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방지원 논문)근대 이후 공교육은 가르치기 위한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화하고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근대 공교육의 역할도 학생 주체의 성장을 지원하는 데 중점을 두는 쪽으로 변화했다. 학생의 학습권을 기본권적 관점에서 최대한 보장하고, 교육에 대한 사회 전체의 합의를 이루어내는 네트워크가 건전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행?재정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 전문성을 지켰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면서 학교 역사교육이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2008년 보수 정당의 집권과 동시에 한국 근현대사 내용과 역사인식을 국가의 통제 하에 두고 한국사 교육을 정치도구화하려 했다. 최근 학계에서는 이러한 정치권력 인사들이 주장하는 역사교육을 ‘국가주의 역사교육’으로 개념화하기 시작했다. 국가주의 역사교육은 보수 세력 또는 우파 인사들이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학생들이 수용하여 내면화하도록 하는 데 역사교육의 목표를 둔다. 이 글은 최근 정치권력에 의해 초래된 역사교육을 둘러싼 갈등 국면들을 국가주의 역사교육의 관점으로 파악하려는 선행 연구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2008년 이후 역사교육정책이 국가주의 역사교육을 향해 왔음을 밝히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명박, 박근혜 두 정부가 추진한 역사교육정책들과 그로부터 야기된 문제들을 국가주의 역사교육의 현실화라는 맥락에서 살펴보겠다.근?현대사 교육을 통해 학생들은 오늘날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바람직한 사회 변화 방향을 상상하고 추론할 수 있다. 2008년 이후 이명박 정부 시기에는 집권 여당 및 정치권력, 보수 인사들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는 한국현대사 인식을 학교 현장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온갖 조치와 방법이 동원되었다. 그 과정에서 법률로 규정된 절차를 무시하는 등 탈법적 진행과 학교와 학습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비교육적 결정을 반복했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및 채택 변경 압력을 행사하였다. 결국 2009년 신학기에는 교과부의 요구를 반영하여 수정된 교과서가 학교 현장으로 들어갔다. 금성 교과서 필자들은 저자의 동의 없이 수정된 교과서의 사용을 막아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낸데 이어 출판사를 상대로 저작권침해 정지소송을 냈다. 또한 교과부의 수정 지시가 부당하므로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도 제기했다. 교과서에 대한 수정 압박을 가하는 동시에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기념사업,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개관, 보수 인사의 일선학교의 강연 등을 통해 현대사 교육을 장악하고 통제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교육당국에서는 교과서를 고치는데 그치지 않고, 학교 현장으로 찾아가는 특강을 실시했다. 이 특강에서 우익 인사로 구성된 강사들은 대한민국의 성공 이유를 자유민주주의에서 찾고 반공과 친미를 강조했다. 금성출판사 교과서를 다른 출판사의 것으로 교체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한편 교육당국은 금성출판사 필자들에게 행정소송을 제기당한 이후 교과서검정에서 교육부의 수정 명령을 필자들이 따르도록 절차를 변경했다. 더 나아가 교과서 내용을 통제, 관리하는 교과부 장관의 법적 권한을 강화하려 했다.2010 부분개정 교육과정 개발이 본격화하던 중 이명박 정부는 ‘역사교육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고등학교 를 필수과목으로 하고 각종 공무원 시험에 한국사를 넣으며 모든 과목의 교사 임용에 국사편찬위원회가 주관하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3급 이상을 자격 요건으로 할 것을 검토하겠다는 안이 포함되었다. 사실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에서 역사교육은 별다른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정치권, 정부가 말하는 역사교육은 한국사교육과 동의어였고, 정치적 필요에 따라 한국사교육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교육과정 개발의 마무리 단계에서 ‘자유민주주의’ 파동이 일어났다.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안도 자유민주주의라 표현을 썼을 뿐 아니라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를 얼버무리고 친일파 청산 등의 주제는 언급조차 하지 않은 점이 논란이 되었다. 이에 교과부는 역사과 교육과정의 ‘자유민주주의’를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라는 용어로 바꾸어 고시하고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역사 집필 기준안을 확정했다.박근혜 정부 시기에 역사교육정책은 이전 정부를 계승하면서 역사교육에 대한 정치권력의 통제 기제를 한층 강력하게 제도화하는 쪽으로 전개했다. 역사교과서 국정제 전환 문제가 그 정점을 보여줬다. 국정제는 정치권력이 원하는 역사인식을 강제하는 장치라는 점에서 국가주의 역사교육의 강력한 도구이다. 이러한 박근혜 정부가 지지하는 역사인식의 전모를 확인시켜 준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학사 사태이다. 