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인간관계의 역설202111226진유림현대에는 스마트폰 사용자가 늘고 무선 인터넷 서비스가 발달함에 따라 SNS사용자도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로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고 확장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SNS의 활동이 과연 인간관계를 풍요롭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더 깊이 생각해보아야할 문제라고 생각한다.오른쪽 그래프(트렌드모니터의 2015 SNS이용인식조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은 SNS속 인간관계의 기능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 이유는 다양하다. 먼저 SNS는 시공간의 제약없이 넓게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과 지식, 재능 등을 공개하고 공유함으로 더 효율적으로 일하고, 창조하고,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또한 세계적으로 만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과도 교류가 가능해졌다. 그 사람이 내 집에서 멀리 거주하든 서로 시간이 없든 사회적 문화적 교류가 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두 번째는 SNS는 단순한 정보 외 감정이나 일상생활까지 교류할 수 있게 하여 인간관계를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대면으로 인간관계를 맺을 때는 만나볼 수 있는 사람의 수가 SNS로 만나 볼 수 있는 사람의 수보다 적어서 자신과 목적, 의견,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만나기가 더 어렵다. 하지만 SNS를 이용하면 감정과 일상생활 등을 공유하여 자신과 공통점이 많은 사람들과 집단을 만들어 쉽게 모임을 가질 수 있다. 나도 평소 뮤지컬이나 공연을 보는 것을 좋아해 취미로 자주 보러다니곤 한다. 요즘은 SNS를 통해 같은 대학 내에 이런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같이 활동하자는 글을 보고 참여하게 되어 하나의 소모임이 만들어졌고 실제로 활동 중이다.세 번째는 SNS는 소외계층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SNS는 장애인, 임산부, 대인기피증 환자 등의 소외계층의 인간관계 형성에 도움을 준다. SNS기자연합회(SNS언론방송진흥재단)의 활동을 살펴보자. 이들은 SNS를 이용해 여러 지역사회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구금활동을 벌여 위기청소년, 미혼모 가정 및 사회 소외계층에 기부물품 틴톤 시크릿 립스틱과 립클로즈를 전달한 사례가 있다.SNS가 있기 전까지 사람들은 “느슨한 관계”의 사람들과 만날 일이 없었다. 하지만 SNS를 통해 잠깐의 시간으로도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좋은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학자 마크 그라노베터는 1973년 느슨한 관계의 힘이라는 책에서 우리는 생각한 것 보다 훨씬 자주 이 느슨한 관계에 의존한다고 규명. 가령 구직 과정에서 대다수의 사람이 친한 친구가 아닌 느슨한 관계로 맺어진 아는 사람을 통해 취업한다는 연구 결과도 발표했다. SNS는 현대사회 사람들의 인간관계를 다방면으로 풍요롭게 해주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SNS의 편리성에 가려져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먼저 SNS는 오히려 인간관계의 피로감을 증대시킨다. SNS를 키면 겉으로만 친구들의 정보가 과잉 연결되면서 ‘안 궁금한’ 소식들이 쏟아진다. 취업 포털 인크루트가 지난 4월 조사한 내용을 보면 ‘인간관계’에서 피로감을 느낀 적이 있다‘는 물음엔 무려 85%가 ‘있다’라고 답변했다. 또한 나은영 교수(서강대 지식융합미디어학부)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과잉 연결은 남과 나를 비교하는 ‘사회 비교과정’(Social Comparison)을 촉진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한다.사회 비교(Social Comparison)란 자신의 신념이나 능력, 태도 등을 타인과 비교하여 이를 토대로 자신을 평가하는 것으로 타인의 삶에서 가장 밝은 부분과 내 삶에서 가장 어두운 부분을 무의식적으로 비교하게 돼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나 또한 SNS를 보면서 우울감을 느낀 적이 종종 있다. 시공간의 제약 없이, 쏟아져나오는 단순한 정보수집과 편리한 감정 소통의 이면에 원치 않는 과잉연결로 인해 오히려 인간관계의 피로감을 증대시킨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는 것 같다.