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식적 성공법칙"안녕하세요 ㅎㅇㅇ 대저택입니다" 이 책을 알게 된 계기는 한 유튜버의 언급이었다. 채널 운영자가 경제적 자유를 어떻게 이루었는지 궁금하였고, 그가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책들에 궁금증도 생겼다. 채널 운영자는 자신의 경험을 공유해주었고 자신의 통찰까지 함께 말해주었다. 이 책을 언급한 영상을 몇 차례 본 후로 유튜브는 ‘어포메이션’이라 불리는 확언 - 미래에서 현재에 하는 질문 ? 영상들을 연결해주기 시작했다. 해당 영상들을 들어가 보니 이것을 듣고 삶에서 실천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책의 내용과 무관하게 좋은 책이라고 느꼈던 이유는 나는 해내었는데 너희는 왜 못하냐고 꾸짖기보다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에베레스트 산을?최초로 등정한 영국의 '조지?맬러리'에게 기자가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였다고 한다. 맬러리는 "그곳에 산이 있으니까"라고 답하였다. 전해지는 말로는 심드렁하게 대답하였다고 하는데 이 책의 저자도 자신이 이룬 성과를 과시하듯 말하지 않았고 점잖았다. 플라톤이 말하던 철인(哲人)처럼 동굴 밖 세상을 보고 깨우친 자가 동굴 속에 묶여 불빛에 일렁이는 그림자가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사람들을 독려하며 깨우침을 전달하려는 교사 같은 느낌이었다.저자가 강조하고 실천하길 권하는 내용은 네 가지였는데 "자신이 이루고 싶은 걸 기한까지 구체적으로 적을 것", "반복하여 쓸 것", "쓰고 되뇌일 것", "그리고 행동할 것"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네 가지 항목들을 보면서 주변에서 '간절하게' 해보라고 했던 것을 왜 더 간절하게 안 해 봤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상식적이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기도문으로 쓰고 기도하고 그렇게 될 거라 믿는 마음들을 책에서 보았기 때문이다.취업 시험에서 떨어질 때 마다 '내가 안되는 건 다른 사람들보다 간절함이 부족했다'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 당시에는 ‘R=VD’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비상식적으로 보였다. 좋은 문구를 붙여놓고도 매번 자리를 비우는 사람들을 보면서 차라리 한 자라도 더 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취업이라는 무게에 억눌려 비상식적인 걸 상식적이라 여기고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하여 좋은 결과를 받은 사람들을 보면 간절함이 작은 차이, 한 끗 차이를 만들어 나를 앞서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였다.비상식적인 나의 성공 경험을 말해보자면, ‘집에서 출퇴근이 가능하며 20분 안에 교회에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학교’를 간절히 바라면서 마지막 시험을 준비하였다. 결과적으로, 마지막 시험도 최종 탈락했고, 우연히 지인의 도움을 받아 들어간 곳은 ‘집에서 출퇴근이 가능하며 20분만에 교회에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직장’’이었다. 3가지 바람 중 딱 한 가지만 부합하지 않은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취직하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합격 년도와 점수까지 명확히 바라였다면 어땠을까’였다. 성공했다면 나도 누군가 앞에 서서 “간절히 바라고 선명하게 꿈꾸면 이뤄집니다”라고 말하고 다니지 않았을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그의 이야기에는 현실과 비현실이,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이 한 데 뒤섞여 있어.” 이 책의 주인공이 방문하고 인연을 맺는 커피숍 사장이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하는 말이다. 나는 책 후반부에 나오는 이 한 문장이 꿈과 현실을 한 데 섞은 듯한 책 분위기를 소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꿈 읽는’어느 날 홀연히 첫사랑이 사라진 세상에 순응해가는 주인공과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꿈 읽는’ 책임을 맡은 주인공이 번갈아 나온다.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탈출하기 전까지 주인공은 자신이 세운 세상에서 꿈을 곱씹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꿈 도서관에 있는 오래된 꿈들을 어루만지면 꿈이 깨어나지만 흐릿하여 읽혀지지 않는 모습으로, 곁에서 약초를 갈아 차를 마시게 하는 소녀의 모습은 자신이 잃었던 사랑의 그리움으로 벽 안의 도시에 스스로 가두고 있다고 생각하였다.