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주인공인 ‘쿠난디’가 이탈리아 모집책을 따라 프랑스로 향하고, 그곳에서 여러 사람의 손에 넘겨지게 될 때까지만 해도 프랑스, 즉 백인은 악, 아프리카, 흑인은 선이라는 구조가 보였다. 하지만 쿠난디를 인간다운 대우를 해주는 백인, 쿠난디를 이용하는 흑인의 등장을 보며 그 구조는 깨져버렸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와 같은 선과 악의 개념을 구축하려다가 해체하는 방식을 보였을까?나는 기존의 선과 악의 구조를 해체한 이유를 해체를 통해 얻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찾아보았다. 첫째는, 인간을 규정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유럽인은 모두 악, 아프리카인은 모두 선으로 보는 구조는 애초부터 옳지 않다. 소설에서 쿠난디에게 악을 행하는 아프리카인, 선을 행하는 유럽인이 등장하듯이 실제로도 지배관계에 서고 경제적 이득을 얻고 싶어하는 아프리카인, 지배관계를 원하지 않는 유럽인이 있을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관계의 양상을 보이는 집단을 우리는 ‘선과 악’이라는 기준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이는 인종이라는 잣대에서 벗어나 선과 악의 범위를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두 번째는, 앞서 말한 인간의 규정 범위 확장과 함께 개인의 성장 가능성의 확대이다. 소설에서 아프리카인인 쿠난디가 프랑스의 곳곳을 떠돌며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정된 공간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랑하는 것과, 선과 악의 해체로 자신이 속한 집단이 모호해진 것이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함으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과정은 쿠난디에게 가능성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구절을 통해 정체성 모호가 어떻게 긍정적인 결말로 이어지는지와 연관이 있다.“그 누구도 내가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있기를 원하지 않으니 나는 물 위를 걷는 법을 배우리라”그전까지 쿠난디는 땅에서의 생존만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이용하는 이들, 즉 자신이 땅 위에 발을 붙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 이들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하였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인 것인 듯 절실했다. 나는 쿠난디가 자신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정체성, 모습에 옭아매려고 했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쿠난디의 주체성과도 관련이 있다. 그전까지는 쿠난디가 주체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생존을 위해서였지만 마치 가축처럼 다른 사람들의 의지에 따라 이리저리 넘겨지는 모습, 자신의 이름과 나이까지 바뀜을 당하는 모습에서 주체성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앞서 말한 구절은 쿠난디가 정체성의 모호로 인한 자기 확장을 통해 스스로 가능성을 넓혔고, 주체적인 의지가 표출되었다고 생각한다.선과 악의 해체를 제외하고 내가 책을 읽으면서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사람들의 ‘도움’이었다. 쿠난디는 프랑스로 온 후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는다. 그 도움은 절망적인 상황의 연속에서 조금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적어도, 굶어 죽거나 불법체류자로 경찰에 잡히지는 않게 해주었다. 인종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작가의 선과 악의 해체로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대사회는 어떨까?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 ‘위험한 사람’을 피하라고 교육받았다. 그 위험한 사람의 범주에는 외국인 이민자가 포함되었다. 나의 머릿속 언저리에 이들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이들이라는 생각이 있다. 나는 그것이 틀린 것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우리의 도움이 얼마나 절실한지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알게 되었다고 해서 내가 그들에게 가지는 공포, 혐오, 피해의식이 눈 씻듯이 사라질 수 있을까? 