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채만식 작가에 대하여
1902년 6월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에서 출생한 그는, 부친 채규섭(蔡奎燮)과 모친 조우섭(趙又燮) 사이에서 7남 2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평야지대로, 상당한 부농(富農)의 아들이었다. 그가 자라던 시기에, 우리나라는 일본의 토지 수탈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인 자본가들의 매점 매석(買占賣惜)이 성행하였다. 채만식의 부친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본인 지주와 자본가들에게 토지를 몰수당해 그의 젊은 시절은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려야만 했다. 또한 채만식의 고향은 바다가 가까운 곡창 지대로 교통도 편리하였기 때문에 물자의 교역이 성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수탈 행위가 더욱 심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문학이 식민지의 모순을 질타하고 해방기의 부정적인 현실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 것은‘구한말’로부터 식민지 시대와 해방을 거쳐 분단을 경험하는 근현대사의 격동기에 있는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채만식은 경성의 중앙고보를 마친 뒤에 곧이어 일본 유학길에 올라 1922년 와세대 대학 부속 제일 와세다 고등학원을 다녔다. 그러나 그는 군산 미두에 손댄 아버지의 경제적 몰락과 관동 대지진의 여파로 학업을 중단하고 이듬해인 1923년 귀국길에 오른다.
1924년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단편「세 길로」를『조선 문단』12월호에 발표하며 작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잠시 강화의 한 사립학교에서 교원으로 있다가『동아일보』,『개벽』,『별건곤(別乾坤)』.『혜성』,『제일선』,『신여성』,『중앙일보』등의 신문과 잡지에서 기자로 지냈다. 기자의 경험은 훗날 소설 창작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시대 현실에 대한 지식인의 고뇌와 식민지 사회 경제에 대한 날카로운 안목을 마련하는 바탕이 된다.
1936년 그는 조선일보 기자직에서 물러나 “노둔한 머리와 병약한 5척 단구를 통째로 내매껴 성패간(成敗間)에 한바탕 문학이란 자와 단판씨름을 하리라는 비장한 결심” 으로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의 전업 작가로의 선택은 새로 이룬 가정 채만식은 중앙고등 재학 중인 18세(1919년 4월)에 한 살 위였던 인근의 처녀 은씨와 결혼한다. 그녀는 두 아들을 낳았으나 남편의 불고(不顧)와 시댁의 박대로 친정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이혼절차는 밟지 않는다. 조혼에 실패한 후 채만식은 1936년 숙명여고 출신의 개화 여성 김씨와 가정을 새로 꾸린다. 그러나 1945년 이후 낙향했던 그는 병마 속에 은씨 소생의 두 아들을 그리워하지만 끝내 함께 살지 못한다. 첫 결혼 실패의 경험은 그의 초기 작품 속에 방종과 안정 사이의 갈등을 드러내는 자전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에서 철저한 문학인으로 살아가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전업 작가의 길은 예나 지금이나 대중적 환호를 받는 몇몇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고단하기 짝이 없는 수도자의 인고를 요구한다. 채만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본부인과 고향을 등지면서까지 새 가정을 꾸미지만 가난과 병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개성의 가형 집, 경성, 안양, 광나루 인근을 전전했고, 해방 직전 일제의 전시 소개(疏開)정책에 따라 낙향하였다. 작가로서 원숙한 경지에 도달해야 할 나이에 사십대를 채 넘기지 못한 원인도 따지고 보면 평생을 괴롭혔던 가난과 피폐해진 육신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48년의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나 한 듯, 후배에게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원고용지 20권을 구해 달라는 부탁의 편지를 보낸다.“이제 임종의 어느 예감을 느끼게 되는”지금,“죽을 때나마 한번 머리 옆에다 원고용지를 수북이 놓아두고 싶다” 고 그는 편지에 썼다. 원고지 스무 권은 그에게 글쓰기를 위한 정진의 다짐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겪었던 물적 궁핍에 대한 최소한 염원을 담은 물건이었다. 이런 생활의 핍절 속에 채만식은 6. 25발발 보름 전인 6월 11일 쓸쓸하게 눈을 감는다.
1924년부터 1950년까지의 작가 생활에서 그는, 10여 편의 장편, 80여 편의 중, 단편, 30여 편의 희곡, 촌극, 시나리오, 30여 편의 평론, 140여 편에 이르는 수필과 잡문을 남겼다. 시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문학 장르를 섭렵했다는 것은 그의 작가의 재능이 다방면에 걸쳐 있음을 일러주는 면모이다. 그는 동반자 작가로서 좌우 문단 모두의 칭송을 받았고 해방 후 좌우로 대립한 문단에서 중도적인 민족주의자의 입장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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