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병찬 선생과 역사인식돈헌 임병찬 의병장은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광월마을의 남산밑에서 출생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 한다. 그런데 돈헌 선생은 이복 동생 병대, 아들 응철, 손자 진, 수명 등 3대가 함께 항일 구국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었던 보기드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가문이다. 선생은 열여섯 나이에 전주부 식년감시에 장원급제후 가세가 빈한해 옥구현 형방을 시작으로 전주감영 공방 등 향리의 길로 나섰다.조선 후기에는 전라도 향리의 위세가 대단해서 흥선대원군은 전라도 향리들의 작폐를 충청도 사대부, 평안도 기생과 더불어 조선의 3대 폐단으로 지목했을 정도였다. 학문이 뛰어나고 계산에 밝았던 그는 향리들의 관행에 힘입어 막대한 재산을 모았던 것으로 추정된다.그러나 모은 재산을 모두 백성들의 빈민구제 활동과 독립운동에 내놓아 후손들은 만주 등지를 떠돌며 빈한한 생활을 하였다.임오군란이 일어나던 해 시국이 불안해지자 서른 두 살의 젊은 나이에 아내의 고향 정읍 산내면 장금리 산골로 친족들을 이끌고 이사를 했다. 그 후 영국군함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는 사건이 생기자 거문도에 성을 쌓는 설진별감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낙안군수로 1년 남짓 선정을 베풀다 귀향한 곳이 산내면 종송리(후에 종성리로 개명)였다. 그동안 집안에서는 동생 병대가 무과 전시 급제를 했고 아들 응철이 문과 전시에 급제를 한 경사가 있었다
금만평야(金萬平野)의 자부심으로 ‘새만금광역시’를 지향하자최 규 홍(전 군장대학교 명예교수, 임피향토사연구회 대표)오늘날 우리 전북의 심장부인 새만금을 둘러싼 현실은 참으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선조들이 천 년을 일궈온 비옥한 터전을 눈앞에 두고 지자체 간의 관할권 갈등이 법정 공방으로 치닫더니, 이제는 역사적 정통성 마저 무시한 행정통합 논의로 민심이 분열하고 있다. 최근 김제시의회에서 제기한 전주와의 통합 논의를 보며, 필자는 형언할 수 없는 비애와 위기감을 느낀다. 과거 임피현, 옥구현과 만경현이 인접하여 이뤘던 드넓은 들녘을 선조들은 ‘금만평야(金萬平野)’라 불렀다. 이제 ‘금만평야’는 단순히 쌀을 생산하는 땅에서 새만금으로 재탄성되었고 현대차의 새만금 투자로 로봇·수소·AI 산업단지로 비상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앞의 현실은 참으로 참담하기만 하다. 금강, 만경강, 동진강의 하류 도시에 불과했던 이들 지자체들은 2010년 새만금 방조제 준공 후 이제까지 매립지와 기반시설의 관할권을 놓고 싸우기만 했다. 그 이유는 새만금신항의 항만물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러더니 선거철이 돌아오자 최근 김제시의회에서는 전주시와 통합을 논의하여 도민들을 더욱 어리둥절하게 만든다.‘금만평야’의 역사를 잊었는가. 김제(金堤)와 만경(萬頃)의 이름이 합쳐진 그 명칭 안에 이미 군산과 김제는 하나의 경제 공동체이자 운명 공동체로서 역사적 지정학적 정통성이 깃들어 있었다. ‘새만금’이라는 이름 역시 새로운 ‘만경·김제 평야’를 개척한다는 뜻이 아니었던가. 그 이름의 주인인 우리가 왜 정작 그 정통성을 도외시한 채 밖으로 눈을 돌리려 하는가.강물은 하류에서 다투지 않고 하나로 만난다. 군산, 김제, 익산, 부안은 각각 떨어진 점의 도시가 아니다. 금강, 만경강, 동진강이라는 세 줄기 젖줄이 이 하류 도시로 흐르고 흘러 서해의 끝자락에서 하나로 만나 생명의 터전을 이뤘다. 지자체 간에 인위적인 선으로 나누기 전에, 우리는 같은 강물을 마시고 같은 바람을 맞으며 살아온 만백성(萬百姓)들 이었다. 세 강이 만나는 새만금에서 지자체들이 하나로 융합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자 지정학적 순리이다. 전주에서 새만금 까지 걸리는 시간이 불과 15분 거리라 하여 김제가 전주의 일부가 될 수는 없다. 행정 통합의 원칙에는 반드시 역사적 맥락과 지정학적 정통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백릉 채만식의 가족 이야기---------최규홍백릉 채만식이 간 지 70여 년이 흘렀지만 남긴 작품세계는 군산항 선창가에 불멸의 화신처럼 남아 있다. 고향의 후학들은 1984년 6월 11일 ‘탁류’의 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월명공원 정상에 「백릉 채만식선생문학비」를 건립했다. 문학비 전면에는 ‘탁류’의 머릿글이 선명히 새겨져 있다. 