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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도체공학] 반도체기초과정
    목차1. 반도체의 특징과 결합원리원자의 구조이온결합(ionic bonding)공유결합(Covalent bonding)금속결합(metallic bonding)< 물질의 전도성> 도체, 부도체, 반도체2. 반도체소자의 제조공정단결정성장규소봉절단웨이퍼 표면연마회로설계마스크(Mask)제작산화(Oxidation)공정감광액 도포(Photo Resist Coating)노광(Exposure)공정현상(Development)공정식각(Etching)공정화학기상증착(CVD:Chemical Vapor Deposition)공정금속배선(Metallization)공정웨이퍼 자동선별(EDS Test)웨이퍼 자동선별(EDS Test)웨이퍼 절단(Sawing)칩 집착(Die Bonding)금속연결(Wire Bonding)성형(Molding)1. 반도체의 특징과 결합원리1. 원자의 구조 : 원자는 중심에 원자의 핵 그리고 주위에는 전자가 선회하고 있다. 원자의 핵은 양전하를 띠고 있는 양성자(proton)와 전기를 띠지 않는 중성자(neutron)으로 구성되어 있으면 이들의 질량은 거의 같다. 핵 주위를 선회하는 전자는 음전기를 띠고 있으며, 핵 속의 양성자와 수가 같기에 원자의 총 전하는 0으로 중성이다.물질의 성질을 나타내는 것은 대부분 가장 바깥쪽궤도의 전자(가전자)에 의해서이며 이 전자는 원자에서 가장 높은 에너지 준위를 나타내며 다른 원자와 결합하여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2. 이온결합(ionic bonding)가전자를 버림으로써 안정을 찾으려는 원자와, 전자를 받아들여서 안정을 찾으려는 원자 사이의 결합으로 전자를 버린 양이온과 전자를 얻은 음이온 사이에 서로 당기는 힘에 의해서 결합이 이루어진다.예) 염소와 나트륨의 결합염소는 7개의 가전자를 가지며 1개를 받아들여 안정을 찾으려는 성질이 강하고, 나트륨은 1개의 가전자를 갖기에 가전자를 버림으로써 안정을 찾으려 한다. 결과적으로 나트륨은 양이온인 Na+가 되고 염소는 음이온인 Cl-가 되어 서로 당기는 힘에 의해 NaC자에 대한 핵의 구속력이 강하면 자유전자가 만들어지기 힘들게 되며 이런경우는 전도성이 작은 부도체가 되고, 핵의 구속력이 약하면 많은 자유전자를 갖게 되어 전도성이 크게 된다.1. 가전자대 : 가장 높은 에너지 준위로 비록 핵의 인력은 받지만 인력이 약하여 외부의 조건이 맞으면 원자핵의 구속을 벗어날 수 있는 에너지 준위.2. 전도대 : 가전자대의 전자가 핵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전자가 되는데 필요한 에너지 준위.3. 금지대 : 가전자대와 전도대 사이의 에너지 폭으로 가전자는 금지대 폭 이상의 에너지를 받아야 자유전자가 될 수 있다.*도체: 금지대의 폭이 없어서 가전자대와 전도대가 구별되지 않아 항상 자유전자가 존재한다.(온도의 영향) 전기 전도는 자유전자에 의해서 일어나며 금속결합이기에 전자가 떠난 자리를 다음 전자가 채우지 않음으로 홀은 이동하지 않는다( 가전자가 1개인 경우가 좋은 도체이다.)* 부도체: 금지대의 폭이 넓어서 가전자대의 전자가 전도대로 올라가기 힘든다. 그렇지만 부도체라도 금지대폭 이상의 전압을 가하면 전류가 흐르게 되며( 항복전압) 금지대의 폭은 열 에너지에 의해 좁혀질 수 있다. ( 가전자가 8개로 안정되어 있는 경우가 부도체이다.)* 반도체: 반도체로 쓰이는 4족 원자들은 서로 4개씩 공유결합을 하고 있음으로 가전자가 8개로 안정된 상태가 된다. 그렇지만 금지대폭이 부도체보다 훨씬 좁기 때문에 열 에너지에 의해 자유전자가 만들어질 수 있다. 즉 절대온도 0K 에서는 완전 부도체이지만 상온에서는 도체로 작용할 수 있다. 순도가 높은 진성반도체의 경우 열 에너지에 의해 전자들이 공유결합을 깨고 원자로부터 벗어나면 전자가 있던 빈 공간이 생기며 이를 홀(hole)이라 한다. 그러므로 전성반도체의 경우 홀과 전자가 1:1로 생긴다. 그리고 생성된 홀과 전자는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재결합 하게 되는데 홀이 다른 공유결합의 전자와 재결합 하므로 전자가 이동하는 동시에 홀도 이동하게 된다. 이런 진성반도체에 불순물을 소량 dopping 하므로써성장시킨다.그림1. 단결정성장과정그림2. 단결정규소봉(Ingot)2. 규소봉절단성장된 규소봉을 균일한 두께의 얇은 웨이퍼로 잘라낸다. 웨이퍼의 크기는 규소봉의 구경에 따라 결정되며 3인치, 4인치, 6인치, 8인치로 만들어지며 최근에는 12인치 대구경 웨이퍼로 기술이 발전하고 있다.그림3. 실리콘웨이퍼(Ingot)3. 웨이퍼 표면연마웨이퍼의 한쪽면을 연마(Polishing)하여 거울면처럼 만들어주며, 이 연마된 면에 회로패턴을 형성한다그림4. 웨이퍼 연마공정4. 회로설계CAD(Computer Aided Design)시스템을 사용하여 전자회로와 실제 웨이퍼 위에 그려질 회로패턴을 설계한다.그림5. CAD를 이용한 회로설계5. 마스크(Mask)제작설계된 회로패턴을 유리판 위에 그려 마스크를 만든다. 전자회로의 미세형상을 포함하고 있는 매우 정밀한 플래이트이다. 포토마스크는 유리 또는 쿼츠 플래이트의 한 쪽면이 크롬층으로 코팅되어있다. 전자회로는 이 크롬의 일부분이 에칭이 되어 형상화된다.포토마스크는 기본적으로 기판, 크롬 및 포토리지스트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기판으로는 주로 유리(glass) 또는 쿼츠(quartz)가 사용된다. 기판의 한쪽면은 크롬이 코팅되어있으며 크롬은 포토리지스트로 덮혀있다. 때에 따라서 크롬위에는 포토마스크 제작시 빛반사를 줄이기 위해 AR(anti-reflective)막을 형성하기도 한다.그림6. 포토마스크 구조6. 산화(Oxidation)공정산화막 형성은 실리콘 집적회로제작에서 가장 기본적이며 자주 사용되는 공정이다. 800~1200℃의 고온에서 산소나 수증기를 실리콘 웨이퍼표면과 화학반응시켜 얇고 균일한 실리콘산화막(SiO2)을 형성한다.그림7. 실리콘산화막의 형성실리콘 공정에서는 열산화막이 많이 사용되고, 그 외 실리콘 기판 위에 산화막을 형성하는 방법은 산화막을 형성하는 온도에 따라 다양하며 이 방법들을 소개한다.- 산화막 형성온도 영역1. 250-600도 : 양극산화,CVD,Sputerring2. 600-900도 : CVD 가 감소하게 되면 다층배선구조를 가지는 반도체 디바이스 제조시표면에서 단 차가 발생하여 동일한 패턴을 형성하는데 어려움이 뒤따르게 된다.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표면을 평탄화 하는 공정이 등장하였고 이 기술의 중요성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EX) 1G DRAM의 경우 0.18μm을 실현하기 위해 photo-lithography시에 점점 더 짧은 파장의 광원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기에 DOF의 기준은 점점 더 엄격해지고 있는 추세이다.그림10. 화학증폭성 포토레지스트의 미세 패턴 형성 공정9. 현상(Development)공정웨이퍼 표면에서 빛을 받은 부분의 막을 현상시킨다.그림11. 감광막의 현상공정10. 식각(Etching)공정회로패턴을 형성시켜 주기 위해 화학물질이나 반응성 가스를 사용하여 필요없는 부분을 선택적으로 제거시키는 공정이다.그림12. 