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제1법칙-사랑하고 사유하라--시인 진은영의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을 바탕으로Ⅰ. 머리말‘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진은영 시인의 시, ?멜랑콜리아?(참고1)의 일부다. ‘나’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녹아버린다. 아스팔트에 떨어져버린 아이스크림은 더 이상 누구의 입속에도 들어갈 수 없다. 만일 내가 소태처럼 쓰다면 떨어져버린 아이스크림에 일말의 안도감이 함께했겠지만 ‘나’는 달콤하기에 혼자 녹아 사라져버리는 것은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그는 나를 모래사막에 그려놓고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기에 다시 지워주기도 한다. 나는 그에게 슬픈 존재다. 더불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자주 잊어버린다. 나와 그의 사이에는 소통이 부재한다. 진정한 자신은 서로에게 닿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나를 사랑하기에 배려한다. 그에게서 지워준다. 하지만 그는 그에게서 지워진 내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 그는 낙관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고 슬픔에도 나는 아이스크림이고 물고기이기 때문에 시는 아름다웠고 그가 낙관주의자기 때문에 진은영 시인의 시집은 펼쳐졌다. 낙관주의자인 그를 그려낸 시인이 궁금했다.진은영 시인은 1970년생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0년에 계간된 『문학과사회』 봄호에 시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외 3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과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2004),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2007) 등의 저서가 있다. 시인 최승자가 “드디어 나를 정말로 잇는 시인이 나왔다”고 말하기도 했다.본문에서 다룰 시집은 『우리는 매일매일』이라는 진은영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앞서 언급한 ?멜랑콜리아?가 수록되어있는 시집이기도 하다.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은 진은영 시인의이었다. 일상적이고 쉬운 시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시구나 시행은 쉽지 않았다. 처음 시를 훑을 때는 큰 인상을 받지 못했음에도 한 차례 두 차례 곱씹다보면 가슴에 선명히 자국이 남는 이유가 이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대체적으로 진은영 시인의 시에서는 ‘너’와 ‘나’의 관계성이 눈에 띈다. 시에서 화자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거나 듣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화자와 대상과의 관계는 인칭대명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직설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화자가 대상과의 기억을 되새기는 방법과 같이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매일매일』에서 나타난 진은영 시인의 시들은 보다 청자나 화자가 명확히 정해져 있어 1:1 형식으로 대화하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또한 적지 않은 시들에서 초록, 붉음, 하양 등 색채의 사용이 잦게 나타나며 감각적인 표현이 도드라졌고 그러한 표현이 시각적인 생동감을 부여함에도 전체적인 시의 분위기는 다소 우울하고 침잠된 역설적인 분위기였다. ?멜랑콜리아?의 분위기 역시 우울하다. 하지만 어둡지는 않다. 우울의 끝 맛은 오히려 달콤하고 그래서 아름답다. 시집의 매일매일은 지나치고 되돌아볼수록 아름다웠다. 이제 우리는 아름다움에 관해 사유하며 『우리는 매일매일』의 특별한 날들을 곱씹어보기로 한다.Ⅱ. 본론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을 규정짓는 기준은 과연 존재하는가. 나는 시집 속의 시들이 각기 다양한 상황과 주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공통된 아름다움을 느꼈다. 아름다움은 간결한 어휘들의 독특한 연결에서뿐만이 아니라 시에 내재된 다양한 상황들에서조차 폭넓은 범위에 걸쳐 나타났다. 나는 어째서 시로부터 아름다움을 느꼈을까.시집의 첫 장에 실려 있는 ?아름답다?(참고2)는 두 가지 방향의 해석을 내밀어온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시작된 시는 ‘죽은 여자 자라나는 머리카락 속에서 반짝이는 핀과 같고’와 같은 문장으로 ‘네 아름다움’을 비유한다. 죽은 여자의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일은 기적적인 일이면서도 의뭉스러운 일이다. 아름다움을 표현했다고 볼 수도 있다. 가정에는 실재에 관한 일말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 하지만 화자는 불가능한 현상만을 비유한다. 