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문명에 대하여고대인들은 빛은 동방으로부터 라고 하였는데, 이는 유럽의 문명이 이집트나 서남 아시아에서 일어난 문명을 이어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집트나 서남 아시아 지방을 유럽 사람들은 오리엔트라고 불렀다. 오리엔트란 태양이 떠오르는 땅 이라는 뜻으로 문명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한편 문명의 시작에 있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선차적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어지고 있는 부분이다. 특히 이 두 곳은 지역적인 특수성을 가지고 문명의 발달을 가능하게 했다는 공통점과 반면 내부적인 성향의 차이점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이들 문명의 가장 뚜렷한 차이라 설명할 수 있다. 어쨌든 이러한 문명의 시작이 인류에 있어 남겨놓은 영향력들이 막대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이집트 문명의 탄생은 어쩌면 가장 필연적인 자연적 요구였는지도 모른다. 즉, 나일강이 중심이 되고 사방경계로는 사막과 절벽 등이 존재해 외부와 일찍이 정치·종교·생활·문자 등 모든 부분에 단절된 형태를 보였고, 이러한 외부와의 단절은 이집트인으로 하여금 이집트내의 세계가 그들의 전부일 수 밖에 없었고 그 이상의 세계는 인식 불가능한 형태로 단지 현재의 반복으로 현세와 내세에 대해 인식하고 있을 뿐이었으므로 그들은 현세의 영속성을 믿고 이것을 중심으로 한 종교의 내용들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외부로부터의 영향력 밖의 문제로 폐쇄적이며 안정적이었고, 외부로의 활동이 드물어 비교적 수동적인 행태들을 가능하게 하였다.한편 나일강의 의미는 이집트인에게 또다른 의미(안정성)에서의 자연이었다.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 나일강은 이집트의 어머니다 라는 말처럼 나일강은 해마다 일정한 시기에 홍수가 나고, 그 홍수가 끝나면 상류에서 흘러내려온 기름진 흙이 하류에 쌓이므로, 나일강 하류 일대에는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하였고 초기 분화되어있었던 지역들이 나일강을 통하여 교통교역이 가능하게 되 지역 내부의 결합 부분이 용이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농경지의 활용은 이집트인들의 안정적인 수입원으로 그들의 수동적이며 안정적인 인간성 발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이러한 자연적·지리적 특수성을 한마디로 간추리면 폐쇄적·안정적·수동적·반복적이라 설명할 수 있는데 이러한 성격은 정치·종교의 역사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이집트의 정치와 종교는 편의상 6개의 시대로 구분이 가능한데 그것의 기준은 선차적으로 종교와 직결된 파라오의 권력의 변화양상에 기인하게 된다. 현세의 영속선상에서 바라본 내세에 대한 믿음들의 구체화로 종교가 확산되고 이것은 곧 백성들에게는 정치적 믿음으로까지 확대되어짐을 통해 이집트사는 종교와 정치가 동일선상에서 판단되어지는 관계들로 인식되어지는 것이다.초기 문명 발달을 위한 토대 마련이 가능했던 상고·초기왕조시대에는 무엇보다 이집트의 정치사의 출발점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문자가 발명되고 기존의 분리된 상·하 이집트가 관개를 중심으로 통합되면서 정치적 영향력들이 확대되어졌던 것이다. 특히 당시 이집트의 통일을 가능하게 했던 파라오는 이집트인 전체에게는 신적인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신에 의해 영속성과 안정성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백성들에게 이집트의 통일은 신에 의해 관장된 것이며 이로써 파라오는 곧 반신반인의 전형적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이집트의 통합은 고대 종교의 통합을창출, 기존에 지역적으로 다양하던 신이 아몬과 오시리스로 통합되었던 것이다.한편 조세르에 의해 계승되어진 기원전 2700년경의 고왕국은 국왕 절대주의의 시대였다. 