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4
검색어 입력폼
  • 민족주의 입장에서의 대학생들의 반미감정-촛불시위중점으로
    논문의 개요 ........2Ⅰ. 서론1. 연구의 목적 ........32. 연구의 방법 ........3Ⅱ. 본론1. 민족주의와 반미감정 ........41) 민족주의 2) 반미감정2. 대미인식의 변화 ........51) 60년대 2) 70년대3) 80년대 4) 90년대5) 2000년대6) 반미감정을 일으키게 한 직접적인 사건들3. 여중생 사망사건 ........101) 미장갑차에 여중생 2명 숨져2) 여중생 사고 미군 2명 소환3) 여중생 사망 미군 무죄 평결4. 촛불시위 ........121) 촛불의 의미2) 촛불시위의 전개3) 촛불시위의 의의5.설문조사 ? 분석 ........14Ⅲ. 결론 ........17참고문헌 ........19개 요6.25 때 우리를 도와주었던 혈맹이자 공산 세력이라는 공통의 적을 가진 군사적, 외교적 우방. 그리고 한국의 경제 발전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던 나라. 이와 같이 어쩌면 막연하다고 생각될 지도 모르는 미국에 대한 동경과 고마움은 분단 이 후 줄곧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남아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이미지는 과거와는 달리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막연하기만 하던 예전과는 달리 한미 관계에 대해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가 확산되기 시작했고 나아가서는 지난 반세기가 넘게 지탱해 온 한, 미 동맹관계에 대한 회의론적 재평가 작업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작년 6월, 여중생이 장갑차에 치여 죽어 미국에 대한 감정은 폭발하였다. 그로 인해 여중생 추모식으로 촛불시위가 이뤄지고 미국 대통령의 사과와 소파개정을 요구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민족주의 입장에서의 대학생들의 반미감정 실체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자주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현대학생들의 반미운동 역사와 반미감정에 대해 알아보고, 여중생 사망사건의 조사기록, 그리고 촛불시위를 통해 대학생들이 표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고자 한다. 자발적이고 아래로부터의, 그리고 인터넷 세대를 중심으이다. 또한 정치적 상징과의 일체감이 국민적 정체감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데, 강한 국민적 정체감을 확보하는 문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국기, 국가, 상징적 건물 등 국가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존재가 필요하며 정치적 상징이 지지되면 이는 정치적 공동체나 권위체 및 체계의 가치나 목표에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 이러한 가치나 목표에 대한 사명감을 줄 수 있다.민족주의와 촛불시위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맹아론적인 입장에서 바라보자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의 독립자주의 국가를 지향하는 진보적 민족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즉, 배타적 민족주의, 소극적이고 저항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능동적인 세계화 추세에 맞는 진보적인 민족주의이다. 한국 민족주의의 목표가 문민 진보정치의 확장이요, 주변국가의 부정적 간섭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남북간 평화적 통일을 성취하고 그 후에는 아시아에서 독립자주성을 유지하면서 균형자적 역할까지도 담당하는 독립적이고 균형된 외교노선을 정립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촛불시위는 그야말로 진보적인 민족주의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2) 반미감정한마디로 요약하면 ‘미국에 반대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 ‘반미감정’은 ‘반미주의’와는 구별되는 성격을 지닌다. ‘반미주의’는 미국을 적극적으로 배척하고 공격적으로 반대하는 신념으로 미국의 존재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인 반면에 ‘반미감정’은 미국의 어떤 부분을 마땅치 않게 여기거나 싫어하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감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는 흔히 두 종류의 반미정서가 있다고 지적되는데 그 중 하나는 감정에 바탕을 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념적인 것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 중 감정적인 반미주의는 인간의 정상적인 느낌에서 나오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미국의 한국에 행사하는 강력한 영향력, 한미 양국 간의 문화적인 배경 차이 또는 의견 차, 그리고 한국인들의 자존심 증대에 따른 미국의 오만에 대한 반발 등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으로서 한국뿐만이 아항쟁이 이들에게 준 메시지는 간단하였다. 