‘때가 되면 동이 트고 이윽고 햇살이 창으로 흘러드는 것처럼’첫사랑이 사라진 세상에서 출판업계 종사자였던 주인공은 40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작은 마을 도서관 관장으로 부임해 온다. 도시는 특별했다. 도서관이 있는 마을은 높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였고, 전 도서관장인 고야쓰 씨는 벽 안의 시계탑처럼 시곗바늘이 없는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 나는 ‘때가 되면 동이 트코 이윽고 햇살이 창으로 흘러드는 것처럼’ 이 문장이 의미심장했다. 그가 이곳으로 온 것은 자연의 흐름대로 무언가에 이끌려 왔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준비된 듯한 흐름은 밝은 대낮에 약간 소름 돋는 귀신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M**’노란색 파카를 입고 서번트 증후군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가 등장한다. 이 아이의 이름은 M**이다. 주인공이 다시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고, 도시에서 도망치면서 헤어졌던 소녀에게 ‘안녕’이라는 인사를 건네게 하였다. 그리고, 도시에 작별을 고하고 떠나게 한다.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안에서 주인공이 맡았던 ‘꿈 읽는’ 역할을 이어받은 아이의 이름이 혹시나 MAP이 아니었을까라는 상상을 책을 다 읽은 후에야 하게 된다.현실의 주인공과 ‘벽 안의 주인공’의 전환이 빠르게 일어나는 책 초반부에서는 작가가 두 환경을 흔들어 놓으며 모호한 경계선을 만드는 것 같아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책을 읽어가면서는 작가가 뿌려둔 떡밥은 무엇인지 앞뒤로 찾아가면서 읽어보았지만 출제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실패했다.우리나라와 헐리우드 미국영화에서도 주인공들이 서로 다른 시간대 혹은 동시에 존재하면서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작품들은 만들어졌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나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을 떠올렸고 ‘그것도 무스비’가 그 당시 유행어처럼 떠돌았던 것을 기억해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운명의 흐름, 신이 연결해주는 무스비를 느끼는 것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화가 동일해서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말과 글에는 그 사람의 성격과 성품, 성향이 담긴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을 닮은 사람을 좋아한다.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머리 속을 가득 채우는 생각들이다. 책의 문체는 서늘하였다. 막 갈아내어 퍼런 서슬이 선 칼로 휴지를 자르는 걸 볼 때마다 목 뒤로 소름이 돋듯이 말이다.이 책은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면서 비틀거리고 위태롭게 엎어질 듯이 읽은 책이다. 책은 주인공인 경하를 덮칠 듯이 다가오는 꿈 속의 나무들과 손가락 봉합수술 때문에 제주도에서 육지로 날아온 친구 인선이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바가지 요금이 존재하지만, 지금까지도 ‘제주도’라고 하면 육지와 기후대가 다르고 낭만적인 곳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봉합 수술과 병실이라는 단어들에 건조하게, 차분하게, 오랜 시간 친구 사이로 지내온 따뜻한 감정마저 날려버린다.앵무새를 키우는 지인은 추운 겨울이 되면, 카페에 데리고 오는 앵무새를 집에 두고 나온다. 제주도의 추운 중산간 지역에 사는 인선이는 자신의 집에 가서 앵무새의 밥과 물을 챙겨줄 것을 요청한다. 길을 한참 걸은 뒤에야 자신이 어떻게 걸어왔는지 보이는 것처럼 책을 덮고 나서야 소설에서 앵무새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게 된다. 그리고 두 친구가 만난 병원 창문 너머로 눈이 내린다. 눈은 경험한 것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제설작업의 공포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기억을 잠시 덮어두는 것일지도 모른다.