이집트의 통합과 함께 강력하게 대두된 왕권은 태양신의 아들로 파라오를 인정하며 신정이 일치됨으로써 국가의 기본적인 형태는 모두 왕에의해 가능하게 되며 그의 말이 곧 법이요 진리였다. 이는 무엇보다 피라미드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 거대한 규모나 피라미드를 축조할 때 모든 작업이 인간의 직접노동으로 가능하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는 분명 파라오의 막대한 권력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고왕국의 외교정책은 그들의 생활이 폐쇄적이며 안정적이었던 것에 기인하여 평화적이며 고립적인 성격을 가져 군사의 조직이 불가하였고 단, 파라오의 명령에 의한 집결만이 가능하였으며,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로 이러한 집결은 공공 사업에 대한 노동력 투입의 형태였다. 한편 고왕국의 종교는 Re 신이 중심이된 신앙 체계로 파라오의 권익을 대표하는 국가적 이익과의 연대 아래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왕국의 번영은 지속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즉, 내부적으로는 이전에 파라오가 그들의 세력의 확장을 위해 어느 정도의 혜택을 제공해 주었던 관리들이 지역적인 역량들을 키워내면서 상층계층간의 투쟁들이 진행되었다. 결국 관리들은 그들의 부와 지역적 기반을 중심으로 지위를 상승시켜 나가게 되었고, 반면 파라오는 상층계층간의 갈등과 더불어 종교적으로는 기존의 신격존재로서가 아닌 레신의 아들(지상계의 신)의 신분으로 권력에서 한단계 하락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또한 과도한 정부사업도 혼란의 한 몫을 했다. 권력을 대표하던 피라밋 건설에 대한 무리한 정부사업은 곧 경제적 문제로 구체화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들은 점점 확대되어 중앙집권의 종말과 함께 혼란기에 접어들게 되며 흉년이 들고 한편으론 아시아 유목민이 침입하게 됨을 통해 분쟁이 계속되면서 제 1중간기의 무정부 상태가 도래하게 되어 기원전 2050년경까지 계속되다가 중왕국 시기에 접어들어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기원전 2000년경의 중왕국은 사회적으로 재통일을 이룩하며 새로운 중앙집권을 만들기 위해 수도를 멤피스로 정하고 관리를 견제하려 하였으나 당시까지 꾸준히 힘을 키워온 지방귀족의 견재는 쉽지만은 않았다. 파라오는 중간 계급과 결탁해 강력한 지배권을 장악하고자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관개 시설과 용수로 등의 사업을 확대시켜 민심을 수습하였다. 또한 이전의 피라미드 건설보다는 사원의 설립에 주력하였는데 이는 개인의 숭배에서 신에게로의 적극적 전화을 통해 개인의 구원에 대한 민중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알 수 있다. 함께 종교에서는 고왕국의 국가적 존재에서 탈피한 도덕적 행위와 구원 의식의 대중화로 이전의 신앙 체계와는 많은 차이점들을 지니고 있었으며 종교적으로는 아몬이 나라의 주신으로 존재하게 되었다.그러나 중왕국 역시도 영원하지는 못했다. 제2중간기를 맞으며 중앙집권의 약화-귀족의 반란이 구체화 되는 시기-와 내란으로 끝내 외부(힉소스)로부터의 침입으로 결국 힉소스인에 의해 지배되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제2중간기는 이집트인의 행태에 많은 변화들을 야기시켰는데 단적으로 군사적 내용의 현실적 제기나 민족의식의 강한 대두로 투쟁적인 국면들이 강하게 제시되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민족의식으로 무장한 이집트는 외세에 대한 투쟁의 힘으로 외세에 대한 탈출과 함께 중앙집권적 국가가 형성되었으며 이와 함께 신왕국 시대(제국 시대:기원전 16세기)가도래하게 된다.신왕국 시대는 제2중간기를 거치면서 투쟁적인 국면으로 변화한 이집트상을 살펴볼 수 있다. 군사조직이 성립되고 더이상 국내의 안정만이 아니라 외부로의 군사적 팽창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와 함께 종교 역시 윤리적 중요성이 파괴되어지고 미신과 주술이 횡행하면서 불안한 민중을 안심시키기 위한 사제들의 편법은 종교의 타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종교의 타락에대한 아케나톤의 일신교 확립을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은 신왕국 시대의 흐름을 많은 부분 흔들어 놓았다. 