식각공정반도체 소자 제조에 필요한 미세패턴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리쏘그래피와 함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공정이다.- 건식식각의 장/단점* 장점1. 비등방식각이 가능하며 정확한 패턴형성이 가능하다.2. 자동화가 가능하여 수율을 높일 수 있다.3. 진공분위기에서 처리가 되어 깨끗한 공정, 폐수처리 문제가 없다.* 단점1. 많은 공정변수를 가진다.2. 플라즈마 내의 이온의 충격이나 래디컬에 의한 손상, 오염발생3. 건식식각이 어려운 물질이 있다.( Cu , Pt )11. 이온주입(Ion Implantation)공정회로패턴과 연결된 부분에 불순물을 미세한 가스입자 형태로 가속하여 웨이퍼의 내부에 침투시킴으로써 전자소자의 특성을 만들어 주며, 이러한 불순물주입은 고온의 전기로 속에서 불순물입자를 웨이퍼 내부로 확산시켜 주입하는 확산공정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그림13. 이온주입공정12. 화학기상증착(CVD:Chemical Vapor Deposition)공정증착 공정은 화학적 기상 증착 XE "화학적 기상 증착" XE "기상 증착" (Chemical Vapor Deposition, CVD XE "Chemical Vapor 반도체장비*) CVD 반응의 종류- 열분해, 환원, 산화, 질화, 탄화, 합성반응*) CVD의 종류(1) 반응기 벽의 온도에 의한 분류- HOT WALL CVD : 주기적인 CLEANING 필요- COLD WALL CVD : 냉각 장치 필요(2) 반응기 내부의 압력에 의한 분류- APCVD (Atmosperic Pressure CVD) : 대기압 (1 atm)- LPCVD (Low Pressure CVD) : 수십mTorr~ 수십Torr(3) 활성화 에너지 공급방법에 의한 분류- Thermal CVD : resistance heating or rf induction heating- PECVD (Plasma Enhanced CVD) : rf(13.56MHz) or microwave(2.45GHz)- PhCVD (Photo-assisted CVD) : UV LAMP, IR LAMP- LCVP (LASER-assisted CVD) : LASER(4) 반응온도에 의한 분류- HIGH TEMP. CVD, LOW TEMP. CVD(5) 반응 기체의 종류에 의한 분류- CONVENTIONAL CVD : SiH4 등 NONORGANIC METALLIC SOURCE- MOCVD (METAL ORGANIC CVD) : ORGANICMETALLIC SOURCE(6) PRECURSOR 공급방식에 의한 분류- Conventional gas delivery system : gas source, bubbling- Liquid delivery system : liquid pump or LMFC+FLASH VAPORIZER13. 금속배선(Metallization)공정웨이퍼 표면에 형성된 각 회로를 알루미늄선으로 연결시키는 공정이며, 최근에는 알루미늄 대신에 구리선을 사용하는 배선방법이 개발되고 있다.그림15. 금속배선물질의 증착- 금속공정은 집적 회로에서 소자와의 접촉(Ohmic,Schottky) 소자들간의 연결(interconnection), 칩과 외부 회로와의 연결의 세 가지 기능을 몰딩공정
    공학/기술| 2005.04.21| 14페이지| 1,500원| 조회(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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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화정책] 우리나라의 고액권발행과 디노미네이션에 대한 고찰 평가A좋아요
    고액권 발행과 디노미네이션최종보고서목차1. 서론 12. 고액권 발행과 국민경제 32.1 국내 화폐시장 현황 32.1.1 국내 경제의 발전 32.1.2 화폐 유통 현황 62.1.3 국내 고액권 발행 내역 82.2 화폐 시장의 문제점 102.2.1 수표 발행의 경제성 문제 102.2.2 유통비용의 문제 112.2.3 사회적 비용의 문제 122.3 선진국 비교 및 시사점 142.3.1 선진국 사례 142.3.2 역사적 고액권 사례 172.3.3 고액권 발행의 시사점 193. 디노미네이션과 국가경제 213.1 디노미네이션의 개념 및 필요성 213.1.1 디노미네이션의 개념 213.1.2 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 223.2 디노미네이션 사례 및 시사점 233.2.1 디노미네이션 사례 233.2.2 디노미네이션의 시사점 264. 고액권 발행 및 디노미네이션의 정책적 방향 284.1 고액권 발행의 득실 및 정책 방향 284.1.1 고액권 발행의 득과 실 284.1.2 고액권 발행의 정책 방향 314.2 디노미네이션의 득실 및 정책 방향 334.2.1 디노미네이션의 득과 실 334.2.2 디노미네이션의 정책 방향 34참고문헌표 목차표 2.1 한국의 경제규모 1986~2002 4표 2.2 한국의 통화금융 지표1987~2002 5표 2.3 2002년 은행권 화폐 수급동향 6표 2.4 화폐발행잔액 비중 추이 7표 2.5 전국 금융기관 운영 CD/ATM기 설치현황 7표 2.6 한국의 고액권 발행 전후 10년간 물가 비교 9표 2.7 화폐(은행권) 폐기규모 추이 11표 2.8 은행권 종류별 평균 환수기간(월) 12표 2.9 고액권 발행 및 유통 비용 12표 2.10 OECD 각국별 화폐단위 및 고액권 현황 16표 3.1 세계 각국의 디노미네이션 사례 25표 3.2 고액권 화폐발행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개요 29표 3.3 고액권 화폐발행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 29표 3.4 고액화폐권의 선호종류 29표 3.5 고액권 화폐발행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 29표 3.6 고액권 화폐발행시 문제점 29 8.2%가 증가하였다.은행권을 기준으로, 2002년 화폐 폐기규모는 금액으로는 5조 9601억원에 장수로는 9억 440만장에 이르렀다. 이는 2001년에 비해 각각 34.3%와 16% 늘어난 수준이다. 연중 폐기된 은행권을 제조비용으로 환산할 경우 이는 약 540억원에 달하는 금액이다.은행권을 종류별로 분류해 보면, 만원권이 5조 3200억원(5억 3천만장)이 폐기되어 전체 화폐의 89%를 차지할 정도로 고액권 화폐의 폐기가 많은 형편이다.[표 2.3 2002년 은행권 화폐 수급동향] (단위: 억원, %)2000년2001년2002년발 행295,655(-6.9)314,025(6.2)325,198(3.6)환 수307,139(22.2)304,914(-0.7)306,817(0.6)순 발 행-11,4841)9,11118,381(은행권)-12,5398,05617,120(주 화)1,0551,0551,261화폐발행잔액214,249( 5.1)223,360(4.3)241,741(8.2)(은행권)203,164211,222228,342(주 화)11,08512,13813,399화폐민간보유액176,324( 9.5)187,184(6.2)198,642(6.1)한국은행 자료주 1) 2000년중 큰 폭의 순환수는 '99년말 Y2K와 관련하여 일시적으로 확대공급 되었던 화폐의 환수규모 증가에 기인2) ( )내는 전년동기대비 증감률(%)3) 화폐발행잔액 및 화폐민간보유액은 연말기준, 나머지는 연중기준임[표 2.4 화폐발행잔액 비중 추이]1999년말2000년말2001년말2002년말은행권10,000원권89.3387.9687.4187.305,000원권2.552.863.063.151,000원권3.623.944.033.95기 타0.060.060.060.06소 계95.5694.8394.5794.46주 화4.445.175.435.54합 계100.00100.00100.00100.00(단위: %)한국은행 자료[표 2.5 전국 금융기관 운영 CD/ATM기 설치현황]19*************2.7설치대수(대)4게 떨어졌기 때문이다.