두 번째는 넓고 얕은 관계형성과 인맥착시효과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요즘에는 신조어 ‘관태기’(관계와 권태기의 합성어)와 ‘티슈 인맥’(한 번 쓰고 버리는 티슈처럼 필요할 때만 만나고 소통하는 사이)가 등장했다. 관태족의 특징으로는 면대면 대화나 전화보다 문자가 편하다, 어색한 자리에서 대화를 이어갈 자신이 없다, 더 이상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려 노력하고 싶지 않다 등이 있다. 나는 온라인 인간관계보다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가치를 훨씬 더 중요시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깊은 관계를 선호하는 사람으로서 넓은 관계를 형성하고자 이용하는 SNS가 오히려 사람을 사귀고 유지하는데 있어 필수요소인 ‘사회성’을 악화시킨다는 것에 대해 우려가 된다. 느슨하고 얇은 인간관계와 필요할 때만 소통하는 사이가 과연 건강한 관계라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이 진정 내 인맥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것은 그저 착시효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SNS의 발달로 온·오프라인 구분 없이 관계의 폭이 넓어지는 것에 반비례해 관계의 깊이는 얕아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한다.세 번째는 SNS에서는 서로의 단편적인모습만 보기 때문에 그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가 생길 수 있으며 오히려 친해지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동아리나 과 개강총회를 가서 술자리를 가지면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친해지고 인스타 맞팔로우를 꼭 하게 된다. 그러면서 딱 한번 본 사람의 인스타를 살펴보곤 한다. 그 사람의 인스타를 봤을 때 문신을 한 거나 담배에 관련된 게시물을 본적이 있다. 분명 ‘문신’과 ‘담배’는 그 사람에 대해 나타내는 도구도 아니고 나쁜 시람이라고 단정지을 순 없지만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적이 있다. SNS의 단편적인 모습을 보고 편견이 생긴다면 어떤 사람인지 서로 알아가고 깊이 있는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데 있어서 장애물이 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연극 제목:119옆 낙원빌딩현대에는 많은 기술이 발전하면서 삶이 편해지기도 하고 평균 수명이 길어지기도 하며 더 오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따라 고령화 사회 문제가 대두되고 독거노인 고독사 문제도 발생한다. 안락사를 찬성하느냐 마느냐의 논쟁과, 풍요로워지고 다양화된 사회와 반대로 올라가는 자살률 문제도 심각하다. 특히 한국은 세계적으로 자살을 가장 많이 하는 국가로서 이 문제에 대해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죽음’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자는 의미로 한 작가는 ‘119옆 낙원빌딩‘이라는 연극으로 현대인을 초대했다. 만남과 이별 즉, 삶과 죽음은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것으로 누구나 겪어야하는 보편적인 사실이자 받아들일 수 있어야하는 것 중 하나이다. 나도 누구나 중 한명으로 이러한 고민에 뛰어들고자 빠른 걸음으로 작품을 보러갔다.작가는 목적과 의도가 더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연극을 실제나 현실에 최대한 가깝게 재현한듯하다. 한 무대에 빌딩옥상, 식당, 한 노인의 집, 119건물 이렇게 4개의 공간이 있었다. 조명의 켜짐과 꺼짐 그리고 장소를 구별할 수 있는 소품들을 보며 이어져있는 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대가 마치 나의 일상과 같이 친숙하고 사실적으로 묘사가 되어있었다. 이를 통해 연극이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작품에 몰입하는데 더 도움을 줄 것만 같았다. 이러한 사실주의는 실제로도 극에 공감을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연극은 시작이 되었고 관객들은 숨을 죽여 관람했다. 마치 무대 속 우리들의 삶을 엿보듯이. 순정이 옥상에서 담배를 피며 극은 시작한다. 담배소품에서 실제로 연기가 나오고 찝찝한 냄새가 나서 그런지 실제로 옆에서 담배를 피고있는 것 같았다. 순정의 담배와 한숨이 섞인 말투를 보며 나도 현실의 암담함을 무의식적으로 느끼며 마음 한 편이 무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극 초반에 직접전달과 간접전달의 방법 덕분에 내용의 흐름과 각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나 성격을 이해하기 쉬웠다. 낙원빌딩 401호에 사는 덕수라는 노인은 만성신부전증과 뇌졸중의 후유증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고 죽음을 갈망한다. 