즉, 아톤신을 숭배하면서 기존의 왕권을 회복시키기 위해 기타 계층 세력의 중심인 신들을 부정하고 유일신 사상을 주장하며 아톤을 숭배하는 대상을 특정인에 한하게 하고 백성들에게는 신왕을 숭배케 함으로 중앙집권의 부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내세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종교개혁은 끝내 실패하게 되고 이전의 체제로 복귀되어진다.신왕국 시대의 종말은 그들의 제국적 형태에 기인한다고 본다. 광범위한 영토의 병합과 상대적으로 열악한 관리상의 내용, 그에 따른 광범한 반란은 이집트의 내부적 혼란을 야기시켰고 종교에서의 사치와 타락적 윤리관들은 국력 쇠잔의 길을 자연히 초래하였던 것이다. 결국 정복지를 상실하고 군사적 기반의 제국주의는 새로운 야만족의 침입과 타락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며 기원전 10세기 중반 거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이렇게 정치와 종교를 둘러싼 이집트의 역사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되어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고정된 틀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권력 체계의 형식이다. 즉, 신의 능력을 등에 업고 나선 파라오가 지방귀족의 세력과 종교의 직접·간접으로 영향력을 미쳤던 사제, 그리고 제국시대 또다른 세력의 획으로 등장한 군대와의 계층적 견제들이 전 시대를 걸쳐 유지되었으며 이러한 세력 투쟁을 가능하게 한 가장 기본적인 국가구성은 상층계급의 혼란에 상대적인 하층민(농민·상민) 등이 고정적인 수입원으로 나라를 지탱해 주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위·하위의 체계는 부분적으로 혼란이 있었다 하여도 이집트의 특성상 비교적 안정적인 체계를 유지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특성은 종교와 직결되어지게 된다.
이집트의 자원고대 이집트인들은 많은 자원을 향유하였다. 인산염이 풍부한 비옥한 토양은 온갖 종류의 식량을 생산해 냈다.*주요작물 : 여름밀, 겨울밀, 여섯줄보리의 이집트빵, 맥주의 주원료, 부추,양파,상추,멜론, 오이, 강낭콩 ,대추,*가축 : 소, 돼지, 염소, 양 나귀등1.소 -주요제사에 바쳐지는 육류로 신왕국시대에 사육하기위해 누비아에서 소를 수입했고 아시아로부터 등굽은 황소도 들여왔는데 이는 이집트 전염병 때문에 보충용이었음2. 돼지 - 농부나 하층계급의 일상적 주요식품. 나일강 지류에 물고기가 많았는데 노동자들의 중요식료품으로 돼지고기와 마찬가지로 제식상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여겨졌다*식물성 생산품 : 이집트의 부족한 자원은 바로 목재였다. 그래서 레바논에서 수입하여 사용하였다이집트사람들은 예전부터 갖가지 골풀과 갈대로 여러종류의 고리세공제품을 만드는 솜씨기 뛰어나 탁자, 스탠드, 상자 따위를 만들곤 하였다. 덮개가 있거나 없는 바구니를 온갖 크기로 풀줄기를 하나 하나 엮어서 만들었는데 최근 동아프리카에서 사용하였던 것과 비슷하다무덤에서 발굴된 이집트의 생활용품파피루스에서 종이를 제조한 이집트인이집트 역사상 가장 뛰어난 발명은 파피루스 골풀 줄기에서 나긋나긋한 종이를 제조한 일이다. 이로써 종이에다 펜과 잉크로 빠르게 글을 쓸 수 있게 된 점이다. 이것으로 이집트를 가장 조직적인 국가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 적어도 기원전 1000년경까지 이집트는 다른 문명국가와 무역을 할대 파피스 두루마리를 수출하고 있었다.이집트의 광물자원*동부사막의 생산품 : 광물자원, 홍옥,석류석, 벽옥, 아마존석 , 금, 호박금등 이집트는 많은 금속 때문에 부유하게 되었으며 국제 거래에 금본위제를 인정하고 있는 세계에서 존중받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해외에서까지 이집트인의 뛰어난 석제가공기술을 인정받기도 했다.이집트의 신화눈(NUN)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의 모든 것, 그리스 신화에서 묘사되는 우주 발생이전의 원시상태인 카오스로서 생무의 근원을 품고 있는 최초의 바다이다.