「---이렇게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 채 얼려 좌르르 쏟아져버리면서 강이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大處=도회지) 하나가 올라 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탁류’는 일제강점기 장마철 흙탕물 같이 세태에 휩쓸린 여인의 운명을 그린 사회상을 집약한 것이다. 그러면서 잔잔하게 흐르는 금강의 물줄기처럼 유려하고 토속적인 사투리가 펼쳐진다. 후면에는 이고장 시인 홍석영의 ‘글’이 새겨져 있다. 「---‘탁류’는 한 시대의 역사적 현장으로서 세태의 혼탁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인간의 탐구에 기여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했다. 군산항 내항 주변 미두장 터 가까이 쌀 창고가 있던 곳에는 ‘탁류’에서 미두장 투기로 재산을 탕진했던 서천 출신 정주사와 그의 딸 초봉, 고태수, 곱추 장형보 등의동상이 세워져 있다. 암울한시대를 살았던 그들이 타임머신을타고 와 째보선창가를 거닐고 있는 것만 같다.채만식은 중앙고보에 재학중이던 1920년 4월 부모로부터 결혼하러 급히 귀향하라는 편지를 받았으나 반응하지 않았다. 결국은 맏형이 상경하여 당시 교장이던 김성수에게 사실을 말하자 교장이 명령을 내려 부득히 귀향했다. 부모의 강권으로 함라에 사는 규수 은선흥(1901-1993)과 1920년 4월 21일 결혼(혼인신고 8월 15일) 했다. 그들은 구습에 따라 조혼을 했지만 결혼 초부터 별거를 했다.채만식은 부인 은선흥 사이에 무열(1924-1945)과 계열(1928-2004) 두 아들을 두었으나 남편과 정이 없었다. 그녀는 고아로 자란 여아(복열, 1926-1991)를 입양하며 외로움을 달랬다. 광복 직전 부인 은선흥이 시댁의 고된 시집살이 끝에 분가하여 친정 함라에서 살 때 일이었다. 채만식이 탄 버스가 처가가 있는 함라를 지날 때 장남 무열이 우연히 그 버스에 승차했다. 부자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으므로 채만식과 동행했던 사람이 ‘네 아버지’라고 언질을 주었다. 하지만 무열은 ‘나에겐 아버지가 없어요’라고 대답을 했다. 그때가 채만식이 고향 임피에 잠시 내려와 있을 때로 추정이 된다. 무열은 1945년2월 열병으로 함라면 함열리 358번지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은선흥은 무열이 친부와 만난 충격으로 죽었다고 생각했다. 장남을 의지하며살았던 그녀는 남편을 원망했고 상심은 매우 컸다.그후로채만식이 찾아와 대문을 두드려도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후 그녀는 가족을 이끌고 구리 교문리로 이사해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갔다. 5년 전 서울에서 만난 채석재(백릉의 자 계열씨의 장자)는 1993년 10월 21일 노환으로 별세(92세)하여 ‘남양주 모란공원’에 모신 조모의 묘소로 필자를 안내했다. 그는 조모가 생전에 사용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손때 묻은 재봉틀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채만식에게는 혼외부인 김씨영(金氏榮)과의 사이에 아들 병훈(1942-1985), 출가한 딸 영실(1944-생존추정), 영훈(1947-1996)을 두었다.백릉 채만식의 가족 이야기---------최규홍백릉 채만식이 간 지 70여 년이 흘렀지만 남긴 작품세계는 군산항 선창가에 불멸의 화신처럼 남아 있다. 고향의 후학들은 1984년 6월 11일 ‘탁류’의 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월명공원 정상에 「백릉 채만식선생문학비」를 건립했다. 문학비 전면에는 ‘탁류’의 머릿글이 선명히 새겨져 있다.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 채 얼려 좌르르 쏟아져버리면서 강이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大處=도회지) 하나가 올라 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탁류’는 일제강점기 장마철 흙탕물 같이 세태에 휩쓸린 여인의 운명을 그린 사회상을 집약한 것이다. 그러면서 잔잔하게 흐르는 금강의 물줄기처럼 유려하고 토속적인 사투리가 펼쳐진다. 후면에는 이고장 시인 홍석영의 ‘글’이 새겨져 있다. 「---‘탁류’는 한 시대의 역사적 현장으로서 세태의 혼탁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인간의 탐구에 기여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했다. 군산항 내항 주변 미두장 터 가까이 쌀 창고가 있던 곳에는 ‘탁류’에서 미두장 투기로 재산을 탕진했던 서천 출신 정주사와 그의 딸 초봉, 고태수, 곱추 장형보 등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그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와 째보선창가를 거닐고 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