교학사 교과서에는 근현대사에 대한 학계의 연구 성과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자국사 교과서임에도 불구하고 행위 주체를 일제로 설정하거나, 일제의 편에서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탐구해보도록 유도하거나,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내재된 내용 구성을 취함으로써 친일?반민족적이라는 비판이 쇄도했다. 이승만에 대한 찬양에 가깝도록 긍정적인 평가로 일관하고, 경제 성장에서 박정희의 공헌을 높이 평가하면서, 유신 독재에 대해서는 당시 여건상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로 합리화했다. 역사교육계와 역사학계에서는 지학사 교과서의 검정합격을 취소할 것을 교과부에 요구했다. 교육당국은 교학사 교과서를 선택 가능한 교과서로 만들었지만 결국 거의 채택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을 역으로 정부는 정치적 외압이라고 항변하며 국정교과서로 전환해야 한다고 몰아갔다. 『한국사』 교과서 채택 과정에서 주목할 점을 살펴보겠다. 첫 번째는 교학사 교과서를 ‘엄호’하는 과정에서 11월 29일 교육부가 내린 수정명령에 대해 교과서 필자들이 법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재판부는 2015년 4월 2일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려 교육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는 사법 권력까지 가세하여 권력에 의한 교과서 통제에 힘을 실은 것이다. 두 번째는 보수 우파 인사들이 역사교과서를 좌편향으로 몰면서 교학사 교과서의 역사인식을 두둔한 점이다. 역사교육계에서 교학사 교과서 사태를 부실교과서에 대한 정치권력의 편들기와 부실검정 문제로 접근했지만 보수 우파에서는 이념 논쟁으로 접근했다. 세 번째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또한 교과서 이념 논란과 동일한 맥락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국정 교과서가 정권의 이념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검정제를 유지하면서 보수의 관점을 반영한 교과서를 만들자고 주장한 것이다. 다음으로 2014년 초부터 2015년 초까지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에 대해 알아보겠다. 역사교과서 국정제의 본질은 국가권력이 학생들의 역사인식을 합법적으로 통제하는 강력한 기제라는 점이다. 정부는 국정제 주장과 동시에 편수조직 강화를 언급했다. 편수 조직이 부활할 경우 과거 문교부 시절처럼 교육과정 개발과 교과서 개발 및 수정 과정에 담당 공무원들이 막강한 권한으로 직접 관여할 것이다. 이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정하는 교육과정, 학습내용을 구체화한 교과서의 세세한 부분까지 국가가 개입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2015 개정 교육과정의 한국사 내용 체계를 보면 초등학교 5학년 사회의 한국사, 중학교 와 고등학교 에서 선사부터 현대까지 통사를 배우는 구조로 돌아갔다. 특히 고등학교에서 고대사의 비중이 증가하는 대신 근현대사 비중이 줄어들었다. 이는 역사교육의 세계적 추세, 학생들의 역사에 대한 흥미 역시 현재와 가까운 시기에 집중된다는 국내의 조사 보고 등에 역행한 것이다. 한국사 영역에서 가장 큰 문제는 정치사 중심 국가 서사의 강화이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정치사 중심의 국가서사가 반복되는 역사교육은 결과적으로 국가가 구성원 개인보다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긴다. 국가의 발전에 무조건적으로 희생하는 개인을 당연시하는 국가주의적 역사인식으로 귀결될 수 있다. 또한 현대사 단원에서 국가주의 역사교육과 관련하여 우려되는 점이 있다. 과거 교과서처럼 현대사를 아주 소략하게 형식적으로 다루거나 안 가르치고 넘어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2015 개정교육과정 시안이 현대사를 구성하는 관점도 문제다. 이 교육과정 시안에서는 첫째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은 강조하면서 8?15광복은 제대로 다루지 않고 있다. 둘째 자유민주주의 발전 과정에 대한 이해를 다루면서 남겨진 과제는 다루지 않았다. 셋째 경제 성장의 과정과 성과를 강조했지만 그것이 초래한 문제점을 탐구하는 데 인색하다.
과제(김한종 논문)중학교 사회 책 중 한 종에는 ’다른 문화의 이해‘라는 소제목 아래 자연환경에 따라 문화가 달라진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 집필자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은 하나의 고정된 잣대가 아니라 그 사회의 환경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다문화적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교과서 내용은 다문화적 관점이 아니라 특정 관점에 토대를 두고 서술되어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교과서의 세계사 서술이 이처럼 편향된 것은 세계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그 사회의 관점에서 다양하게 보지 못하고, 미국, 유럽 중심, 서구의 시각과 자료, 해석에 따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사 교과서는 학생들이 다문화적 관점을 가질 수 없도록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역사교육을 통해 다원적 가치를 기르기 위해서는 두가지 문제의 검토가 전제해야 한다. 첫째 역사교육에서 가치를 다루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 역사교육에서 가치를 가르쳐야 한다면 다원적 관점은 역사교육이 지향하는 바람직한 가치인지를 검토해야 한다.