내가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용기를 하루아침에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본능적 혐오가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 박민규]현대인들의 나약함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사정을 안고 삶의 안전선, 즉 지하철이라는 비좁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푸시맨과 같이 그 경계선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자신을 회의하고 있는 것인지, 그 지하철, 즉 자본주의 사화에서 탈출이든지 도망이든지 그곳을 벗어나려 하는지에 대해 한번쯤은 현세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주인공 승일이는 코치 형의 권유로 지하철에서 푸시맨 알바를 하게된다. 승일이는 푸시맨을 하며 자신의 삶을 현실적으로 돌이켜본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그 후로 아버지는 감쪽같이 눈앞에서 사라지게 된다. 얼마나 지났을까, 승일이는 지하철에서 기린을 보게 되고 그 기린이 아버지임을 확신하지만, 그 기린은 자신을 아버지가 아닌 기린이라는 존재로 표현을 하며 소설이 마무리된다.위에서 말했듯이 나는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세 종류의 사람들로 구분 지었다. 승객들은 모두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아둥바둥하는 존재, 아버지는 그곳을 벗어나는 존재, 또 코치 형은 현실을 벗어나려 시도하지만 결국 현실에 안주함을 선택한 존재로 여겼다. 특히 나는 이 중에 현실을 벗어난 이들, 아버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기로 하였다.아버지 역시 자본주의 시대에 순응을 하며 자신의 산수에 맞게 가장으로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갑작스러운 사고에 대한 방안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인지, 혹은 나약해서 인지 결국 아버지가 아닌 기린의 존재로 살아감을 선택한다. 어떤 이들은 아버지를 자본주의 시대에서 탈출하여 비로소 자신의 이성의 존재에 다달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를 무거운 현실의 벽, 혹은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도피한 약한 존재들로 보였다. 그래서인지 기린이 한없이 의지를 가진 강인한 동물이 아닌 안타까운 초식동물로 보인 까닭도 이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이와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아버지라는 역할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들 중 몇몇은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전혀 강하지 않고, 어쩌면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게 숨기고 있는 내면을 헤아리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현대의 사회인들의 짐의 무게에 대해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서양 고전 철학 Essay플라톤의 익숙해짐과 교육, 그리고 현대사회의 평등, (플라톤, 박종현 옮김, 서광사, 2005)를 읽고***********학과이**플라톤의 에서 소크라테스는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 ‘좋음의 이데아’에 이르는 길을 설명한다. 그 중 ‘동굴의 비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는 교육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성향 차이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지하에 동굴이 있고 그 동굴의 입구에는 불이 있다. 그 안에는 어릴 때부터 손발이 묶여 살아온 죄수들이 있다. 그들은 묶여 있으므로 머리를 돌릴 수가 없다. 그들 뒤쪽의 동굴 입구에는 횃불이 있고 이 횃불과 죄수 사이에 담이 하나 세워져 있다. 조 죄수들은 자기들의 맞은편 동굴 벽에 비치는 그림자들이 실물이라고 생각한다. 그중에 한 사람이 풀려난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그림자로만 보아온 실물들을 보아도 눈이 부셔서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익숙해짐’의 시간 끝에 그는 실물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 후 마지막으로 해를 볼 것이다. 태양이 모든 것의 근본임을 알게 될 것이다.우리는 여기에서 각각의 내용이 상징하는 바를 잘 알아야 한다. 동굴 감옥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을 의미한다. 감옥의 불빛은 해의 힘이고, 한 죄수가 위로 올라가서 높은 곳에 있는 것들을 구경한 것은 ‘지성으로 알 수 있는 영역’을 향해 올라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식되는 영역에서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것이 바로 ‘좋음’의 이데아이다. ‘해’가 바로 그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 ‘좋음’의 이데아가 진리와 지성의 근원임을 알게 된다.“그러기에 그가 높은 곳의 것들을 보게 되려면 익숙해짐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하네. 