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사의 인식
- 최초 등록일
- 2000.11.08
- 최종 저작일
- 2000.11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목차
1. 발해사인식의 전제
2. 고려시대의 발해사 인식
3. 조선시대의 발해사 인식
본문내용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각 시대의 발해관은 발해국을 자국사로 인식하고 있었는가의 여부와 발해의 종족적 계통을 고구려로 인식하고 있었는가의 여부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문제는 서로 동일한 문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문제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발해를 자국사로 인식하면서도 발해의 종족적 계통에 있어서는 고구려와 다른 '말갈'로 보려는 기록들이 병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발해의 종족계통을 보여주는 중국측의 기록들이 각각 그 내용상의 혼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의 출신을 언급하면서 발해의 멸망시기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편찬된 {구당서}(후진, 945)는 발해를 '고구려 별종'으로 서술하고 있었는가 하면, 이보다 115년 늦게 나온 {신당서}(송, 1060)는 고구려와 다른 듯한 '속말 말갈인으로 고구려에 부속된 자'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이 결국 후세인들로 하여금 발해를 고구려인들이 세운 국가로 보기도 하고 마치 고구려인과 계통을 달리하는 말갈인들이 세운 국가로 보기도 한 원인이 되었으며, 한국사에서 발해의 자국사 논쟁이 벌어지게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대조영의 본래 모습은 '고구려의 속말(송화강) 지역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발해사 인식을 살핌에 있어 또 하나 주목할 수 있는 사실은 발해에 대한 인식이 시대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발해에 대한 인식이 꼭 '말갈'의 문제만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의 반증이다. 다시 말해, 한국사에서 삼한(마한) 및 통일신라에 대한 정통의식의 농도와 시대마다의 북방관 이를테면 고토 회복 의식의 농도에 따라서도 발해사에 대한 자국사로서의 인식 정도가 다르게 나타났던 면이 있었다는 점도 미리 밝혀두어야 할 것 같다. 따라서, 전자의 경우는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로 인정하면서도 신라사의 한 인접국 정도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각 시대의 발해사 인식은 항상 신라사 특히, 신라의 삼국통일관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또한 후자의 경우는 발해를 고구려와 종족적 계통을 달리하는 말갈의 후손 왕조로 생각하면서도 한국사의 체계에 넣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