톱을 깔고 자면 악몽을 막아준다는 미신과 치매가 있지만 낯선 이를 보면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인선이의 어머니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앵무새를 챙겨주기 위해 쏟아지는 눈폭탄을 헤치며 인선이의 집을 찾아가는 길은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길이고 어머니가 치매로 덮어둔 기억과 연결되는 길이다.제주도는 4.3사건에 몰살당한 사람들이 많아 아직도 한 마을이 한 날 한 시에 제사를 드린다. 경하는 그 집에 도착한 후에 환상에 이끌리듯 인선이가 집에 심어놓은 듯한 기억들에 이끌려 4.3사건에 대한 기억과 집안 곳곳에 숨겨진 자료들을 보게 된다. 인선이의 어머니는 그 때의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톱을 깔고 주무시고, 자신의 오빠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면서 낯선 이들을 보면 경계심에 오히려 또렷히 정신이 돌아온다, 어머니는 앵무새처럼 따뜻한 보살핌이 많이 필요한 존재였을까?
매일 면도를 한 말끔해진 얼굴로 삶의 의지를 보여줘 수용소에서 생존하여 나왔다는 예화는 여러 책에서 인용될 만큼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다. 저자인 빅터 프랭클은 끝없이 이어질 거 같은 나치 수용소의 삶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와 자전적인 이야기들을 함께 하면서 ‘삶의 의미’가 사람에게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를 설명한다. 삶의 의미는 내 안에서도 몇 차례 바뀌었다. 뒤늦은 사춘기에는 티베트로의 도피였고, 대학 시기에는 현재의 즐거움이었으며, 대졸 후 잊힌 듯한 몇 년은 수용소 사람들처럼 무감각했고, 지금은 내가 담당하고 있는 아이들이다. 이 감상문은 대졸 후 우연한 기회를 만나 일하고 있는, 현재의 나에 대한 반성문이다.기말고사를 마친 고등학교 1학년 2학기였을 것이다. 미뤄둔 독서를 하겠다고 구입한 십 여권의 책 중에서 ‘티베트의 아이들’이라는 책은 나라를 잃었지만 욕심부리지 않고 인도 라다크에서 살고 있는 티베트인들의 삶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욕심없이 경쟁없이 살아가는 그들의 삶이 히말라야 산맥마냥 커져 별안간 도피하고 싶었다. “대학은 진학하고 안산 반월공단에서 일하며 그들의 말을 배워서 떠나라” 이 말은 고등학교 시기 말미에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한 말이었다.“이 정도면 얼마나 공부해야 할까요?” 맹랑하게도, 대학교 1학년 때 독해력 하나만 믿고 ‘교육학’이라는 시험지를 풀어서 교수님께 여쭈어 보았다. 학과 자체에서 치뤄진 교육학 시험에서도 등수가 서서히 올랐었다. 4학년 때, 나와 동기들은 저마다 지원한 지역의 시험장에서 첫 시험은 떨어져 보는 게 경험이라는 걸 증명하듯 우수수 떨어졌다. 그리고 그 다음 해부터 나는 삶의 의미를 잃었다. 돌아보면 4학년 1년의 삶은 자만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최선으로 여겼었다. 그 후, 몇 년 간 최종 면접까지도 갔었지만 번번히 떨어지면서 책에서 말하듯이 ‘믿음을 상실하면 삶의 의지도 상실’하였다.종교-교회 설교-에서 ‘의미 부여’하는 것이 부질없다고 여겼었다. 설교 내용에는 때때로 개개인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자’라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노래부르며 서로의 얼굴을 보며 축복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설교 내용이 너무나도 ‘성공학’같이 부자가 되고, 모든 게 잘될 것이며, 당신을 사랑하시는 분이 창세 전부터 계획하여 이곳에 불렀다고 하였다.나에게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내면 세계가 간직하고 있는 도덕적, 정신적 자아가 무너지도록 내버려 둔 사람이 결국 수용소 안 타락한 권력의 희생자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였다. 이 문장을 읽고 돌아봤을 때, 내가 스스로 웅덩이라 부르는 그 시간 동안 내가 삶의 의미를 제대로 부여하지 못하였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공부하면서도 ‘내가 시험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나보다 더 간절하게 공부하는-의미 부여하는 삶-사람들의 것이다.’라는 말을 되뇌이면서 공부하였다. 그 시간을 정리한다면, 삶의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지 못하고 자아가 무너진 나에게 종교나 가족들이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였고, 나는 자아가 무너지도록 내버려 둔 사람이었던 것이다.
