 쏟지 않는다. 이는 무슨 사정으로 우리 마을에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괜히 관심이 쏠리는 것을 의식하며 마음 쓰게 하지 말자는 일종의 배려이다. 마을에 들어온 외지인에게 보이는 이 첫 반응은 외지인에 대한 배척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외지인이 잘 정착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다. 전통적으로 제주는 같은 가족, 같은 궨당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참견하거나 간섭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주는 정치적 이념의 충돌과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1948년 제주 4.3사건을 겪으며 국가 공권력에 의해 14,442명가량의 제주 민간인이 학살되는 비극을 겪었다. 제주 4·3사건은 올해 73주년을 맞았으며 이 잔인하고 끔찍한 비극은 채 100년도 되지 않은 역사로 제주도민의 마음속에 큰 상처로 남아있다. 이에 따라 조부모 세대는 외지인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과 불신을 갖게 되었으며 이러한 외지인에 대한 인식은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를 통해 일부 교육되고 전승되었다.이후 제주도는 1970년대 한반도 근대화 국가사업의 과정에서 진행된 관광사업·관광개발을 통해 기존의 전통적 마을은 해체되었고 ‘환상의 섬, 제주’라는 상징적인 이미지를 내세우며 관광지로서 급속한 변화를 겪었다. 5·16 군사 정변을 통해 집권에 성공한 박정희 정부는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발전을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세웠다. 이에 각 지역은 근대화 과정에서 특정 산업에 따라 공간적으로 구분되었고 이 과정에서 이국적인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는 제주가 관광산업을 분업적으로 맡게 되었다. 당시 정부는 우선적으로 토지소유자와의 협의에 의해 토지매입을 추진하도록 지시했지만, 만일 협의가 이뤄지지 않을 때에는 강제 토지 수용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러한 국가 주도의 하향식 개발로 인해 제주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토지는 강제로 수용되어 관광 개발 지역의 하나의 구획으로 묶이면서 해당 지역의 제주 원주민은 제주 근대화 발전의 희생양이 되었다.2000년대 후반 이후 제주는 관광객의 급증과 새롭게 유입된 집단들과의 갈등과 공존의 문제를 겪고 있다. 중국 거대 자본 및 중국 관광객의 유입, 제주형 젠트리피케이션, 20대~30대 중심의 제주 이주 및 한달살이 열풍 등으로 대안적 삶의 터전으로의 부상 등이 제주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첫 번째, 제주는 제주특별자치도 특별법을 제정하여 중국 거대 자본 및 중국 단체, 개인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2010년 부동산투자이민제도를 시행하여 5억 원 이상 휴양콘도시설에 투자한 외국인에게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하며 투자 유치를 위해 힘쓰고 있다. 이 제도로 2018년 4월 영주권을 부여받은 외국인은 1,491명으로 이 중 중국인이 1,463명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제주 무사증 제도를 시행하여 기존의 관광목적 방문 비자 면제 112개국 외에 비자 면제가 되지 않는 국가에 대해서도 제주지역에 한정하여 비자를 면제해주고 있다. 이에 따라 제주는 외국인 관광객이 증가하였고, 특히 중국인 단체 관광객과 개별 관광객이 급증하였다. 하지만 중국인 이주민과 관광객 급증은 제주 무사증 제도 악용과 사회적 부작용을 발생시키면서 제주 내 중국인 공동체에 대한 반감을 심화시켰다.두 번째, 제주는 관광산업 개발 심화로 인한 ‘제주형 젠트리피케이션’을 겪으며 자본가 계층과 제주 원주민·소상공인 계층 간의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젠트리피케이션(둥지 내몰림; gentrification)은 도심 인근의 비개발지역 혹은 저개발지역이 활성화되면서 외부인과 돈이 유입되고 임대료 상승 등으로 원주민이 밀려나는 현상이다. 관광산업·관광개발 활성화로 제주로 중국인 관광객이 모여들고 자본가들이 투자하면서 해당 일대의 개발과 임대료와 집값의 상승으로 기존의 상권에 있던 원주민이 함께 공존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실제로 중국인 관광객의 급증은 '제주 속 작은 중국'이라 불렀던 '바오젠 거리'(현 ‘누웨마루 거리’)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바오젠 거리뿐만 아니라 해당 일대가 중국인들이 반드시 찾는 관광 명소로 떠오르면서 상가 임대료가 폭발적으로 상승하였고 기존의 소상공인들이 높은 임대료를 이기지 못해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다.