최고액권인 1만원짜리를 가지고는 한 가족이 외식을 할 수가 없으며 1만원권 10장, 즉 자기앞수표 10만원권이 이미 실생활에서는 고액권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전국 대부분의 은행 현금 지급기에서는 10만원짜리 수표를 현금과 동일하게 뽑아쓸 수 있게 된지 오래며, 이는 결국 현재 고액권인 1만원 보다는 자기앞수표 10만원권이 고액권으로서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겠다.10만원권 자기앞수표의 용지 1장의 가격은 25원 선으로 1만원권의 70원에 비하면 싸지만 수명이 1만원권의 경우는 4년이고, 약 10여일에 지나지 않은 수표에 비하면 약 100배이상 길다. 자기앞수표는 발행 후, 현금으로 교환되는 순간 곧바로 폐기되야 하기 때문이다.발행한 수표는 지폐와는 달리, 일정기간(현재는 3년)동안 마이크로필름에 담아 보관한 뒤 폐기 처분해야 하기 때문에 부대비용이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1만원권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은 결국 수표 유통의 문제점으로 전가되고 있는 셈이다.[표 2.8 은행권 종류별 평균 환수기간(월)]1999년2000년2001년2002년10,000원권7.06.31)7.17.95,000원권13.514.115.217.11,000원권13.315.616.018.1한국은행 자료주 1) 2000년의 경우 99년말 Y2K와 관련하여 일시적으로 확대 공급되었던10,000원권의 환수규모가 크게 증가한데 기인[표 2.9 고액권 발행 및 유통 비용]구분비용(2001년 장당기준)연간 총비용평균유통기간1만원권제조비용 약 70원2001년 305억원54개월10만원 자기앞수표발행수수료 50원(제조비용 약 25포함)추심수수료 0∼2,000원 부대비용 원1999년 3,358억원1)(부대비용 3,018억원)7일 내외1)한국은행 자료주1) 1999년 기준으로 한국은행에서 21개 국내은행을 2000년 11월에 조사한 결과 자료 : 각 금융기관, 한국은행2.2.3 사회적 비용의 문제10만원권 자기앞 수표가 사실상 10만원권 고액권의 역할을 함)47,589터키리라20,000,000(7)14,405한국원10,000(3)10,000외환은행 및 홈페이지 자료2.3.2 역사적 고액권 사례이제까지 발행된 최고액권의 화폐는 과연 얼마짜리 일까. 1923년 10월 독일에서 발행된 1백조짜리 마르크화가 역사상 최고의 고액면 화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의 인플레이션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을 때의 일이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을 때의 환율은 달러 당 4.20마르크였으나 종전 후 계속 오름세를 보이더니 1923년 1월 초 드디어 1만 마르크를 돌파했고 7월에는 16만 마르크로, 10월에는 2천4백20억 마르크로 치솟다가 11월에는 1달러를 얻기 위해 4조2천억 마르크를 가져야 했다. 그 무렵의 물가는 빵 한 조각이 8백억 마르크, 쇠고기 한 조각이 9천억 마르크, 맥주 한잔에 2천80억 마르크였다. 노동자들은 하루치 임금으로 손수레에 가득 찬 지폐를 받아 가게로 가게로 몰려들었으나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은 별로 없었다. 당연히 천정부지의 고액권들이 남발될 수 밖에 없었다. 4백만 마르크짜리 지폐를 시작으로 거의 매일 더 높은 단위의 지폐가 등장하더니 마침내 50조 짜리 주화와 1백조짜리 지폐가 등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당시의 미국 신문들은 독일의 이같은 현상을 '숫자의 광란' 혹은 '제로 (O) 발작' 이라고 부를 정도였다.현재 사용되고 있는 화폐 중에서는 OECD 국가중에서, 터키의 2천만 리라 화폐가 최고액면 화폐이다. 터키도 치솟는 물가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최근 1천만 리라보다 큰 2천만 리라의 고액권을 발행하여 사용하고 있으나, 이 화폐의 가치는 우리나라 돈으로 약 1만 4-5천원에 불과한 실정이다.[그림 2.3 터키의 최고액권 2천만 리라][그림 2.4 독일의 100조 마르크 지폐][그림 2.5 독일의 50조 마르크 주화]2.3.3 고액권 발행의 시사점현재 고액권 발행에 대한 논의는 잠시 수면 아래로 잠복중이라고 볼 수 있다. 인수위에서 고액권 발행과 디노미네이션에 대한 검토 의견이 나표시단위를 바꾸어야할 현실적인 소요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특히, '1달러=1원'이 된다고 우리경제가 미국과 대등해 지는 것도 아니다.화폐단위 변경은 그 자체로 엄청난 비용을 초래할 뿐더러 경제 주체들에 적지않은 혼란을 조성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더욱이 디노미네이션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실시시기, 화폐단위 절하비율과 호칭, 사전공고, 화폐 교환방법 등에 대한 철저한 사전준비가 필요한데 현재 그러한 준비를 위해서는 최소 2-3년에서 길게는 5년의 시간이 필요하기에 현재로서는 필요성이 그리 크다고 할 수 없어 보인다. 또한 긍정적 효과는 장기간에 걸쳐 나타나고, 그 계측이 어려운 반면에 부정적 효과는 계측이 어느 정도 가능하고 단기간에 나타나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디노미네이션에 대한 여론은 그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앞으로 머지않은 시점에 남북이 하나의 금융 체계를 갖추게 되거나, 동일한 통화 시스템을 갖게 되는 그러한 상황에 이르러서의 화폐 및 통화시스템의 전면적인 개혁을 염두해 두지 않는 한, 경제가 회복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현 시점에서의 디노미네이션은 단기적인 부정적 영향에 대한 우려로 여론 및 정부에서 이를 실시할 여유도 의도도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3.2 디노미네이션 사례 및 시사점3.2.1 디노미네이션 사례그동안 이루어져 온 한국의 디노미네이션을 보면, 두차례 모두 사회개혁적인 상황에서 디노미네이션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즉, 경제적 목적의 화폐제도 변경이 아니라, 한국전쟁 후의 불안한 상황에서 기인한 물가불안과 516 군사혁명에 따른 퇴장자금의 양성화를 위한 화폐 개혁적 차원의 성격이 강했다.- 제1차 디노미네이션제1차 디노미네이션은 1953년 2월 15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 13호'를 공표하여 시행하였다. 1차 디노미네이션은 3년여에 걸친 한국 전쟁으로 생산 활동이 크게 위축된 상태에서 계속적으로 거액의 군사비가 지출되면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날로 커지면서 통화의 대외가치가 폭락한 상황속에서 이루어졌다.