처음에는 그림자들을 제일 쉽게 보게 될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물속에 비친 사람들이나 또는 다른 것들 것 상들을 보게 될 것이며, 실물들은 그런 뒤에야 보게 될 걸세. 또한 이것들에서 더 나아가, 하늘에 있는 것들과 하늘 자체를 밤에 별빛과 달빛을 봄으로써 더 쉽게 관찰하게 될 걸게. 낮에 해와 햇빛을 봄으로써 그것들을 관찰하는 것보다도 말일세.”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동굴을 벗어나 마침내 보게 되는 것을 ‘좋음의 이데아’ 라고 설명한다. 위 인용절은 그 설명의 중간 과정에 해당한다. 동굴에서 벗어나 눈이 부셔 아무것도 못 보는 상황에서 익숙해지기 시작한다면 그림자를 보고, 다른 것들의 상을 보고, 마지막으로 해 그 자체, 바로 좋음의 이데아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익숙해짐’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좋음의 이데아에 닿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 익숙해짐은 무엇을 무엇이며 왜 필요하다고 보는 것일까?나는 이것을 플라톤이 말한 ‘교육’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하였다.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를 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나라에서 교육과 훈련을 시켜야 하며 예비교육에서 교과목을 제시하기도 한다. 예비 과정을 마치고 나면 변증법을 집중적으로 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근거를 조금 더 뒷받침하기 위해 플라톤이 말하는 교육에 대해 알아보자. 예비 과정을 마치고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교육을 받고 시험을 거치며 최종 단계로 인도된다. 그들이 ‘좋음’의 이데아를 보도록 하고 이를 본 다음에는 이것을 본보기로 삼아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다. 그들은 철학을 주요 과제로 하며 통치자가 되어 국정을 보살핀다. 그리고 자신들과 같은 또 다른 사람들을 교육해서 국가의 수호자로 양성한다. 플라톤은 이상 국가 실현을 위한 철인 통치자를 양성하기 위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교육방법을 주장하였다. 플라톤은 통치자의 자질을 이렇게 말한다. 민첩하고 활기차고 당당한 성향과 조용하고 안정되고 얌전한 성향을 모두 갖춰야 한다. 애국심을 심사하는 시험도 거쳐야 하며 다른 학문도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만 ‘가장 최고의 학문’을 감당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바로 이 가장 최고의 학문은 올바름보다 더 높은 단계의 배움인 ‘좋음의 이데아’이다.여기서 우리는 동굴의 비유와 철인 통치자를 양성하는 과정에서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수호자들은 여러 가지 과정을 통해 동굴 밖, ‘지성으로 알 수 있는 영역’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후 해, ‘좋음의 이데아’에 다다르는 것으로 철인 통치자의 자질이 생겨난다.이야기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우리는 동굴의 비유로 ‘좋음의 이데아’가 무엇인지와 다다르는 과정에 대해 상징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 후 에서 플라톤이 주장하는 교육에 대해 살펴보았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교육과정을 통해서 철인 통치자가 생겨난다. 철인 통치자는 다른 수호자들과 달리 올바름의 다음 단계인 좋음의 이데아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다. 동굴의 비유, 철인 통치자의 양성 모두 좋음의 이데아에 다다르며 이야기가 끝이 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굴의 비유는 즉 통치자 양성의 과정이라는 사실에 도달할 수 있다. 동굴의 비유에서 좋음의 이데아에 도달하게 되는 중간단계인 ‘익숙해짐’은 결국 철인 통치자 양성의 교육과정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플라톤은 라는 작품을 통해 좋음의 이데아를 아는 철인 통치자와 그 양성에 있어서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셈이 된다.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자. 우리가 이제껏 이야기했던 익숙해짐, 즉 교육의 현실 적용 가능성이다. 과연 플라톤이 주장하는 교육은 현재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적용할 수 있을까?아까 등장했던 교육의 가장 중요한 단계인 ‘변증법’으로 시작해보자. 변증법은 원래 대화술 또는 문답법이라는 뜻이다. 상대방의 입장에 어떤 모순이 있는가를 논증함으로써 자기 입장의 올바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같은 문답법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전개되었고, 그것을 다시 플라톤이 이어받았다. 이러한 변증법은 정신적으로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젊은이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지조가 없거나 의지가 약한 사람은 변증법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정한 나이가 된 사람 중에 선발된 이들에게만 변증법 교육이 시행된다. 