세 번째, 제주 이주 및 한달살이 열풍으로 대안적 삶의 터전으로서 제주가 급부상하면서 기존의 주거지역의 관광지화가 심화되고 있다. 한국은행 제주본부가 2017년에 발표한 ‘제주 투어리스티피케이션 현상이 지역주민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급증한 관광객으로 인한 관광지화가 제주도민의 삶을 악화시켰다고 발표했다. 투어리스티피케이션(Touristification)은 관광지화(touristfy)와 지역개발에 따라 원주민이 내쫓기는 현상을 의미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합성어로, 관광객이 많이 몰려와 지역주민들의 삶의 터전이 관광지가 되고 이에 따라 기존 지역주민들의 주거환경이 위협받는 현상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제주도민이 살고 있던 기존의 동네가 관광지가 되면서 세탁소나 정육점, 과일 및 채소 가게, 철물점 등 제주도민을 위한 편의시설이 카페나 음식점으로 바뀌면서 생활이 불편함을 겪고 있다. 또 관광객들이 과도하게 몰리면서 발생하는 소음과 쓰레기, 주차 문제로 주민과 관광객이 충돌하거나 관광 정책을 둘러싸고 주민과 제주도정 간의 갈등도 발생하고 있다.
영화감상 레포트과 목동양미술사담당교수안**제 출 일2023.10.11전 공***과학 번202*****이 름이**영화 속 장면을 음양오행론의 오방색을 통해 분석하겠다.위진남북조 시대의 예술이론 중 육법에서는 ‘수류부채’를 제시하며 색채의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다루고 있다. 과거부터 색채 관련 내용이 예술이론 속에서 제시될 만큼, 중국 미술에서 색채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표현하거나 현실에 입각한 화가의 ‘예술적 상상’을 이루기 위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요소이다.영화 속에서 하나의 장면은 하나의 그림이다. 그림 하나하나가 모두 모여 영화가 이루어지듯 영화산업에서도 색채는 감독의 창작 의도를 전달하고 표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 ‘영웅: 천하의 시작’을 만든 장이머우 감독 역시 색채 미학을 영화 속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사용한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 ‘영웅’ 속 장면을 예술이론에 영향을 미친 요인 중 하나인 음양오행론의 오방색을 통해 이해해 보려 한다.음양오행론은 전국시대 제나라 추연이 음양설과 오행설을 체계적으로 결합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음양오양론은 어둠을 뜻하는 ‘음’과 밝음을 뜻하는 ‘양’인 두 개의 상호보완적 힘이 서로 작용하여 우주를 발생시키고 변화, 소멸시킨다고 보는 이론이다. 음양오행론에서 오방색은 이론에 따른 방위와 상징을 나타낸다. 청색은 동쪽과 나무를, 백색은 서쪽과 금, 적색은 남쪽과 불, 흑색은 북쪽과 물, 황색은 중앙과 흙을 의미한다. 청색, 백색, 적색, 흑색, 황색이 오방색에 해당한다.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영화 속 장면 하나하나가 색채 이미지의 향연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대부분의 장면 속에서 사용되는 오방색은 영화 전체를 화려하게 만들고 오방색을 어떻게 사용했나에 따라 등장인물들의 협력과 갈등 관계를 볼 수 있다. 오방색 상호 간의 교류와 갈등은 영화 속 흐름과 함께 변화하고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크게 2개의 장면을 살펴보며 오방색 간의 관계가 영화의 이야기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분석해 보겠다.첫 번째 장면은 무명이 진시황 암살 의도를 숨기고 진시황과 대면하는 장면이다. 무명은 거짓 사실로 진시황에게 3명의 자객을 죽인 과정을 설명하지만 이후 왕의 암살을 포기한다. 여기서 진시황은 흑색의 의복을 입고 있으며 진나라의 신하와 군대, 궁정 역시 흑색으로 표현된다. 이때 무명은 진시황을 암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흑색이 아닌 다른 오방색의 의복을 입어 두 인물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해야 한다. 하지만 무명 역시 흑색의 의복을 입고 진시황을 마주한다. 이는 파검의 이야기를 들은 후의 무명의 심리상태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시황을 살해하기 위해 궁정으로 가야 하는 무명에게 파검은 자신이 진시황을 죽이지 못한 이유를 이야기한다. 