    경영/경제| 2004.01.17| 40페이지| 2,500원| 조회(1,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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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현대사] 1970년대 박정희의 정치에 대한 고찰 평가A좋아요
    목차◈ 1970년대 정치Ⅰ. 박정희의 독재 고착화 과정1)박정희 1인 체제의 완성(1) 박정희의 선거 조작(2) 5·25 총 선거(3) 4인체제의 몰락2)영구 집권을 위한 10월 유신(1) '10월 유신' 선포(2)제 8대 대통령 등극(3)유신 헌법 찬반투표3)긴급조치Ⅱ.남북관계1) 닉슨의 중공방문과 남북 적십자 회담2) 7·4 남북 공동 성명3) 10월 유신과 북한Ⅲ.국내의 정치적 역학관계1) 야당(신민당)2) 사법부3) 언론Ⅳ. 박정희가 실시한 정책- 새마을 운동Ⅴ. 평가1970년대 정치Ⅰ. 박정희의 독재 고착화 과정1)박정희 1인 체제의 완성(1) 박정희의 선거 조작박정희 정권의 정보기관들은 4·27 대선을 앞두고 '건수 올리기'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선거가 열흘도 남지 않은 시점인 4월 18일 '선거를 틈타 민중 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암약'해 왔다는 혐의로 재일 교포 대학생 서승(27세), 서준식(24세)형제 등 '간첩' 10명에 대한 구속 영장이 청구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들은 각각 7년형과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박 정권은 서승이 10개월 가량 김대중의 측근 김상현의 집에 기거한 적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 다른 관련자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물론 그 사건은 철저하게 조작된 것이었다. 서승, 서준식 형제가 1970년 서울 법대 재학 중 불법적으로 7박 8일동안 북한 여행을 다녀온 것 사실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재일 교포로서 모국에 대한 그리움에서 방문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권은 이것을 간첩 행위로 연관시키며 한 편의 무서운 음모극을 연출했던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중앙정보부의 조작으로 어차피 선거는 박정희가 이기에 되어 있었지만,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서인지 유권자들을 위협하는 소문은 여기저기에 떠돌아 다녔다. 예를 들어, 박정희·김대중 후보가 마지막 선거 유세 대결을 벌일 때 윤필용 단시 수도경비사령관이 김대중이 당선되면 '서울 거리에서 탱크를 보게 될 것'이라고 미 CIA책임자에게 했다는 공화당 의원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지는 않았다. 1971년에 일어난 이른 바 '10·2항명'은 박 정권의 포악함이 어느정도였는지 잘 말해주는 사례이다. 당시 공화당 의원 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백남억등 4인 체제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처음 이 4인 체제는 다분히 JP(김종필) 라인의 견제용으로 박정희가 등장시킨 것이었다. 67년의 제 7대 국회의원 공천 때부터 서서히 그 영향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4인 체제는 60년대 말까지 당의 재정, 공천, 운영등 전반적인 주도권을 장악하여 명실상부한 주류 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4인 체제의 주도권 장악은 어디까지나 박정희의 묵인과 이용가능성의 한계내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4인체제 당사자들은 이러한 역학 관계를 잘 터득하지 못했다. 특히 개헌과 71년의 박 대통령 3선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는 최대의 공로자로 자부하며 우쭐댔다. 그때가 사실은 가장 위험했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김성곤 같은 사람은 박정희가 3선 임기가 끝나는 70년대 중반을 내다보면서 권력구조의 개편까지를 구상했었다. 즉 박정희가 3선 임기가 끝나면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내각에 실권을 주는 이른 바 2원 집정 제안을 구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박정희의 귀에 들어갔을 때 박정희는 소름끼치는 눈매로 그를 노려보았다고 한다.박정희는 4인체제를 견제할 필요성을 느껴 김성곤의 영향권 내에 있던 일들을 신임 내무부 장관에게 맡겼다. 신임 내무부 장관 오치성은 장관이 된 지 두달여 만인 1971년 8월 16일 경찰 간부 220명은 권고 해임시키거나 인사 이동시켰고, 이어 8월 19일엔 시장, 군수, 구청장 및 도청 국·과장 204명은 인사 이동시켰는데, 이는 모두 4인체제 세력의 기반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치성에 대한 4인체제의 불만은 극에 이르렀다. 김성곤과 길재호는 때마침 내무부 장관이 책임져야 할 큰 사건들이 여러 건 발생한 점에 주목하여 야간에 영향을 미쳐 오치성의 해임 결 새야'라는 노래를 가르친 후, 각 가정을 방문, 학생들에게도 이 노래를 보급시키도록 지시하고 학부모들에게도 적극적인 국민투표 기권 방지 운동에 나서게 했다. 경기도 교육 위원회가 만들어 전국에 보급시킨 '유신새야'라는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새야 새야 유신새야 푸른 창공 높이 날아 조국 통일 이룩하고 자주통일 달성하자/새야 새야 유신새야 너도나도 잘살자는 유신헌법 고수하여 국력 배양 이룩하자/유신유신 우리 유신 우리 살림 오직 유신 유신체제 반대하면 붉은 마수 밀려온다."대학교수들도 대대적으로 동원되어 국민투표에 찬성하는 신문 칼럼들을 써댔다. 일방적인 찬성 유도와 선심 공세가 난무했고, 행정력의 말단 조직까지 동원된 '행정 투표'가 진행되었다. "투표 거부 반대를 위한 행정기관원들의 위협, 대리투표, 사전투표, 무더기 투표, 공개 투표, 중고등학교의 휴교, 교육 공무원, 심지어 유치원아이들까지 동원"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렇게 하여 2월 12일에 강행된 투표는 투표율 79.84%, 찬성 73.1%, 반대 25.1%로 나타났다. 이는 전체 유권자의 58.3%만이 찬성한 것으로 풀이되었다.3) 긴급조치1973년 12월 24일 각계 민주 인사 30명이 발기인이 된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 선언이 터져 나왔다. 그 날 민두 인사들은 서울 YMCA 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개헌 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하고, 백만인 서명 운동을 시작한다는 걸 선포했다. 이에 국무총리 김종필은 12월 26일 밤 9시 40분부터 1시간 40 분동안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한 특별 연설에서 개헌 운동의 즉각 중지를 요구하면서 강력한 처벌을 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였고, 이는 다음 날 조간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러나 개헌 청원 서명운동은 그런 정도의 위협으로 주저앉을 정도의 운동이 아니었다. 