역사교육에서 역사적 사실을 평가해서, 학생들이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인식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바람직할까? 일부 역사학자들은 역사가 가능한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역사교육은 가치교육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도덕적 판단이 역사연구의 객관성을 저해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다른 한편으로 많은 역사학자나 역사교육자는 역사적 사실이 가치판단과 엄격히 분리될 수 없으며, 가치를 배우는 것이 역사교육의 중요한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상반된 주장이 있지만 역사적 사실에 가치가 내재되어 있으며 역사교육이 가치교육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역사 이해를 위해서는 역사적 행위자와 역사가의 가치판단을 고려해야 한다. 즉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도덕적 판단이 필요한 것이다. 역사 수업을 위해 내용의 선정과 조직, 학습활동의 결정 등 일련의 수업계획도 교사의 역사인식이나 역사교육관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들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를 교훈에서 찾는 것은 역사교육이 가치교육을 내포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가치중립적이거나 몰가치적인 역사교육은 가능하지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문제는 역사교육이 가치교육이 되어야 하는가 여부가 아니라, 역사교육에서 가치교육에 접근하는 방법의 문제이다.근래 역사교육이 추구해야 할 대표적 가치관 중 하나로 강조되는 것이 상대적 가치관, 다원적 가치관이다. 이러한 가치관을 함양해야 현대 사회에서 부딪히는 많은 갈등을 해소하거나 완화시킬 수 있다. 예를 들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많은 신생국들은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대립이라는 냉전체제에 직면하였다. 당시 역사교육에서 다루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역사교육은 이원적 사고방식을 유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지만 이후 역사의 전개는 이 두 체제 외에 제3의 체제를 출현시켰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교육이 역사적 사실의 외형적 특성에 의존하는 양자택일적 성격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세계화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세계화를 사회의 기본적인 성격으로 본다.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화를 강대국의 지배 내지 신제국주의 논리로 보기도 한다. 이 두 가지 관점 중 어느 편을 택하는가에 따라,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역사인식은 크게 달라진다. 예컨대 강화도조약을 학습할 때, 그 침략적 성격이나 불평등성을 언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지만 세계화와 거기에서 이익을 찾는 기업의 논리에서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외개방을 하지 않은 대가‘를 치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전자는 국사교과서의 관점이고, 후자는 한 경제단체의 주장이다. 이는 다원적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또 다른 문제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는 관점이 역사 해석의 다양성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는 자신의 사회적 처지나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역사인식은 역사를 보는 관점이나 역사 해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다원적 성격을 가진다. 역사를 공부하게 되면 기본적으로 다원적 가치를 받아들이게 될 가능성이 많다. 역사교육에서 다원적 가치는 역사나 사회 현장을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고, 다양한 기준으로 평가하려는 자세를 필요로 한다. 또한 다원적 가치는 상대주의적 관점을 전제로 한다. 일본에서는 역사인식을 둘러싼 갈등과 분쟁을 해소하는 방법의 하나로 상대주의적 관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포스트모던 역사학자로 대표되는 민족 중심의 역사교육 비판자들은 ’우리나라‘의 관점에서 역사를 재구성하고 다른 나라 역사를 이해하려고 함으로써 갈등이 빚어지고 전체주의적 관점이 나타난다고 본다. 민족이나 국가에 이로운 것은 선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악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올바른 역사인식을 제약한다는 것이다. 다원적 가치관을 기르기 위해서는 어떤 지배적인 관점이나 해석으로 역사를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그 방법으로 지적되는 것이 ’주변‘의 역사이다. 중심과 주변은 국가들 간의 관계일 수도 있지만, 국가 내부의 지역이나 계층, 집단 간의 관계일 수도 있다. 계층이나 계급에서 중심이 지배층이라면 ’주변‘은 피지배층이다. 또 남성 중심의 역사에 ’주변‘은 여성이며, 도시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농촌이 ’주변‘이다. 