그 후 시험을 거치고 관직을 맡기도 한다. 그 후 좋음의 이데아를 보도록 하게 되고 철인 통치자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때의 통치자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자질만 있다면 중요하지 않았다.이러한 국가와 제도를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은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 묘안으로 국가가 국민의 교육 전체를 관리하는 것이다. 3단계로 나누어 국가가 엄격하게 통제하고 지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아테네의 교육은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중등과 고등 교육도 사적으로 비형식적인 방법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플라톤은 이러한 교육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을 주장하였다. 완전한 공교육 체제를 말한 것이다. 모든 아동이 같은 시기에,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것이다.플라톤의 교육은 나에게 있어 오직 철인 통치자 양성을 위한 교육이지만 그 과정에서는 ‘평등’을 살펴볼 수 있다고 보며 이는 우리 현대사회에 적용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본다.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통치자의 ‘성별’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 근거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말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플라톤은 무려 2500년 전에 현대사회의 능력과 성에 대한 개념에 접근한 것이다. 아직 현대사회에서도 국가를 경영함에 있어 여자만 할 수 있거나, 남자만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 뿌리 잡혀 있다. 하지만 플라톤은 여러 가지 성향이 양쪽 ‘성’에 비슷하게 흩어져 있어서 모든 일에 남자와 여자 모두가 관여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이 개념은 현대 사회에서도 교육을 하고 통치자를 양성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성이라는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능력과 자질만을 따져 통치자를 색출하는 것이다.그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공교육’의 중요성이다. 당시 아테네의 교육은 사교육을 중심이 되고 있다. 현대사회 역시 사교육에서 공교육의 흐름으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모든 아이의 출발선은 같지 않다. 가정의 영향 때문이다. 그렇기에 플라톤은 다소 지나치고 엄격하지만 양육과 교육의 공동화를 주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 사회에 적용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아이들의 출발선이 같아야 하고 그 시작으로 능력과 자질이 뛰어난 아이를 집중적으로 양성하는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플라톤의 교육은 현대사회에 적용하기에는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시작의 ‘평등’은 본받아야 한다고 본다. 평등을 향한 발걸음으로 플라톤의 사상을 뒷받침하여 성 평등과 공교육의 중요성이 대두하여야 한다. 이를 시작으로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의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 아니다학과 : **학과학번 : *********이름 : 이**논제 : 페미니즘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논지 : 페미니즘은 진정한 양성평등의 실현에만 집중해야 한다.논거 : 자칫 잘못하다가 양성의 대립과 충돌을 부추길 가능성이 있으므로.목차 (개요)서론남녀 갈등의 심화, 이수역 사건을 비롯한 현대 우리나라의 심각한 상황본론1. ‘페미니즘’과 여성차별1) 페미니즘의 개념과 역사2) 여성차별3) 현대 페미니즘2. 래디컬 페미니즘과 한국의 페미니즘1) 래디컬 페미니즘의 등장과 필요성2) 한국의 페미니즘3. 페미니즘의 바람직한 역할1) 갈등 해소를 위한 노력2) 제도 변화를 위한 노력결론수정과 발전이 필요한 한국의 페미니즘서론얼마 전, 여성 2명이 남성3명에게 폭행을 당했다며 억울함을 토로하는 청원글이 올라왔다. 남성 일행에게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메갈리아’, ‘워마드’라며 혐오발언을 듣고 일방적인 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은 이에 분개하였고, 남성 일행의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하지만 진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남성 일행의 주장과 목격자들의 증언, CCTV 확인을 통해 진실이 드러났다. 