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사]이탈리아의 통일
- 최초 등록일
- 2005.12.14
- 최종 저작일
- 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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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비엔나 체제의 유럽의 시기에 이탈리아가 통일 하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한 것입니다. 참고한 책의 각주까지 세세히 달았답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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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옛 로마 제국의 영토이며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는 중세이후 로마 교황과 유럽의 여러 강대국들 (특히 오스트리아)의 간섭으로 인해 많은 군소국가들로 분열되어 상호 항쟁을 계속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수세기 동안 실로 ‘지리적인 표현’에 불과했다. 이탈리아에게 통일의 의지를 불어넣은 것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영향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말미암아 복고적인 비엔나 질서에 항거하는 운동이 1820년대로부터 시작되어 1848년 2월 혁명으로 이어졌으나 이탈리아의 자유주의 운동은 열강의 개입으로 모두 실패했다.
이탈리아 문제는 실제로 두 개의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로는 자유주의적인 헌법의 채택이었으며, 이는 물론 전통적인 보수주의에 대한 대항개념으로서의 자유주의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둘째로는 이탈리아 자체의 통일로서 이는 민족주의적인 이념적 기초에서만 타당성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탈리아의 경우 민족주의는 기존의 오스트리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여망 속에서 이론적으로는 잘 합치되어질 수 없는 자유주의사상과 통합될 수가 있었다. 통일을 이루기까지의 수세기 동안 이탈리아의 역사는 ‘재활’, ‘재생’을 뜻하는 ‘Resorigimento’의 정신 속에서 입헌군주제하에 있었다. 따라서 반보수적인 자유주의적인 운동이건, 反(반)오스트리아적인 민족주의 운동이건 이탈리아 사태는 이념적인 속성 때문에 모두가 유럽의 문제가 되어 있었다.
이탈리아의 통일에 대해 영국․프랑스는 자유주의적 사조 속에서 동정적이었고, 더구나 이는 영국의 상업적 이익을 위해서 이로운 것이었다. 오직 오스트리아의 세력이 급속히 감퇴함으로써 나타날 불안정상태를 막자는 것이 영국의 관심 대상이었다. 러시아는 이탈리아의 통일로부터는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였고, 프러시아는 비스마르크의 출현까지는 다분히 오스트리아에 묵종적인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통일에 가장 크게 영향받은 나라는 오스트리아임이 분명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에 대한 태도가 보수성으로 일관된 것임에 비해 프랑스의 태도는 한층 더 복잡한 것이었다.
참고 자료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 :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오기평. 『世界外交史』. 서울 : 搏英社,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