중학교 미술선생님이 미술시간에 배경음악처럼 들려주시던 책을 이제야 꺼내들었다. 전학을 앞둔 상황에서 미술선생님의 책 선정은 같은 교실에 앉아있어도 나를 지명하는 듯이 들렸다. 앞으로 미술시간마다 해 주실 이방인 이야기를 듣지 못할 아쉬움 때문인지 몇 년이 지나도 읽어보겠다고 잊지 않았던 책이다.주인공의 ‘소속되지 않음-무소속’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그처럼 온갖 사람들과 빛이 가득한 거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눈이 피로해졌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인생이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주인공에 이입되어 온갖 사람들은 주인공이고 빛이 가득한 거리는 무대이고 자신은 관객처럼 느껴진다고 해석되었다. ‘그가 내게 공공연히 “이제, 자넨 진짜 친구네.”라고 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은 내게 강한 인상을 안겨 주었다.’라는 문장을 보면서는 김태주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친구’라고 말해줬을 때에야 주인공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면 그는 그제서야 어머니의 장례를 위해 방문한 지역의 낯선 사람들 속에서 소속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주인공에게는 어머니의 죽음이 스쳐 지나가는 ‘배경’이었지만 삶과 죽음을 ‘전경’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로 인해 관점이 비교되는 모습들도 발견했다. ‘저녁에 마리가 나를 찾아와서는 자기와 결혼하고 싶은지를 물었다. 나는 그건 하나 안 하나 같은 거지만 만약 그녀가 그걸 원한다면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마리에게 결혼은 삶에서 중요한 전경이자 필수 사항이지만 주인공에게는 배경이자 ‘선택 사항’이었다. ‘그는 그것 하나에 길들여져 있다는, 내 자신이 주목할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당신은 병들기 전의 그놈을 모를 거요. 그놈은 더 멋진 털을 가지고 있었다오’ ‘오늘 밤엔 개들이 짖지 않았으면 좋겠소. 나는 항상 그게 내 개라는 생각이 드니 말이오’ 살라미노 영감은 윤기 흐르는 개의 멋진 모습과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에도 잊지 못하는 기억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에게 어머니의 상실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책을 다 읽고 나면 ‘아랍인이 칼을 뽑아서 햇볕 안에 있는 내게 겨누었다. (중략) 그 불타는 칼은 내 속눈썹을 물어뜯고 내 눈을 고통스럽게 파고들었다. 모든 것이 흔들린 것은 그때였다.’ 이 문장들이 눈에 들어올 것이고 이 이야기는 주인공이 끝내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처음 읽을 때는 ‘장면의 전환’으로 와 닿는다. 하지만, 다시 읽어보면 우연이었을지 필연이었을지, 누가 죄인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산 자가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가 아니면 망자가 되더라도 사실을 말하는가?주인공인 뫼르소에게 은 십자고상을 흔들며 걸어오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그를 보며 분개하는 판사는 “당신은 내 삶이 의미 없어지기를 원하십니까?”라고 하며 하나님을 믿고 회개하라고 한다. 주인공은 기독교 정신을 가진 문화권에서 이를 거부하는 통념 밖의 인물이라는 점과 오래 전 미술 선생님이 들려주셨던 내용보다 바깥에 도달했다는 묘한 공통점에 흥미가 솟았다. ‘죄 없는 자부터 돌로 치라’라는 성경 구절이 떠오르는 것은 스스로가 죄인이라 칭하는 그리스도인이 우연에 우연이 겹쳐 살인하게 된 주인공을 정죄하는 모습처럼 보인다.사형을 당하기 전 부속사제가 그를 ‘회개’시키고 ‘구원’을 받도록 몇 차례나 찾아왔음에도 거부했을 때 “그러니까 당신은 이 땅을 그렇게나 사랑한다는 거군요?”라고 묻는다. 여기까지 오자 나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충돌이라는 생각까지 도달하였다. 조금은 기존 사회에서 벗어나 물 흐르듯 살아가는 자연인같은 뫼르소의 모습이었으나 “내가 이것을 회상할 수 있는 어떤 삶이오!”라고 답하는 것에서 거창하게도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신본주의, 모더니즘과 인본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충돌하는 것을 보았다.
