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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일련종(日蓮宗)의 성립과 전개   일련종의 소의경전인 법화경 개관   일련종(日蓮宗)의 주요 교리  석존은 이미 입멸하셨으며 하종(下種)의 부처도 아니므로, 그 삼보에 기초한 화도(化導)의 길도 소멸하였으며 올바른 본존을 확립하는 것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일련종(日蓮宗)의 성립과 전개 일련종의 소의경전인 법화경 개관 일련종(日蓮宗)의 주요 교리 석존은 이미 입멸하셨으며 하종(下種)의 부처도 아니므로, 그 삼보에 기초한 화도(化導)의 길도 소멸하였으며 올바른 본존을 확립하는 것은 될 수 없는 것이다.
    Ⅵ. 일련종(日蓮宗)1. 일련종(日蓮宗)의 성립과 전개1-1. 일연종의 개조인 니치렌[日蓮]의 생애니치렌(1222~1282), 그는 12세 때 천태밀교의 사원이 있던 청징산(淸澄山)에 입산하여, 16세에 출가했다. 그때부터 가마쿠라에 유학하고, 이어 21세 때 히에이산에 은거하여 그곳에서 10년간 불교연구에 몰두했다. 32세 때 일단의 결론을 얻어서 고향으로 돌아와서,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습득한 사상을 발표한 후, 가마쿠라로 가서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포교를 시작했다.니치렌은 다른 조사들과는 달리 유년기, 소년기에 부모가 건재했다. 따라서 그는 인생의 무상을 느끼지 못했으며, 현실에 대한 회의를 느낄 수 없었다. 다른 조사들의 경우에는 그것이 출가의 동기가 되었지만 니치렌의 경우는 불교를 통해서 학문을 습득하려고 했다. 말하자면 지적인 탐구가 출가의 동기였다. 따라서 그는 청징산(淸澄山)이나 히에이산에서 배운 천태본각사상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으며, 초기에는 일원론적이고 현실긍정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자신의 의지처로 삼았다. 그래서 그러한 세계관에 반대하는 것으로서 오로지 호넨[法然]의 정토염불에 공격의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그런데 가마쿠라에서 전도하기 시작한 지 5년 정도 지났을 무렵, 천재지변과 사회불안이 연속적으로 발생하여 그것이 니치렌으로 하여금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하였다. 그 회의란 불교가 여러 가지로 성대하게 신봉되면서도, 왜 재해가 속출하고 백성의 비참함은 날로 더해 가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니치렌은 이런 의문을 품고 불교를 다시 연구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의문이 풀어짐과 동시에 하나의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런 결론에 입각해서 저술된 것이 『수호국가론(守護國家論)』에서부터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에 걸친 일련의 책이다. 참된 니치렌의 불교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말 할 수 있다.니치렌이 내린 결론은 불교가 사회를 구제하는 것으로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개인의 영혼을 구제하게 되면 각 개인에게 알맞은 교의가 선별되고, 방법이 선택되어 염려가 없지만, 사회 전체의 구제라는 점에서는 불교가 하나의 단체가 되어 강력한 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니치렌은 그것이 이룩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불안을 제거할 수가 없었고, 세상이 혼라에 빠지는 것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 것이다.이렇게 해서 니치렌은 불교의 통일을 외치며, 그 통일의 주축으로 법화경을 새롭게 해석하여 채용하였다. 더욱이 사회구제에 있어서는 우선 위정자의 자세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저술하여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호죠[北條]에게 바쳤던 것이다.니치렌에 의하면 사회의 개혁 없이는 평화가 오지 않으며, 사회개혁은 바른 사상과 이념의 확립에 의해서 가능할 것이고, 따라서 불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불교가 사회개조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일치 협력하여 통일된 체제를 구축하고, 통일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이러한 측면에서 니치렌은 통일불교의 수립을 의도하고, 그 주축으로서 법화경을 한층 고양시키기에 이른다. 단 세계관으로서 불이원융(不二圓融), 천태본각사상을 기반으로 모든 것을 같은 계층, 평등으로 긍정하던 초기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러한 세계관에 입각한 천태 · 진언 내지는 선종에 대한 비판을 가하지 않고, 공격의 화살은 역시 호넨[法然]의 정토염불에 기울었다. 호넨에 있어서 세계관은 현실부정의 색체가 농후한 상대적 이원론이고, 형태적으로는 모두 관행을 폐기하고 염불이라는 하나의 관행만을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니치렌이 의도하고 있던 통일불교라는 형태에서 벗어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니치렌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그런데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통한 니치렌의 진언과 권고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염불을 비판한 것이 문제가 되어 탄압을 받기에 이른다. 40세 때 이두(伊豆)로 유배당하며, 50세 때 다시 좌도(佐渡)로 유배당한다. 그 사이에도 많은 박해를 받는 등, 고난에 가득찬 니치렌의 인생역정의 전개된다. 이런 수난은 결국 니치렌의 세계관에도 일대 전환을 초래하게 된다.이제까지 절대적 일원론의 토대 위에서 현실긍정적이었던 것이 현실에 대한 투쟁적, 변혁적인 것으로 변하고, 교판에 대해서도 역사주의적, 상대주의적인 카테고리를 형성해 간다. 이두(伊豆) 유배시기의 『교기시국초(敎機時國?)』, 『현방법초(顯謗法?)』에 보이는 비판의 내용이 그것이다. 결국 시대나 국가의 정황이나 인간의 근기에는 여러 자지고 있고, 그것에 순응하여 교설도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바로 지금 하나의 교의 · 사상이 선택되었다 하더라도 그 전에 어떠한 교의 · 사상이 유포되었는가를 파악한 후에 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불법 유포의 전후라고 하는 것이다.동시에 법화경에 대한 관점도 변해간다. 법사품 제10부터 촉루품 제22에 걸쳐서, 고난과 싸우면서 진리의 현실적인 구현에 힘쓰는 보살의 활동이 설명되어 있다고 확신하여, 그 부분에 주목하고, 거듭 인용하게 된다. 또한 자신을 그러한 보살의 유품을 계승한 자로 자각하고 자기의 독자적인 교의를 수립해간다. 그것이 책으로 저작된 것이 좌도(佐渡) 유배기에 쓴 『개목초(開目?)』와 『관심본존초(觀心本尊?)』이다.이리하여 후기의 니치렌은 도겐[道元]과 마찬가지로 절대 위의 상대를 견지했다고 말할 구 있다. 절대 위의 상대라는 것에 대해서는 호넨[法然] 역시 같은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호넨[法然]의 경우는 현실부정, 초월로 향하고 있었던데 대하여, 도겐과 니치렌은 연실구현, 개혁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런 도겐과 니치렌에 있어서도 전자는 개인적이고, 후자는 사회적이라는 점에서 각각의 독자상이 보인다. 결국 도겐은 개인의 주체적 실천과 실증에 철저했던 것이 비하여, 니치렌은 역사형성과 현실개혁을 중시하고 궁극적으로는 미래에 있어서 이상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1281년에 여원연합군에 의한 제2차 일본원정(고안의 역)이 일어나고, 이듬해 9월에 니치렌은 병을 얻었다. 지토 하키이 사네나가(波木井?長)의 권유로 사네나가의 영지가 있는 히타치 국(常陸?)의 온천으로 향하던 니치렌은 10일 뒤인 9월 18일에 무사시 국(武??) 이케가미 무네나카(池上宗仲)의 저택에 도착했고, 10월 13일 진시(오전 8시경), 니치렌은 그곳에숨을 거두었다. 