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사회의 이해 / 삐라에 대해서
- 최초 등록일
- 2010.09.25
- 최종 저작일
-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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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한사회의 이해 리포트
자유주제 : 삐라
목차
1. 삐라의 시작과 그 과정
(1) 6.25 전쟁 당시 남북간의 삐라
(2) 전쟁 이후 남북간의 삐라
① 대남 삐라
② 대북 삐라
(3) 최근 삐라에 대한 정보
2. 삐라에 대한 의문들
(1) 북한이 남한에 삐라 살포를 중지해달라고 요구하는 이유
(2) 대북 삐라의 효과는?
3. 논평
본문내용
1. 삐라의 시작과 진행
(1) 6.25 전쟁 당시 남북간의 삐라
삐라는 6·25전쟁 때 남북이 심리전의 수단으로 활용, 양쪽에서 모두 25억장이 뿌려졌다.
대부분 상대편의 귀순이나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북한이 뿌린 삐라는 "연합군이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이 많았고, 연합군이 뿌린 삐라 중에는 활짝 웃고 있는 북한 포로들의 사진을 담은 것도 있었다. 이런 삐라들은 `안전보장증명서`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이 삐라를 지니고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의미다.
삐라는 한반도에서 치열한 선전전의 도구로 쓰였다.
왼쪽에서 위쪽 두 사진은 6·25 전쟁 중 유엔군이 북한에 뿌린 삐라
아랫쪽 두 사진은 지난 2000년 서울과 수도권 일원에서 발견된 북한 삐라.
(2) 전쟁 이후 남북간의 삐라
전쟁 이후에도 남북한은 체제 선전을 하기 위해 서로 삐라를 뿌렸다. 1970, 80년대 초 북한은 삐라를 통해 1974년 건립된 인민문화궁전과 평양 등을 선전했다. 이후 북한 삐라는 남한 대통령에 대한 노골적 비난으로 바뀌었다.
① 대남 삐라
6.25전쟁 직후에는 공산주의체제인 북한이 남한보다 경제적인 조건이 더 좋았기 때문에 월남보다는 월북하는 사람들이 그 당시에 많았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남한 사람들의 사상을 교화시킬 목적으로 삐라를 살포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들은 아래와 같다.
- "총 칼부림과 사람 잡이 밖에 못 배운…" 등 입에 담지 못할 인격 모독에 대한 내용
- "보람찬 삶이 기다리는 평양으로 가자!"
- "월북용사 행복의 프로필, 그들은 여가를 이렇게 즐긴다"는 노골적인 내용 대부분
- "북한의 주체사상 학습 조직이 한국군 내에 결성됐다"는 등 거짓 주장이 다반사
- 미군 철수, 보안법 철폐, 민족 공조, 북핵 합리화, 김정일 우상화에 대한 선전
-"한민족 7000만의 안전은 북한이 보장한다"
-"북한의 핵무기는 동족간에 사용 안 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