사랑이 미완성이었던 "연인"들을 위한 이야기누군가에게는 간질거릴 만큼 좋은 '썸'이 독후감을 쓰기로 마음먹을 즈음에 깨졌다. 썸 초기에 깨졌으니 제대로 시작도 못 한 관계라고 위로하면서 새로운 인연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로에게 감정이 남아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며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그 말들을 마음에 품고 책 표지에 실린 소녀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밑으로 처진 입과 볼, 열린 동공, 공허한 눈빛. 내가 가지고 있던 감정을 책 표지에 실린 주인공에게 투영하였는지, 미완성된 감정을 품은 얼굴처럼 보였다.베트남 사이공(호찌민)의 강둑 집에 사는 소녀는 프랑스 국적을 가졌고, 열 다섯 살 반이다. 사이공, 프랑스 국적, 백인, 강둑 집, 열 다섯 살 반, 메콩강에 떠 있는 나룻배라는 요소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소녀를 상상해 보았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불안하고, 세상 속에 어느 순간 던져져 있는 모습이다. 메콩강은 주인공의 마음을 대변하듯 '지구가 기울어진 듯이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 주인공에게는 '검은 리무진'이라는 선택지가 주어진 곳이다. 나룻배에 같이 실렸지만 많은 승객이 함께 공간을 공유하는 버스와 단둘이 머무를 수 있는 검은 리무진은 관계성의 대비가 명확해져 누구와, 운명을 어떻게, 건너갈 것인지에 대한 작가의 계획된 의도처럼 느껴졌다.'검은 자동차에 타는 순간 그녀는 그 사실을 깨달았고, 처음으로 그리고 영원히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앞으로 주인공이 나타낼 행보일 거라는 생각을 하였다. 독후감을 쓰면서, 내 예측이 맞았다는 안도감을 주는 동시에, 소녀가 서 있는 불안정한 환경에서 행동을 선택하는 능동적인 객체라는 의미로도 와 닿았다.시대는 안정적일 수 있는 사람도 불안정하게 흔들어대는 패러다임이다. 중국 화교 청년은 이미 많은 것을 잃은 것처럼 등장한다. 남들이 보기에 근사해 보이는 검은 리무진은 '몸에 털이 없고, 성기를 제외하면 남성적인 데가 없이 너무나도 나약해서'로 표현되는 그의 모습을 덮는 포장지였을지도 모른다. 불현듯 '이 사람은 애착 형성이 회피형으로 이루어졌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는 자신에게 책임감으로 압박하는 아버지와 시대가 부여하는 짐들을 외면하기 위해 휘몰아치는 욕망 속으로 자신을 거세게 밀어 넣는 것처럼 보인다. 점점 더 소녀와의 육체적 관계를 더 탐닉하는 형태로 그 불안함을 피하려는 회피형과 아버지의 지시에 반항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여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있는 불안형이 같이 나타나는 혼합형일지도 모르겠다.작은 오빠는 등장인물로서 유일하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큰오빠의 끔찍한 성격에 그 공포에 무력하다고 설명한다. 한 부모에게서 났다는 것을 빼면, 화교 청년과 일탈 중인 주인공, 폭력적인 큰 오빠와 대비하여도 서로가 다르다. 나는 이들의 성격에서 큰오빠는 충동적인 이드(id) - 여주인공은 주체적인 자아(ego) - 작은 오빠는 이들을 조율하고 앞으로 나타나지 않는 초자아(super ego)로도 대응시켜 보았다. 주인공은 자신이 붙잡고 통제해 줄 사람이 사라진 것처럼 작은 오빠의 죽음과 상실을 크게 느낀다. 작은 오빠는 본능적이고 에너지가 높은 큰오빠에게 야금야금 사로잡혀 자신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정서적인 문제를 비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창가의 토토’라는 책은 중학교 때에도 고등학교 때에도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선정한 필독도서 중 한 권으로 들어가 있었지만 손에는 판타지소설이 찰싹 붙어 떨어지지를 않았고 읽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서머힐 학교 같이 교육사의 일부분을 장식하고 있지 않지만 아시아권에서도 이러한 학교가 운영되고 있었다는 것에서 개방적인 그 교장 선생님의 가치관이 그려졌다.태평양 전쟁의 전후를 배경으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사회의 부속품으로 만들어내려는 기존의 학교에서 토토는 부적합한 학생으로 퇴학을 당하고 일종의 대안학교인 도모에 학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도모에 학원 교장선생님과 대면한 토토가 4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며 ‘정말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아이구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 있어서 일반학교에 다닌다면 선발되어 창의력 교실 등에서 특별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토토의 능력-창의력-이 죽는다는 생각을 하였다. 오전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자유롭게 산책이나 자신이 하고 싶은 활동을 할 수 있는 학교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을 하거나 좌절을 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적인 교육일 것이다. 