이를 도와줄 사람으로 아름에게 자신을 죽여주는 대가로 오천만원의 목돈을 주겠다고 한다. 그 제안을 들은 아름의 내적갈등과 낙원빌딩 청소부인 혜자의 살인 부추김은 정말 흥미로웠다. 한편으로 내가 이 인물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극 중 한 등장인물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라고 하며 질문을 던진다. 처음에는 제3의 벽이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나(관객)에게 하는 질문인지 몰랐다. ‘여러분들 대답해도 돼요‘라고 말을 해서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몰입감이 잠깐 떨어지긴 했으나 작품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잊고 있던 질문(나라면?, 사회문제? 등)에 대한 답을 찾아가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연극을 봤던 것 같다. 연극의 결말부에는 덕수가 과연 죽을지 죽지 않을지 궁금해 하면서 관람했는데 그 끝은 너무 허무했다. 아름과 혜자가 덕수의 집을 찾아가 살인을 실행하려는 순간 119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동시에 나의 마음도 요란해졌다. 덕수가 죽었을까 살았을까. 다행히 살았다는 것을 보고 안도했지만 동시에 멧돼지의 습격으로 낙원빌딩의 한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죽고싶어하는 사람은 어쩌다가 살게 되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어떤 사람은 정말 어처구니 없이 죽게됐다. 정말 삶은 덧없다는 허무함에 빠져들었다. 이것이 비극일까 희극일까. 이 작품에는 덕수가 살았다는 희극과 또 다른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비극이 공존한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봤을 때의 느낌처럼. 우리들의 일상에 희극과 비극이 동시에 발생하듯 이 작품에서도 살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죽음에 대한 슬픔을 동시에 녹여낸 것 같다.‘죽음’이라는 단어하나를 주위로 다양한 인물들이 있었다.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서라도 죽고싶어하는 덕수,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서라도 사람을 살리고자하는 119대원들, 사람을 죽일지 말지 고민하는 아름,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혜자, 삶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순정, 이영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상만이 있다. 이러한 각 인물들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과연 죽음이란 무엇일까?,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의미가 있을까?, 죽음이란 꼭 나쁜 것인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죽음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죽음에 관한 고찰보단 ‘삶’이라는 단어에 더 집중하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살아갈 이유가 생기고 나를 지켜주고 도와줄 사람이 있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일상의 고통, 행복 하나하나가 그냥 삶의 의미이다. 이 연극에선 사람을 죽일려고 부추기는 사람 그리고 죽이는 방법이 무엇이 있는지와 같은 내용을 다루지만 악인은 없다고 생각한다. 돈을 가지고 더 나은 삶을 살기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이다. ‘살리고 살기 위해’ 우리는 모든 일을 한다. 나는 덕수 조차 정말 죽고 싶은 것 일까? 라는 의문이 든다. 물론 후유증 때문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그 고통은 외로움에서 오는 게 더 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픈 독거노인 덕수에겐 나를 죽여주는 사람보단 말벗이 되어주는 사람 즉. 나의 외로움을 해소시켜주는 사람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덕수는 항상 벚꽃이 절정에 이른 그 봄의 밤에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한다. 벚꽃하면 아름다움, 순수한 사랑 이런 것이 떠오르는데 그때 죽고 싶어 한다는 것은 정말 역설적이다.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과 삶을 계속 살고자하는 인간의 본성 사이의 대립을 극대화 시키는 것 같다. 연극이 끝나고 나서 벚꽃의 꽃말에 대해 알아보았다. 놀라운 사실은 벚꽃이라는 꽃 자체의 의미가 굉장히 역설적이였다. 