한국인의 숱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 체제가 재생되고 유지되는 것은 그 배후에 미국이 있기 때문이라는 ‘암시’였다. 학생운동 진영은 1982년 봄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1983년 겨울의 레이건 방한 반대투쟁, 1984년 가을의 방일?방한 반대투쟁, 1985년의 매국방미 및 수입개방 문제를 계기로 한 민족자주권 수호투쟁, 1985년 5월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등 ‘반외세 민중 민주화 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해 나갔다. 1980년대 초반에 전개된 일련의 반미운동은 주로 미국정책의 의도나 동기적 측면보다는 결과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 시기까지 미국은 한국을 ‘착취’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단지 민주주의의 심벌이요, 우방인 미국이 제대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책임론’만이 강하게 제기되었었다. 한 조사자료는 이 시기 대학생들 사이의 일반적인 반미감정은 “미국국민이나 국가 전체에 대한 것”이기 보다는 “한국에 와서 피해를 주는 자들과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들에 대한 것”임을 강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4) 1990년대 초반에는 80년대를 이어 '미제축출'이니 '주한미군 철수'니 하는 주장들이 여기저기서 거침없이 제기되었고, 분신이나 투신과 같이 생명을 건 투쟁이 서슴없이 감행될 정도로 매우 급격한 양상의 반미정서가 지배적이었으나 90년대 중반이나 후반으로 갈수록 이러한 양상은 소수의 과격한 운동권 학생들의 전유물로 치부되어져 버리고 오히려 일반 시민은 이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또한 일부 젊은 한국인들에게서는 친미적인 경향마저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은 과거 미국의 시혜에 대한 고마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이익, 즉 미국의 부와 권력의 월등함에서 오는 여러 이익들을 추구하여 나타나는 경향으로서 90년대 후반에 시민권 획득을 위한 원정 출산 붐이나 조기 어학연수 열풍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5) 2000년대의 반미감정은 이전의 반미감정과는 우정면 매향리는 지난 50여년간 미공군(쿠나시격장)의 폭격연습으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하였다. 특히 주된 목표물이 되는 농섬은 폭격에 의해 반이상 날라갔고, 그 주변지역은 불발탄등에서 나오는 중금속으로 인하여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는 상태이다. 매향리 주민들은 지난 50여년간 계속되는 폭격연습 중 오폭으로 인한 인명피해, 재산피해, 소음으로 인한 정신장애 등을 앓고 있다. 1952년 처음 사격장이 들어선 이래 목숨을 잃은 주민만 20여명, 소음은 주거불능 상태인 100dB이다.주민들의 원성이 높아지면서 자체 대책위원회가 조성되어 농성 등의 활동을 벌여왔으나 대중의 큰 관심은 끌지 못하여 홀로 울고있던 매향리 가 2000년 6월 6일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전국에서 모여든 학생-노동자-시민단체 회원등 3천500여명의 지원군을 만나 사격장 철조망을 1km가량이나 뜯어내며 사상최대의 미군기지반대 시위의 날을 이룬 것이다. 이어 17일에는 집회 최초로 사격장 안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하여 이 지역출신 가수 안치환이 시위대와 함께 대치한 경찰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하지만 이같은 시위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6월 19일 중단된 폭격연습을 제개하였고 이에 격분한 시위대의 최종수 신부가 7명의 대학생, 시민들과 함께 20일, 농섬으로 들어가 대형 태극기를 꽂는 사건이 벌어졌다. 농섬에 사람이 있으니 즉각 폭격을 중단하라 고 주한미군사령부 공보실에 알렸으나 미공군은 사실확인 전, 공포탄 사격을 하는등 훈련을 멈추지는 않았다. 매향리 주민들이 반세기동안이나 피해를 받고 있었으나 이때에서야 이 문제가 언론에 보도되고 사회적인 이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에는 미국과 미군에 대해 비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미국과 미군과 관련된 우리나라 사람들의 피해가 얼마나 오랫동안 뿌리깊게 존재해 왔는가를 국민들에게 새삼 알려주는 계기이기도 하였다.3. 여중생 사망사건사고는 지난 6월13일 오전 10시45분쯤 경기도 파주시 광적면과 법원읍을 연결하는 56죄평결 파문)4. 촛불시위1) 촛불의 의미2차대전 말 유대인 수용소에 갇혀 있던 정신의학자 프랑클은 촛불을 지켜보며 죽어간 60대 할머니 이야기를 써서 남겼다고 한다. 