향년 61세였다. 죽기 전에 이케가미 집안의 저택이 있던 골짜기 뒤편의 산 위에 절을 짓고 초요산 혼몬지(長?山本門寺)라 했으며, 죽기 5일 전에 제자 닛쇼(日昭), 니치로(日朗), 닛코(日興), 니치코(日向), 닛초(日頂), 니치지(日持)를 후계자로 정했는데, 이들은 훗날 육로승(六老僧)이라 불렸다.1-2. 일련정종(日蓮正宗)1) 연혁일련정종은 니치렌을 종조로 하며 직제자인 닛코상인을 파조(派祖)로 하는 불교의 종파이다. 일본의 니치렌 계열의 여러 종파 중에서 오직 니치렌 본불론을 내세우고 있으며, 과거에는 일련종의 승렬파(勝劣派)의 한 갈래로서 취급되었으나, 그중에서 후지문류즉 닛코상인을 파조(派祖)로 하는 닛코팔본산(興門八本山) 중에서는 총본산인 다이세키사, 그리고 본산인 묘렌사, 역시 본산인 사누키본문사등의 3개 본산이 여기에 속하며, 후지문류 중의 가장 중추적인 유력한 종파로 되어 있다.역사적으로는 종조인 니치렌의 입적 후에, 여섯 제자 중의 닛코상인이 총본산 다이세키사를 건립하여 총본산의 개조가 되었으며, 그 교의적 방향성을 결정지었다. 이후 7년 뒤 지역의 유력자였던 이시가와(石川)씨의 외호로 거처를 기타야마 혼몬사(北山本門寺)로 옮겨 만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리고 제자인 니치모쿠상인(日目上人)에게 혈맥을 물려준 뒤 오모스담소에서 제자의 육성, 지도에 힘을 쏟고 이곳에서 입적하였다.일련정종(日蓮正宗)이라고 정식의 종명을 붙이게 된 것은 20세기 초반으로 그때까지는 일련종승렬파의 한 종파로서 다이세키사파(大石寺派), 한때는 후지문류의 각 본산과 연합하여 일련종(日蓮宗) 흥문파(興門派)라고도 불렸으며, 이후 후지문류의 8본산이 연합하여 만든 일련본문종(日蓮本門宗)이라는 종파로도 잠시 형성되어 있었다. 일련본문종 시대에서는 8본산에서 호선으로 관장을 지내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정식으로 종조로부터의 혈맥의 호지 계승이 외호받기 어려웠고, 이 때문에 곧 대석사의 본산과 말사들이 모두 일본정부에 독립을 신청하여 이것이 정부로부터 인정받아, 1900년에 일련종 후지파(富士派)를 공칭, 1912년에는 일련정종으로 정식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현재 창가학회와 서로 분리되어 다른 종단으로 활동 중이다.2) 일련정종의 교의
    인문/어학| 2024.03.01| 28페이지| 2,500원| 조회(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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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굶주림과 질병 때문에 살아서 다섯 살을 넘기기 힘들다는 브라질 북동부에서 룰라는 태어났다. 가족과 함께 남부의 상파울루로 이사 온 그는 열두 살에 구두닦이를 시작했고, 금속 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했다.
    굶주림과 질병 때문에 살아서 다섯 살을 넘기기 힘들다는 브라질 북동부에서 룰라는 태어났다. 가족과 함께 남부의 상파울루로 이사 온 그는 열두 살에 구두닦이를 시작했고, 금속 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했다.
    제6편 브라질의 역사와 문화Ⅰ. 브라질의 지리와 역사1. 브라질의 지리1-1. 개관브라질은 남아메리카 대륙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국토의 총면적은 약 851만 ㎢로, 이 중 29%는 농지, 66%는 산림지이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거의 절반(47.3%)을 차지하며, 러시아와 캐나다, 중국,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나라다. 한반도의 약 37배에 이를 정도로 국토가 광대하다.브라질은 국토의 약 10분의 9가 적도와 남회귀선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국토의 대부분이 남반구에 속해 있으며, 전 국토 면적의 7%인 59만 ㎢만이 북반구에 걸쳐 있다. 브라질 국토의 종단 길이는 4,320㎞, 횡단 길이는 4,319㎞에 달한다. 국토 면적의 99.35%는 육지, 나머지 0.65%는 하천과 호수로 구성되어 있다.브라질은 에콰도르와 칠레를 제외한 남아메리카의 모든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우루과이, 남동쪽으로는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서쪽으로는 페루, 북동쪽으로는 콜롬비아, 북쪽으로는 베네수엘라, 가이아나(Guyana), 수리남과 프랑스령 기아나에 면해 있다. 동쪽은 대서양과 불규칙하게 접해 있으며 해안선의 길이는 약7,400㎞에 달한다.브라질은 국토가 광대하여 지역마다 기후가 상이하다. 수도인 브라질리아(Brasilia)는 18˚C~30˚C의 아열대성 기후를 보인다. 4월 중순에서 9월 말까지는 비가 오지 않는 건기로 매우 건조하다. 습도는 15% 이하로 사막기후를 보인다. 겨울철인 6월에서 8월 중순까지는 아침 저녁으로 쌀쌀하여 감기에 걸릴 수도 있다. 우기인 10월에서 익년 3월까지는 심한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하루 한두 차례 온다. 기온은 20˚C~30˚C로 한국의 5월 말이나 6월 초와 비슷한 기온이다. 습기가 적어 실내는 서늘하다.1-2. 지형적 특색브라질은 국토가 광대한 만큼 고지대와 저지대 등 다양한 지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브라질의 지형은 지정학적으로 크게 고원(高原) 지대, 구릉지대, 아마존 평원 등으로 나뉜다하고, 17세기 초에는 아마존 강 유역에 기지를 설치하는 한편, 1621년 네덜란드의 서인도 회사를 중심으로 식민과 교역을 강화하였다.164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브라간사 왕조가 시작되면서 유럽에서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사이에 적대 관계가 종식되고 조르지 마스카레냐스가 브라질 최초의 부왕으로 도착하였다. 그 후 브라질에서 부왕 제도는 260여 년 간 존속하여 최후의 부왕인 노롱냐가 재임 중이던 1808년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포르투갈 왕실이 리우데자네이루에 천도함으로써 끝을 맺었다. 식민 초기에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단지 원료 산지 및 관세 부과 지역으로 중요시했을 뿐 그곳의 개발 및 주민들의 생활상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따라서 교역면에서는 엄격한 독점 체제를 수립하여 대서양 횡단 선단의 밀수 방지를 위해 호송대를 파견하였다. 1554년 헤수이타파 선교사들이 브라질에 진출하여 상파울루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것이 상파울루라는 도시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158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합병되자 반데이란치스는 본국의 간섭 없이 내륙으로 쉽게 진출할 수 있었다. 1612년 프랑스 인들이 마라냥 주의 산루이스를 침공하여 정착하였으나 1655년에 축출되었다.1698년 미나스제라이스와 마투그로수, 그리고 1725년에는 고이아스에서 금이 발견되었다. 그러자 북동부 지역의 제당업자들이 노예들을 이끌고 금광 지대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1750년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마드리드 조약을 체결하여 선언적 조항보다 실질적 점유권을 인정하고, 또 측정보다는 강, 산, 호수 등 자연적 경계를 인정하여 토르데시야스 경계선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1761년 포르투갈측이 이를 무효화시켜 스페인과 갈등을 빚었다. 이어 1763년 포르투갈 정부는 브라질에서 부왕청과 세관을 광산 지대에 인접한 리우데자네이루로 이전시켰다. 그 후 1789년 브라질에서 포르투갈의 관세 정책에 반발하여 티라덴티스 지휘하에 반역 음모가 발생하였다. 