각자의 흥미를 중시하고 아이들의 생각을 최대한 반영하며 학문만이 배움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이 학습내용이라는 생각은 단순히 교육을 해서 아이들에게 졸업장을 주는 것이 목표인 학교와 비교하였을 때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획일적인 교육을 배워서 나가면 학생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토토가 상이군인들에게 위문공연을 갔을 때 모두가 부르지만 토토는 부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마음보다 오히려 남들이 하기에 그대로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먼저 배워 나간다는 다른 면을 보며 기뻐하였다. 일반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중에 뛰어난 아이는 특별한 교육을 통하여 사회를 이끌 인재로 키워지겠지만 나머지 대다수의 아이들은 어떠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일까? 대부분은 소수를 위하여, 상부에서 내려지는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만 남게 되지 않을까?고바야시 소사쿠 교장 선생님의 교육철학은 단순히 학교에서 학습하는 것만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주변에 있는 사회 구성원들에게도 관심을 주어 학교 주변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도 학생들에게 교육할 것이 있고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그 직업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 개인의 고유성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농부 선생님께 하였던 “밭일에 관한 한 당신은 선생님입니다.” 이 말 안에 자격은 장애물이 되지 않고 아이들에게 진짜를 보여줘야 한다는 교장선생님의 마음을 읽게 되었다. 사회는 전체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이루어진다는 가치관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약자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학교 분위기가 그러했으므로 장애를 지닌 '야스아키’는 자신의 신체를 전혀 콤플렉스로 느끼지 않았고 토토 또한 자연스럽게 그와 첫 친구가 되었다. 또 다카하시라는 키 작은 아이를 위해 교장 선생님은 운동회의 모든 프로그램을 다카하시에게 유리하게 해 주었다. 그 결과 한 학생에게 사회의 낙오자로, 환경이 좋은 학생만을 사회의 일원으로 선별하여 기존의 사회체제를 구성하는 기능론에 반하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볼 수 있다. 특수교사를 하려고 특수교육을 공부하고 있지만 내가 통합학급에 배치를 받았을 때 장애학생을 운동회에 참여시키기 위해 나는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을 것인가? 이리저리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해보고 참가시키도록 노력을 하겠지만 결국에는 장애학생을 참여 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결론을 낼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하지만 소사쿠 교장선생님은 운동회의 환경을 다카하시가 참가하여 잘 할 수 있도록 조성해 놓으셨다. 누구도 쉽게 알 수 없도록 배려하신 모습을 보며 교장 선생님의 생각의 깊이에 배움도 중요하지만 나의 생각의 폭과 깊이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장애 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님들이 몸이 불편하거나 발달지체의 아이를 일반 학교에 보내려 할 때 학부모들의 저항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아직도 비일비재한 우리네 현실은 그에 비추면 부끄럽고도 부끄럽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두 사람의 연애편지 속에 녹아있는 기독교적 사상에 가로막혀 독후감의 방향성을 잡기 어려웠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열어보고 덮기를 반복하면서 눈에 띄는 것은 사랑에 적극적인 여성인 엘로이즈와 금욕적인 남자 수도사의 표본인 아벨라르 입장차이였다. 그 중 아벨라르의 입장에 중심을 잡고 써 본다.성경에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였다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다. 