파검과의 대화 이후 궁정으로 가는 무명은 파검의 이야기로 인해 여정을 보내는 동안 암살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계속 갈등했을 것이다. 하지만 궁정에 도착할수록 그는 진시황을 암살하지 않는 것이 대의명분에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왕과의 대화가 끝난 시점에서는 그 생각을 굳히고 진시황을 살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진나라의 색채와 무명의 색채가 흑색으로 동일한 것은 진시황의 역할을 이해하고 대의를 따르려는 무명이 진시황의 암살을 포기하게 되는 결말을 내포한다.두 번째로 비설과 파검이 결투를 하는 과정에서 비설의 검이 파검에게 큰 상처를 입히는 장면을 오방색을 통해 분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파검의 이야기로 인해 무명의 암살계획이 실패하자 비설은 파검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이 장면 속에서 비설과 파검 모두 백색의 의복을 입고 있고 결투하고 있다. 두 인물이 같은 오방색의 옷을 입지만 서로 갈등하는 모습은 서로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으로 인해 발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속 비설과 파검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지만 파검이 진시황을 살해하지 않으면서 둘의 사이는 멀어지게 된다. 진시황을 살해하고자 하는 비설은 화의 감정, 즉 적색의 감정을 가지면서 동시에 파검을 사랑하고 파검과 함께 삶의 길을 가고 싶은, 즉 파검과 같은 색의 감정 총 두 가지의 감정을 가진다. 파검은 진시황을 살해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적색의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진행 시간 동안 파검과 비설의 의복 색이 항상 같다는 점과 영화 내용을 비추어 보면 파검 역시 비설을 사랑한다. 이에 그도 그녀와 같은 색의 감정을 가진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비설과 파검이 결투를 하는 두 번째 장면을 다시 살펴본다면 비설과 파검 모두 백색의 의복을 입은 것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반영한 것이지만 비설의 적색 감정으로 인해 서로 갈등하고 전투를 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더불어 음양오행론의 오행상극설에서 화(적색)는 금(백색)을 이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내용을 더해서 두 번째 장면을 본다면 비설의 적색 감정으로 인해 백색의 의복을 입은 파검이 죽음을 맞이하는 내용도 파악할 수 있다. 두 번째 장면 후 비설 역시 파검의 몸을 안으며 죽는데, 이 장면에서도 두 인물은 같은 백색의 의복을 입고 죽음을 맞이한다. 서로 사랑하며 죽음까지 함께 하는 모습이 색채의 관계를 통해 더욱 애틋하게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이 영화의 감독인 장이머우는 인터뷰에서 중국 전통 색채 이론과 회화 이론이 창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전했다. 감독의 창작에 영향을 준 중국 전통 색채 이론을 통해 영화 속 장면과 인물 간의 관계를 분석하며 감독이 영화에서 전하고자 했던 내용을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인물 사이의 관계를 파악해 보며 과거부터 대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중국의 가치관을 알 수 있었고 장면 속에서 나타나는 구성을 통해 중국 미술에서 중요하게 사용하는 색채와 미술이론을 확인할 수 있었다.
Research Paper과 목Principle of Economics2담당교수한**교수님제 출 일2021.12.18전 공**과학 번202*****이 름이**? Contents1. 서론1.1. 연구 배경1.2. 연구 목적2. 본론2.1. 재난지원금이란2.2. 재난지원금 보편지급의 긍정적 측면2.2.1 소비촉진과 소비지출 수준의 회복2.2.1.1 소상공인의 경제적 피해의 근본적 원인 해결2.2.1.2 국가 정책의 방향성과 일치2.2.2 취약계층의 경제적 보호2.2.3 재난지원금의 본래 목적에 부합3. 결론1. 서론1.1 연구 배경코로나19(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는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생하였다. 이후 2020년 1월 대한민국에 첫 확진자가 발생하여 2021년 12월 10일 기준으로 누적 확진자 50만 명을 돌파하였다. 코로나19는 세계적으로 인명피해를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피해 또한 발생시켰다. 