결국 18세기 말에 이르러 브라질에서 포르투갈의 독점 교역그러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결과 사막화 현상이 나타날 정도로 토지가 거칠어지고 가뭄이 자주 발생하여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동남부의 커피 농장 일꾼들은 가난한 동북부에서 온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농사철에 가족 단위로 와서 일을 하고 있는데,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북부는 아마존 강 유역의 셀바스 지역으로 동북부와 마찬가지로 주민 소득이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이에 비해 남부 해안 지방은 주민 소득이 높다. 남부 해안은 기후가 비교적 온화한 편이고, 유럽과 만나는 교통 요지이다. 이곳에는 브라질 최대의 도시 상파울루와 세계적인 관광 도시 리우데자네이루 그리고 생태 도시로 유명한 쿠리티바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이 있다.* 빈민촌 파벨라해수욕장에 나온 소매치기들은 거의 가난한 동네에 산다. 브라질에서는 가난한 동네를 파벨라라고 부른다. 파벨라는 브라질의 수많은 도시에서 볼 수 있으며, 한 도시 안에도 여러 곳이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파벨라 수만 해도 800여 개나 된다. 그러나 파벨라에 외부 사람들이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심지어는 경찰도 들어가기가 어렵다. 파벨라에 사는 사람들은 불법으로 총 등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경찰에게서 총을 사기도 한다. 파벨라 조직은 수류탄뿐 아니라 기관총도 가지고 있어 그 화력은 일반 경찰의 것보다 강하다. 파벨라에서는 종종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한다.만약에 버스 기사에게 파벨라 부근을 천천히 달려 줄 것을 제안한다면 버스 기사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만약 이곳에서 외부 사람이 자동차를 세우거나 천천히 달리면, 주민들은 그들이 자기를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파벨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자기 보호구역인지도 모른다. 마을 입구에 경찰이 서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외부 사람들이 이 마을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리우데자네이루 사람들은 위험해서 아무 거리에서나 데이트를 하지 않는다. 갈 수 있는 곳이 있고, 가서는 안 될 곳이 있기 때문이다. 가서는 안 회를 반영하는 문화현상으로 나타난다. 브라질을 대표하는 문화현상으로 꼽히는 카니발, 까포에라, 삼바 등이 그 예이다. 위의 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문화적 흐름을 지배 계층이었던 백인이 아닌 흑인, 혼혈 인종들이 리드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어떻게 브라질 노예 계급이었던 그들이 현시대의 브라질 문화 현상을 주도하고 이끌 수 있었을까? “인종적 민주주의” 또는 “흑과 백 문화의 조화” 라고 불린다는 브라질의 독특한 문화 현상들이 생겨나게 된 원인과 의의를 카니발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1-2. 카니발- 개요카니발은 포르투갈의 가톨릭 문화와 아프리카의 토속 문화가 브라질이라는 공간에서 결합한 결정체이면서. 가장 생동감 있고 가장 사랑 받는 라틴 아메리카의 대중문화로 손꼽힌다. 또한 카니발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될 점은 부자와 가난한 자, 아프리카와 유럽, 가톨릭과 민간신앙, 남성과 여성이라는 브라질 사회의 이중적인 모습을 가장 진솔하게 그리고 종합적으로 담고 있는 사회, 문화 현상이라는 것이다.브라질인 들에게 있어 카니발은 진정 개방성과 다양성이 보장된 국민적 축제요 문화적 시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유럽적 요소와 아프리카적 요소가 한데 어우러지기까지 카니발은 아프리카 기원의 종교 의식과 마찬가지로 수백 년에 걸쳐 그 형식이 변해 왔으며 몇 십 년 전에 이르러서야 종합 예술적인 성격을 갖춘 오늘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흑인들의 춤과 리듬에서부터 시작하여, 파벨라의 하류층 사회를 거쳐, 20세기의 자본과 기술이 결합되어 종합 예술의 형태로까지 진화된 오늘날의 카니발. 300년 동안 노예였던 흑인들의 문화적 유산이 백인의 문화를 누르고 브라질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으며 카니발은 어떻게 브라질 문화의 상징이 되었던 것인가?1-3. 브라질의 카니발 (까르나발: carnaval)1) 카니발의 어원과 기원카니발의 어원은 기원전 6~7세기 구 로마시대, 바쿠스 축제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나체의 남녀가 동물들이 끄는 수레를 타고 외설적인 노래를 부르며 행진한 데서발이 망국병의 원인이라고 한탄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카니발이 브라질인들에게 가져다주는 민족적이고 사회, 심리적인 효과를 고려해보면 무의미한 논쟁이 될지도 모른다.브라질의 카니발은 무엇보다 우선 민주주의의 실현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브라질인에게 있어 카니발은 계급과 인종, 경제적 빈부의 차이를 뛰어넘는 완전한 평등주의와 민주주의의 실현의 장이다. 카니발을 통하여 그리고 카니발에 직접 참여함으로서 브라질 민중은 모두를 위하여 마련된 자리에서 똑 같은 복장으로 허물없이 춤을 추며 똑같이 즐기고 똑같이 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바로 카니발은 밝음과 어두움, 비이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문명과 미개의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고 식민지 국가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이원주의로부터 벗어나 타인과의 평등을 구가할 수 있는 자리인 동시에 또한 오랜 세월동안 전쟁의 경험을 겪지 않고 태평성대를 누려온 탓에 기인한 지나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극복하는데 가장 적절한 처방이기 때문에 하나의 국가와 하나의 국민으로의 통합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계기가 되는 것이다.오늘날 브라질 사회는 과거의 백인 중심 이데올로기에서 탈피하여 진정한 인종 민주주의를 향한 정체성 찾기 움직임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삼바, 카포에이라를 비롯한 아프리카 기원의 문화 현상들에 대한 연구와 진흥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인간성의 심연을 표현하는 미학적 감수성이 두드러진 흑인 문화가 새로운 세기에 브라질의 문화적 다원주의를 이루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부각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브라질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흑, 백 인종간의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에서부터 교육의 기회균등이나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보다 폭 넓게 정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브라질 하층민들이 장악한 카니발은 브라질 국가의 기호로써 부상했는데, 이는 브라질 국가가 그들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을 의미한다. 흑인 요소들에 대한 가치의 전화는 그들 문화의 승리를 가져오
    생활/환경| 2024.02.28| 74페이지| 2,500원| 조회(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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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파라과이에 대한 최초의 탐험은 1524년 스페인 항해가인 디아스 데 솔리스 탐험대에 동승한 포르투갈의 모험가 알레이쇼 가르시아에 의해 1525년에 이루어졌다. 그 후 스페인의 카를로스 5세는 1535년 페드로 데 멘도사에게 파라과이 지역의 식민화를 명령하였다.