여성 일행이 주점에서 먼저 소란을 피웠고, 남성 일행에게 욕설을 한 것이다. 이 사건은 더 이상 단순한 쌍방 폭행 사건이 아니게 되었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혐오를 넘어 갈등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사건이었다.이 사건 이후로 여성 일행을 포함한 페미니스트들의 요즘의 태도에 대해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여성 일행이 과연 진정한 페미니스트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페미니즘이라는 명목 하에 남성 혐오를 일삼는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은 과연 페미니즘이 맞을까?본론1. ‘페미니즘’과 여성차별1) 페미니즘의 개념과 역사‘페미니즘’의 기본적 전제는 ‘섹스(sex)’와 ‘젠더(gender)’의 구분하에있다.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구분을 생물학적 결과로 보는 ‘섹스(sex)’가 아닌, 사회적, 문화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인 ‘젠더(gender)’로 간주하는 것이다.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서 페미니즘은 탄생하였다. 이 시기에는 혁명에 대한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하였던 시기였다. 여성들은 자신들을 혁명에 참가하는 한 명의 독립적인 시민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여성들을 혁명에 참여한 동등한 동지로 인식하지 않고, 혁명을 남성들만의 산물이라고 보는 전통적인 시각이 공존하였다. 상반되는 두 개의 시각이 충동하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이 등장하였다.페미니즘의 목표를 3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먼저,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불평등한 남녀의 관계의 원인인 가부장제의 해체이다. 마지막으로, 여성들이 자신을 남성에게 종속되며 타자화된 존재가 아니고, 주체로 인식하도록 이끌어주기이다.2) 여성차별페미니즘의 목표형성의 기반이 된 불평등한 남녀의 전통적 관계는 무엇일까? 페미니즘 관점에서 역사 속의 여성 이미지를 확인해보았다. 대표적인 예로 신화 속의 여성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판도라’, 그녀의 출현은 인류의 불행이 시작된 시점을 상징한다. 또한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이브는 악의 근원을 상징하는 여성 이미지의 원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세를 기점으로 역사와 문학을 살펴보면 ‘권력을 지닌 여성’을 위험한 존재와 동일시하는 담론이 확산되었다. 또한, ‘순결’ 혹은 ‘정숙’의 미덕에 여성을 가두었다. 남성에 대한 순종을 이상적인 여성이 갖춰야 할 미덕으로 제시하며, 여성을 ‘순결한’ 여성과 ‘타락한’ 여성, 이렇게 두 분류로만 구분하였다. 이는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여성 차별의 한 부분이다.3) 현대 페미니즘1960년대에는 여성운동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계승했던 현대 페미니즘이 탄생하였다. 현대 페미니즘은 혁신을 시도하였는데, 이는 가부장제의 근본적 해체를 요구하는 것이다. 현대 페미니즘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부장제와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기위해 ‘분리주의’ 시도. 둘째, 억압의 대상인 여성들이 함께 수평적으로 연대하여 집단 투쟁을 전개하는 것. 셋째, 여성들이 스스로 자신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문제의 쇄신. 이와 같은 현대 페미니즘이 그 이전의 전통적 페미니즘과 다른 점은 가부장제 내 혁신에서 가부장제의 해체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대두되고 있는 래디컬 페미니즘은 이와 같은 현대 페미니즘과 이어진다. 그렇다면 래디컬 페미니즘은 무엇일까?2. 래디컬 페미니즘과 한국의 페미니즘1) 래디컬 페미니즘의 등장과 필요성래디컬 페미니즘(radical feminism), 즉 급진 페미니즘은 남성주의 제거를 목표로 하는 여성주의 사상이다. 여성 억압의 근본적인 원인을 가부장제로 바라본다. 가부장제의 해체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현대 페미니즘을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래디컬 페미니즘은 급진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사회에 혼란을 가져다준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있다.하지만 이들은 ‘약한’ 이들이 행하는 ‘온건한’ 방법은 효과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여성과 남성의 문제는 권력을 가진 이와 아닌 이의 관계의 문제이다. 기득권층, 즉 남성은 문제에 대한 자각이 어렵다. 역사적 사건들을 예로 들자면, 시민 혁명과 흑인 인권 운동 등이 있다. 