그로인해 결국 실재와 허구, 가능과 불가능이 충돌하며 모순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시신의 머리카락은 자라날 수 없다. 존재할리 없는 현상 속에서 반짝이는 핀은 거짓 속 상상 같다. 그 속에서 핀은 아무리 반짝인다 해도 결국에는 허구적인 것이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이라는 가정 속에 내재된 가능성, 실재와 존재할리 없는 현상 속의 핀에 내재된 불가능성, 허구는 이 짧은 문장 속에서 모순되며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뒤로 이어지는 시구들 역시 모두 같은 맥락 안에서 아름다움이 표현된다.‘한참 떨어지다/공중에 걸려있다’ 추락하고 있는 사람은 ?푸른 셔츠의 남자?(참고3)다. 나뭇가지-그녀-는 연약해 남자를 버텨내지 못한다. 남자와 여자에게 행복한 결말은 보이지 않는다. 함께해도 추락하고 함께하지 않아도 추락한다. 그저 같이 추락하느냐 각자 추락하느냐의 차이다. ‘추락의 투명하고 긴 허리를 애무하며’에서 알 수 있듯이 추락은 투명하다. 투명하기 때문에 잡히지 않고, 잡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애무는 속절없이 허우적거리는 손짓으로 남는다. ‘추락’의 ‘허리’는 길기 때문에 허우적대는 시간은 짧지 않다. 문득 ‘애무’라는 표현을 보았을 때 추락은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가 부러진 뒤에는 속절없는 사랑-추락-에 빠져 아픈지도 모르고 한없이 젖어들거나, 여전히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추락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만의 사랑에 빠지거나 함께해도 결국 우울뿐인 절망 혹은 그에 비견되는 부정적인 상황으로 떨어져 버린다. ‘풀려난 두 팔’은 서로에게 속박되지 않은 상태임을 말한다. ‘활짝 벌어진 옆구리의 상처’와 같이 둘의 관계는 상처를 입는 관계이지만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움에도 불구하고 둘은 여전히 사랑하며 추락한다. 필연적인 파멸을 알고 있음에도 그 속으로 온몸을 내던지는 열정이 아름답다.?소멸?(참고4)은 하루의 시작부터 무엇일까. 어째서 사람이 사라진 막다른 골목길 풍경만이 그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인가.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나는 한 번도 진실을 말한 적이 없다’고 한다. 화자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팔월의 나무에 자라는 녹색 종양은 ‘진실’일 수도 있고 ‘진실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자라나는 수많은 거짓, 불쾌함, 상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화자는 ‘죽음이 나를 감아 오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종양은 점차 증식해 나무를 죽이게 되고 ‘뱀처럼 기다란 죽음’역시 내 목을 졸라 질식시키고 만다. 그리고 결국 내 안의 세계는 ‘다리 부러진 피아노’처럼 기울어지게 된다.내 밖의 세계가 먼저 기울어지고 어둠이 찾아왔을 때 결국 ‘한 번도 진실을 말한 적이 없’는 화자는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흰 공책에 진실을 쓰려 한다. 흰 공책에 진실을 모두 적는 순간이 오면 밤은 끝나고 ‘소멸’은 찾아온다. 이 ‘소멸’은 ‘종양’과 ‘죽음’의 소멸, 하루의 소멸 그리고 ‘푸른색 칸막이’인 ‘하늘’의 소멸이 된다. 종양과 죽음, 하루, 하늘을 종결시킨 소멸은 새로운 시작의 재탄생을 낳는다. 오늘까지의 진실을 말하지 않던 하루는 끝이 나고 ‘좀 더 위쪽의 신비’가 모습을 드러내는 하루가 시작된다. 더 이상 종양과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노래’가 ‘사람들이 사라진 막다른 골목길 풍경’을 달고 ‘좀더 위쪽의 신비’로 날아갈 것이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신비’는 ‘진실’을 들고 나 자신의 ‘막다른 골목길’까지 들어가 마침내 모든 것을 소진하고 ‘소멸’해야만 마침내 날아갈 수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진실’을 말하는 행위 또한 마찬가지다. 이러한 과정은 우리가 얼마나 빈번히 거짓을 말하는지와 얼마나 어렵게 진실을 말하는지를 알 수 있다.진실을 말하기까지 우리는 너무나도 어렵고 두려운 과정을 거친다. 타인에게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 봐야한다. 자신의 밑바닥, 막다른 골목길까지 거짓을 파내어 치열하게 자신을 몰아붙인다. 마침 시는 아름답기 때문에 읽는 이의 마음을 성형해 구워낸다. ?아름답다?에서는 허구적인 표현에서 오는 허무와 간절함, 그리고 허구와 실재의 모순으로 비롯되는 공허함 속의 충실함이 느껴진다.?푸른 셔츠의 남자?에서는 추락으로 인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가장 먼저 고개를 든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남자를 지탱하고 있는 곧 부러질 나뭇가지-그녀-로 인해 심화된다. 하지만 두려운 만큼 한편으로는 편안함과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추락을 피하기 위해 고뇌하고 외면하며 당장의 고통을 느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추락하는 순간만큼은 온몸으로 허우적댈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고 편하다.?