    파라과이에 대한 최초의 탐험은 1524년 스페인 항해가인 디아스 데 솔리스 탐험대에 동승한 포르투갈의 모험가 알레이쇼 가르시아에 의해 1525년에 이루어졌다. 그 후 스페인의 카를로스 5세는 1535년 페드로 데 멘도사에게 파라과이 지역의 식민화를 명령하였다.
    제5편 파라과이의 역사와 문화Ⅰ. 파라과이의 지리와 역사1. 지리볼리비아와 더불어 남아메리카의 내륙에 위치한 파라과이는 406,752㎢에 이르는 영토를 가지고 있다. 파라과이의 면적은 한반도의 약 1.8배, 남한의 약 4배에 달한다. 남쪽으로 아르헨티나, 동북쪽으로 브라질, 북서쪽으로 볼리비아와 맞닿아 있다. 남아메리카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서 ‘아메리카의 심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국토 중 초원이 55%, 산림지대가 32%를 차지하며, 파라과이 강이 국토의 중심을 지나 파라나 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연평균 23℃의 온화한 아열대 기후, 비옥한 토양, 풍부한 수자원 등 천혜의 자연환경을 보유하고 있어 전통적으로 농업과 축산업이 국가경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파라과이는 전 국토가 대륙성 아열대 기후를보인다. 연평균 기온은 22.5℃이며 지역에 따라 극심한 편차를 보인다. 10월부터 3월까지 하계 기온은 22~42℃(평균 32℃), 4월부터 9월까지 동계 기온은 3~32℃(평균 15℃)를 나타낸다. 연간 평균 강우량은 1,500mm에 이르며, 브라질과의 국경지대는 1,700mm에 이른다.파라과이는 내륙 국가이고 국토 전면이 거의 평지이기 때문에 지진, 해일, 산사태 등 대규모 자연재해는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비가 많이 올 때는 배수시설이 열악하여 차도나 도로가 침수될 위험이 있어 외출을 삼가는 것이 좋다. 또한 여름철에는 높은 기온으로 인하여 뎅기열 발병이 빈번하다. 열사병, 탈수 등에도 유의해야 한다.2. 파라과이의 역사2-1. 식민시대 이전 : 과라니족파라과이 지역을 중심으로 과라니 족(Guaranies)이 거주하였다. 그들은 농업과 수렵으로 생활을 영위했으나 제물을 바치는 관습은 없었다. 그들은 관할 지역의 식물을 가지고 식량과 약용 식물로 사용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사원, 궁전 및 도로 같은 것은 건설하지 않았다. 그들은 방대한 지역을 계속 이동하여 언어적으로 과라니 - 투피 집단을 이룩하였다. 그들의 사회 조직은 결혼을 기반으로 카는 아순시온에서 여러 지역으로 원정대를 조직하여 파견하였다. 그러나 차코 지방에는 광산 지역이 없었다. 그 후 알바로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는 아순시온에서 체포되어 스페인으로 호송되고, 도밍고 마르티네스 데 이랄라가 다시 그곳의 통치자로 선언되었다. 그는 1556년 죽을 때까지 아순시온에서 농목 경제를 기초로 새로운 자급자족의 사회 건설에 주력하였다.파라과이에서는 1564~1593년 사이 30년 동안에 여러 지역이 식민화되었다. 1592년 아순시온 지방의 정치적 혼란으로 시 의회가 소집되어 에르난도 아리아스 데 사아베드라(Hernando Arias de Saavedra)를 통치자로 선출하였다. 그는 스페인 원정대원의 아들로 1560년 아순시온에서 태어난 크리오요(Criollo)였다. 그가 1631년에 사망할 때까지 아순시온 지역의 주민들은 두 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중 한 파는 헤수이타파를 중심으로 폐쇄된 자급 자족 경제 체제를 옹호하는 집단이고, 또 다른 한 파는 그러한 체제는 지리 및 경제적 측면에서 손실을 초래한다고 주장하던 집단이었다. 에르난도 아리아스 데 사아베드라는 집권시 특산물인 마테차(Yerba Mate)의 재배 및 상품화에 반대하여 아순시온의 경제를 쇠퇴시켰다.파라과이에는 1556년에 최초로 가톨릭 주교가 도착하였다. 그 후 1588년 헤수이타파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주로 파라과이의 남동쪽과 현재의 브라질 및 아르헨티나 영토인 파라나 강 남부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들은 1609년경부터 선교 구역 내에 자급자족 경제 체제와 도시 조직을 갖추고 신정 제국을 건설하려고 시도하였다. 결국 헤수이타파의 선교 활동은 식민자들과 마찰을 빚게 되어 아순시온에서 선교사들을 추방하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더구나 1717년 디오고 데 로스 레예스 발마세다 총독이 차코 지역에서 원주민 폭도들을 체포하여 농장주들에게 분배하지 않고 헤수이타파 선교단에 인도함으로써 식민자들의 반발이 더욱 거세졌다. 그로 인해 1720년대에 수많은 농민 폭동이 발생하였다. 그로 선출하여 파견하였다.당시 파라과이 대표로 선출된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는 파라과이 자치 정부의 수립에 따른 연방 결성을 위한 제안을 갖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의회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의견은 강력한 중앙 집권주의 형태의 통합 정책이었다. 결국 양측의 주장이 달라서 상호간의 독립을 수락해야 했다. 그러나 파라과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측이 리오데라플라타 하구를 봉쇄하고 있어 통상 문제로 부에노스아이레스측과 우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1811년 10월 강대국의 침략시 상호 협력을 약속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1811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체결한 지원 동맹과 경제 및 교역에 관한 조약 사항의 준수 문제로 파라과이 군부 내에서 장교들 간에 갈등을 빚었다. 이는 군비면에서 열세인 파라과이를 강력한 포르투갈이 보복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측이 스페인 왕실군, 그리고 리오데라플라타 지역에 침공한 포르투갈인들과 전투를 위해 파라과이측에 지원을 요청했을 때 발생하였다. 당시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는 이에 반대하면서 새로운 의회의 구성을 요구하고 나섰다. 결국 파라과이 정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측의 요구를 계속 거부하면서 독립을 시도하는 우루과이의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를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파라과이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 사이에서 외교적 마찰을 빚게 되었다. 그러자 부에노스아이레스측은 파라과이에 대해 경제적 제재 조치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1813년 9월에 제2차 대표자 회의가 소집되어 헌법을 채택하고 10월 12일 파라과이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신정부는 집정관 제도를 채택하여 집정관으로 프란시아를 지명하였다. 또, 대표자 회의에서는 프란시아가 작성한 정부 규정을 승인하고, 장군 제도를 창설하여 독립군 지휘관들을 파라과이군 최초의 장군으로 진급시켰다. 집정관제 정부는 행정 기구를 개편하면서 유럽 국가들과 교역 관계를 수립하였다. 또한, 군부 조직을 개편하면서 성직자의 부패 문제트로에스네르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뒤 7차례의 선거에서 계속 당선되어 8차례나 대통령직에 올라 장기 집권했다. 그러나 1989년 2월 자신의 측근이자 제1군사령관인 장군 A.로드리게스가 민주화를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켜 스트로에스네르는?실각하였고 브라질로 망명하였다. 로드리게스는 1989년 5월 총선을 실시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약속대로 1993년 8월 문민정부에 정권을 이양하였다. 이후 문민정부는 군부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1998년 5월 실시된 선거에서 라울 쿠바스 그라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전 육군사령관 오비에도(Oviedo) 석방문제로 여야의 대치정국이 지속되었다.?