할머니는 켜지 못하게 되어 있는 초를 구해 담요를 둘러쓰고 자기만의 암흑 속에 그 촛불을 응시하는 것으로 삶을 확인하며 연명하고 살았던 것이다.어느 날 너무 오랫동안 기척이 없어 담요를 벗겨보았더니 촛불은 닳아 꺼지고 할머니는 눈을 뜬 채로 굳어있었다고 한다. 이 수용소의 할머니에게 촛불은 생명이었던 것이다.바오로6세의 설교 중에는 이런 말도 있다. 곧고 무구하며 순결한 마음의 막대에 더러는 아프게 정열을 불태우는 촛불은 그대들의 삶과 매한가지로 침묵 속에서 소진하는 운명을 감당하고 있다. 소진해도 죽지 않고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만남 속에 촛불은 타 나아갈 것이다. 그대들 삶처럼.’이처럼 촛불은 초월자에게 인도하는 조명이기도 하며 이승과 저승간의 통로를 밝혀주는 가로등이기도 하다. 영국에서 캔들마스라는 성촉절은 풍년을 기약하는 성인이 하강하는 날로 그 성인을 위해 침대하나를 정결하게 비워놓고 머리맡에 촛불을 켜놓는 것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물론 부정적 이미지의 촛불 민속도 없지 않았다. 유럽에는 증오하는 상대를 한 자루 초로 상정하고 이를 저주하여 촛불을 태우는 민속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의 관아에의 집단 소원인 등장(登狀)갈 때나 민란을 일으킬 때 횃불을 들고 민심을 집결했던 것도 조명 이외의 주술적인 의미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희생자를 위령하기도 하려니와 민원의 집결수단이요, 미국에 대한 등장시위가 복합된 것이 바로 촛불시위인 것이다.2) 촛불시위전개2002년 12월 14일 서울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들. 어떤 사회학자가 ‘군중은 하나의 유기체’라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군중들은 하나로 살아 숨쉬고 있었다. 이 거대한 생명체는 시청 앞 광장에서 서서히 몸집을 불려 자라나더니 이윽고 몸을 돌려 광화문 쪽으로 향했다. 공권력도 이 생명체의 이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조선일보」사옥
    사회과학| 2008.12.30| 19페이지| 2,500원| 조회(529)
    미리보기
  • [노동정책] 노동의 종말을 읽고
    진보는 인류에게 유토피아를 꿈꾸게 하였는가?아니면 인간성의 파괴를 가져온 것인가?어쩌면 너무 급진적이고 도발적으로 보이는 이 문장은 제레미 리프킨이 언급한 '레져냐 실업이냐'처럼 정보화 시대의 야누스 얼굴을 잘 나타냈다고 생각한다.오늘날의 우리들은 신세계를 꿈꾸는 지도 모른다. 공상영화를 보면 배경은 항상 2050년. 그때는 기술의 문명 이룩으로 인해 더 이상의 교통체증, 재난 등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인간들은 자동화된 기술을 즐기고, 기술은 더 이상 기술이 아닌 삶의 일부로써 인간과 함께 그 문화를 공유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영화의 결말은 인간의 행복은 물질문화나, 기계문명이 발달된 유토피아의 지향이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 재정립, 감성이란 가치에 비중을 둔다.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인류는 벌써 과학 진보의 비극을 감지한 것일까?이런 생각을 반영하는 듯이 제레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을 통해 우리에게 경고를 하고 있다.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 정보화 시대에 대해 제레미 리프킨의 입을 빌려 얘기하고자 한다.20세기를 세계화라는 구호아래 전세계를 지구촌화 시켰다고 한다면 21세기는 정보화라는 슬로건 아래 세계는 국가를 초월하여 여러 네트워크를 통해 점점 가까워지고 좁아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보통신시대라고 할만큼 인터넷 이용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또한 기업에서도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등 기술이 그야말로 눈부시게 발전하였다.5년 전으로만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그때는 한창 일명 삐삐라고 불리는 것이 유행이었고, 본인을 비롯한 또래 고등학생들은 다들 삐삐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으로 서로의 연락을 대신하곤 했다. 삐삐의 소유는 공중전화를 멀리할 수 없게 한다. 누군가 삐삐를 치면 음성을 듣기 위해 우리는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들어야만 했었다.하지만 불과 6개월 후에 대학생이 되었을 때 상황은 180。 변해갔다. 이제는 삐삐가 아니라 핸드폰이 젊은이들의 손에 들려져 있었던 것이다. 2003년의 오늘날에는 초등학생도 핸드폰을 들고 다닐 정도로 첨단산업 기술은 우리의 생활에 파고 들었다.이렇게 눈부신 기술의 발전에 대해 제레미 리프킨은 단 한 문장으로 내게 펀치를 날렸다. "레져냐 실업이냐" 취업을 앞에 둔 나였기에 더 깊이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으나 좀더 직설적으로 말해서 "너 돈 좀 적게 받고라도 일할래 아니면 그냥 잘릴래?"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왜 우리가 이런 극한도에 이르게 되었는가.