소멸?역시 ?푸른 셔츠의 남자?의 추락처럼 본능적인 두려움을 자아낸다. 하지만 ?소멸?에서의 두려움은 조금 다른 두려움이다. 필연적 파멸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긍정적 변화를 위한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두려움은 묘한 기대와 흥분을 수반한다. 두려움을 각오하며 진실이 씌어지는 밤을 맞이할 때는 사뭇 비장함마저 느껴지기도 하며 더불어 오랜 시간 기다려왔던 순간을 맞이하는 듯 환희로 뜨거워지기도 한다.이처럼 아름다움으로 인해 파생된 감정의 패러다임은 넓고 다양하다. 아름다움은 어떻게 이렇게도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또한 각기 다른 시적 상황에서 아름다움이 공통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어떻게 시들은 전부 아름다울 수 있는가. 시집을 읽다보면 아름다움이 어디서부터 기원되어 발현될 수 있었는지에 관한 물음이 생긴다.시가 그 자체로써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시가 단순히 아름답다는 감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슬픔, 기쁨, 그리움 등의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동반될 수 있는 이유는 사랑에서 아름다움이 비롯되어, 결국 아름다움의 기저에는 사랑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자기애, 모성, 연애감정 등 모든 애정적인 범위를 포괄하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사랑을 주는 대상 역시 다양하고 자유롭다.Ⅲ. 마치며사랑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존재한다. 사랑의 부재
예술비평문70억 과녁을 위한 화살-파벨 쿠친스키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목차Ⅰ. 머리말- 파벨 쿠친스키의 사회문제의식의 잉태 배경Ⅱ. 세상을 바라보는 파벨 쿠친스키의 세계관의 일기A.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 그의 작품 속 전쟁과 자본의 문제 조명- 전쟁과 자본에 대한 문제의식B. 누구에 의한, 무엇에 의한 : 그의 작품 속 정치와 빈부격차의 문제 조명- 정치와 빈부 격차에 대한 문제의식C. 현실인가, 감옥인가 : 그의 작품 속 환경과 세태의 문제 조명- 환경과 세태에 대한 문제의식Ⅲ. 마치며- 파벨 쿠친스키의 세계관의 일기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첨부자료참고문헌5Ⅰ. 머리말궁사(弓師)가 시위를 당긴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대를 지나 화살은 시위에서 벗어난다. 궁사는 사수(射手)가 되어, 사수는 집행자가 되어 화살을 통해 수십억 쌍의 눈동자와 마주본다. 나는 그 수십억 쌍의 눈동자 사이에 껴있다. 느린듯하지만 빠르게 화살이 다가온다. 물러설 곳이 없다. 눈조차 감기지 않는다. 화살촉이 매섭게 마주쳐온다. 가쁜 숨을 한번 몰아쉬었을 때면 그것은 이미 지나가 있다. 지금껏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한 뒤의 일이다.폴란드인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폴란드 최고의 작가 중 하나로 꼽히는 그는 파벨 쿠친스키(Pawel Kuczynski)라는 이름을 가진 작가로 1976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미술 아카데미를 졸업해 2004년부터 풍자카툰을 그려왔다. 2005년 열린 국제카툰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각종 공모전에서 수상한 경력이 100회가 넘을 정도로 대외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카투니스트이다. 그의 작품은 주로 환경문제, 빈부 격차, 정치 현실 등의 사회문제를 담아내고 있는데 다소 무거운 주제임에도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작품을 ‘따뜻하고 동화적인 작품’으로 평가한다.폴란드의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의 역사와 상당히 닮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대국인 주변 나라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나라가 분할되어 계속형성되는 유아기와 아동기가 폴란드의 어려웠던 시기와 맞물려 파벨 쿠친스키의 작품 세계관이 탄생되었을지도 모른다.이 논문에서는 파벨 쿠친스키의 작품 속에 살아있는 세계관과 그 경향의 자서전의 분석이 이야기될 것이다. 분석과 이야기의 과정을 거치기 위해 그의 문제의식을 자본과 전쟁, 정치와 빈부격차, 환경과 세태 이 세 부문으로 나눠 그를 이정표로 삼아 전개해나갈 것이다.Ⅱ. 세상을 바라보는 파벨 쿠친스키의 세계관의 일기A.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 그의 작품 속 전쟁과 자본의 문제 조명병정인형들이 널브러져 있다. 그 옆에는 군모를 쓴 아기가 올리브 잎을 문 하얀 비둘기의 꼬리를 잡아 든 채 인형의 태엽을 감고 있다. 