다원적 관점이나 가치관이 바람직한 역사인식에 긍정적 작용만을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다원적 가치와 상대주의적 관점은 이런 교육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오히려 장애를 줄 수도 있다. 한 교과서의 머리말을 인용한 것이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의 가운데서 과거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고민을 하고,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였는가, 즉 과거 사람은 어떤 태도로 살았는지 배우는 것이라고 하는 편이 낫다,”이 내용은 일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의 『새로운 역사교과서』에 나오는 것이다. 역사이 해가 맥락적 이해이며, 역사인식이 하나의 고정된 관점이 아니라 다원적 시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면, 위 서술은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것 같다. 하지만 위 주장은 외형적 표현과는 달리 관점의 다양성을 내세워 문제가 되는 역사적 행위를 합리화하는데 이용될 우려가 크다. 역사적 행위자의 편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평화, 인권과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는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전쟁을 일으킨 행위를 다원적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고 해서 긍정, 부정 어느 편으로 평가해도 괜찮은 것일까? 다원적 가치와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이해하고 타자를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는 그 방향 못지않게 적절한 내용의 선정과 구성에 달려 있다.전통적으로 한국의 역사교육은 한국사와 세계사로 분리되었다. 이러한 역사교육의 내용 구성은 자국이나 민족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기가 쉬워서 세계사적 맥락에 바탕을 둔 자국사 교육을 어렵게 하며, 다원적 관점에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을 힘들게 한다. 이 때문에 한국사와 세계사를 연계시키는 역사교육이 필요성이 계속 제기되었다. 2007년 2월 개정 고시된 교육과정에서 가 아닌 로 바꾸고, 고등학교 선택과목으로 를 신설한 것은 이런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취지가 교과서나 역사 수업에서 관철될 수 있을지 여부는 더 지켜보아야 할 문제이다. 중학교 는 한국사 단원과 세계사 단원을 단순히 병렬적으로 배치하는데 그쳤다. 기존 학교 역사교육의 내용은 주로 정치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사람들은 다른 나라와 갈등이나 분쟁이 개입되는 정치적 문제에 표면상 하나의 가치관으로 통일된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역사교육은 다원적 관점을 기르고 타자를 인식하는 데는 정치사 외에 사람들이 구체적인 생각이나 삶이 드러나는 사회사나 문화사적 접근이 유용하다. 정치사가 국가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면, 사회사나 문화사는 지역적 특성이나 문화적 다양성을 보여준다. 다원적 관점과 타자 인식을 위해서는 교과서를 비롯한 교재의 내용도 그에 맞도록 서술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원적 관점을 가지게 하려면 교과서 서술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편이 좋다. 교과서는 설명식 문체를 통해 해석의 결과가 아니라 객관적 사실을 서술한 것인 양 가장하였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역사교과서의 서술에 내포된 역사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저자의 관점에 빨려 들어간다. 저자가 아니라 자신의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드러나는 서술이 방법의 하나가 될 수 있으며, 내러티브적 서술이나 역사 자료를 그대로 포함하는 서술도 여기에 유용하다. 또 교과서 서술이 특정 가치나 관점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전쟁사 서술을 보면 전쟁에서 자신의 국가가 대승을 거두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역사교육을 통해 지켜야 할 가치가 ’대승‘이 아니라, ’평화‘이며, ’패전‘이 절대로 피해야 할 가치가 아니라, ’전쟁‘이 그 가치가 될 수도 있다.
-한국근대사 -1. 한성순보,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를 조사하여 정리하시오.(1) 한성순보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이다. 1883년 10월 1일 서울 저동의 통리아문 박문국에서 발행한 월 3회 발간된 순보로, 매월 1일자로 간행되었다.먼저 신문 발간의 배경을 설명하고자 한다. 조선은 열강 여러 나라들과의 접촉을 통해 신문의 존재와 그 역할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이를 통해 신문이 개화에 긴요한 기관임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뒤 우리나라 관리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과 일본에 갔다 오면서 신문에 대해 좀 더 정확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1876년 1월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 온 김기수의 《일동기유》에 신문?종이?인쇄?사진 등 신문 또는 서적의 인쇄와 관련되는 견문기를 비교적 정확하게 소개하였다. 