서명 운동 1주일 후인 1974년 1월 1일에 서명자는 5만 명을 넘어섰고 1월 8일엔 10만명에 육박했다. 개헌지지 서명자가 계속 늘어가는 상황에서 박 정권을 압박하는 성명과 시위가 이어졌다. 정권은 그 분위기를 이용해 아예 민주화 시위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리겠다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그게 바로 5월 13일에 공표 된 긴급조치 9호였다. 헌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지한 것이다. "일체의 유언비어 날조 및 헌법 비방 행위의 금지, 학생 집회 및 시위의 금지"등도 당연히 따라 붙었다.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변호사 이정석의 다음과 같은 해석이 적절할 것이다. "이름하여 긴급조치 9호! 산천이 떠는 법률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주권자이고 헌법제정 권력자로서의 국민이 '헌법'이라고 입만 벙긋해도 긴급조치 9호의 올가미가 다가오고 있었고, '헌법'이라는 글자가 인쇄된 유인물만 들고 다녀도 수사기관에 불려가야 했다....... 일본의 식민지하에서도 이런 법은 없었다. 하물며, 자유 민주주의를 내건 유신 선포 하에서 이러한 법률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한탄할 수박에 없다. 박대통령은 유신체제를 고수하기 위하여 긴급 조치 9호로 정계와 국민 여론은 완전히 봉합해 버린 것이었다. 제 3의 쿠테타임과 동시에 민주정치를 박할내는 핵폭탄이었다." 이처럼 긴급조치 9호는 1974년 1월 8일에 나온 긴급조치 1호 이래로 그간 공표된 긴급조치의 모든 반 민주성을 포괄한 긴급조치의 결정판이었다. 긴급조치는 한시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긴급조치 9호는 햇수로 5년, 날수는 1천9백69일이나 지속되면서 8백여명의 구속자를 낳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긴급조치 9호가 중점적으로 겨냥한 건 역시 대학이었다. 5월 14일 문교부는 각 대학내의 서클(동아리)들의 해산을 지시했고, 5월 20일 전국 98개 대학 총학장회의에선 전 고교 및 대학에 학도호국단을 결성하고 대학의 군사 교육체제를 강화하도록 지시했다. 따라서 긴급조치 9호 이후의 대학 캠퍼스엔 시위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마저 없었다. 서울대의 경우엔 1975년 2월 28일 동숭동 캠퍼스 철수식을 갖고, 3월 14일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여 개강하였는데, 서울대 정문 앞에는 기동 경찰 3백여명이 휴식하며 대기할 수 있는8월 30일까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모두 일곱 차례 열렸다. 그와 병행하여 남북 조절위원회 회담도 1972년 11월 30일부터 12월 1일까지 서울에서, 1973년 3월 14일부터 16일까지 평양에서,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다시 서울에서 ,모두 세차례 열렸다. 그러나 당시 남북은 가자가 동상이몽이었다. 남한은 주한미군과 국제연합을 외세로 보지 않았으며, 따라서 한반도 문제를 국제연합에서 떼어 내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는 북한의 노력에 반대했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역시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해 필요하다는 입장을 지켰으며, 연방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북한이 또 '남북 조절 위원회'의 5개 분과 위원회를 일제히 가동시켜 남북한이 다각적 합작을 꾀하자고 주장했을 때, 남한은 북한의 그러한 자세를 '현실성 벗는 일거 해결론'으로 못박고, 점진적이며 단계적이고 기능주의적인 접근 방법을 제시했다.사실, 당시 남과 북은 각자 계산법이 달랐을 뿐 나름대로 실리를 취하기 위한 계산에 몰두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선 북한이 남북대화로 대외관계에서 큰 성과를 얻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1973년 4월 이후 북유럽 5개국이 북한을 승인하였다. 북한은 1973년 5월 국제연합 산하기구인 세계보건기구에 가입하였으며 이에 따라 그 해 9월 5일 뉴욕의 국제연합 본부에 대표부를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남북 공동성명 발표이후 1973년 말까지 북한을 승인한 나라는 20개국에 이르렀다. 그러나 김일성은 대내적으로 더욱 큰 것을 얻었다. 북한도 북한식 '10월 유식'을 꿈꾸었으며 박정희의 10월 유신과 동시에 그것을 실행하였다. 북한은 10월 유신이 있은 지 2개월여 후인 12월 27일, 1948년에 제정된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사호주의 헌법'을 새로 만들어 1인 지배 체제를 강화하였다. 새 헌법은 집단 지도체제에서 후퇴하는 것과 기존의 '수령의 유일적 영도'를 강화한 것이었다
    경영/경제| 2003.08.27| 17페이지| 2,000원| 조회(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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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트남전쟁] 월남(베트남)파병 평가A좋아요
    목차1. 들어가는 말2. 월남전의 시작3. 국군의 월남파병 경과4. 파병의 성과- 군의 전투 경험으로 인한 전투력 향상과 현대화- 경제 발전 등 국가발전의 원동력5. 후유증과 문제점- 고엽제- 전쟁의 또 다른 희생양 라이따이한- 베트남 정부와의 관계문제6. 맺음말월남파병의 의의와 문제점1. 들어가는 말한국 현대사를 돌아봄에 있어 월남전 파병만큼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친 사건은 드물 것 같다. 특히 월남전 파병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군의 해외전쟁 파병이라는 의미에서 당시로선 엄청나게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월남전에서 전사한 무수히 많은 용사들과 살아 돌아왔으되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고 돌아온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 특히 고엽제 피해자문제 시한부 생부로부터 버림받은 라이따이한 이라 불리는 제 2세대 희생자 문제와 최근 불거져 나온 베트남 전쟁에서의 양민 학살문제까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런데 의외로 월남 파병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드문 것이 사실이다. 이런한 문제의 해결은 이러한 역사에 대한 인식과 의식의 확산이 더불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여기서는 베트남 전쟁의 시작과 우리 군의 월남 파병의 의의 및 그 후유증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2. 월남전의 시작디엔비엔푸 패배로 프랑스인들이 떠나고 난 다음에 새로 월남 땅에 들어 온 사람들은 미국인들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양 진영으로 나뉜 세계에서 만일 월남이 공산진영에 넘어가면 인접한 나라들도 차례로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도미노 이론을 믿은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어떤 일이 있어도 월남의 공산화를 막겠다고 나선 것이다. 