부통령 아르가냐 암살사건으로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라울 쿠바스 그라우대통령은 취임 7개월만인 1999년 3월 사임하였으며,?헌법규정에 따라 루이스 곤살레스 막치 상원의장이 쿠바스 전대통령의 잔여임기인 2003년 8월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곤살레스 막치 대통령의 군부 개혁으로 군부영향력이 현저히 축소되었다. 2000년 5월 반정부 쿠데타가 발생하였으나 진압되었다.?2003년 4월 대선에서 당선되어 8월 15일 취임한?니카노르 두아르테?대통령은 1993년 민정이양 이후 처음으로 정통성에 하자 없이?정권을 이양 받았다.3. 파라과이 문화3-1. 종교파라과이는 원주민인 과라니족(Guarani) 문화와 스페인 문화가 접목된 독특한 혼합문화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중적 요소가 민요 · 미술 · 문학에 반영되어 있다. 과라니 악사(樂士)들은 에스파냐풍의 하프와 기타를 연주하고 라틴아메리카 스타일의 유럽 댄스를 즐긴다. 또한 가톨릭 성당이나 교회 장식에는 과라니 스타일의 조각이나 목각이 이용된다. 이밖에 파라과이의 가장 대표적인 공예품으로 거미줄 모양의 레이스인 냔두티(Nanduti)에서도 두 요소를 함께 볼 수 있다.??파라과이는 전 국민의 97% 상당이 가톨릭을 신봉하고 있어, 가톨릭 교단이 정치, 사회 등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각 지인 괌파는 전통 특산품으로도 유명하다.5) 치파치파(Chipa)는 만디오카(mandioca)나 옥수수 가루, 돼지기름, 파라과이 치즈(queso paraguay), 달걀, 소금, 우유, 아니스(anis) 등을 넣고 반죽한 뒤 적당한 모양으로 표면이 딱딱해질 때까지 오븐에서 구워낸 빵이다.4. 한국과 파라과이 관계한국과 파라과이는 1962년에 수교하였다. 이후 1973년 문화협정, 1975년 과학·기술협정, 1981년 무역협정, 1982년 사증면제협정, 1992년 투자보장협정, 1996년 범죄인 인도협정 등을 체결하였다.파라과이는 예부터 한국에 우호적이고, 국제무대에서 항상 한국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왔으며,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한국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경제발전 모델을 자국에 적용하려고 애쓰고 있으며, 한국 기업의 투자진출, 경제, 기술, 교육 등의 분야에서 한국과 실질적인 협력 관계를 증진하려고 애쓰고 있다.한국 이민자들이 파라과이를 거쳐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의 근접 국가나 미국, 캐나다로 이주하는 경향을 볼 때 파라과이는 한국인들이 미주지역으로 이민하는데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1965년 2월 27일 농업 이민선발대 10세대 75명과 이민 예정 가족대표 25명이 ‘보이즈 밴’호를 타고 부산항을 출발하여 1965년 4월 22일 아순시온(Asuncion) 항에 도착함으로써 파라과이 이민 원년을 기록했다. 이후 파라과이는 미주지역 이민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해왔다. 지금까지 파라과이를 거쳐간 이민자수는 약 25만 명인 것으로 추정된다.현재 파라과이에는 약 5천명의 한인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다. 한인동포들 중 약 80%가 아순시온에 거주하며, 나머지는 시우다드 델 에스테, 엥카르나시온, 페드로 후안 카바예로, 코로넬 오비에도 등지에 거주한다.파라과이 이민 제1세대는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지만, 현재는 식료품 판매업, 잡화판매업, 의류 제조 및 판매, 전자제품, 신발류, 직물 및 의류수입, 서비스업 등에 종사한다. 한인동포들이 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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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이과수 폭포의 절정은  악마의 목구멍  이었다. 말발굽 모양으로 상류 쪽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형태로, 그 깊이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물안개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는데, 으르렁거리는 물소리와 어울려 폭포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느낌이 악마의 달콤한 유혹 같았다.
    이과수 폭포의 절정은 악마의 목구멍 이었다. 말발굽 모양으로 상류 쪽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형태로, 그 깊이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물안개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는데, 으르렁거리는 물소리와 어울려 폭포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느낌이 악마의 달콤한 유혹 같았다.
    제4편 아르헨티나의 역사와 문화Ⅰ. 아르헨티나의 자연환경과 역사1. 자연환경아르헨티나는 면적 278만㎢, 인구 3953만 명(1990년)에 달하는 남미 대륙에서 브라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국가이다. 남북 사이의거리는 3,690㎞이고, 동서 사이의 최대 폭은 1,423㎞, 최소 폭은 300㎞이다. 아르헨티나의 지역적 특성은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첫째, 북서쪽의 소위 푸나지역은 해발 4,000m 이상의 황량한 평원 지대를 이루고, 또 많은 호수와 산줄기들로 덮여 있다. 둘째, 북쪽에서 남쪽으로 칠레와 국경을 이루는 안데스 산맥 지대가 있다. 이는 주산맥, 동부 산맥, 변형 중인 파타고니아의 안데스 산맥 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셋째, 살타와 후후이 사이를 연결하는 소산맥지대가 있다. 이는 푸나와 소안데스 산악 지대 사이의 지역이다. 넷째, 소안데스 산악에서 해발 2,000m 정도에 이르는 동부 산맥으로 연결되는 산악 지대가 있다. 다섯째, 안데스에서 분리되어 산후안, 멘도사 및 라리오하로 연결되는 소산악 지대가 있다. 여섯째, 대초원을 형성한 구릉 지대가 있다. 일곱째,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이 있다. 여덟째, 파라나와 우루과이 강 사이의 아르헨티나 유역 지대가 있다. 아홉째, 살라도 강이 통과하는 차코 - 팜파의 평원 지대가 있다. 이 지역은 곡물 생산과 목축업이 성행하는 비옥한 지대이다. 열째, 건조하고 해풍이 심한 안데스에서 대서양까지 연결되는 반(半)사막의 파타고니아 고원 지대가 있다. 이 지역의 대서양 연안에는 많은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리오데라플라타의 길이는 사실상 300㎞에 불과하지만, 볼리비아에서 발원하는 필코마요, 살라도, 파라과이, 브라질에서 기원하는 파라나 강과 우루과이 강이 연결되어 리오데라플라타 수계를 이루면서 아르헨티나에서만 35,000㎢의 유역을 형성하고 있다. 리오데라플라타 하구의 폭은 아르헨티나의 산안토니오 곶과 우루과이의 푼타델에스테 사이를 기준으로 230㎞에 이른다. 파라나 강의 길이는 4,023㎞이고, 그중 아르통령은 태환정책(1991년 4월) 및 시장개방조치를 단행하였다. 1999년 12월 10일 급진당과 국가연대당의 연합야당 후보인 페르난도 데라루아 대통령이 취임하였다.2-6. 데라루아 대통령의 하야 및 임시정부 출범데라루아 대통령은 취임 이후 계속되는 경제정책 실패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긴축재정 정책 일환으로 예금인출 제한조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과격한 민중시위에 의해 2001년 12월 20일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였다. 이에 상원의장이 48시간 동안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수행하는 한편, 의회에서는 산루이스주지사 로드리게스 사아 임시대통령을 선출하였으나, 집권당 내 정책 불협화음으로 사아대통령도 사임하게 되었다.결국 2001년 12월 31일 의회 상하 양원 합동회의는 데라루아 대통령의 잔여임기 기간 동안의 임시대통령으로 페론당의 에두아르도 두알데 상원의원을 선출하였다.2-7. 