신화에선 물속에 몸을 반쯤 담그고 두 팔로 신들을 받치고 있는 자세로 묘사되며, 눈으로부터 태양신인 라가 탄생한다누트(Nut)하늘의 여신으로 남편 게브와는 달리 제사를 받는다. 신화에선 항아리를머리에 얹은 여인의 모습으로 묘사된다.아톰헬리오 폴리스의 지방신 중 하나로 아톰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으로 태초의 바다'눈(Nun)속에 잠재하던, 아직 형태도 이름도 없는 온갖실체의 영이다.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태양신 라와 결합되어 아톰-라신으로 승격 되어 라와 함께 숭배 받았다. 최초에는 여신 없이 독신으로 한쌍의신을 잉태하여 낳은 것이 슈와 네프네트이다.라(RE)하늘과 땅의 절대적 지배자인 태양신이다. 생명 탄생 이전에 원초의 바다 눈의품안에 웅크리고 있다가 바위속에 들어가 형체를 가지게 되었다. 신화에서뾰족한 바위 즉 오벨리스크 모습으로 표시된다. 하늘과 땅을 통치했지만 늙어입을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는 노인으로 묘사된다. 세계 곳곳에 오벨리스크는라의 상징이며 승리와 영광과 최고의 권력을 의미한다. 그를 모시던 이시스가세트를 이기기 위해 꾀를 내어 라의 신통력과 주문력을 빼앗아 간 후 하늘로들어가 은거한다.오벨리스크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것이 12왕조의 파라오 세누세르트의 것이며 이후 태양신의 힘을 가진 이시스가 이집트 전체를 통해 숭배받게 된다.슈슈는 쌍둥이 누이동생 네프네트와 함께 헬리오폴리스 최초의 부부가 된다. 아톰이 그를 내뱉아 탄생 시켰기 때문에 '내뱉는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슈는 공기와 공허의 신으로서 게브와 누트가 꼭 껴안고 있을 때 태양신의 명으로 누트를 떼어 하늘로 올렸던 신이다. 아버지 태양신 라의 뒤를 이어 첸계를 다스리지만 반란이 일고 신하들이 배신하는 등의 쓰라린 경험을 겪은 후 게브에게 권력을 넘기고 폭풍우와 함께 승천해 버린다. 신화에선 타조 깃을 머리에 꽂은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된다피라미드(pyramid)-돌 또는 벽돌로 만들어진 방추형의 건조물로 이집트,수단,에티오피아,멕시코 등에서 건조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국왕·왕비·왕족 무덤의 한 형식이다. 어원은 그리스어인 피라미스(pyramis)이며, 이집트인은 메르라 불렀다. 현재 80기가 알려져 있으나, 대부분은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에서 일라훈에 이르는 남북 약 90km인 나일강 서안 사막 연변에 점재해 있다.기원-피라미드는 초기왕조시대의 마스터바에서 발전된 것으로, 제18왕조 초에 왕묘가 암굴묘(岩窟墓)의 형식을 취할 때까지 계속된다. 최성기는 제3∼5왕조로 '피라미드시대'라 부른다.최고의 피라미드는 사카라에 있는 제3왕조 제세르왕의 '계단피라미드'로 재상 임호테프가 설계한 것이다 처음에는 한 변이 63m인 직사각형 석조 마스터바로, 중앙에 깊이 28m의 수혈(竪穴 )을 파고 그밑에 매장실을 만들었다. 그러나 확장공사가 시작되어, 결국 마스터바를 6단 포개놓은 모양의 밑변 109×126m, 높 이 62m의 계단 피라미드가 완성되었다 이것은 종교적으로는 헬리오플리스를 중심으로 예로부터 존재했던 태양신 숭배가 피안( 彼岸)의 신앙과 결부된 결과로, 계단은 죽은 국왕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태양신과의 결부는 후의 정 통 피라미드의 출현으로 한층 긴밀해졌다. 피라미드 그 자체는 왕의 미라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다. 그러나 음식물과 가지각 색의 물품을 진열하여 제사를 지내는 장소도 필요했다. 그래서 피라미드 북측에 장제전(葬祭殿)이 건조되고, 다시 동쪽에 세드 제의 의식을 행하는 신전·소신전·중정이 남쪽에는 계단이 있는 대중정이 축조되고 그것들을 높이 10m, 동서 277m, 남북 545m의 사각형의 주벽으로 돌러 장대한 묘소를 형성하였다. 이것들을 '피라미드 복합체'라고 부른다. .건조법-피라미드를 건조함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무거운 석재를 필요한 높이까지 운반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피라미드 측면에 직각으로 경사로를 만들고 석재는 썰매로 운반하였다. 