커다란 군모에 눈이 가려진 아이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그림1) 여느 아기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딱딱하면서도 삼엄한 느낌이 든다. 배경의 온화한 색감으로도 엄중한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군모를 쓴 아기의 모습은 마치 군인 같고 그 옆에 쓰러진 병정인형들은 패잔병 같다. 아기의 손에 들려있는 하얀 비둘기 인형은 전쟁의 승전보를 연상시킨다. 하얀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지만 태엽으로 움직이는 비둘기 인형은 조작된 평화를 나르는 것 같이 느껴진다. 태엽을 감는 아기를 보자니 그런 조작된 평화를 위해 전쟁을 배운 병사 같기도 하다. 부모에게서 아이에게로 전쟁의 대물림이 연상되기도 한다. 이 그림을 들여다보자면 전쟁의 이유에 대해 물음이 떠오른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군인들을 위한 전쟁은 아니다. 그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그들의 부모, 그들의 아내를 위한 전쟁도 아니다. 전쟁의 대물림을 받게 되는 그들의 후손을 위한 전쟁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붉은 빛의 배경 안으로 금시계와 금반지로 치장한 손이 들어와 주판으로 셈을 하기 시작한다. 주판의 아래에는 동전이 쌓여있다. 주판의 알은 총을 든 군인들이다.(그림2) 호화롭게 치장한 손이 전쟁으로 이익을 계산하는 정치가의 손, 혹은 사업가와 같은 인물의 손으 그리고 화면의 왼쪽, 그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는 푸른색의 페인트가 진탕 쏟아져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쏟아진 페인트에 관심을 가진다. 많은 사람들이 쏟아진 페인트를 둘러싸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페인트 기사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단한사람도 없다.(그림3) 이 작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작품들 중 하나이다. 보면 볼수록 생각이 더해져 잔잔하지만 강한 인상으로 남기 때문이다. 페인트는 페인트 기사의 생계수단이므로 물질적 가치에 해당될 수 있고 페인트 기사는 인간 그대로의 가치를 의미할 수 있다. 페인트의 색을 푸른색으로 설정한 것은 페인트 기사의 피의 색과 대조적인 이미지를 주려 한 것 같기도 하고 푸른색 본연의 이미지인 이지적이고 냉정한 이성의 이미지를 강조해 그림 속에 감정적인 느낌을 축소시키려한 것 같기도 하다. 페인트 기사의 피의 양과 쏟아진 페인트의 양의 차이가 상반되게 대조적인 것도 앞의 생각과 연관 지어본다면 이해가 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이 그림은 마치 인간 존재의 가치를 넘어선 자본주의적 가치의 승리를 말하는 것 같게 느껴지기도 한다. 누군가의 시선 속 현재의 우리는 자본을 위한 인간인지도 모른다.B. 누구에 의한, 무엇에 의한 : 그의 작품 속 정치와 빈부격차의 문제 조명예전에 sns에서 어떤 사람이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하는 직업 1위를 정치인으로 뽑은 글은 본 적이 있다. 실제로 선거 기간만 되면 들려오는 정치인의 공약과 위선적인 모습에 우리는 코웃음을 치곤 한다. 파벨 쿠친스키 역시 그런 정치인들의 모습에 환멸을 느껴 그 위선을 고발하고 그들의 자리가 누구에 의해 세워진 것인지 경각심을 심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우리 모두에게 피노키오는 너무나도 익숙한 캐릭터이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피노키오의 이야기는 많은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해선 안된다는 교훈을 심어주기도 했다. 나는 어릴 적 피노키오의 거짓말에 가증스러움을 느끼고 동화책을 덮은 경험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피노 번뜩이는 날과 마주친 사람은 더이상 어느 누구라도 평온함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붉은 배경은 단두대의 위편으로 갈수록 검어져 절명한 사람들의 죽음이 말라붙은 듯하다. 의자의 등받이에는 왕관문양이 새겨져 있다. 마치 프랑스혁명에서 국민으로 인해 몰려나 처형된 루이16세의 왕좌 같다. 의자 밑에 그려진 누더기 옷을 입은 사람을 보니 그 느낌은 더욱 와 닿는다. 누더기 옷을 입은 그 사람을 보다보면 우리는 그가 다리 하나가 없는 의자의 균형이 되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림5) 우리의 시선은 어떤 끈을 쥐고 있는 그의 손으로 향한다. 그 실을 따라가 보면 이내 우리는 그가 단두대의 집행자임을 알게 된다. 그의 표정은 알쏭달쏭하다. 다물린 입매는 억눌린 고초인 것 같기도 여유로운 자신(自信)인 것 같기도 하다. 국민의 신뢰에 떠받들어진 왕은 단두대에 앉아 군림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왕좌가 단두대임을 알며 국민이 단두대의 끈을 쥐고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누더기를 입은 사람은 한낱 살아있는 다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왕좌가 단두대임을 잊을 것이다. 대부분의 왕들이 그래왔다. 왕좌에 앉은 후 그들은 우리에게 무심해져왔다.