네스토르 키르츠너대통령 정부의 출범에두아르도 두알데 대통령은 집권기간 동안 절박한 경제난 타개를 위해 국제통화기금과의 구제금융 협상을 진행하는 한편 정치안정에도 주력하였으나, 경제위기 대처 실패와 빈번한 대규모 시위에 따른 정국 및 사회불안이 지속되었다. 이에 따라 에두아르도 두알데 대통령은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2002년 7월 조기대선 실시 계획을 발표하였다.2003년 4월 27일 실시된 대선에서 전(前)대통령이었던 메넴 후보가 24.3% 지지율로 1위, 에두아르도 두알데 대통령이 지원한 중도좌파 성향의 키르츠너 후보가 22%의 지지율로 2위를 기록하였으나, 결선투표를 앞두고 여론의 강한 반 메넴 정서에 밀려 메넴 후보가 사퇴함으로써 결선투표 없이 네스토르 키르츠너 후보가 당선되어 2003년 5월 25일 취임하였다.2-8.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키르츠너현 정부 출범집권 당시 고속 경제성장으로 인해 압도적인 지지기반을 보유하고 있었던 네스토르 키르츠너 전 대통령의 재선 출마 가능성이 기대되었지만 2007년 7월 19일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키르츠너영부인이 대선라도 더욱 커지고, 라디오와 축음기의 영향으로 탱고의 인기는 더더욱 높아져갔다.4) 탱고의 침체기 (1960~1970년대)가) 군부독재와 로큰롤의 유행아르헨티나 탱고는 1960~1970년대 침체기를 맞는다. 60년대부터 이어진 계엄과 군사정권, 그리고 급격히 유입된 미국문화 특히 로큰롤에 의해 탱고는 잠식당했다. 아르헨티나는 제2차 대전 이후 지속적인 장기 불황을 맞게 되었고, 군사 독재의 정치적 불안이 가중되는 가운데 세 사람 이상 모이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이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더 이상 모여서 탱고를 출 수도 없었고, 탱고 악단 리더였던 푸글리에세 마저 수감되는 등 탄압의 시기를 겪으면서, 아르헨티나 탱고는 근근이 겨우 맥을 이어가는 침체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침체기 와중에도 탱고의 혁신을 꾀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스트로 피아졸라다.나) 누에보 탱고의 시작, 아스토르 피아졸라1950년대에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아스트로 피아졸라는 탱고의 침체기를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혁신을 지속적으로 시도하였다. 아스트로 피아졸라와 같은 선구자들에 의해 작은 그룹의 오케스트라가 대형 오케스트라로 대체되고 탱고 연주만을 위한 콘서트도 열렸다. 이들의 음악은 춤추기 위한 음악이라기보다는 연주를 위한 곡으로 ‘누에보 탱고(최신의 탱고)’라고 한다. 1940년대부터 이어져온 연주곡으로서의 탱고에 대한 시도가 확립되어 탱고가 춤과 완전히 독립하여 콘서트장에서 단독으로 연주되는 독립된 장르로 개척된 것이다.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누에보 탱고’는 아르헨티나 전통 탱고의 뿌리에 클래식, 특히 피아졸라가 숭배하던 스트라빈스키와 바르토크의 음악과 미국 재즈의 접목을 시도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무대 위에 올려지는 스테이지 탱고를 개척하고 옹호했으며, 탱고에 클래식 음악과 재즈를 접목시키고 악단을 피아노, 반도네온, 바이올린, 베이스, 기타의 다섯 악기로 구성하는 실험을 하였다. 처음에는 가르델처럼 전통적인 탱고를 불순하게 타락시킨다는 비난을 받아 보수적인 고국 아 여자는 왼발을 축으로 오른쪽 뒤로 돌아서 남자의 오른쪽으로 오른발을 내디딘다. 다시 왼쪽으로 남자가 리드하면 위 동작을 반복하게 되고, 남자가 자신의 앞쪽으로 리드하면 원래의 살리다(Salida) 3보 동작으로 돌아간다. 다음은 동작의 실행에 대한 발의 움직임이다.2보: 남/ 왼발을 옆으로여/ 오른발을 옆으로 살리다의 2번 스템과 동일3보: 남/ 제자리에서 여자를 자신의 왼쪽으로 리드여/ 남자의 리드에 따라 등이 남자의 왼쪽으로 향하도록 90도 회전한후 왼발을 뒤로(남자의 왼쪽으로 디딘다)연속동작으로 디딘 왼발을 축으로 180도 회전4보: 남/ 여자를 자신의 오른쪽으로 리드여/ 오른발을 뒤로(남자의 오른쪽) 디딘다..5보; 남/ 오른발을 여자의 왼쪽으로, 여자 왼발 뒤로 살리다의 3번 스템과동일하다. 그 다음은 살리다의 동작을 따른다.4. 아르헨티나와 인접국 간의 관계4-1. 아르헨티나의 남미공동시장과의 관계세계경제의 블록화 추세에 대응하기 위해 1995년 1월 아르헨티나는 브라질, 우루과이, 파라과이 등 3개국과의 남미공동시장 창설에 합의하고, 미주자유무역지대(FTAA) 설립에 앞서 브라질과 함께 역내 통합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남미공동시장이 창설된 지 15년 이상이 경과하고 있지만, 공동 대외관세 적용, 역내관세철폐 등의 문제가 상존하고 있으며, 역내 브라질-아르헨티나 간 주도권 분쟁, 우루과이나 파라과이 측 소외감 등으로 남미공동시장(MERCOSUR) 결속에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다.아르헨티나는 2009년에도 브라질 주도의 남미국가연합(UNASUR) 체제보다는 남미공동시장 통합에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고,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는 남미공동시장 역내 통합협상을 재추진하기 위해 관심을 경주하고 있는 상황이다.4-2. 아르헨티나와 칠레와의 관계아르헨티나는 칠레와 1세기에 걸친 비글해협 문제로 인하여 긴장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79년 1월 교황청의 중재로 양국이 남미대륙 남단의 비글해협에 위치한 3개 도서 영유권 관련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다. 그러다가 1616년 성당이 붕괴될 조짐이 보이자 재건축되었는데, 일부 부분 공사는 1618년경에 이르러서야 끝났다. 1620년 부에노스아이레스는?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주교좌 소재지, 즉?교구로 지정되었다. 그리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세워진 주 성당도 지위가?주교좌 성당으로 격상되었다.1662년 이후,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장이었던 크리스토발 데 라 만차 이 벨라스코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 호세 마르티네즈 데 살라자르에 의해 대성당의 재건축이 실시되어 1671년에 완료되었다. 완공된 대성당은 오늘날과 같이 세 개의?네이브와 이를 덮은 나무 지붕과 탑으로 구성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질이 나쁜 건축 자재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1680년대에 대성당의 탑과 지붕이 내려앉았다. 이후 1684년 아스코나 임베르토 주교의 지시로 대성당의 전체적인 재공사가 착수되었으며, 1695년 파사드의 면 보루 탑과?제의실?등이 거의 완공되면서 건물이 대략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18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공사 속도가 늦춰졌으며, 첫 번째 탑만이 1721년경에 겨우 완공되었다. 두 번째 탑은 1722년에 공사가 개시되어 1725년에 완성되었다. 정면 파사드는 1725년~1727년에 이탈리아의 예수회원 조반니 비안키에 의해 재설계되었다. 새로 설계된 파사드는 이탈리아?르네상스 건축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1752년 5월 23일 밤에 대성당의 네이브가 붕괴되었다. 붕괴될 당시 파사드와 탑들은 무사했지만, 나머지 부분은 완전히 재건축해야만 했다. 이탈리아 건축가 안토니오 마셀라가 대성당 재건 계획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1753년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마셀라는 반원통형의?궁륭?아래 네이브에 세 개의 복도와 더불어 대성당 내부 측면에 부속 경당들을 설치하는 등 이전의 대성당보다 훨씬 큰 규모의 장엄한 모습으로 설계하였다. 돔은?교차랑과 마주한 형태로 설계하였다. 그러나 돔이 거의 완성되기 직전에 균열이 발견되어 재건축해야만 했다. 마셀라는 총책임 자리에서 .