앨빈 토플러가 예견했듯이 농업혁명, 산업혁명을 잇는 「제3물결」-정보혁명의 도래로 인해서 산업사회의 방향은 바뀌었다. 시커먼 연기나는 공장굴뚝이 아니라 아파트형 공장의 새로운 굴뚝이 만들어진 것이다. 조립라인에는 더 이상 여공이 필요하지 않고 다만 로봇이 바쁘게 움직일 뿐이다. 이런 로봇의 움직임을 체크하는 관리자가 있다. 로봇으로 일을 하면 효율성 뿐 만이 아니라 노동임금 인상요구, 노동시간 개선 등의 노사문제는 사라지게 된다.농사짓는 법도 달라졌다. 과거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시대에 추수 때가 되면 가족들이 모두 논에 가서 일일이 낫으로 베고 그러하였으나 오늘날, 특히 미국 같은 대평원지대에서는 트랙커 등의 기계로 바로 밀어버린다. 시간적·경제적 여러 면으로 보아 훨씬 편리해졌다. 트랙커를 운전할 사람만 있으면 그 많고 많던 벼의 추수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앞으로는 무선기로 장난감차를 운전하듯 그렇게 간단하게 조종할련지도 모른다.리프킨이 직접 예시를 들어놓은 것으로는 미국의 남부에서 일하던 흑인노예가 있다. 이 흑인노예가 목화농장의 생산을 담당하였는데 목화 따는 기계가 발달하자 이들은 말 그대로 쓸모 없는 인력이 되어버렸다. 이들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것이다. 이것은 단지 과거에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낡은 제2물결 공장들은 기본적으로 상호교환이 가능한 노동자들을 필요로 했다. 이에 반해 제3물결 기업체들은 다양하고도 계속 변화하는 기술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은 노동자들의 상호교환 가능성이 날로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앨빈 토플러 「권력이동」p119위의 글은 블루칼라들의 업종이 점점 사양산업이 되어가면서 구조조정, 인원감축 등의 이유로 해고되는 것과 관련된다.앨빈 토플러는 '프롤레타리아'에서 '코그니타리아') cognitariat, 육체 노동이 아니라 지식·두뇌의 사용에 바탕을 둔 유식계급으로의 변화에 중점을 두었다. 프롤레타리아가 예전의 블루칼라라고 한다면 코그니타리아는 화이트칼라를 지나서 골드칼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정보화로 인해 기술문명은 빨리 변해가고 그 흐름에 시스템 역시 발빠르게 맞춰가지만 결국 인간은 뒤쳐지게 된다.최근에는 신입사원을 모집할 때에 이메일로 이력서를 받는데 대기업의 경우 컴퓨터 채용 시스템을 설치하여 1차적으로 서류지원자들을 걸러낸다고 한다. 즉, 토익성적·학교·학점·기타 자격증에 일정 기준을 부여하여 마치 SPSS) Statistical Package for the Social Science로 통계수치를 돌리듯이 점수를 내놓는다고 한다.이렇듯 새로운 기술이 인간을 판단하게 되고 이런 기준에 밀려나게 된 인간은 파행의 길로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복지사회를 지향하는 현대국가에 있어서 이렇게 뒤쳐지게 된 국민들을 위해 국가는 나름대로의 프로그램을 계획하여 이들을 재교육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실업자 재교육 프로그램의 질적인 면을 생각해 본다면 그 효율성은 미진하다 하겠다. 또한 흔히 경제원칙으로써 국가경기가 움츠러들었을 때에 국가는 팽창정책을 펴면서 통화를 풀어 활성화시키고, 각종 건설공사를 진행시키면서 일자리를 노동자들에게 부여해왔다. 하지만 그 일자리라는 것이 공사를 진행 시에만 있는 일용직이며, 또한 그런 일자리는 육체적 노동을 필요로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면 너무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리프킨은 이미 도래한 정보화 시대에 있어서 기술혁신과 인간의 삶을 부정적으로 기술하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리프킨이 극단주의자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의 책이 96년도에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현재 2003년의 입장에서 봤을 때도 아직도 실현이 안된 여러 가지 점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2000년대가 되면 모든 것이 홍수처럼 밀려올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또 당장 취업을 눈 앞에 둔 졸업반 학생으로서 그가 위협하는 노동의 미래상이 어쩌면 있을지도, 아니 마치 가까운 미래에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가 제시하는 예시들은 흔히 신문에서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리프킨은 이런 부정적인, 종말이 보이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대안으로써 '노동시간 단축'과 '제 3부문의 확대'를 제시한다. 노동시간 단축은 우리 나라에서도 적극적으로 검토되는 것으로 어느 정도 타당성이 높다고 생각한다.오늘날 근로자들은 과거와는 달리 적당히 일하고 레저를 즐기기를 원한다. 과거의 아버지상이 밤 늦게 까지 일하고 돈 많이 벌어오는 것이었음에 비해 오늘날의 아버지상은 자녀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함께 있어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겠다.