폴란드는 국민들의 생활에 대한 정치인들의 무심함으로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은 경험이 있다. 정치인들의 무심함으로 인해 폴란드의 빈부격차는 더욱 벌어졌는데 사실 과거든 현재든 정치인들의 무심함으로 생겨난 빈부격차는 전세계 각국의 풀어야할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파벨 쿠친스키 역시 캔버스 위의 서로 다른 기차를 끌고 있는 비슷한 또래의 두 소년으로 자신의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그 두 소년은 너무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비싸 보이는 장난감 기차의 끈을 잡고 있는 아이는 모자부터 운동화까지 제대로 갖춰 차려입은 반면 반대편의 아이는 신발도 없이 낡은 상의와 하의만 입은 채로 석탄이 든 커다란 기차를 끌고 있다.(그림6) 극한의 노동을 하는 아이와 그런 아이를 바라보기만 하는 부유한 아이가 극명하게 대조되고 황색으로 칠해진 배경의 맑은 하늘과 대비되는 어두운 하늘에 그려진 해는 이질적이게 느껴진다. 우리가 이런 만들어진 세상에서 살고있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푸른 하늘이 캔버스 한켠에 조그맣게 엿보인다. 그 하늘 밑에는 커다란 벽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고 그 앞엔 벽을 넘을 수 있는 사다리와 갈색피부의 소년이 있다. 사다리 없이 벽을 넘어서기엔 벽이 너무 거대하고 두텁다. 벽에 걸쳐져있는 사다리만이 소년의 유일한 희망이다. 하지만 그를 지켜보는 우리는 그 희망조차 꺾여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아이에게 그 사다리를 타고 벽 너머로 넘어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추위를 극복하지 못하고 직접 톱으로 사다리 발판을 썰어 추위를 잊기 위한 모닥불의 땔감으로 쓰고 있다.(그림8)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미래의 기회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포기한 것이다. 따뜻함은 몇 조각의 나무토막이 소진되기까지의 찰나의 순간이다. 그 잠시가 지나면 소년은 다시 추위에 고통 받을 것이다. 소년과 우리는 그 선택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을 안다. 이 소년뿐만이 아니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소년과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달동네나 판자촌 주거인들만이 아니라 금전적, 권력적 어려움 등 소유의 한계에 닥친 지인들까지 고려하면 우리는 상류층이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소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이 우리를 지금의 현실로 고이도록 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가둬져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Ⅲ. 마치며활을 내려놓은 사수는 다시 궁사가 되어 활을 그리기 시작한다. 우리를 주시하며 활을 그리는 그의 표정은 웃는 듯 우는 듯 묘하다. 우리 역시 그를 주시한다. 그를 계속해서 되새기다보면 결국 그가 우리를 얼마나 오래 지켜봐오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얼마나 오래 우리를 표적으로 삼아 왔고 얼마나 오래 우리를 위한 화살을 만들어왔는지 알게 된다. 화살은 다시 날아온다. 우리를 마주보기위해 느린듯하지만 빠
인투 더 스톰 (In to the stome)지구의 변화와 관련된 영화의 줄거리: 영화 ‘인투 더 스톰’은 2014년 8월 8일 미국에서 개봉한 토네이도와 폭풍을 주제로 한 재난영화로 전례 없이 큰 토네이도가 생성되어 성장하고 소멸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스토리 속에 녹여내어 작은 범주로 보자면 토네이도에 대해, 큰 범주로 보자면 자연재해에 대해 관객들로부터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영화다.처음, 고등학생 4명이 토네이도로 인해 숨지는 장면으로 일종의 경고적인 메시지를 내밀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영화의 스토리를 끌고 가는 사람은 첫 번째로 토네이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전문 다큐멘터리 감독 피트와 그의 팀원들을 꼽을 수 있다. 그들은 토네이도를 찍기 위해 실버턴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토네이도의 징조를 목격하게 된다. 초기에 처음 생성되었던 토네이도가 수그러진 이후 곧, 골프공에서 야구공만한 우박이 떨어지기 시작하며 동쪽에 벽운이 드리워지고 강한 바람과 소용돌이가 생성되기도 했다. 그들은 이러한 징조를 겪은 직후 토네이도를 자세히 촬영하기 위해 설계된 특수차량 타이터스를 앞세워 토네이도를 찾아 나선다.한편, 실버턴 고등학교의 졸업식에는 폭풍우가 몰아치며 토네이도가 찾아온다. 빠르고 신속한 대처로 위기를 모면한 게리와 차남 트레이는 케이틀린과 진학 인터뷰 영상을 재촬영하기 위해 페지공장으로 간 도니를 찾으러 학교를 떠나며 두 번째 스토리를 진행시킨다. 이들은 도니를 찾아 폐지공장으로 향하던 도중 토네이도와 함께 피트 일행을 만나게 되어 동행하게 되고 직후 중고차 시장을 덮치면서 정유차량이 파괴되어 일어난 휘발유로 인한 점화로 파이어스톰이 만들어지게 되고 피트의 다큐멘터리 촬영 팀원이던 제이콥은 무리하게 파이어 스톰을 촬영하다 빨려 들어가 사망하게 된다.