여기서 5,000명은 여자와 아이를 제외한 ‘남자들’만을 셈한 것이다. ‘여자를 남자 앞에, 아내를 남편 앞에, 수녀를 수도사 또는 사제 앞에’라는 엘로이즈의 놀라움을 표현하는 서한을 보았을 때 교부철학의 영향이 컸던 유럽 중세에서의 여성은 남자보다 당연히 아래의 존재로 여겨졌을 것이다.엘로이즈는 첫 번째 편지에서 ‘당신은 따뜻한 말씀으로 위로해 주려 오시지도 않는가 하면’, ‘모든 내 불행의 근원이신 당신만을 바랍니다’라는 말들로 한 친구를 위로하듯 자신에게 사랑을 줄 것을 간절하게 요청하고 있다. 특이점은 엘로이즈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 여자 철학자였던 아스파시아의 주장을 기반으로 자신의 사랑을 주장하는 점이었다. 암흑기라고도 말하는 중세 유럽 시기에 헬레니즘 문화를 끌어온 것은 시대적 가치관을 뛰어넘겠다는 주도적인 여성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듯하여 흥미로웠다.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더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벨라르에게 가해졌던 신체적 손실은 ‘신이 환자를 구하기 위한 명의(名醫)같은 수법’이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육체적인 자극이 뜨거운 청춘의 불길에 의해 (중략) 사람들은 나를 순결하다고 합니다’라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열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매사에 있어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마음뿐이므로.’라고 표현하면서 자신을 수도원으로 피하게 한 아벨라르에게 원망보다 사랑에 불타는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봐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아벨라르의 나이 39세, 엘로이즈의 나이 17세에 처음 만났다는 걸 떠올리면서 두 사람을 심리학에 근거하여 풀어보면 재미있고 이해가 빠를 거 같아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단계와 연결해 보았다. 아벨라르는 자신에게 처해진 신체적 결손을 신에게 가까이 귀의하여 기독교 문화 사회 구조에 순응하고 공고히 하려는 생산성과 침체성(25~54세)의 시기로 보였다. 엘로이즈는 자신만의 정체성-신의 사랑보다 아벨라르의 사랑이 자신에게 더 필요하다-을 확립하고 능동적이며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친밀감과 고립감(19~24세)시기로 보여졌다.두 사람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두 개의 글을 읽어보게 되었다. 하나는 ‘12세기 지식인상: pter Abelard를 중심으로’라는 이희만 교수님의 글이고, 하나는 ‘자유로운 사랑의 법열과 그 비극을 온전히 책임지다: 엘로이즈’라는 한정숙 교수님의 글을 읽어보았다. 두 교수님의 지식을 발판 삼아 두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말해본다면 ‘사회적 규범의 한계’이다. 내가 배운 서양철학사에서의 플라톤은 절대적 관념을 말하는 이데아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 존재를 탐구하는 실재론을 말하고 있다. 아벨라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절대적인 이데아를 현실로 끌고 내려와 중세유럽의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하는 지식인이었지만 거세를 당한 후에는 ‘많이 잃은 자’로서 사회에 순응하게 되었다. 엘로이즈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자 앞에서 함께 갇혀버린 ‘한 인간’이었다.우연히 보았던 한 다큐멘터리에서는 유럽에서 ‘자유연애’가 결혼에 선행되는 시기를 산업혁명 이후라고 설명하였다.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전까지는 남존여비의 사상이 약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조선시대보다 자유로운 연애가 가능했다는 걸 문학작품들과 역사 다큐멘터리로 추측해 볼 수 있었던 경험들이 있다. 이 내용들의 공통점은 기록으로 남아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한 나라의 문화라고 알고 있는 문화들은 민중의 역사보다는 ‘상류층 문화’가 기록된 내용이 많을 것이다. 한정식집에 가면 신선로나 육전 등 민중들이 먹었음직한 음식보다 상류층 양반 이상의 사람들이 귀한 자리에 먹었던 음식이 나오듯 말이다. 그렇다면, 아벨라르와 엘로이즈가 살던 시대의 민중들은 어떠한 연애/결혼관을 하고 살았을지는 완전히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한정숙 교수님의 마지막 문장으로 갈음한다. ‘서양 중세는 어쩌면 다른 엘로이즈들도 품 안에 품고 있던, 겉보기보다 훨씬 다채로운 삶을 허용하고 있던 사회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