이 경제적 피해를 줄이기 위해 많은 국가들이 노력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재난지원금을 통해 국민의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피해를 줄이려 노력하고 있다. 현재 재난지원금은 총 5차까지 지급되었으며, 6차 재난지원금 지급의 세부 사항을 논의하고 있다.1.2 연구 목적지금까지 재난지원금 지급에 대해 많은 논의와 갈등이 있었다. 3차 재난지원금 지급 당시 지급 대상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기사에 따르면, 전 국민에게 지급했던 1차 재난지원금과 선별적으로 지급했던 2차 재난지원금의 효과를 분석한 결과 1차 재난지원금의 경제적 효과가 더 높게 나왔다. 그러나 정부는 3차 재난지원금을 선별지급으로 선정하였고, 많은 이들이 이에 대해 통계 수치를 무시한 정책이라고 비판하였다. 5차 재난지원금 역시 이와 비슷한 비판을 받았으며 여전히 재난지원금의 지급대상에 대한 많은 갈등이 있다.본 연구는 위와 같은 재난지원금에 대한 소모적 논쟁을 줄이고 국민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재난지원금을 제공하고자 한다. 앞으로의 재난지원금은 지난 재난지원금이 경제에 미쳤던 효과와 그 효과를 경험한 국민의 의견 등을 적절히 고려해 지급 대상을 정한 후 지급되어야 할 것이다.2. 본론2.1. 재난지원금이란재난지원금이란 자연현상으로 인해 사망하거나 생계 수단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재난 복구 및 구호를 위해 지원하는 돈이다. 2020년 4월 정부는 코로나19에 대한 국민의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재난지원금은 총 5차까지 지급되었으며, 현재 정부에서 6차 재난지원금 지급의 세부 사항을 논의 중이다.2.2. 재난지원금 보편지급의 긍정적 측면2.2.1 소비촉진과 소비지출 수준의 회복재난지원금의 지급 대상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재난지원금에 따른 효과를 보았을 때, 앞으로의 재난지원금은 선별지급이 아닌 보편지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근거로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첫 째, 재난지원금의 보편지급은 소비를 촉진하고 소비지출을 코로나19 이전의 상황 수준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보편지급되었던 1차 재난지원금에 관련된 논문을 확인해보면 재난지원금의 보편지급에 대한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가로: 날짜, 세로: 카드 매출액(단위: 억원))해당 그래프는 카드지출액 일별 자료를 이용하여 2020년 상반기 코로나19와 1차 긴급재난지원금이 소비지출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것이다. 그래프를 보면 코로나가 확산한 2기(2월 19일~4월 17일)에는 2020년 카드지출액이 2019년에 비해 15.4% 정도 감소하였다. 이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소비지출이 감소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5월 중순부터 지급된 긴급재난지원금의 영향으로 2기 이후의 소비지출은 10.4% 정도 증가하였다. 또한, 2020년 2분기 국민계정 가계소비지출액과 본 연구에서 설정한 재난지원금의 효과 기간을 토대로 재난지원금의 사용현황을 계산해 봤을 때, 약 17.6조 원의 긴급재난지원금 약 30%는 재난지원금이 없었더라도 했을 소비지출을 대체하였고, 약 70%는 새로운 소비를 창출하였다. 이에 따라 6월부터는 소비지출이 2019년 수준을 회복하였다.(가로:소비지출 증가율(%), 세로: 업종)본 연구의 또 다른 그래프는 1차 재난지원금 지급 당시 증가한 소비지출의 세부 사항을 나타낸 자료이다. 그래프를 보면, 거리두기가 완화된 후, 유아교육, 숙박, 유흥 등의 업종에서 소비지출이 많이 증가하였다. 또한, 1차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이후 거리두기 완화하였을 때보다 더 많은 업종에서 소비지출이 증가하였고 그 증가 폭도 더욱 상승하였다 재난지원금 사용가능업종 기준으로 보았을 때, 전체 투입예산 대비 26.2~36.1%의 매출 증대 효과 나타났다.코로나19가 품목에 따라 소비에 미친 영향은 품목에 따라 차이가 매우 컸으나, 재난지원금이 소비에 미치는 효과는 품목에 따라 10~20% 수준에서 고르게 나타났다.보편지급을 했던 1차 재난지원금의 결과를 통해 재난지원금의 보편지급은 소비를 촉진시키고 소비지출을 코로나19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2.2.1.1 소상공인의 경제적 피해의 근본적 원인 해결재난지원금의 보편지급이 소비를 촉진하고 소비지출을 코로나19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면, 이는 소상공인의 경제적 피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소상공인의 상황이 어려운 근본적 원인은 그들 업종의 매출 하락이다.