결국 제이콥의 죽음으로 인해 피트의 팀은 토네이도의 촬영을 속행하자는 피트와 이를 반대하는 앨리슨으로 분열되고 앨리슨과 게리, 트레이는 도니를 구하기 위해 폐지공장으로 향해 익사할뻔한 둘을 간신히 구해낸다. 그들은 피트와 다시 합류해 도니와 케이틀린을 구하고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사방에서 총 4개의 토네이도를 만나게 된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이 4개의 토네이도들은 곧 하나로 합체해 전례 없는 거대한 폭풍이 되어 학생들이 대피해있는 실버턴 고등학교로 이동해가기 시작하여 이들은 학교로 돌아가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그들 역시 스쿨버스를 통해 피난하지만 이내 무너진 전신주에 발을 묶여 근처 배수관으로 대피하게 된다.하지만 폭풍으로 인해 배수관이 뚫리고 몰살당할 위기가 닥치게 되고 피트는 죽음을 각오하고 타이터스를 운전해 죽음을 각오하고 배수관을 막지만 태풍의 눈이 지나간 후 찾아온 꼬리폭풍에 그와 타이터스는 폭풍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되고, 피트는 ‘신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이라는 태풍의 눈을 촬영하며 감동한 뒤 추락해 사망하고 나머지 배수관에 있었던 인물들은 꼬리폭풍까지 견뎌내고 살아남아 자연의 두려움을 깨닫게 됨으로써 영화는 막을 내린다.영화에서 사용된 지구의 변화와 관련된 과학적인 생각: 먼저 간단히 토네이도에 대해 알아보자면 토네이도는 트위스터 또는 사이클론으로 불리기도 하는 평야나 바다에서 발생하는 강력한 바람의 일종으로 고속 소용돌이이다. 남극대륙을 제외한 전 세계 모든 지역에서 관찰되지만, 주로 미국의 대평원지역에서 발생한다. 토네이도의 모양과 크기는 다양하지만, 보통 깔때기 모양이며 지름은 평균 150~600m이고 시속 40~80km의 속도로 이동한다. 토네이도는 일반적으로 수명이 짧아 평균 진로 길이는 10km에 불과하며, 약한 토네이도의 경우 진로 길이는 1km를 넘지 않는다.전형적인 토네이도를 기술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심한 뇌우로부터 발생한 빠르게 회전하는 깔때기 모양의 구름이 지반에 도달해 있다는 정도로밖에 규정지을 수 없다. 어떤 것은 지반에 몇 초 동안만 닿고 어떤 것은 한 시간까지 닿아 있으며 어떤 것은 수시로 장소를 바꿔가며 길게는 몇 분에서 짧게는 몇 초까지 머무른다. 바닥에서의 직경 또한 몇 미터에서 수백 미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회색, 검은색, 갈색 등 색상마저도 다양하다.영화에서는 소형의 단순한 회오리바람에서부터 토네이도의 다양한 종류의 징조와 형태를 보여주고자 한 것 같지만 영화 관람 이후 찾아본 자료 속의 실제 토네이도와는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풍속480km/h, EF6급의 거대한 재앙을 표현하고 두려움을 일으키기 위해 영화 속의 토네이도는 육안으로 확인하기에도 현실 속의 토네이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돌고 마치 흔한 회오리바람처럼 좌우로 요동치며 흔들리기도 하는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또한 벽운의 징후도 연출에서 생략되기도 했다.현실에서는 생각해보기 어려운 영화적 연출도 자주 눈에 띄었다. 그 중 단연 인상에 남던 장면은 피트가 풍속 480km/h의 토네이도와 맞닿을 정도로 인접한 거리에서 타이터스까지 걸어가 문을 열고 차체 내부로 들어가던 장면이었다. 이러한 장면 이전에도 종종 등장하던, 제이콥이 파이어 스톰을 코앞에서 촬영하던 장면이나 날아다니는 철근 사이로 뛰어다니던 주인공들 역시 현실적인 가능성을 무시한 비현실적인 일련의 영화적 기법이었다.토네이도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시청했을때는 눈에 띄는 오류를 발견하지 못했는데 서적을 통해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비교하니 영화의 내용이나 의미 전달적 능력을 제외하고서라도 생각보다 꽤나 많은 생략과 오류가 눈에 띄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더욱 흥미롭게 볼 수 있었던 부분도 있었는데 토네이도의 성장과 소멸 과정을 예로 들 수 있다.섬세하지 못한 스토리와 과학적인 고증의 취약성, 스토리와 극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소재인 토네이도 양측 모두 충분한 설명이 없어 여러모로 아쉬운 영화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촬영 장치가 아닌 손으로 카메라를 들어 촬영하는 등의 극의 현실감을 증대시켜 영화가 전하고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에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천재지변 탐사학교, 자연탐사학교 저, 2008.02.22. 청어람미디어항공기상, 이강희 저, 2015.03.01. 비행연구원손안의 지구과학, 마이클 브라이트 저, 곽영직 역, 2012.10.15. 지브레인한권의 물리학, 클리퍼드 A. 픽오버, 최가영 역, 2000.03.07. (주)프리렉토네이도 - 강력한 바람의 소용돌이 (지구과학산책)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931&cid=58947&categoryId=58981
