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함허당 기화의 생애"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說誼
2. 詩·頌·歌·讚
3.『顯正論』
본문내용
기화의 행장을 기록한 것은 문도인 野夫가 서술한 「涵虛堂 得通和尙 行狀」(이하 「행장」)이 유일하다. 이를 바탕으로 그의 생애를 살펴보고자 한다.
기록에 따르면 기화는 그의 諱이며, 號는 得通이라 하였으며 옛 이름은 守伊, 號는 無準이라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옛 이름’이 俗名인지, 출가 후 처음 얻은 법명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스님의 행장을 기록함에 있어 俗姓과 字 또는 俗名을 밝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일부 경우에 있어서 속명과 법명 또는 당호와 법호를 명확히 구분지어 표기하지 않는 경우 또한 있다. 특히 기화의 경우 스스로 법명을 바꾼 일화가 전하고 있으므로 ‘옛 이름’이라 밝힌 것을 두고 속명이라거나 법명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다. 따라서 기화의 경우, 당호인 涵虛堂과 법호인 得通, 諱라고 밝힌 己和를 법명으로 칭하며, 守伊와 無準이라는 名과 號는 여러 연구에서 그 평가를 달리하고 있다.
기화는 1376년(고려 우왕 2)에 中原, 지금의 忠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劉聽은 禮曹에 소속된 관청인 전객시(典客寺)에서 일하였다. 어머니 方氏 부인은 오랫동안 자식을 얻지 못해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하여 아들을 얻었으니, 그가 곧 기화라고 전한다.
따라서 기화는 유교와 불교가 양립한 환경을 이미 유년기에 경험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관직사회, 그 중에서도 중국과의 외교를 담당하는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아버지를 통해서 유교적 지식과 환경을 학습했을 것이며, 어머니로부터는 일상 속 신앙으로서의 불교를 익숙하게 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성균관에서 수학한 이력으로 보아 유년 시절에는 유교적 입신양명의 가치가 다소 우위를 점하였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기에도 승려들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 바, 기화 개인에게 유교와 불교의 사상적 대립이 편파적이거나 적대적이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였으며 성균관에서도 그 학문이 출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21세 되던 해에 성균관 친우의 죽음을 접하고, 삶과 죽음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갖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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