이 두 사건 모두 그 과정에서 급진적인 전략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온건한 방법으로는 사회가 변화하지 않거나 그 속도가 매우 느리기 때문이다. 사회가 변화하는 과정이 시끄럽지 않을 수는 없다. 분명히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며 소란스러울 것이고, 또한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리고 적대적인 사람들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래디컬 페미니즘의 대표적인 필요성은 여성들의 감정적 결속으로 여성 혐오와 관계된 젠더 관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음에 있다. 1이 변화하기 전의 사회라고 한다면,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개혁은 10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0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인해 사회는 5로 변화한다. 래디컬 페미니즘이 있었기에 여성과 남성들 모두 여성 억압과 더불어 성 평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2) 한국의 페미니즘대다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러한 래디컬 페미니즘은 ‘메갈리아’와 ‘워마드’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만큼 ‘메갈리아’와 ‘워마드’는 래디컬 페미니즘의 대표적인 한 예로 볼 수 있다. 홍콩에서 메르스 증상을 보인 한국인 여성 2명이 격리 조치를 거부했다는 뉴스가 전해졌을 때 디시인사이드라는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의 메르스 갤러리에서 ‘김치녀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의 여성 혐오성 글이 등장했다. 여성 사용자들은 그러한 글에 대한 대응으로 주체만 바꾸어 같은 방식을 취하였다. 이에 메르스 갤러리에서는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메갈리아’는 탄생하였다. 메갈리아(Megalia)는 메르스와 미러링의 대표 작품인 ‘게르 브라텐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1977)의 이갈리아의 합성어이다. 메갈리아는 여성 혐오에 대해 미러링 전략으로 남성 혐오를 하는 인터넷 여성 커뮤니티 사이트이다.워마드는 메갈리아의 분열 이후 형성된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하는 남성 혐오 사이트이다. Woman(여성)과 Nomad(유목민)을 합성한 말로 알려져 있다. 워마드가 메갈리아와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메갈리아는 여성 혐오에 대한 대응으로 ‘미러링’이라는 전략을 세웠지만, 워마드는 처음부터 자신들을 극단적인 남성 혐오이며 여성 우월주의라고 칭하였다. 두 번째로,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의 차별을 반대하였던 메갈리아와는 달리 워마드는 이들을 배척하는 태도를 보였다. 2015년 12월 전후에 발생한 게이 비하 사건 이후에 게이를 비하하고 또한 아웃팅을 막은 메갈리아 운영진에 반발한 회원들이 메갈리아에서 이탈하여 독립한 사이트였기 때문이다. 즉, 워마드는 메갈리아에서 파생된 좀 더 극단적이고 폐쇄적인 사이트이다.2016년, 워마드에서는 "커피에 자동차 부동액을 타 남성들에게 먹였다." "저수지에 밀쳐 죽였다." "남자 아기를 낙태했다." 등의 남성을 살인했다는 글이 게시되었다. 또한, 2017년 11월 19일, 오스트레일리아에 거주하며, 워마드에서 활동하던 대한민국 국적 여성이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남자 어린이에게 수면제를 먹인 뒤 성폭행을 했다는 글과 동영상을 워마드에 게재하였고 검거되는 사건이 있었다. 앞서 말한 홍대 누드모델 몰카 사건과 더불어 각종 모욕과 혐오성 글이 올라왔었다.많은 사람은 이러한 워마드의 악행을 바라보며 페미니즘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워마드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이 래디컬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하는 메갈리아와 워마드는 그저 혐오를 정당화하는 집단일 뿐 역사적으로 현대 페미니즘을 계승한 래디컬 페미니즘이 아니다. 어쩌면 래디컬 페미니즘의 하나로 워마드를 말할 수 있겠지만, 래디컬 페미니즘이 워마드라고 생각하는 것은 집단매도의 문제점이다. 워마드는 래디컬 페미니즘과 달리 문제의 근원인 여성 혐오의 해결이 목적이 아닌, 혐오를 혐오로 맞서고, 남성에 대한 보복심리만을 가지고 약자를 괴롭히는 단체이다. 목적의 정당함이 폭력의 부당함을 인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워마드는 목적의 본질 또한 흐려졌다고 할 수 있다.3. 페미니즘의 바람직한 역할1) 갈등 해소를 위한 노력그렇다면 페미니즘의 바람직한 역할을 무엇일까?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녀 갈등을 해소하고 올바른 성 가치관을 가지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여성들만을 위한 사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페미니즘은 주류에 속하지 않은 남성들을 억압에서 구제해줄 수 있다. 