-놓는 것과 놓치는 것, 그리고 용기에 대하여장석남의 ?배(船)를 밀며?에서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이라고 화자는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 어쩌면 가장 흔한 경험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난 순간부터 지금껏 그다지 길지 않은 내 살아온 날들에도 배를 밀어보았던 순간이 수없이 존재했다. 그 기저에 어떤 이유가 내재되어 있던지 간에 화자가 배를 밀어 보냈듯 내 선택에는 아쉽게도 원하는 것을 놓아버리는 것들이 많았다.무언가를 놓쳐버렸던 날들도 많았다. 김억의 ?피리?에서의 화자의 말처럼 ‘부는 바람에 좇기여 내 청춘은 내 희망을 버리고’가기도 했다. ‘바람’은 무정형의 형태로 나를 몰았다. 그것은 일면식이 있던 타인이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혹은 나 자신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그처럼 냉정하거나 따뜻한 바람에 나는 속절없이 희망을 날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러한 불가피한 선택을 놓쳤다고 표현했다.사실 내게 ‘놓는 것’과 ‘놓치는 것’의 개념은 정확히 구분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그 경계가 애매했다. 때로는 상호간에 따로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선택에 있어서 자유의 유무는 둘의 가장 큰 차이를 부여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와는 다르게 선택에 의한 결과임에도 후회와 아쉬움과 같은 잡념이 남아 종래에는 놓은 것인지 놓친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진은영의 ?멜랑콜리아?에서의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나를 지워줬던’ 그가 그랬다.위와 같이 생각하다보면 장석남의 ?배(船)를 밀며?역시 놓는 것과 놓치는 것의 경계가 흐려진다. 장석남의 ?배(船)를 밀며?의 화자는 배를 한껏 세게 밀어냈지만 결국 빈 물 위에 상처와 아픔을 실은 배가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필연적인 고통을 선택하는 사람은 드물다. 검은 패를 뒤집는 사람들은 대개 검은 것과 더 검은 것 사이에서 고민하는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다.김억의 ?피리?에서의 화자는 소리도 없이 달이 울을 때 옛 곡조의 피리를 불었다. ‘때도 아닌 낙엽을 재촉하는 부는 바람에 좇기여’ 희망을 버렸던 청춘이 서글펐나보다. 내 청춘은 아직 지나지 않았지만 여태껏 버리고 온 희망이 후회스러워 나 역시 달이 울을 때면 옛 곡조의 피리를 불기도 한다. 후회에 젖어 울적한 피리를 불다보면 불현 듯 떠오르는 외면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 후회로 힘을 얻다가도 부는 바람에 힘을 잃기도 하는 그것은 ‘용기’였다.‘놓는 것’과 ‘놓치는 것’을 가로지르는 선택은 결국 ‘용기’로 귀결되었다. 용기가 없어 원하는 것을 놓치고 놓는 것이다. 적어도 길지 않은 내 삶 속에서 탈선했던 대부분의 선택들은 용기의 부족이 까닭이 되었던 경우가 많았다. 용기가 없어서 배를 밀었고 용기가 없어서 옛 곡조의 피리를 불게 되었으며 용기가 없어서 낙관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용기가 없어서 바다로 간 물고기로 남기도 했다. 실은 내가 거세다고 생각했던 바람은 몸을 한껏 웅크렸기에 냉랭히 느껴졌는지도 몰랐다.
-내면을 투영하는 맑은 거울이 되어붉은 기운이 움튼다. 언뜻 푸른빛이 비치는 것 같기도 하다. 도깨비불인가 하지만 모습을 뜯어보면 뱀의 형상임을 알 수 있다. 아니, 다시 깊이 들여다보면 도깨비불로 보이기도 한다. 시작과 끝. 탄생과 죽음. 혹은 양극을 잇는 과정과 끝없는 순환에 되풀이되는 시간. 우로보로스를 처음 접한 사람에게는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상반된 두 가지 사실을 끌어안은 붉은 뱀의 형상이 보일 것이고 두 번째로 접한 사람에게는 세상만물을 넘어 우주조차 포용하는 푸른 도깨비불의 형상이 보일 것이다. 지식을 알고 깨우칠수록 보이는 그 모습은 점차 다양해지고 거대해지다가 끝내는 하나로 응축되어 신체와 정신 안에 녹아들어 최후에는 완전한 합일을 이루게 될 것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자가 신이 되고 우주 만물이 되는 것처럼 이해를 거듭할수록 우로보로스 그 자체가 되가는 것이다.우로보로스의 머리는 꼬리를 묾으로써 우주고리처럼 둥글어져 황도를 감싸고 있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그 모습은 억겁의 세월동안 팽창하고 있는 우주처럼 영원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무(無)를 보았다. 예전에 한 만화책에 삽입되었던 흰 뱀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비록 이야기의 내용적 측면에서는 알리고자 의도한 바가 전혀 다르지만 좀 더 발전시켜 생각해보면 만화의 커다란 내용과, 삽입된 흰 뱀 이야기가 우로보로스와 꽤나 친밀하게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 만화는 판타지적 요소와 신화적 요소가 긴밀하게 연결된 테마를 가지고 있다. 우로보로스와 연결 지어 이야기의 흐름을 간단히 생각해보면 인간의 탄생과 세상의 종말, 그 종말을 막기 위한 신의 탄생, 그리고 세계의 소멸 위기와 재탄생으로 압축시킬 수 있다. 