1881년에는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던 엄세영이 일본의 국정을 보고하는 가운데 “원로원을 두고 백성들에게 귀 기울이며 신문지를 만들어 위로는 점차 군민이 서로 함께 다스리는 데까지 이르렀고, 조야의 논의도 가히 한곳으로 귀일했다고 할 수 있다”라고 쓰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 정부의 관리들은 서양열강 여러 나라는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이미 신문을 발행하고 있으며, 국민을 깨우치고 가르치는 가장 시급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은 신문의 발간이라고 판단하여 《한성순보》를 창간하였다.이어서 신문 창간 과정을 살펴보겠다. 신문에 대한 효용성이 알려지고 있는 가운데, 1882년 박영효 일행이 수신사의 자격으로 일본에 가 머무르면서 국민 대중의 계몽을 위한 신문 발간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신문 제작을 도울 기자와 인쇄공 등 몇 명의 일본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귀국하여 곧 한성부 판윤에 임명된 박영효는 자주 궁중에 출입하면서 고종에게 신문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신문 발간을 진언하였다. 그래서 1883년 2월 28일 고종으로부터 한성부에서 맡아 신문을 간행하도록 하라는 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 해 4월 박영효가 갑자기 광주유수로 좌천되면서 신문 발간작업은 일단 무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장박·오용묵·김기준을 박문국 근무의 사사로 임명하여 실무진을 갖추었다. 그 밖에도 박영효 등이 일본에서 데려온 이노우에도 주재로 다시 고용되어 신문간행작업은 본격적인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들은 9월 20일부터는 신문 창간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신문 발간의 준비는 박문국이 설립되기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9월 11일 자 《통서일기》에 김인식이 신문 초역하느라고 통리아문에는 나올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이 무렵부터 벌써 외국의 신문을 가져다가 순보 발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공식적인 업무는 9월 20일부터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 끝에 1883년 10월 31일 마침내 《한성순보》가 창간되었다.순보는 일본에서 들여온 인쇄기계와 활자로 인쇄하여 A4판 비슷한 판형 24쪽의 책자형으로 제작되었는데 사용 문자는 순 한문이었다. 기사 내용은 크게 내국 기사와 각국 근사의 기사로 나누어진다. 내국 기사로는 관보·사보·시치탐보를 싣고 있으며, 각국 근사 기사로는 당시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전쟁이나 분쟁, 근대적인 군사장비나 국방 방책, 개화 문물 등을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각국 근사 기사 가운데는 의회제도나 자유민권 사상 등을 소개한 기사도 있으나 수적으로는 매우 적다. 관보의 경우는 주로 『조보』에서 기사를 취재, 보도하였다. 각국 근사 기사는 『신보』·『호보』·『중외신보』·『순환보』 등 중국의 신문에서 주로 번역, 전재하였는데, 이들 신문 외 『시사신보』·『동경일일신보』·『보지신문』 등 일본의 신문과 기타 여러 나라의 신문기사를 번역하여 보도하였다. 관영신문의 성격을 지닌 이 신문은 발행 직후 각 관아에 배포되어 관리들이 읽게 하였으며, 관아에서는 1부당 동화 50문을 신문값으로 박문국에 납부하였다. 이 신문은 관리 외 일반인도 구독할 수 있었는데, 서울에서는 박문국에 직접 구독을 신청하였고, 지방에서는 경저에 연락하여 구독하였다. 이 신문은 1884년 12월 4일 김옥균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 하겠다. 《독립신문》이 창간된 시기에 일본은 침략정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한반도 진출의 야욕을 지닌 러시아와도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일본은 1894년의 청일전쟁으로 중국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었으나 조선 정부가 그들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데 대한 불만으로 이듬해 10월에는 궁중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여 러시아의 영향이 증대되고 있었으며, 서구 열강 여러 나라들은 각종 이권을 탈취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무력침략과 병행하여 외교적인 압력을 가하면서 경제침략과 언론 침략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일본은 1895년 2월 15일부터 서울에서 《한성신보》를 발행하여 언론 침략을 위한 전위기구로 삼고 있었다. 은둔의 작은 왕국이었던 조선은 열강의 침탈과 밀려 들어오는 서구문물의 도전에 슬기롭게 대처하면서 세계무대에서 독립된 자주 국가의 일원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 열강의 종속국으로 전락할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이에 대처할 능력과 경륜이 부족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서재필은 망명지 미국에서 돌아와 신문을 발행하였던 것이다.