여성 해방이 여성만의 해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성적 성차별 또한 해결될 수 있다. 즉, 여성 해방과 성 평등을 통해 남녀 모두 지금까지의 고정된 성 역할에서 벗어나 올바른 성 가치관을 가지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숲과 나무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채사장이**“기타를 치며 노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서너 개의 코드는 잡을 줄 알아야 한다. 대화 놀이도 예외일 수는 없다.”기타연주는 코드의 연속이다. 몇십 개의 코드를 하나하나 숙지한 후에 각 코드를 배열하고 연결해야만 노래 한 곡을 완성할 수 있다. 생뚱맞게 기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나에게 기타연주와 지적 대화의 형성이 매우 유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기타의 코드와 같은 이 책의 다섯 개의 주제는 연결되어 흐름이 있고, 그것을 앎으로써 노래 한 곡이 완성되듯 지적세계가 열리기 때문이다.이 작품은 현실 세계와 그 너머의 세계, 총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현실 세계에 해당하는 1권은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로 각 분야별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나는 이 책에서 숲에 해당하는 이야기와 나무에 대한 이야기, 총 느낀바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우선 숲, 즉 거시적 측면의 이야기를 먼저 시작하겠다.“이 책은 순서대로 읽을 것을 권한다. 이 책은 다양한 인문학 분야를 백화점의 상품 카탈로그처럼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인문학의 골격을 제시하기 위해 쓰였다.”서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서술되어 있다. 책을 읽기 전 나는 저 글을 보며 의문이 생겼다. 역사, 경제, 정치 등 다섯 가지 주제는 각각 분리되고, 독립되어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중등교육에서 저 다섯 가지 주제를 각각 분리된 과목으로 교육을 받는다. 고등교육인 대학에서도 역사학과, 경제학과와 같이 각 주제는 전공으로 나뉘며, 단독으로 존재하는 학문 체계로서 배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역사를 움직이는 핵심 개념은 생산수단과 공급과잉이다. 여기서 생산수단과 공급과잉은 공통점이 있는데, 두 개념 모두 경제적 개념이란 것이다. 즉 ‘역사’를 움직여온 핵심은 ‘경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여러 경제체제 중 우리에게 필요한 체제를 어떻게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는 ‘정치’분야를 통해 답할 수 있다. 이처럼 각 분야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전 주제의 원리를 다음 주제가 설명하기도 하고, 이전 주제의 물음을 다음 주제가 답해주기도 한다. 나는 특히 후자의 경우가 매우 놀라웠으며, 책 안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를 살아가면서 이를 숙지하고, 활용하여야 함을 느꼈다. 어떠한 문제를 만났을 때 그 안에서만 해결하려는 것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해결방법을 모색하거나, 생소한 분야를 탐구하여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두 번째로 미시적인 측면에서, 나에게 ‘나무’는 ‘경제’였다. 마지막 장을 읽고 책을 덮고서 머릿속에 가장 뚜렷하게 남았던 것은 경제 이야기였다. 하필 왜 경제일까? 나는 물음을 가지고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해보았고, 두 가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첫째로. ‘앎’이다. 현재 나는 아주대학교에서 ‘정치학개론’을 수강하고 있다. 그 수업에서 좋은 정치의 방향을 논하기에 알아야 하는 기본적 지식이라는 이유로 자본주의, 공산주의와 같은 개념들을 배웠다. 같은 개념이 경제 분야에서 등장해서 인지 매우 친숙하였고,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과 비교하며 더 깊고 폭넓은 이해가 가능하였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 즉 ‘앎’은 나에게 용이한 지식습득이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와는 반대로 두 번째 이유는 ‘무지’이다. 나는 이 책의 다섯 가지 분야 중 경제가 가장 생소한 분야였다. 다른 주제는 중등교육 교육과정에서 배웠거나, 실생활을 통해 익숙하였다. 하지만 경제는 나에게 틀도 잡혀있지 않은 어려운 주제였다. 이러한 무지는 나에게 지적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고, 더욱 텍스트를 꼼꼼히 읽고 노트에 정리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반되는 두 가지 이유로 인해 경제 분야는 전체 이야기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주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