    생활/환경| 2024.02.28| 50페이지| 2,500원| 조회(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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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불교는 밀교(密敎)와 현교(顯敎)로 나눌 수 있다. 현교는 겉으로 드러나 있다는 뜻의 현로불교(顯露佛敎)를 줄인 말이다. 겉으로 드러났다는 것은 역사적 존재로서 화신불(化身佛)인 석가모니에 의한 설법이나 문자를 통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현교로는 조계종 천태종 태고종 등이 있다.
    불교는 밀교(密敎)와 현교(顯敎)로 나눌 수 있다. 현교는 겉으로 드러나 있다는 뜻의 현로불교(顯露佛敎)를 줄인 말이다. 겉으로 드러났다는 것은 역사적 존재로서 화신불(化身佛)인 석가모니에 의한 설법이나 문자를 통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현교로는 조계종 천태종 태고종 등이 있다.
    Ⅴ. 밀교(密敎) 진각종(眞覺宗)1. 밀교 개관1-1. 밀교란 무엇인가?불교는 밀교(密敎)와 현교(顯敎)로 나눌 수 있다. 현교는 겉으로 드러나 있다는 뜻의 현로불교(顯露佛敎)를 줄인 말이다. 겉으로 드러났다는 것은 역사적 존재로서 화신불(化身佛)인 석가모니에 의한 설법이나 문자를 통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현교로는 조계종 ? 천태종 ? 태고종 등이 있다.밀교는 비밀불교를 줄인 말이다. 비밀(秘密)에서 비(秘)는 심오(深奧)하다는 의미인 비오(秘奧)의 비(秘)이다. 밀(密)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의미인 은밀(隱密)의 밀(密)로서, 진리의 본체인 법신불 즉 비로자나불의 자연실상이다. 심오하고 은밀한 뜻을 지닌 밀교는 통상의 언어?문자에 의한 설법으로는 깨달을 수 없고, 신비적인 직관에 의해서만 체득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불교란 뜻이다. 한국에서의 밀교 종파로는 진각종 ? 총지종 ? 진언종 등이 있다.비밀불교(秘密佛敎)→밀교(密敎)?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심오한 불교? 진리자체[法身]의 설법진각종 ? 총지종 ? 진언종현로불교(顯露佛敎)→현교(顯敎)? 겉으로 드러난 설법?경전의 불교? 석가모니불[化身]의 설법조계종 ? 천태종 ? 태고종 ? 법화종불교(佛敎)비밀불교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나가르쥬나[龍樹]가 지은『대지도론』이다.『대지도론』권4에「불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비밀이다. 또 하나는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佛法有二種 一秘密二現示)」라는 기록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밀(秘密)은 심오하여 드러나지 않는다는 의미인 듯하다. 비밀불교를 통상 줄여서 밀교라 한다. 밀교가 비밀불교의 약자라는 것은『대지도론』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즉『대지도론』권4에는 비밀로 표현되었으나, 권65에는 비밀이 아니라 그냥 밀(密)로 표현되었다.일반적으로 비밀이란「숨기어 남에게 알리지 아니한 것」을 일컫는다. 따라서 밀교를 비밀불교라 할 경우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밀교가 심오한 불교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또 현실생활에서 매우 유익한 실천방법을 지니면서도 부인 말로 표현하는 진언[口密]을 하고, 붓다의 마음인 무아의 경지[意密=三摩地]에 이르면 중생은 바로 붓다와 일체가 된 것이다.이상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밀교를 정의할 수 있다.「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심오한 철학적 체계를 가진 종교로서, 삼밀수행(三密修行)에 의해서 즉신성불을 목표로 하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불교.」1-3. 밀교(密敎)의 특성1) 현실긍정 ? 현세이익의 추구불교의 근본적인 목적은 정신적 행복의 추구[精神的至福]이다. 이를 위해 세속을 떠나 금욕적 생활로 해탈을 하는 것이 출가자들인 승려이다. 즉 번뇌와 업장을 소멸하여 적멸(寂滅)의 도를 추구하는 것이 불교 중에서 현교이다.밀교는 적멸(寂滅)의 도를 기본으로 하되 세속적인 행복도 중시한다. 부를 축적하거나 출세하여 명성을 얻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밀교에서 주문을 외우는 진언 수행법을 통해 번뇌와 재앙을 없애고 복을 불러들인다. 이것은 해탈을 통한 영원한 미래의 행복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간의 이익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교와 다른 밀교의 특성중 하나이다.현교와 밀교가 추구하는 것을 아래의 표로 요약하였다.증장(增長)의 도(道)? 부 ? 명성의 세속적 행복추구- 욕구추구 ? 현실긍정행복의 추구[精神的至福]적멸(寂滅)의 도(道)? 번뇌 ? 업의 소멸에 따른 해탈- 금욕적 생활 ? 현실부정밀교(密敎)적멸의 道 중심이나 증장의 道도 중시현교(顯敎)적멸의 도 추구2) 즉물적(卽物的) ? 상징적(象徵的) ? 의례적(儀禮的)? 즉물적(卽物的)초기 대승불교는 재가신자의 적극적인 참여로 불교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중기 대승불교 때부터 차원 높은 불교이론인 유식설과 중론 등이 제시되면서, 불교는 출가자 중심의 전문적인 학문연구로 변하였다. 학문과는 거리가 먼 재가신자들은 불교로부터 점차 이탈하여 새로이 등장한 힌두교로 전환하였다. 그러자 불교에서는 재가신자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밀교가 성립되었다.밀교가 추구하는 것은 대승불교의 고차원적인 이론을 재가신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다.삼밀 중에서 구밀에 의한 합일의 경우를 보자. 현교에서 주로 염송하는 경전은「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로 시작되는 밀교계통의 천수경이다. 천수경의 중심인 신묘장구대다라니 및 진언은 의미와 관념보다는 소리 그 자체가 중요하다. 의미와 관념은 분별이 근간이어서 번뇌가 일어난다. 그러나 분별이 없는 소리에 주의력을 집중하면 자아의 중심은 소리로 이동한다. 즉 자아는 떨림과 느낌으로 진리의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我入於佛 : 자아가 부처의 세계에 들어가다.] 그리고 자아는 텅 비고[空] 소리 자체도 없어진다. 자아의 텅 빈 공간에 우주의 진리가 들어온다.