아름다움과 정신미, 순결, 부와 교양을 뜻하기도 하지만 삶의 덧없음과 결박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결박되어있는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 솔베이 회의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하고 과학의 특징을 토대로 본인의 경험을 해결을 해결한 사례를 쓰시오.과학의 발전과정에 대해 논한다면 오랜 시간에 걸쳐 열린 솔베이회의를 빼놓을 수 없다.솔베이 회의는 세계 최초의 물리학 학회로 1911년부터 3년 주기로 개최되는 회의다. 첫 번째 회의에서 세 번째 회의를 거쳐 열린 1927년 브뤼셀에서 열린 제 5차 솔베이 국제회의가 가장 유명한 솔베이 회의이다. 다섯 번째 회의에서는 전자와 광자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양자역학을 주장한 코펜하겐 학파의 수장인 닐스 보어는‘전자는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이며 이 둘은 서로를 배척하면서 동시에 보완한다. 이 때문에 불확정성의 원리가 나타나는 거다.’라고 주장하며 상보성의 원리를 발표한다.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건 없고 확률만 제시 할 수 있다는 코펜하겐 학파에 반해 무엇이든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고전역학을 주장한 아인슈타인은 불확정성의 원리에 크게 반대한다. 아인슈타인은 변형이중슬릿 실험을 통해 전자의 입자성을 측정하면서 전자의 파동성도 측정이 가능하다며 불확정성의 원리가 틀렸음을 증명하려 했다. 하지만 닐스보어는 실험의 전제 자체가 틀린 것이라고 설명하며 불확정성의 원리를 깰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로써 회의의 승자는 닐스보어가 되었다. 이 뒤에 열린 회의에서도 아인슈타인은 포기하지 않고 불확정성의 원리가 틀렸음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제 5차 솔베이 국제회의는 회의 참석자 29명중 17명이 노벨상을 받기도 했으며 이 물리학 토론이 현재 양자 역학에 대한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 깊은 회의이다. 솔베이 회의의 과정을 살펴보니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세계로만 느껴졌던 물리분야가 정말 재미있게 다가왔다. 원래는 물리학하면 이해하기 어렵고 고정된 수학적 식만 떠올랐는데 무엇보다‘상대성’에 민감한 것이 물리였다. 어떤 사물을 누가 관측했는지, 어디에서 바라보는지에 따라 지식의 전제가 달라진다. 내 앞에 놓여진 휴대폰이 당장은 가만히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달에서 휴대폰을 본다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현대 사회에서도 여러 과학적 논쟁을 거치고 기존 원리에서 더 탐구하여 수많은 새로운 이론과 정보가 생성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결정을 할 때 과학적 객관성과 지금 나의 시각, 가지고 있는 가치에 대한 판단을 고려하여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개인적 경험을 예로 들자면 최근에 코로나 사태로 백신을 예방원리와 부작용의 확률적 위험성에 대해 알고 접종을 맞았다는 것이다. 물론 국가에서 2차까지 접종을 완료하는 것에 대한 권고와 이행하지 않았을 시 다른 장소에 머무르는 것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급히 접종을 하긴 했다. 하지만 사회적, 법적제도에 등떠밀려 아무생각없이 접종을 받는 것보단 그 접종의 예방원리가 무엇인지, 부작용에 대한 위험성, 적어도 내 몸속에 어떤 성분이 들어가는지에 대해 알고 행하는 것이 똑똑한 시민이라고 생각했다.백신을 접종해야했던 2021년도에 한국에 허가된 백신은 화이자, 모더나, 얀센, 아스트라제네카 4종류였다. 화이자나 모더나는 항원 유전자를 RNA형태로 주입하는 것이였고 얀센과 아스트라제네카는 목표 항원을 보다 검증된 기존의 바이러스나 병원균을 바이러스 운반체로 유전자 재조합된 백신이였다. 기초과학연구원에 따르면 각 백신의 예방율은 화이자 95, 모더나 94.1, 얀센 66.9, 아스트라 제네카 70.4였다. 결국 코로나 바이러스를 예방하고자 접종을 하는것이기 때문에 예방율이 가장 높은 화이자를 주입하는 것을 고려하게 되었다. 백신의 원리는 무엇일까? 백신은 무독화, 약독화 시킨 항원을 주입하면서 2차감염에 대비하는 것이다. 주입된 약한 병원체가 기억세포를 만들고 실제 병원체가 몸 안으로 침입했을 때 기억세포가 방어물질을 빠른 시간에 대량 생산하여 무력화 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이러스 변이에 대한 백신의 효능은 있을까? 각각의 백신들은 주입하는 항원에서 차이가 있지만 결국 코로나 바이러스의 항원에 대한 중화항체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을 투여하면 항체 뿐만 아니라 T세포가 활성화 되고 이것이 아까 말한 기억 세포로 몸에 남게 된다. T세포의 경우 스파이크 단백질 뿐만 아니라 다른 단백질에 반응하고 감염된 세포를 제거해준다. 코로나 바이러스 변이로 중화항체가 제기능을 못하게 됐는데 T세포는 여전히 바이러스를 없앨 수 있어 백신의 효능이 있다고 한다. 