책을 보다보면 뱀의 형상, 생성과 소멸 등 신화와 밀접히 관련된 여러 가지 상징들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나 앞서 말했던 흰 뱀 이야기 역시 들여다보면 우로보로스 신화와의 연관점을 찾아볼 수 있다.만화에 삽입된 흰 뱀 이야기는 간단히 이렇다. 흰 뱀이 있다. 흰 뱀은 다른 생명체들을 해치는 것을 꺼려했고 결국 배가고플 때마다 조금씩 자신의 꼬리를 뜯어먹는다. 그렇게 수 계절이 지나고 흰 뱀은 결국 겨울날 눈 속에서 자신을 전부 먹어치워 버리고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의도는 다를지라도 꼬리를 물고 점차 자신을 뜯어먹기 시작한 흰 뱀의 모습은 우로보로스의 형태와 유사하다. 우로보로스의 그림에서는 우로보로스가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정적인 순간밖에 표현이 되지 않아 그 행동을 알 수 없지만 처음 그림을 봤을 때 우로보로스가 마치 자신의 꼬리를 먹는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자신의 몸을 점차 먹어 가면 최후에는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마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우로보로스의 경우 온 우주와 세상만물을 포용하고 있으므로 그가 자신을 전부 먹어치우는 날은 결국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는 날이다. 이렇게 나는 이 만화에서 우로보로스의 순환, 시작과 끝, 시간 등과 같은 유(有) 말고도 자신을 먹어치워 모든 것이 사라지는 무(無)를 보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우라보노스는 유(有)와 무(無)를 전부 갖춘 완전함 그 자체인 것이다.수많은 실재와 의미를 품고 있지만 탄생과 죽음은 모호하다. 우로보로스는 마치 마라톤의 출발점과 도착점과 같이 상반된 두 사실이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그 말인 즉 위치상의 연결도 있지만 어디가 출발점이고 어디가 도착점인지 명확하면서도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로보로스는 명확하면서도 모호한 인간의 삶과 닮아있다. 신화는 인간에게서 태어난 것이니 인간이 가진 생각, 철학, 역사 등을 당연하게 지니고 있다. 우리는 신화만으로도 인간사의 원시적 원형을 연구해볼 수도 있고 역사의 변천과정, 문화의 변천과정 등 여러 방면을 살펴 볼 수 있다.우로보로스는 뱀 이외에도 용, 바다, 동굴, 골짜기, 알 등으로 표상되기도 하며 자기 충족성, 자기완결성, 자기동일성, 모든 미분리와 비현현의 상태, 현실태 이전의 잠재적 가능태, 전체성, 원초적 통일성, 파괴(해체 혹은 죽음)와 재통합(재결함 혹은 재생)의 순환성, 자기소멸과 자기갱신을 영구히 계속하는 힘, 영겁회귀, 영원한 시간성, 영지(靈智), 남녀추니(양성구유), 창조의 원질, 창조 이전의 암흑, 태초의 부모, 삶의 신비, 물질과 영혼의 일체성, 창조와 부활, 반대의 일치, 생명원리 등을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상징이다.옛날 한 심리학 관련 저서에서 이런 비슷한 글을 본적이 있다. ‘인간의 내면에는 하나의 성격을 가진 자아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어린아이, 노인, 장난꾸러기 등의다양한 수십 가지 성격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데 사람마다 어느 자아의 비중이 커다란가에 따라서 개인의 성격이 형성된다.’위의 단락을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로보로스가 개인의 성향을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이 되지 않을까? 글의 서두에서 이야기한 붉은 뱀, 푸른 도깨비불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그들을 말할 때는 신화에 대한 지식이나 깨우침의 정도에 대해 말한 것이지만 이번 질문은 지극히 개인의 성향에 관한 물음이다.나는 우로보로스가 가진 수많은 의미 중에 탄생과 죽음, 영원한 시간성에 대해 주목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아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지적 생명체로서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만큼 이 주제들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탄생과 죽음은 우리에게 멀리 존재하는 것 같이 느껴지다가도 우리의 의식과 삶 가까이에 파고들어있는 문제 중 하나이다.인간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크게 가지며 불가능한 것일수록 더욱 손에 넣고 싶어 한다. 영원한 시간성. 영원한 회귀. 이들을 저주라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상당수를 차지한다. 연금술에서 현자의 돌이 이 사실을 잘 나타내준다. 깨달음을 얻고 영생을 사는 삶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평생 동안 연구에 매달리며 정신을 수양하다 금속에 중독되어 세상을 떠났다. 연금술만이 아니더라도 진시황 등의 인물을 비슷한 예로 들 수 있으며 현재에도 불로장생을 위한 연구에 많은 돈, 시간, 인력을 투자하는 사례를 볼 수 있다. 또한, 불로불사는 영화나 소설, 미술, 음악 등 다양한 문화 컨텐츠에서 단골 소재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