제네바 협정 이후 남부의 월남공화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고딘디엠 대통령에 대하여 미국정부는 강력한 후견인 역할을 했다. 남북총선이 불발로 끝나면서 남부에서 공산주의자(베트콩)들은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고 고딘디엠 정권 타도를 목표로 하여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미국은 고딘디엠의 반공정부에 대하여 막대한 양의 군수 베트콩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으며, 그대로 두었다가는 남부 월남이 공산권에 넘어갈 것이 뻔해 보였다. 이에 미국은 한국등 우방국에게 군사파병을 촉구하며 베트콩과의 본격적인 전쟁을 벌인다.3. 국군의 월남파병 경과월남파병은 공산군과 전쟁 중인 월남공화국을 돕기 위하여 행하여진 우리나라 최초의 국군 해외파병으로써 처음에는 비 전투부대 파월계획안을 수립하고 파월에 따르는 제반준비에 착수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1964년 12월18일 브라운 주한미국대사는 박정희 대통령을 방문하여 월남사태에 대한 처지를 밝히고, 한국군을 증파해줄 것을 요청하였다.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국방부장관에게 병력증파계획안을 수립할 것을 지시하였고, 국방부는 그 준비에 착수하였다. 월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한다는 문제를 앞에 놓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론이 분분했다.국회에서는 야당이 월남 파병을 반대했고 국민의 여론도 이에 못지않게 뒤끓었다. 한국의 귀중한 아들들을 타국의 전쟁터로 보내 목숨을 잃게 한다는 점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으며 더욱이 월남전의 양상으로 보아 자국의 국토방위를 앞에 놓고 목숨을 바칠만한 의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 방문시에 미국 측에서 정치적으로 압력을 가한 결과 파병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라고 억측한 국민들은 정부의 처사에 불만을 품었던 것이다.그러나 시야를 좀더 널리 펴서 세계정세를 살펴보고 그 중에서도 동남아에 있어서의 정세를 참작하여 본다면 공산 베트콩과 싸우고 있는 월남전은 공산세력에 대한 민주주의의 대결이라고 봐야겠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월남전의 승리는 곧 민주주의 측의 승리며 한발 더 나가서는 한국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된다. 미국의 장기놀이 도미노에서 비롯된 도미노 이론은 한 국가가 쓰러지면 연쇄적으로 다른 국가도 잇달아 쓰러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도미노 이론은 미국의 대공정책의 기조가 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더라도, 또 한편 월남과 한국의 유사한 국제적 정세 하에서의 파병은 결국 미국의 압력에 불가피한 반대하던 야당인사는 물론 국민들 모두가 장병들의 무운을 빌며 환송의 대열에 참가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역사적인 거국적 환송식이 거행되었고 육군준장 조문환이 지휘하는 비둘기부대가 1965년 3월10일 인천항을 떠나 3월16일 사이공에 도착, 다얀으로 이동하여 그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5년 8월29일에는 맹호부대가 파월부대로 결정되었으며, 1965년 10월22일 퀴논 항에 도착한 다음 11월3일 미제1공수사단으로부터 전술책임지역을 인수받았다. 이어 1966년 6월1일 월남증파전투사단으로서 백마부대가 구성되었으며 1966년 9월22일 여의도공항에서 나트랑으로 공수되어 9월23일 지휘소를 개소하고 작전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해군은 백구부대와 청룡부대를 파월하였다.그러나 1968년 5월13일 월남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휴전협상이 미국과 월맹 사이에서 시작되고 월남전의 월남화 계획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우방 국가들의 군대는 1971년부터 철수를 시작하게 되었다.한국군은 1971년 12월부터 1972년 3월까지의 기간 동안에 해병 제2여단이 철수하고 이어 1973년 2월3일부터 3월15일까지의 기간 동안에 주월 한국군사령부, 맹호부대, 백마부대, 십자성부대 및 기타부대가 철수하였다.월남파병은 국가정책적인 측면에서나 군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큰 의의가 있다. 월남파병은 무엇보다도 경제개발, 안보강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파병에 따르는 국내경제계획에 대한 지원활약이 미국으로부터 있었을 뿐만 아니라, 파병은 그 당시 한국안보에 중추적인 소임을 담당하고 있던 미국과 군사적인 관계를 더욱 증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4. 파병의 성과정부는 미국 측과 수차례의 회담을 거쳐 한국군 전력증강과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차관 공여 등 14개항의 사전보장을 받았으나 이후에 국회에서는 이 보장의 효력 등에 대해 많은 시비가 있었다. 논란 속에서도 한국은 월남파병으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많은 외화를 획득하여 한국 경제발전에 기여했으며, 상황에서 결정한 국가의 생존 및 발전전략으로서 한국역사의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한국은 파월로 인하여 공산권은 물론 일부 비동맹 국가와의관계에서 외교적 손실을 보았고 군사작전과 경계활동에서 5,400여 명의 인명손실을 가져오기도 했으나 군사 , 경제, 외교적으로 많은 긍정적 성과를 얻음으로써 국위를 선양하고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소위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는데 초석을 놓았다. 한국은 전투병력 파병을 통하여 국가안전보장은 물론한미간의 현안들을 해결 하였을 뿐만 아니라 월남특수를 통한 경제 발전을 도모하였다. 한국은 월남참전을 통하여 껄끄럽던 미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인 협력 관계로 발전시킴으로써,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한국군의 파병으로 주한미군의 월남이동을 저지하여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였고, 월남경제 진출 등으로 많은 외화를 획득하여 경제발전을 이룩하였으며, 미국으로부터 많은 군사원조를 받음으로써 국군의 장비 현대화를 달성하였다.-경제 발전 등 국가발전의 원동력한국은 월남파병으로 인한 경제활동, 전투수당, 경제원조, 외국으로부터의 차관 등으로 많은 외화를 획득하여 경제발전에 충당하였다. 월남참전으로 인한 경제적 이익은 미국의 경제 및 군사원조, 차관도입, 대미수출 등을 제외하더라도 월남으로부터의 외화수입은 무역과 무역 외 부문을 포함하여 약 9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그 어려웠던 한 일 협상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청구권이란 명목으로 받아낸 돈이 겨우 6억 달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월남파병으로 인한 외화수입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금액이었다. 