내가 맞고자 하는 화이자는 mran 백신이라고 한다. mrna 백신은 최신 유전자 공학 기술을 활용하는 것이라 개발기간이 짧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백신의 원리에 대해서 아무리 공부해 봐도 모르겠으나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항할 항원을 우리 몸에 직접 넣는게 아니라 신체 내에서 스스로 생성가능 하도록 항원에 대한 설계도를 넣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는게 젤 쉬운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새로운 기술에 따라 개발된 백신은 혁신적이고 안정적일 것 같지만 부작용이 없을 수 없었다. 예방접종 후 이상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몸에 주입되는 백신이 신체 세포에 코로나 바이러스의 항원 생산만을 위한 정보만을 확실하게 전달하는 지 확증이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마다 유전체와 신체의 면역 시스템이 다르기에 어떻게 반응이 일어날지 100프로 확정이 불가능하다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인지 뉴스기사에는 백신을 맞고 여러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과 사망에 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몇 번 접한 적이 있었다. 역시 100프로가 아닌 것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함인 걸까. 끝까지 백신을 안맞겠다고 버티는 친구들도 있었고 나또한 조금 걱정했고 고민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부작용의 위험성이 나이가 많으신 분들에게 확률적으로 더 컸고 사회에 같이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과 나 자신을 위해 1프로라도 바이러스가 예방되길 원하는 사람으로서 화이자 맞기를 택했다. 언론에서 백신 부작용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에 대한 보도는 백신과 증상의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지만 주목을 끌기 위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범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현재 3차까지 백신접종을 완료한 상태다.
1. 무엇이 과학이고 무엇이 과학이 아닌가?2. 과학철학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3. 연구활동을 함에 있어서 과학철학적인 지식이 중요한가?1. 무엇이 과학이고 무엇이 과학이 아닌가?내가 일반적으로 ‘과학’이라는 것을 떠올려 보면 흔히 ‘고정된 보편적인 원리 또는 증명된 무언가’라는 생각이 든다. 과학은 굉장히 어려운 주제로 들리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분야와 연관되어 있는 부분이다. 지금 밖에서 비가오는 것에도 ‘과학적’ 원리가 숨겨져 있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노트북이 작동하는 데에도 있는 ‘과학적’ 원리, 심지어 어떻게 내 눈으로 노트북이 보이는지에 대한 ‘과학적’ 원리도 있다. 이러한 과학은 사전적 의미로는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을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너무 ‘자연과학’에만 제한된 듯한 느낌이다. 고교시절에 수학과 과학이 싫어 인문계열대학을 진학하길 원했고 경영학을 공부하게 된 나는 알고보니 정말 누구보다 열심히 과학적인 탐구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주, 물, 생명 등 자연 현상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은 자연과학이라고 볼 수 있고 사람 간, 사회현상에 대해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을 인문사회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회계, 빅데이터 분석, 데이터 마이닝부터 시장세분화를 바탕으로 마케팅전략을 구상하는 것 등도 결국 (인문사회)과학적 탐구로 볼 수 있다. 그러면 도대체 이러한 과학을 포괄적으로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과학을 정의하기 힘들기 때문에 오히려 과학이 아닌것들 즉, 비과학이란 무엇일지 생각해보자. 비과학, 유사과학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실증적 검증 방법이 없거나 반증 가능한 예측을 하지 못하는 것들을 일컷는다. 일반적으로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것, 예술, 마술, 종교 같은것들이 우리는 과학이 아니라고 본다. 비과학은 증명이나 예측이 안되는 것들인데 그럼 신학, 철학, 심리학 같은 것은 과학적 학문이 아닌것인가? 아니라고 하기엔 문학, 역사, 철학, 심리학 같은 것을 우리는 이미 ‘인문과학’이라고 부르고 다닌다. 