또 다른 해결책으로 제시된 제 3부문의 확대는 너무 이상적인 감이 없지않나 싶다.우선 리프킨은 기술이라는 무감정적인 요소를 극단적으로 들어 무감정을 인간의 이성, 감성에 호소하여 자원봉사주의의 활성화를 강조한다. 결국 지구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기술, 기계에 의해서가 아닌 우리 인간에 의한 것이기에 자발적인 우리의 역할에 비중을 둔 것 같다.이 대안을 우리 나라에 적용시켜 봤을 때, 예를 들어 한국의 자선단체 모금비율이 타 나라에 비해 상당히 저조한 편이다. 재벌들은 온갖 수단으로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한다. 하지만 미국 같은 서구의 선진국들에서는 기업가들이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유교적 문화권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아 가족에 대한 愛가 높은 가족주의가 발달하는데 그 결과 가족이외에는 타인을 믿지 못하는, 이런 가족주의는 우리 나라 재벌들이 가족중심으로, 혈연중심으로 운영되어 온 것과 관련 있을 것이다. 이기주의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 더 많은 고용을 창출하기 위해 노동 시간을 줄이고 그것으로 인한 여가 시간을 자신들의 공동체에 쓰도록 한다는 게 얼마나 작용할 수 있을까. 여기서 한가지 짚어봐야 할 것은 노동시장에서 요구하는 노동의 질을 갖추지 못한 채 장기실업자로 전락하는 이들은 소수의 상위계층이 아니라 다수의 하위계층이라는 것이다. 그럼으로 인해 사회는 점점 양극화되어 갈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적응할 수 있는 소수만이 기술의 발전이 가져올 생산성 향상의 혜택을 누리게 될 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회과학| 2003.04.23| 5페이지| 1,000원| 조회(824)
    미리보기
  • [동양] 장안의 제의
    THE RITUAL CENTERS∞ 머리말수(隋)·당(唐)대의 장안(長安-지금의 서안)은 황실의 정기적, 비정기적인 다양한 종교적 제의(祭儀)들이 거행되던 곳이었다. 이에 발맞추어 도성 내, 외곽에 각종 제사를 위한 건축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중앙에 태묘(太廟-The Ancestral Temple)와 사직(社稷-The Altars of State)을 중심으로 하여 도성 곳곳에 세워져 있었는데, 이러한 것들은 전근대 중국 도읍지에서 나타나는 가장 근본적인 부분이었다. 특히 태묘와 사직은 유교(儒敎)에서 규정한 카오공지(Kaogongji)의 원칙 아래 축조되었고 수도를 여타의 다른 도시들과 구별해주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본고에서는 수·당대 제국의 도읍으로서 그 기능을 다한 장안성 내, 외에 축조되어 있던 여러 제의용 건축물들과 여기에서 이루어졌던 의식들의 종류에 대해 열거하고 이러한 건축물들과 제의행위들을 통해 수·당 제국의 황실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본론도시내 종교적 제의의 중추1 태묘(太廟-Ancestral Temple)태묘의 설치는 새로운 수도나 제국을 창업할 때 가장 우선이 되는 것이었다. 태묘는 영구히 봉향(奉享)되고 지속적으로 의식적 행위들이 거행되었다. 전근대 중국의 유학자들은 조상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시작을 기억하기 위한 장소로서 태묘의 설치를 정당화하였다. 이곳에서 벌어진 수·당의 제의는 1년에 네 번, 각 계절의 첫 달에 거행되었다. 제의의 목적은 황제의 조상들의 영을 달래고, 그들의 보호를 구하기 위해 거행되었다. 이 제의의 내용에 대한 것은 각 지배자마다 차이가 있었고, 이 시대에 하나의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이 논쟁의 중심에는 정현(鄭玄)과 왕숙(王肅) 두 사람의 300년 간의 이론적 쟁투(爭鬪)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 정현 이론의 요지는 씨족의 조상, 즉 황실 가문의 조상을 최우선시하고 영구히 봉향케 하는 것이었던 반면, 왕숙의 이론은 그것보다는 제국의 창업자가 최우선이고 그 다음은 것 등을 말하는 것이다.2 사직(社稷-The Altars of State)수나라때 중요 의식으로서 선조들을 숭배하고, 신에게 토지와 곡식을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알려진 사직에 대한 숭배는 관습적으로 특별한 숭배의식을 위해 행해진 것이고, 사직은 그들의 의식을 위해 세워진 것이다. 전통적으로 사직의식은 중간 의식으로 분류되었다. 사직은 환구( 丘-Round Mound)와 스쿼어 마운드 혹은 태묘에서 열리는 의례보다도 덜 중요하게 생각되어진 것이다. 이곳에서 거행된 의식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Lei Ceremony(軍禮)사직은 또한 군례(軍禮) 의식을 위한 중요 집회지로서 쓰여졌는데, 이것은 특별한 경우를 위한 의식이었고 주기적으로 행하여졌다. 당나라 때에 군례는 흔히 중요한 원정 전에 행하여지는 군사의식으로 고제의와 이런 점에서 비슷하지만 주요 다른 점은 조상의 신보다 하늘의 신이 숭배되는 의식이었는 것이다.3 태극회당(The Taiji Basilica)태극회당은 도시 중심부에 비종교적인 용도로 계획되었지만, 회당은 황제가 중요 의식을 위해 금욕을 준비하는 곳으로, 지상에 세워진 거룩한 왕의 신전이었던 것이다.