일부 비판론자들은 월남파병으로 국가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많은 발전을 하였음에도 파병이 경제이익과 전투수당을 전제로 이루어졌으므로 파월 한국 군을 용병이라고 비판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았고 전투수당을 받기는 하였으나 처음부터 파병목적이 명확하였고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용병이란 말은 군사적 지식이 없는 사람들의 잘못된 표현이다. 한국군은 파병의 의의나 그 결과를 올바르게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대한민국 정부는 파병으로 얻은 경제적 실리를 파병당사자에게 제대로 분배하지 않고 일부 재벌중심의 경제개발을 가속화하였다. 파월 기간 중 우리나라가 베트남에서 송금한 액수는 총 9억 달러에 달했는데 그중 2억 달러는 파월한국군의 피의 대가라고 한다. 이 달러들은 경제개발을 위해 필요한 외화 자금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부상당한 2만여 명의 파월용사에 대한 복지와 고엽제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은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한 해명이 있어야 한다.5. 후유증과 문제점-고엽제베트콩 게릴라가 숨어 있는 삼림지역의 나뭇잎을 없애기 위해서 미군은 에이전트 오렌지라는 제초제 혼합물을 살포하였다. 저공비행 항공기로 뿌렸던 이 고엽제의 화학물질을 실험동물에 노출시키면 유산, 피부병, 선천적 결손 등을 일으킬 확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진다.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 중 몇몇은 이와 비슷한 장애로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이들은 이것이 에이전트 오렌지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에 대해 결정적인 증거를 잡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미군에 에이전트 오렌지를 납품한 7개의 제초제 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하여1984년 에이전트 오렌지에 대한 노출로 인해 장애를 겪고 있다고 생각되는 미국의 재향군인과 그 가족들은 1억 8,000만 달러에 이르는 보상을 받았다. 제초제 회사 다우코닝사는 베트남 전쟁 때 오렌지 제 이외에도 방화성이 높은 젤리 모양의 물질 '네이팜' 을 생산했다. 한 보고에 따르면 이 네이팜탄은 민간인과 군인에게 무차별 사용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는 베트남 전쟁참전군인 12명이 정부로부터 전상 판정을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1993년 1월 15일 국방부로부터 정밀신체검사를 의뢰받은 고엽제 후유증 환자 238명을 검사한 결과이들 중 12명에게 3~6급의 상이등급 판정을 내렸다. 이들은 보훈병원에서 고엽제 후유증에 대한 무료진단과 함께 매.
    사회과학| 2003.08.27| 7페이지| 1,500원| 조회(1,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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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사] 1970년대 경제(박정희 시대) 평가A+최고예요
    목차◈ 1970년대 경제Ι. 1970년대 수출과 경제성장1) 10억 달러 수출성장 목표 달성(1) 수출의 국가 종교화(2) 10억 달러 수출성장의 양면성2) 1972년 8·3 긴급경제조치(1) 사채동결(2) 8·3 조치의 피해자들3) 중화학 공업의 성장(1) 중화학공업화와 수출(2) 자동차·조선 산업의 발전(3) 포항제철의 설립(4) 중화학공업화에 대한 비판4) 관광산업의 성장(1) 일본인 기생 관광 붐(2) 화대 착취 구조를 묵인한 정부5) 1백억 달러 수출 달성Ⅱ. 1970년대 국토개발1) 주택난 해결을 위한 주택건설(1) 아파트 건설(2) 33명의 생명을 앗아간 붕괴 사고(3) 선거와 판자촌2) 경부고속도로의 개통(1) 경부고속도로의 건설(2) 77명의 생명을 바친 경부고속도로(3) 경부고속도로와 지역 갈등Ⅲ. 인구 및 생활1) 이농인구(1) 호남인의 호남탈출(2) 호남차별2) 쌀 수확량의 증가(1) 희농 1호 의 실패(2) 진짜 기적의 볍씨 통일벼(3) 절미운동 위반은 범죄3) 오일쇼크(1) 원유값의 폭등(2) 중동진출4) 경제개발과 가족계획(1) 가족계획(2) 1인당 GNP를 높이기 위한 가족계획Ⅳ. 1970년대 경제평가Ⅴ. 반성 및 느낀점1970년대 경제&정치배경◈ 경제편Ι. 1970년대 수출과 경제성장1) 10억 달러 수출성장 목표 달성(1) 수출의 국가 종교화군사적 성장주의 는 외형적 결과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추구하는 개발 방식을 뜻한다. 박정희가 군사적 성장주의 의 방법론으로 택한 전략은 국가가 주도하는 외자 의존적 수출주도형 공업화 정책이었다. 이 정책의 특징은 1 수출 산업을 위한 제반 특혜, 2 외자에의 의존, 3 외국 시장에 대한 의존, 4 임금통제와 농산물 가격 안정정책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당시 수출만이 살길 이라는 구호가 말해 주듯이 수출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수출을 위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기업은 군대 조직처럼 움직였으며 박정희는 앞장서서 수출 노동자를 지휘하는 기업가들을 독려했다.실제 70년 기업가들이 받은 특혜는 엄청났부실 기업들은 더욱 사채에 의존하게 되고 그래서 금융 부담이 가중되어 부실화되는 악순환의 덫에 갇혀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박 정권에게 사채를 동결시켜 달라는 요청을 했다. 당시 기업들이 쓰는 돈의 30%가 사채였는데, 금리가 연리 30%이상이었다.1972년 8월 3일에 발표된 이른바 8·3 긴급경제조치 의 주요 내용은 8월 9일까지 신고된 기업보유 사채는 앞으로 3년 거치 후 5년간 월리 1.35%로 분할 상환토록 하며, 정부가 연리 8%, 3년 거치, 5년 불할 상환으로 대환해 준다는 것 등이었다.8월 3일부터 7일간 신고된 기업의 사채는 4만 6백77건에 3천4백56억원에 이르렀는데, 이는 전체 통화량의 약 80%, 국내 여신잔액의 34%수준에 이르는 것이었다. 성과도 즉시 나타나 1972년 7월부터 1973년 6월까지의 수출 실적은 전년 동기 대비 75.6%, 1973년 상반기는 전년 동기보다 91%의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1973년 상반기 경상수지는 전년 동기의 적자에서 1억 2천4백만 달러의 흑자로 반전되었다.(2) 8·3 조치의 피해자들8·3조치로 박 정권과 기업들은 큰 이익을 보았으나 충격으로 자살한 사람들도 있었다. 소규모 사채를 놓고는 그 돈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서민들에게 8·3조치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실제로 신고건수 기준 90%에 이르는 소액 사채업자들은 본의 아닌 피해를 입었다.