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던 시기에 창간된 《독립신문》은 국권의 회복과 정치 사회의 개혁을 지향하면서 국민 계몽과 민권의 신장을 위한 횃불을 높이 들어 국민의 여론을 환기하고 민중의 힘을 결집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독립협회가 민중의 지지에 힘입어 개혁을 추진한 것도 《독립신문》과 그 이후에 나오기 시작한 신문들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다음으로 독립신문의 창간 과정을 살펴보겠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을 거쳐 미국에 망명한 서재필은 미국에 들른 박영효로부터 대역부도죄가 1895년 3월 1일 자로 사면되었다는 사실과 정권을 장악한 개화파 동지들이 자신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1895년 12월 26일 귀국하였다. 그는 갑신정변 실패의 주요 원인이 민중의 지지가재필은 귀국한 지 3개월 만인 1896년 4월 7일에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이처럼 단시일에 신문을 발간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재정지원과, 초기에는 감리교 계통의 인쇄소인 삼문출판사에서 신문을 인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부에서 서재필의 신문 발행을 지원한 것은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신문을 발간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문 발행을 지원한 또 다른 목적은 일본의 침략을 합리화하는 《한성신보》와 대항하겠다는 의도도 있었다.독립신문은 주 3회(화·목·토) 격일 간으로 발간되었다. 창간 당시에는 한글판 3면과 영문판《The Independent》 1면을 한 신문에 같이 편집한 2국어 신문이었다. 이후 1897년 1월부터는 한글판과 영문판을 분리해 신문을 2종으로 만들었다. 또한 독립신문에는 본격적인 신문광고가 처음으로 실리기 시작했다.이러한 독립신문은 오늘날 신문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데, 그렇다면 독립신문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첫째, 독립신문은 논평과 비판을 가장 중요한 기능올 삼았다. 서재필은 1면에 정부와 집권 위정자들의 비정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를 폭로하였으며, 민간인의 잘못도 서슴없이 지적하였다. 둘째,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관존민비의 봉건적인 전제군주 치하에 억눌려 살던 국민들은 자신들이 나라의 주인이며 관리는 국민을 봉사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셋째, 국민들은 이 신문에 실린 사설과 기사를 통해 국가의 안위가 위태로웠던 당시의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치가 어떠한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열강 여러 나라들이 국가의 이권을 탈취한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국가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저항하도록 하였다. 넷째, 《독립신문》은 한글을 전용하고 띄어쓰기를 실시하여 누구나 읽기 쉽도록 만들었다.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한 우리글로 신문을 제작하여 한글을 일상적인 공용문자로 격상시켰다. 다섯째, 구독료를 싸게 하여 상하귀천 많은 사람들이 볼 하게 되자 독립신문도 폐간 위기에 봉착하였다. 정부는 윤치호를 외직으로 방출하고 신문사의 매수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미국공사 알렌(Allen, H. N.)은 고종 및 수구파정부와 긴밀히 결탁해 『독립신문』의 자진 정간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정부는 1899년 1월에 「신문조례」를 제정해 『독립신문』 등 각종 신문들의 혁신적 논조를 탄압하려고 하였다. 윤치호가 서울을 떠나게 되자 신문사는 아펜젤러를 주필로 추대해 신문을 속간하기로 결정하였다. 아펜젤러가 주필로 취임한 1899년 1월 이후 정부 비판의 논조는 현저히 완화되고 주로 온건한 계몽적 논설을 게재하였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독자들과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회원들을 실망시켜 『독립신문』의 사회적 위신을 저하시켰다. 또 『독립신문』에 대한 정부의 탄압을 완화시키지도 못하였다. 정부는 관료의 부정부패에 대한 정당한 보도에 대해서도 독립신문사를 수색하고 기자를 체포하는 형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문사를 인수하기 위한 여러 차례의 공작을 시도하였다. 신문사는 1899년 6월 1일부터 영국인 선교사 엠벌리를 사장 겸 주필로 임명하고 아펜젤러가 동업자로 후퇴해 퇴세를 만회하려 하였다. 엠벌리는 신문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국문판의 크기를 확대하고 영문판은 주 2회로 축소 간행하였다. 그러나 국문판의 논조는 맥이 빠지고 영문판은 오자투성이였고, 결국 2주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게다가 정부는 『독립신문』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1899년 7월 18일 독립신문사의 사옥 반환을 요구하였다. 신문사는 당시 심한 적자 운영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이러한 요구는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신문사는 정부의 사옥 반환 요구를 몇 차례 연기시켰지만 무제한 미룰 수는 없었다. 정부가 노린 것은 물론 사옥 반환 자체가 아니라 이를 구실로 한 신문사의 매수였다. 이 사실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서재필은 더 이상 신문사의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판매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 제국의 외부대신이 1899년 11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