계승의식왕의 정기적인 통과의례인 계승의식은 수도와 나라전체를 위해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사건이었다. 이런 의식은 천자로써 거룩한 신들 사이에서 그의 상징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런 계승의식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하나의 왕족으로부터 다른 왕조로의 권력이동이고, 두 번째는 양위나 혹은 죽음을 통해서 전대 왕조가 시작된 후에도 똑같은 통치권 안에서의 권력이동이다. 즉, 새로운 왕조를 설립하는 것이나, 새로운 통치권의 시작을 만드는 의식인 것으로 흔히, 계승의식은 진정한 계승과 하늘과의 상호소통인 것이다.황제의 성년식황제가 공식적으로 성년기에 들어갈 때, 선조의 정신과 하늘로부터 승인과 축복을 예언해주는 것이었다. 이 의식의 주요한 정치적인 의미는 황제에게 나라에 대한 큰 책임감을 주는 것이다. 당나라 때에 이 의식은 환구( 丘-Round Mound)위신을 떨치는 의식이었다. 왕비는 정당한 원칙의 배우자라는 점에서 다른 배우자들과 달랐다. 그녀의 책봉 의식은 나라의식의 보통 과정을 따랐다. 중요한 의식은 태극회당에서 거행되었다.왕자의 책봉왕비의 책봉과 마찬가지로 왕자의 책봉은 환구( 丘-Round Mound), 북쪽 교외의 스퀘어 마운드 그리고 태묘를 포함하는 다른 모든 장소에서 동시에 거행되었다. 그러나 의식의 중요한 장소는 태극회당이었다. 태극회당에서 일어나는 왕자의 책봉과 동궁에서 일어나는 유사한 의식행위의 차이는 황제의 모든 참여와 참석 여부에 있었다. 왕자는 태극회당이나 동궁에서 책봉되어질 수 있었다.4 동궁도성에 위치한 동궁은 왕자가 기거하는 곳에 해당한다. 왕자 책봉이 있은 후 왕자는 동궁에 자리잡고, 미래의 천자(天子)로서 수신하게 된다. 왕자로 책봉되지 못한 이들은 물러나게 된다.5 교육의 후원을 위한 사원주(周)왕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의식인 신디안(sindian: )은 학교의 개교를 축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수대에 이러한 의식은 교육기관에서 열렸고, 당대에는 국립대학에 두 개의 사원을 만들어 행하였는데, 주(周)왕조의 공작들을 위한 것과 공자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6 현명한 왕을 위한 사원적어도 한나라 이전에 행하여진 사직의식의 목적은 나라를 안정시키고, 질병을 피하게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을 수나라에서는 전설적인 왕의 명예를 위해서 행하여졌다. 그러나 일찍이 당나라는 그런 의식들은 공식화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747년 황제의 칙령은 3명의 군주와 6명의 황제인 현명한 전설의 왕을 위해 2개의 사원을 짓도록 하였다. 해마다 장안에서는 더 일찍이 있던 전설의 군주를 숭배하기 위해 다른 사원도 세웠다.7 타이큉 궁 (The Taiqing palace)타이큉 궁은 Li왕조의 선조로 주장되어지는 다오니즘(Daoism :노자철학)의 전설적인 창시자인 라오지(Laogi : 노자)의 숭배를 촉진하기 위한 당나라의 관심 속에 있었다. 741년 제국의 칙령은 라오지 사원을 두 개의 수도인를 얻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원형의 언덕( 丘)이라는 신성한 제단은 왕숙의 이론에 따라 가장 높은 군주에게 바쳐졌고, 이전보다 더 웅장하게 개축되었다. 각 사료들과 고고학적인 발굴의 결과 그 규모가 밝혀지고 수와 당이 하나의 환구를 제의에 이용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것은 주로 가끔씩 이지만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의식이 열리는 장소로써 기능되었는데, 환구에서의 의식은 다른 기타 의식들의 모델이 되었다.郊天郊天은 동짓날에 거행되는데, 가장 높은 수준의 중요한 의식이었다. 北周왕조이래로 하늘을 향한 이 기도는 매년 행해졌는데, 隋 文帝 이래로 그것은 2년마다 행해졌다. 文帝는 국가를 대표하여 위하여 스스로 의식을 이끌었다. 唐代에 그 의식은 해마다 기본적으로 열렸다.明堂黃帝는 明堂이라고 불리는 신성한 건물에서 수행되는 의식의 관습에서 시작되었다고 믿어진다. 西周, 漢, 그리고 秦왕조, 그리고 각각의 여섯 왕조들은 그들만의 明堂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明堂은 隋이래로는 건설된 것이 없고, 단지 唐代에 건설된 明堂이 동쪽의 수도인 洛陽(Luoyang)에 위치해 있다. 중요한 明堂의례는 季秋大享인데, 이를 비롯하여 계절마다 행해지는 중요한 기도는 국왕 자신에 의해서 행해졌다.비에 대한 기원(기우제)雩로 알려진 비를 만드는 의식은 수도지역에서 중요한 의식장소에서 행해졌다. 漢 이후에 학자 정현은 雩는 하늘에 대한 다른 이름이기에, 그래서 雩의식은 丘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唐의 관리인 王中秋는 비를 기원하는 활동은 오황제에게 간청하는 것이 오랬 동안 통례라고 하여, 양쪽 다 계속 인정되어 졌다. 文帝기간에는 成文律로 정하여 따랐다. 조금이나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하늘이 불만을 나타내는 표시로 생각되어 졌고, 어떠한 즉각적인 조취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평판이 나있는 비 만드는 사람들은 비를 일으키고자 하는 희망에서 의식을 하기 위해 북쪽 근교 제단으로 호출되었다.2 중요신들에 대한 의식중심지丘와는 별개로 근교 종교 예식의 중심이 있다. 