아니 그럼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지을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우주와 같이 아주 넓고 광대한 세계부터 정말 눈으로 확인이 힘들 정도로 미세한 세포 원자같은 매우 작은 세계까지 엄청 넓고 다양한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고 모르는 것들도 너무 많다. 학자들조차 이런것들은 종교(신)이나 철학적 영역으로 떠밀어 버린다. 그래서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짓는다는 것은 현재의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것에 의지해서 기준을 세우지만 그 기준이 정말 절대적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과학의 역사를 되돌아 봐도 ‘지구가 평평하다’라는 생각이 일반적이고 상식적이였을적에는 ‘지구가 둥글다’라고 생각하면 비과학이라고 비난받았었기 때문이다. 지금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수백년 후엔 틀릴수가 있다. 과학과 비과학의 기준은 시대와 인류의 발전과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 같다. 따라서 과학이란 하나의 지식이나 ‘결과물’들로 정의하기 보다는 호기심과 의문을 가지고 어떤 현상을 탐구해 답을 알고자하는 그러한 모든 ‘과정’이라고 정의하고 싶다.2. 과학철학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인류는 정말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의식주의 측면을 포함해 인간은 더 안전한 삶, 더 편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을 넘어 평균 수명도 길어졌다. 이렇게 과학은 문화, 건강, 교육과 소통과 같은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 걸쳐 우리의 삶에 큰 이점을 남겨줬다. 과학의 큰 이점 덕분인지 사람들은 어느새 과학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현실에 대해 과학적으로 묘사하는 것만이 진리라는 의견이 많아졌다. 즉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과학만능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 인간이 불확실성에대해 두려워하기 때문에 확실성의 측면에서 과학은 어떤 현상에 대해 굉장히 신뢰감있는 근거를 제시해주곤 한다. 이러한 정확성에 의존하는 인간의 본능적 심리를 이용해서 사람들은 유사과학을 과학인 것 마냥 설명하거나 광고하여 서로를 속일 때도 있다. 예를 들어 2018년 침대 속 라돈사태나 과학적 효과가 인증이 안됐지만 건강기능식품이라고 속여 파는 경우가 그렇다. 이렇게 과학과 비과학이 만연하는 시대에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한다. 앞의 글(문제1)에서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짓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고 말해놓고 비과학이 만연하다고 구분지어 보아야 한다고 말하게 되니 내스스로가 도대체 무슨말을 써놓고 있는지 정말 머리가 아프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정리하니 절대적인 기준을 세울 수 없음에도 우리가 과학인것과 아닌 것을 구분해야하는 이유는 종교적이고 주관적인 행위가 구체적, 체계적으로 증명이 가능한 일이랑 구분이 될 때 사회의 질서가 잡히게 되며 상호신뢰가 생기고 안정적인 생활과 더불어 효율적인 국가통치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사고를 포함해서 과학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주장하는 것이 과학철학적 사고이다. 우리는 과학을 계속 발전시켜왔고 그러한 과학이 인간에게 편리하고 안전한 삶을 줬다. 하지만 이제는 과학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거나 지지하는 과학만능주의에서 벗어나 과학에 대해 끝없이 의심하고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과학철학적 사고를 가지는 것이 과학의 진보와 우리의 안전한 삶을 위해 더 바람직한 태도이다. 생물학에서 화학으로 화학에서 물리학으로 환원된다는 뜻의 환원주의는 흔한 상식일지라도 이 상식이 믿을 만한것인가? 환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고민해보는 것처럼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과 어떤 지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과학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과학의 자격, 과학적 이론들의 신뢰성, 과학의 최종목적 등에 대해 생각하는게 왜 중요한지에 대한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