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천의 역사 및 행정지도 1-1. 선사시대 110여 기의 고인돌과 60여기의 선돌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 특히 용문면 상금곡리에 북방식 고인돌 1기가 있다.
- 최초 등록일
- 2024.02.24
- 최종 저작일
- 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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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 예천의 역사 및 행정지도 1-1. 선사시대 110여 기의 고인돌과 60여기의 선돌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 특히 용문면 상금곡리에 북방식 고인돌 1기가 있다."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예천 개황 2
Ⅱ. 개심사터 오층석탑 10
Ⅲ. 동본동 석불입상과 삼층석탑 19
Ⅳ. 용문사(龍門寺) 21
Ⅴ. 예천회룡포 33
Ⅵ. 초간정(草澗亭) 35
Ⅶ. 한천사 39
Ⅷ. 무섬마을(영주) 46
본문내용
Ⅰ. 예천 개황
1. 예천의 역사 및 행정지도
1-1. 선사시대
110여 기의 고인돌과 60여기의 선돌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 특히 용문면 상금곡리에 북방식 고인돌 1기가 있다.
1-2. 삼국시대
신라의 최북단에 위치한 우리 고장은 신라 제19대 눌지왕(417~458) 때 ‘수주촌’이라는 이름이 [삼국사기]에 있다. 신라 제22대 지증왕 6년(505)에 ‘수주현’으로 되었다. 통일신라 제35대 경덕왕 16년(757)에 영안(풍산), 안인(동로, 산북 일부), 가유(산양), 은정(상리, 하리)의 4현을 영속시켜 예천군이 되었다.
2. 예천지역의 지명유래
2-1. 예천(醴泉)
예천(醴泉)의 지명을 생각해보면 ‘샘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금방 알 수 있다. 물과 관련이 있는 땅이름은 ~천[泉· 川], ~주(州), ~수(水), ~개[浦], ~나루[津], ~항(港), ~해(海), ~원(源) 등 무수히 많다.
예천의 옛 이름은 수주(水酒)· 보주(甫州)· 기양(基陽)· 보천(甫川)· 청하(淸河)· 양양(襄陽))이었으며, ‘예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것은 신라 35대 경덕왕 때부터이다. 원래 예천의 지명 유래는 노상리의 군(궁)방골샘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또 예천의 관문 역할을 하던 서본리 지(주, 쥐)고개 밑의 박생(주천:酒泉)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들 샘물의 맛과 수질이 너무나 좋아서‘단술 예(醴) 샘 천(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고을이름‘예’자인 것으로 보아 원이름은‘샘골(고을)’로 추정된다.
여기서 군방골샘에 관한 설화를 소개한다.
옛날 예천 고을 담 밖 관혁동에 주천(酒泉)이란 샘이 있었다. 이 샘은 물맛이 달 뿐 아니라,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철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정유재란 때 울산지방의 왜군을 토벌하기 위해 예천을 지나던 명나라 장수 양호가 이 샘의 물을 마셔 보고 감탄한 나머지 “과연 예천의 이름처럼 물맛이 좋다”고 하면서 “예천의 지명은 이 샘 때문에 얻게 되었구나.”라고 극찬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