[佛入於我] 이것이 자아와 진리의 상응(相應)이요, 유가(瑜?)이며, 신비체험이다. 이 때 성불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현교와는 다른 밀교의 즉신성불이다.아래의 표로 소리에 의한 즉신성불의 방법에 대해 요약했다.성불(成佛)의 방법현교(顯敎)밀교(密敎)삼세(三世)성불?견성성불?왕생성불즉신성불(卽身成佛)의미개념밀교의 즉신성불 방법→삼밀유가관행법(三密瑜?觀行法)구밀(口密)소리에 의한 신비체험신밀(身密)행위에 의한 신비체험의밀(意密)관념에 의한 신비체험소리신비체험[成佛]느낌말[言語]관념(觀念)2. 진각종의 창종2-1. 밀교의 전래1) 밀교의 발생29세에 출가한 그는 6년만의 수행 끝에 35세가 되던 해 자신이 원하던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님을 우리말로 ‘깨달은 사람’ ‘진리에 눈뜬 사람’이라고 하는 뜻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룬 이후 45년 동안 자신의 진리를 많은 사람에게 전하였다. 그 법은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초기불교(初期佛敎), 부파불교(部派佛敎),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시대를 겪으면서 발전하였다.?7C 중엽부터 인도사회에서 힌두교의 부흥과 대승불교의 형식화가 만연되자 민중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밀교(密敎)가 등장하였다. 이때부터 불교의 신앙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비밀의 교의와 의례를 스승이 제자에게 은밀하게 전달하여 간직하는 비밀스러운 신앙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을 중)을 수행한지 10년째인 1946년, 그간의 수행을 정리하고 깊은 도리의 실체험(實體驗)을 얻기 위하여 경 북 달성군에 정진도량(精進道場)을 설하여 100일 정진에 들어갔다. 불법의 포교방 법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여야 하고, 이 불법의 진리를 바탕으로 인간의 내면적 심성(心性)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사회적 과제도 100일 정진을 행한 이유가 되지만, 그보다 더 큰 뜻은 불법의 묘리(妙理)를 체득하려 하였던 것이다. 100일 정진을 마친 1947년 5월 16일, 새로운 불법(佛法)의 도리를 체득,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이때에 깨달은 육자진언의 묘과(妙果)는 그 후 회당이 설한 가르침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아집(我集)에 쌓인 자신에서 벗어나 진실한 실상(實相)을 되찾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자신을 철저하게 발견하는 '참회'를 하여야 된다는 것에 이르렀다. 즉, 참회에 의해서 자신의 참 모습이 드러나면 자신과 만상(萬相)의 은혜에 쌓인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즉, 회당이 깨달은 증과(證果)는 '참회의 진리', '은혜의 자각'에 있음을 알 수 있다.그 후 1947년(진기 1) 6월 14일에 교화를 시작, '참회원(懺悔園)'이라는 도량을 열고, 진기 4년 참회원을 서원당(誓願堂)과 심인당(心印堂)으로 수행도량을 이원화하였다. 진기 7년에는 종단(宗團)으로서의 면목을 갖추기 위하여 헌법제도를 실시하 , 인회(印會 : 總意機構)를 조직하여, 종단의 모든 일은 인회에서 결정하였다. 그 해 12월, 교명을 대한불교진각종 보살회(大韓佛敎眞覺宗 菩薩會)라 개칭하였으며, 진기 11년에는 진각종을 밀교종단으로서의 교상(敎相)을 확립시키고, 삼밀선정법 (三密禪定法) 등을 비롯한 수행법도 확립시켰다.종단의 내실을 기하면서 전국에 심인당(心印堂) 설립을 계속하고, 경전의 편찬 · 교화방편의 강구 등 교화에 전념하던 중, 진기 17(1963)년 10월 11일 대중을 모아 놓고, 교계(敎戒)를 설한 후 16일 62세로 입적하였다.3. 대한불교진각종의 중요 교리해방이후의 한原理)로, 보편과 특수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회당은 ‘상호반영 상호영향’이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긍정적인 발전, 그리고 조화와 공존을 지향하는 정신이다.이러한 관계를 아래의 표로 요약했다.회말이취본(會末而就本)취본(就本)진리의 실현지말(枝末)이원원리 : 세속의 실천원리이원상대원리이원전문원리이원상보원리만상은 무진연기만상은 가치적 존재만상의 조화와 공존3-2. 회당사상의 체계회당은 회말이취본(會末而就本)과 이원원리를 불교의 불신관(佛身觀)에 적용하여 기존의 현교와 밀교와는 다른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였다. 현교에는 불?법?승 삼보가 있다. 이때 불(佛)은 일체의 부처이며, 법(法)은 부처님이 설한 교법(敎法)이며, 승(僧)은 교법에 따라 수행하는 스님을 말한다. 그러나 진각종에서의 불(佛)은 법신의 정신이며, 법(法)은 법신으로부터 전개되는 당체설법(當體說法)이며, 승(僧)은 법신의 구체적인 활동체인 자성법신(自性法身)이다. 따라서 자성법신의 실현을 통해 법신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자성법신은 회당의『실행론』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비로자나부처님은 시방삼세 하나이라, 온 우주에 충만하여 없는 곳이 없으므로 가까이 곧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먼저 알라’라고 하여 바로 내 마음에 계시는 부처님이 자성법신이라는 것을 피력하였다. 이때의 자성법신을 중생의 입장에서 심인(心印)이라 부른다. 심인은 참회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현실의 고통인 병(病)?가난[貧]?투쟁[諍]이라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참회를 한다. 참회에 의해 밝혀지는 마음의 경지, 또는 인간심성의 본성을 심인이라 하여 교화의 중심개념으로 정립하였다.심인 또는 자성법신이라는 말은 개념적이요, 관념적이다. 밀교에서는 관념적인 것을 지양하여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낸다. 그래서 회당은 심인의 구체적 양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심인은 곧 다라니를 내 마음에 새겨 있는 불심인인 삼매왕을 가리켜서 말함이요, 삼밀로써 내 마음에 항상 심인을 새겨 가져 실상 같있다.
    인문/어학| 2024.03.01| 20페이지| 2,000원| 조회(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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