일정한 높이마다 핵재-내장재-전재-외장재의 순 으로 쌓아놓고, 피라미드가 높아짐에 딸 경사로도 높아졌다. 이 경우 경사로의 기울기는 일정해야 하므로 길이는 점차 길어진다. 정상까지 다 쌓고 나면 위에서부터 위장을 완공시켜가면서 서서히 경사로를 낮게 하여 완성시키는 방법을 취하였다. 외장은 정성 들여 시공되고, 석재는 종이 한 장 끼워지지 않은 정도로 정밀하게 쌓아졌다. 완성에 걸린 연대에 대하여 헤로도투스는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20년이라 적었으나, 실제로는 더 짧은 기간으로 생각된다.주로 BC 3000년 이후의 왕조시기에 이집트와 누비아의 나일 강 계곡지역에서 제작된 기념비적 건축물과 회화·조각·공예품의 총칭.이집트 미술의 발전과정은 대체로 그 나라의 정치사와 궤를 같이하지만 아울러 뿌리 깊은 이집트적 사회제도의 산물이기도 했다. 공식적인 종교에 의해 지탱되는 위계적 사회구조는 권위주의적 법률에 순종할 것과 강제적 윤리를 지킬 것을 요구했다.이집트 미술은 아마도 다른 어느 나라의 예술보다도 한층 더 권력층의 이익에 봉사하는 강력한 선전도구로써 기존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 미술의 발전과정은 대체로 그 나라의 정치사와 궤를 같이하지만 아울러 뿌리 깊은 이집트적 사회제도의 산물이기도 했다. 공식적인 종교에 의해 지탱되는 위계적 사회구조는 권위주의적 법률에 순종할 것과 강제적 윤리를 지킬 것을 요구했다. 이집트 미술은 아마도 다른 어느 나라의 예술보다도 한층 더 권력층의 이익에 봉사하는 강력한 선전도구로써 기존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이집트 미술의 특성을 낳는 데는 지리적 요소가 주요한 작용을 했다. 나일 강은 유망한 농업적 조건을 이집트에 선사함으로써 미술과 공예가 발전하기에 좋은 안정된 생활환경을 제공해주었다. 아울러 사막과 바다는 사방에서 이집트를 보호하여 거의 2,000년 동안 외세의 큰 침략 없이 그같은 안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한 사막의 구릉에는 광물과 좋은 석재가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어 미술가들과 공예가들이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다만 좋은 목재가 부족했는데 그때문에 이집트인들은 레바논과 소말리아로, 그리고 중개인들을 통해 열대 아프리카 등지로 원정을 다녔다.전반적으로 유용하고 귀중한 물자를 찾으려는 노력이 대외정책의 방향을 결정하고 무역로를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이집트의 물질문명을 풍부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대 이집트 미술은 이집트 문화의 종교적 신앙을 반영하여 지상의 삶은 내세의 영생에 비하면 잠시 지나가는 막간극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했다. 신분과 계급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내세에 자신들이 지니고 갈 유용한 장식물을 수집했으며 자신들의 매장지에 대해 최대한의 관심을 쏟았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전해오는 미술품의 대부분은 고대의 무덤과 결부된 것들이다.이집트 문명.나일강변을 따라 형성된 양쪽 비옥한 지대를 상이집트, 하이집트라 한다. 이 지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황량한 사막으로 되어있는 패쇄적인 지형 때문에 이민족의 침략이 비교적 적어 그들만의 독자적인 사회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나인강의선물 이라 할 정도로 나일강은 이집트 모든 부분에 영향을 주었다. 폭포가 거의 없이 흐르기 때문에 통상과 교통을 위한 중요한 교통로가 되었고, 정기적으로 물이 불어나고 줄기 때문에 관개사업이 발달하였으며, 비옥한 토지를 가질수 있어 농업용수와 식량자원 확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온건조의 기후로 생활하기 편리하며 기록보존에 매우 적합하였다.농업중심이며, 나무의 부족으로 목재건물은 거의 없으며, 돌과 석재, 구리, 동광 등을 산출하였다. 농민은 농업에 종사했을 뿐만 아니라 파라오가 조직한 거대한 건설사업에 동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