그것은 것의 의식적 지위에서 군주의 위신이 일치되는지에 관해서 성문화하였다. 이 의식은 매 계절 첫 달에 열렸다. 宣宗의 죽음 이후에 Nine Palace 의식은 중간 수준으로 떨어졌다.雩壇雩壇은 隋왕조 기간에 啓夏門(도시 남문 동쪽 끝) 남쪽 13里에 세워졌다. 그것은 오로지 비에 대한 의식을 위한 것이었는데, 용의 환영이 보여진 이후 첫 여름의 달에 행해졌다. 그 경배의 대상은 중요한 지시를 하는 다섯 신이다. 雩의식은 또한 수도 지역에서 여름 가뭄이 일어날 때에도 행해진다. 唐代에, 雩는 매년 군주에게 丘에서 첫 여름 달에 처음으로 제공되어 졌다. 외관상으로는 隋의 雩제단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方丘壇도시의 북쪽 40里 정도에 위치하고 있는 方丘壇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지신(Earth god), 신성한 땅, 몇몇의 덜 중요한 신들 - 이를테면 산, 숲, 바다를 관리하는 신들 - 에게 사직의식에 대한 제단으로써 제공된다. 지신에 대한 의식은 하짓날에 행해진다. 方丘壇과 비슷한 종교예식 규칙이 행해지는 方澤은 아마도 方丘壇 근처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 周武則天은 695년에 그것들로서 지신과 군주를 결합하였고, 742년에 宣宗이래로 제도화 되었다.籍田隋代에 籍田에서의 경작의례는 도시 남쪽 근교의 啓夏門의 남쪽 40里에서 실행되었다. 唐代에 전통과는 반대로, 太宗은 동쪽 근교에서 의식들을 행하였는데, 그것은 봄의 번영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周武則天이래로, 이 의식을 위한 제단이 先農壇으로 처음 이름지어 졌고, 나중에 그것은 帝社壇(토지신에 대한 황제의 제단)으로 개명되었다. 宣宗은 제단 지역이 너무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春明門 밖으로부터 長江의 동쪽까지 넓혔다. 농업과 관련하여 열리는 의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인 이 의식은, 唐경제에 대한 농민의 본질을 강조하고, 농업을 격려·권장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황제에 의해서 행해 졌는데, 황제는 개인적으로 그 땅의 일부분을 경작하였다.최초의 양잠 제단籍田 의식의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써,다.
    인문/어학| 2001.12.01| 8페이지| 1,000원| 조회(510)
    미리보기
  • [동양고중세사] 중국 대동사상에 대한 고찰 평가A+최고예요
    1. 들어가며E.H.Carr에 의하면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과거의 사실이라고 해서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현재를 알며, 또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게 하는 거울이 되어주는 것이다.중국의 춘추시대에 이르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사상가들의 이론이 많이 제시되게 된다. 보다 나은 세상을 추구하려 했던 이들의 이상향, 즉 대동사회와 이런 대동사회에서 공·평·균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를 알아보려고 한다. 더불어 점차 공산주의에서 반자본주의로 전락한 중국을 이해하고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대동사회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려고 한다.2. 대동사상이란?중국인들은 유토피아, 또는 이상사회를 대동사회로 부르고 있다. 여기서 대동은 '大道가 구현된 이상적인 사회'를 일컫는다.예기의 예운편에서 보이는 대동 사회의 성격) 중국의 유토피아 사상, 진정염, 지식산업사, 1999, p122은 다음과 같다.첫째, 대동사회의 궁극적인 원칙은 '天下爲公'이다.이 원칙을 보면 사유제에 기초한 天下爲家와 대립된 것으로써 사회현상의 대립을 공유제와 사유제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에서부터 오는 차이이다. 물론 公과 私를 구분하는 것이야말로 부정부패를 없앨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뿌리인 것에는 틀림이 없다.둘째, 재산의 공유는 대동사회의 경제적 기초이다.마치 계급이 분화되기 이전의 고대 공동체사회를 시사하는 것 같다. 아마도 이 원칙이 중국이 공산화되는 데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셋째, 각자 진력하여 사회를 위하여 노동한다.인간은 동물이지만 짐승과는 확연히 구분된 존재로 인식하였음을 시사한다.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사회를 이루며 노동을 통해 물자를 생산한다. 이 당시에 있어 노동이라는 것은 토지에 대한 노동일 것이다. 그런데 토지가 없다면 경작, 수확도 없을 것이다. 노동을 위해선 '토지'라는 것이 주어져야 한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넷째, 성별·연령과 사회의 수요에 따라 분업을 한다.원시시대부터 남자는 사냥을 해왔고 여자는 채집이나 음식을 만드는 일을 해왔다. 이는 자연스러운 분업을 의미한다.다섯째, 현자를 지도자로 뽑고 능력있는 자에게 관직을 수여한다.