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단지 금전적 보상을 지속할 경우, 소상공인의 어려움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매출이 증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소상공인은 더 이상 경제적 손실을 입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소비를 하고 소비지출 수준을 회복시킬 수 있는 재난지원금의 보편지급을 시행하는 것이 소상공인의 피해를 해결할 장기적 해결책이다.2.2.1.2 국가 정책의 방향성과 일치정부는 2021년 11월 1일부터 코로나19 방역체계를 단계적 일상회복인 ‘위드(with)코로나’로 전환하였다. 다중이용시설에 대한 운영시간 제한을 상당 부분 해제하는 등 거리두기 정책을 점차 완화하는 것이다.위드코로나 이전에는 코로나가 심해질수록 그만큼 방역체계를 강화하였다. 그로 인해 소상공인과 오프라인 매장은 직접적인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정부가 이를 보상하기 위해 2, 3차 재난지원금과 같이 재난지원금을 선별적으로 지급하였다. 그러나 위드코로나로 접어들게 되면 거리두기는 점차 완화되어 경제가 활성화될 것이다. 2021년 11월 기사들에 따르면 위드코로나 시행 이후의 첫 주 동안 제주공항을 찾은 인파는 60만 명을 돌파하였고, 외식 수요가 증가하여 배달앱 이용자가 7.3% 감소하였다.이처럼 위드코로나가 시행될수록 소상공인과 오프라인 매장의 매출 피해는 점차 줄어들기 때문에, 앞으로의 재난지원금은 특정 집단의 피해를 보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의 경제가 코로나19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2.2.2 취약계층의 경제적 보호재난지원금의 보편지급을 시행한다면 취약계층의 경제적 보호 또한 이루어질 것이다.자료: 통계청, 가계동향조사 원자료 (가로: 분위별, 세로: 변화율(단위: %))이 그래프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가구 소득과 지출의 변화를 소득분위별로 조사한 것이다. 그래프를 보면 코로나19 확산 시기에서 가구 소득의 감소는 모든 소득분위에서 관측되었다. 그러나 저소득 가구는 근로소득이, 고소득 가구는 사업소득이 더 많이 감소하였는데, 이는 근로소득만으로 살아가는 저소득 가구는 코로나19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이 상 대적으로 증가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분위 가구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구는 소득 감소보다 지출의 감소가 더 크게 나타났지만, 필수재 지출 비중이 높은 1분위 가구는 소득에 비해 지출 감소율이 낮았다. 이는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저소득 가구가 더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소득분위별 상황은 코로나19의 완화 및 1차 재난지원금 지급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변화하였다.자료: 통계청, 가계동향조사 원자료 (가로:소비지출 증가율(%), 세로: 업종)코로나19 완화 및 1차 재난지원금으로 인한 소득분위별 가구 소득과 지출의 변화를 나타낸 그래프를 보면, 코로나19가 완화되고 1차 재난지원금이 지급된 시기에는 모든 소득분위에서 가구 소득과 지출이 증가하였다. 특히 저소득 가구일수록 소득 증가율이 높은 경향을 보였는데, 이는 보편지급된 1차 재난지원금이 상대적으로 저소득 가구에 더 큰 도움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따라서 재난지원금의 보편지급은 소득에 비해 지출감소가 작았던 저소득층을 위한 경제적 보호가 가능하도록 한다.2.2.3 재난지원금의 본래 목적에 부합재난지원금은 자연현상으로 인해 사망하거나 생계 수단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재난 복구 및 구호를 위해 지원하는 돈이다. 이를 보았을 때, 재난지원금의 목적은 자연재해로 피해 본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돈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국민이 받은 피해는 ‘경제적’ 피해와 ‘심리적’ 피해이다. 거리두기 지침으로 인해 주로 소상공인과 오프라인 매장은 경제적 피해를 보았고, 재난 상황에서의 불안과 거리두기 지침으로 인한 우울감으로 대부분의 국민이 심리적 피해를 입었다. 2021년 10월의 한 기사 속 한국사회여론연구소에서 실시한 ‘국민지원금 국민인식조사’ 결과를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