또한 8·3조치와 같은 제도적인 대기업 육성 정책은 그 후 중동건설 진출 등에서의 기업 부실화에 따른 특별금융의 제공 등에서도 그대로 적용, 오늘날 우리나라의 독점적 재벌경제를 형성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뿐만아니라 8·3조치는 위기에 처한 기업들을 살리기 위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미증유의 특혜를 이들에게 부여함으로써 대기업과 국가 관료제의 연합을 선명히 보여주었다. 이는 후 한국 경제의 고질적 문제인 정경유착을 낳게된다.3) 중화학 공업의 성장(1) 중화학공업화와 수출1973년 1월 12일, 박정희는 유신 이후 처음으로 일종의 , 1973년엔 1백 94만 7천 톤을 따내 세계 시장 점유율 2.64%로, 1974년에 3%로 높여 나갔다.(3) 포항제철의 설립박정희는 1970년 1월 1일 포항제철 건설을 위해 1970년 1월 1일 철강공업육성법을 제정하였다. 포항제철의 기공식은 1970년 4월 1일에 거행되었다. 그로부터 3년 2개월 만인 1973년 6월 8일 첫 화입식(火入式)을 가졌고, 7월 3일에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여의도 3배에 이르는 넓은 부지에 연간 1백3만 톤 규모의 생산 능력을 갖춘데다 준공하자마자 생산 규모 확장에 들어간 포항종합제철은 9개월 전 준공된 울산석유화학 공업단지와 함께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이룬 놀라운 업적으로 평가되었다. 박정히는 종합제철건설에 적극적인 지원을 했으며 포철은 준공 첫 해부터 40억원의 흑자를 냈다.(4) 중화학공업화에 대한 비판중화학공업화가 이른바 한강의 기적 으로 불리는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의 토대 역할을 했다는 걸 부인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중화학공업화는 많은 문제점도 않고 있었다.한국의 중화학공업은 국내 산업간의 분업적 관련 없이 수출 위주의 노동집약적 산업(조선)이나 공해 산업(알루미늄·석유화학·플라스틱)중심으로 개발 추진되었으며, 시장경제에 어긋나는 독단적 의사 결정으로 무리한 투자 지출을 초래하고 투자배분 과정에서 정경유착이 발생했다. 또한 생산 및 실현 과정에서 대외종속성이 심화되었다. 국내의 산업간 불균등도 심화되었으며 정부의 특혜지원과 강제적 독점 기반 구축에 힘입은 독점의 강화가 심화되었다. 뿐만아니라 중화학공업은 큰 규모의 설비와 투자가 필요한 공업상의 특성 때문에 재벌중심으로 개발이 추진되었다. 그 때문에 재벌들은 빠르게 자본축적을 이룰 수 있었으며, 그로인해 모든 업종에 문어발식 으로 침투하는 경영이 성행했다. 또한 포항제철 설립을 위해 일본자본이 국내에 침투함으로써 대일 의존도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4) 관광산업의 성장(1) 일본인 기생 관광 붐한국 관광 역사에 있어서 70년대 초반은 일대 도약기였다. 할 기생 관광을 하면서도 일본인들은 한없이 당당했다. 그들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대낯에 스스럼없이 젊은 한국인 여성을 껴않고 다니기도 했으며, 반나체의 일본 사나이가 한국여인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호텔안을 휘젓기도 했다.5) 1백억 달러 수출 달성세계언론은 박정희 치하에서의 놀라운 경제성장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한국을 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했다.박정희는 100억 달러 수출 목표 달성을 1980년으로 정하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는 10월 유신에{대한 중간평가는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라고 외쳤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행정, 생산양식, 농민생활, 국민의 사고 방식, 외교, 문교, 과학기술 등 정부의 모든 정책 초점을 100억 달러 수출 목표에 맞추어 총력을 집중해야한다. 라고 촉구했다. 그 결과 박 정권은 1980년에 달성하겠다고 했던 100억 달러 목표를 3년 앞당겨 달성할 수 있었다.12월 22일 1백억 달러 수출 달성을 기념하는 수출의 날 기념식이 열렸다. 박정희는 민족 중흥의 창업 도전에 획기적 이정표가 될 자랑스러운 이 금자탑 이라고 선언했다.Ⅱ. 1970년대 국토개발1) 주택난 해결을 위한 주택건설(1) 아파트 건설1960년 244만 명(전체 인구의 10%)이던 서울 인구는 1970년 543만명(전체 인구의 18%)으로 급증했다. 이농인구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주택이었다. 서울의 산비탈과 고지대엔 하루가 다르게 판자촌이 늘어갔고 그로 인한 문제가 심각했다.당시 불도저 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김현옥은 별명답게 아파트 건설을 밀어붙였다. 그는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 동안 240억 원을 투입해 2천 동 10만 호의 아파트를 짓는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그는 자신의 계획 실현에만 급급하여 20~30°의 비탈에 철근도 제대로 넣지 않았고 콘크리트 혼합 비율도 지키지 않은 채 아파트를 건설했다. 산꼭대기는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하수도물로 콘크리트 반죽속도로는 후에 땜질공사로 몸살을 알았다.1990년 말까지 경부고속도로 보수비는 약 1,527억원으로 건설비의 4배 가까운 비용이 들었다.(3) 경부고속도로와 지역 갈등1960년 당시 경부고속도로와 같은 남북종단보다는 횡단도로의 건설이 더 시급했다. 1968년 IBRD의 보고서에 근거하면, 서울-부산간에는 철도망과 국도·지방도가 잘 갖추어져 있으므로 오히려 서울-강릉간 고속도로의 건설을 해야 했다. 강원도에는 지하자원과 관광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철도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경부고속도로 공사는 1968년 착공되었다.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다른 지방에 비해 영남에 개발이 집중, 지역 불균등 발전을 심화 시켰다. 또한 유래없던 지역 감정이 심화되기 시작된 것도 이즈음부터였다.Ⅲ. 인구 및 생활1) 이농인구(1) 호남인의 호남탈출산업화 이전인 1939년의 인구 구성은 영남인이 1천5백만명으로 남한 전체 인구의 35.5%,그리고 호남인이 1천2백9만 명으로 30%였다. 산업화 과정에서 이주가 있었지만 인구의 자연 증가에서는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박정희 통치 20년동안 호남 인구는 거의 제자리 걸음이었다. 자연 증가분에 해당하는 약 3백만명이 서울로 이주를 한 것이다.(2) 호남차별{일거리를 찾아 서울로 이주한 사람들은 서울의 달동네로 몰려들었다. 1979년에 발표된 서울시의 영세민의 출신지역을 살표 보면 아래쪽의 표와 같다. 이농 및 서울로 이주한 것에 있어서 호남인과 영남인 사이엔 큰 차이가 있었다. 서울로 이주한 영남인의 상당부분은 대학 진학, 관료 진출, 사업가의 형태를 띤 엘리트나 중산층으로의 이주였다.하지만 호남 출신의 이주자들은 대부분 서울에 빈민가에서 공장에 다녔다. 그들은 불안정한 저임금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전통적 상업과 서비스 부문 종사자, 또는 다수의 실업 상태에 있는 빈민들이었다.이는 박정희의 호남 차별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의 편견 때문에 그의 밑에서 일하는 공무원들도 호남을 편견하는 것이 대통령에 대한 충성졌다.
    경영/경제| 2003.08.27| 12페이지| 1,500원| 조회(1,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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