이는 능력위주의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혈연에 의한 되물림이 아니라 조선시대로 말하자면 과거를 통해 보다 능력있는 자를 뽑아 나라를 책임성있게 운영하려 했음을 뜻한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현자란 私중심이 아닌 公을 위하는 사람을 뜻할 것이다.여섯째, 사유관념이 없으며, 진정한 博愛가 인간의 사상을 지배한다.사해 동포주의라고도 일컬어지는 박애는 우선 인류는 모두 평등하다라는 전제에서 시작될 것이다.일곱째, 전제 사회성원이 단결하고 사랑하며, 성실하고 속이는 일이 없이 각자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며 아름답고 행복이 충만한 생활을 한다.이는 씨족사회처럼 작은 마을집단에서 보여질 수 있는 모습이다. 조그만 공동체로 이루어질 수 있을 때에 사람과 사람사이에 대화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여덟째, 도적과 전쟁이 없어 전사회가 모두 태평한 생활을 한다.하나를 취함으로써 둘이 되고픈 욕망이 아니라 하나를 취함으로써 반을 나눠줄 수 있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것은 영토확장에 대한 욕구, 지배욕구의 결과이기 때문이다.이런 원칙에 의거하여 살펴본 결과 대동사회라는 것은 상당히 공동체적이고 공산주의적인(공유제인정, 사유부정) 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디,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실패에 대한 해결책으로 빈부가 존재하지 않으며 재산에 대해 걱정함이 없고 지상작원과 같은 사회를 꿈꾸었기 때문이다.3. 현인이 말하는 이상향 사회란?①공자가 살았었던 춘추시대는 大동란의 시대였고 사회경제상황은 대단히 복잡하였다. 제후들끼리는 서로 패권을 다투었고 그 쟁패결과로 民들은 오고갈데없는 난민이 되기도 하였다. 왕권이 미약하다보니 公田보다는 私田이 대거 출현하게 되면서 사회의 빈부분화를 가속시켰음을 추측할 수 있다. 부정부패로 인해 토지를 잃는 농민들이 증가하며 점차 빈농이나 유랑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공자는 均을 바로 이루어야 民들이 살수 있다고 생각했다. 民들이 살아야 國이 和해질수 있다고 생각하며 나아가선 서로 안정해질 수 있다고 하였다.②묵자가 말하는 전형적인 개체 소생산자) 중국의 유토피아 사상, 진정염, 지식산업사, 1999, p66이란 사유와 직접노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사유를 인정하다보니 公적인 것이 빠진 면이 없지않아 있다. 私를 강조하다보면 빈부차이가 확대되며 이는 곧 투쟁, 다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공산주의에서 公을 너무 강조하고 私를 배제하다보니 참여동기가 형성되지 않아 국가가 패망하기에 이르고, 또 너무 私를 강조하는 자본주의에서는 빈부차이로 인한 사회악화를 경험하기도 한다.③노자가 말하는 小國寡民은 말 그대로 지상낙원인 듯 싶다. 그러면서 노자는 無爲를 주장하는데 사람의 원초적 욕망을 없앤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불가능해 보인다. 또한 노자는 문명이란 것을 사회악으로 여겨 발전이 없는, 정체된 사회를 원한 것 같다. 마치 소국과민은 문물교류가 없던 그저 자급적 생산방법에만 의존했던 시대에 걸맞는 것일 것이다. 지금의 중국은 공산주의체제에서 '경제특구'라는 명목으로 외국의 자본을 끌어들이며, WTO에도 가입하는 등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적극적으로 세계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중국에 모든 자원이 갖추어져 있었다면 세계와 교류할 필요가 없는 소국과민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중국은 가지질 못하였다.④맹자가 말하는 왕도정치와 더불어 기본적으로 중국의 이상사회가 토지의 균등분배와 소농민의 안정을 기축으로 설계된 것은 극히 당연하다. 현실사회의 모순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었다. 맹자는 公을 앞세우고 私를 뒤로 하기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는 平의 입장에서는 계급제를 인정하였다. 계급제를 인정하면서도 與民同之(민과 함께 한다)를 내세움으로써 '爲'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였다.4. 공·평·균이라는 것은?앞에서 여러 사상가들의 이상향국가에 대해 간단히 언급해보았다. 이들 사상가들은 보통 사보다는 公을 중시여겼고, 차별적인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즉, 평등한 관계를 중시여겼으며, 토지분배와 생산물을 나누는 균등함을 강조하였다. 이에 더불어 서로가 조화를 이루는 '和'도 중시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인문/어학| 2001.11.19| 3페이지| 1,000원| 조회(672)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1
1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1
  • A좋아요
    0
  • B괜찮아요
    0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23일 목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2:43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